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27)
* * *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 죽었다. 독살이었다. 황태자는 바로 범인 찾기에 나섰다.
독이 든 와인을 가져온 시녀장 에크모르가 가장 먼저 심문 당했다.
“대답하라. 누구의 사주냐?”
아무도 건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여전히 황태자는 어머니의 시신을 껴안고 있었다.
독을 탄 것이 틀림없는 와인 잔도 곁에서 나뒹굴었다. 황후의 숨이 끊어진 것은 채 1분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황태자는 냉철할 수 있었다. 범인의 목숨과 피로 어머니의 원혼을 달래드릴 작정이었다.
“저의 독단입니다.”
에크모르 할멈은 범행을 순순히 인정했다. 동기 또한 밝혔다.
“겉모습만은 누구보다도 아름다웠으나, 속은 그렇지 못한 여자였습니다.
태자 전하. 그녀는 태자 전하의 어머니 된 입장을 이용하여, 카이사리아를 능멸하였습니다.
나라를 망치는 요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황후는 정이 깊은 황태자의 천성을 이용하였다. 어머니가 아닌 여자가 되어 황태자에게 안겼다.
이로써 황태자의 약점을 잡았다. 이런 성품 천한 여자가 권력을 잡으면 어떤 식으로 악용할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소피아 아르첼이 권력을 남용하기 전에 미리 선수 쳐 죽였다. 그것이 시녀장 에크모르 나나이젤의 범행 동기였다.
“어차피 늙어 뒤질 몸, 혼자 전부 껴안고 가겠다 이건가? 그렇게는 안 되지.”
공범이 있을 것이다. 범행을 사주한 진범도 있을 것이다.
황태자는 진실을 묻어둘 생각이 없었다. 모조리 끌어내어 전부 다 죽여 버릴 것이다.
“황녀 아스트리아를 끌고 와.”
여동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
“오라…… 버니…….”
황녀 아스트리아가 여기사들의 손에 끌려 나왔다. 그녀는 알현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황태자는 서 있었고, 황좌에는 어머니의 시신이 앉혀져 있었다.
여전히 피 묻은 드레스를 입고 계신 황후를, 돌아가신 어머니의 뺨을 황태자가 어루만졌다.
“어마마마의 생명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 칼로도, 독으로도 결코 어마마마를 죽일 수 없어.
그랬던 분이 뺨은 왜 이리도 차가우시며, 눈조차 바로 못 뜨시며, 가슴에는 왜 들숨과 날숨이 드나들지 못하는 걸까?”
드디어 황태자가 어머니에게서 눈을 떼고, 황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쌍둥이답게 황녀는 눈 색과 머리카락 색이 검정으로 황태자와 똑같았다.
얼굴도 황후의 친딸답게, 황후랑 똑 닮아 있었다.
그래서 동생은 아름답다. 황녀의 미모를 흠모하는 영랑들이 그녀에게 ‘죽음을 부르는 검은 튤립’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지.
그 별명처럼 황녀가 죽음을 가져왔다.
“오라버니. 미안해요…….”
동생의 눈물에 황태자는 오히려 화가 치밀었다. 증거품이랍시고 갖춰놓은, 셰르링산 레드 와인이 따라진 유리잔을 집어 던졌다.
“쳐 울지 말고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
“꺅!”
유리잔이 황녀 바로 옆의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황태자의 심문은 계속 되었다.
“어마마마께선 죽을 수가 없는 몸이란 말이다! 그런데 돌아가셨어! 왜일까! 내게 걸린 저주가 흐트러졌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 흩어진 모든 근심과 슬픔을 한 데 모으고 살펴야 하는 황태자의 의무.
그 반대급부로 얻은 권리가 생명의 기적이었다. 공감의 능력이 아니라.
황태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었다. 황후도 마찬가지. 황태자가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황후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황제의 전리품 시절, 황후는 매일같이 이어지는 능욕을 못 이겨 자살을 시도했다. 손목을 긋고, 침대보를 찢어 그것으로 목을 매었다.
그래도 죽지 못했던 모후 전하께서 고작 독으로 돌아가시다니. 본래대로라면 벌어질 수가 없는 사건이었다.
“나는 내게 걸린 저주를 중화시키는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다. 그것은 아스트리아, 네가 가진 망각의 마력이지.”
황태자는 바닥을 적시는 적포도주를 가리켰다.
“내가 마신 와인에서 나는 피 맛을 느꼈다. 네 피지? 아스트리아.”
“……네에. 오라버니.”
아스트리아는 팔소매를 거두어, 붕대감은 팔을 황태자에게 보여주었다.
“누가 네게서 피를 짜냈느냐?”
황태자의 추궁에 황녀는 몹시도 떨었다. 자신이 입을 열면 많은 사람이 다친다. 황태자의 명성에도 금이 간다.
