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9)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그러게요."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는 80살이 되었다.
수진이는 61살. 엊그제 환갑잔치를 맞이했다.
"이제 3번째 소원권도 끝났어요."
"그러게."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내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펑펑 울었을 때처럼 수진이도 장모님 앞에서 엉엉 울었지.
나는 그저 수진이를 끌어안아 주었다.
장모님이 계시지 않아도 옆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 이제 난 80살이다.
이제 죽음이란 걸 실감할 나이가 되었다.
평소 나와 안부 인사를 하며 지내던 친구놈들도 하나둘씩 먼저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고 이제 남은 녀석은 9명뿐이다.
"고마워요. 내 곁을 지켜줘서."
"당연한 거지."
"네."
장례식이 끝이 나고 수진이가 마음을 추스른 겨울날.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해돋이를 보러 가기로 했다.
"운전석엔 제가 앉을게요."
"미안해."
"아뇨. 당연한 거죠. 어차피 자동 운전인데요. 뭘."
시대가 변했다. 이제 본인이 직접 운전을 하는 사람은 없다.
AI가 운전해주는 시대에 사고가 나면 제조사의 문제지만 본인이 직접 운전을 하면 본인의 책임인데 직접 운전을 하는 사람은 어지간히 운전을 좋아하는 마니아 뿐이다.
그것도 일반 도로에서는 운전이 금지고 개인 사유지나 서킷 같은 곳에서만 운전할 수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를 AI의 고장을 대비해 운전대에는 꼭 사람이 앉아 있어야 한다는 법이 있기는 한데 지금까지 사고는 굉장히 드물었다.
시대가 정말 많이 변했지.
"노래라도 틀까?"
"우리 남편 선곡은 할아버지 냄새가 나서 별로예요."
"그럼 우리 부인의 할머니 냄새나는 노래나 틀어야겠다."
"그러시든가."
"쟈비스. 내 사랑이 즐겨듣는 노래로 틀어줘."
ㅡ네. 알겠습니다.
차 안에 수진이가 즐겨듣던 노래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세상 참 좋아졌어요."
"그러게. 이제 노화도 막아주는 약이 나온다잖아."
"네."
"아쉬워. 10년만 일찍 나와주지. 장모님도 친구놈들도 좀 더 오래 살았을 텐데."
"그러게요. 그래도 덕분에 우리 서방님은 더 오래 살겠네요."
나는 수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수진이.
나는 수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이제 선생님이라고 불러줘. 아이들도 다 독립했으니까."
"선생님이 좋아요?"
수진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방님, 남편, 당신, 여보.
다 좋았다.
하지만 나와 수진이의 관계는 역시 수진이와 선생님이다.
"선생님."
"어."
"사랑해요, 선생님."
"..."
나는 그 순간 수진이를 처음 봤을 때의 그 광경을 떠올렸다.
"왜요?"
"아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그땐 저 정말 예뻤죠?"
그리 말하며 입을 가리며 작게 웃는 수진이.
그래. 그때 너는 정말 예뻤다.
"지금도 예뻐."
"우리 선생님은 말을 참 예쁘게 한다니까?"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려왔다.
말을 예쁘게 한 게 아니다. 정말로 내 눈엔 지금의 수진이도 사랑스럽게 보일 뿐이다.
***
"이걸로 41번째 새해네."
"네."
저 멀리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수진이와 매년 해돋이를 보러 오자고 약속하고 지금까지 딱 1번을 제외하곤 모두 찾아왔다.
"매년 찾아오자고 했는데 한번 빠져버렸어요."
"어쩔 수 없었지."
수진이의 출산예정일이 가까워서 그해에는 해돋이를 볼 수 없었다.
"이렇게 매년 보고 있으니 이제 별다른 생각도 안 들어요. 그땐 왜 이런 걸 보러 오자고 했는지."
"너도 늙어서 감수성이 메말랐네."
"하아. 이젠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그만 돌아갈까?"
"그러죠."
나와 수진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해돋이. 매년 보다 보니 이젠 질렸다.
예전같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무언가를 다짐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즐기기엔 우리는 너무 늙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곳을 매년 찾아온다.
서로 더는 오지 말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더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에서 감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행사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나는 앞으로 40년간 더 이곳을 찾아와야 한다.
"이제 절반이네."
"네, 이제 딱 절반이에요."
그래. 아이들이 다 자라서 독립을 했어도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난 80살. 120살까지 살아야 하니 아직 40년이나 남았지.
수진이와 결혼하고 40년의 세월이 흘렀고 아직 수진이와 살아갈 날이 40년이 남았다.
이제 겨우 절반이 왔을 뿐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수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
"희진아. 아빠 힘들어."
"조금만 더 버텨봐."
"희진아. 엄마도 힘들어."
"아니, 진짜 쌍으로 왜 그래?"
새해가 시작되고 아직 봄이 되긴 이른 날.
희진이가 짐을 바리바리 싸고 집으로 왔다.
나는 보자마자 한숨을 쉬며 부부싸움 하고 집에 오지 말라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여긴 왜 기어들어 왔느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희진이는 그런 이유로 온 게 아니라며 배시시 웃으며 우리를 향해 뭔가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가 들어있었다.
그래. 나와 수진이는 나란히 앉아서 희진이의 그림 모델이 된 상태다.
아마...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늙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던 거겠지.
어떻게든 딸 아이의 어리광에 어울려주고 싶어 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근데 이 서방은 놔두고 왜 혼자 왔어?"
"남편은 집에서 애 보고 있어. 오래 걸릴 테니까 그냥 집에 있으랬어."
"그래?"
조금 아쉽다.
손주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힘찬이는 잘 있고?"
