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수상할 정도로 몸매가 좋은 동급생 (2)
* * *
아침 일찍부터 강의실에 나온 것 치고 나는 비비안과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뭔 헛짓거리인가 싶겠지만 놀랍게도 이게 비비안의 정석 공략방법이다.
여기서 호감도 쌓겠다고 인사하거나 말을 걸면 비비안 루트는 끝이다.
나도 물론 처음 아침 등교 이벤트에서 비비안을 발견했을 때는 말을 걸었다.
‘....네.’
대화는 단답형으로 끝났고 다음 날부터 비비안은 아침 등교를 하지 않았다.
말로 호감도 쌓는 걸 실패한 다음에는 음침녀의 공략의 국룰인 ‘성추행으로 시작하는 조교’를 해야 하나 싶어 등교하자마자 가슴을 주물렀다가 퇴학 당했다.
그렇게 수많은 베드엔딩 끝에 발견한 루트가 바로 ‘침묵’ 루트.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다.
사실 뭘 어떻게 하든 공략 실패를 하니 열 받은 마음에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는 심정으로 이렇게 진행 한 거지만….
놀랍게도 이게 정답이었다.
이렇게 아무 말 하지 않고 일주일 정도 있으면 ‘사소한 친절’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도와주면 정석공략 루트가 진행된다.
‘그리고 비정석 루트...’
비비안이 얼굴을 붉히며 열심히 읽고 있는 저 야설을 이용한 비정석 루트도 존재한다.
정석 루트가 순애조교라면 비정석루트는 가스라이팅 세뇌조교다.
그래서 나는 순애조교를 탈 거냐고?
아니, 둘 다 할 거다.
***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마구 떠들어대는 게 학기 첫날이라 그런지 다들 들뜬 것만 같았다.
보통 아카데미의 최하위 반은 낙오자들 반이라고 생각하는데 오산이다.
“아버지가 졸업만 잘하면 상회 지분을 좀 떼어주신대.”
“잘됐네. 그럼 내 영지에 오면 되겠네. 나도 독립 영지를 받기로 했는데.”
벌써 얼굴에 서로 금칠하는 것 좀 봐라.
5반의 학생 대부분이 비교적 재능은 부족해도 돈이나 권력으로 입학시킨 귀족이나 대상인의 자제들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은 어릴 적부터 사교회나 다과회 같은 곳에서 얼굴을 익힌 사이다.
나 역시 고위귀족인 칼리오페 가문의 자제지만, 내 복잡한 집안 사정 때문인지 가볍게 인사를 하는 놈은 있어도 친분을 쌓으려는 녀석은 없다.
‘오히려 좋아.’
히로인에게 쏟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엑스트라까지 상대할 시간은 없다.
그때, 강의실 문이 열리며 한순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입학 전부터 아카데미에서 교수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을 것이고, 설령 듣지 못했더라도 눈앞에 있는 교수의 분위기는 도저히 입을 열 수 없게 만들었다.
“로레오스다.”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카데미의 입학 할 정도의 학생이라면 그가 누구인지 분명 알고 있을 테니까.
“...미리 말해두지. 나는 너희 같은 애새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을 모욕이 튀어나온다.
“부족한 재능을 지닌 주제에 가문의 권세를 빌려 카르네아에 입학한 놈들이 여기 모여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종군 마법사가 뿜어내는 압력에 누구 하나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그래도 교수의 책임은 지겠다. 내가 가르친 대로만 따라온다면 전장에서 개죽음은 당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뱉어질 때마다 강의실의 숨소리가 작아진다.
“지금까지 그저 운 좋게 태어나 받은 대우는 모조리 잊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네놈들 이름 뒤에 붙어있는 성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으니까.”
로레오스가 먹잇감을 보는 포식자 같은 눈빛으로 학생들을 노려본다.
나야 저 대사를 게임 속에서 질리도록 봐서 익숙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아니겠지.
‘다행이야.’
나도 이제 마음이 좀 놓인다.
로레오스의 대사가 게임 속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 얼마나 아름답나. 대사가 좀 거칠면 어때 첫 만남부터 도게자 실금하는 히로인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정상적이다.
“...이상이다.”
그 말과 함께 강의실을 짓누르던 압력이 조금 풀어지며 학생들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바로 첫 강의다. 전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튀어나가라!”
씨발.
어쩐지 쉽게 간다했다.
***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마법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종군 마법사로 입대했다.
그 후 이십여 년. 제법 이름이 알려질 정도는 활약했다.그러나 육년 전 전쟁에서는 더는 군인으로 살아가기는 어려울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은퇴를 하게 되었다.
당연히 전쟁터에서 죽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은퇴 후의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고향에서 조용히 살다 죽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젠 전장이 아닌 카르네아의 교수로 일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찾아오는 이들에게 질려 결국 오 년간 강의해줄 테니 그 대신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교수직을 얻었다.
