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망나니, 악역 영애, 의붓 엄마 (6)
* * *
“오늘만 지나면 우리가 진짜 형제가 될 수 있겠구나.”
문 앞에선 케일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케일이 뒤통수 칠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걸 아는 나로선 어이가 없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왔구나.”
긴 녹발을 위로 땋아서 고정한 가르시아가 매혹적인 자태로 앉아있었다.
가르시아가 입고 있는 옷은 제법 노출이 많았지만 입고 있는 사람이 귀족적인 느낌이 강해서인지 음란하기보다는 고풍적으로 보였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어머니.”
어머니란 단어가 입에 잘 붙지 않았다.
그건 가르시아도 마찬가지였는지 왠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앉거라.”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가르시아는 하녀에게 손짓했다.
“차를 가져오거라.”
“...네.”
가르시아는 사소한 손짓 하나에서부터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위엄을 느끼게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들거라. 마이샤 가문에서 직접 기른 찻잎으로 우린 것이다.”
“...괜찮습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목을 축인 터라.”
비록 동맹을 맺기 위해서 왔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여긴 적진이다.
적진에서 주는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자 케일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유진! 지금 네놈이 어머니의 성의를 무시하겠다는 거냐!”
“...형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먼저 마셔보겠다!”
그렇게 말한 케일이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떠냐! 유진 이제야 믿을 수 있겠느냐!”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의심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형님.”
“그렇다면 마셔보아라! 동맹하고자 왔다면 최소한의 신뢰를 쌓아야 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내가 차를 한 입 들이키자 가르시아와 케일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입에는 맞느냐?”
“...맛이 훌륭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이윽고 차를 홀짝인 가르시아가 매끈하게 관리된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그럼,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자꾸나. 케일에게 차기 가주로 우리 쪽을 지지한다고 들었다. 보답으로는 무엇을 바라는지...”
“그 전에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
중간에 말을 끊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동맹을 맺으러 온 나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지 표정을 살짝 구기는 것으로 넘어갔다.
나는 부드럽게 고개를 숙이고는 케일에게 얼굴을 보며 말했다.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형님.”
내가 케일을 바라보며 웃자 케일이 인상을 찌푸린다.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 어...? 네놈... 왜.. 갑자기.... 두..명이...”
쿵─
거기까지 말한 케일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쓰러졌다.
“...이거 형님이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케일! 케일! 정신을 차려 보아라! 케일! ...네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글쎄요. 무엇을 한 건 제가 아니라 어머니가 아닙니까?”
가르시아는 이를 갈고는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케일에게 먹이려고 했지만, 내가 그보다 빨리 손목을 낚아챘다.
“이거 놔라!”
“어차피 소용없는 짓입니다. 제가 바보도 아니고 어머니가 준비한 것과 똑같은 독을 사용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차를 가져온 하녀를 바라보며 말하자 하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저, 저는...”
“네년이 돌았느냐! 감히 나를 배신해!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흐..흑..죄..죄송합니다..마님...살려주십..”
펑펑 울며 머리를 조아리는 꼴이 불쌍해 보일만도 했지만, 저 하녀에게도 몇 번이나 죽어봤기에 그런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엠마가 잘 해냈네.’
하녀를 협박하는 역할은 엠마에게 맡겼다.
그녀가 가르시아의 편에 붙어 내게 독을 먹이려는 계획이 들통 났다는 사실과 마음만 먹으면 너뿐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고 말이다.
반쯤 정신이 나간 가르시아가 소리쳤다.
“네놈!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거 같으냐!”
“예, 무사할 겁니다. 오히려 저보다는 케일 형님을 걱정해야지 않겠습니까?”
내가 가볍게 협박했지만 가르시아는 두렵지 않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여봐라! 당장 들어와 이 가증스러운 놈을 체포해라!”
가르시아로서는 문밖에 있을 기사들을 믿고 소리친 것이겠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끼익─
문틈이 조금 열리고 그곳에서 인자한 얼굴로 웃고 있는 알프레도가 모습을 보였다.
“...왜...네가!”
“...죄송합니다. 마님. 도련님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 이곳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알프레도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확인했는지 가르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크흣...!”
가르시아로서는 나름대로 준비한다고 한 기사들이겠지만 아쉽게도 알프레도가 더 강했을 뿐이다.
물론 문 앞에 서있는게 칼리오페가 자랑하는 하얀 늑대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하얀 늑대 기사단은 아버지와 첫째 형님께 충성하는 자들.
애초에 가르시아는 그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하녀에게 케일이 마시던 차를 건네며 말했다.
“마시세요.”
“도, 도련님...제, 제발...용서를...”
“마시지 않으면죽습니다.”
이제부터 이어질 대화는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것이 아니다.
“흐..흐그..흡....음..”
차를 마신 하녀가 정신을 잃자 이번에는 내가 천천히 다리를 꼬며 가르시아를 불렀다.
“어머니...”
“그 입으로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어미가 날카롭게 짖었지만, 이빨 빠진 암캐 따위가 짖어봤자다.
“그럼, 가르시아...”
“지금 감히...!”
이름을 불린 가르시아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내가 짧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도 싫다, 가르시아도 싫다.
