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8/259)

남미의 S급 빌런 후안 라즈카였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여자들의 프로필이다.

박운호의 여자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그에게 가족은 없었다.

애인은 넷 정도 되는 거 같았다.

여자들의 나이대도 취향도 다양했다.

섹시한 여자는 물론이고….

청순하고 순진해 보이는 여자나 체구가 작은 여자도 있었다.

상당한 잡식이었다.

각성자가 여러 여자를 두는 것은 지금 세상에 특별한 일도 아니고 그렇게 흠도 아니었다.

법으로는 여전히 일부일처인 곳이 많았으나.

대부분의 남자 각성자는 여자를 두셋씩 끼고 살았다.

각성자의 자손이 각성할 확률이 더 높게 나온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세계는 각성자의 일부다처를 지지하지도 비난하지도 않는 그런 암묵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가족이 없는 박운호이기에 표적이 결국 그의 여자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프로필을 살펴보던 후안의 시선이 한 여자에게로 쏠렸다.

얼굴은 당연히 미인이었다.

유부녀였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과 나이 차이도 거의 나 보이지 않았다.

박운호는 그녀의 딸과도 동거하는 깊은 관계였다.

그는 모녀를 동시에 건드린 거다.

게다가 그녀는 임신한 상태다.

가정이 있는 임신한 여자였다.

'이 여자….'

후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임신한 여자의 아이가 박운호의 아이라는 것을.

'박운호의 아이를 가진 여자라….'

놈의 힘이라면 남편과 이혼시키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여전히 가정을 유지 시키고 있었다.

조사내용을 보니까 그의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악취미였다.

호구인 줄 알았는데 은근히 음침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이해는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어두운 면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그렇기에 더욱 소중할 수 있다.

후안은 비열한 미소와 함께 혀로 입술을 훑으며 말했다.

"역시 이 여자가 좋겠군."

*

*

*

제주도에서 간만에 패드를 잡고 느긋하게 게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똑. 똑.

"아, 아저씨…."

노크 소리와 함께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유나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아, 아저씨,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데요. 어떡하죠?"

"음?"

당연히 나는 유나의 어머니를 알고 있다.

유나의 엄마라면 김경숙이다.

얼마 전에도 그녀의 집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임신도 해서 그다지 밖을 돌아다니지는 않을 텐데.......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애초에 김경숙은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퇴근했을 때부터 보이지 않았데요. 잠깐 나간 건 줄 알았는데......그 뒤로도 들어오지 않았데요. 아버지 말로는 낮에 산책하러 나간 뒤부터 돌아오지 않은 거 같다고…."

'수니 부탁해.'

[알았어요.]

수니에게 바로 김경숙의 행방을 찾아보라 했다.

[낮의 산책까지는 CCTV로 확인이 됐어요. CCTV 사각지대에서 납치당한 것으로 추정돼요. 그녀를 납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은 이거에요.]

시꺼먼 SUV 차를 내 시야에 보여줬다.

'추적은?'

[차량의 흔적은 부산항에서 흔적이 끊겼어요. 아마도 배를 탄 것 같아요.]

공대 파티에 그녀가 들어와 있었다면 위치를 추적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겠지만….

집에서 얌전히 태교에만 집중하는 그녀가 다른 아이들처럼 사냥할 일도 없었으니 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임신까지 한 평범한 주부인 그녀를 굳이 납치할 이유가 있을까. 그녀가 납치당할 만한 원한을 샀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나겠지?'

내가 공대 파티에 넣지 않은 걸 노리지는 않았을 테고 놈들이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동안 특별한 원한을 산일은….

왕천이랑 중국 정도다.

그 외에는......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왕천 놈이 그랬을까?'

다른 건 몰라도 자존심은 세 보였으니, 왠지 그러지는 않았을 거 같았다.

'도대체 누가?'

내가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나도 모르게 원한을 샀을 수도 있다.

그때 유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아마도 경숙이의 새로운 소식이라도 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전화를 받은 그녀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아, 아저씨…."

유나가 울상을 지으며 내게 휴대폰을 건네줬다.

"나?"

"네…."

