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파악할 길이 없다.
지금이 안된다면 그렇게 만들면 된다.
로그인 스킬을 사용해 좀비 세계의 통로를 열었다.
옆에서 불안한 표정을 하는 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라."
"예? 아저씨? 그게 무슨…."
<23지구로 접속하시겠습니까?>
어리둥절한 표정의 유나를 보고 나는 빠르게 좀비 세계의 통로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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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풍경이 바뀌면서 가구 하나 없는 삭막한 방안이 나타났다.
좀비 세계의 새로운 거처.
학교에서 이사한 고급 아파트의 세이브 포인트를 설치한 방이다.
방 하나를 세이브 포인트를 위해 통째로 쓰고 있는 셈이었지만, 어차피 워낙 넓은 집이니 상관없었다.
이 좀비 세계로 들어온 이상.
시간이야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후안 그놈을 빨리 조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벤토리 스킬을 올리지 말 걸 그랬나.'
생각해보면 별 차이 없었을 거 같다.
육체 강화 스킬을 올리는데 들어갈 스킬포인트는 상당하다. 모아놨다고 하더라도 한 단계 올리는 요구 포인트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거다.
나는 일단 메시지를 보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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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거실에 놓여 있는 소파에 아이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앉았다.
"오빠....화나셨어요? 저희가 뭐 잘못했나요?"
지아가 물었다.
"화?"
거실의 소파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조금은 움츠린 얼굴을 하고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평소 툴툴대던 한수지마저 조용했다.
'실수했군….'
나는 화가 난 게 맞았다.
후안 놈에게.
그리고 그게 은연중 분위기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그녀들에게 화난 건 아니었지만 엉뚱한 곳에서 뺨을 맞고 와서 애먼 아이들에게 인상 쓴 셈이다.
"미안. 너희들에게 화가 난 게 아니다. 다른 곳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을 뿐이야."
"에이....괜히 긴장했네."
긴장했던 한수지가 그제야 얼굴을 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지아는 내가 그녀들을 불러 모은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잠시 자리 좀 비워야겠다."
“예? 어디 가시게요? 얼마나요?”
지아가 내 말에 깜짝 놀라 묻는다.
“글쎄....나도 잘 모르겠군.....메시지도 보낼 수 있으니 연락은 어렵지 않을 거다.”
"그건 그래도…."
내 의식의 확장영역을 넓혀야 한다.
작정하고 사냥해서 육체 강화 스킬을 하나에서 둘 정도 더 올릴 생각이었다.
지금 여분의 스킬 포인트가 4포인트다.
지금 육체 강화 스킬 레벨을 하나 올리려면 거기서 60포인트가 더 필요하다.
두 단계 올린다고 치면 총합이 188포인트다.
원래 세계에서 확장해본 내 지금의 인지 범위를 생각하면 하나보다는 역시 두 개가 확실하다.
'시, 시간 좀 걸리겠는데….'
188포인트라고 생각하니 느낌이 확 와닿는다.
청주 쪽을 생각도 해봤지만.
청주 쪽은 이그니스와 생존자 사냥꾼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나을 거 같았다.
내가 직접 나서서 자원을 고갈시켜 버린다면 이그니스야 다른 곳에 보내면 되지만, 생존자들은 순식간에 실직자가 된다.
청주 쪽이야 빠르던 늦든 어차피 내 스킬 포인트가 될 지역이었다.
다른 곳을 노리는 것이 나았다.
'그나저나….'
꼬맹이들을 바라봤다.
'역시 넣는 것이 낫겠지?'
꼬맹이들이 경숙이와 같은 일을 당한다면 잠자리가 사나울 거 같았다.
"왜요? 아저씨?"
내 시선을 느낀 채원이의 동생 채영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물어본다.
결국 꼬맹이들도 공격대 안으로 집어넣었다.
경숙이를 납치당해 보니.
그동안 느슨했던 신경에 어느 정도 경각심을 가지게 했다.
내가 소중하다고 하는 이들은 전부 공격대파티에 넣는 게 맞는 거 같았다.
그러면 안전은 보장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단순히 위치 추적뿐만이 아니라 여차하면 수니로 보호할 수도 있으니….
수니는 내가 허락한다면 육체 강화와 로그인 외의 스킬들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정말 위험하면 수니를 통해 이그니스를 보낼 수도 있다.
"바뀌는 건 없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울 뿐이야. 이그니스는 언제나처럼 부탁하고."
냉정하게 이곳에 꿀 빠는 시스템을 구축하면서부터 여기에서 내가 가장 하는 일이 없었다.