참으로 바라는 것도 많은 여인이었다.
쿵─
나는 책상을 내리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멍청이를 살리고 싶으면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거야.”
[염동력 (Rank D)]
염동력을 얇게 퍼트려 물리적으로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살기나 강한 마력으로 인한 발생하는 위압감을 염동력으로 흉내 내는 것이다.
물론 진짜들에는 어림도 없는 기술이지만 가르시아처럼 무력한 자에게는 충분히 통할만 한다.
그때야 어느 정도 냉정함을 되찾았는지 가르시아가 길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바라는 게 뭐냐.”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요.”
“닥치고 바라는 걸 이야기해라!”
“간단합니다. 차기 가주의 자리를 첫째 형님에게 넘기시죠.”
“에르덴이 사주한 일이었느냐! 겉으로는 고귀한 척은 다 하더니 결국 이런 것이냐!”
가르시아가 또다시 핏발선 눈으로 노려보자 나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은 관계도 없고,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해. 당신도 알잖아. 첫째 형님이 본격적으로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면 마이샤 가문 따위는 언제든지 밟을 수 있는 위치라는 거.”
“네놈...!”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르시아의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가르시아에게 있어 마이샤 가문은 역린과도 같은 존재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봐주고 있는 거야. 받아.”
내가 건네준 쪽지에는 가르시아가 준비한 암살 계획의 비용, 의뢰 조직, 작전 시간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적혀있었다.
“...이걸...어떻게?..읍..”
자신도 모르게 계획을 긍정했다는 걸 깨달은 가르시아가 입을 다물지만 이미 한참 늦었다.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계획을 알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텐데.”
나를 제외하고 이건 순전히 가르시아와 레이카만이 알고 있는 계획이다.
“그럴 리가..그럴 리가 없다.”
“부정하고 싶으면 부정해. 다만 거기에 적힌 것은 어떻게 부정할지 모르겠지만.”
가르시아가 레이카를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보다는 레이카가 내 쪽으로 붙었다는 게 현실적인 판단 일테니까.
....사실 나로서는 가르시아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다.
둘의 관계에 불신을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럼 슬슬 길을 열어줄까..’
쥐새끼도 궁지로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도망칠 구멍은 남겨 놓는 게 좋았다.
그것이 지옥으로 향하는 입구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뿌려 놓았던 염동력을 회수하며 친절하게 웃었다.
“어머니. 저라고 무작정 밀어붙일 생각은 없습니다. 적당히 협상할 생각도 있고요.”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냐?”
“어디 한 번 솔직해져 보자는 말입니다.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권력욕의 근원은 마이샤 가문이 모멸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순결한 귀족 처녀가 한밤중에 남자를 덮치러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가르시아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약해빠진 가문 탓에 다른 귀족들에게 지나친 모욕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패하면 가르시아 마이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지만, 성공한다면 그동안 받은 치욕과 수치를 되돌려 줄 수 있었으니까.
도박은 반쯤 성공이었다.
가르시아는 칼리오페의 안주인이 되는 것은 성공했으나 권력은 잡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오히려 마이샤 가문을 무시하는 자들은 늘어났다.
몸을 팔아 칼리오페 가문에 들어간 주제 안주인 다운 행동은 어느 하나 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가르시아는 이토록 차기 가주에 집착하는 것이다.
진짜 권력을 얻어 자신과 가문을 모욕한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제가 마이샤 가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칼리오페가문... 만큼이라고 하면 거짓이겠죠. 하지만 적어도 이 북부에서는 누구도 어머니의 가문을 무시할 수 없게 말입니다.”
“...너 따위가 어떻게 나를 돕는다는 말이냐.”
맞는 말이다.
내가 칼리오페의 가주도 아니고 힘이 있던 외가는 가문이 멸망했다.
결국, 내게 남은 힘 따위는 없다.
....그러니까 내게 남은 힘은 말이다.
“저는 루시아 우르엘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나름대로 폭탄선언이었지만, 가르시아가 생각보다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짐작은 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10년이나 매달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왔으면 곁에 있는 가르시아 정도는 눈치챌 만도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패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황녀 전하께도 말이죠.”
“...그게 무슨...!”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가르시아의 눈이 크게 떠진다.
나는 그런 가르시아에게 황녀 전하의 서신을 보여주었다.
“...이게..황녀전하가...적은 서신이라고?”
가르시아의 기분은 이해한다.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황녀가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연서를 보냈다고는 믿기 어려울 테니까.
“...믿지 못할 것 같아도 사실입니다.”
“...그런...말도 안되는...”
편지를 회수한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가르시아를 노려보았다.
“아시겠습니까? 제겐 우르엘라와 황가의 비호가 있습니다. 이 둘의 힘이라면 마이샤 가문을 밀어주는 것도 문제는 아닙니다.”
“...내 아들에게 독을 먹인 네놈을 어찌 신용하겠느냐.”
가르시아의 말에 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먼저 독을 먹이려 해놓고선 그걸 트집을 잡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께서도 제 약점을 잡으면 됩니다. 마침 제가 바라는 것도 그것이고요.”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나는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굽혀 가르시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와 육체 관계를 맺으시죠. 어머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