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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70화 (270/354)

Chapter 270 - 이제부터는 내가 규칙이니까 (7)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시선이 살짝 부담스럽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후로는 언제 어디서나 시선을 받을 예정이니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

수많은 시선 중에서 특히 강렬하게 느껴지는 쪽으로 슬쩍 눈을 돌리자.

'꿇어라... 꿇어라... 제발... 꿇어라... 제발...!!'

... 라는 속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이마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벨베르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 충분히 이해한다.

벨베르트도 내 파벌이 황실과 대적 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이라고 생각했겠지, 설마 진짜 대적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만일 내가 여기서 끝까지 무릎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건 황실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그렇게 되면 반란군의 수장인 나에게 허리를 숙인 벨베르트의 목은 무조건 날아가겠지.

고작해야 무릎 하나에 무슨 반란이나 싶을 수도 있지만...

본래 황가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증거로 언제나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시던 라인그람 폐하께서도 지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다.

'... 이 정도면 충분히 전해졌겠지.'

나는 눈을 감으며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언제 마물들의 대규모 침공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에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혼란을 더 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황제가 멜피사만 건드리지 않았다면 이런 귀찮은 짓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윽─

내 한쪽 무릎이 땅에 닿자, 라인그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하하하하하!! 이제 다들 그만 일어나서 잔을 들게나! 하하하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넘어가려는 듯한 황제의 태도.

나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일어서자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도 하나둘 무릎을 폈다.

"하하하하하!! 다들 짐의 연회에 참가해줘서 고맙군! 마음껏 즐기다 가게."

그렇게 귀족들의 축하와 인사를 받으며 연회를 즐기던 라인그람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연회장에서 사라졌다.

"... 유진 칼리오페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젊은 집사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잠시 대화 나누길 바라십니다."

"... 알겠네."

순간 루시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지만, 이렇게까지 힘을 보여줬는데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내게 손을 댈 리가 없다.

"루시아."

연회장을 떠나기 직전, 나는 루시아의 허리를 감싸고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다녀오마."

"... 조심하세요. 주인님."

이것으로 나와 루시아가 단순한 파벌원과 파벌장 이상의 관계라는 소문도 돌겠지만, 오히려 그걸 노리고 있었다.

"그럼, 가지."

"이쪽입니다."

뒤를 따라 한참 동안 긴 복도를 걷고 있으니 어느 순간 집사가 발을 멈추고 말했다.

"여기서부터 쭉 앞으로 걸어가시면 폐하의 침소가 나올 것입니다."

"같이 가지 않는 건가?"

".... 죄송합니다만 저는 가지 못합니다."

"폐하의 명인가?

"아닙니다. 그저 저로서는 저 복도를 지날 수 없습니다."

"... 알겠네. 그럼 가보게."

선문답 같은 집사의 대답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허나, 황제와의 대면을 앞두고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냥 보내주었다.

또각─ 또각─

집사의 의미심장한 말 때문에 뭔가를 준비해놨을 줄 알았던 복도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 괜한 걱정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순간.

"....!"

어째서 집사가 같이 갈 수 없다고 했는지 피부로 느껴졌다.

-쿠우우웅

마치 거대한 바위로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그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술을 잘근 씹으며 정면을 바라보자, 화려하게 장식된 문 옆에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 하."

남자의 모습을 잠시 관찰한 나는 옅은 탄식을 흘렸다.

놀랍게도 저 남자는 나를 압박하기 위해서 기운을 내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느껴지는 건 기운을 갈무리하고 남아 있는 찌꺼기에 가깝다.

'... 그런데도 저 정도라고? 도대체 저런 사람이 어디 숨어 있었는데?'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카조교사'에서 저런 남자가 등장했던 기억은 없다.

까먹었을 리는 없다.

특이한 외모도 그렇고 압도적인 실력도 그렇고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잊어버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 남자 또한 나비효과로 인해 나타난 것일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너무나 달라진 게 많아서 이제는 어디서부터가 나비효과고 나비효과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는 강하다는 것뿐.

하지만....

그래 봤자 인간이다.

괴물이었던 리아나의 위압감마저 견뎌낸 내가 지나가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신체강화」를 사용해 근력과 체력을 상승시키고 「염동력」으로 남자의 기운을 흘려보낸다.

