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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5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8) (235/301)



〈 235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8)

진수가 결혼하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수진이는 50살이 되었고 나는 69살이 되었다.

희진이는 어느새 25살의 꽃다운 나이의 여성이 되었고 결국은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아빠."


"응."

"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그래. 그거 잘됐네."

"..."

"왜? 내가 울고 불며 반대라도 할 줄 알았어?"

"응. 아빠, 내가 결혼하면 운다고 했잖아?"


"오히려 속이 후련하다. 이제 너희 엄마랑 단둘이서  수 있으니까."

"치~,  어렸을 때 엄마한테 질투한 거 알아? 만날 엄마랑 꽁냥꽁냥 거리고 말이야."


"어머, 얘는. 사랑하는데 당연한 거 아니니?"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내 손을 잡아왔다.

나도 자연스럽게 손에 힘을 주어 수진이의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아직까지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부부다.

아니,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왔다.


서로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생각보다  차이가 있으니까.


아이들 앞이라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도 않았다.

"내가 이래서 함부로 연애를 못 했다니까. 이렇게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말이야."

"사위 녀석은  받았네. 이렇게 참하고 예쁜데 과거마저 깨끗하니까."


"성희롱이야?"

"유니콘인데?"

"이이는 나이를 먹어도 변화가 없네."


"수진아, 넌 내가 호호 할아버지 같았으면 좋겠어?"


"아니요. 그냥 당신은 그대로 살아요."

"그래. 괜히 나이를 먹는다고 있는 척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살다가..."

가야지 라는 말을 하려다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입을 닫았다.

아직... 50년은 더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하는 사람이야?"


"이제 30살인 사람이고 직장에서 만난 사람이야."

"그래?"


수진이가  사위가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숫기가 없어 연애경험이 없지만, 항상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고백을 해왔다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


나는 희진이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줬다.

희진이의 입에서 나오는 사위는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외모가 멋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서는 차마 숨기지 못한 애정이 묻어나왔다.

아마... 좋은 사람이겠지.


희진이가 고르고 골라서 선택한 남자다.

하지만 한번은 얼굴을 봐야겠지.

"데려와. 얼굴은 보고 생각해야지."


"네. 아, 그렇다고 이 결혼 반댈세! 하면서 얼굴에 차 뿌리고 그런 건 하지 마요?"

"도대체 언제적 드라마야?"

내 말에 수진이도 희진이도 같이 웃기 시작했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이젠 가상현실이 현실화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더는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다.


아니, 더는 TV 같은 영상 매체에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된 거지.


현실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감각으로 다른 세계에 여행도 가능하니 굳이 이야기에 빠져드는 사람이 없어졌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노화도 극복할 수 있는 약이 만들어질 거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세상.


씁쓸하게 느껴진다. 세상이 휙휙 바뀌고 있는데 나만 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니까.


하지만 내 곁에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는 수진이가 있다.


세월이 흘러 이미 아줌마의 손이 되어버린 수진이.


나는 갑자기 가슴이 조여와서 수진이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여보?"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너도... 나이를 먹었구나.

천사 같던 미소와 악마 같은 짓궂은 미소를 보이던 얼굴엔 어느새 주름이 잡혔다.

 사실이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언제 데려올 건데?"


"다음 주에 시간 되지?"


"우리야 이제 백수니까 되지."

"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희진이는 그리 말하며 우리를 한번 꼭 끌어안은 다음에 집을 나갔다.


이제 이 넓은 집엔 나와 수진이만이 남았다.

"이제 곧이네."


"그러게요."


희진이가 결혼을 해서 다른 가정을 쌓아올리기 시작하면 진정한 의미로 나와 수진이만 남는 집이 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수진이는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여기 봐봐. 진수랑 희진이 키를 재던 흔적이야."

"그러게요. 진수는 진짜 키가 엄청 빨리 컸죠? 고등학생일  180이 넘을 줄은 몰랐는데."


"희진이도 키가 컸지. 170cm나 되니까."

"아빠 유전자가 한몫하긴 했어요."

"너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니까 그렇겠지."

진수의 방이었던 곳으로 들어간다.


진수가 독립하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우리는 이 방을 아직 정리하지 않았다.


스포츠를 좋아하던 진수답게 방에는 아령부터 축구공, 농구공 그리고 야구 글러브도 있었다.


"재밌었어. 진수랑 캐치볼 하는 거."


"그래 보였어요. 후훗."

진수는 친구가 많았다. 주말에 친구들과 운동장에 다니는 게 일상일 정도로 운동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런 진수도 가끔은 친구들이 아닌 나와 캐치볼을 하자며 옆구리에 글러브를 끼고 보챘었지.

나이를 먹어가도 어딘가 천진난만함이 남아있던 개구쟁이 같은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어느새 아버지가 되어 있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

"이거 기억나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진수의 방에 진열된 상장을 하나 손에 들었다.

"그래. 진수가 처음으로 백일장에서 받은 상이잖아."

"그때만 해도 진짜 진수가 작가가 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그러게."


진수는 속도위반 결혼을 한 다음부터 빡세게 공부를 하더니 그냥 공무원이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가정이 있으니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겠지.


우리는 방을 나서서 희진이의 방으로 향했다.


희진이의 방은 진수의 방과는 다르게 조금 포근한 느낌의 방이었다.

전체적으로 핑크색이 많은 방.

"희진이는 너랑 다르게 장모님이랑 비슷한 취향이었지. 방도 핑크색이고."

"우리 여보가 그렇게 공주님 취급을 하니까 공주병이 들어서 그래요."

나는 수진이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수가 축구교실에 다녔다면 희진이는 발레 학원과 피아노 학원에 다녔지.

하지만 발레 학원은 금방 그만뒀다.


