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8 -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5)
"... 본녀가 죽였으니 말이야."
베를리오즈가 불길한 말을 꺼낸 순간, 비앙카는 물고 있던 주먹밥을 내팽개치며 뒤로 물러났다.
"먹을 것을 땅에 버리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조금 전에 네 손으로 제자를 죽였다며!! 주먹밥도 독을 넣었을지 어떻게 알아! 우에웩!"
비앙카가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고 구역질하자 베를리오즈가 한심하다는 듯 눈을 훑기며 말했다.
"쯧쯧, 음식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보기 역하니 그만두거라. 본녀는 독살 같이 추잡한 짓을 하지 않는다."
"... 흐엑. 그럼 죽였다는 건 뭔데? 아, 혹시 내 손으로 직접 기른 제자를 죽이고 싶다는 그럼 뒤틀린 욕구가 있는 거야?"
"... 네 눈에는 본녀가 그런 정신병자로 보이느냐?
"응, 보이는데."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비앙카의 대답에 베를리오즈가 꿀밤을 때렸다.
"쯧쯧, 빌어먹은 꼬맹이 같으니. 스승에 대한 예의라고는 쥐뿔도 없구나!"
"아악! 나랑 별로 키 차이도 안 나면서 꼬맹이라고 부르지 좀 마! 그리고 그쪽이 나보고 유일한 제자라고 하자마자 제자를 죽였다는 말을 꺼냈는데 이게 내 잘못이야?!"
비앙카가 계속해서 그르렁거리자 베를리오즈가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얀 것. 안 죽일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애초에 본녀가 제자를 죽인 건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이 있었다."
베를리오즈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고 나서야 비앙카도 긴장을 풀고 다시 곁으로 다가왔다.
"...."
"뭘 그렇게 쳐다보느냐?"
"... 아니 ... 그 죽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뭔데?"
"캬캬캿! 이런 이야기는 자세히 캐묻지 않는 것이 예의가 아니더냐? 참으로 좋은 눈치를 가졌구나!"
허벅지를 때리며 광소를 터트리는 베를리오즈의 모습에 비앙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차피 나보고 예의 없다며!! 그리고 누가 꼭 듣고 싶댔나!!! 자기가 물어봐 줬으면 하는 얼굴로 기다려놓고!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뻘게진 얼굴로 소리친 비앙카는 아까 내던진 주먹밥을 다시 집어 들었다.
"에이, 다 묻었네."
흙이 묻은 부분을 대충 털어내고 주먹밥을 먹는 비앙카를 보며 베를리오즈가 피식 웃음 흘렸다.
"네가 살의로 견신(犬神)을 강신시킨 것처럼, 오래전 사랑으로 사신(蛇神)의 강신에 성공한 아이가 있었다."
"뭐야... 결국 말할 거면서."
"... 됐었다. 이제 아무 말도 말 안 하고 싶구나."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요! 조용히 들으면 되잖아!"
비앙카의 앙탈 섞인 말에 베를리오즈가 짧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쯧... 그 아이는 인간을 사랑하고 사랑하며 너무나도 사랑한 끝에 모든 인간이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랐지."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니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비앙카의 머릿속에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이번에도 말을 끊으면 진짜 끝이라는 생각에 근질거리는 입을 꾹 참아냈다.
"하지만 아무리 간절히 바라더라도 인간은 죽는 법이지."
"... 사람이 죽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러나 2번은 못 참았다.
비앙카도 말을 뱉고 나서 아차 싶어 입을 가렸지만, 베를리오즈는 그저 아련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하지만 아이는 그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는 결심했다. 여신이 인간에게 영원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손으로 인간을 영원하게 만들겠다고."
"...."
"그렇게 아이는 자신의 부모를 시작으로 사람들을 하나씩 박제하기 시작했다. ... 그리고 안타깝지만, 본녀가 그 아이의 이상성을 깨달았을 땐 이미 다섯 개의 마을이 통째로 박제된 뒤였다."
베를리오즈가 눈을 감자 박제된 마을 한가운데서 행복하게 웃던 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자 중 누구보다 상냥했고, 사랑이 많은 아이였지만 결국 죽일 수밖에 없던 그 아이.
'... 본녀가 조금만 빨리 눈치챘더라면.'
그 아이가 손에 피를 묻히기 전에 이상성을 알아챘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곱씹으며 베를리오즈가 실소를 내뱉었다.
"그러니 비앙카. 너도 조심해라."
"... 뭘 말이야."
"본녀가 너를 죽이지 않도록 말이다."
베를리오즈의 살벌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말에 비앙카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하! 그렇게 겁주지 않아도 위험하다는 건 알거든!"
그래, 알고 있었다.
강신법을 처음 전수 받을 때부터 위험하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요지는 안 잡아 먹히게 정신력으로 견디면 된다는 거잖아!"
하지만 위험한 게 어쨌다는 건가?
정말 죽을 만큼 인정하기는 싫지만....
유진의 곁에 있는 어느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나는 재능이 부족하다.
그것도 재능 때문에 유진에게 버려질지라도 불만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 하지만 그 멍청이는 끝까지 기다리겠지.'
그러나 비앙카 베아트리스가 알고 있는 유진 칼리오페라면...
자신이 아무리 늦게 쫓아와도 싫은 기색 하나 내지 않고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다.
그건 정말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행복해지는 일이지만.
