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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차 히로인이 조교를 기억함-8화 (8/354)

〈 8화 〉 000일 후에 조교 당하는 음침녀 (1)

* * *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다.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렇다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 건 아니고 그냥 히로인이 알몸 도게자를 하지도, 방뇨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세계는 그것만으로 평화로워질 수 있었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음미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강의실 앞까지 도착했다.

막상 문 앞에 서니 약간의 긴장감이 돌았다.

마치 슈레딩거의 상자를 열기 직전의 과학자가 된 기분이랄까.

과연 강의실 안에 비비안이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당연히 첫날 비비안에게 말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로레오스 교수한테 찍힌 것처럼 비비안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강의실에 없을 수도 있다는 거다.

사실 비비안이 강의실에 없더라도 순애 조교 루트가 끝장난 것뿐이지 '세뇌 조교' 각은 살아있다.

하지만 내가 노리는 건 일종의 버그성 플레이.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반드시 순애 조교 루트가 필요했다.

‘아카조교사’의 1장 보스는 어떤 히로인을 공략하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비비안 루트 경우 비비안 그 자체가 보스가 되는데 이건 순애와 세뇌를 어느 루트를 타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반복되는 시행착오 끝에 나는 두 개의 루트를 밸런스 있게 조절하면 1장 보스 ‘마녀 비비안’를 발생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러니 제발 안에 있길 바란다.’

게임 속에서도 ‘마녀 비비안’ 레이드는 빡샜는데 그걸 현실에서 경험한다?

절대 사절이었다.

‘예스.’

다행스럽게도 비비안이 있었다.

평소랑 다르게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노트를 꺼내놓고 뭔가를 적고 있었다.

노트에 적힌 내용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괜히 일을 망칠 필요는 없다.

가능한 비비안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순애 루트 진입은 순조롭겠네.’

아카데미에서는 로레오스에게 특별 훈련을 받고 집에서는 따로 염동력 훈련까지 하느라 좀 피곤하다.

하지만 일찍 일어나는 것만으로 1장 보스를 그냥 넘어간다면이 정도 피곤함은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한 일주일만 더 하면 ‘사소한 친절’ 이벤트가 발생할 거다.

사실 ‘사소한 친절’ 이벤트는 이벤트라고 하기에도 쪽팔리는 수준의 이벤트다.

그냥 비비안이 떨어트린 물건을 주워주는 것에 불과하니까.

어떻게 이따위 이벤트로 히로인의 호감도가 쌓이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학창시절 반장이 인사 한 번 해준 거로 자식 이름까지 상상했던 걸 보면 아예 현실성이 없진 않은 것 같다.

....떠오르는 흑역사는 덮어두고 염동력이나 연습하자.

운 좋게도 지금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 좆망겜은 언제 어디서 나를 죽이러 들지 모른다.

그러니 가능한 한 빠르게 성장할 필요가 있다.

'지금 가장 피부에 와닿는 성장방법은 염동력이다.'

교과서를 펼치고 염동력으로 한 장 한 장 넘겼다.

의외로 책을 넘기는 건 정신력을 많이 소모했다.

그만큼 섬세한 움직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종이가 찢어지거나 여러 장이 동시에 넘어갔다.

사락, 사락.

그렇게 염동력으로 책을 넘기고 있자 어느 순간 피로가 밀려온다.

아직 반 정도밖에 넘기지 못했지만 계속하다가는 강의 시간에 잠들어버릴 것 같기에 적당히 그만두었다.

집중하느라 굳어있는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자.

­툭

비비안의 펜이 내 발아래로 떨어졌다.

“...?”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

진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사소한 친절 이벤트는 최소한 일주일 늦으면 이주일까지 친밀도를 쌓아야 발생하는 이벤트다.

그런데 이제 겨우 둘째 날 아닌가. 친밀도가 쌓이려면 한참 멀었을 텐데 도대체 뭐 때문에 이벤트가 벌써 발생한 건가?

“아….”

내가 펜을 줍지 않고 고민하고 있자 비비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생각 할 시간이 없다.

일단 진행하자.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언제 이벤트가 발생할지 모른다.

친밀도가 벌써 쌓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략이 빨라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펜을 주워 비비안에게 건네주었다.

“자, 여기.”

“고, 고마워...”

반대쪽 손으로 보라빛 머리카락을 귓가로 넘기며 펜을 받아가는 비비안.

“별거 아니야.”

의도하지 않아도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확실하다.

비비안 순애 조교 루트를 타기 시작했다.

**

“끄으으….”

또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지옥 같은 하루가 끝났다.

오늘은 분명 이론강의인데도 로레오스는 나를 따로 단련실에 불러서 훈련을 시켰다.

추가 훈련을 땡땡이쳐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그랬다가는 다음날 더 빡센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 걸 알기에 포기했다.

그리고 이유야 어쨌건 체력이 단련되는 것도 사실이니까….

