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망나니, 악역 영애, 의붓 엄마 (5)
* * *
“그래서 유진은 뭐래? 자기도 차기 가주 쟁탈전에 참여하겠데?”
책상 위에 걸터앉은 레이카 칼리오페가 잘 관리된 녹색 머리카락을 뱅뱅 꼬며 말했다.
“...아버지랑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
“하. 멍청하긴... 오라버니. 지금 그 말을 믿어?”
“지금 나에게 멍청하다고 한 것이냐!!”
“그래, 멍청하다고 했다. 이봐, 오라버니. 내가 단순히 한배에서 나왔다고 오라버니 편을 드는 것 같아?”
레이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케일이 뒷걸음질 친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느냐?”
“하아... 오라버니는 정말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해. 그랬으면 나한테도 잡아먹혔을 테니까.”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레이카를 보며 케일이 이를 으득 갈았다.
“헛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그럼 이유나 말해라!”
“내가 오라버니를 돕는 건 내가 단순히 칼리오페의 핏줄을 이은 여자라는 것과 차기 칼리오페의 가주의 여동생이라는 건 전혀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소리냐?”
“이것도 이해 못 했어? 간단히 말해서 내게 이득이 있으니까 오라버니의 편을 드는 거라고.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오라버니 편을 들겠어? 사실 능력으로만 보면 에르덴은커녕 유진에게도 밀리는 게 오라버니 아니야?”
“레이카!”
정곡을 찔린 케일이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었지만 레이카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시끄럽게... 그러면 이유를 말해봐. 아무리 오라버니가 멍청하다고 해도 아무 이유도 없이 유진의 말을 믿지는 않았을 테니까.”
“...크읏...유진이 나를 지지하기로 했다.”
“하아...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믿냐는 말이야. 내가 하나하나 전부 설명하지 않으면...”
“닥치고 끝까지 들어라! 어머님과 만남에서 지지를 표명하기로 했으니 문제없을 거란 말이다!”
“어머? 정말로? 오라버니가 아니라 어머니에도 말이지... 설마 진심인가?”
레이카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를 하자 케일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너는 내가 정말 병신으로 보이는가?”
“...아니었어?”
쾅─!
분을 참지 못한 케일이 창문을 후려치자 큰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어머, 무서워라.”
“...아무리 동생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주가 되고 나서는 입을 조심하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차기 가주님.”
비꼬듯이 레이카 인사를 하는 순간 케일은 주먹을 뻗을 뻔했지만, 손을 대는 순간 어머니의 호통이 떨어질 것을 알기에 간신히 참아냈다.
‘...내가 가주만 되면...’
가주만 되면 설령 어머니라 해도 내게 간섭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고 저 건방진 여동생의 버릇도 단단히 고쳐 놓을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엠마 그년도 말이지...’
엠마가 자신을 쓰레기처럼 보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엠마의 구릿빛 피부와 길게 늘어진 다리를 볼 때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성욕이 밀려왔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 아래에 깔려 울게 해줄 테니까.’
물론 엠마가 유진의 직속 하녀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유진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위는 없던 케일에게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다.
가주가 되는 순간 가주 자리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철저히 제거할 것이니까.
‘그래도... 유진 네놈은 내게 붙었으니 팔다리의 힘줄을 끊고 유배 보내는 정도로 봐주지.’
자신이 가주가 된 미래를 망상하며 케일이 입술을 핥았다.
***
“도련님. 모두 모였습니다.”
“...그래 들어가자.”
알프레도가 문을 열자 수많은 시선이 내게 박히며 이내 엄청난 고함이 울려 퍼졌다.
“오우! 도련님!! 오랜만이야!!!”
“도련님 보고 싶었습니다. 많이 크셨군요! 제가 꽃을 준비해왔습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도련님.”
시끄럽기는 해도 하나하나가 내게 호의가 가득 담긴 말과 눈빛이었다.
“그래, 고든 아저씨도 오랜만입니다... 어, 차르트도 꽃 고맙다. 안 가져와도 된다고 했는데….”
한 사람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온다.
내가 한참을 정신없이 돌아다니자.
쿵─
알프레도가 가볍게 발을 내리찍으며 강제적으로 이들을 침묵시켰다.
“...다들 오랜만에 도련님을 만나 반가운 것을 알겠지만 도련님이 말을 할 시간은 줘야지 않겠나.”
그때야 나는 한숨을 돌리며 알프레도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알프레도.”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알프레도가 만들어낸 침묵 속에서 앞으로 걸어 나온 나는 수십 개의 시선을 동시에 받았다.
시선은 호의적이기는 했지만, 다수의 시선은 그것만으로 힘을 가진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너희는 누구에게 충성하는가.”
