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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207화 (207/354)

〈 207화 〉 음란 기사는 NTL을 꿈꾼다 (1)

* * *

“황녀 전하께서 평민과 하급 귀족을 대상으로 강당에서 연설을 한다고...”

책상에 앉은 내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마르잔, 확성기랑 바람잡이를 준비해놔. 연설을 통째로 빼앗아야 할 거 같으니까.”

“아... 저... 유진님...?”

평소 같았으면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을 마르잔의 말끝이 불길하게 흐려진다.

나는 보고서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마르잔을 바라보았다.

“왜 무슨 문제 있어?”

“...그게...돈이 부족 할 거 같습니다.”

“그 많던 돈을 벌써 다 썼다고?”

내가 놀라 되묻자 마르잔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자금이 훨씬 빨리 떨어졌다.

칼리오페 가문에서 챙겨온 돈과 딜도 판매로 받은 수익금.

거기에 미래의 딜도 수익까지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왔는데 그걸 다 쓰다니...

실시간으로 돈이 삭제되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철저하게 대응하려다 보니 비용이 늘어났나 봅니다.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는 마르잔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 비난하려고 한 건 아니야.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해줘.”

“하지만 비용이...”

“비용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지금 당장 필요한 돈은...”

황녀를 상대할 때는 철저하게 하지 않아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설픈 방식으로는 오히려 황녀에게 잡아 먹히고 말 테니까.

“...루시아에게 빌려와야겠네... 그래도 우르엘라의 이름으로 빌리지는 못할 테니 적당한 가문을 하나 우회로로 사용해서...”

말을 하던 도중 갑작스레 머리가 빙글 돌더니 기운이 쭉 빠지면서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쿵—

쓰러지기 직전 간신히 책상을 붙잡아 바닥을 나뒹굴지는 않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유진님...!!”

놀란 마르잔이 소리치며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괜...괘찮으십니까? 무.. 무슨 문제라도.”

“...괜찮아. 그냥 피로가 좀 쌓인 거야.”

“피로로 쓰러졌다고요? 그..그러고 보니 최근 주무신 걸 본 적이 없는데.... 유진님 며칠이나 잠을 주무시지 않은 것입니까?”

마르잔의 말을 듣고 나서야 꽤나 밤을 지새웠다는 게 떠올랐다.

‘...반귀족파 모임이 끝난 뒤에 잠을 잔 게 마지막이니…. 이제 일주일 정도 됐나.’

기간을 인식하자 피로가 더욱 몰려왔지만 어쩔 수 없다.

나 같은 범인凡人이 괴물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몸을 갈아 넣는 수밖에는 없다.

내겐 루시아나 리아나처럼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내용을 암기하고 요약할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으니까.

‘...그래도 나름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지금 와서 보니 황녀의 움직임을 따라가기도 벅차다.

의자에 몸을 기댄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자금 융통은 루시아에게 말하는 수밖에는 없겠네. 이야기 좀 부탁할게.”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루시아라면 분명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전하고 올 테니 유진님은 그동안 좀 주무시고 계십시오.”

“응, 일단 이 보고서까지만 검토하고 나서 잘게.”

“안 됩니다! 당장 주무십시오.”

서류를 손으로 쾅 내려친 마르잔이 이윽고 눈을 크게 뜨며 사과했다.

“죄...죄송합니다... 주제를 넘었습니다. 하지만 유진님. 이대로 가시다간 황녀 전하께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도 전에 유진님께서 쓰러지고 말 겁니다.”

진지한 얼굴로 경고하는 마르잔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았다니까. 진짜 이것만 검토하고 잔...”

“유진님...!!”

“그렇게 소리치지 마. 정말 중요한 서류라 어쩔 수 없어. 그보다 얼마 안남았는데 이렇게 계속 방해하면 오늘도 밤새워야 할 수도 있겠는걸?”

사실 방해하지 않더라도 밤을 새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또 밤을 새운다는 말에 마르잔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방해하지 않도록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유진님. 대신 정말 검토가 끝나는 대로 주무시는 겁니다.”

“알았다니까. 들키지 않게 조심히 돌아가고.”

“...네. 유진님. 몸조심 하세요.”

나는 최대한 피로를 감추며 마르잔을 배웅했다.

“....”

마르잔을 보내고 홀로 남아 의자에 몸을 기대자 문득 발아래에 깔린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리아나 루멘하르크.”

나도 모르게 황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최근 황녀에 대해서 생각이 길어질 때마다 그림자가, 정확히는 그림자 안에 있는 ‘검’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그럴수록 황녀에 대한 감정이 점점 뚜렷해진다.

