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낙화(花) (4)
* * *
푸른색이었던 갑옷과 찬란한 빛을 내뿜던 성검은 검게 물들었지만 확실했다.
...저 녀석은 ‘나’ 였다.
그것도 해피엔딩은 아닐지라도 이 세계의 엔딩을 본 ‘1회차의 나’.
“...!”
찰나(?)
내가 놈의 모습을 보고 멈춘 시간은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1회차의 나는 그 틈을 놓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찰나의 망설임 만들어낸 빈틈을 비집고 ‘내’가 달려들었고.
촤아악—
나를 대신하여 한 송이의 꽃이 떨어졌다.
***
본래 유진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1회차의 유진...
지금에 와서는 ‘되살아난 타락’이 된 녀석은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유진이 1회차 때 그랬던 것처럼 철저하게 상대를 분석하고 이길 수 있는 싸움만을 거듭했다.
페이크 보스가 리치나, 구울이 아닌 데스나이트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되살아난 타락’이 페이크 보스로 자신의 전투 스타일과 가장 유사한 데스나이트를 선택해 상대의 실력을 가늠한 것이다.
그 결과 ‘되살아난 타락’은 릴리스와 비앙카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데스나이트의 연격을 막아낸 릴리스의 방어막은 한순간에 뚫을 자신이 있었고, 비앙카의 체술은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다.
“...”
다만, 한가지 불안요소라고 할 수 있는 건 유진이었다.
유진이 특별히 마법이나 고유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이 모조품이 진짜를 볼 때 느끼는 열등감이라는 걸 거짓된 부활을 이룬 ‘되살아난 타락’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되살아난 타락’은 가장 먼저 유진을 죽이기로 했다.
유진을 죽이지 않으면 이 불쾌한 감정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기에.
“....”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마기를 뿜어내, 움직임을 멈추고 그 상태에서 검을 휘둘러 유진을 베어낸다.
너무나도 간단한 계획.
실패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되살아난 타락’의 예상은 빗나갔다.
유진을 베었어야 할 검은 비앙카를 베었다.
‘되살아난 타락’은 그것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앙카의 신체 능력으로는 절대로 ‘되살아난 타락’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른다]
그 조건이 충족된 순간 유진의 죽음은 확정되었단 말이다.
...하지만 ‘되살아난 타락’은 한 가지 착각을 했다.
비앙카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움직인 게 아니었다.
‘유진아...!’
천장에서 ‘되살아난 타락’이 떨어지는 순간 비앙카는 유진을 향해 달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것’이 유진에게 있어서 엄청난 위협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되살아난 타락’이 혼절 할 수준의 마기를 뿜어냈을 때도, 비앙카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비앙카는 다리 근육이 끊어질 정도로 땅을 박차며 유진에게 닿기를 소망했다.
그렇게 비앙카가 유진을 밀쳐냈을 때.
비앙카는 웃을 수 있었다.
죽음의 앞에서 비앙카는 언젠가 유진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나도 위험한 거 하기 싫어! 하지만 너가 위험한 건 더 싫어! 그러니까 내가 널 지키겠다고! 내가 죽더라도 너 지키겠다고! 그만큼 널 좋아한다고! 왜 이걸 못 알아 처먹는 건데 병신아!
...설마하니 그 약속을 이렇게나 빨리 지키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약속을 지키고 싶지도 않았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가능하다면 위험한 일 없이 유진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그럼에도 비앙카에게 후회는 없었다.
자신이 유진을 지켜냈다는 것만으로도 비앙카는 웃을 수 있었다.
‘...사랑해.’
마기로 범벅된 검날이 몸속을 파고드는 순간 비앙카가 떠올린 한 마디.
하지만 비앙카는 이 말을 전하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이 어떤 말을 내뱉던 유진에게는 저주가 될 것을 알았기에 비앙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것이 자신이 유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며.
***
퍼어억─!
검을 휘두른 소리라기보다는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 퍼지며 비앙카가 저 멀리 튕겨 나간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비앙카의 핏물과 내장 조각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비앙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삐이이이이이이이—
날카로운 이명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끝과 발끝에서 감각이 사라져간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고 강렬한 현기증 탓에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조차 인식하기 어렵다.
...그저 참기 어려울 정도의 구토감이 솟아났다.
현기증을 견디다 못한 내가 제자리에 주저앉으려던 순간.
“살아있습니다!”
릴리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살아...있습니다..!”