이렇게 버프를 덕지덕지 발라도 문으로 다가갈수록 숨쉬기가 힘들어졌지만 견딜만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침내 내가 문 앞까지 도착하자, 남자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

감정이라고는 한 조각도 느껴지지 않는 남자의 잿빛 눈동자와 옷으로 감추고 있음에도 뚜렷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단련된 신체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곤충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

"...."

잠시 나를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눈을 감았다.

'... 후우.'

그때야 짧은 한숨을 내쉰 나는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리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 폐하, 유진 칼리오페입니다."

"들어오게."

라인그람의 허락이 떨어지자 내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나만 팔아도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한 보물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방.

그리고 방 한가운데 놓인 목제책상.

"짐의 방에 온 것을 환영하네. 유진 칼리오페."

리안그람 루멘하르크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남자의 위압감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이리 와서 앉게나."

"... 환영 인사가 제법 격하더군요. 폐하."

내가 턱짓으로 문밖에 있을 남자를 가리키자 리안그람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어쩔 수 없었네. 필요한 절차였으니까."

라인그람의 말에 내가 실소를 터트렸다.

단언컨대 남자의 실력이라면 기운의 찌꺼기조차 내보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감추지 않았던 건, 라인그람이 명령했기 때문이겠지.

"절차치고는 지나치게 까다롭군요. 웬만한 사람은 가까이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자네가 웬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 맞는 말이기는 했다.

문밖의 남자나 내 주변에 있는 여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강한 거지 내가 약한 게 아니다.

솔직히 지금의 내 수준이면 황실의 기사와 정면에서 싸워도 한두 명은 가볍게 쓰러트릴 테니까.

"맞는 말이긴 하군요."

내가 자리에 앉으며 대답하자, 라인그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감사 인사를 해두지."

"감사 말입니까?"

"그래, 연회장에서 자네가 물러 서준 것에 대해서."

그런 라인그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굳이 피를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자네가 연회장에서 벌인 행동과 이곳에 온 이유는.... 아마도 짐이 파볼리에의 여식에게 저지른 짓 때문이겠지."

"멜피사."

"... 뭐?"

"파볼리에의 여식이 아닌, 멜피사라고 부르십시오. 폐하."

감히 황제를 대한다기에는 건방진 말투였지만, 라인그람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네. 지금 멜피사 그 아이도 그림자 안에 있나?"

"그렇습니다."

"불러줄 수 있겠나? 당사자도 있는 게 대화하기 편하겠지."

"... 멜피사."

촤아악─

나의 부름과 동시에 그림자에서 솟아나는 멜피사.

"공자님..."

멜피사는 먼저 내게 고개를 숙이고는 라인그람에게 인사했다.

"파볼리에 멜피사가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볼 줄은 몰랐군."

어딘가 거슬리는 황제의 말에 내가 한마디 하려던 찰나.

".... 미안하네."

라인그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멜피사에게 허리를 숙였다.

"자네와 가문을 모욕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네. 부디 용서해주게."

사적인 자리이고 셋밖에는 없다고는 하나 황제가 허리를 숙인 것 자체가 충격이었기에 반응이 조금 늦었다.

긴 숨을 내뱉은 나는 라인그람에게 물었다.

"...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그 질문에 라인그람은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답했다.

"짐은 멍청이가 아닐세. 짐이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자네의 파벌과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면 싼 편이지."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지만 설명도 듣지 않고 사과를 받아서야 납득하기 어렵다.

"... 공자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멜피사가 받은 모욕이니 멜피사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뒷감당은 제가 하겠습니다."

지금이라면 멜피사가 황제의 뺨을 한 대 때리는 것 정도는 어떻게 커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멜피사가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 저는 공자님을 섬기는 몸입니다. 공자님께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을 택하시지요."

"괜찮습니다. 멜피사. 애초에 손익을 따질 거였으면 그런 짓을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 공자님이 저따위를 그렇게 아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

이 자리에서 더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멜피사의 조용히 손을 붙잡아주었다.

"허리를 드시죠. 폐하."

"... 용서해주는 건가?"

"아니요. 모든 것은 제 질문이 끝난 뒤에 결정하겠습니다."

"알겠네. 자네의 질문에 거짓 없이 대답하도록 하지."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폐하."

나는 라인그람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서 선대 황제... 폐하의 아버지를 암살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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