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부부사기단 (1)
* * *
“...이렇게까지 치열한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네요.”
루시아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럼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고 승자조인 비비안과 레이카님께서 마지막 승부를 가리도록 하죠.”
레이카는 엄지손톱을 씹으며 생각했다.
‘...승자조는 무슨 승자조에요!!’
좋게 포장해서 승자조다.
비앙카와의 승부에서 이긴 것도 어디까지나 승부의 허점을 찾아냈기 때문.
정정당당하게 허접보지를 가렸다면 100% 이쪽의 패배였다.
‘위험해요... 이건 위험하다고요! 제가 초청제에 오려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대로 오라버니랑 헤어질 수는 없어요!’
레이카... 아니 가르시아 모녀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
물론 유진과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고작 한 번뿐이다.
몇 달 동안이나 참아 온 성욕을 고작 한 번의 관계로 전부 채우라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닌가.
레이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기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저 거유 음침녀에게 이길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가버릴 거에요!’
꽤 긴 시간 동안 휴식을 취했지만, 아직도 ‘불완전의 딜도’가 남긴 후유증이 레이카의 보지에 남아있었다.
‘무승부...무승부로 끌고 가야 해요.’
승부는 아직 1대1 상황.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지금이라면 무승부를 주장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근데 어떻게 해야 하죠? 무릎 꿇고 빌까요? 아니에요! 소용없다고요!’
유진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무릎 따위 몇백 번이고 꿇겠지만 통할 리가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만일 상황이 반대였다면 레이카는 고작 무릎을 꿇고 비는 정도로는 절대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어쩌냐고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대가 승부를 피하게 둘 것 같지도 않다.
매 초마다 패배가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입안이 바싹 마르고 초조함이 심장을 가득 채운다.
“그럼 마지막 승부 규칙에 관해 설명하겠습니다. 승부는...”
루시아의 입에서 마지막 승부에 대한 규칙이 나오려던 그때.
똑똑─
방문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루시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저러한 노크 방식을 쓰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까.
루시아는 문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마르잔, 중요한 일이 진행 중입니다. 나중에 해도 되는 말이면 다시 오세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루시아님. 하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우려하시던 상황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쯧. 하필 지금...”
루시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씹으며 칼리오페 모녀를 흝었다.
“....!”
레이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눈빛을 교환한 모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건 가르시아와 레이카에게 있어서는 구원의 밧줄과도 다름없다.
무조건 붙잡아야만 했다.
“아아. 이런 이런... 방해꾼이 들어왔으니 승부는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해야겠어요. 아쉽지만 1대1 무승부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거의 다 이긴 승부였는데 이렇게 끝이 나다니...”
가르시아의 말에 비앙카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무승부?! 누구 마음대로 무승부야! 어딜 도망치려고!”
“...도망이요? 제가 도망칠 이유가 어디 있죠?”
“질까 봐 도망치는 거지!! 쫄았으니까!”
비앙카가 길길이 날뛰자 가르시아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쫄아...? 쯧, 경박한 말투하고는. 품성은 언행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그딴 언행으로는 평생 귀족다운 품성을 가지지 못할 겁니다.”
“품성 같은 소리 하네! 자긴 아들한테 따먹히면서 히익거려놓고..!!”
비앙카의 날카로운 반격에 가르시아의 얼굴이 굳었다.
똑똑─
“...루시아님, 그래도 바쁘시다면 다음에 다시 올까요?”
“...”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마르잔의 재촉에도 루시아가 입을 다물고 있자 레이카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뭐, 승부를 진행하자고요? 좋아요. 그럼 밖에 있는 누군가를 돌려보내고 진행하면 되겠네요. 그게 아니면 무승부에요.”
“말도 안 돼! 뭐 자기 마음대로...”
“그쪽이 말도 안 된다고 하면 어쩔 건데요. 심판께서 빨리 결정하시죠. 참고로 무승부를 하는 조건은 다음 방학 때는 오라버니가 집에 찾아오는 거예요.”
주도권을 잡자 판을 통째로 흔드는 레이카.
한때 칼리오페의 악녀였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 장난해! 그쪽에서 무승부를 하자고 하면서 조건까지 내건다고?!”
“네, 방해꾼 난입은 주최 측에서 저지른 잘못입니다. 당연히 그쪽에서 보상해야죠.”
상품 측, 즉 유진의 의견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채 진행되는 이야기.
하지만 유진과 루시아의 머릿속은 모녀와 자매의 승부보다는 마르잔이 들고 올 소식에 쏠려 있었댜.
“루시아..”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내가 이름을 부르자 루시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시아의 의견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 승부를 지속 할 수 없는 이상 1대 1. 즉 무승부로 경기를 마치겠습니다.”
“오라버니. 그럼 다음 방학 때는 집에서 뵙겠네요.”
