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나비는 두 번 날개짓 한다 (4)
* * *
후우웅─!
갑작스러운 돌풍에 순간 몸의 균형을 잃었다.
‘...씨...발...!’
발판 끝에 선 나는 허리를 뒤로 크게 젖히며 팔을 마구 휘적거렸다.
“...허억...허억...”
잠시 후, 간신히 균형을 잡아낸 내가 쭈그려 앉은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진짜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터라 공포로 몸이 떨렸다.
‘...하마터면 보스 얼굴도 못 보고 떨어져 뒤질 뻔했네.’
—빠직
떨림을 조금 진정시키고 이동 할 생각이었지만 발밑에서 들리는 불길한 소리가 그런 여유는 없다는 걸 알려주었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연속된 염동력 사용으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죽지 않기 위해 발판을 올라가고 있자 히카트의 목소리 들렸다.
“입 닥쳐! 지금 누구와 연락을 하는 거냐...!”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아무래도 지금 같은 속도로는 제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발판을 연속해서 만들며 뛰어 올라갔다.
빠직─ 빠지직─
급하게 만든 발판이라 그런지 밟을 때마다 불길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내가 닥치라고 했지!”
뛰어오름과 동시에 부서지는 마지막 발판.
그 순간 히카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멈춰라.”
쿵—!
너무 긴장해서 목소리가 갈라졌고, 착지할 때 거리 조절을 실수해서 다리가 시큰거린다.
눈에 핏발이 솟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죽기 싫으면 물러나라.”
거짓이라고는 하나 없는 순수한 진심만을 담아서 히카트에게 말했다.
‘...제발 물러나!’
그러다 황녀가 폭주하면 너만 뒤지는 게 아니라 모두 다 같이 죽는 것이다.
진심이 통한 것일까 황녀가 아닌 나를 겨눈 히카트의 칼끝이 떨린다.
“...뭐냐 넌! 어디서 나타난 거냐!”
숨 한 번 내쉴 체력이 아쉬운 지금 저런 소모적인 질문에 답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지금 묻고 있잖아!”
히카트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맞춰 나는 오른발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화아아악!
동시에 얼마 남지 않은 정신력을 전부 쏟아부어 바닥에 있는 흙먼지를 솟구치게 했다.
먼지에 눈을 당한 히카트가 멈칫한 틈을 타 ‘조교사’의 고유능력을 발동한다.
[염동력 (Rank D)]
[바람─칼날 (하급 바람 원소 마법)] [‘루시아’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67.4%]
[베어라─바람—칼날 (중급 바람 원소 마법)] [‘비비안’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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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동력 (Rank D)]
[바람─칼날 (하급 바람 원소 마법)] [‘루시아’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67.4%]
[꿰뚫어라─대지—창 (중급 대지 원소 마법)] [‘비비안’에게서 조교사로 생성됨, 위력 57%]
하급 대지 마법도 못 쓰는 내가 갑자기 중급 마법을 쓰는 걸 보고 황녀가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몇 배는 나았다.
「꿰뚫어라─대지─창」
영창을 내뱉는 순간 몸에 있던 마력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며 원뿔 모양의 창이 히카트를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앙!
아직 시야를 되찾지 못했는지 대지의 창은 히카스의 가슴팍에 정통으로 들어갔다.
물론 반지가 있는 이상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움직임을 막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리아나를 향해 달려간 내가 있는 힘껏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황녀 전하!”
잡아라.
제발 잡아라.
이렇게 부탁할 테니 제발 잡아라.
“...후훗♬”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리아나는 나를 보며 살며시 웃더니 총총 달려와 손을 마주 잡았다.
‘잡았다!’
나는 그런 황녀를 납치하듯 팔로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황녀가 내 품 안에서 쿡쿡 웃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가 아니라 리아나라고 불러달라니까?”
“이 와중에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런 상황에도 저런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황녀에게 있어 이 정도 사건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끝낼 수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그럴 만도 하지...’
황녀가 직접 손을 쓰지 않더라도 그녀의 그림자에 숨어있는 ‘파볼리에 멜피사’만 나타나도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그 대신 황녀를 제외한 여기 있는 모두가 죽겠지만 말이다...
그때 황녀가 마치 연극을 하듯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어머, 이 와중이니까 더욱 그러는 거지. 지금 상황을 봐. 마치 악당에게 납치된 공주님을 구하는 용사님 같지 않아?”
“....”
나로서는 공주를 구하러 온 용사보다는 폭탄에 불이 붙기 전에 꺼내온 느낌이었다.
“...으아아아! 이딴 게 통할 거 같으냐!”
히카트의 반지에서 불빛이 피오르고 , 동시에 대지의 창을 마구 베어내기 시작했다.
말했다시피 히카트는 2학년 수석 정도 되면 상대할 만했다.
...문제는 내 실력이 2학년 수석은커녕 1반에 들어갈 수 있을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상성도 최악이고...’
히카트가 가진 반지의 특성상 일정 수준 이하의 공격은 전부 무효가 된다.
