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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41화 (41/354)

〈 41화 〉 비비안 조교 일지 (6)

* * *

일렁이는 촛불들이 가득한 방에서 흰 가면을 쓴 남자가 한쪽 팔을 넘기고 다리를 꼰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왜 안 와?’

열심히 분위기를 잡아놨는데 루시아가 늦는다.

살다 보면 사람이 좀 늦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루시아는 나에 관해서는 절대 늦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자세를 바꾸는 틈에 들어올까 봐 가만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더니 슬슬 다리가 저렸다.

‘...무슨 일이 생겼네.’

이젠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순찰하던 경비원에게 들켰나? 아니면 하필 물건을 놓고 온 다른 학생이 있었나? 그것도 아니면...

머릿속에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가 여럿 떠올랐다.

물론 게임 플레이 중에 들킨 적은 없다.

이벤트도 없고 사람도 없는 날을 고르고 골라서 정한 날이 오늘이니까.

하지만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 세계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넘쳐난다는 걸.

내가 알고 있는 메인 스토리는 그렇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정도일 뿐 확정된 게 아니다.

‘시발...’

결론을 내린 나는 의자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루시아는 명령 내린 건 잘 들어도 임기응변 능력은 부족하다.

정말로 누군가 만났다면 내가 가서 중재하지 않으면 큰일이 터질 수도 있다.

“후우, 후우.”

행여나 불이 날까 애써 붙여놨던 촛불을 전부 끄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

“하아...하아...”

힘들었다.

괜히 무게 잡는다고 검은 정장 같은 걸 입어서 달리기 불편했다.

“...싫...어...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위층에서 비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내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자.

─짜악

루시아가 비비안의 뺨을 때렸다.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스럽게도 루시아와 비비안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

일단 누군가에게 들킨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코너에 몸을 숨긴 채 귀를 기울였다.

“...못..하겠어요..”

─짜악

“...죄, 죄송해요..”

─짜악

“죄송해요....”

─짜악

정말 가차 없이 뺨을 후려갈기는 루시아.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가 맞는 것도 아닌데 괜히 깜짝 놀란다.

‘음...’

호감도를 쌓기 전 1회차에서 루시아는 저런 모습을 자주 보였다.

공평하지만 냉정하고 자신의 사람이 아닌 것에게는 한없이 차가운 여자.

황녀를 순수한 미친년이라 표현한다면 1회차의 루시아는 소시오패스가 아니었을까.

...만일 내가 1회차의 세계에서 전생했다면 분명 루시아는 피해 다녔을 것이다.

“착각하지 마세요. 단순히 가문을 망하게 하겠다는 게 아니니까요. 그건 시작에 불과해요. 모든 것을 밟을 것입니다. 그렇게 밟고 밟아서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 할 수 있도록 해줄게요. 그렇다고 죽음으로 도망칠 생각도 하지 마세요. 당신이 죽으면 다음은 당신의 언니를, 그다음에는 아버지를, 그다음에는 사촌을 이렇게 베아트리스의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 짓을 반복할 테니까요.”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루시아가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저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듣고 있던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루시아에게 어느 정도 처벌권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조교에 있어서 처벌을 빼놓을 수 없으니까.

그래도 지금의 루시아는 이상할 정도로 비비안에게 적대적이었다.

‘이게 처음이 아니지...’

루시아의 공격성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비비안뿐만이 아니라 황녀에게서도 저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

단순한 질투라고 한다면 해결될 문제지만 질투라고 하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루시아를 질투하지 않게 조교 했다는 그런 이유가 아니다.

별별 상황이 다 터지는데 질투를 하지 말라는 조교가 풀릴 수도 있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

하지만 황녀에게 질투한다기에는 나는 황녀를 피해 다니고 있었고, 오히려 대놓고 친하게 지내는 유리아나 새로운 공략 대상인 양호 마망에게는 전혀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기준이 뭐야?’

루시아가 이상할 정도로 적대감을 보내는 인간의 공통점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려 하자.

“네, 네에...감사합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비비안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어...? 지금 저 대사가 왜 나와?’

혹시나 잘 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슬쩍 내밀자 비비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좆됐다...’

진짜 좆됐다.

저건 마녀 비비안 각성 대사였다.

정확히는 이제 각성에 들어가려는 순간의 대사고 아직은 각성한 것은 아니지만, 곧 폭주할 것은 확실했다.

‘시발...’

여기서 비비안을 잃은 순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후우...심호흡하고.’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서 비비안에게 정신 차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침대 위의 왕자는 그것이 최선의 수라 말하지 않았다.

지금 허둥지둥 달려나가 봐야 무게감만 떨어질 뿐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며, 우아하면서도 진중한 무게를 담아 한 발자국 내디딘다.

‘가자.’

