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망나니, 악역 영애, 의붓 엄마 (2)
* * *
“고든 아저씨는 여전하시나?”
“고든이야 아직도 식당에서 날뛰는 중이죠. 어제도 새로운 요리를 개발한다고 식당을 폭발시켰습니다.”
“그 아저씨는 여전하네. 차르트는?”
“...차르트는 이 추운 겨울에 굳이 도련님께 꽃을 길러 가져다드린다고 땅에 곡괭이 질을 하더군요. 분명 꽃은 봄에 자란다고 말했는데 말이죠. 젊음이란 때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꽃은 괜찮으니 부디 몸조심하라고 전해줘.”
“전하겠지만 그가 말을 들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용인에 대한 정보는 기본적으로 머릿속에 들어있지만, 이 세계에서 그들이 얼마나 달라졌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식당으로 가는 내내 나는 알프레도에게 고용인들의 안부를 물으며 상황을 확인했다.
“다들 내가 없는 사이에도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네.”
“도련님이 이렇게 기억해주셔서 다들 기뻐할 겁니다 ”
“도착했어요! 도련님!”
그렇게 필요한 정보를 모두 확인할 때쯤 엠마가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칼리오페의 문양이 새겨진 문이 눈앞에 보였다.
‘아카조교사’에서는 3장 시작과 함께 펼쳐지는 화면이 바로 이 문이었다.
마침내 새로운 장이 시작된다는 것에 내가 약간 흥분하고 있자 알프레도가 문을 열어주었다.
덜컹—
문을 열자 칼리오페 가문의 일원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마주친 사람은 서열 3위 자리에 앉아 있는 가르시아 마이샤였다.
애를 두 명이나 낳은 유부녀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름 하나 없는 외모와 매력적으로 뻗은 각선미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가르시아를 향해 인사를 하자 그녀는 나를 슬쩍 보고는 흥미 없다는 듯 다시 차를 홀짝였다.
‘...그래도 적대감은 없네.’
가족으로서 친밀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권력에 민감한 만큼 차기 가주 자리에 관심 없어 보이는 나를 적대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이득이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돌리자 망나니 케일이 혀를 차는 게 보였다.
“쯧.”
이쪽은 대충 보기에도 적대감이 가득했다.
이유는 알고 있다.
케일은 떨어진 카르네아에 내가 입학했기 때문에 생긴 열등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주 자리를 노린다면 결국 내 지지가 필요할 터인데 이런 태도라니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흘린 내가 자리를 찾았다.
‘...내 자리는 먹혔네.’
서열대로라면 내가 5위의 자리에 앉았어야 했지만, 그 자리는 이미 레이카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동안 가문을 비웠다지만 여자에게도 밀리는 후계자가 바로 나였다.
하지만 의외로 옆에 앉자 레이카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유진, 오랜만이야. 카르네아에서 잘 지냈어?”
“...?”
내가 눈을 껌벅거렸다.
‘...레이카가 이런 성격이던가?’
기억하고 있던 설정과는 전혀 레이카의 다른 모습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설마 벌써 가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나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레이카 누님도 잘 지냈..”
“아, 생각해보니 별로 안 궁금하네. 말 안 해도 괜찮아.”
레이카는 내 말을 끊으며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밀어 올렸다.
‘역시 쌍년이네.’
기분은 더러웠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 레이카의 관계에 변화가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덜컹─
그때 다시 한번 문이 열리며 에르덴 칼리오페가 들어왔다.
에르덴의 아름다운 흑발에 날카로운 턱선은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한 외모였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에르덴의 온몸이 피투성이라는 점이었다.
원작에서도 에르덴이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별로 놀랍진 않았다.
‘어차피 마물의 피니까.’
하인들도 그런 에르덴의 모습이 익숙한 듯 수건으로 피를 닦아주었고 그사이 에르덴이 내게 말을 걸었다.
“...유진, 오랜만이구나.”
“예, 형님.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에르덴은 대답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덴, 옷차림이 그게 뭐죠?”
그러자 자신이 아닌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이 못마땅한지 가르시아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마물을 토벌하고 바로 오는 길이라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아버님을 뵙는 자리입니다. 최소한 피를 닦고 오는 게 정상이 아닌가요?”
