Chapter 279 - 네가 여기서 왜 나와? (1)
카르네아로 돌아와서 삼 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서운해하는 양호 마망을 젖소 비키니를 입힌 채 착유 플레이로 달래주고, 근황 보고 겸 피임약을 사러 잠깐 가게에 들려 트리스티아랑 뒹굴었고, 여신교와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돌아와 더 이상 릴리 화이트플랑이 아닌 릴리스로서 카르네아를 다니겠다는 릴리스에게 열심히 쥐어짜이고, 회의하는 동안 멜피사에게 책상 아래에서 몰래 빨게 시키고, 온몸에 잔뜩 야릇한 낙서를 한 마르잔과 밤 산책하러 나가는 것 같은 일 말이다.
'... 음?'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굉장히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다 섹스 뿐이지 않은가.
"...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내었다.
꼭 섹스에 관련한 일만 한 건 아니다.
유일하게 1회차의 기억을 공유하는 루시아와 다가올 재앙에 대처법을 짜기도 했으니까.
'...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2학년 2학기가 시작됐다는 거지.'
이름만 들어도 두근거리는 새 학기다.
평소보다 유난히 가슴이 뛰는 건 단순히 개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카조교사'에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학기라서 그럴 것이다.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니 새삼스럽게 제국의 내전을 막았다는 사실이 뿌듯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잠시 만족감에 젖어 카르네아를 둘러보고 있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저기 유진 칼리오페다..."
"쉿! 닥치고 눈깔아. 들으면 어쩌려고... 가문 날아가고 싶냐?"
"설마... 내가 욕을 한 것도 아니.... 히이익! 아... 안녕하십니까!"
그냥 눈길 한 번 줬을 뿐인데 떠들어대던 무리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하더니 재빨리 도망친다.
"...."
원래도 친구는 별로 없었지만, 이제는 아예 사귀기 그른 거 같다.
반경 20M 이내에는 사람이 다가오지도 않고 슬쩍 바라만 봐도 바퀴벌레처럼 사샤샥 흩어진다.
'... 내가 무슨 폭군도 아니고.'
눈 좀 마주쳤다고 쳤다고 가문을 통째로 날려버릴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진짜 괴로운 건 저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세간에서 보기에는 나는 황제 즉위식에 당당히 반기를 들어버린 미친놈이자,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제국의 실세일 테니까.
"내 업보지..."
터벅─ 터벅─
속으로 한숨을 쉬며 걸어가고 있자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를 가렸다.
과연 누가 앞을 막았을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로레오스 교수님."
오랜만에 보는 로레오스의 얼굴에 반가움이 솟아난다.
'어째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아.'
볼 때마다 근육이 늘어나는 모습이 이제는 진심으로 마법이 아니라 주먹으로 싸워도 될 것 같다.
그러자 로레오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법 대단한 일을 저질렀더구나."
"... 들으셨습니까."
하긴, 그렇게 큰 소동을 벌였는데 모를 거로 생각하는 게 더 웃긴 일이긴 하다.
아마 제국에 황제의 이름은 몰라도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더군..."
거기까지 말한 로레오스가 팔짱을 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묻는 듯한 그의 눈빛에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 힘이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만으로는 부족했단 말이냐."
힘을 숨긴 적은 없으니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보다 내가 많은 힘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다.
온 제국에 나와 내 파벌의 이름을 알려야지 재앙이 터졌을 때 혼선 없이 우리가 지휘권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더 많은 힘이 필요했습니다."
"... 알겠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하다는 듯 로레오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파벌의 문장을 건네주며 물었다.
".... 혹시 괜찮으시다면 로레오스 교수님도 제 파벌에..."
"필요 없다."
억만금을 주고도 파벌에 넣어달라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는 로레오스.
'... 그렇다고 회유가 통할 사람도 아니고.'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며 내가 문장을 다시 집어넣자 로레오스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파벌에는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 내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감사합니다."
로레오스가 보여주는 깊은 신뢰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 그렇다고 학생으로서 특별 취급은 바라지 말 거라. 어디까지나 공평하게 대할 것이니."
로레오스는 권력을 탐하지도 않지만, 권력에도 굽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황제가 왔더라도 똑같은 말을 했겠지.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쓴웃음 지으며 대답하자 로레오스가 작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맞습니닷..!... 특별취급은 바라지 말라는겁니닷...!"
그때, 발밑에서 혀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 에이미 교수님? 언제부터 계셨나요?"
"아앗!!.. 그게 무슨 소리 입니깟!! 처음부터 계속 있었다는 겁니닷...!"
로레오스와의 체격 차이가 너무 커서 그런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 그건 그렇고.'
에이미 교수는 나와 별다른 관계가 없을 텐데 왜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에이미 교수님 제게 할 말이라도..."
"할 말은...!!...... 없습니닷...!!"
"...."
어이가 없다.
할 말도 없는데 왜 기다린 건지 진짜 모르겠다.
