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11화 (211/354)

〈 211화 〉 리아나 루멘하르크 (1)

* * *

[...나는 리아나와 파트너를 맺고 있었다.]

파트너라고 하면 섹스파트너 쪽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서 파트너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지금의 루시아처럼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리아나 루멘하르크를 신뢰하다니.

헛웃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허나, 꿈속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리아나를 깊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모든 가정이 뒤틀렸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보았다.

지금까지 ‘되살아난 타락’이 1회차의 내 모습을 하고 있던 원인을 ‘아카조교사’를 플레이했을 때의 찌꺼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리아나와 파트너를 맺었다는 사실 때문에 내 가설은 쓰레기가 되었다.

단언하는데 ‘아카조교사’를 플레이할 때 나는 리아나를 만날 때마다 살해당했다.

몇 번 개죽음을 당한 뒤에는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괜한 수작을 부린 걸 들켜, 평소보다 더 빠르게 살해당한 적도 있을 정도다.

파트너가 되기는커녕 대화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 관계.

그것이 나와 리아나였다.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랬지...’

하지만 단 한 번.

리아나를 정면으로 마주치고도 살아남았고, 심지어 그녀의 호의마저 얻어낸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 말이다.

이 세계에서만큼은 리아나가 내게 호의를 보여주었다.

내 행동이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생 직후, 나의 행동 방식은 ‘아카조교사’ 시절의 ‘유진 칼리오페’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난 나비효과를 두려워했고, 최대한 정사를 따라가는 게 생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 행동이 ‘아카조교사’의 시절과 변화가 없음에도 리아나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내가 리아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갔다면...

우리의 관계가 상당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모든 가정은 리아나가 나를 적대하지 않았을 때만 발생하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아카조교사’와 ‘이 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의외로 정답은 간단하다.

내가 이 세계에 전생했다는 것이다.

리아나가 ‘유진 칼리오페’를 적대하지 않는 조건은 ‘내’가 유진 칼리오페로 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아나와 내가 파트너가 된 세계는 도대체 뭐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마치 출구가 없는 미궁을 계속해서 헤매는 느낌이다.

떠오르는 모든 가정이 허황되게 느껴지지만, 그런 가정이 아니면 이 상황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결론 내리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리아나와 파트너가 됐는지가 아니니까.’

중요한 건 앞으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다.

지금까지 나는 리아나의 계획을 지연시키며 내전을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 낼 생각이었다.

리아나가 악이라는 걸 당연하다고 여겼고,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꿈속에서 본 광경만 아니었다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러나 모든 진실을 확인한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새하얀 손바닥과 피투성이가 된 손이 겹쳐 보였다.

─후후훗...이제...유진이는...나를...절대로...못...잊겠네...♪

리아나와의 거래로 내가 그녀의 심장을 찔렀을 때 들은 말.

그녀의 유언은 세계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게 깊숙이 박혀있었다.

그만큼 꿈속 세계의 내게 리아나의 죽음은 큰 의미를 지니던 것이다.

차라리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잠시 그런 잡념이 떠올랐지만, 바보 같은 생각이다.

만일 꿈속 세계에서 보았던 ‘내’가 진짜 ‘나’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설령 자신의 육체를 ‘되살아난 타락’에게 넘기더라도.

‘...어이가 없네.’

나는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결국, 모든 건 내가 선택했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고인물이라며 잘난 척이랑 잘난 척은 다 해놓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리아나가 인류를 배신하고 내전을 일으킨 것이 단순한 유흥이라 생각했다.

황녀는 그런 캐릭터니까.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리아나는 제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음으로서 제국의 통합을 이루어냈다.

‘...지난 수백 년간 루멘하르크 제국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제국의 적이라고 부를 만한 국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아인족들의 국가와 아스란 제국 정도가 있겠지만, 아인족의 왕은 움직이지 않았고, 아스란 제국은 형제국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진 것은 좋았지만...

고여버린 물은 썩어가듯이 외부의 적은 없을망정, 제국 내부의 어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그렇게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들이 밖으로 나온 계기가 바로 리아나가 일으킨 내전이었다.

다른 귀족들이 벌인 내전이라면 눈치 보며 침묵했을 그들도, 황실의 피를 가진 리아나가 제국에 반기를 들었으니 이런 기회는 다시 오기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제국 구석구석에 퍼져 있던 반동세력은 리아나의 아래로 집결했고, 그들의 힘이 정점을 찍었을 때.

...리아나가 죽음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심해야 했어...’

리아나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이 수상 할 정도로 잘 풀려갔다.

황녀라는 우수한 머리를 잃은 세력은 혼란에 빠졌고, 황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둠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반동세력을 단숨에 제압됐으며, 그로 인해 제국은 일시적이나마 하나가 되어 최종 보스에게 대적할 힘을 얻었다.

“...여기까지가 아카조교사의 세계의 이야기.”

추가로 꿈속 세계의 나는 리아나를 직접 처리했다는 이유로 병사들의 막대한 지지를 얻었고, 이를 통해 총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최종 보스로 가는 길을 리아나의 죽음으로서 단숨에 열어 재낀 것이다.

‘지금 황녀의 행동도 꿈속 세계와 거의 일치한다.’

내가 파트너가 아니라는 걸 제외한다면, 지금 리아나의 행동은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하다.

무리해서 리아나와 대립할 필요 없이 리아나가 자살할 때까지만 내버려 둔다면 자연스럽게 최종 보스와 맞서 싸울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 꿈의 세계를 보지 않았더라면.

설령 진실을 알았더라도 나는 리아나의 죽음에서 눈을 돌렸을지 모른다.

리아나가 죽음을 바라고 있고, 그 죽음을 가장 쓸모 있는 형태로 사용하기를 바란다면 내게 그걸 막을 권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게 심장을 꿰뚫리기 전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뱉은 리아나의 한 마디가 나를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역시 죽고 싶지 않네.

곧바로 뒤에 농담이라 덧붙이기는 했지만, 리아나의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리아나는 죽음을 바라지 않음에도 결국 자살을 택한 것이다.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리아나 루멘하르크는 협박이나 강요 따위로 죽음을 선택할 만한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도 리아나가 자살을 했다는 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꿈속 세계에서 내가 리아나를 파트너로 삼은 건, 분명 이유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리아나를 동정했고, 연민했으며,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문제의 열쇠는 이 이유에 달려있다는 걸.

‘...리아나에게 직접 물어볼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헷갈려서는 안 된다.

이곳은 꿈속 세계가 아니다.

리아나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는 꿈속 세계만큼 유대를 쌓지 않았다.

그런 내가 갑작스럽게 가장 깊은 비밀에 관해 물어봤을 때, 리아나의 반응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창가로 다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쪽이 과연 옳은 것일까?

꿈속 세계의 나는 리아나의 계획이 옳다고 믿고 그녀의 파트너로 살아갔다.

그 결과, 내전으로 인해 죄 없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목숨을 잃는 걸 지켜보았다.

나도 알고 있다.

분명 이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내전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제국은 하나로 통합되지 않을 것이다.

대전쟁을 앞두고 개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서로를 견제할 것이고 틈을 놓치지 않고 어둠도 활동을 시작하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최종 보스와 맞서 싸워 볼 기회조차 잃고 결국 세계는 배드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선택해야 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 것을 알지만, 최종 보스와 싸울 기회를 얻기 위해 리아나의 자살을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제국의 통합에 실패할지라도 리아나를 막아설 것인가.

내 손에 리아나의 목숨과 이 세계의 미래가 달려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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