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 음란 기사는 NTL을 꿈꾼다 (4)
* * *
‘큰일 났다...’
제정신을 차린 마르잔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을 가리고 냄새만 맡게 한다면 이곳이 카르네아의 기숙사인지, 아니면 제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홍등가, 드래곤헤드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만큼 지금 유진의 방안은 애액과 정액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마르잔!!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어요!’
자괴감과 후회가 폭풍처럼 밀려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되돌린다고 해도 그때의 성욕이라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스흡...스흡...정신 똑바로 차려요!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후회와 반성은 뒷정리가 끝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요!’
마르잔이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면서 슬쩍 실눈을 뜨고 방안을 둘러보자 수치심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니...뭘 어떻게 해야 이렇게 되는 건가요!’
책에서 말하길 첫 경험은 보통 쾌락보다는 교감을 중요시한다고 했는데.
...자신은 예외였나보다.
옷, 침대, 바닥, 심지어는 천장까지.
얼마나 쾌락에 미쳐있었는지 더러워지지 않은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로 방안에는 온통 정사의 흔적이 가득했다.
‘...설마 천장까지 정액이 튈 줄은....아...아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혼자서는 아무리 날고뛰어도 제시간에 정리하기 어려워 보였지만, 마르잔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아, 물론 이런 상황을 계획하고 있던 건 아니다!
정말로! 조금도! 전혀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성녀님께 수면제를 받은 이후.
마르잔은 ‘우연히’ 유진의 방이 더러워질 상황을 대비해 뒀다.
‘...부...분명 루시아님의 말로는 여기 어딘가 놔뒀다고 하던데..’
침대 아래에 몸을 반쯤 집어넣고 뒤적거리던 마르잔.
잠시 뒤 마르잔은 원하던 물건을 찾았는지 짧은 비명을 흘렸다.
“...찾았다!”
침대 아래에서 꺼낸 것은 팔뚝 정도 크기의 원통형의 물건이었다.
정식 명칭은 따로 있지만, 흔히 ‘청정기’라 불리는 마도구.
본래는 마기를 오염된 지역을 정화하는 용도로 쓰는 녀석이다.
만들기 힘든 정화 계열의 마도구인 만큼 평범한 사람은 물론 웬만한 귀족들조차 함부로 사들이기 어려운 가격을 자랑했지만...
상대가 루시아 우르엘라였다.
자금력으로 따지면 대가문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우르엘라 가문의 차기 가주란 말이다.
루시아 지위라면 아무리 값비싼 마도구라 할지라도 한낱 청소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우우웅—!
마르잔이 청정기에 마력을 불어넣자 청정기가 방에 있던 오염 물질을 정화하기 시작한다.
그것만으로도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더럽혀졌던 방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솔직히 루시아님이 청정기를 정사의 뒤처리 용도로 쓴다고 들었을 때는 돈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 사용해보니 그 편리함에 반해버릴 것 같다.
“후우, 일단 급한 불은 껐네요.”
잠시 후, 청소가 끝나고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마르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루시아님과 유진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심장을 죄여왔다.
‘...루시아님. 이번 일은 나중에 꼭 자백하겠습니다.’
마르잔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다짐했다.
분명 벌을 받을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숨기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변명을 해도 이건 배신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루시아님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황녀 전하의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는 유진님과 루시아님이다.
그분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루시아님 분명 괴로워하시겠죠...’
세간에선 한없이 냉정하다고 평가받지만, 일단 자신의 편이 된 사람은 굉장히 아끼는 게 루시아님이다.
연적인 비앙카 베아트리스와 매일같이 티격태격하면서도 베아트리스 가문에는 꾸준히 지원을 이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마르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지금 마르잔이 누리고 있는 삶은 루시아가 없었다면 성립하지 않았다.
루시아가 없었다면 빈민가 출신인 마르잔은 기사가 되지도, 카르네아의 입학하지도, 유진은 만나지도 못했을 테니까.
‘...나는 그런 루시아님을 배신하고 유진님과 관계를 맺은 거구나....’
유진과의 섹스를 떠올리자 죄책감은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마르잔의 심장에 박혔다.
...그러나 괴로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랫도리가 간질거리는 게 느껴졌다.
‘미...미쳤어요! 그렇게 해놓고서..! 원숭이도 아니고!’
마르잔이 잡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유진이 있었다.
마르잔은 자신도 모르게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 보니 저 키스도 아직이네요. ...섹스는 했는데 말이죠.’