".. 할 말은 없지만...!!... 앗...! 여기에 먼지가 묻은 겁니닷...!"
그러자 갑작스럽게 까치발을 들며 내 가슴을 툭툭 터는 에이미 교수.
먼지가 묻었다고 했지만, 이 제복은 먼지는 물론 주름도 하나 생기지 않는 특제품이다.
"아...! 생각해 보니 주머니에 먹다 남은 초콜릿이 있는 겁니닷...!! 유진군이 먹고 싶다면 절반 정도는 줄 수 있는 겁니닷...!!"
뭔가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는 에이미 교수의 태도에 불현듯 무언가 머리를 스쳤다.
"... 교수님 혹시나 해서 묻는데..."
"아... 아앗..! 아닌 겁니닷..!! 유진군에게 잘 보이면 파벌의 한 자리 정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습니닷....!!"
말도 제대로 꺼내지 않았는데, 에이미 교수가 알아서 술술 불어댄다.
"그럼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만약 한 자리 받으면 뭘 할겁니까?"
"후후훗... 유진군과 친분을 핑계로 뇌물을 잔뜩 받는 것입니닷...!!"
이거 보기보다 속물이었다.
"부자가 되면 키크고 쭉쭉빵빵한 몸매가 되는 약을 개발 시키는 겁니닷...!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나보고 초등학생이냐고 묻는....."
"...."
자신의 원대한 꿈을 토해내는 에이미 교수를 뒤로하고 나는 강의실로 걸어갔다.
***
드르륵─
"....."
강의실 문을 열자 쏟아지는 지나치게 쏟아지는 시선들.
그것도 내가 저지른 사건 때문이 아닌 수컷의 질투가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하지만 미리 기다리던 여성진들이 그쪽을 쳐다보는 순간 꼬리를 말고 눈을 깔았다.
'... 미안하다.'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어그로 끈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다들 왜 여기 있는 거예요?"
"흐음~ 나는 원래 유진이 옆자리였는데? ♬"
"저도 주인... 유진의 옆자리였습니다."
"저... 저는... 앞 자리에요."
그래, 루시아 리아나, 비비안은 이해한다.
같은 학년에 같은 반이니까.
하지만...
".... 비앙카는 왜 여기 있어요?"
"왜 뭐,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너무나 당당하게 반문하는 비앙카 때문에 내가 잘못 한 줄 알았다.
"... 제가 알기로는 비앙카는 저보다 한 학년 위 아니에요?"
"씨이... 그냥 너 보고 싶어서 왔다 왜!! 네가 이제 안 숨겨도 된다면서! 그리고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쟤네는 뭔데!"
비앙카가 대각선 앞자리에 앉은 릴리스와 마르잔을 가르치며 말했다.
"전! 릴리스에요!"
"누가 이름 물어봤냐! 너네는 왜 여기 있는지 물어보는 거잖아!!"
"저... 저는 루시아님의 호위로..."
"릴리스는 그냥 선생님 옆에 있고 싶어서 왔어요!"
아무리 학기 첫날이라 강의는 없을 거라지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 아니, 조용히 있자 그냥.'
내가 말한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교수님이 들어오면 상황을 정리해줄 테니 그냥 견디자라는 결심과 함께.
드르륵─
강의실 앞문이 열리고...
"아... 안녕하세요."
하얀 가운을 입은 핑크빛 머리의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 아이리스는 왜 여기에?"
"그..."
얼굴을 붉힌 아이리스가 몸을 꼬면서 말했다.
"... 유진군이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고 해서... 와버렸어요. 헤헷..."
빠드득─
아이리스가 귀엽게 혀를 내밀며 말하는 순간, 교실에서 앞쪽에서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가득 울려 퍼진다.
"... 서... 설마... 양호 선생님 마저..."
원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마망단이었나보다.
빠득─ 빠드드득─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다가는 반 남자들 대부분이 틀니를 사용하게 될 것 같았다.
"그... 다들 원래 자리로 돌아가 주실래요."
"흐음... 왜? 이제 우리 사이를 숨길 필요 없다면서♪"
내가 숨길 필요는 없다고 했지 이렇게 대놓고 과시하라는 소리도 아니었다.
"... 숨길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람이 불편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불편하다고? 그럼 물어볼게!"
자리에서 일어난 리아나가 강의실이 가득 울리도록 소리쳤다.
"나랑 유진이가 애정행각을 벌이는데 불편한 사람은 손~!"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묻는데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응! 아무도 없네! 그럼 좀 더 붙어도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끼며 찰싹 달라붙는 리아나.
리아나가 달라붙자 다른 여성진도 쪼르륵 달려와 붙는다.
'... 돌겠네. 진짜.'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원망의 시선과,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에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
... 같은 시간.
"후후훗... 마침내 도착했사와요."
밤하늘은 녹여 만든 듯한 검은 머리카락과 동양풍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복장의 여인이 카르네아의 정문을 올려다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