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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14화 (14/354)

〈 14화 〉 이 멋진 마을에서 첫경험을 (2)

* * *

오랜만에 입은 사복은 목이 조금 답답했다.

단추를 하나 풀며 광장에 있는 시계를 확인하자 9시 45분이다.

‘생각보다 늦네.’

아직 약속 시각 전이지만 루시아라면 30분은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준비가 오래 걸리는 모양이다.

꾸욱─

그때 누군가 뒤에서 셔츠 끝을 잡아당겼다.

뒤를 바라보니 얼굴은 보이지 않고 챙이 넓은 하얀 캐플린만이 눈에 들어왔다.

“...헤헤, 주인님.”

루시아가 캐플린을 벗으며 수줍듯이 웃는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평소처럼 티 없는 은발이 아닌 흔한 갈색으로 염색된 머리카락.

이게 문제였다.

지금까지의 루시아가 비인간적인 외모 때문에 전시회의 예술품을 보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살아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덜 아름다워져서 더 이쁘게 보인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진짜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주인님?"

너무 오랫동안 넋을 놓고 있었나보다 루시아가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시끄럽다. 육변기 따위가 주인을 기다리게 할 생각이냐."

“하읏..죄성해여. 주인님.”

당황해서 조금 강하게 말했더니 평상시보다 더 짜증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루시아가 모자를 푹 누르며 사과한다.

"멍청한 육변기라 죄송해여..."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여자는 외모가 무기라고 하던가.

한 번 루시아의 외모를 의식하자 슬픈 표정을 짓게 한 죄책감이 장난이 아니다.

“...오늘 마을에서는 평범하게 행동할 생각이다. 그러니 주인님이 아니라 유진이라고 불러라.”

분위기를 바꿀 겸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는….”

나야 그렇다 쳐도 루시아의 이름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너무 유명하다. 루시아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 변장한 의미가 없다.

“시아요...”

가명을 생각하고 있자 루시아가 아직 풀이 죽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아…. 라고 불러주세요."

시아.

내가 1회차 때 가끔 불렀던 별명이다.

딱히 별다른 의미가 있어 고른 건 아니다.

그저 이름에서 한 글자를 뺀 거라 외우기 쉬워서 고른 건데….

루시아는 그 이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듯 말한다.

"...그래. 알았다."

"헤헤, 감사합니다."

확실하다.

부끄럽다는 듯 웃는 루시아의 얼굴은 심장에 몹시 해롭다.

­땡 ­땡

마침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10시가 된 것이다.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류장에 마차가 하나둘씩 들어온다.

“가자. ...시아.”

“아! 네, 유진님.”

루시아가 투명하게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

“이 마을도 오랜만이네여.”

카르네아 아카데미에서 마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마을.

보통 아카데미에서 마을을 말하면 90% 이상 이 산키샌 마을을 의미했다.

카르네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을이라 학생들을 대상으로 만든 오락 시설이라던가, 음식이라던가 제법 규모가 있다.

“아, 유진님, 저기 기억나세여?”

조금 들떠있는 루시아가 내 소매 끝을 잡으며 물었다.

루시아가 바라보는 방향을 확인하자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한 골목길이 보였다.

...기억난다.

저쪽 골목길에서 암캐처럼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싸라고 했었다.

다시 루시아를 바라보자 마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상기된 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때는 들킬까 너무 무서웠어여…. 물론 지금도 좋지만, 그 오싹오싹함이 덜 해서 아쉬워여.”

...오랜만에 양심이 가책이 마구 느껴진다.

1회차의 나는 도대체 뭔 짓을 해놓은 거냐.

“아! 저 가게도 그대로네여.”

이번에는 애완용품 가게였다.

...분명 저 가게에서는 루시아에게 직접 목에 걸 목줄을 골라서 사 오라고 했었다.

“지금도 하나 사러 갈까여?”

“...됐다.”

마을에서 돌아다닐 때마다 루시아가 그립다는 듯이 한 마디씩 내뱉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 정신력이 마구 깎여나간다.

“...아!”

루시아가 또 무언가를 발견한 듯 감탄사를 뱉었다.

'제발...'

또 어떤 말을 할지 떨고 있자 루시아가 벤치를 가리켰다.

“유진님. 잠시만 저기에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여?”

“...알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아는 어디로 총총 뛰어가며 말한다.

“헤헤, 금방 다시 올게여!”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 지쳤기에 좀 쉬고 싶은데 잘됐다.

벤치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잠시 휴식하고 있자 좀 살거 같다.

“...유진님.”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양손으로 들 정도로 커다란 봉투가 눈앞에 있었다.

‘...이거지.’

루시아를 데리고 온 효과가 있다.

슬슬 배도 고팠는데 말하지 않아도 먹을 걸 사다 바친다.

‘기왕이면 만화점에서도 돈을 내주면 좋겠는데.’

쓰레기 같은 마인드였지만, 어차피 루시아가 나를 쓰레기라 인증 한 거. 기왕이면 돈이라도 아끼면 좋지 않은가.

“주인님이 좋아하는 음식이 보여서 사 왔어여.”

그때 루시아가 무언가를 꺼냈다.

“....?”

이게 뭐지?

봐서는 안 된 걸 본 것처럼 뇌에서 이해를 거부한다.

“보세요! 민트 초코 닭꼬치에요! 주인…. 아니, 유진님이 자주 먹었던 거 기억나세여?”

“....그래.”

그래, 기억난다.

확실히 루시아의 말대로 게임 속에서는 자주 사 먹었었다.

‘...가성비가 좋았으니까.’

