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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71화 (271/354)

Chapter 271 - 이제부터는 내가 규칙이니까 (8)

'공자님...'

황제와 당당히 맞서는 유진을 바라보며, 멜피사는 그 날 이 방안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파볼리에의 여식이여. 지금 너는 누구를 섬기고 있지?"

"... 유진 칼리오페입니다."

"그렇다면 유진을 위해서라면 무엇까지 할 수 있느냐?"

".... 제 심장까지도 바치겠습니다."

이 말은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여전히 죽는 것은 두렵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온다.

허나, 공자님께 필요하다면 직접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낼 수도 있다.

그만큼 유진 칼리오페라는 존재는 멜피사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턱을 매만지며 천천히 다가온 라인그람이 멜피사의 귀에 속삭였다.

"유진 칼리오페를 위해 레오폴드 루멘하르크를 죽일 수 있겠느냐?"

".... 전... 하...?... 지금 뭐라고?"

"레오폴드 루멘하르크를 죽일 수 있냐고 물었다."

레오폴드 루멘하르크

제국의 황제이자 라인그람의 아버지였다.

"... 어... 어째서... 그런 제안을..."

멜피사의 목소리와 동공이 떨렸다.

황제가 암살 위협을 받는 것이야 당연하다지만, 레오폴드는 황제이기 전에 라인그람의 아버지이지 않은가.

하지만 라인그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칼리오페는 제국의 방패, 우르엘라는 제국의 지팡이, 아멜리아는 제국의 창... 하지만 파볼리에는 제국의 비수가 아닌 황가의 비수라 불렸지. 그 이유를 아나?"

거기까지 말한 라인그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멜피사를 바라보았다.

"황가가 아니면 파볼리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지도, 인구도, 자원도, 무엇하나 가지지 못한 파볼리에가 대가문이 될 수 있던 건 전부 황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

"결국, 파볼리에란 황가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란 말이다."

멜피사가 시선을 피하자 라인그람은 손가락으로 턱을 붙잡아 강제로 눈을 마주치게 했다.

"그리고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라인그람의 말대로였다.

처음부터 파볼리에는 황가를 위해서 만들어진 가문.

그 증거로 과거 멜피사가 받았던 교육에는 황실의 핏줄에 복종하는 것도 포함되어있었다.

"... 그리고 네 아비에게는 받아야 할 빚이 있다."

"빚... 말입니까."

"그래, 네 아비 파볼리에 메츠가 직계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냐?"

"....!"

묻어두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숨을 쉬기가 괴롭다.

지독한 피비린내와 찢어는 듯한 비명, 내 가슴을 관통한 아버지의 칼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키아라님...

그 모든 것들이 조금도 잊히지 않은 채 생생히 떠오른다.

"그리 놀라지 마라, 짐은 파볼리에 내부의 일 따위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하지만 네 아비가 어중간하게 반란을 일으킨 탓에 직계와 방계가 공멸했고, 덕분에 황가는 소중한 비수를 잃었지."

"그걸... 어떻게... 저... 전하께서..."

"어리석은 질문이군. 하나의 대가문이 멸문한 것치고는 너무나 조용하게 넘어간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생각은 했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이었고, 리아나님이 알아서 처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가문의 멸문의 진상이 내전이라는 것을 알려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 묻어버린 게 바로 짐이다."

하지만 리아나님이 아니라 라인그람이 처리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헌데, 현장을 조사하다 보니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나오더군..."

두근─ 두근─

라인그람의 말에서 불길함을 느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대의 아비가 유진 칼리오페의 어미를 직접 찔러 죽였다지?"

유진과 리아나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 날의 진실이 황태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파볼리에 키아라는 꽤 사랑받은 인물이었다지... 키아라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녀를 살해한 자의 딸이 살아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상당히 기뻐하겠어."

"... 전... 하..."

"자, 그럼 다시 한번 물어보마. 할 수 있겠느냐?"

"... 저... 저는..."

"아직도 망설이는 것이냐? 설마 이제와서 자신의 손을 더럽혔기 싫다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라인그람 말에 멜피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깨끗한 손이었지만 멜피사 눈에는 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황태자의 말대로 이미 이 손은 한참 전부터 더럽혀져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키아라님은 칼에 찔리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아니었으면 아티펙트를 사용해 살아남았을 것이다

... 그러니 키라아님의 목숨은 내가 뺏은 것과 다름없다.

그때, 황태자의 달라진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협박을 던질 때와는 다르게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멜피사는 오히려 두렵게 느껴졌다.

