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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29화 (229/354)

〈 229화 〉 핑발핑두핑보 서큐버스 성녀님 (1)

* * *

“...후아아암...”

깊게 잠들었었는지 귀여운 하품 소리와 함께 아이리스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잘 잤어요?”

“...네에...잘잤어요... 유진군도 잘 잤나..!..헛!...지...지금 몇 시죠 유진군?”

뭔가 급한 일이 있는지 잠에서 깨자마자 놀라서 시간을 묻는 아이리스.

“이제 곧 4시네요. 왜요? 할 일이 있어요?”

“그...그게...어쨌든 다행이에요! 그렇게 늦지는 않았네요! 유...유...유진군 서둘러서 씻고...아니! 씻는 건 가서 씻고 릴리스의 방으로 가도록 하세요. 방이 몇 호실인진 알고 있죠?”

나는 급히 서두르는 아이리스를 붙잡으며 말했다.

“잠시만요. 가는 건 상관없는데 그전에 아이리스에게 물어볼 게 있어요.”

“무...물어 볼거요?..죄송한데 유진군 나중에 하면 안될까요? 지금 시간이 얼마 없어서...”

아이리스가 울상을 지으며 부탁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지금 할 거예요.”

“아아...정말!!... 알았어요. 그럼 저는 방 청소를 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물어보세요!”

한시라도 빨리 내쫓으려는 듯 갑자기 방을 정리하는 아이리스를 보며 나는 말을 툭 던졌다.

“그래서 왜 아기 흉내를 내고 있던 겁니까?”

“...흐엣!”

옷가지를 줍던 아이리스가 제자리에서 화려하게 넘어졌다.

“...그...그게...꼭지금 말해야 하나요...? 나중에 말하면 안 돼요?”

설마 다시 캐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는 아이리스.

“네, 안돼요. 꼭 지금 말해야 해요.”

“...그...지금..말하기에는...뭐랄까...마음의 준비가 안됐다고 할가...조금...”

아이리스가 말을 돌리며 시간을 끌자 나는 대놓고 시계를 보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아까는 급하다면서 이제는 시간이 넘쳐나나 봐요. 어, 봐요. 이제 4시 넘어가네요.”

“아아!! 유진군! 이제 출발하지 않는다면 진짜 늦는다고요!”

여자들끼리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획대로 진행되려면 이제 슬슬 릴리스를 만나러 가야 하는 것 같았다.

“뭐, 릴리스한테는 아이리스가 붙잡아서 못 왔다고 하죠. 뭐.”

“그...그건 거짓말이잖아요! 제가 언제 붙잡았어요! 전 빨리 가라고 했어요!”

“지금 말 안 하는 게 붙잡는 거 아닌가요? 저를 릴리스가 있는 곳에 보내고 싶으면 빨리 말하세요.”

“...으으....정말...유진군...못됐어요.”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보는 아이리스였지만 무섭기는커녕 귀여울 뿐인다.

결국,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아이리스가 말을 꺼냈다.

“하아.... 그러니까 유진군의 첫번째. ...쉽게 말해 정실 자리를 차지하는 경쟁 중이거든요. 유아기 흉내를 내봤고요.”

“...네? 지금 뭐라고...”

“유진군은 부성애가 강해 보이니까 아기 흉내를...”

“아뇨. 그거 말고요.”

내가 그거라고 말한 게 섭섭했는지 아이리스가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흥, 정실 자리를 놓고 싸우는 중이라고요. 처음에는 다 같이 달라붙기로 했지만 그랬다가는 유진군의 체력이 못 견딜 테니까 제가 말렸어요...”

아이리스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여성진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튀어나올 줄이야.

‘...역시 루시아의 역할이 중요하네.’

지금까지 여성진의 폭주는 루시아가 제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아나를 받아들인 이후, 루시아의 멘탈은 조금만 자극해도 폭발하던 초창기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자기 자신을 관리하기에도 벅찬 루시아에게 여성진의 제어까지 바라는 건 욕심일 것이다.

‘아니, 루시아가 오히려 먼저 나섰을 수도 있다.’

아이리스 앞에서 결혼 이야기를 꺼낸 걸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무력행사는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일 여성진끼리 서로 다쳐서 싸우기라도 했다면 내 멘탈도 박살 났을테니까.

‘아직 마지막 선은 지키는 모양이네...그래도 빨리 해결해야한다.’

내가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고 있자 아이리스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근데 유진군은....누구랑 먼저 결혼하고 싶어요?”

고개를 숙인 채 눈만 힐끔거리는 아이리스.

“....”

아이리스의 말을 빌리자면, 정실 대전이 펼쳐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누구를 고르든 좆될게 확실하다.

