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0. 돌아온 탕아 (2)
* * *
증강현실이란 말이 있다.
줄여서 AR이라고도 부르는 이 기술의 핵심은 현실에 컴퓨터가 만든 정보를 더한다는 데 있다. 인간의 지각 능력만으론 놓치기 쉬운 부분을 이렇듯 전자기기 따위가 필요에 따라 보조해 주는 것이다.
「소원을 입력해 주십시오.」
하지만 증강현실은 오늘날에도 개발 중이었고,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관계로 완벽한 상용화는 먼 기술이었다. 더구나 도윤은 한낱 스마트폰이 이렇게 화려한 홀로그램 화면을 띄울 수 있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도윤 님?」
채팅창의 글자가 도윤을 재촉했다. 마치 진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어쩔 줄 몰라 하던 사이, 두어 명의 승무원이 일등석 객실로 들어와 그를 지나쳤다. 복층 구조로 된 기체의 특성 때문이었다.
“……?”
홀로그램은 24인치 노트북처럼 커다란 화면을 자랑했다. 오죽하면 널따란 일등석 공간을 거의 대부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도윤을 지나친 승무원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무심했고, 그로 하여금 한 가지 의문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여기요.”
“네, 손님.”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도윤이 승무원 호출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마침 그의 뒤에 있었던 은하가 다가왔고, 접객 규정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뒤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혹시 안 보입니까?”
은하가 갸웃거렸다. 그러다 곧 도윤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당황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선 단순히 제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홀로그램이 보이지 않느냔 물음이었는데, 경력 있는 승무원이 보기론 뭔가 불만을 가진 손님이 클레임을 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부족한지 말씀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홀로그램은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도윤이 고갤 숙인 은하에게 손을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가 입에 담은 말은 정말로 보이지 않고서야 내뱉을 수 없는 사과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셔도 좋아요.”
“정말 괜찮으신가요?”
“네, 제가 뭘 착각했나 봅니다.”
은하가 영 꺼림찍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도윤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가 물러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마트폰을 만졌다. 저에게만 보이는 홀로그램 속 채팅창은 현실을 감지하는 기능도 있었는지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본 프로그램에 대하여 궁금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타자를 치기 위한 자판은 스마트폰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어색하지 않게끔 나름대로 고안된 설계 같았다.
「너는 누구지?」
도윤은 익숙한 손짓으로 타자를 쳤다. 사실 스마트폰을 건넨 게 바로 그 스티븐임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물음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몰랐다.
「저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보조 프로그램 ‘Moonlight’입니다.」
「뭐, 스티븐의 회사에서 개발한 AI 비서라도 되나?」
「본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도윤 님께서 말씀하신 재력가 스티븐 모리스와 무관합니다.」
그 즈음 기내엔 일반석 승객도 모두 태운 모양인지 문이 닫히고 있었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선 의례적인 절차였던 기장의 안내방송이 시작되었고, 육중한 기체는 활주로를 따라 이륙할 준비를 시작했다.
「우도윤 님은 본 프로그램의 실행 권한을 충족하신 바, 이용자에 해당됩니다.」
「이용자는 제 서비스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움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소원을 비시겠습니까?」
이윽고, 비행기가 앞으로 나아갔다.
「나랑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때까지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도윤은 작게 한탄했다. 살아있지도 않은 기계를 대상으로 한탄하는 건 퍽 우스꽝스러운 짓 같았지만, 이런 일에 있어서 중요한 건 언제나 자기만족이었다.
그래서 도윤은 지금껏 제 마음속에 담아둔 울분을 프로그램에게 토했다.
「억만장자는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갖고 노나?」
「본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도윤 님께서 말씀하신 재력가 스티븐 모리스와 무관합니다.」
「이걸 내게 건네준 게 그 양반인데도?」
「본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도윤 님께서 말씀하신 재력가 스티븐 모리스와 무관합니다.」
「이따위 장난감을 준들 대체 무슨 소용이야?」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 있다. 금세기 최고의 대부호가 제 사랑을 손에 넣은 그 순간, 평범한 소년이었던 도윤은 제 가족을 무참히 빼앗겼다는 것이다.
