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수상할 정도로 몸매가 좋은 동급생 (1)
* * *
달빛을 머금은 찬 공기가 아직 남아있을 무렵 문뜩 잠에서 깼다.
"..."
일단 주변부터 살펴봤지만, 당연하게도 내가 살던 아파트가 아닌 카르네아 아카데미의 기숙사 안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꿈일 거라는 기대도 아주 약간은 했지만….
역시 그럴 리가 있나.
꼼짝없이 이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하아...”
어제 일을 떠올리니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차마 알몸으로 기절한 루시아를 바닥에 내버려 두고 나올 수는 없어서 대충 오줌을 치우고 몸을 닦아 침대 위에 던져 놨다.
게임 속에서도 그런 플레이가 아닌 이상 히로인이 지린 오줌을 처리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는데….
첫 만남부터 발에 입을 맞췄다고 히로인이 오줌을 지리면서 기절하는 세계가 과연 존재해도 되는가?
이걸 보면 사실 최종보스는 착한 놈이고 잘못된 건 이 세계가 아니었을까?
진짜 내가 살아가는 세계만 아니었어도 멸망하라고 내버려 뒀을지 모른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번 꾹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깔끔하게 다려진 셔츠 위에 마이를 걸친다.
아직 등교하기엔 한참 이른 시간이었지만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이 시간에 등교해야지만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거울을 보자 ‘유진 칼리오페’의 얼굴이 비친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어제 일을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 이상한 점이 있었다.
루시아에게 명령할 때 그건 나답지 않은 말투였다.
전생의 나였다면 분명 그 상황에서 말을 더듬거나, 당황해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 테니까.
혹시 이 세계에 전생하면서 내 인격이 ‘유진 칼리오페’ 영향을 받아 변화가 생긴 건 아닐까 두려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
침대 위의 왕자 (Rank B)
이성과의 대화에서 적당한 보정이 들어갑니다.
원인은 이 특성이었다.
침대 위의 왕자라길래 성행위 중에만 사용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이성과의 대화 중에서는 자연스럽게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보정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할 때는 그런 느낌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어찌 됐건 오늘부터 진짜 카르네아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기대? 설렘? 그딴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살아남고 싶었다.
방심하면 죽는다.
그건 파리목숨처럼 사라져간 나의 수많은 플레이 기록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오늘도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자.
...그곳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루시아가 있었다.
“...아! 주인님.”
쾅!
바로 문을 닫았다.
굳게 다잡은 마음이 1초 만에 무너졌다.
이상하다.
분명 엔딩까지 본 게임인데 전개가 예상이 안 된다.
‘...시발 뭐야?’
루시아가 왜 여기 있는가? 그녀가 가진 사소한 단점 중 하나는 분명 잠에 약하다는 거 아니었나?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 등교하기는커녕 일어나기도 한참 이른 시간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자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루시아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주인...”
나를 부르는 루시아의 손목을 잡고 일단 방안에 끌고 들어왔다.
나야 그렇다 쳐도 루시아는 너무 눈에 띈다.
일찍 일어나서 다른 학생은 없어서 다행이지.
그 루시아 우르엘라가 내 방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걸 들켰으면 끝장이었다.
“씁하...주..주인님의 방..”
들어오자마자 왠지 숨을 크게 들이쉬는 루시아.일단 주인답게 행동해야 한다.
“...쓰레기 같은 년. 제멋대로 발정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읏...죄성해여..”
루시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떤다.그녀의 무릎을 보자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기다린 것인지...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던 거지?”
“세, 세 시간 정도여.”
“.....”
진짜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자 내가 짜증이 난 걸 눈치챘는지 이리저리 방을 구경하던 루시아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학..죄, 죄송해여..너무..죄송해서...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요..용서 받으려고... 제가 기절하는 바람에 주인님을...귀찮게..해서. 제가 해야하는 건데.. 다음부터는...”
“됐다. 다음부터는…. 내 허락 없이 이딴 짓을 하지 마라.”
왜 저러고 있었나 했더니 오줌을 지리면서 기절한 것에 대한 나름대로 사과였나보다.
그래도 이런 식의 사과는 절대로 거절이다.
“...미리 말해두지. 이제부터 다른 사람의 앞에서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는 걸 금한다.”
아니, 오히려 지금 일이 터진게 다행이었다.
첫날과는 달리 루시아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사실 루시아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내 탓도 아주 약간 있었다...
게임 속 후반부에서는 나는 루시아에게 우르엘라 가문의 공동묘지에서조차 공개노출방뇨자위를 하면서 주인님에게 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게 시켰으니까….
존경하는 선조님들 앞에서조차 그런 꼴을 다 보여줬는데 고작 학생들 앞에서 무릎 꿇기? 못 보여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루시아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받은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그런.. 주인님을..주인님으로 부르지 못하면 어떻게..”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앞에서 말했다시피 루시아가 이러는 이유는 ttq123이 미친새끼가 조교로 정상적인 사고를 망가트려서 생긴 일이다.
그냥 안된다고 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건 주인님답지 않은 행동이니까.
“...나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나. 그러니까 네가 아직 내 노예가 되기 전에 말이다.”