다시 한번 쥐어 짜내는 릴리스의 말에 무너져가던 정신이 되돌아온다.
그래 봤자 희망이라는 얇디얇은 끈으로 간신히 붙잡아 놓은 정신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그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상대를.... ‘나’를 노려보았다.
“...”
내 시선을 느낀 ‘되살아난 타락’이 천천히 검을 일으켰다.
불행 중 다행일까.
한 번 무너져가던 정신에는 비어있는 장소가 많았다.
원래 무엇이 들어있어야 할 장소인지 모른다.
지금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
단지 남아있는 모든 공간에 ‘나’를 상대할 방법을 계산시킨다.
내가 허락된 이상의 연산력을 사용하느라 뇌가 곤죽이 되어버려 녹아내릴 것 같다.
‘...하지만.’
그 덕에 잠시지만 저 녀석을 상대로 시간을 벌 방법을 찾아냈다.
‘저것이 정말 1회차의 나라면...’
이 방법은 반드시 먹힐 것이다.
콰앙—!
‘되살아난 타락’이 바닥을 박찼고 파편이 제멋대로 튀어 올랐다.
그렇게 ‘되살아난 타락’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삼켜라─그림자」
“....!”
넓게 펼쳐진 그림자가 순식간에 ‘되살아난 타락’을 집어삼켰다.
본래라면 그림자에 살아있는 생물을 집어넣는 건 불가능하지만 상대는 ‘나’였다.
어찌 됐거나 파볼리에의 피를 이은 이상 그림자가 삼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쿠웅—
‘되살아난 타락’이 그림자 안에서 발버둥을 치는지, 그림자가 크게 출렁거린다.
‘오래는 못 견뎌...’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쓸어낸 나는 릴리스의 앞까지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부탁드립니다.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짓은 한없이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살려주세요..”
지금이라도 혼자서 도망친다면 릴리스만큼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릴리스의 양심과 죄책감을 이용하면서까지 비앙카를 살리기 위해서.
머리를 바닥에 붙이며 말했다.
“...비앙카를...살려...주세요.”
***
릴리스는 넘쳐 흐르는 눈물에 시야가 흐릿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눈물을 닦지 않았다.
눈물을 닦기 위해 손을 떼는 그 짧은 시간에 비앙카는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의 상태다.
‘...제발..! 제발...!!’
지금 비앙카는 복부 부위가 완전히 날아간 상태.
상체와 하체가 붙어있다는 게 기적적인 정도였다.
후웅웅─!
만일 비앙카의 부상이 평범한 사고로 생긴 것이었다면, 벌써 몇 번이나 회복시킬 수 있었을 정도의 마력을 쏟아 넣었다.
‘...제발...견뎌주세요..!’
하지만 타락의 힘이 스며든 상처는 릴리스의 회복을 거부하고 있었다.
“...성녀님...부탁드립니다.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앞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릴리스에게 시선을 돌릴 여유는 없었다.
“...살려주세요...”
하지만 얼핏 보이는 실루엣만으로도 유진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앙카를...살려...주세요.”
그 모습을 본 릴리스는 비앙카에게 마력을 좀 더 밀어 넣으며, 입술을 피나 날 정도로 깨물었다.
“저...릴리스...여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종이자 성녀입니다...”
고유 능력이 마법에 비해 마력의 효율성이 월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릴리스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회복’은 최상급 마법의 버금갈 정도의 마력을 지속해서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무리 성녀의 마력이 방대하더라 하도 이렇게 사용하면 금방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증거로 마력이 급속도로 빠져나간 릴리스 얼굴이 창백해지며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제 목숨 하나를 부지하자고 도움을 필요한 어린 양을 버릴 생각은 단 한 순간도 한 적 없습니다.”
그럼에도 릴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유진의 부탁 때문이 아니다.
설령 유진이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릴리스는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력이 부족하다면 생명력을 바쳐서라도 끝까지 비앙카를 구해내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릴리스는 성녀(??)이다.
힘이 강해서도 아닌, 재능이 넘쳐나서도 아닌, 누군가를 위해 아무런 주저 없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기에 성녀라 불리는 것이다.
“...비앙카님은 제가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마력고갈로 인해 속에서 올라오는 피를 집어삼키며.
릴리스는 유진이 무너지지 않도록 확신을 담아 속삭였다.
“...그러니 선생님은 선생님이 해야 할 일을 해주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