공허한 마음, 결핍된 애정.
그때의 아픔은 오랜 시간이 지난 아직도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남아있다.
“손님? 곧 이륙합니다. 안전을 위해 스마트폰은 집어넣어주십시오.”
전담 승무원이란 직책답게 도윤을 주시하고 있던 은하가 다가와 주의를 주었다. 부드러운 제스처를 취하기 위해 몸을 숙이자 돋보인 가슴이 시선을 확 끌었다.
“죄송합니다.”
도윤은 군말 없이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그제야 은하는 이륙에 대비하기 위해 일등석 쪽 점프 시트로 이동해 앉았다. 조종석 방향에 위치한 그 보조 좌석은 그렇기에 다소곳이 앉은 승무원을 감상하는 좋은 전시대였다.
외항사와 달리 국내 항공사의 규정은 엄격했다. 남성이 주로 포진한 항공종사자의 경우엔 수염을 기르는 것조차 엄격히 금지되었고, 여성이 주된 객실 승무원의 경우엔 유니폼을 입은 채로 다리를 꼴 수 없게 돼있었다.
무릎 위로 오는 짧은 스커트, 흰색에 가까운 크림 베이지색 스타킹, 다소곳이 모은 다리와 허벅지 부근에 얹은 두 손은 마치 예절이라는 두 글자를 형상화한 것 같았다.
“…….”
욕망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쩌면 모든 항공사의 삯에는 눈요깃거리가 되는 비용도 들어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스튜어디스란 직업이 주는 마력은 대단했다. 단순히 직업만으로도 그러할진대, 절 담당한 은하는 그 황홀한 외모로 매력적이다 못해 탐스럽기까지 했다.
도윤이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소유욕을 느꼈다. 저 아름다운 여자를 손에 넣고 싶단 욕구를 실감했다. 그리고 때마침 이륙한 기체는 스치듯 지나가던 그런 욕구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이륙 시엔 기체 중량이 가장 무거울 때라고 했다. 그래서인진 몰라도 덜커덩거리는 비행기가 불안감을 조성했다. 엔진의 소음이 청력을 거의 마비시키고 이성을 흐트러놓았다.
‘만에 하나 이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마지막으로 갑작스러운 기압의 변화가 주는 이질감은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조차 현실처럼 가정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평소라면 기를 써서라도 잊으려고 했을 부정적 감정까지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 인생은 끝이겠지.’
문득 드는 감정만큼 강렬한 게 또 없다. 도윤은 우울감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그 최후의 순간 제가 바랄 것은 과연 무엇일지 곱씹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륙이 끝나고 기체가 성층권 경계에 다다랐을 무렵 눈을 떴다.
굉음 어린 진동 때문이었을까?
어쨌거나 굉장히 실감 나는 가정이었던 건 분명했다. 제 마지막 순간이라는 상황에 몰입했던 도윤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던 스마트폰을 다시 꺼냈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방전된 물건에 불과했던 그것은 기다렸다는 듯 예의 홀로그램을 송출했다.
「어떤 소원을 비시겠습니까?」
실로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만약 소원을 들어준다는 네 말이 진짜라면…….」
도윤은 거침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설령 억만장자라도 이 정도 스케일의 농간을 부릴 수 있으리라곤 믿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니 이게 진짜 그의 농간이라도, 이렇게나 공을 들였다면 한 번쯤 속아주지 못할 것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본능에 충실한 순수한 삶을 살고 싶어.」
고작해야 스물둘 나이에 너무 많은 비애를 겪었다. 제아무리 억만장자의 후계자가 된들 죽은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자신 또한 영원한 애정결핍으로 남는다. 그렇기에 도윤은 더 이상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았다.
도리어 얻고, 지배하며, 누리고 싶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마음을 얻길 원해.」
은하의 미모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녀는 일개 항공사의 승무원일 뿐이다. 비단 그녀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모든 여인들이 대부분 그렇다. 하루아침만에 금권의 황태자로 둔갑한 도윤은 제가 원하는 여자라면 누구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짜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지배한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일까?
누린다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일까?