지친 몸을 이끌고 방에 돌아오니 루시아가 내 침대 위에서 배게에 얼굴을 처박고 허리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하흣..하아...주이니임..”

“....”

분명 방 밖에서 나를 기다리느라 다른 학생들에게 들키는 것보다는 방안에 들이는게 나을 것 같아서 루시아에게 예비 열쇠를 주기는 했다.

그러나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루시아는 내 허락 없이는 자위도 할 수 없게 조교 해놨으니 차마 만지지는 못하고 그냥 허공에 허리를 흔들고 있었나 보다.

“지금 뭐 하는 거지?”

“...!”

내 목소리를 들은 루시아가 허리를 든 상태로 돌처럼 굳었다.

그리고 베개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그게..빠..빨리..오셨네여..주..주인님..이..이건..”

“...변명은 됐다. 벌은 나중에 내리도록 하지.”

의자에 앉은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정신적으로 지쳐서 그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사이 루시아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침대를 정리하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 오늘도 수고하셨어여. 주인님.”

“...내가 찾아오라고 한 건 찾아왔겠지?”

대답하지 않고 본론으로 바로 넘어갔다.

설마 시킨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내 침대에서 놀고 있던 거면 진심으로 짜증이 솟아날 거 같다.

“아... 네 주인님. 찾아왔어여.”

루시아의 대답에 마음이 조금 풀린다.

그 책이 어느 고서점에 있을지는 플레이 할 때마다 랜덤으로 바뀌어서 며칠은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하루 만에 찾아온 걸 보면 루시아가 유능하기는 한가 보다.

루시아에게 찾아오라 시킨 것은 성인만화였다.

책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것 없다.

그림체도 평범하고 내용도 그냥 야한 것을 모르던 소녀가 우연히 젖꼭지를 만진 것으로 시작해 성의 쾌락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중요한 건 작가지.’

하지만 작가가 중요하다.

이 책의 작가가 바로 비비안 베아트리스니까.

이걸 통해서 나는 세뇌 조교 루트에 들어갈 수 있다.

안 그래도 순애 조교 루트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서 조금 걱정했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가져왔다.

“멍청한 암캐년치곤 제법 잘했구나.”

“가, 감사합니다. 그럼..주인님..그...상은...”

그러자 꼼지락거리면서 루시아가 상을 탐낸다.

“...네년이 보여준 추태를 용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상이라 생각하지 않나?”

그러자 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내가 말하기도 뭐하지만, 기가 막히게 머리를 쓴 것 같다.

이거라면 따로 벌을 내리지 않아도 되고 상도 안 줘도 된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닌가.

“아...”

그런데…. 루시아의 눈빛에 초점이 조금 흐려지고 입술을 깨무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설마 벌써 스트레스가 쌓였다고?’

질투와는 별개로 모든 히로인들은 일정 수준 조교가 진행되고 너무 오랫동안 방치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덮치는 이벤트가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히로인의 스트레스가 전부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정액을 짜내진다.

물론 이 이벤트 자체는 하루가 통째로 날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부작용도 없고 히로인도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죄송하다며 몇 번이고 사죄하지만….

‘지금은 안돼….’

문제는 지금 내 체력으로는 그걸 감당할 수 없다.

아무리 ‘침대 위의 왕자’가 있다 할지라도 순수하게 체력부족으로 복상사할 수 있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스트레스가? 아…!’

갑자기 한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내가 이 세계에 전생 한 건 고작 며칠에 불과하지만, 루시아가 1회차의 기억을 떠올린 건 과연 언제쯤일까?

일주일? 한 달? 일 년? 지금 상황을 보니 짧진 않은 것 같다.

루시아가 지나치게 폭주하던 상황이 지금 와서야 이해가 갔다.

루시아는 1회차의 기억을 되찾고 그동안 쭉 참아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 마주한 걸 인지한 뇌가 답을 찾기 위해 애쓴다.

“그렇지만...”

일단 시간을 끌기 위해 말을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시아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는다.

“네년의 노고를 생각해 상을 내려주지.”

상이라는 말에 루시아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여기서 상은 섹스가 정석이겠지만 지금은 체력도 바닥난 상태에 근육통도 있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리고 설령 하더라도 일단 다른 곳에서 한 번 ‘침대 위의 왕자’의 효과를 실험하고 와서 하고 싶다.

‘그래서 뭔 상을 내릴 건데!“

이럴 때가 아니다. 생각해라 생각해.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넘어갈지 생각해라.

“...특별히 내 앞에서 자위하는 걸 허락하마.”

섹스가 아니면 자위지.

딱 그 정도 생각으로 지껄였다.

그러자 루시아가 이해하지 못한 듯 몇 초간 정적이 흐른다.

‘좆됐나?’

겨우 이걸로는 넘어갈 수 없나?

난 여기서 복상사로 죽어버리는 건가.

억누르던 공포심에 손이 떨리기 시작하려는 무렵….

“...헤으읏...미천한 암퇘지에게 자위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오늘도 살아남은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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