그리고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세계에 ‘해피엔딩’이 확정될 때까지는 결혼할 생각은 없기에 슬쩍 비켜 나간 대답을 했다.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유진군?결혼할생각이없다고요?그럼예전에저한테결혼하자고했던건거짓말이였어요?거짓말은나쁜거에요유진군나쁜아이는벌을받아야하는데.유진군한테도벌을줘야하나요?후후후.”

결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리스의 눈에서 초점 사라지고 알 수 없는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오른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아이리스의 상태도 위험해질 것 같았다.

“아, 그러니까 카르네아의 학생일 때는 결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 그런 거였네요. 저는 또 유진군이 거짓말을 한 줄 알고 깜짝 놀랐네요. 후후훗.”

그때야 다시 눈빛에 빛이 돌아오는 아이리스.

하지만 완벽하게 의심이 사라진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황급히 한마디를 덧붙혔다.

“제가 아이리스에게 거짓말을 할리가 있나요. ...그냥 학생 때는 학업만 집중하려고요.”

“아...그...그렇죠...유진군은 아직...하...학생이니까...어쩔 수 없죠.”

사실 아이리스가 따지고 들면 더 따지고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카르네아의 학생 중 상당수가 귀족들과 부르주아들로 이루어진 만큼 카르네아를 다니는 도중에도 약혼은 기본이고 혼인까지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등장했으니까.

하지만 아이리스가 선생님이라 그런지 학생이라는 방패가 잘 먹히는 느낌이다.

“그러면 유진군은 곧 2학년 2학기니까.... 앞으로 얼마남지 않았네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숫자를 세는 아이리스.

분명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지금 내 정신을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2학년 2학기.”

‘아카조교사’의 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학기.

내가 모르는 미래가 펼쳐진다는 뜻.

그리고...

최종보스와의 결전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네요. 얼마 남지 않았어요.”

나는 스스로에게 되새기듯 작게 중얼거렸다.

***

릴리스가 사용하는 기숙사는 루시아가 사용하는 것처럼 고위 귀족이나 대부호용 기숙사가 아닌 딱 중간급 기숙사라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성녀가 사용한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기숙사지만, 대외적으로는 성녀 ‘릴리스’가 아니라 하급귀족 ‘릴리 화이트플랑’으로 입학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뭐, 대충 정체를 눈치챈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힘을 사용했다 하면 갈색으로 변장한 머리카락이 분홍색으로 돌아오는 성녀님이다.

이번 폭동에서도 많은 사람을 도왔을 테니 분명 머리카락 색도 들켰을 것이다.

흔치 않은 분홍빛 머리카락에 압도적인 치유력까지 보여주는 젊은 여자?

조금이라도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바로 성녀를 떠올릴 것이다.

‘...이젠 들켜도 큰 상관은 없지.’

정식 스토리에서도 이쯤에서 릴리스의 정체가 들키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카르네아가 폭동으로 망해가고 제국에는 내전이 터졌는데 릴리스가 성녀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필요한 건 릴리스의 정체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는 힘이었다.

실제로 ‘아카조교사’에서도 릴리스에게 복귀 명령이 떨어졌지만, 릴리스는 내전으로 목숨을 잃어가는 생명을 내버려 두고 파르테논에 복귀할 수는 없다고 태어나 처음으로 파르테논의 명령을 거부했다.

‘여기선 내전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성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1회차와 지금 세계에서 성격이 가장 많이 달라진 게 누구냐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릴리스를 고를 정도로 파르테논의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던 릴리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만히 있어도 나를 덮쳐 올 정도로 주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니까.

설령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파르테논에서 복귀 명령이 떨어지면 릴리스가 알아서 거부할 것이다.

─똑똑

내가 문 앞에서 옷차림을 가다듬은 내가 노크하자 안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어왔다.

“들어오세요.”

허락을 받고 방안에 들어서 나는 놀라서 숨을 멈췄다.

솔직히 릴리스의 방이라고 하면 여러 성인용품이 나뒹구는 모습을 생각했는데...

성인용품은커녕 이곳이 교회 안이라도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성서와 여신상으로 가득 찬 신실한 분위기의 방이었다.

“어서 오세요. 신도님.”

안쪽 방에서 마중 인사를 나온 릴리스가 상냥하게 말했다.

“...릴리스?”

나도 모르게 릴리스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그만큼 릴리스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흘리던 음란한 공기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노출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새까만 수녀복을 입은 채 미소를 띠는 릴리스.

“기도를 드리러 오셨나요?”

지금의 릴리스는 마치 정초하고도 순결하고 고귀했던...

1회차의 성녀를 떠올리게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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