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컬렉션-1화 (1/28)

* * *

〈 1화 〉 0. 돌아온 탕아 (1)

* * *

커버보기

누구나 억만장자의 삶을 꿈꾼다.

부호란 상상도 못했던 기회가 주어지는 것보다, 이미 주어진 기회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빈곤이 악랄한 이유는 뻔히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알면서도 놓쳐야만 하는 부당함에 있으니까.

도윤도 한때는 그런 공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영양가 없는 망상에 불과하지만 그랬다. 난치병에 걸린 아버지가 금전적인 이유로 연명치료를 중단했을 때, 학자금이 부족한 나머지 반강제로 휴학을 했어야 했을 때 그런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수백 번도 더 좌절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울 정도의 푼돈이었다. 그래서 더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억만장자의 삶을 꿈꾸는 사람이야 많지만, 그것을 실제로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까. 더구나 그 삶이 하루아침만에 이뤄진 것이라면 말이다.

“우도윤.”

뉴욕 JFK 국제공항의 퍼스트 라운지는 조용했다. 속세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사업가 때문이었다.

스티븐 모리스, 금세기 최고의 대부호.

어느 누구도 거스르길 원치 않는 억만장자는 지금 도윤의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새까만 브리오니 정장을 걸친 그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혹처럼 정정했다. 미노년이란 표현에 걸맞게 멋스러운 수염과 지팡이도 인상적이었고, 육성 또한 차분하지만 울림이 있었다.

“넌 내가 어머니를 빼앗은 악당으로 보이겠지.”

카리스마는 결코 숨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도윤은 하얗게 샌 백발과 주름진 이마조차도 관록의 하나로 느꼈다. 실제로 스티븐은 난다 긴다 하는 월 스트리트에서조차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는 뉴욕의 맹주였다.

“하지만 나는 내 사랑을 쟁취한 주인공일 뿐이다.”

그러니, 그가 어제 장례를 마친 어머니의 배우자만 아니었다면 둘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평생을 아무런 접점도 없는 채로 서로를 모르며 살아갔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스티븐?”

“우리는 네가 이 사업을 물려받았으면 했다.”

“그 얘기는 끝난 걸로 아는데요.”

이른 아침의 대화치곤 영 거북한 분위기였다. 작별을 앞둔 채로 나눈 말이라서 더 그런 경향이 있었다. 도윤은 제가 앉은 탁자의 찻잔을 들고 조용히 한 모금을 머금었다. 억만장자가 매일 아침 제 아내와 함께 마셨다던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는 맛이 퍽 쓰기만 했다.

“차가 영 쓰기만 하네요. 어머니는 왜 이런 차를 좋아하셨던 걸까요.”

“삶을 곱씹기에 좋아서겠지.”

“그래도 배우자랍시고 꿰뚫어보신단 겁니까?”

이번에는 스티븐이 찻잔을 들었다. 진하게 우러난 홍차의 향을 맡은 그는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곧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내려놓았다.

“네 엄마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결코 영생에 집착하는 추태를 보이지 않았지. 병에 걸려 힘겨워하면서도 결코 인간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이제는 그만 죽은 네 아비 곁으로 가고 싶다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았어.”

“조금 의외네요. 당신이라면 어머니를 억지로라도 살려낼 거라 생각했는데.”

“물론 그러고 싶었지.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다. 나는 지금껏 그녀를 사랑했고 또한 존중해왔어. 그러니 최후라고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널 부탁한다는 당부에 이렇게 나선 것처럼 말이다.”

빈말은 아니었다. 어딜 가든 경호원과 수행원을 무더기로 데리고 다니던 억만장자가 오늘만큼은 이렇게 홀로 전송하러 나왔으니까.

“받거라.”

스티븐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난생처음 보는 회사의 스마트폰이었다. 차가운 강철로 된 그 기기의 후면엔 Moonlight란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이게 뭡니까?”

“나는 살면서 네 엄마 이외의 사람에겐 단 한 번도 져준 적이 없다. 그리고 그녀를 기리는 의미에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다.”

꺼진 스마트폰은 사뭇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달빛을 머금은 듯 유려한 이 물건은 억만장자가 내민 것만큼이나 특별한 것이었다.