억지로 받은 교수직이었지만 그래도 카르네아 아카데미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어느 정도 기대를 했다.
내가 지킨 제국의 미래가 이곳에 모두 모여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착각이었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느낀 것은 혐오감이었다.
전장의 두려움을 모르는 귀족들은 나의 말을 우스갯소리로 흘려넘겼고, 재능있는 평민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국가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닌 그저 출세의 도구로 생각했다.
작게 불타오르던 열정마저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남은 계약 기간 5반의 찌꺼기들을 맡기로 했다.
가장 열정 없는 교수가 가장 열정 없는 이들을 맡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대신 그저 최소한의 생존법이나 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자존심 강한 귀족들이 모욕을 참아내는 건 그저 아카데미 교수의 권위 때문만이 아니다.
첫 만남부터 상하관계를 알려주기 위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숙련된 군인조차 견디기 힘들 압력을 부여했다.
그런데….
‘하나는 흘려내고….’
비비안 베아트리스는 본능적으로 미묘하게 마력의 흐름을 비틀어 압박에서 벗어났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지만 진짜 더 재미있는 놈은 따로 있었다.
유진 칼리오페
이런 녀석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능력을 사용해 압박에서 벗어난 학생은 있었지만, 그저 정신력으로만 압박을 받아낸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걸로 부족한지 더 해보라는 듯이 웃기까지 했다.
‘재미있겠군.’
유진의 그 여유 넘치는 얼굴을 떠올리자 로레오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미 식어버린 줄 알았던 재 속에서 다시 불꽃이 피어나려 했다.
***
‘...주, 죽을 거 같다.’
흙먼지가 풀풀 풍기는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의 교육은 기사, 마법사, 고유능력자로 나뉜다고 했지만 이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이야기다.
신입생이 받는 훈련 대부분은 체력단련이다.
이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전장에서는 순수하게 마법만 쓰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눈앞에 마물이 달려드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도망쳐서 시간을 벌어야 주문을 외우든 지원을 요청하든 하지.
그러니까 기사만큼은 아니더라고 기본적인 체력은 필수라는 거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체력은 10이다.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평균이지만 아카데미 입학생 중에서는 바닥.
당연히 다른 학생들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걸 증명하듯이 지금도 다른 학생들은 진작 운동장을 도는 걸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나 혼자 아직도 반 바퀴나 남았다.
“하아...하아..”
아니, 혼자는 아니다. 비비안도 포함이었다.
스탯을 정신과 마력에 몰빵한 비비안은 나보다도 뒤처져있었다.
심지어 가슴 크기에 맞춰 체육복을 고른 탓에 팔 길이는 한참 남아서 펄럭거리는게 더욱 힘들어 보였다.
“엄살 부리지 마라 유진! 고작 이걸로 지친 척이냐?”
로레오스 교수가 나를 노려보았다.
분명 나랑 같이 뛰고 나이도 오십은 넘었을 텐데 땀방울은커녕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니, 그렇군. 벌써 동료애를 가진 건가."
알겠다는 듯이 혼자 중얼거리며 피식 웃는 로레오스.
도대체 뭔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대답할 힘도 없어서 그냥 무시하고 달리자 그가 소리쳤다.
“좋다! 한 번 지켜봐 주지.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녀석은 세 바퀴를 추가로 돌겠다!”
계속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갑자기 세 바퀴 추가…? 미친 소리를 하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더 뛰다가는 진짜 뒤질 수도 있다.
내 뒤에서 헉헉거리는 비비안에게는 미안했지만 일단 나도 살아야 했기에 마지막 남은 힘까지 다해서 달려나갔다.
‘..거의.. 다왔..’
통과점까지는 대략 남은 거리는 십여 미터. 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달리면 꼴찌는 비비안이다.
탓, 탓, 쿵!
그렇게 통과점을 코앞에 둔 순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발이 엉켜 넘어졌다.
“....”
아, 진짜 존나 쪽팔리고 아프다.
이 뭔 병신같은 짓인가. 나를 바라보며 반 애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아..하앗..”
그 순간 나를 추월하는 비비안. 아래에서 보니 펑퍼짐한 체육복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출렁거리는게 확실하게 보였다.
“....”
“....”
스쳐 지나가는 사이 눈이 마주쳤다.
제발 한 번만 봐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통하지 않았는지 비비안은 그대로 통과점을 지나치고 꼴등이 확정되었다.
이왕 꼴지가 된 거 숨이라도 고르고 있자며 누워있자 로레오스 교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까지 하다니. 이건 예상외군. 하지만 당장 일어나라.”
“..하아..잠시만..쉬고..”
“전쟁터에서 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서 일어나 뛰어라!”
아, 진짜 좆 같은 세상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