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루시아는 웃고 있다 (3)
* * *
놀라서 몸이 굳었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정신 차려!’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순 없다.
'침대 위의 왕자'를 사용해 순식간에 표정을 정리하고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인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왜 맞서 싸우지 않냐고 욕하지 마라.
지금 황녀와는 싸움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건 자연재해에 인간이 맞서지 않고 몸을 숙이는 것과 같다.
그저 최대한 머리를 조아려 황녀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카조교사’가 발매되고 내가 이 세계에 끌려오기 전까지 커뮤니티에서 주기적으로 도는 떡밥이 있었다.
【왜? 아카조교사 황녀는 공략 불가임?? 외모를 이렇게 뽑아놓고 공략 불가 맞냐??】
황녀가 공략 불가인 이유가 제작사가 나중에 DLC로 팔 거다, 제작자 자캐라 그런 거다 등 여러 떡밥이 무수히 많았지만….
엔딩을 본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미친년.’
황녀의 모든 게 전부 연기다.
부드러운 말투도 상냥한 눈빛도 자애로운 행동도 철저하게 계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싸이코패스?
그런 것도 아니다.
리아나에게는 감정이 존재한다.
슬픔도 느끼고 기뻐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도 한다.
하지만….
황녀에게는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킬 광기가 있었다.
황녀의 판단 기준은 하나다.
재미있을까.
재미있지 않을까.
그녀의 사고방식은 인간보다는 고양이에 가깝다.
생쥐를 찢어 죽이는 것이나, 실타래를 가지고 노는 것이나 고양이에게는 둘 다 놀이에 불과하다. 단지 인간의 눈에 생쥐를 찢어 죽이는 건 징그럽고, 실타래를 가지고 노는 건 귀여울 뿐이다.
황녀도 마찬가지다.
본성을 숨기는 게 재미있으니까 사람들에게 상냥히 대한다. 반대로 제국을 내전으로 이끄는게 재미있으니까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다.
이 모든 게 황녀에게는 단순한 놀이에 불과하다.
이런 존재를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재앙’
이 세계에서 황녀는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면 안 돼요.”
틀렸나.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황녀를 인적 드문 장소에서 만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해당한 게 몇 번이던가.
‘어머, 정말 살아있었네요?’
저게 나를 죽이고 하는 대사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내가 감독에게 5700자를 날린 이유의 절반은 저 황녀의 탓이라 보면 된다.
너무 부조리하게 죽었다.
심지어 황가의 혈족 마법의 설정 탓인지 황녀에게 죽으면 세이브도 날아간다.
게임에서조차 세이브가 사라졌는데 과연 여기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조차 안 된다.
“카르네아 아카데미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요?”
황녀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내 몸에 손을 대는 것도 소름이 끼쳤지만, 감히 내색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모두가 평등하잖아요♪그러니 황녀전하가 아니라 리아나라고 불러주세요.”
황녀의 말대로 키르네아 아카데미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신분과 관계없이 학생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평대를 해야 하니까.
그러나 실상은 어느 정도 급이 맞는 학생들이나 그런다는 거다.
아카데미 생활을 짧고 인생은 길다.
아카데미에서 말 좀 편하게 하겠다고 대귀족에게 찍히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을 거다.
물론 나는 역시 황가 다음가는 대귀족의 자제인 만큼 어느 정도 급은 맞는다고 볼 수 있지만….
“어찌 감히 황녀 전하께 그리하겠습니까.”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황녀하고는 가능하면 엔딩까지 접점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흐음. 고집이 세네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휙 돌린다. 영락없이 토라진 여자애의 얼굴이다.
“...황녀 전하는 여기에 어떤 일로.”
“어머,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말인걸요?”
“그게 무슨….”
“유진은 여기를 어떻게 왔어요?”
시발, 황녀가 내 이름을 떠올렸다.
황녀가 흥미 없는 사람들은 이름조차 기억깊숙한 곳에 넣어놓는다는 걸 생각했을 때 이건 좋지 않다.
황녀가 내게 흥미를 느꼈다는 증거니까.
“우연입니다. 길을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흐음, 우연이요?”
“그렇습니다….”
황녀의 생글거리는 얼굴이 왠지 싸하다.
“우연이라….”
작게 중얼거리며 황녀가 다시 내 코앞까지 걸어왔다.
웃으며 다가오는 황녀를 보자 숨이 턱턱 막혔다.
저벅, 저벅.
황녀는 나를 지나쳐 내가 등을 기대고 쉬던 나무 앞에 섰다.
“...우연히 길을 헤매다. 우연히 여기까지 왔단 말이죠? 우연히도 땀을 그렇게 흘리면서? 저도 우연히 유진의 반지의 번호를 봤는데 계산해보면 거의 최단 시간에 도착한 거 같은데 말이죠?”
거기까지 말한 황녀가 잘 살펴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감춰져 있는 나무구멍에 손을 넣더니....
황금색 구슬을 꺼낸다.
‘시발? 이게 거기서 왜 나와?’
진짜 욕설이 튀어나 올 뻔했다.
구슬이 70개가 아니라 73개인 이유는 백색 구슬 70개를 제외하고 금색, 은색, 동색의 구슬이 각각 한 개씩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플레이하면서 은색 구슬까지는 발견해도 금색 구슬은 단 한 번도 찾아낸 적이 없었는데...