스티븐이 액정에 지문을 대는 시늉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해야 전원을 켤 수 있다는 무언의 설명이었다.

“절연하다시피 했어도 네게는 어머니였다. 소중한 사람이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그래서?”

“재력은 곧 권력이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당부한 것처럼 네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잠시 이 뜻을 접어야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용의가 있어.”

도윤은 늙은 계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움푹 팬 눈두덩이 속에 숨은 그의 눈빛을 들여다보았다. 사별의 아픔을 새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다소 지친 기색이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래 보였다.

“제가 어쩌길 바랍니까?”

“탕아가 무엇을 하고 돌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

“돌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스티븐이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때마침 라운지에 울리는 방송도 곧 출발할 항공편이 도윤의 것임을 말해주었다. 슬슬 작별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 의붓아들을 바라보다가, 호젓한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다녀오거라.”

그런 말과 함께였다.

그리하여 도윤은 홀로 남았다. 실로 혈혈단신이었다. 가진 거라곤 상복으로 맞춰 입은 아르마니 정장 한 벌이 다였다. 그 외투 품속에 든 항공권과 탁자에 놓인 예의 스마트폰뿐이었다.

‘네가 그 사람을 너무 미워하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절연했던 어머니가 위중하단 소식을 들었을 땐 몹시 갈등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재혼한 탓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임종을 지킨 건 잘한 선택이었다.

해묵은 감정으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면 그건 너무 어리석다. 그래서 도윤은 의연히 상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였고, 많은 곡절 끝에 어머니의 유지를 이었다.

‘그게 당신의 뜻이시라면요.’

양부조차도 어색하기 마련인데 계부는 오죽하랴. 그러나 스티븐 모리스는 진정으로 애처가였다. 검은 머리 외국인처럼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의 비결이란 오로지 아내에 대한 사랑이었다.

“……어머니.”

그렇게 중얼거리고 난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탁자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증을 떨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잊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것이 친애하던 사람의 유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 * *

JFK 국제공항, 터미널.

일찍이 확인한 바 있던 항공권은 스타게이트 사의 것이었다. 인천국제공항을 허브로 삼고 있는 그 항공사의 특징이란 단연코 서비스였다. 소위 퍼스트와 비즈니스라 불리는 일, 이등석의 접객이란 그 유명한 에미레이트 항공에 비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번거로운 탑승 수속을 일사천리로 마친 도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항공기에 탑승했다. 전용기를 여럿 보유하고 잇던 스티븐은 가급적 제 비행기로 귀국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런저런 신경전 끝에 결국은 민항기의 일등석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수려한 제복을 입은 승무원 여럿이 단체로 인사했다. 스타게이트 항공사는 그 서비스만큼이나 눈이 즐거운 제복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청자색 재킷과 블라우스, 하얀 스카프와 스커트로 치장한 여인들의 인사는 뭇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좌석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선두에 선 여인이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좌석은 일등석이니만큼 당연하다는 듯 기내 전면부에 위치해있었다. 가늘고 고운 손가락으로 티켓을 건네받은 승무원이 보기 좋은 몸짓으로 확인 절차를 거쳤다.

“맨 앞 좌석이시네요.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의 승무원이 영업용 미소와 함께 도윤을 인도했다. 굴곡진 몸에 쫙 달라붙은 제복 탓인지 뒤태가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부드럽고 한껏 차오른 엉덩이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살짝씩 움직이는 게 외설스러웠다.

“아, 혹시 외투 보관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이윽고 근사한 퍼스트 클래스의 전경이 드러났다. 널따란 공간에 침대형 좌석이 드문드문 있는 곳이었다. 구석에는 일등석 승객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욕실이 자리하고 있었고, 중앙에는 그런대로 갖출 것을 모두 갖춘 바까지 있었다.

“웰컴 드링크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간단히 입가심할 술로 아무거나 부탁합니다.”

“위스키 괜찮으실까요?”

도윤이 끄덕였다. 승무원은 언제나와 같은 미소로 답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돌아왔을 땐, 은으로 된 쟁반에 위스키가 담긴 잔을 가져와 제공했다.

