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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30화 (30/31)

〈 30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30)

* * *

12월 1598일. 사무치는 추위는 여전했다.

아직 황태자는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괜찮다 싶다가도 쓰라린 기억이 쓴물처럼 올라오기 때문이었다.

식욕도 잃고, 배변욕조차 없는 황태자는 빛바랜 동상 같기도 했다.

그러나 수면욕은 있었다. 종종 그는 알현실 옥좌 위에서 잠들어 꿈을 꾸었다.

황태자를 사로잡은 저주는 아직 포기를 모르는지, 그의 양심을 자극하려 들었다.

굶주린 사람, 헐벗은 사람들이 꿈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한결같이 그들은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황태자를 욕했고, 위정자로서 역할을 못하는 황태자를 비난했다.

그리고 겨울을 불러온 황태자를 원망했다.

인정한다. 전부 내 잘못이다.

하지만 겨울을 되돌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황태자의 의지는 꺾였기 때문에. 본래부터 그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황태자는 잠에서 깼다.

“미안. 깼어?”

“의외로군. 이미 루진 아르페지나를 따라, 이곳을 떠난 줄 알았는데.”

연한 푸른빛의 드레스. 금발.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백옥같이 하얀 피부.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였다. 그녀가 옥좌에 앉아 있는 황태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라. 짜증나니까.”

그녀만 보면 구토가 올라왔다. 한때나마 황태자비에게 호감을 품은 적도 있었다.

겉은 도도한 아가씨가 속은 여리다는 점이 좋았다.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또 싫었다. 이 감정은 동족 혐오라는 녀석이 아닐까.

“미안해, 황태자. 하지만 오늘은 네게 사랑을 강요하러 온 게 아니야.

그냥…… 이야기를 나누러 왔어.”

“네 얼굴 따위를 마주보고 얘기하길 원치 않아.”

“그러면…… 이러면 어때?”

황태자비는 옥좌 뒤로 돌아갔다. 황태자의 뒷편에서, 옥좌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옛날에 오빠랑 이런 식으로 등을 붙이고 앉아서 대화하곤 했어.

나. 우리 집에서 천덕꾸러기에다, 고집 센 울보였거든.”

아르페지나 가문은 기사의 전통이 강한 보수적인 가문. 기가 센 위나 아르페지나는 그런 집안 분위기를 못 견뎌했다.

“오빠는 기사가 되고 싶지 않은 이단아였고, 나는 계집애 주제에 아르페지나 공작이 되고 싶은 욕심쟁이였어.

아르페지나 가문원들은 그런 우리 남매를 못마땅해 하였지. 언제나 우리들의 의지를 꺾으려 들었어.

보수적인 가문의 교육 방침을 같이 욕하면서, 오빠랑 나는 친해질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뭐?”

“부끄러운 말인데, 나…… 오빠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다?

어수룩하지만 밉지 않은 사람. 미숙하지만 성실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상형이야.

네가 오빠를 닮아 좋아했어.”

“내가?”

황태자는 납득하지 못했다. 자신처럼 철두철미한 냉혈한이 어디 있다고.

멍청할 정도로 착한 루진과 차갑고 계산적인 자신은 사자와 유니콘의 차이처럼 닮은 구석이 없었다.

“아니야. 닮았어. 너는 모르겠지만…….”

위나는 오빠를 좋아했다. 하지만 친오빠랑 결혼할 순 없는 노릇이니, 오빠를 닮은 사람을 찾았다.

겉모습이 아닌, 마음이 닮은 사람. 위나 아르페지나, 그녀가 울고 있을 때, 다가와 안아주던 사람. 그게 황태자였다.

좋아했다. 결혼과 함께 자신을 떠난 오빠와는 다르게, 영원히 자신의 곁에 황태자가 쭉 머물러주길 바랐다.

황녀 아스트리아를 질투했다. 오빠를 또 빼앗기는 듯하여서.

황녀도 여동생인 만큼, 자신처럼 오빠를 빼앗기기 싫어할 테니, 위나는 기를 쓰고 황태자를 황녀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 들었다.

