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수면 아래에서 (3)
* * *
“어떠한가 로레오스! 본녀의 추리력도 제법 쓸만하지 않은고?”
베를리오즈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로레오스의 이마 위로 핏줄이 튀어나온다.
‘...진짜 놀고 있었을 줄이야.’
로레오스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난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베를리오즈의 앞이다.
베를리오즈에게 유진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로레오스는 화를 눌러 참으며 말했다.
“...아마 저를 보러 오는 중이었을 겁니다.”
“캬캬캿! 꼴에 교수라고 학생을 챙겨주는구나!”
“챙기는 게 아닙니다. 그저 유진이라면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는...”
“아아! 쓸데없는 말은 되었다. 직접 가서 확인할 테니.”
투웅─
가볍게 땅을 박차는가 싶더니 어느새 유진의 앞에 도착해있는 베를리오즈.
갑작스러운 로레오스의 등장에 유진의 사고가 정지해있는 사이.
“호오, 과연! 흠흠!”
먹이를 휘감은 뱀처럼 유진의 몸을 마음껏 더듬은 베를리오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레오스가 그토록 추천한 이유는 알겠구나! 제법 몸이 사내답구나! 요즘 것들 같지가 않아!”
“너...너...넌...뭐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비앙카는 베를리오즈와 유진의 사이로 끼어들며 소리쳤다.
안 그래도 유진이 지각해서 짜증 나 있던 상황이다.
거기에 낯선 여자가 유진을 더듬기까지 하자 비앙카의 눈에 불꽃이 튈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문 비앙카가 유진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 씨발놈아! 너도 문제야! 도대체 언제! 또! 여자를! 꼬신 건데!”
“...오해입니다. 비앙카.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애초에 지금 처음 봤습니다.”
“말이 되냐! 처음 보는 여자가 이렇게 마구 몸을 더듬는다고!”
비앙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유진으로서는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자신 때문에 벌어진 싸움이지만 베를리오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볼수록 신기하구나. 아무리 보아도 본신의 재능은 하찮기 짝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까지 올라갔는지 솔직히 놀랍구나.”
칭찬이라고 하기는 미묘한 베를리오즈의 평가.
로레오스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베를리오즈가 말을 이었다.
“로레오스. 이제 확실해졌다. 이 아이는 본녀의 제자로 삼을 만한 재능은 없다.”
“...베를리오즈님?”
그 말에 로레오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많은 학생을 지켜본 로레오스로선 유진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마치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아, 로레오스 네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안다. 하지만 저건 재능이 아니다.”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베를리오즈는 입꼬리를 올렸다.
“재능의 유무를 평가하면... 유진 저 아이는 확실하게 없는 쪽이니까 말이다.”
“베를리오즈님도 지금 유진의 힘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느껴지지. 말했다시피 놀라울 지경이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유진을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흐음. 그래서?”
“그래서가 아닙니다! 고작 1년 사이에 저 정도의 힘을 쌓은 게 재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글쌔다....”
잠시 말을 멈춘 베를리오즈의 동공이 세로로 길게 늘어났다.
“업보일 수도, 운명일 수도.... 뭐, 어느 쪽이든 내가 손댈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베를리오즈님!”
“시끄럽다! 오히려 재능만 보면 이 두 녀석이 더 훌륭하다. 특히...”
뱀처럼 부드럽게 비비안의 뒤로 돌아간 베를리오즈가 가슴을 주물렀다.
“흐아앗..!!”
“캬캬캿! 특히 이 아이의 재능은 놀랍구나. 인간의 몸으로 이 정도의 재능을 지녔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다! ...뭐 그 대신 쓸데없는 지방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투웅─!
베를리오즈가 비비안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후려치자, 거대한 가슴이 마치 푸딩처럼 흔들린다.
그 모습에 로레오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하아.... 그렇다면 비비안을 제자로 삼겠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본녀가 가르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천재뿐이다. 그러니 비비안은 가르칠 수 없다.”
“...비비안은 천재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래.”
조금 전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호평한 주제 곧바로 천재라는 평가를 부정하는 베를리오즈.
거기에 로레오스가 한마디 하려고 하자 베를리오즈가 말을 이었다.
“천재라는 말은 이 아이의 재능을 표현하기 부족하다. 애초에 저 정도의 재능이라면 스승이 필요 없다. 누군가의 지도를 받지 않더라도 알아서 벽을 넘겠지. 아니, 그보다 벽을 마주할지도 의문이군.”
“...그렇다면 전부 불합격이란 말입니까.”
로레오스의 표정이 굳었다.
지난 1년.
유진에게 걸맞은 스승을 찾기 위해서 루멘하르크뿐만 아니라 아스란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녔지만 그게 전부 헛수고가 되었단 말인가.
“아니, 이 아이는 마음에 드는구나.”
베를리오즈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쭉 펴지며 비앙카를 가리켰다.
“거기. 이름이 뭐지?”
“비앙카 베아트리스다! 왜!”
이름을 들은 베를리오즈가 불길하게 웃었다.
“...비앙카라.”
베를리오즈의 진한 파란색 눈동자가 비앙카를 집어삼킬 듯했다.
“범재조차 되지 못한 수컷과 천재라는 영역으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저 암컷. 저 두 이례(??) 사이에 껴서 잘도 여기까지 도달했구나.”
“...지금 뭐라는 거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베를리오즈는 비앙카의 가슴을 슬쩍 내려다보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빈약한 몸매도 마음에 드는군.”