유나를 통해서 내게 전화라….

그녀에게서 휴대폰을 받았다.

「박운호.」

난데없이 내 이름이 흘러나온다.

남자 놈의 목소리였다.

"누구야."

「후안 라즈카.」

내가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인이다.

남미의 S급 빌런.

"무슨 일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놈이 범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뭐, 식상할 수도 있지만.....네 소중한 사람을 내가 데리고 있다.」

"미쳤군. 너......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거냐?"

「당연히 알고 있지. 내 용건은 간단하다. 네 비전을 내놔라. 비전도서관에 잠겨있는 것은 물론이고 네가 아직 숨기고 있는 것까지.」

바로 본론을 말했다.

놈은 일반 납치범처럼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

당연하다.

S급 빌런인 후안 라즈카는 국가가 나서도 손을 쓸 수 없는 범죄자였다.

협상 정도는 할 수 있을까.

놈이 원하는 게 명확했으니 그것도 의미 없는 짓이다.

"후......지금이라도 그녀를 얌전히 데려온다면 네 놈 팔 하나로 용서해주마."

「허.....박운호. 아직 네 입장을 이해 못한 건가?」

"너야말로 이해 못한 거 같은데. 난 지금 너에게 굉장한 자비를 베풀고 있는 거다. 경고했다. 지금 바로 그녀를 데려오지 않는다면 넌 곱게 못 뒤질 줄 알아라."

「허....어이없군. 박운호, 내게 깔려서 울부짖는 네 여자를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다음에 연락하지. 네 여자의 안부는 멋진 동영상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어.」

-뚝.

후안놈은 버릇없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

*

*

전화를 끊은 후안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박운호는 강한 척을 하긴 했지만, 후안은 그에게서 동요를 느꼈다.

후안은 확신했다.

그는 자기 여자를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부류가 아니다.

박운호의 여자가 도착하면 적당히 맛을 보고 그 영상을 보내 다시 한번 협상? 하면 된다.

그것도 안 되면 그다음은 배 속의 아이를 가지고 협박한다.

그것도 안 된다?

다른 여자를 노리면 된다.

그게 히어로와 빌런의 차이다.

언제나 방어만 하는 히어로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격만 하는 자신의 입장에서야 뭘 시도 하든 손해가 없었다.

빌런을 이기는 히어로는 영화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악당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끊임없이 괴롭히다 보면 박운호는 결국 자신에게 비전을 가져다 바치게 될 것이다.

*

*

*

"......."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비전을 원한다는 것은 내가 풀어놓은 마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은혜를 베풀어줬더니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다.

각성하고 이 정도로 화가 난 적이 있을까?

그만큼 내 여자에 대한 소유욕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다.

평소에는 닫혀있던 감각을 풀었다.

극한으로 가속되는 사고.

확장된 의식은 끊임없이 뻗어나간다.

제주도를 넘어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일부분까지 어느 정도 내 인지 영역으로 들어왔다.

이 정도로 전력을 다해 의식을 확장해 본적 본적은 없다.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는….

세상을 관조하는 전지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듦과 동시에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후안 놈에 대한 분노도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감정이 크게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인식해서 그런 건지...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런 의문은 제쳐두고.

확장된 의식 안의 범위에서 김경숙을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김경숙은 내 인지 범위를 벗어났다고 하는 게 맞는 거 같았다.

역시.....모자란가?

'수니, 후안 놈의 위치는?'

[후안 라즈카의 위치는 파악했어요. 브라질 상파울루에요. 주인님이라면 모를까. 시간상으로 비행기로 움직이더라도 김경숙 님이 도착했을 거리가 아니에요. 배라면 더욱 그렇고요.]

김경숙은 아직 놈에게 옮겨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당장 상파울루에 가서 후안 놈을 조질 수야 있다.

후안 놈을 먼저 조진다면?

후안 놈 부하들의 충성심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그녀에게 해코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내게 겁을 먹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만의 하나도.

잘못될 수 있는 그 작은 확률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순서는 명확했다.

역시 김경숙을 먼저 구한다.

그다음이 후안 라즈카다.

그러면 그녀가 어디 있는지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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