【민트 초코 닭꼬치】

일명 민초닭은 포만감 대비 가격이 저렴해서 자주 사 먹었다.

먹을 때마다 ▶놀라울 정도로 맛이 끔찍했다! 이런 스크립트가 흘러나와도 내가 느끼는 것도 아니고 알게 뭐냐 하는 마음으로 무시하고 먹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민초닭을 보자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게임 속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짓이 있었다.

뚝, 뚝.

닭꼬치에 듬쁙 묻은 민트초코 소스가 떨어진다.

...정녕 이게 사람 먹는 게 맞는지 의심이 간다.

“자, 드세여.”

루시아가 내 입 앞에 민초닭을 가져온다.

“아~.”

아무래도 먹여주려는 것 같다.

여기서 화를 내며 육변기가 건방지다고 하고 민초닭을 치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히 행동 하라고 한 것도 '나'고 민초닭을 좋아하는 것도 ‘나’였다.

먹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그래 봤자 먹을 거다…. 죽는 것도 아니고 눈 딱 감고 먹으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숨을 들이쉬자 치약 냄새가 코끝을 맴돈다.

‘우욱...시발, 이걸 어떻게 먹어.’

하지만 입에 넣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루시아를 보며 겨우 입에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렇게 몇 번 씹어보자….

‘...어, 이거 생각보다?’

...더 쓰레기 같았다.

루시아만 보지 않았으면 당장 뱉었을 거다.

상큼한 치약 향기와 닭꼬치의 미끄덩한 느낌, 그리고 가끔 나를 잊지 말라듯 역겨운 단맛을 뽐내는 초콜릿.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 지적해야 할지 모르는 환장의 콜라보였다.

“맛있으세여?”

환하게 웃으며 묻는 루시아.

‘...지금 1회차 복수하는 거 아니야?’

제정신이 있다면 이게 사람 먹을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 맛있냐고?

콱,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목이 좀 마르군.”

은근 슬쩍 마실 걸 요구한다.

1초라도 빨리 입안에서 치약향을 지우고 싶다.

“아, 마실 것도 사 왔어여!”

그러자 루시아가 유리병에 담긴 음료를 건넨다.

그나마 눈치가 있어 다행이다. 음료랑 같이 같이 삼키듯이 먹어 치우면 그래도 하나는 끝낼 수 있겠지.

단숨에 음료를 입에 털어 넣었다.

꿀꺽­

“....”

시발….

이게 뭐야.

민초닭 이하의 음식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것도 만만치 않다.

진짜 내뿜지 않은 게 기적이다.

“설의눈이에여! 이것도 자주 드셨죠!”

루시아가 투명하게 웃으며 말했다.

확실하다.

이 세계는 제정신이 아니다.

***

간신히 민초닭 하나와 물파스맛 음료를 다 처리했다.

게임 속에서 당연히 포만감이 금방 찰 수밖는 이유를 알았다.

이런 걸 먹고도 식욕이 더 생기면 그건 인간이 아니다.

...내 민초 첫 경험이 이렇게 날아갈 줄이야.

‘감독... 이 미친년.’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지랄하고 자빠졌다. 최선을 다했는데 이런 악마의 음식들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맹세하는데 내가 돌아가게 되면 감독 그년은 잡아서 반드시 민트 초코 국밥을 만들어주리라.

그렇게 복수심에 이빨을 으득 갈고 있자.

“많이 있으니 더 드세여!”

민초닭을 하나를 더 꺼내는 루시아.

“....”

무리다.

진짜 한계다.

루시아에게서 닭꼬치를 받아든 내가 말했다.

“너도 같이 먹어라.”

“괜찮아여! 이건 주인님이 좋아하시느거라. 제가 먹을 건 따로 사왔….”

“시아야.”

지금껏 없었던 부드러운 말투로 루시아를 부르며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입 앞에 민초닭을 들이댄다.

“아, 해봐.”

“...유진님?”

“그 동안 수고한 상이다.”

루시아의 눈동자가 마구 떨린다.

정말 끔찍하게 먹기 싫지만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먹여준다는 유혹에는 이기지 못했는지 결국 루시아가 작게 입을 벌리고는 천천히 다가와 민초닭은 한입 베어 문다.

“....”

씹을 때마다 루시아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인상을 찡끄리기도 하며 시시각각 변해간다.

...나도 ‘침대 위의 왕자’가 아니었다면 저랬겠지.

“....맛. 맛있어여.”

닭꼬치 한 입을 5분 가까이 걸려서 삼킨 루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전부 먹어라.”

내가 루시아에게 민초닭을 통째로 건넨다.

“...네?”

“전부 먹으라고 말했다.”

“전부여? 그럼..유진님은”

“나는 배부르다."

"그래도..."

"...도대체 내게 몇 번이나. 말하게 할 생각이지?”

“히잉...”

결국, 루시아가 울상이 되어서 다시 민초닭을 씹어 넘겼다.

***

루시아의 민초닭 먹방을 즐겁게 보고서 소화가 될 때까지 조금 돌아다니자 어느새 시간이 되었다.

“슬슬 가자.”

“네!”

루시아의 대답을 들으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면서 졸졸 따라온다.

산키샌 마을의 골목길을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작은 상점이 보였다.

사실 모르고 보면 상점이라고도 느껴지지도 않을 모습.

하지만 문 앞에 대충 새긴 글씨가 이곳이 상점임을 증명했다.

【마녀의 만화점】

참으로 성의 없는 상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상점은 상점 같지 않은 게 장사가 잘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가게는 이 세계 유일의 '성인용품 제작 상점'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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