그 순간 내게 호의적인 시선은 차갑게 변하며, 조금 전까지 큰 소리로 떠들어댔던 고든은 사자의 것을 닮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당연한 걸 묻는군. 인간도 마족도 아닌 우리를 거두어주신 그 순간부터 우리의 주인은 언제나 오직 키아라님 한 분뿐이었다.”
“...”
모두가 고든의 말에 동의하듯 침묵을 지켰다.
....단 한 사람 옆에 있던 엠마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저는 도련님이 제 주인님이에요.”
그 순간 혼혈들 사이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분위기 파악 좀 해라. 엠마야!”
“우우우! 자기만 도련님께 잘 보이겠다고!”
야유를 받은 엠마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양이 귀와 손톱을 내보였다.
“뭐, 뭐, 어쩌라고요! 왜 나한테 뭐라고 해요! 내가 섬길 주인을 내가 고르겠다는데! 불만 있으면 덤벼요!”
“오우, 그래! 개랑 고양이랑 누가 위인지 승부를 가려보자고!”
또다시 난장판이 시작되려고 하자 고든이 손을 들어 다른 이들을 제지했다.
“그만해라. 싸움하려던 나중에 나랑 해라.”
“아...아저씨랑은 좀...”
“그럼, 조용히 해라.”
“...그래서 고든, 하고 싶은 말은 그걸로 끝인가?”
“...하아...사실 도련님이 우리의 주인으로 자격이 있는지 시험이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거기까지 말한 고든이 엠마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엠마 때문에 흥이 깨졌네. 그래, 키아라님의 유언도 있으니까. 키아라님의 핏줄을 이은 정당한 후계자인 유진 칼리오페. 당신이 우리의 새 주인이다.”
“...그건 에다드 칼리오페와 비교해서도 그러한가.”
칼리오페 가문의 고용인에게 가주와 비교해도 내게 더 충성하냐는 말은 반역과 다름없다.
하지만 고든은 당연하다는 듯 사자의 어금니를 씨익 드러내며 웃었다.
“...증명해볼까?”
증명하라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혼혈들을 이끌고 반역을 일으킬 기세다.
혼혈들의 힘은 개개인의 힘은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강력했으니 이만한 숫자가 동시에 내부에서 반역을 일으킨다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큰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어머니가 아닌 내게 새롭게 맹세해라.”
“이봐, 도련님. 우리의 맹세는 가볍지 않아.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어?"
고든이 맹수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닐 것이다.
만일 내가 맹세를 저버린다면 지금 이렇게 웃고 떠들고 있는 이들은 당장 내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들이 필요했다.
고든의 눈을 바라보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쿵—
그 순간, 동시에 나를 향해 모든 이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유진 칼리오페. 그대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그대를 배신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대의 검이 되어 적을 벨 것이고, 방패가 되어 그대를 수호하겠다. 그대, 우리의 충성을 받아들이겠는가.”
“...나 유진 칼리오페가 맹세하겠다. 그대들이 지칠 때면 내 품 안에 쉬게 할 것이고 그대들의 굶주릴 때면 내 살과 피를 내어 먹게 하겠다. 나는 그대들의 충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내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다.”
“.....”
짧은 서약이 끝나고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침묵을 깨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원래 말투로 돌아올까요?”
“...크하하하하! 그러자고 말투가 낯간지러워서 혼났네. 도련님. 그럼 새 주인이 된 기념으로 떠들썩하게 마셔보자고! 미키! 부엌에서 술이랑 음식 가져와!”
“아이 씨, 왜 또 나야! 가려면 고든 아저씨가 가요!”
“하라면 해! 쥐새끼만 한 게!”
“아저씨. 그거 종족 차별 발언이에요!”
순식간에 떠들썩하게 변해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슬쩍 몸을 빼내자 알프레도와 엠마가 뒤를 따랐다.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명실상부 저희의 주인이 되셨군요.”
“저는 처음부터 도련님의 편이었어요!”
신기한 느낌이었다.
왠지 어머니의 유품을 이어받은 느낌도 들었고, 조교를 통해서가 아닌 순수하게 내게 충성을 바치는 세력이 생겼다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네.’
잠시 이 기묘한 감각을 만끽한 나는 엠마와 알프레도에게 말했다.
“...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시죠. 저희는 그저 따르겠습니다.”
“뭐든지 말만 하세요. 도련님.”
당연하다는 듯 따르는 둘을 보며 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그럼 명령하마. 내가 곧 가르시아와 만날 때 너희 둘은....”
명령을 듣는 둘의 눈빛이 점차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빛난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칼리오페 가문에 핀 곰팡이를 도려내는 것 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