결과적으로 위나의 그 행동들이 황태자에게 상처가 되었다.

사랑과 소유욕을 구별하지 못한 데서 온 참사였다.

“미안해. 황태자. 전부 내 잘못이야. 나는 어린애였어. 울고 떼쓰기만 하면, 당연히 네가 나만 바라볼 줄 알았어.”

때 늦은 사과와 함께 위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후우.”

사람의 마음에 이타심이 깃드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그것은 타인의 얼굴에 눈물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다.

황태자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위나의 곁으로 갔다.

“울지 마. 누나.”

“미안해…….”

황태자는 눈물 흘리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한다. 어쩌면 나약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황태자는 자신이 눈물에 약한 사람이란 것을, 애써 숨겼다.

그 숨은 면모를 위나는 알아챘다. 때문에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황태자. 그렇게 아무 여자에게나 친절해서는 안 돼. 전부 착각하게 되어버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황태자는 눈물 흘리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그도 울고 싶으니까. 자신이 울고 있을 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안고 달래주길 바라니까.

받고 싶은 대로 황태자는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이 위나를 착각하게 만들 줄은…….

“황태자. 나…… 네 비밀을 한 가지 더 알고 있다? 너는 나랑도 많이 닮았으니까.

나는 할아버지를 좋아했어. 할아버지는 나 같이 성미 더러운 손녀딸을 많이 칭찬해주셨거든.

외로운 사람은 칭찬받길 바라는 법이야.”

이것은 진작에 누군가 황태자에게 해줬어야 하는 말.

“고마워, 황태자. 불쌍한 우리들을 사랑해줘서.”

아.

가슴을 찌르는 것과 같은 아픔이었다.

헌데 차가운 고통은 아니었다.

뭉클거리는 애틋함.

머나먼 여행길을 떠났다 돌아와, 지친 몸으로 어머니의 스프를 한 모금 입에 넣어 삼켰을 때 느껴지는 목메임.

아. 나는 칭찬에 목말라 있었구나.

황태자의 눈물샘이 터졌다.

“그깟…… 말뿐인 감사인사…….”

낯선 감정에 황태자는 부정했다. 그러나 부정하려해도, 그깟 말뿐인 감사에 이끌려, 황태자는 황태자비를 끌어안고 말았다.

“어마마마…….”

황태자가 진정으로 모후 소피아 아르첼에게 원했던 것. 어머니의 칭찬.

황태자는 어머니께 칭찬받길 바라였다. 어머니께서 지어주시는 기쁨의 미소를 원하였었다.

너무 늦었지만, 늦게나마 황태자는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다.

***

“어때? 후련해졌어?”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

속이야 후련하긴 했다. 황태자는 위나 아르페지나 너머,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은 물러가지 않았다.

“어마마마를 잃은 슬픔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복수심마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너희들이 어마마마를 죽였어.”

“응…….”

위나 아르페지나는 서글프게 긍정했다. 황태자는 변명 못하는 위나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나도 알아. 나는 사적으로 복수심을 품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음을. 나라를 다스릴 책임이 있는 왕은 그래선 안 되는 거야.

나의 슬픔과 목적 없는 분노로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신민들이 고통 받았는지…….

원망 받아도 할 말은 없지.

사실 나도 노력하고 있었어. 겨울을 거두어들이려고. 그러나 나의 심층의식이, 상실감이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감정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의지로 인간이 모든 걸 가능케 했다면, 세상이 이런 형태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질투. 오만. 식욕. 색욕. 탐욕. 나태. 분노.

이들 죄악을 초월한 사람을 우린 성인이라 부른다. 일반적인 사람은 이들 죄악의 유혹에 쉽게 굴복한다.

피곤한 사람은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쉬이 일어나지 못한다.

배고픈 사람은 빵의 유혹을 참을 수 없다.

나보다 잘난 이웃이 있으면 왠지 시샘하게 된다.

