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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55화 (55/354)

〈 55화 〉 메스가키 + 조교 = M's가키 (4)

* * *

내가 기숙사 침대에 앉아서 얼굴을 부여잡았다.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아니, 생각대로 되기는 했다.

비비안이 이길 거라고는 예상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이기는 건 아니었다.

내가 바라던 건 비비안이 결투를 통해 소심한 성격을 극복하고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이었지 압도적으로 상대방을 날려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유진님... 저... 자,자, 잘했나요?”

지금의 비비안을 좀 봐라.

정신적으로는 성장은커녕 후퇴했고 어떤 놈한테 ‘좌표지정’이나 ‘감각동화’같은 꼼수를 배웠는지 마법 실력만 늘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복잡한 내 마음은 전혀 모른 채 비비안이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다가왔다.

사실 비비안의 입장에서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시킨 대로 이겼을 뿐이니까.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얄미운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내가 잠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자, 비비안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몸을 벌벌 떨면서 뒤로 물러나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유, 유진님께 칭찬을 바라는 건 아니었어요...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오늘따라 유독 비비안의 자존감이 바닥을 기었다.

이따 저녁에 있을 비앙카와의 만남 때문에 정신적으로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태어나서죄송합니다.다시는건방지게질문하지않을게요.죄송합니다.”

비비안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더니 눈동자에서 빛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이대로 가다가는 애써 막아놓은 ‘흑화 각성’이 다시 시작될 것 같았다.

‘조금만 참자...’

내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늘만 지나고 나면 비비안의 저런 불안한 정신 상태도 많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아니, 잘했다.”

이 이상 비비안의 멘탈을 갉아먹을 수는 없으니 일단 급한 대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흐윽....에...? 아...가,감사합니다..유진님...”

꼬리가 달려있었다면 마구 흔들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행복한 미소를 짓는 비비안.

...아직 눈물이 흐르는 중인데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 급격하게 바뀌어도 되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비비안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 루시아가 기숙사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

루시아의 모습을 보자마자 비비안이 호다닥 정자세로 원위치한다.

마치 누워서 티비를 보던 이등병의 눈앞에 선임이 나타났을 때 같은 모습이었다.

“...비비안, 주인님께 칭찬받고 있었나 봐요?”

루시아가 세상에서 가장 착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그게...”

“...비비안이 오늘 학년 대전에서 2학년을 이겨서 칭찬하고 있었다.”

“어머, 잘했네요. 비비안... 그런데 주인님. 루시아도 오늘 이겼답니다.”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 앉아 살며시 머리를 기대왔다.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것 같기에 쓰다듬자 루시아가 고양이처럼 갸릉대었다.

“흐음..음..흐아앙..”

그렇게 적당히 쓰다듬고 손을 떼려고 하자...

“...그러고 보니 제 상대는 2학년 수석이었어요. 주인님.”

...좀 더 많이 쓰다듬었다.

“후아아....감사합니다. 주인님.”

내게 기대에 기지개를 켜는 루시아를 쓰다듬고 있자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뭔가가...다르다.’

분명 내가 주인이다.

주도권은 내게 있고 내가 칭찬하는 쪽인데….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솟아나는 걸 느낄 때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오늘 대전 때 비앙카 베아트리스를 봤어요.”

“힉...”

비앙카의 이름을 듣는 순간 비비안이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

이름만 들어도 비명을 지르는데 과연 괜찮을지 걱정되었다.

“...어땠지?”

“음... 엄청 사납던데요. 거의 짐승이었어요.”

루시아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상대가 항복하지 못하게 목 부위를 타격하면서도 교수님이 말리기에는 모호한 선을 지키며 끝까지 괴롭혔어요.”

역시 비앙카 베아트리스.

‘아카조교사’의 대표적 인성쓰레기 다운 모습이었다.

절대 내가 처맞은 것에 대한 원한이 담긴 평가가 아니다.

“그리고 승부가 나서도 능욕을 하는데... 그게 어떻게 하냐면...”

잠시 목을 가다듬은 루시아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바보~♥ 허접~♥ 쓰레기~♥ 약해 빠졌어~♥...이런 느낌이었어요. 주인님.”

나한테는 이런 취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루시아가 말해서 그런지 귓가에 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아랫도리가 움찔거린다.

“어머... 주인님... 주인님이 원하시다면... 언제라도...어느 때라도 루시아에게 명령을 내려주세요...♥”

...마치 작은 악마가 유혹하듯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가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어 왔다.