엄밀히 따지고 보면 과거 유진과 부딪쳤을 때, 순간적이지만 입술과 입술이 맞닿기는 했다.
그러나 남성 경험이 없는 여자들이나 그걸 키스 횟수로 세는 법.
더 이상 처녀가 아닌 마르잔에게 그때의 일은 입술 박치기일 뿐, 제대로 된 키스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어...어차피...저지른 거...조금만...더...욕심부려도..’
계속해서 유진의 입술을 힐끗거리던 마르잔이 결심을 한 듯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0에서 1이 되는 건 어렵지만, 100에서 101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군의 연인을 면간(??)한 죄는 100이나 200으로는 훨씬 부족하다.
거기에 키스 한 번이 추가된다고 해서 죄의 무게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죄...죄송해요...유진님, 루시아님...나중에...이것도...제대로...벌을 받을테니까...’
괜히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린 마르잔이 두 눈을 감고 유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쪽─
입술에서 유진님의 체온이 느껴졌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지만, 이걸로 끝낼 거였으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다.
마르잔은 입술을 딱 붙인 채 혀를 내밀어 닫혀있는 유진의 입을 서서히 벌렸다.
쪼옵─ 쪼옥─
이빨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마르잔의 혀는 유진의 입안을 제멋대로 탐했다.
“...쪼옵..♥...하아....쫍..♥.유..진니임...쪼옥..”
제대로 된 키스는 처음인 만큼 서툴고 거칠었지만, 마르잔은 키스가 주는 열기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책에서 왜 그토록 키스 묘사에 공을 들였는지 알겠어요...’
섹스와 비하면 한없이 약한 교감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키스를 이어갈수록 섹스와는 다른 종류의 만족감이 마르잔를 가득 채웠다.
“...하아...쪼옵...,하아...”
그렇게 한참이나 유진의 입술을 탐내던 마르잔이 정신을 차리고 떨어지자 타액으로 이루어진 다리가 둘 사이에서 반짝거렸다.
“...여...여기까지만..."
떨어지기 아쉬웠지만, 계속 키스를 이어갔다가는 다시 덮쳐버릴 것만 같았다.
수건으로 유진의 얼굴을 닦아준 마르잔은 마지막으로 침대를 정리하고 방 밖으로 나섰다.
끼익─
그렇게 방문이 닫히기 직전.
뒤를 돌아본 마르잔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편히 쉬세요. 유진님.”
***
꿈에서 깬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책상 위에서 쓰러졌을 텐데 마르잔이 옮겨놨는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마르잔?”
내가 잠긴 목소리로 마르잔을 불러봤지만 이미 돌아간 듯 대답은 없었다.
‘하긴 얼굴 보기 힘들겠지... 그래도 개운하네.’
오랜만에 잠을 자서 그런지 수상 할 정도로 몸이 가뿐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 상태를 점검하던 중 문뜩 위화감을 느꼈다.
“...응?”
사라진 것은 피로뿐만이 아니었다.
참기 힘들 정도로 쌓여있던 성욕도 깨끗하게 정리된 느낌이다.
‘...설마. 몽정 한 건 아니겠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내 사정량은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다.
만일 몽정을 했다면 백 퍼센트 마르잔에게 들켰을 것이다.
자면서 정액을 줄줄 흘리는 주군이라...
나로서는 별로 모시고 싶지 않았다.
‘...제발...제발...’
내가 떨리는 손으로도 조심스럽게 아랫도리를 확인하니 다행스럽게도 깨끗했다.
몽정은 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곤했을 때면 몰라도 몸 상태가 좋은 지금은 더 성욕이 들끓어야 하는 거 아닌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 가지 가설에 도달했다.
“...설마 자는 사이에 마르잔이 덮친 건 아니겠지?"
잠시 상상을 해본 내가 피식 웃었다.
릴리스나 양호 마망이라면 몰라도 마르잔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마르잔이 루시아에게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내게 수면제를 먹인 것만으로도 괴로워했을 마르잔이 루시아를 배신할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끝내고, 책상에 앉아 꿈에서 보았던 것을 되새겼다.
‘...잘 안 떠오르네.’
분명 머릿속에는 저장되어 있는데 그걸 되새기려고 하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기억력의 문제라기보다는 꿈을 떠올릴 수 없도록 금제가 가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명확한 것이 있었다.
너무나 충격적이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던 것인지 아니면 ‘검’이 내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이것인지.
작게 한숨을 흘린 내가 꿈에서 본 것을 종이 위에 적었다.
[...나는 리아나와 파트너를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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