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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29화 (29/31)

〈 29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전(29)

* * *

12월 570일. 아마 그쯤 되었을 것이다. 세계는 황태자의 슬픔 탓에 눈에 잠기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차례대로 황태자와 인연이 있던 여인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탄원했다.

“태자 전하. 이만 슬픔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처음은 성녀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이 울며 빌었다.

“에스텔. 나는……”

황태자는 지치고 얼어붙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절의 순환은 멈춰버렸지만, 황태자의 시간만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도 흐려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황태자가 완전히 기운 차린 것도 아니었다.

분노와 증오 이후에 찾아온 감정은 허무함.

황태자는 허무했다. 허무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태자 전하! 부디……. 사람들이 얼어죽고 있습니다. 또 굶주리고 있습니다! 저의 미미한 기적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성녀의 신실한 기도조차 하늘에 닿지 않으니, 그녀는 이제 어찌해야 할까?

이미 에스텔은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황태자 앞에서 옷을 벗었다. 목련꽃 같이 희고 순결한 살결이 드러났다.

“게일포드 공작이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별의 불꽃이 필요하다고. 저의 이것으로 전하의 슬픔을 달래드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날따라 에스텔은 몹시도 떨었다. 그녀와 황태자가 살을 섞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아마 에스텔은 알고 있던 것 같다. 지금 이 행동은 정답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 외에 황태자를 위로하는 법을 모르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리 와.”

황태자는 거부하지 않았다. 에스텔은 황좌 바로 밑에 기대어 앉아 있는 황태자에게 다가왔다.

처음 안긴 그날처럼 황태자의 다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황태자는 에스텔을 껴안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너의 머리카락은 하얗구나. 예전보다도 더 하얀 것 같아. 신성력을 과도하게 짜낸 부작용이라지.

머리카락도 하얗고, 속눈썹도 하얗고, 피부조차 하얀. 마치 너는 하얗게 타버린 잿가루와 같구나.”

황태자는 그가 아는 여인 중에 에스텔을 가장 많이 아꼈다.

동질감. 동병상련.

신앙에 모든 것을 바치고 타버린 에스텔이, 이 세계의 체제와 시스템에 갉아 먹힌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되어서.

“조금쯤은 자기 자신을 아끼도록 해. 전부 태우고 나면, 남는 것도 없으니.”

안아주었으나 안아주지 않았다. 에스텔의 어깨만 감싸 쥐었을 뿐, 살과 살을 섞진 않았다. 이만 황태자는 에스텔을 밀어내었다.

“태자 전하! 제발……”

황태자가 불러온 겨울과 맞서 싸우느라, 에스텔의 신성력은 또 다시 고갈되었다.

신성력을 보충하려면, 하계의 주인이자 기적의 현현인 황태자에게 반드시 안겨야 했다.

“이 이상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말아줘.”

황태자는 에스텔을 외면했다. 결국 에스텔은 울며 알현실을 떠나야만 했다.

기적을 베푸는 성녀조차 잃은 세계는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부셔지기 시작했다.

12월 935일. 이번엔 율리아 게일포드가 황태자를 찾아왔다.

그녀는 검을 쥐고 있었다.

“당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목을 베어 떨어뜨려 놓으면, 머리든 몸통이든 하나는 죽겠지요!

잘게잘게 조각을 내버리면, 부활조차 할 수 없겠지요!

그냥 죽으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겨울만을 불러오겠다면, 그냥 죽어버리십시오!”

개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언제나 황태자를 졸졸 따라다니던 암캐였던지라, 율리아의 격한 반응이 신선했다.

실로 간만에 황태자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다.”

황태자는 순순히 목을 내놓을 준비를 했다. 율리아는 황태자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카이사리아와 카이사리아의 신민들을 위하여. 나, 율리아 게일포드는……”

위로는 왕에게 충성하고, 아래로는 성실히 영지민을 보살피니, 게일포드 가문은 카이사리아의 귀족 가문 중 가장 귀족다운 가문이었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속물 귀족들과 부대껴야 했던 황태자가, 그나마 믿고 의지했었던 가문.

그들마저 없었다면 황태자는 더더욱 빨리 절망하고, 지쳐버렸을 것이다.

그런 게일포드 가문마저 돌아섰다. 황태자의 운명도 이제 끝이라는 소리였다.

더없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황태자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다.

“저는…… 못해요.”

마지막 순간, 결국 율리아는 칼을 내렸다.