"잘 있지. 우리 힘찬이는 이름대로 잘 크고 있어."
그리 말하며 열심히 붓을 놀리는 희진이를 바라본다.
젊었을 때의 수진이를 닮은 얼굴.
어렸을 때 벽지에 낙서했다가 수진이에게 혼나서 엉엉 울던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희진이는 예전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지.
"희진아."
"왜, 엄마?"
"너도 참 많이 컸어. 예전엔 벽지에 그림 그리다가 나한테 혼쭐이 났었는데."
"아, 언제적 이야기야~"
신기하지. 부부라서 그런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왜 그렇게 방긋방긋 웃어요?"
"그냥. 나도 당신이랑 같은 생각 하고 있었거든."
"후후. 부부는 닮는 거니까요."
그래. 우리는 점점 서로를 닮아갔지.
띠띠띠띠 삐로링.
우리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
"그냥 요 근처 지나갈 일이 있어서 들렀어요. 근데 넌 뭐하냐?"
"보면 몰라? 그림 그리지."
진수는 희진이가 그린 그림을 슬쩍 보고는 식탁에 있는 의자를 하나 가져와 희진이의 옆에 앉았다.
"거치적거리게 여긴 왜 앉아?"
"그렇다고 소파에 앉을 순 없잖아?"
"그냥 가란 뜻인데?"
"또 싸우냐?"
"싸우는 거 아니에요."
"이 애들은 진짜..."
수진이는 희진이와 진수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렸을 땐 그리 잘 지내던 녀석들이 어느 순간부턴 저렇게 티격태격 되기 시작했지.
그 모습은 처남과 수진이의 어렸을 적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이제 장모님 심정을 알겠어?"
"네. 이젠 알겠네요. 이런 기분이셨어요."
수진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직도 투닥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나이를 먹고 덩치도 커져서 한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 녀석들이 아직도 저렇게 아이같이 행동한다.
아, 그런가.
예전에 어머니가 하셨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이가 몇 살이 되든 부모의 눈으로 보면 아이로 보인다던 그 말.
그래. 그렇구나.
이제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버지."
"왜?"
"얘가 그리는 거 다 끝나고 나면 오랜만에 사진이나 찍으러 가요."
"갑자기 왜?"
"그냥요."
그냥은 무슨 그냥이냐.
내가 곧 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보구나.
나는 진수의 속마음을 눈치챘지만, 그냥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수진이도 진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이다.
"걱정 마. 지금까지 약속은 다 지켜왔잖아."
"네. 믿어요."
"그래. 난 신뢰의 아이콘이지."
"아하하! 아빠는 이제 할아버지가 돼도 여전하네!"
"고럼. 아빠가 누구냐? 70대에도 의사가 50대 체력이라고 했던 몸이잖아?"
내 말에 금세 분위기가 풀렸다.
그래. 우리는 칙칙한 분위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약속을 지켰고 앞으로도 지킬 생각이니까.
***
"이제 세 명 남았네."
"그러게. 이렇게 한 명씩 떠나가는구나."
85세.
어느새 친구들도 한 명씩 여행을 떠나고 남은 것은 나를 포함해서 3명.
이젠 예전처럼 눈물을 흘리진 않지만, 가슴이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후우. 1년만 더 버티지. 그러면 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준범이는 그리 말하며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노화를 억제하는 약이 결국 나오고 말았다.
내년부터 판매한다고 하며 인류의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여행을 떠나버린 병진이는 결국...
"울지마라, 짜식아."
"안 울어, 영감탱이야."
"또 지랄이네. 그만 좀 해라. 우리 동창회는 좀 기분 좋게 지내자고."
"그래. 동창회에서 질질 짜는 건 아니지."
지금은 병진이의 장례식 중이다.
그래. 장례식 중이지.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죽음을 장례식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만날 이유라도 없으면 서로 잘 모이지 못하는 우리는 서로 여행을 떠날 때가 되면 장례식에 참석해서 눈물, 콧물 질질 짜지 말고 서로 웃으면서 옛날에 있던 일들을 회상하며 먼저 떠나간 녀석을 축복해주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장례식을 동창회로 부르기도 했다.
"안 운다니까 영감쟁이 놈들이 쌍으로 지랄이네."
그냥 코가 좀 찡해졌을 뿐이다.
"그래도 니들이라도 남아서 다행이네. 니들 나보다 먼저 가지 마라? 나 가족도 없어서 니들이 먼저 가면 난 진짜 끝이야."
"그러게 누가 독신으로 살래?"
"그래그래. 손주 녀석들이 `할아부지!` 하고 웃으면서 안겨드는 기쁨도 모르는 녀석아."
"내가 설마 니들을 부러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우리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 주제는 정치, 사회, 경제 등등 두서없는 이야기부터 본인의 근황이나 자식이나 손주 자랑 등등 끝이 없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 오감을 재현하는 VR이라든지 자율주행 자동차라든지 노화를 극복하는 약이라든지."
"그래. 많이 변했지. 네 머리처럼 말이야."
"하하! 공짜 좋아하던 딴따라 녀석 꼴 좋다 그쟈?"
"고럼!"
"이 새끼들이!"
나와 준호는 배를 잡고 웃었고 준범이는 얼굴을 붉히며 손에 들고 있던 사이다를 들이켰다.
나와 준호는 각각 커피와 맥주를 손에 든 상태로 건배를 외쳤다.
무거운 공기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이곳만큼은 정말로 동창회로 느껴지도록 말이다.
먼저 여행을 떠난 친구놈들이 우릴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 우리는 그놈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병진아. 그리고 먼저 간 친구놈들아.
조금만 더 기다려라. 우리는 조금만 더 즐기다 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