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수면 아래에서 (1)
* * *
방 주인의 힘을 상징하듯 제국에서 손꼽는 보물만으로 가득 채워진 방.
그 한쪽 구석에는 마력을 차단하는 사슬로 온몸이 구속된 멜피사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쿠웅─!
그때, 방문이 열리며 태양처럼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들어왔다.
“으하하하하, 생각보다 감금이 길어졌군. 이거 미안하군. 하하하.”
제국의 황태자.
라인그람 루멘하르크의 등장에 멜피사는 즉시 머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태자 전하. 즉결처분이 내려져도 당연한 일인데 이렇게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 할 따름입니다.”
멜피사의 말대로 그녀가 저지른 죄는 그 자리에서 목이 베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늦은 밤 황태자의 침실에 잠입한 것이니까.
실제로 유진의 편지가 아니었다면 멜피사 또한 그렇게 처분됐을 것이다.
“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이군. 알다시피 보통 내용이 적힌 편지가 아니라서 말이야! 이쪽에서도 진위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거든! 으하하!”
유진이 편지에 적은 것을 요약하자면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반란군이 모여있는 장소였고.
두 번째는 곧 있을 마물들의 대규모 침공을 대비한 북부의 군비 지원 요청.
그리고 마지막이 리아나 루멘하르크가 저지른 죄에 대한 탄원이었다.
하나하나가 기밀을 요구하는 일이었기에 잠입에 능한 멜피사가 직접 황태자의 침실까지 온 것이다.
“흐하하! 놀랍게도 사실이더군. 덕분에 전부는 아니지만, 반란군의 대부분을 토벌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하하하하! 그럼 약속대로 촌각을 다투는 긴급사태였음을 고려해 자네의 죄는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감사를 표했지만 무언가 더 기대하는 멜피사의 표정.
짧게 코웃음을 친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 이것도 있었지. 본래라면 황가의 핏줄을 이은 자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제국에 반기를 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유진 칼리오페가 쓴 탄원서와 반란군을 미리 제거할 수 있다는 공을 고려해 리아나는 ‘황위 계승권’을 빼앗는 것으로 처벌을 끝내겠네.”
“다시 한번 관대한 처분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황태자의 말에 멜피사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전부 공자님의 예상대로다...’
며칠 정도 감금되기는 했어도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끌어냈다.
멜피사가 그렇게 생각 한순간.
황태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렇게 말할 줄 알았더냐?”
쿠웅—!
“루멘하르크의 황태자를 우습게 보지 마라.”
황태자의 흘러나오는 압박감은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혼절해도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멜피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파볼리에 가문에서 갖은 고문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 무표정을 유지하도록 길러졌고, 무엇보다 리아나 루멘하르크를 긴 시간 곁에서 모셨다.
이 정도의 압박감이야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제 출신이 비천하여 전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비천? 멸문했다고는 하나 파볼리에 가문의 영애가 출신이 비천하다니 재미없는 농담이군.”
설마 자신의 출신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한 터라 순간적으로 멜피사의 가면에 금이 갔다.
“호오, 목에 칼이 들이밀어져도 벗겨지지 않던 가면에 금이 갔구나. 역시 파볼리에의 이름이 네 역린이었나 보군.”
“전하... 그걸 어떻게...”
당황한 멜피사의 모습에 황태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설명하기 귀찮다.”
한 마디로 멜피사의 의문을 끊어낸 황태자는 말을 이었다.
“...본인은 지난 며칠간 반란군을 토벌함과 동시에 황실에 잠입해있던 벌레들의 입궁 과정을 추적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벌레들은 하나 같이 리아나와 관계가 있구나.”
고작 며칠 사이에 반란군을 제압하고 벌레들의 뒷조사까지는 하다니...
황태자가 유능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을 한참 초월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리아나님께서는 제국의 단합을 위하여 스스로 악역을...”
“그래, 백번 속아주어 반란군까지는 제국의 단합을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
멜피사의 변명을 잘라내며 황태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진실로 제국의 단합을 위해서 그랬다면 반란군을 제압할 황실에 버러지를 심어 놓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
황태자의 물음에 멜피사가 필사적으로 대답을 짜내려고 할 때.
“거짓을 고할 생각은 말아라.”
피부를 벗겨내고 심장을 파헤치는 듯한 황태자의 눈빛.
“본인은 리아나의 힘을 알고 있다. 동시에 그 속에 감당할 수 없는 어둠을 지닌 것도 말이다. 그런데도 그 아이를 내버려 둔 건 단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라인그람 루멘하르크의 선택은 옳았다.