“태자 전하! 왜 자신의 목숨을 그리 쉽게 포기하십니까! 차라리 저를 원망해 주십시오!

황후 전하를 죽인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를 황제에게 팔아넘기고, 시신마저 불태운 원수의 딸이 당신 눈앞에 있단 말입니다!”

율리아는 구원 대신 복수를 바라였다. 차라리 황태자가 복수심에 불타 일어나길 소원하였다.

“처음엔 원망하였다. 하지만 의미 없더라. 오히려 내가 너에게 묻고 싶구나.

너의 순결을 짓밟고, 네가 지키고자 하는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남자가 네 눈앞에 있다. 왜 너는 나를 원망하지 못하는 것이냐?”

여기사는 기사다움을 잃은 채 눈물 흘렸다.

“저는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짐을 대신 짊어질 만큼 영혼이 강하지 않습니다.”

“공작이 가슴 아픈 진실을 가르쳐준 모양이로구나.”

율리아의 아버지 레온 게일포드 공작은 카이사리아 황실의 사생아. 딸인 율리아에게도 카이사리아 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율리아는 황태자의 사촌 누나였다. 그러나 황태자가 억지로 수여받은 왕의 의무를 대신해 짊어질 수 있을 정도로, 영혼이 강하지 못했다.

율리아가 여황제가 되어도 겨울을 물러가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리도 무기력한데, 황태자더러 감히 강해지라 충고할 수 없었다.

“복수는 삶의 원동력이라 하지. 너는 나의 복수심이라도 자극하여, 나를 일으킬 작정이었느냐?

옳지 않아. 허무로 가득한 내 마음이 겨울을 불러왔듯, 아마 복수로 내가 일어선다면, 나는 이 세계를 불태우고 말 것이야. 결과는, 같을 것이야.”

“모르겠습니다, 전하. 저는 이 세계보다 당신이 더 소중합니다.”

율리아는 황태자의 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끅끅거리며 울었다.

감히 또 사랑한다 고백하지 못했다.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이 황태자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알기에.

“다 큰 어른이 또 울기는.”

황태자는 가만히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는 열아홉. 채 스물을 못 넘긴 소년이 마음 여린 누님을 다독이고 있었다.

“복수 같은 건…… 다음 생에. 그때는 마음껏 괴롭혀주도록 하지. 하지만 현생에서의 나는 현생의 너를 보듬어주고 싶구나.

원망하지 않겠다. 오히려 용서를 빌고 싶다. 완전무결하지 못했던 너희들의 왕을 용서하라.”

황태자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나 할까.

현생의 행복을 기억도 안 나는 전생 덕분이라는 듯,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정당화하는 속물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불행, 어머니의 죽음도.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전생 탓 따윈 하긴 싫었다.

환생을 믿지 않는 황태자가 현생의 복수심을 놓는다는 것. 즉, 황태자는 율리아를 완전히 용서하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사랑을 강요했던 것. 의무를 다하라 다그친 것. 그리고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했던 것까지.

전부 용서하기로 했다.

“돌이켜보니, 너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실수밖에 안했구나. 율리아.

마치 덩치만 크고 속은 여린 대형견 같아. 낡은 컵 하나 실수로 깨트리고 주인의 눈치를 보는.”

황태자는 율리아를 계속해서 다독였다. 그녀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그녀는 꼬박 하루, 울다 지쳐 잠들었고, 잠 속에 눈물을 잃고 깨어났다.

“이만 돌아가라. 나 대신 카이사리아를 지켜주렴. 신민들이 좋은 영주를 필요로 할 터이니.”

국가를 다스릴 왕이 오래도록 부재하였으니, 구심점을 잃은 카이사리아는 분명 잘게 쪼개졌을 것이다.

왕에게 버림받은 백성들을 지켜 달라, 황태자는 책임감 없고 부끄러운 부탁을 했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황태자는 또 한 사람을 떠나보냈다.

12월 1247일. 루진 아르페지나의 부인, 테오도라 이세티아가 찾아왔다.

의외의 방문이라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네가 여기에 있지?”

“부군께서 차마 죄송스러워, 태자 전하를 뵙지 못할 것만 같다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용건은?”

“남편과 저는 이만 아르페지나의 영지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성녀의 기적도 바닥을 드러냈고, 중앙 권력의 통제력도 약해진 지금. 시시각각 카이사리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황제는 없고, 유력 세력가가 지방에서 웅거하는 ‘대공위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각자도생하는 것이지요.”