진수와 다르게 몸을 움직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다.


대신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다루고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계속 예체능 공부를 해도 되느냐고 물어왔지.


나도 수진이도 희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했다.

희진이는 활짝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계속해서 예체능 공부를 했지.


하지만 음악으로 밥을 먹고  정도로 희진이의 재능은 특출나진 않았다.

대신 희진이는 디자인을 공부해서 회사에 취직했다.

우리는 취직했다며 눈물을 펑펑 흘리는 희진이의 등을 두드려주며 우리 딸 장하다! 그렇게 말하며 축하해줬지.

방에는 희진이가 그림과 음악에 관해서 공부했던 흔적이 가득했다.

"희진이가 처음으로 그렸던 그림 기억해요?"


"언제?"


"초등학교 때요."


"아~ 알지. 우리 가족이라고 그렸는데 뭔가 그림이 이상해서 친구들한테 놀림당했다던 그거 말하는 거잖아."


"그래서 오기가 생겨서 그림 공부한 거잖아요. 진짜 누굴 닮았는지."


"널 닮았지. 나도 좀 닮고."

우리는 방을 다 둘러본 다음 다시 거실로 나왔다.

이제 곧 이 방에 우리 둘만 남게 되는구나.

그게 안타깝게 느껴진다.

"장모님도 모시고 살고 싶었는데."


"오빠가 데려갔으니까 어쩔 수 없죠."


"이젠 오라비라고  부르네?"


"저도 나이가 있으니까요."


나는 수진이의 몸을 살짝 안아줬다.


"나에겐 아직 아간데."


"아가한테 애를 두 명이나 낳게 했어요? 범죄자네?"

"그러게. 내가 나쁜 놈이지."

"아하하!"


수진이도 내 몸을 마주 안아왔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절반이에요. 거의  왔어요."

"절반?"

"내 소원권."

"아."


"조금만 더 힘내요."

"그래.  약속은 꼭 지키는 남자야."

내 말에 수진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로마도 재밌었죠."


"어."

희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다 같이 유럽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로마의 휴일.

수진이와 연인이 되기 전에 봤던 그 영화처럼 명소를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맛있는 것도 사 먹으며 시간을 보냈지.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연인끼리 오지는 않았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래. 난 약속은 꼭 지켰지."

"네."

"그러니까 너도 약속 지키고."

"네."

그래. 이제 멀지 않았다.

이제  희진이가 결혼하고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부모로서 해야  역할이 끝이 난다.


지금까지 잔병치레 없이 건강히 살아왔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진 않겠지.

희진이까지 우리의 곁을 완전히 떠나 부모로서 해야 할 역할이 끝난다면 그땐 남은 시간을 전부 수진이를 위해 써야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수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평생을 내 곁에 있어 준 수진이가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


"아빠."


"왜?"

"나 결혼한다고 하니까 슬퍼?"

"그래, 이것아."


"아빠... 지금까지 키워줘서 고마워."

나는 순간적으로 눈이 뜨거워져서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난 평생 흘려야 할 모든 눈물을 쏟아냈다고 생각했다.

진수가 사고를 치고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뭔가 하나 해냈다는 생각과 짐을 덜어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울적한 기분이었다.


"아빠 울어?!"


"안, 운다니까..."

"아니, 왜 아빠가 울고 그래? 신부가 우는 날인데?!"


내가 옆에서 훌쩍이자 희진이가 당황해선 아등바등하고 있다.


이제 곧 신부 입장이 있는데 이렇게 울고 있으면  되겠지.


나는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 이제 놓아줄 때다.


이제 희진이도 여자가 되었다.

희진이를 지켜주는 건 내가 아니다.


이제 희진이랑 결혼하게 될 순박한 청년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겠지.


"행복하게 잘 살고."

"응."

"부부싸움 해서 집에 돌아오지 말고."

"응."

"아프지 말고."

"응..."


"아빠가 많이 사랑한다는 거 잊지 말고."


"응...나도... 아빠 사랑해..."


"화장 번진다 울지마."


"응..."


신부 입장이라는 사회자의 말이 들려왔다.

나는 아직 훌쩍이는 희진이를 에스코트해서 신랑이 기다리는 예식장으로 들어섰다.

신랑에게 희진이를 데려다주고 앞으로 행복하게 해달라는 말을 전했다.


"예! 평생 행복하게 하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나에게 맹세하는 사위.

긴장에 몸이 딱딱하게 굳은 숫기 없는 청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아버지, 울었어요?"

"아니."

"할아버지, 울었어?"

"아니란다."

어느새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한 진수와 귀여운 혜은이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저 희진이의 결혼식을 바라봤다.


희진이는 그냥 엉엉 울고 있어서 사회자도 신랑도 곤란해 하는 눈치였다.

"우리가 결혼식  땐 하하 호호였는데 말이에요."

"그러게. 진수 때도 그랬지."

"네. 희진이는 눈물바다네요."


"예체능을 했으니까 감수성이 풍부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럼  감수성이 메말랐다는 거에요?"


"아니, 넌 항상 가불기 쓰더라.  이렇게 사람이 치사해?"


"내 맘이죠."

우리가 희진이의 결혼식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옆에서 진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여전하시네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여전하지.


"사람이 확 바뀌면 죽을 날이 가깝다더라."


"재수 없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120살까지 사신다면서요? 우리 혜은이 결혼하는 것도 보고 손주도 보셔야지."


"할아버지. 오래오래 사세요!"


"그래. 그래야지."


"여보."


"응?"

"고생하셨어요."


수진이는 그리 말하며 내 손에 깍지를 껴왔다.

나는 수진이의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너도."

우리는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희진이의 결혼식을 지켜봤다.


이제 우리의 부모로서의 의무가 끝이 나는 광경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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