“하, 시비 거는 거였어? 미안한데 그쪽도 별로 몸매는...”
“좋다. 감사하도록! 본녀의 제자로 삼아주마.”
“무슨 말이 안 통하네! 으앗! 뭐?...뭐야!...이거 안 놔!”
“읏쌰! 거! 젊어서 그런지 힘이 좋구나!”
붙잡힌 비앙카가 발버둥을 치지만 베를리오즈는 가볍게 웃어넘길 뿐이다.
“아! 쫌! 놓으라고!!”
짜증을 참지 못한 비앙카가 제법 진심을 담아 팔을 휘둘렀지만, 베를리오즈의 손짓 한 번에 막히고 만다.
“캬캬캿! 기세는 좋구나! 허나, 주먹을 휘두를 거면 좀 더 살기를 담아서 휘둘러야지. 이래서는 통하지 않는다.”
“...비앙카를 놓아주시죠.”
비앙카를 든 채 떠나려는 베를리오즈의 앞을 유진과 비비안이 막아섰다.
“호오... 본녀의 앞길을 막겠다?”
저것들을 어떻게 하냐는 듯 로레오스를 바라보는 베를리오즈.
로레오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유진. 일단 비켜드려라. 겉보기에는 이상하더라도 나쁜 분은 아니다. 내가 곧 설득해서 비앙카를 돌려보내마.”
“어허! 말조심하거라! 이상하기는 누가 이상하다는 게냐!”
로레오스의 말에도 유진과 비앙카는 물러서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로레오스 교수님. 설령 교수님의 부탁이라도 비앙카가 가고 싶지 않다는데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저...저도요...어..언니를 놔주세요.”
“캬캬캿. 말로 해서 안 되면 어쩔 수 없구나. 후회하지 말거라.”
쿠웅──!
순간, 베를리오즈에게서 거대한 뱀이 노려보는 듯한 불길한 마력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 무겁고, 비릿하고, 소름 끼치는 마력이다.
하지만...
리아나 만큼은 아니었다.
유진이 마력을 정면에서 받아내자 베를리오즈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반짝였다.
“베를리오즈님 멈추십시오! 더 이상 하신다면 저도...”
그러자 조금 전까지 유진을 막아서던 로레오스가 베를리오즈를 향해 적의를 내뿜었다.
“쯧, 여기서 끼어들다니 보기보다 눈치가 없구나. 설마 본녀가 이 나이를 먹고 어린 것들과 주먹다짐이라도 할 것으로 생각했느냐?”
베를리오즈가 손을 휘휘 흔들자 심장을 죄어오던 마력이 흩어진다.
“....그러려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멍청한 것! 본녀가 어려 보인다고 정신연령까지 어린 줄 아느냐? 이건 그냥 시험해본 것뿐이다.”
혀를 찬 베를리오즈가 비앙카를 놓아주자, 비앙카는 단숨에 뛰어 유진의 곁에 섰다.
“자, 풀어주었으니 되었지? 그럼, 거기 작은 것. 다시 가까이 오거라.”
“내가 미쳤냐! 또 억지로 끌려갈 게 뻔한데 거길 왜 가!”
비앙카가 소리치자 베를리오즈가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귀찮은고.... 이럴 줄 알고 그냥 데려가려고 한 건데.”
“처음부터 설명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쯧. 알겠다. 작은 것아. 본녀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마. 억지로 끌고 가지 않겠다. 잠시 대화나 하자꾸나.”
베를리오즈가 이름에 맹세한 순간.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실렸다.
“...잠깐이야.”
"캬캬캿! 알겠다! 그리 오래 끌지 않으마."
잠시 망설이던 비앙카가 다가가자 마치 오래된 친구를 보는 것처럼 어깨동무하는 베를리오즈.
“암컷끼리의 대화다. 수컷이 멋없게 방해하지 말거라.”
따라오려던 유진을 째려 본 베를리오즈는 비앙카를 데리고 조금 떨어지더니 귓가에 한참 동안 무언가를 속삭였다.
비록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비앙카의 표정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아 좋은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이래도 가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구나.”
말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베를리오즈의 소맷자락을 비앙카가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갈래. 데려가줘.”
“캬캬캿!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곱게 따라오지 그랬냐?”
“비앙카. 협박이라도 당한 겁니까?”
유진이 베를리오즈를 노려보며 말하자 비앙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거 아니야. ...그냥....”
잠시 입을 우물거리던 비앙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나중에 이야기할게.”
“캬캬캇. 차였구나! 자, 이제 억지로 데려가는 게 아니니 비키거라.”
손을 흔들며 비앙카와 함께 떠나는 베를리오즈.
하지만 비앙카가 자신의 의지로 떠나는 이상 막을 명분이 없다.
떠나가는 비앙카의 뒷모습을 보며 비비안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언니가...어떻게 된 걸까요.”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말했다시피 악한 분은 아니다. 비앙카는 걱정 할 필요는 없다.”
“....”
로레오스의 보증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때 로레오스가 넥타이를 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유진 칼리오페. 네 걱정을 할 필요는 있겠지.”
"....!"
뚜둑─ 뚝─
마법사의 근육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로레오스의 상의의 단추가 터져나간다.
“딱히 학생의 연애를 반대하는 편은 아니지만.... 정신을 좀 차리게 할 필요는 있겠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