“네, 누님. 어머니도 다음 방학 때는 가문에서 뵙겠습니다.”
“...후후후. 그럼 됐어요. 충분한 성과를 얻었네요.”
잘됐다며 웃고 있는 둘의 얼굴을 보고 있자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다.
다음 방학...
과연 그런 게 존재할지 의문이 들었다.
루시아가 ‘초청제’에 집착한 것도 이 행사가 카르네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축제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는 제국 전체가 휘말리는 내전이 시작되니까.’
카르네아 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가 전쟁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뭐어...? 무승부? 지금 이쪽이 다 이겼는데 그게 말이 돼!”
“심판의 말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럼 오라버니, 본가에서 봐요.”
“...본가에서 보자꾸나.”
판정이 번복되지 못하도록 도망치듯 나가는 가르시아와 레이카.
마르잔은 스치듯 도망치는 둘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루시아님. 지금 나가신 분들은?”
“...신경 쓸 거 없어요. 마르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네, 루시아님.”
마르잔이 방안에 들어오자 그녀를 뚱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비비안.
그 모습에 내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비앙카, 비비안. 미안한데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겠어요.”
“왜! 왜! 우리도 내쫓는데? 셋이서 무슨 비밀이야기를 하려고!!”
비앙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르잔을 의심했다.
“부탁해요. 비앙카와 비비안이 들어서 좋을 이야기가 아닐 거에요.”
지금 이야기를 들어봤자 괜히 혼란만 더해질 뿐이다.
베아트리스 가문처럼 이제 막 부흥하는 가문의 일원이라면 특히.
“언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비비안이 비앙카의 옷 끝을 잡고 잡아당긴다.
잠시 나와 비비안을 번갈아 보던 비앙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쯧, 네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 이번 승부는 우리가 이긴 거야. 나중에 보상받을 거라고!”
마지막으로 권리를 주장한 비앙카는 비비안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유진님의 방에서 야한 냄새가...가득...”
"..."
베아트리스 자매를 문 앞까지 마중하고 오자 마르잔이 얼굴을 붉히며 다리를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루시아가 팔짱을 끼며 쏘아붙였다.
“...마르잔. 급한 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상황을 설명하세요.”
“...흐앗...! 죄... 죄송합니다. 루시아님이 우려하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롱기스트 가문의 장남, 페드로 롱기스트가 결투 중 얼굴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페드로라면 분명 3학년의 1반이었죠.”
롱기스트 가문이면 서부 귀족 중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가문이다.
서부의 대가문 우르엘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대가문을 제외하고는 최상위에 위치한 가문이다.
우르엘라의 차기 가주인 루시아의 입장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가문인 건 확실하다.
“상처를 입힌 상대 어느 가문이죠?”
“...그게 제이빗이라는 평민입니다.”
루시아는 붉은 입술을 쓰다듬었다.
“이런 초청제 기간에 평민과 귀족이 대결했다고요? 분명 가문들이 다 보고 있을 텐데?”
“그게... 원래 나와야 했던 귀족이 급작스러운 부상으로 제이빗이 대타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페드로가 그걸 받아드렸고요?”
“예, 2반이라 쉽게 이길 줄 알았나 봅니다. 3학년쯤 되면 실력과 반이 정비례하니까요. 실제로 제이빗이 마지막 순간 기습적인 반격으로 승리하기 전까지는 페드로가 압도했다고 하니까요.”
평민이 귀족에게 상처를 입혔다.
카르네아 밖에서 일어났다면 상당한 중죄로 처벌받을 사건.
하지만 카르네아 안에서, 그것도 정당한 결투 중에 입은 상처는 누구도 처벌할 수 없다.
“그래서 롱기스트 가문에서는 뭘 바라는데요? 설마 보상을 바라는 건 아니겠죠?"
“네, 진심 어린 사과와 승부의 무효처리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만 한데요? 사과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다면 끝내는 게 옳아요.”
루시아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네아의 교칙이건 뭐건 부모의 앞에서 자식을 상처입혔다.
도의적으로 봐서라도 사과를 하는 게 옳다.
“그런데 뭐가 문제죠? 제이빗이 사과하지 않겠다고 했나요?”
“아니요, 처음에 롱기스트 측이 비겁한 수를 썼다고 주장 할 때는 흥분해서 반발했지만... 진정한 뒤에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사과하려고 했답니다...”
제이빗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카르네아는 짧고 인생은 길다.
자존심을 한 번 굽히는 것으로 귀족의 분노를 누그러트릴 수 있다면 당연히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그럼에도 루시아에게 이 소식이 전해 왔다는 건.
‘사과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그 상황을 발생시킬 요인은...
“...황녀 전하께서 끼어들었군.”
내 한숨 섞인 혼잣말에 마르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