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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185화 (185/354)

〈 185화 〉 효도하는 법... 아시죠? (5)

* * *

같은 시간, 카르네아의 기숙사.

“지~루~해.”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던 리아나 루멘하르크가 문뜩 말을 꺼냈다.

“지루하다고!!”

방 안에 있는 건 리아나 혼자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리아나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스윽

그때야 멜피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림자 속에서 얼굴을 반쯤 내밀고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 황녀 전하.”

“응, 멜피사♪뭐 재미있는 거 없어?”

갑자기 재미있는게 있냐고 묻는다고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멜피사가 뭘 추천해도 리아나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질문을 받았는데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멜피사는 늘 하던 대로 무난한 답을 택했다.

“...그럼 황실로 돌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멜피사. 그런 농담은 별로 재미없는데... 안 그래도 지긋지긋한 곳인데 뭐하러 돌아가.”

“...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시지 않겠습니까.”

“오라버니가? 내가 카르네아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그 사람일 텐데. 하아... 그래, 멜피사에게 물은 내가 잘못이었어.”

‘...대답을 안 했으면 안 했다고 뭐라고 했을 거면서.’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멜피사는 자신의 목숨이 귀한 걸 아는 사람이다.

멜피사는 고개를 한 번 젓는 것으로 쌓인 말을 털어냈다.

“아아~ 유진이 보고 싶다.”

그때 리아나가 갑작스럽게 중얼거리며 이불로 몸을 감싸고 빙그르 돌았다.

수많은 사내가 자신의 관심을 한 번 끌어보겠다고 보석과 황금을 얼마나 가져다 바치는데 그 복에 겨운 남자는 먼저 관심을 줘도 도망치기 급급하다.

‘뭐, 그래서 재미있는 거지만.’

리아나가 쿡쿡 웃었다.

오라버니 이외에의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본 유일한 사람.

유진의 당황해서 어쩔 수 모르는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저절로 걸린다.

“유진이도 참 어딜 간다면 간다고 말을 해주지. 그럼 나도 따라갔을 텐데.”

“....”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공자님이 정보를 숨기는 게 아닐까.

멜피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리아나를 바라보자 둘둘 말린 이불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음... 감시라도 붙여놓을까? 어떻게 생각해 멜피사.”

“...안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왜? 그래도 하나 남은 혈육이라고 걱정되나 보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멜피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이젠 유진에 대한 감정은 혈육의 정보다는 여인으로서 사랑이 훨씬 커다랬지만, 황녀 전하에게 굳이 그걸 떠들어 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때, 리아나가 이불 속에서 꾸물꾸물 기어나 왔다.

“아으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안 할 거야. 응응, 패를 다 알고 하는 싸움은 재미없는걸. 유진이한테 그런 아까운 짓을 할 수는 없지....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말을 곱씹은 리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유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걸?”

호의라는 단어가 이토록 무서운 것이던가.

황녀의 호의를 사는 것보다는 미치광이 살인마의 원한을 사는 게 몇 배는 더 안전하지 않을까.

잠시 그런 불경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이번에도 멜피사는 최선을 다해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전하의 뜻대로 하시지요.”

“그런데 멜피사...”

“네. 전하.”

“너, 유진이를 언급할 때마다 목소리가 움찔 떨리네? 둘이 뭔가 있었어?”

“....!”

방긋 웃으면서도 정곡을 찔러오는 리아나의 말에 이번만큼은 멜피사도 놀랄 수밖에 없다.

‘...어떻게?’

리아나의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멜피사의 가면도 완벽에 가까웠다.

파볼리에 가문의 방계로서 감정을 숨기는 법은 흉터와 함께 몸에 새겼으니까.

실제로 황녀 전하께 거두어지고, 공자님과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멜피사의 가면은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단 말이다.

그러자 리아나의 눈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았다는 듯 반짝였다.

“흐음... 이 반응 좀 봐. 그냥 한 번 찔러본 건데 정말 뭔가 있었나 본데?”

‘이런...’

멜피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설마 황녀 전하가 자신을 떠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해서 잘못된 반응을 하고 말았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우와! 지금 멜피사 나한테 숨기는 거야?”

“숨기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요.”

“후후훗...♪그건 지금부터 찬찬히 알아보면 되는 거 아니겠...”

싱글벙글 웃으며 멜피사에게 다가가던 리아나 표정이 한순간에 차갑게 변했다.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황녀 전하...?”