─또각

발소리가 복도 가득 울려 퍼지며 목숨을 건 비비안 공략이 시작되었다.

***

“주...주인님...”

발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루시아님이 깜짝 놀라며 가면을 쓴 남자에게 달려갔다.

“주...주인님이 어째서 여기에..”

“...너에게는 실망했다. 루시아.”

“...읏. 죄..죄송합니다. 주인님...”

언제나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루시아님이 남자의 앞에서 몸을 벌벌 떨며 머리를 숙인다.

“완벽히 조교가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

“그..그게..”

“쯧, 변명은 듣기 싫다. 이 일에 대한 처벌은 나중에 하도록 하마. 물러나 있어라.”

“네...”

입술을 꽉 깨문 루시아님이 옆으로 물러나고 가면의 남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또각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남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무언가 기시감이 들었다.

─또각

익숙한 걸음걸이.

─또각

눈에 익은 체형.

─또각

달콤한 향기.

─또각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믿을 수 없지만, 이 모든 정보가 하나의 결론을 끌어내고 있었다.

“...유...진..?”

그 순간 남자가 걸음을 뚝 멈추더니 가면을 벗었다.

“어...어떻게...너가...”

숨이 멈추는 줄 알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유진이 나오리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비비안 베아트리스.”

그러자 유진이 싸늘한 얼굴은 한 채 지금까지 본 적 없던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그것만으로 간신히 기워놓았던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루시아가 찾아냈다고 한 새로운 암컷이 너였을 줄이야.”

유진의 손끝이 내 입술에 닿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비비안 너의 존재 가치는 뭐지?”

목을 스치며 내려온 손이 쇄골을 쓰다듬었다.

“저..저는...”

본능적으로 존댓말이 흘러나온다.

나의 존재 가치....

그런 것이 있던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라는 존재는 지금까지 언니의 대용품에 불과했다.

“그래, 너는 네 언니에 비하면 무엇 하나 잘난 게 없지. 그렇다면 너는 언니의 대용품인가?”

마음을 읽힌 듯 이어지는 유진의 말.

툭, 투툭

동시에 유진의 손이 거칠게 단추를 뜯어내더니 가슴에 손이 닿았다.

“...흐읏...”

루시아님과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크고 뜨거운 남성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유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고작 이 정도로 교성을 흘리다니 몸만큼은 제대로 조교가 되어있구나... 아,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자위를 했다지.”

피가 차갑게 식는다.

지금까지 루시아님이 그것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기에 듣지 못한 줄 알고 있었는데 이미 유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아, 비비안. 나는 너를 ‘친구’로서 대했는데 너는 나를 이렇게 보고 있었을 줄이야... 실망이 크군.”

“..흑...흐윽...죄, 죄송합니다.”

“그래? 무엇이 죄송하지?”

유진이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음란한 몸은 그것만으로도 흥분하고 만다.

“...흐윽...유진님을 떠올리며...흑..자..자위를 해서 죄송합니다.”

“똑바로 말해라. 어디서 어떻게 자위를 했지?”

“강..강의실에서.. 유..유진님의...책상 위에 앉아서..유진님에게 강간 당하는는 상상을 하면서...자위..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을 생각하며 자위했다고 고백하는 수치심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 성스러운 강의실에서 그것도 너를 친구라 여겼던 내 책상 위에서 자위했단 말이지...”

“..흑...흐윽..네에.”

잠시 턱을 매만지던 유진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비비안. 너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변태로구나.”

유진의 작은 비난 한 번에 마음이 무너져내린다.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절망감.

나는 그 자리에서 주어 앉아 눈물을 쏟아내었다.

“..흐윽..흐아윽...죄...죄송합니다..흐윽...저..같은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죽자.

죽어버리자.

유진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아버렸다.

나는 세계를 원망한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이런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가 누구를 원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죽음을 결심한 순간 유진님이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다. 비비안.”

그것은 독이었다.

너무나 달콤한 독.

“비비안. 네가 아무리 쓸모없을지라도, 네가 아무리 음란할지라도, 네가 아무리 죄를 저질러도 나만은 너를 아껴주마.”

절망의 끝에서 던져진 구원의 손길은 감미로워서.

“흐윽...흐아윽...흐윽..흐아앙..”

완전히 무너진 줄 알았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무서웠다.

이 달콤함이.

더는 믿고 싶지 않았다.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유진님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렸다.

모든 것에 부정당한 내가 세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였으니까.

“...그 대신 비비안. 너를 내게 다오.”

이제 유진님에게 버림받으면 완전히 망가질 것이라는 건 알고 있다.

상관없었다.

유진님에게 버림받는다면 그 순간 삶을 끝낼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흐윽...네...네..유진님..바, 바칠게요..”

그리고 유진님의 발에 입을 맞추며 나는 맹세했다.

“제..모든 것을 당신께 바칠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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