그것을 깨기 위해서는 반지를 사용할 마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시간을 질질 끌며 상대하거나 반대로 강력한 한 방으로 끝내는 것인데….
내게는 시간을 끌 만한 마력도, 강력한 한 방도 존재하지 않았다.
즉, 정석대로라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 정석대로라면 말이다.
나는 히카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응, 유진아.”
“좀 도와주시지요?”
“...뭐야? 지금 왕자님이 공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거야?”
황녀가 갑작스럽게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물었다.
“...네, 시야가 가려진 지금이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흐으음♪”
보고 있지 않아도 등 뒤에서 황녀가 웃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내가 굳이 익숙한 바람 계열의 마법을 놔두고 대지 계열의 마법을 사용한 이유는 히카트의 움직임을 봉인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 다른 학생들과 황녀 사이에 장애물을 세워 시야를 가리기 위한 게 컸다.
이 상태라면 리아나가 감춰놓았던 힘을 보여주더라도 나 혼자만 알고 있을 테니까.
물론 내 목숨은 위험하겠지만...
부디 황녀가 내게 가진 호기심과 호의가 내 목숨보다 무겁길 바랄 뿐이다.
“평범하게 도와달라는 건 아닌 거 같고... 유진,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네. 그렇습니다.”
황녀의 질문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지옥 입구에서 염라대왕의 판결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후후훗♪ 역시 재미있어. 어떻게 알았는지는 궁금하지만...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내가 주먹을 꽉 쥐며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일단은 살아남은 모양이다.
“...나를...나를 무시하지마라!”
무시하지 말라며 히카트가 소리치지만, 그에게 신경을 쏟을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론은 나오셨습니까.”
“응! 유진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도와줘야 하는 이유가 없네?”
“저와 황녀 전하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어떤가요?”
“하핫♪ 지금 농담하는 거지?”
역시 쥐뿔도 안 먹힌다.
하긴 지금 내 목숨이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카드만큼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와주신다면 황녀 전하의 초대를 받아드리겠습....”
“어? 정말!”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내 눈앞에 다가온 리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예...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니까...!”
“으아아아아!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오오!”
소리를 지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히카트가 검을 치켜들었다.
“후훗. 알았어. 대신 약속 꼭 지켜야 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아나는 히카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을 들었다.
「깨지고─부셔져라」
리아나의 영창이 울려 퍼진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소리가 히카트가 우뚝 멈춰선다.
....그리고 멈춰선 자세 그대로 발끝부터 먼지가 되어 사라져간다.
땡그랑─
잠시 후, 히카트가 이 자리에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건 그가 끼고 있던 반지뿐이었다.
“어머? 반지가 남았네.”
“...이런 상황에서 말씀드리기 참으로 송구하지만 가능하다면 그 반지를 제게 양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평소 내 성격이라면 황녀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만 히카트의 반지는 본래 이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고작 말 한마디로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무조건 얻는 게 좋았다.
물론 반지로 신체를 강화하는 데는 마력을 상당히 잡아먹는 터라 마력량이 적은 나로서는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마력량에 비해 신체 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비비안에게 전해주면 상당히 유용 할 것이다.
“흐음... 대가로 뭘 줄 건데?”
“...돈을..”
“돈은 말고. 돈은 나도 많아.”
...아무렴 제국의 황녀인데 당연히 많을 것이다.
이 상황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는 황녀를 보며 내가 한숨 내쉬었다.
“...황실에서 나흘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에?...에에?!”
내 대답에 황녀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황실에서 나흘보다 적게 있을 생각이었어?”
사실 마음 같아서는 도착하자마자 떠나고 싶었지만 들어가고 나가는데 공식적인 절차만 걸쳐도 이틀은 걸린다.
팔짱을 낀 황녀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한 달이야. 한 달 있겠다고 하면 반지 넘게 줄게.”
“...좀 더 양보하겠습니다. 오 일입니다.”
“으으... 치사하게... 진짜 그럼 이주는? 이거 진짜 많이 양보 한 거 알지?”
“...마지막입니다. 일주일 있겠습니다. 이걸로도 안되면 깔끔하게 반지는 포기하겠습니다.”
진심이었다.
반지를 손에 넣지 못하는 건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아무리 시간을 최대한 짜내도 일주일이 한계다.
이 이상 시간을 투자한다면 3장의 메인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는 게 불가능했다.
“으으으.... 아무래도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알았어. 일주일.”
황녀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반지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내가 인사를 전하며 물러나려 하자 리아나가 셔츠를 잡아당겨 허리를 숙이게 하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황녀 전하가 아니라 리아나라고.”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황녀 전하.”
“흐음... 끝까지 그렇게 부르네. 뭐 좋아.”
풀려난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자 황녀는 자신의 검지를 들어 붉은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언젠가 꼭 리아나라고 부르게 만들 테니까♪”
새벽을 몰아낼 것 같은 화사한 미소를 짓는 제국의 태양은...
본성을 알고 있는 나조차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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