멜피사가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아는 리아나는 절대 이런 흥밋거리를 놓아 줄 사람이 아니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어떻게든 바라는 정보를 끌어낼 것이란 말이다.

그런 멜피사의 의문을 읽은 듯 리아나가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됐다고 말하잖아. 아니면 뭐야? 더 파고들었으면 좋겠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멜피사, 산키샌 마을에 가서 케이크나 사와.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거든.”

뜬금없는 명령이었지만 추궁당하는 것보다는 백배는 나은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하. 케이크라면 카르네아 내부에서도 판매를...”

“으응, 카르네아껀 마음에 안 들어. 반드시 산키샌 마을에서 사와. 크림파이 여관 맞은편에 있는 가게 알지? 거기서 다섯 개 정도.”

“다섯 개나 말입니까?”

“많이 먹고 싶은 기분이거든. 그럼 잘 다녀와~.”

이걸로 대화는 끝이라는 듯 손을 흔들어주는 리아나.

분명 무언가 이상했지만, 황녀 전하의 변덕이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멜피사는 그저 명령을 따를 뿐이다.

“네, 황녀 전하.”

철컥─

멜피사가 방 밖으로 나가고 주변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리아나는 거울 앞에 섰다.

“이제 나오세요.”

리아나가 말을 꺼내자 거울은 마치 돌이 던져진 호수처럼 출렁거리더니 이내 온몸을 붕대로 둘둘 감싼 누군가를 비췄다.

“...리아나 루멘하르크.”

거울에 비친 존재는 유리를 못으로 긁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리아나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초리로 쏘아 붙였다.

“누가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고 했죠? 저는 분명 저를 황녀 전하라고 부르라 했을 텐데요.”

“....인간의 지위 따위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저도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저는 제 말을 무시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스윽—

리아나가 입꼬리를 뒤틀며 검지를 거울을 겨누었다.

“그러니까, 자신 있으면 다시 한번 제 이름을 지껄여봐요.”

거울이 너머에서도 피부가 오싹해질 정도의 살기.

리아나의 손가락 끝을 바라본 ‘일그러진 욕망’이 숨을 삼켰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거울 너머의 공격이 닿을 리가 없다.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면서 대화를 하고 있을지라도 이건 직접 이어진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일그러진 욕망’의 능력으로 모습을 비추고 있을 뿐이란 말이다.

하지만....

‘위험하다.’

사도로서의 직감이 리아나 루멘하르크는 위험하다고 말했다.

“...뭐, 칭호 따위야 어찌 되든 좋다. 우습지만 황녀 전하로 불리기를 원한다면 불러주지... 황녀 전하.”

“그래요. 처음부터 그랬으면 좋았잖아요.”

그때서야 리아나 방긋 웃으며 손가락을 내렸다.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결국 리아나의 말에 굽힌 건 ‘일그러진 욕망’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사도가 한낱 인간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굴욕이다.

‘...정말 저게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그렇다면 사도에게 굴욕조차 감내하게 만드는 리아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무슨 일이죠? 제가 약속한 날까지는 연락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요.”

“...상황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그 상황이 뭔지 묻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제가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요?”

까득—

계속 된 모욕에 ‘일그러진 욕망’이 이빨을 까득 갈고는 리아나를 노려보았지만...

결국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말을 꺼냈다.

“‘...되살아난 타락’이 당했다.”

“어머나, 그냥 얌전히 있는 줄 알았는데... 벌써 죽었다고요? 그럴 거면 왜 되살아났데요? 또 죽으려고요?”

리아나의 비웃음 가득한 말에도 ‘일그러진 욕망’은 반응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도끼리 동료 의식 따위는 없었으니까.

“멍청한 놈이지. 어쨌든 그것 때문에 모든 계획이 빨리 당겨졌다.”

“서두른다고 될까요? 아직 준비가 더 필요할 텐데요?”

“그건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니 슬슬 떠날 준비를 하도록.”

“....흐음.”

리아나의 평탄한 반응에 ‘일그러진 욕망’이 비웃음 섞인 한 마디를 덧붙혔다.

“설마 황녀 전하께서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어머, 제가 후회 같은 걸 할 인간으로 보여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리아나의 두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소름 끼치는 군.’

‘일그러진 욕망’이 짧게 혀를 차자 거울에 비친 모습이 흐릿해졌다.

“...정확한 마중 날짜는 다시 연락하지.”

그 말과 동시에 평범한 거울로 돌아온 리아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리아나는.

아주 약간.

정말로 아주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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