사랑은 아니다.

사랑이라 하기에는 황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몇 번이고 덧칠해진 물감처럼 어둡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은 없지.”

아랫입술을 강하게 씹은 나는 다시 감정을 밀어 넣은 채 자료를 읽어내려갔다.

***

“...하아.”

강의실에 앉은 마르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유진님과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기대도 했다.

그도 그럴게 한창때의 남녀가 단둘이 밀실에서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더욱이 이번 기회는 루시아님마저 자리를 비운 천재일우의 기회.

상황이 된다면 자신이 몸과 마음을 다해 루시아님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바빠도 너무 바쁘잖아요….’

일 할 때는 집중해도 일이 끝나면 오늘도 수고했다며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러나 마르잔의 망상은 단 하루 만에 끝났다.

황녀 전하께서 얼마나 열심히 돌아다니는지 일이 끝나지 않는다.

시간과 돈을 쏟아 부워 겨우 한쪽 구멍을 막아내면 다른 쪽에서 폭탄이 터지는 느낌.

게다가 유진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던가.

전에 가슴을 만졌을 때 느껴진 감촉으로 평가하자면 유진님은 마법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신체를 가졌다.

그런 유진님이 쓰러질 정도면 하루 이틀 밤을 새운 게 아니란 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큰일 날 수도...’

마르잔으로선 어떻게든 유진을 쉬게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아.”

“...하아.”

고민하던 마르잔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옆자리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니 분홍색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귀여운 외모의 성녀님이 책상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최근 들어 성녀님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릴리.”

“...네, 마르잔 릴리 화이트플랑이에요...”

“무슨 일있어요?”

“...네, 있어요. 하아....”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뺨을 책상에 딱 밀착시키는 성녀님.

“....요즘 선생님이 저를 안 불러주시네요. 설마 저한테 질린걸까요...”

성녀님이 말하는 선생님이 유진을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는 마르잔으로서는 심장이 살짝 뜨끔했다.

유진님은 성녀님에게 질려서 부르지 않는 건 아니다.

최근 유진님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다른 여인들과의 접촉을 거의 제한하고 있다.

말했다시피 요즘 유진님의 일과는 잠조차 제대로 주무시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간다.

즉, 여자들을 상대할 여유가 없다는 소리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만을 불러주었다는 건 내가 조금 특별하기...

‘...잠깐만 여자를 안 부르다는 건 나는 유진님께 여자로 인식이 안 된다는 소리잖아?’

불현듯 무언갈 깨달은 마르잔이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마르잔 스스로도 알고 있다.

큰 키와 중성적인 외모.

자신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여자라는 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모하는 남성에게 남자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주먹을 꽉 쥔 마르잔은 성녀에게 말을 걸었다.

“...릴리, 저 고민이 있는데요.”

“어머, 마르잔이 고민 상담을 한다고요?”

우울해하고 있던 주제에 고민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짝거리면서 집중하는 성녀님.

“...네. 저 관심 있는 남자가 있어요.”

“정말요? 잘됐네요! 상대는 누구예요!”

본성부터가 워낙 착해서 그런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두근─두근─

이런 성녀님의 남자를 탐한다는 생각에 마르잔의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치솟았다.

“아직 비밀이에요.”

“...아. 아쉽네요. 그래도 나중에 말해 줄 때가 있겠죠.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럼 고민은 뭔데요?”

“고마워요... 그게 요즘 그 관심 있는 남자가 너무 바쁜 거 같아서요.”

“정말요? 우연이네요! 요즘 제 선생님도 얼굴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바쁘신데...”

우연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일인이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헛기침한 마르잔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그 남자를 쉬게 할 수 있을까요? 잠도 며칠째 안잔거 같아서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쓰러질 거 같은데...”

“음!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성녀님이 가방을 뒤지더니 보라색 약이 담긴 병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게 뭐죠...?”

“수면초 농축액이에요! 이거 한 병이면 곰도 잠든다고요! 사실, 선생님과 만나면 살짝 먹이려고 준비하던 건데... 마르잔에게 줄게요.”

과연 유진님께 수면제를 먹이고 무슨 짓을 하려고 준비한 걸까.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마르잔이 주먹을 꽉 쥐었다.

‘...유진님을 위해서.’

절대! 절대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받은게 아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유진님이 정말 쓰러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 어쩔 수 없이 받은 것이다.

“...그럼, 잘 받을게요.”

작은 약물 병을 손에든 마르잔의 심장이 배덕감과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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