'... 그래도 난 사양이야.'
비앙카는 유진의 배려를 받는 공주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전혀 받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런 건 침대 위에서면 충분했다.
싸울 때만큼은 유진의 뒤가 아닌 옆에서.
그에게 지켜지는 게 아닌, 그의 도움이 되고 싶다.
이 목표를 위해서라면....
비앙카는 얼마든지 위험한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결의에 찬 비앙카의 눈을 본 베를리오즈가 크게 웃었다.
"캬하핫! 좋은 얼굴이구나! 좋다! 본녀가 한 가지 좋은 걸 알려주마! 사랑과 뱀의 조합에 비해 살의와 개의 조합은 한참 안전한 편이니 그리 걱정하지 말아라!"
"... 왜?"
비앙카는 순수한 의문을 담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견신도 어쨌든 개니까 말이다! 설령 개라는 종족은 피 때문에 미쳐 날뛰어도 주인의 명령만큼은 기가 막히게 듣는 게 특징이거든. 캬하하핫!"
배를 잡고 웃어대는 베를리오즈의 모습에 비앙카가 이를 갈고는 소리쳤다.
"아이 씨...! 유진이가 내 주인이 아니라고! 됐어! 나 이제 갈 거야!"
"유진이한테 말이냐? 캬하하하하핫!"
"아아악! 그래! 유진이한테 간다! 그러니까 그만 웃어! 왜 자꾸 웃는데!"
"그럼, 그 거지꼴로 사내를 만나러 간다는데 어떻게 안 웃겠느냐?"
베를리오즈의 지적에 비앙카가 몸을 내려다보았다.
산에 오른 후 한 번도 씻지 못했던 몸은 마물들의 피와 살점으로 범벅되어 있었고, 옷은 죄다 찢어져서 옷으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
"과연 천년의 사랑이라도 한 번에 식을 모습이구나."
"그... 그래도 유진이는 나 안 싫어하거든."
"그러면 그대로 가보거라. 그 상태로 유진이 너를 안는다면 본녀도 인정해주마."
"...."
유진이를 믿는다.
정말 진심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유진이 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니, 피하지 않아도 냄새로 인상이라도 찡그려지면...
'... 나 죽을지도...'
비앙카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 잠깐 눈에 뭐 들어간 거 같아서 강에 좀 갔다가 갈래."
"하! 핑계도 더럽게 못 대는구나!"
휘익!
베를리오즈가 콧방귀를 끼며 던져 준 보따리에는 빗과 비누 그리고 새 옷이 들어있었다.
"... 빗도 쓸 줄 아네."
"본녀를 뭐라고 생각하는게냐? 본녀도 여인이다. 치렁치렁하게 치장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지만 그래도 네놈처럼 거지꼴을 하고 다니지 말아야지."
거지꼴이라는 말에 비앙카가 눈을 치켜뜨자 베를리오즈가 보따리에 손을 뻗었다.
"눈을 건방지게 뜨는 거 보니 이건 필요 없나 보구나."
"필요해!"
보따리를 들고 후다닥 도망치는 비앙카의 모습을 보며 베를리오즈가 크게 웃었다.
"재미있는 녀석을 제자로 받았구나. 캬캬캿!"
**
카르네아의 정문.
황실로 향하는 마차를 대기 시켜놓고 비앙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쏟아진다.
"...."
리아나, 멜피사, 비비안, 릴리스. 한 명만으로도 눈길을 사로잡을 미소녀가 넷이나 모여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저 머리색... 혹시 성녀님 아니야?"
"맞는거 같은데... 안 그래도 성녀님이 1학년 여학생으로 변장하고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입소문에 오르는 건, 머리카락 염색을 풀고 특유의 진한 분홍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릴리스였다.
"저 릴리스 기대돼요!"
카르네아의 폭동 이후로 릴리스의 정체는 아는 사람은 아는 비밀이 되었지만...
이렇게 성녀복까지 입고 대놓고 정체를 드러낸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 뭐, 소문퍼지라고 하는 거지만.'
이것도 다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다.
물론, 계획을 듣는다면 파르테논에서는 난리가 나겠지만...
'내 알바인가?'
지금 이 소문이 파르테논의 귓가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까지 갔을 테니, 계획만 안 들려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지루함에 약한 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지~루~해~. 유진아, 그냥 우리끼리 먼저 가면 안될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곧 올테니까."
그리고 말하기가 무섭게 멀리서 비앙카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왜 갑자기 따라오겠다는 건데! 따라와서 늦었잖아!"
"캬캬캿! 성녀가 왔다는데 얼굴은 한 번 봐야지 않겠느냐?"
"그러면 자기 다리로 걸으라고! 쪽팔리게 이게 뭐야!"
"싫다. 이것도 훈련이라고 생각해라."
"세상에 이딴 훈련이 어디 있어!"
비앙카의 등에 업혀서 티격태격하는 베를리오즈의 모습을 보자 헛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유진아!"
곧이어 비앙카도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 손을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스윽-
비앙카의 등에 매달려있던 베를리오즈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릴리스의 눈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흐엑! 뭐... 뭔가요! 누... 누구세요!!"
갑자기 튀어난 낯선 인물에 릴리스가 비명을 질렀지만.
베를리오즈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릴리스를 몸을 천천히 흝고는 말했다.
"... 거! 성녀치고는 더럽게 음란한 몸뚱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