"만일 내가 변덕을 부린다 할지라도 네 주인을 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황태자의 붉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깨닫고 말았다.

역시 이분에게도 리아나님과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을.

지금이야 채찍과 당근을 던지며 이성적으로 상대하지만 언제 변덕을 부려 모든 것을 뒤엎을지 모른다.

하지만....

황태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쪽에서도 황제 암살 사주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하나 쥐게 되는 것이다.

"....."

물론 약점을 사용하는 순간 라인그람을 끌어내릴 수는 있어도 나 역시 반드시 죽을 것이다.

황제의 암살자가 극형을 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건가.

설령 이 길의 끝에 지옥이 기다리고 한들, 그것이 공자님을 위해서라면...

"... 이 파볼리에 멜피사."

나는 지옥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다.

"....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

"어째서 선대 황제... 폐하의 아버지를 암살하셨습니까?"

"...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군. 다른 질문 할 것도 많을 텐데 말이야."

"전부 물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대답하시지요. 그렇게 황좌가 탐이 났습니까?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폐하의 것이 되었을 것을 왜 그리 서두르신 것입니까?"

이전의 사건으로 리아나는 황위 계승권을 잃었으니, 전대 황제가 죽는다면 자연스럽게 라인그람이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리아나가 계승권을 잃지 않았더라도 라인그람이 황제가 되는 것은 사실상 확정된 일이었다.

라인그람은 황좌에 오르지만 않았을 뿐 황제와 다름없이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 시간이 문제였네. 전대 황제... 그러니까 아버지는 의식을 되찾고 있었으니까."

"... 그래서 죽인 거였습니까. 황위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길어지니까?"

라인그람의 대답에 내가 이를 으득 갈았다.

고작 조금 황위에 빨리 오르고 싶다는 이유로 멜피사를 모욕하고,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냈는가.

"자네가 분노하는 것은 이해하네. 하지만 적어도 짐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죽인 것은 아닐세."

"그렇다면 저를 설득해보시지요,"

내가 으르렁거리자 라인그람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도 짐이 리아나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들었겠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겠군. 이유야 어쨌든 리아나가 제국에 반기를 든 것은 용서하기 어렵지만... 그 덕에 제국을 좀먹던 버러지들을 제거하며 동시에 분열하고 있던 제국은 하나로 뭉칠 수 있던 것도 사실이지."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

내가 진정으로 알고 싶은 건 그 뒤의 이야기다.

"짐의 아버지는 유약했다. 싸우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제국에는 적이 존재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내실을 다지는데만 온 힘을 쏟았지. 평화로운 세상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군이었겠지만... 지금 이 세상은 평화롭지 않네."

나는 전대 황제가 어떤 인간인지 모른다.

게임 속에서도 그의 죽음으로 라인그람이 황제에 오르는 이벤트가 나오는 정도밖에 언급이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세상이 평화롭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만일 전대 황제가 라인그람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인물이라면 다가올 재앙을 대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버지가 깨어나게 된다면? 지금까지 준비해온 모든 것이 백지가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 이빨 빠진 호랑이보다는 폐하의 힘이 더 강하지 않겠습니까. 굳이 암살이라는 수단을 써야만 했습니까?"

라인그람은 결코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다.

선대 황제가 병상에 있는 지난 수년간 깨어날 때를 대비해서 황실의 대부분을 라인그람의 세력으로 바꿔놓았을 것이다.

"... 그렇다고 한들 황제라는 이름은 무겁다네. 아무리 짐이 실권을 쥐고 있어도 아버지가 깨어났으면 제국은 분열할 수밖에 없다."

라인그람은 머리를 쓸어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이참에 말해두겠네. 짐은 단순한 자네와 칼리오페 가문에 대한 호의로 북부의 지원을 결정한 게 아니네. 북부와 같이 수도에서 먼 지역을 지원하는 것은 황가로서는 부담되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지원을 하신 겁니까?"

".... 지금까지 많은 전공을 세운 자네와 에르덴의 요청, 그리고 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들을 종합한 결과 북부를 지원하지 않으면 북부의 세력이 커지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 발생 할 것 같았기 때문이지."

"...."

"말이 길었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황실의 힘을 상당 부분 포기하면서까지 북부를 지원 할 정도로 제국이 위험한 상황에서 제국이 둘로 나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는게 암살의 이유라면 답이 되었는가?"

라인그람의 대답에 내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라인그람의 암살은 그 나름대로 제국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을 가지고 한 일이었다.

"... 하아. 그렇다면 제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그러게."

나는 황제의 붉은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어째서 멜피사여야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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