"알겠다. 주군.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라."
이그니스가 듬직하게 말했다.
*
*
*
눈을 뜨니 나신의 여자 둘이 내 양팔에 안겨있었다.
지아와 설화였다.
그녀들은 나를 꼭 끌어안고 잠을 자고 있었다.
떠나기 전 두 여자와 밤새 뒤엉켜 뒹굴었다.
그녀들도 열정적으로 내게 매달려왔다.
지금은 그 여파로 꿈적도 못 하고 있었지만.
두 여자의 볼에 가볍게 뽀뽀해주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작별 인사까지는 필요 없겠지.'
먼 곳에 갈 생각이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다.
조용히 집을 나섰다.
'채원이도 안아줬어야 하는데….'
그런 아쉬움을 느끼며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
계단 위 옥상 입구 익숙한 얼굴의 예쁘장한 단발머리의 소녀가 서 있었다.
채원이였다.
그녀는 조금 토라진 듯도 보였다.
나도 지아와 설화, 둘과 밤새 뒹군 것이 있어 찔끔했다.
그녀의 가슴에는 4개의 마나의 고리가 돌고 있었다.
재능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엿한 중위 마법사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가시는 건가요?"
"그래."
"데려가 달라고 하면 안 되겠죠?"
"흠…."
작심하고 사냥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게 매달리는? 채원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일단 이곳을 떠나면 여자를 보기 힘들게 뻔했다. 수니도 이쪽 세계에서는 아주 바쁜 몸이다.
작심 하루도 되지 않아 마음이 흔들린다.
사람의 의지가 이렇게 약하다.
"곤란하게 해드렸네요."
채원이 다가와 내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왔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츕. 츄읍. 춥….
그렇게 한참 동안을 포옹한 채 서로의 혀를 탐닉했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 그사이에 투명한 실이 늘어지다 끊어졌다.
"하아......안녕히 다녀오세요."
채원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짝 상기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부끄러운 거 같았다.
그런 그녀의 평소답지 않은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채원이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거주지를 떠났다.
*
*
*
일단 먼저 북쪽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괴물 장수말벌들처럼 거주지에 위협이 되는 놈들이 있으면 스킬 포인트도 벌 겸 처리할 생각이었다.
남쪽은 굳이 가보지 않아도 괴물 장수말벌 녀석들에 의해 초토화됐을 거 같았다.
남쪽에서 가장 위협적인 건 괴물 장수말벌 군단이다.
그리고 놈들과는 휴전협정을 맺었다.
아이러니하게 놈들 때문에 남쪽의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지만.....거대 멧돼지라는 괜찮은 파수병이 있다.
그리고 놈들이 뒤통수를 칠 거 같지는 않았다.
휴먼이 아니라 그런가?
그래서 조금 더 신뢰가 갔다.
일단 서울 쪽을 보고 계속 북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의식을 확장해 주변을 크게 둘러볼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과도하게 퍼뜨리는 것은 정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자제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았다.
그것을 사용했을 때 크게 부담을 느낀 건 아니었다. 확장된 인지 범위 안의 세상을 관조하는 신이라도 된 느낌이랄까.
그게 문제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느낌이….
내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좋은 말로 명경지수.
막말로는 성욕까지 감퇴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후안 놈에 대한 분노와 김경숙의 납치조차 그저 덤덤하게 느껴지던 그 감각은........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종종 비슷한 생각을 하곤 했다.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대할 때와 다르게, 그 외의 인간을 대할 적에는 조금 감정이 무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의식을 확장하는 일은 무언가 확연해지기 전까지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이동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살펴보면서 중급이상의 침식체가 보이면 처리하면서 움직일 생각이었다.
몸을 띄워 방향을 잡아 날아가려던 그때.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그곳을 바라보니 상당한 거리를 두고, 먼 하늘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존재가 보였다.
그것은 거대한 까마귀였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까마귀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치는 건가?'
당연히 놓칠 수는 없었다.
녀석에게 심상치 않은 포인트의 향기가 느껴졌다.
-퍼엉!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빠르게 가속해 녀석을 따라갔다.
전에도 잠깐 본 적이 있는 놈 같았다.
전에 멧돼지들이 말한 수다쟁이 까마귀가 녀석이 아닐까.
《거기서라.》
녀석을 추적하며 텔레파시를 보냈다.
멧돼지들과 소통이 될 정도면 알아먹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을 들어 먹은 건지 녀석은 더욱 속도를 올렸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이 느껴졌다.
'수니.'
[알았어요! 주인님! 부스터 온!]
더욱 강력한 추진력이 발생하면서 녀석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