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4일차
정신은 차렸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있자 줄리가 어떤 여성이랑 얘기를 나눴다.
"진짜라니까요. 못 믿겠으면 들어가서 확인해 보세요."
"진짜? 그렇다면 큰 일이네.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야."
"제니퍼가 충격을 너무 받으면 안 될 텐데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하지만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마리의 목소리인가 보다. 엘리스가 존댓말을 쓸 일은 없으니까.
나는 손으로 내 머리를 짚었다.
"어! 세리아 일어났어요?"
마리의 목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더 아팠다. 너 원래 이렇게 활기찬 사람이었니? 조용하지 않았었나?
과거엔 어떻게 친구가 없던거야. 하는짓은 인싸인데.
"끄응."
나는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진 못하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지방이 빠졌던 날 보다 더 힘이 없다.
뒤에서 둘이 걱정하는 소리를 했지만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다리를 보았다. 관리하던 아이돌들의 다리가 이렇게 얇았던 것 같은데. 분명 대학 축제 때 본 기억이 난다.
어떻게 저 몸매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를까 궁금했었는데 내가 그 몸이 되니까 더 모르겠다. 어떻게 한거야.
내 다리가 이렇게 젓가락 같아서야 좋아하던 축구도 못하게 생겼다. 공 맞으면 뼈가 부러질 느낌이다.
역시 남의 몸이 바뀐 것 보다 항상 보던 내 몸이 바뀐게 체감이 확 됐다.
계속해서 뒤에 둘이 뭐라고 종알종알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거울 앞으로 간 나는 허리 라인과 골반, 그리고 허벅지로 이어지는 부분을 열심히 관찰했다. 기가 막혔다.
어깨 선이나 종아리 라인도 예술이었다. 물론 내 몸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평범해 보여도 괜찮다고 자부하던 내 얼굴이 너무 이질적으로 보였다. 180이란 키에 보정을 받았던 모양이다.
분명 엘리스는 키가 작아져도 잘생겼었는데. 이상하다. 난 아니네.
크로마키를 이용해서 마른 여자 몸만 떼 붙인 모양이다. 나는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와중에 소변이 마려웠다. 제일 이해 안가는 부분이다. 내게 먹고 마시는 쾌락을 뺏어놓고 왜 배설의 쾌락만 남긴 것인가.
뭔가 싸게 할거면 적어도 밥을 먹게 해줘야지 뭐 이리 불공정할까.
나는 자연스럽게 줄리나 마리에게 부탁하려다 둘과 눈이 마주쳤다.
"..."
순간 뇌정지가 왔다. 둘 다 원래 남자였다고 해도 지금은 완전 여자처럼 보이는데. 내가 오줌누는거 망을 봐달라고 하면 성추행인가? 아닌가?
고민하다가 또 헛 웃음이 나왔다. 하루만에 말라 비틀어진 몸매의 남자가 있다는 현실부터 틀려먹었다. 나는 그냥 줄리에게 부탁했다.
"줄리. 미안한데 저 화장실좀 부탁해도 될까요."
"아. 그래."
줄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는 머리 스타일만 이질적이었다. 굉장히 유명한 연예인이 벌칙으로 가발 쓴 느낌이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한 뒤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눴다. 앞에 줄리가 뒤돌아서 서있어 줬다.
그러다가 이제 이 소변기를 멀쩡히 쓰는 사람이 나 뿐이라는게 생각났다.
아직 다른 사람들도 소변기를 썼었나? 기억이 안난다. 괜히 다른 사람 화장실 들어가면 안 쳐다보다 보니까 이런 것이다.
새삼 침대에 누워있는 제니퍼도 어떻게 적응할지 걱정이 됐다. 그도 바지가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계속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오려 하자 애써 냉정하고 차분히 생각하려 노력했다.
볼 일을 다 보고 손도 씻고 나왔다. 인상을 찌푸린 나랑 눈이 마주친 줄리는 내 심정을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데 웃는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기분 나빠졌다. 그는 분명 남잔데 순간 여자 같아서 그런건가? 마치 날 비웃는 것 처럼 보여서 그런건가?
날 배려해서 화장실 앞까지 와준 줄리가 부정적으로 보여졌다. 스트레스가 다시 치솟는 모양이다.
내 뺨을 다시 찹찹 때렸다.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손을 자세히 내려다 봤다. 아까 손 씻을 땐 별 생각 없었는데.
광고에서 연예인들 손 연기 해주신다던 분이 생각났다. 이리 저리 돌려보자 곱고 예쁜 손이었다.
확실히 이 몸매에 더 어울리긴 한다. 근데 지금 난 내 손을 짓이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자학성 높은 사람이었나 싶다. 자존감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세리아. 제 목소리 어떻게 들려요?"
마리가 침대에 다시 앉는 나에게 물었다. 그러더니 도미솔미도 음계로 아아아아아를 한다.
"그래. 듣기 좋네."
"아니 그런 칭찬 말고 좀 더 생산적인 평가요. 그런거 잘 하시잖아요."
생산적인 평가라니.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주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나 일어날 때 아까 둘이서 하던 얘기 좀 마저 들을 수 있을까? 궁금한데."
그러자 마리는 박수를 딱 치며 말했다.
"아! 그거! 맞아요. 경찰이 우리 찾느라 수색하던거 있잖아요. 거의 확실하게 우리나라는 아니라던데요?"
"호오. 난 언제 우리나라를 벗어난거야?"