위기는 기회. 결국 세력이 가장 큰 아르페지나 공작 가문을 중심으로 국가 체제는 개편될 것. 테오도라는 근 미래에 자신이 왕비가 될 것이라며 자찬했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끝없는 겨울로 무너져가는 세계임에도, 끝까지 야망과 욕심을 못 내려놓는 사람이 있었다.

어리석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달리 말하자면……

“생명력이라 해주십시오. 야망 없는 인간은 죽습니다. 당신처럼요.”

“그런가…….”

황태자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죽음을 바라는 마음과는 달리, 아직 심장은 희미하게 뛰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내주지 않겠나? 바깥 세계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당신이 불러온 미증유의 재앙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더더욱 강인해졌습니다.

농사는 못 짓게 되었지만, 사냥은 가능하지요. 요즘 카이사리아에는 사슴이 많아요?”

“사슴? 그 사슴들은 어디서 왔는데?”

“이따금씩 눈이 그치고 해가 뜰 때가 있지요. 겨울이라고 항상 눈이 오란 법은 없으니. 그 때 자란 이끼와 잡초를 사슴들이 먹고 자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테오도라는 바뀌어버린 카이사리아 인들의 생활양식을 황태자에게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과거에 2년 가까이 카이사리아에 흉년이 들었을 무렵, 황태자가 얘기하지 않았나.

바다로, 산으로 나가서 물고기며, 들짐승이며 잡아들이라.

그처럼 사람들은 어업과 수렵을 중심으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눈을 감고, 테오도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황태자는 상상했다.

도시에는 추위를 막는 모피를 두른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삽을 들고 눈을 파내고 다져 길을 만들고, 그 눈길 위로 썰매들이 나다닌다.

추위에 강한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많이 자랐고, 이들 나무들을 베어다가 집을 지었다.

집 안에 모닥불을 지피며, 물을 끓여 스튜를 만들었다. 모닥불 앞에서 여인은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보십시오, 전하. 당신 없이도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테오도라는 황태자를 비웃듯 결론 내렸다. 우리들은 신의 보살핌 없이도 살아갈 수 있노라고.

“재밌네.”

“후우. 생각보다 긴 얘기가 되었군요. 이제 만족하십니까? 외톨이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우리들의 주인이시여.”

그래. 만족했다.

황태자는 달콤씁쓸한 기분을 맛보았다.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너는 아스트리아의 피를 손에 넣었고, 그것으로 나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

테오도라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황태자의 시선을 피했다. 쑥스러운 고백을 할 때 나오는 그녀만의 작은 습관이었다.

“제 남편 루진이 당신을 좋아했으니까요. 욕심이 너무 없어서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제 남편인지라. 그 뜻을 존중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황후 전하를 죽게 하여 당신의 노여움만을 샀지만요.”

“역시나라고 할지, 의외라고나 할지. 참사랑이었구나.”

“네. 좋아합니다. 저의 부군 루진 아르페지나를.”

남편에 대한 진한 사랑을 드러내며 테오도라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독사도 사랑에 빠져, 싱그럽게 웃는 법을 알았다.

“그런데 부부 금슬과는 별개로, 하필 우리 부부 사이에는 아이가 없어서 말이지요.

황태자비가 낳은 아이, 알데어를 우리 부부가 입양하기로 했습니다. 그 아이는 미래에 아르페지나 공작이 될 겁니다.”

황태자는 문득 떠올렸다.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는 황태자의 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알데어.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지만. 새삼 궁금해져 알데어는 잘 지내고 있는지를 황태자는 물었다.

“당신이 적장자로 인지해주지 않아, 알데어는 사생아의 오명을 썼습니다.

어차피 부모의 사랑을 기대하지 못하는데다가, 당신의 이름 따위 땅에 떨어졌으니, 아버지의 후광이랄 것도 없습니다.

저는 알데어에게 진짜 부모가 누군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알데어도 저와 루진을 부모로 알고 있습니다.

괜히 우리 가족의 단란함을 들쑤시지 않았음 하네요? 알데어는 제 아들입니다.”

이만 테오도라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하고, 알현실을 떠났다.

뒤늦게 황태자가 말했다.

“그런가…….”

같은 사건을 두고도 누군가는 비극을, 누군가는 과거를, 누군가는 희망을 본다.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가에는 모래시계가, 겨울의 추위에 얼어 깨져 있었다.

모래시계는 망가졌어도 시간은 흐른다. 모든 것이 변한다.

그가 입은 상실감 또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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