“필요하신 신문 있으십니까?”

“아뇨, 괜찮아요.”

일등석의 과한 서비스는 때때로 성가시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린 승무원이 가지런히 공수하여 허리를 숙인 뒤 물러갔다. 매뉴얼에 따른 접객 절차를 충실하게 따른 태도였다.

“후…….”

탁자에 놓인 위스키를 가볍게 몇 모금 넘긴 도윤이 그제야 제 좌석에 착석했다. 답답한 듯 목을 죈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뱉었다.

“실례합니다, 잠시 괜찮으십니까?”

숨을 돌린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른 승무원이 저를 찾았다. 복장이 조금 다르고, 명찰도 유달리 부각된 것으로 보아 직위가 제법 높은 모양이었다.

“제가 오늘 모시려고 하는 부사무장입니다.”

“아, 예.”

“그리고 여기 홍은하 씨도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를 하고 있자니, 부사무장이란 여자가 다른 승무원 하나를 더 소개했다. 누군가 했더니 앞서 절 자리로 안내한 바로 그 승무원이었다. 이것저것 물으며 귀찮게 하는 것이 참 극성이다 싶더니 제 전담이기에 그런 모양이었다.

“오늘 고객님을 모실 전담 승무원 홍은하입니다.”

스튜어디스란 단어엔 분명 그 직업이 주는 마력이 있다. 은하가 바로 좋은 예시였다. 깍듯한 태도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완벽한 인사를 건넨 그녀가 살포시 웃었다. 지금껏 피로에 시달리던 도윤의 이목조차도 끌 정도로 인상적인 방점이었다.

“언제든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성숙함이 묻어나는 이목구비는 과연 미인의 것이었다. 제복에 가려진 몸매 또한 육감적이란 사실을 숨기긴 쉽지 않았다. 여기 이번 운항에서 저를 전담한다는 승무원은 부정할 여지 없는 절색이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두 승무원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떴다. 도윤은 이번에도 은하의 뒷모습을 보며 갸웃하다가 잔을 들었다.

새삼스럽지만 그의 나이는 아직 스물둘이었다. 그리고 도윤은 썩 잘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연애 경험 한 번 없었다. 고백이야 몇 번 받아본 적 있어도, 먹고살기 바쁜 탓에 줄곧 거절만 했었으니까.

‘여유가 생겨서 그런가.’

도윤이 피식거렸다. 장례가 끝난 뒤, 스티븐은 제 생활이 불편하지 않도록 여러 편의를 봐주었다. 당장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돈도 그중 하나였다.

생계에 쫓겨 일하던 시절엔 도통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남들은 평생 일해도 손에 넣긴 힘든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마저도 스티븐의 재산에 비하면 극히 일부였는데도 그랬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네.’

일등석 승객은 제일 먼저 탑승하고 또 내린다. 그 말은 곧 이륙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단 뜻이기도 했다. 더구나 미주에서 내항하는 노선은 북극 항로로 16시간이나 소요되지 않던가.

그래서 등받이를 젖힌 도윤은 그대로 눈을 붙이려 들었다. 그러다 자세가 불편해 뒤척이던 중,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 걸리적거렸다. 불편함에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넣어보니 차가운 강철 스마트폰이었다.

스티븐이 말없이 건넨 바로 그 스마트폰.

그때 그는 이 물건의 용도를 묻는 도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단지 액정에 지문을 대는 시늉만 하며 어떻게 켜는 것인지만 알려주었을 뿐.

제가 투자한 회사의 신상이라도 되는 것일까?

도윤이 무심하게 제 엄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어떻게 되먹은 구조인지는 몰라도 액정이 반짝였다. 후면에 적힌 것처럼 Moonlight란 글자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환영한다는 문구가 담긴 채팅창이 눈앞에 증강현실로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우도윤 님.」

「더 나은 삶을 위한 보조 프로그램 ‘Moonlight’입니다.」

「어떤 소원을 비시겠습니까?」

당혹감을 금치 못한 도윤이 얼빠진 표정으로 넋을 놓았다.

“……뭐야 이거.”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