기가 막혔다. 분명 심부름 끝나고 집에 가던 길이었는데? 다른 나라로 옮겨졌다니. 대단하구만.
"그러니까요. 저도 분명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소설 읽고 있었는데 그 이후 기억이 없다니까요? 누가 남의 집 침대에서 다른 나라로 보내요. 말도 안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다른 소식은 없어?"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방금 들은 소식도 엄청나긴 했지만 매일 매일 더 심한 소식들이 기다리는 중이라 빡친다.
고개를 저으려던 마리는 다시 뭔가가 생각났는지 박수를 또 쳤다.
"아. 있어요. 그리고 우리를 대상으로 하는 사이트 있잖아요. 그 ts 프로젝트 사이트."
"어. 거기 들어가 봤어?"
"아뇨. 아이디를 엘리스만 알아서. 20만원 내기는 좀 그래가지고. 하여튼 거기서 투자를 한다고 막 나와서 찾아봤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지원 하는 방식이랑 투자 하는 방식. 근데 사실상 투자 느낌이 아니던데?"
"맞아요. 근데 찾아보게된 계기가 그거고 전 다른 걸 발견했어요. 좀 충격적인 사실인데 우리가 1등 못하면 5년정도 일한다는 말 처음에 했었잖아요. 기억 나죠?"
"당연히."
"그 5년동안 아이돌 일 하면서 지금 우리 몸 개조한 비용을 갚아야 한다네요. 이게 말이 돼요?"
"..."
하고 싶어서 하는 개조도 아닌데 비용까지 대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사탄도 울고 가겠다.
"큰일이네. 우리 몸에 생긴 변화들을 보면 천문학적인 액수일텐데."
"그니까요."
머리가 지끈지끈 했다. 이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꼴등을 해서 개조를 많이 받을수록 갚아야 하는 돈도 많다는 것이다.
옆에서 엘리스가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마리가 그의 옆으로 가서 물었다.
"괜찮으세요?"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리자 엘리스는 깜짝 놀랐다.
"깜짝이야!"
그러더니 자신의 목을 잡고 굉장히 넋 나간 표정을 했다.
"아아아."
엘리스는 몇 번이고 자기의 목소리를 테스트 했다.
"가나다라마바사. 에비씨디이에프지."
어떻게 들어도 여자 목소리였다. 살짝 저음이었다. 그래도 남자에 비하면 엄청 고음이다. 마리는 자기도 일어났을 때 다 했다고 말했다.
뜬금없이 성우 하면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발음이 성우같았나?
엘리스의 산발이 된 머리가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지금은 생각보다 정리가 되어있었다. 머리가 길어서 가라앉은 것인지 여기서 드라이를 해준건지는 모르겠다.
만져보고 싶었는데 만지면 화 낼 것이 뻔해서 건드리지 않았다. 어깨부터 가슴 부분까지는 노란색인 것도 웃겼다.
자기 머리를 잡아 당겨 보더니 그는 바로 아픈 소리를 냈다.
"아아!"
그는 일어나서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뭘 찾나 했더니 서랍을 뒤지다가 찾았다. 머리끈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머리를 묶었다.
"잘 묶네."
내가 묻자 엘리스는 인상을 팍 썼다.
"성인 되고는 엄청 길렀었어. 한 번 자르고 나니까 답답해서 다시는 못 기르겠다고 생각 했었는데. 강제로 길어졌네."
"길러봤다니 다행이네."
"다행은 얼어죽을 무슨 다행. 놀리지 마라."
나는 그의 반응을 보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여기 사람들은 반응을 잘해줘서 좋다. 하나 더 물어봤다.
"여기 머리끈이 있다는건 어떻게 알았어?"
그는 친절하게도 말해줬다.
"은근 다 있어. 만약 없으면 요청해도 될걸? 여기 방 한 번도 안 뒤져 봤냐? 와서 뭘 한거야?"
"여길 왜 뒤져. 도둑이냐?"
"넌 그냥 뒤져."
홧김에 말 한건지 엘리스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욕설로 쳐주지 않았다.
근데 너무 친하게 구는거 아니냐고. 만난지 4일만에 뒤진다는 말을 장난스럽게 하다니. 너도 인싸냐? 물론 장난이 아닌 말투였다.
"왜 저게 욕이 아니지?"
"그만 건드려라. 화낸다."
내가 또 건드리자 엘리스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몸이고 목소리고 다 변하니까 행동도 다 여자처럼 느껴졌다. 물론 인식은 남자로 인식중이다.
오히려 마리가 큭큭 웃었다. 엘리스의 화가 마리에게 갔다. 그는 양 손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
줄리는 아까부터 계속 인터넷을 보고있다. 어찌나 열심히 보는지 한 마디도 안 하고 집중 중이다.
마리는 그 얘기를 꺼냈다.
"아! 엘리스. 그 때 20만원 사이트에 내셨다고 했잖아요. 그 아이디좀 빌려주세요."
"왜? 뭐하게."
"무슨 얘기 있나 좀 보게요. 어제는 세리아가 써서 저 하나도 못봤잖아요. 네?"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줄리 끝나면 쳐줄게."
"앗싸. 고마워요!"
그 글을 보고도 저렇게 해맑다면 인정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만 댓글대로 실현이 안 된 상태고 다들 이미 글대로 일어났다.
지금 저렇게 해맑으면 댓글 보고도 해맑을 수 있겠네. 나만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