이게 하필 여기서 나오는 건가.
“심지어 그 우연이란 게 금색 구슬이 있는 장소마저 찾아주었네요♪”
황녀가 지금까지 중 가장 환하게 웃는다.
죽는다.
나는 여기서 죽는다.
거짓말을 했다고 오해를 했든 아니면 그저 죽이고 싶어서 죽이든 나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죽음을 확신하며 등 뒤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자.
“유진은 정말 운이 좋으신 거 같아요!”
황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꼬옥 감싸며 금색 구슬을 넘겨주었다.
“전하…?”
“자요, 저보다 먼저 왔잖아요? 이건 유진 거예요.”
“...괜찮습니다. 저는 이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진짜다.
정말 몰랐다.
“흐음, 그러면 정.말.로 유진은 운이 좋은 사람이네요.”
황녀가 내 눈을 뚫어지라 바라본다.
눈을 피하는 순간 좆될 것 같은 분위기에 나도 ‘침대 위의 왕자’를 최대한 끌어올려 마주 본다.
잠시 눈싸움을 하던 황녀가 내 손에 올려진 구슬을 다시 가져갔다.
“알았어요. 그럼 이렇게 하죠. 유진은 필요 없다고 하고 저는 별로 가지고 싶지 않으니...”
「깨져라」
마법 한 번에 황금색 구슬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아무도 못 가지게 하는 거로요.”
...이제야 알겠다.
이래서 금색 구슬이 없던 것이었다.
황녀가 언제나 제일 먼저 도착해서 구슬을 부숴버리니 찾으래야 찾을 수가 있는가.
“전하가 찾은 것이니 전하의 뜻대로 하시지요.”
“응, 그래요.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할게요.”
환하게 웃는 황녀. 본성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한순간에 반해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유진 칼리오페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말이에요.”
“...황녀 전하께서 이름을 기억해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특별히 내 이름에 힘을 줘서 말한 것은 기분 탓일까.
“흥, 리아나라고 말했는데. 됐어요. 저는 조금 쉬고 있을 테니 이제 가보셔도 돼요.”
“예, 전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녀의 허가가 내려지자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황녀에게서 멀어진다.
걸어가는 내내 뒤통수가 간질거렸지만 어떻게든 돌아보지 않고 끝났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정면만을 보고 걸어가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살았다...”
그 미친 황녀에게서 살아남았다.
****
떠나가는 유진의 뒷모습을 보며 리아나가 작게 웃었다.
‘재미있네요.’
가장 희미하게 느껴지는 구슬의 마력을 따라서 이곳까지 오니 재미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나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웠던 건 남자가 나를 보고 느낀 감정이었다.
적의, 공포, 그리고 혐오.
‘어떻게 알았죠?’
지금까지 본성을 내보고이고도 살아남은 건 단 한 사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쭉 나를 모셔오던 파볼리에 멜피사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 남자는 자신을 두려워하는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남자가 잠시 내비친 감정은 잘못 봤다고 생각할 정도로 빠르게 갈무리 되어 사라졌다.
감정이 사라진 뒤 나타난 건 어디에나 뻔하게 있을 법한 귀족.
아니, 뻔하지는 않다. 대다수 귀족은 나를 이용하려 하거나 나에게 존경심을 표하거나 대체로 그런 쪽이니까.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그저 황가에 예를 표한다는 것만의 집중한 느낌이다.
...마치 이렇게 행동하는 게 지금 상황에 어울린다는 듯이.
그때야 나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유진 칼리오페」
10년 전, 아직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제국을 지배하는 네 개의 가문들이 한 곳에 모였다.
황가 루멘하르크
북부의 칼리오페
서부의 우르엘라
남부의 아멜리아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같은 해에 태어난 4명의 아이를 축복하기 위한 파티였다.
그곳에서 보았던 유진 칼리오페는 어미를 잃어 슬퍼하던 꼬맹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기억에서 바로 지웠다.
다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흥미가 갔던 건 루시아 우르엘라 정도일까? 그녀의 재능과 외모는 나조차 눈길이 갔으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유진 칼리오페’는 누구란 말인가?
인간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보였던 유진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유진 칼리오페’가 아니었다.
즉, 10년 전 유진 칼리오페는 나와 같이 본성을 감추고 있었다는 거다.
‘왜?’
간단하다.
유진 칼리오페는 그때부터 내 본성을 알고 있던 거다.
그리고 내 눈을 피하고자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본성을 숨기고 있던 거다.
그것을 깨닫자 하복부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지금까지 내 눈을 속인 사람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유진 칼리오페를 제외하고는.
천천히 떠나가는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올린다.
그에서 느껴지는 힘은 참으로 미약하다.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이 말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 나처럼 본성을 숨겼다면….
저 모습도 힘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닐까?
‘과연...’
유진이 과연 어떤 수를 감춰놓았을까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깨져...」
유진을 향해 날리려던 마법을 억누르며 손을 내린다.
‘...이러면 안 되죠.’
맛있어 보이는 사탕이 눈앞에 있다고 바로 까먹는 나이는 지났다.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고, 참아서….
더는 참지 못할 때 입안 가득 사탕의 달콤함을 느끼고 싶었다.
“...유진 칼리오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단맛이 퍼지는 것 같다.
“기대할게요.”
부디 그가 자신을 즐겁게 해주길 바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