작은 일에도 인간의 의지가 이리도 쉽게 꺾이고 마는데, 온 세상을 아우르며 떠받치는 의무는 그 얼마나 커다란 의지를 필요로 할지.

그것이 슬픔에 꺾여 겨울을 불러온 황태자를 원망할 수 없는 이유였다.

오히려 위나는 황태자를 비난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잘났으면 황태자의 의무를 대신 짊어지라고.

그러나 황태자의 무의식은 이 세상 모든 영혼과 연결되어 있는데, 황태자는 자신보다 영혼의 크기가 큰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온갖 부와 권력을 약속해도, 영원히 치료할 수 없는 충치 하나를 달고 살라고 하면 망설이는 게 인간이었다.

더구나 황태자가 감내해야하는 고통은, 충치 하나 정도가 아니라, 온 세상의 슬픔을 대신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었다.

황태자는 실체·감각·생각·행동·의식과 연결된 오감을 매일같이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그 고통을 버텨내기에 황태자가 이 하계의 주인일 수 있었다.

이 세계는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인해 굴러가고 있었다.

“성녀 에스텔과 황녀 아스트리아에게서 나는 세계의 진실을 들었어, 황태자.

내가 모르는 곳에서 너는 희생하고 있었어. 그러면서도 잘난 체하지 않았고, 나의 고통을 알아 달라 횡포 부리지도 않았어.

정말 고마워. 그 동안의 말 없는 보살핌에 감사해. 하지만 말뿐인 감사 인사로는 모자라겠지?”

위나 아르페지나는 황태자에게 깜짝 선물을 주기로 했다.

이미 알현실 밖에서 ‘그녀’가 귀를 쫑긋거리며, 자신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렴. 아르첼라.”

황태자비의 부름과 함께 알현실 문 한쪽이 열렸다. 토끼 인형을 안은 다섯 살쯤 되는 소녀가, 부끄럽다는 듯 쭈뼛거렸다.

하얀 드레스의 소녀는 망설이다, 이내 알현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부끄러워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

“맙소사…….”

황태자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인가.

은빛 머리카락의 귀여운 소녀. 키가 작아진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 황태자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가 한참을 걸어서 황태자 앞에 섰다.

“아아.”

소녀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황태자는 소녀를 끌어안고 말았다.

“어마마마…….”

그러다 이성을 찾고, 소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은 모후 전하를 닮았고, 머리카락도 어마마마와 같은 은색이었으나,

“아니구나. 어마마마의 눈 색은 ‘하늘색’이었어. 하지만 이 소녀의 눈 색은 ‘은회색’이야. 이 아이는…… 누구지?”

“나와 너의 딸이야. 이름은 아르첼라.”

아르첼라는 북녘의 처녀란 뜻이다. 하지만 이런 뜻도 가능하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의 딸.’

“왜 위나, 네가……?”

“이 아이가 너의 위로가 되길 바랐어. 황태자.”

아르첼라는 황태자와 황후 소피아 아르첼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

저주받은 출생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위나는 아르첼라를 자신의 친딸인 양, 이 때까지 길러왔다.

친아들 알데어의 존재가 아르첼라에게 상처가 될까 두려워, 루진 아르페지나, 오빠 부부에게 맡겨 보낼 정도로.

“아, 아바마마……. 귀여운 아르첼라를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해주세요.”

아르첼라가 쑥스러워하며 황태자를 불렀다. 그리고는 웃어주었다.

황태자는 구김살 없는 딸의 미소에서, 그녀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슬픔에 눈이 흐려져, 너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이 아빠를 용서하렴.”

다시금 황태자는 딸을 꼭 끌어안았다.

얼어붙은 마음이 녹는 듯했다. 그녀야말로 진정 은빛으로 빛나는 별의 불꽃이었다.

“아르첼라. 너는 은방울꽃을 본 적이 있니? 봄과 여름 사이에 피는 꽃이란다. 너를 닮아 무척이나 아름다운 꽃이지. 약속컨대, 곧, 겨울이 물러날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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