“...아버지께서 조금 더럽더라고 늦지 말라 말하였기에...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하아, 설마 이렇게까지 피투성이가 될 줄은 몰랐겠죠. 그리고 굳이 직접 검을 들고 싸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병사들에게 인망을 얻고 싶습니까?”
가르시아가 비꼬듯이 말하자 지금까지 한 발짝 뒤에 물러난 대답을 하던 에르덴이 고개를 들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인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귀족으로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검을 휘두름으로써 한 명의 병사라도 더 구할 수 있다면 저는 몇 번이더라도 검을 휘두를 것입니다.”
에르덴과 가르시아가 서로 노려보고 있자 다시 한번 문이 열리고 알프레도가 보고했다.
“가주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말과 동시에 싸움을 멈추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
진한 침묵 속에서 에다드 칼리오페는 당당하면서도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연륜이 느껴지는 나이임에도 로레오스 이상으로 관리된 에다드의 육체를 보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반대인가.’
마법사인 로레오스가 기사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니 오히려 로레오스가 놀랍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들 앉지.”
에다드가 자연스럽게 가장 상석에 자리하며 말하자 나를 포함한 모두가 착석했다.
잠시 후, 고급스러운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에다드가 말했다.
“그래, 듣자 하니 유진. 제법 훌륭했다고 하더군.”
“...감사합니다. 아버지.”
뭐가 훌륭한진 몰라도 일단 감사하다고 했다.
그러자 에다드가 흡족해하며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내게 직접 서신을 보냈다. 네 덕에 목숨을 구했다고 칭찬이 자자하시더군. 황실에 손님으로 초대를 받았다는 말도 들었다.”
“...”
솔직히 놀랐다.
설마 황녀가 이렇게까지 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애초에 초대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어차피 상황을 봐서 황실에 초대되었다는 걸 슬쩍 밝힐 생각이었는데 황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말해 줌으로써 좀 더 확고한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운도 반복되면 실력이라고 불리지. 그리고 여름에는 마물을 직접 상대했다고 들었다. 비록 북부에 마물에 비하면 나약한 놈들이지만 마물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에다드의 입에서 나에 대한 칭찬이 계속 이어지자 마이샤의 핏줄을 이은 삼인방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래, 칼리오페에서는 상과 벌을 중요시한다. 황실의 핏줄을 구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거라.”
에다드의 발언에 가르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럴만도 한 것이 가주가 바라는 걸 말하라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요구하는 것을 무리라고 한다면 가주의 체면을 깎아 먹게 되니 말이다.
분명 웬만큼 미친 부탁이 아닌 것은 다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저는 가주님과의 독대를 원합니다.”
굳이 아버지가 아닌 가주라는 단어를 사용 한 이유는 독대이지만 공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탁
그 순간 가르시아가 소리를 낼 정도로 강하게 식기를 내려놓았고, 레이카와 케일 역시 잔뜩 분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해는 한다.
저들이 생각하기에는 내가 독대를 원하는 이유가 후계자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라 생각할 테니 말이다.
유일하게 반응이 없는 건 에르덴뿐이었지만 그는 내가 이 자리에 가주 자리를 달라고 했어도 저런 반응이겠지.
잠시 눈을 감고 턱을 쓰다듬던 에다드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독대라. 원한다면 가문의 창고에서 보물이라도 하나 가져갈 수 있을 정도의 공이다. 그런데 고작 독대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건가?”
“네.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하하하하하하! 좋다. 곧 자리를 마련하마.”
에다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사실 좋은 아버지라면 저렇게 좋아 할 일은 아니다.
내가 후계자 경쟁에 참여하면 자식들이 서로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으니 말이다.
무인으로서는 일류지만 아버지로서는 삼류라는 평가가 딱 맞는 모습이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도록 하지. 식사하도록.”
에다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에르덴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뭐 어쩌라고.’
나는 애써 시선을 무시하며 음식을 썰어 입에 넣었다.
만약 일이 꼬이면 가문에서 독이 들지 않은 음식을 먹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배를 채울 수 있을 때 잔뜩 채워놔야 했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으니까.’
이제는 물러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저 먹고 먹히는 싸움만이 남았을 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