괜한 자극으로 리아나가 황실에 흥미를 느끼고, 그로 인해 황실을 무너트리려고 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리아나를 막을 수 없었을 테니까.
“또한, 이 편지를 읽음으로써 확신했다.”
“무엇을...말입니까.”
“리아나는 힘을 잃었다. 힘을 잃지 않았다면 이런 편지를 보낼 필요도 없이 힘으로 입을 다물게 했을 테니 말이다."
“....”
“물론 그 강대한 힘을 전부 잃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허나, 옛날처럼 홀몸으로 황실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는 못하겠지.”
멜피사는 공포를 느꼈다.
고작 편지 한 장으로 이렇게까지 읽어 낼 수 있는 황태자의 능력이 두려웠다.
“...지금까지 나온 단서를 조합했을 때 본인이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거기까지 말한 황태자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턱을 괴었다.
“리아나는 진심으로 제국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허나 모종의 이유로 그것이 좌절되었고, 그렇다고 해서 계획을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커져 버렸기에 자수함으로써 어떻게든 처벌의 수위를 낮춰볼 생각이었겠지.”
“....”
“이 상황에서 침묵은 곧 진실이라 보겠다.”
그래도 멜피사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거짓을 내뱉는다 할지라도 황태자는 꿰뚫어볼 테니까.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멜피사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렇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호오, 이 상황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닌 오히려 되묻는 건가?”
“만일 태자 전하의 추리가 옳다면 유진 칼리오페는 반역자인 리아나님을 보호하려 하고 있습니다.”
“...반역을 일으키려 한 황녀를 보호하려 하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 그에게도 마땅한 처벌이 내려질 것이다.”
반역자를 도운 것에 대한 마땅한 처벌은 운이 좋아야 사형일 것이다.
멜피사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그렇다면 유진님을 처형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칼리오페 가문의 현 가주인 에르덴 칼리오페는 유진님을 아끼고 있습니다. 만일 유진님을 처형한다면 제국은 칼리오페라는 방패를 잃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멜피사를 향해 허리를 조금 숙이며 몸을 가까이 댄 황태자가 말했다.
“...에다드 칼리오페에게는 3명의 사내자식이 있었지. 유진과 에르덴을 제외하고도 한 명이 남는군. 제국의 방패는 귀중하지만 누가 그 방패를 드는지는 별로 중하지 않다.”
황태자의 대답을 듣는 순간 멜피사는 판단했다.
이 남자는 유진의 적이라고.
그렇게 판단함과 동시에 행동하려고 했으나.
쿵─!
“....감히 개 따위가 송곳니를 드러내다니. 건방짐이 선을 넘는구나.”
어느새 멜피사를 제압한 황태자.
앞서 느꼈던 위압감은 애들 장난처럼 보일 정도다.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몸의 떨림이 제어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 피가 흐를 만큼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무는 순간.
“....?”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얌전히 있거라. 앞서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속아주겠다는 말이다. 본인이 속아주면 좋게 끝날 일이니 말이다. 뭐, 에르덴은 몇 없는 친우이기도 하니 가능하면 살려두고 싶으니 말이다.”
이것도 역시 혈육이라 그런 것일까.
변덕을 부리는 황태자의 모습에 멜피사는 리아나의 모습을 겹쳐 보였다.
“하지만 자비는 강자의 것이다.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멜피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
과연 제국의 황태자라는 그 이상의 힘이 어디 있다는 것일까.
“파볼리에의 여식이여. 지금 너는 누구를 섬기고 있지?”
갑작스럽게 멜피사의 턱 끝을 붙잡은 황태자가 물었다.
“...유진 칼리오페입니다.”
“그렇다면 유진을 위해서라면 무엇까지 할 수 있지?”
“....제 심장을 바치겠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천천히 다가온 황태자는 멜피사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태자 전하...!...어떻게 그런 제안을...”
황태자를 부르는 멜피사의 목소리가 커지고 동공은 떨렸다.
멜피사조차 감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정도의 제안.
허나, 황태자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할 수 있겠느냐?”
“...하...하지만...”
“잘 생각해 보아라.”
제안을 건넬 때와 똑같은 황태자의 목소리가 멜피사의 몸을 떨게 했다.
“만일 내가 변덕을 부린다 할지라도 주인을 구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조금 전, 멜피사는 느끼고 말았다.
황태자에게도 리아나와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것을.
지금이야 이성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언제 변덕을 부려 모든 것을 뒤엎을지 모른다.
‘하지만...’
황태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쪽에서도 황태자의 약점을 하나 쥐게 되는 것이다.
“...이 파볼리에 멜피사.”
그리 길지 않은 시간.
그 사이에 수백, 수천 개의 생각이 오간 끝에 멜피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