“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겠어여. 어리석고 교만한 암컷에게 주인님께서 암컷으로서 살아가는 행복을 알려주셨는데. 주인님이 멍청한 루시아에게 내려주신 성은을 떠올리기만하면 자궁이 쿵쿵거리는걸요. 아읏... 그걸 생각하니 지금도 또 다시 갈 것 같아여.”
돌겠다.
머리가 웅웅거린다.
뭔 말을 하기만 하면 이렇게 되는 건지. 아니, 머리가 웅웅거리는게 아니라 진짜로 뭔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도 진동석을 넣고 있나?”
“네! 주인님! 넣고 있어여.”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루시아.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났는지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의 표정을 짓더니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넨다.
“아... 죄, 죄송해여... 사실 어제 주인님께 조종석을 드려야 했는데…. 깜빡하고 안드렸어요. 암캐가 멍청해서 죄송해여..”
진동석과 똑같이 생긴 돌멩이가 내 손위에 놓였다.
조종석이 뭐냐면 마나를 주입해 연동된 진동석의 강도를 조절 할 수 있는 쉽게 말해 무선 컨트롤러였다.
...사실 말이 돌멩이지 상처입히지 않게 타원형으로 잘 다듬어져 있고, 색깔 역시 분홍색인 게 바이브레이터랑 똑같았다.
“헤으응.. 보지에서 주인님의 마력이 느껴져여..”
미친년….
내 명예를 위해 확실히 말해두는데 나는 마력 안 넣었다. 자기 혼자 망상하면서 저러는 것이다.
“...한동안 진동석을 차고 오는 것도 금지한다.”
“네?..그런...그러면 주인님이 언제 어디서나 하라고 했던 ‘공개절정참기’ 훈련은 어떻게 해야하나여...”
말꼬리를 늘리며 애달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루시아.
가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내 귀에는 똑바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찢어 죽여주마라는 식으로 들릴 뿐이었다.
“...당분간은 내가 그때처럼 직접 조교해주지. 그러니 네년 역시 다른 사람 앞에서는 조교 받기 전에 너를 연기해라.”
“아아... 주인님께서 직접... 네.. 알겠습니다.”
다시 조교해준다는 말에 루시아가 감격한 듯 눈물을 뚝뚝 흘린다.
아. 진짜.
숨 막혀 죽을 것 같다.
***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지만 만약을 위해 조금 떨어져서 걸으라고 했더니 딱 뒤로 세걸음 물러나 따라오는 루시아.
하지만 그것도 1학년 강의실에 도착한 이상 끝이었다.
루시아는 1반, 나는 5반이니까 여기서 헤어져야 한다.
“...지금부터는 내가 말한 대로 행동해라.”
강의실 앞에 도착한 내가 다시 한번 당부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이라도 최대한 1회차랑 비슷하게 따라가야 했다.
‘아카조교사’에서는 이벤트 하나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만큼 정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가능한 나비효과를 줄여야 했다.
그러므로 루시아가 1회차와 똑같이 움직이는게 내겐 베스트라 할 수 있다.
“...주인...아니. 유진님에게 저 같은게 정말 그렇게 행동해도..”
차마 님자는 뺄 수 없었는지 말을 늘리는 루시아.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답이 없다. 지금은 강하게 나가야 한다.
“루시아 우르엘라... 감히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건가?”
“아, 아니에여... 잘 들을게여.”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기를 시작했는지 강아지 같던 루시아의 눈빛이 서서히 무감정해지더니, 이내 길가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보는 것처럼 나를 보았다.
그리고 1회차 초반처럼 나를 완전히 무시하며 그대로 강의실로 들어간다.
“....”
...하지만 루시아의 그런 태도도 잠깐.
맨 앞자리에 앉기까지 몇 번이고 나를 힐끗거리던 루시아는 결국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화들짝 자리에 앉았다.
"...피곤하다."
한숨이 흘러나온다.
아직 본편은 시작도 않았는데 뭔 오프닝이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터벅터벅 걸어 도착한 5반 강의실 문을 열자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까이 가지 않을 음침한 기운을 내뿜는 한 여학생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와 가까워져야 한다.
많고 많은 자리 중에 굳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 그녀는 잠깐 움찔하며 나를 힐끗거리더니. 이내 관심 없는 척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책의 제목은 '불과 얼음 원소 마법의 상관관계.' 재미없는 기본서 같은 이름이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책은 표지만 저렇지 내용은 야설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물론 벌써 꺼낼 말은 아니기에 짐을 꺼내는 척 그녀를 잠시 관찰했다.
게임 속에서는 그냥 넘어갔지만 이렇게 보니까 그녀는 앞이 제대로 보일지 의심 갈 정도로 앞머리가 길게 내려와 있다.
그리고 펑퍼짐한 가디건으로 최대한 가렸지만...
머리보다 훨씬 큰 가슴이 눈에 띄었다.
루시아의 가슴도 큰 편이었지만 이것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죄스럽다.
“....”
수상할 정도로 몸매가 좋은 그녀를 소개한다.
카르네아 아카데미의 신입생 150명 중 150등.
심지어 역대 아카데미 합격생 중 최하위 성적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가지고 들어온 베아트리스 가문의 차녀.
비비안 베아트리스
'아카조교사'의 두 번째 메인 히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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