***

겨울이 온 것을 알리듯 창밖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후우...”

밤늦은 시간까지 단련장에서 홀로 수행하던 비앙카 베아트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땀을 닦아 냈다.

평소에 같이 단련장을 사용하던 학생들조차 오늘만큼은 학년 대전이 끝난 기념으로 휴식을 하거나 놀러 갔지만, 비앙카는 단련을 거르지 않았다.

“...쯧.”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며 비앙카가 혀를 찼다.

이토록 단련해도 재능이란 벽이 앞을 가로막는 걸 느꼈다.

2학년에서 비앙카의 순위는 7위.

하지만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운다면 2위 하고도 겨루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위는 달랐다.

비앙카가 생각하는 1위의 재능은 도저히 노력으로 극복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재능의 축복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비앙카가 생각하는 1위였다.

....하지만 그 생각조차 오늘 무너지고 말았다.

‘루시아 우르엘라.’

그녀야말로 진정한 보석이었다.

보석이라 생각했던 1위조차 루시아와 비교하면 한낱 돌멩이에 불과했다.

교수진의 평가답게 1학년 주제 이미 2학년을 초월한 듯한 마법 실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비앙카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전장에서 수십 년은 구른 듯한 실전 감각이었다.

천재

오늘 본 루시아의 모습은 그렇게밖에 평가할 수 없었다.

‘짜증나.’

비앙카가 이를 으득 갈았다.

이토록 간절하게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1위를 가볍게 짓밟는 루시아의 재능에 질투했고, 그것을 질투하는 자신에 더욱 분노했다.

그렇게 속에서 쌓여가는 분노는 어떻게 풀어낼지 모르고 점점 커져만 갈 때.

덜컹─

단련장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

“안녕하세요. 선배님.”

내가 쾌활하게 웃으며 비앙카에게 인사를 건넸다.

“넌... 지난번에...”

“오! 기억하고 계시네요.”

잠시 눈으로 나를 훑던 비앙카가 입을 열었다.

“...흥,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음... 제가 선배님께 볼일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은 저보다 먼저 만나볼 사람이 있어서.”

나는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비비안의 등을 떠밀었다.

“히익...흑...흐윽...”

“...비비안?”

“흐윽...흑...어, 언니...”

비비안을 본 비앙카의 눈이 잠깐 크게 떠지더니 이내 날카롭게 바뀐다.

“흐음... 도대체 언제쯤 나를 찾아올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많이 늦었군요.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비비안.”

비앙카에는 저것이 명령이라는 자각조차 없을 것이다.

비앙카에게는 비비안은 말을 하면 듣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내가 굳어 있는 비비안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자 비비안이 톤이 엇나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히끅..흑...시,시,싫어요.”

“....?”

비비안의 거절하자 비앙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비비안이 말대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분노로 일그러졌다.

“비비안...지금 누구에게 말대꾸하는 건지 알고 있어요?”

비앙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비비안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내 손을 꼭 붙잡는다.

“..흐끅..위..위헙해도...유..유진님이 절 지켜주실거에요.”

“유진...?”

내 이름을 듣는 순간 비앙카의 눈이 찡그려졌다.

가문의 부흥을 꿈꾸는 베아트리스가의 장녀답게 주요 가문에 대해선 잘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말했네요. 선배님. 유진 칼리오페라고 합니다.”

“...그래서 칼리오페 가문님의 도련님이 무슨 일로?”

비앙카의 말투가 바뀌었다.

아무리 선배라고는 하지만 제국의 실권을 잡고 있는 대가문의 일원에게는 함부로 말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지난번에는 연습이었으니 이번엔 제대로 선배님이랑 붙어보려고요.”

“하, 미안하지만 나는 도련님 놀이에 놀아줄 시간은 없습니다. 지난번에 한 번 붙은 걸로 만족하시죠... 그리고 비비안. 마지막 경고야. 이쪽으로 오세요.”

“히익...흐윽...윽...”

십수 년을 쌓아온 공포심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비앙카의 명령에 비비안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려고 하자...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요. ‘이건’ 제 것이라서요.”

내가 비비안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저 반 친구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친밀해보이는 모습.

거기에 도저히 흘려넘기기 어려운 말까지 더해지자 비앙카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지금 그게 무슨...”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이건 제 소유라고요.”

내가 상쾌하게 웃으며 비비안의 거대한 마력주머니를 주물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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