도윤에게 있어 진정한 사랑이란 곧 헌신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쇠약해지던 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성심껏 간호한 어머니처럼, 그는 그런 성의야말로 진실된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돈으로 사는 사랑만큼 무가치한 건 없다고 여겼다.
그러한 헌신, 그러한 성의는 감히 돈 몇 푼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소원이 접수되었습니다.」
「히로인 컬렉션 앱을 다운로드합니다.」
「……1%」
잠시 후, 채팅을 입력할 수 있는 공간에 불과했던 홀로그램이 새롭게 탈피했다. 마치 근사한 운영체제가 깔린 스마트폰처럼 일종의 초기화면을 송출했다. 그 가운데 텅 빈 공간을 설정과 도움말, 그리고 히로인 컬렉션이란 앱이 한 칸씩 차지했다.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히로인 컬렉션 앱을 실행합니다.」
반투명한 파스텔톤 스크린이 도윤의 눈앞에 떠올랐다.
「히로인 컬렉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본 애플리케이션은 이용자가 원하는 히로인을 공략할 수 있게 돕는 프로그램입니다.」
「수집된 히로인은 공략에 필요한 기능을 해금하는데 사용되며, 영구적으로 보존됩니다.」
히로인 컬렉션은 사람의 마음을 공략하게끔 돕는 도구였다. 빈 도표와 수치, 그리고 채팅창을 비롯한 여러 인터페이스는 이 신비로운 앱이 어떻게 쓰이는 물건인지를 암시했다.
도윤이 작게 감탄하며 이런저런 버튼을 눌러보았다. 공략에 필요한 기능을 해금할 수 있다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앱은 아직 많은 기능이 제한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기능을 조금씩 얻기 위해선 말마따나 많은 히로인의 공략을 필요로 했다.
「첫 번째로 공략할 히로인을 지정하십시오.」
「대상을 히로인으로 지정하기 위해선 통성명이 필요합니다.」
새삼스럽지만 히로인 컬렉션은 사랑의 묘약처럼 편의주의적인 도구가 아니었다. 단지 이 스마트폰이 채팅창에서 스스로를 소개했을 때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한 작은 도움에 불과했다.
‘재밌네.’
도윤이 줄곧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좌석의 오른쪽 손잡이에 위치한 리모컨으로 승무원 호출 버튼을 눌렀다.
이제 이 앱이 어떻게 돌아가는 물건인지는 대충 감을 잡았다. 남은 건 과연 그 기능이 저를 놀라게 한 것만큼이나 진짜냐는 것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이륙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비웠던 은하가 나타났다.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뒤 도윤의 말을 기다렸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요.”
“아마 음료 카트 끄는 소리일 겁니다. 일반석 승객분들에게도 제공해야 해서요. 조금 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알고 있었다. 본론을 좀 더 수월하게 꺼내기 위해 괜히 던져본 말에 불과했다.
“승무원님이 오늘 제 담당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맞습니다.”
도윤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결코 치근대거나 추파를 던지는 일로 오해될 일은 없게끔, 신사답고 무덤덤하게 통성명했다.
“우도윤이라고 합니다. 그쪽 성함을 좀 여쭤도 될까요?”
“퍼스트 클래스 담당 선임승무원 홍은하입니다. 혹시 저희 서비스에 어떤 미흡함이 있어 그러신 거라면…….”
“아닙니다. 제가 아는 분과 얼굴이 비슷해서 혹시나 했어요.”
은하가 알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실은 전혀 공감하지 못했지만, 그마저도 미소로 화답하는 것이야말로 일류 승무원의 태도라 할 수 있었다.
“그럼 다른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아까 마신 위스키, 이름이 뭐죠?”
“발렌타인 위스키 30년산입니다.”
“한 잔 더 부탁해도 될까요?”
“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바닥을 딛고 일어선 그녀가 갤리 쪽으로 사라졌다. 커튼이 쳐진 관계로 이번에는 그 뒷모습을 감상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전세를 내다시피 한 일등석이었기에 소리를 들을 순 있었고, 도윤은 그렇게 귀를 기울이다 들린 음성으로 인해 눈을 크게 떴다.
「지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히로인 공략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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