“저, 저는 제 아들 클로비스의 일로 당신을 몹시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와인에 저의 피와 독을 탄 것은 오라버니께 복수하기 위한 것.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신 것은 마셔야 할 잔이 바뀌었기 때문으로……”
“닥쳐! 순진한 얼굴로 더러운 거짓을 입에 담지 마! 네 피를 담은 레드 와인은 나의 몫, 독이 담긴 화이트 와인은 어머니의 몫! 순서가 지켜져야만 가능한 독살이야!”
레드 와인을 황후가 마셔보아야 피 맛밖에 나지 않는다. 화이트 와인을 황태자가 마셔봐야, 존재의 저주 탓에 황태자는 죽지 않는다.
레드 와인에 섞인 황녀의 피로 황태자의 마력을 어그러뜨리고, 황태자의 마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황후가 화이트 와인의 독을 들이키고 죽는다.
철저히 계산된 계획범죄가 틀림없었다. 황후만을 노린.
“굳게 다문 황녀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을 알지. 아스트리아. 네 아들이 보고 싶으냐?
네 앞에서 네 아이 클로비스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잘라야만, 진실을 이야기하겠느냐?
어서 얘기해! 클로비스가 네 앞에서 토막 나는 꼴이 보고 싶지 않으면! 누가 감히 네 피를 얻어갔어!”
오라버니의 날 센 추궁에 아스트리아는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그녀는 진실을 토해냈다.
“잘못했어요, 오라버니……. 실은 아르페지나 공작부인 테오도라가……”
테오도라 이세티아. 카이사리아의 안주인 자리를 탐내던 독사.
황후 소피아 아르첼 독살 사건의 재판을 구경하는 구경꾼 무리에, 그녀도 껴 있었다.
그녀는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죽이십시오.”
“야망에 눈먼 여자치고는 참으로 당당하시군. 하지만 넌 범인이 아니야. 머리는 따로 있겠지. 나오너라, 루진 아르페지나.”
아르페지나 공작 루진이 부인 테오도라 곁에 섰다. 자기 아내만 밀어 넣고, 자신만 쏙 빠질 생각일랑은 전혀 없었다.
“그래. 그래야 말이 되지. 모독당한 황태자비, 네 여동생 위나 아르페지나를 위하여.”
황태자도 납득할 만한 진범과 범행 동기가 갖춰졌다. 하지만 아직 캐묻고 싶은 게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내게 내린 저주를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어. 나약함 따위를 내비쳐봐야 약점이 되니까.
황녀 아스트리아의 피가 나의 저주를 흐트러뜨린다는 사실을 누가 가르쳐 주었느냐? 분명 루진 너는 전혀 모르던 일일 터인데.”
“…….”
루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았어도 황태자는 금방 답을 찾아냈다.
“성녀 에스텔.”
“예. 태자 전하.”
“너구나?”
현재로선 황태자의 저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에스텔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의 존재, 그 의미와 진실을 알고 있던 교단의 성녀.
그녀는 황태자를 기적의 현현이라 부르며 찬양했다.
황태자가 깨어진 영혼 탓에 힘겨워한다는 것을 알고 동정했고, 황태자가 껴안은 근심의 무게를 덜어낼 방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황태자에게 순결을 기꺼이 바칠 만큼 황태자를 숭배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배신감은 배가 되었다.
“성서 속 하계의 왕자도 어머니인 하늘의 여제를 사랑하였나이다.
근친상간은 이성을 갖추지 못한 짐승, 혹은 인간의 질서를 초월한 신들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기적의 현현인 당신께서 어머니인 황후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허나 황후는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아들을 유혹하는 행동을 하여선 아니 되는 것입니다.”
뒤이어 루진 아르페지나가 말했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 마수를 뻗히기 전까지. 당신께옵선 완전무결한 철인군주셨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굽어보시며, 우리 신민들을 돌보신 성왕.
그것이 제가 알던 태자 전하셨습니다. 이만 돌아와 주십시오.
과거는 묻힐 것입니다. 당신께선 현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실 겁니다.”
왜 루진 아르페지나가 황후를 죽였는가. 왜 성녀 에스텔이 루진에게 동조하였는가.
다시 황태자를 현왕이자, 성왕이자, 기적의 현현으로, 역사의 모래시계로,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속속들이 진실이 드러났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만 같던 이들도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다.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제일 먼저 황태자를 되찾고자 했다.
오빠 루진 아르페지나가 황후 독살 계획을 입안하였다.
성녀 에스텔이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루진의 부인, 테오도라 이세티아가 황녀의 피를 구했다.
황녀 아스트리아는 피를 제공했다.
궁정의 클로지아 마네가 독을 제조했다.
황실 재무관 모렐이 결행일을 오늘로 잡았다.
황궁 시녀장 에크모르가 독이 든 와인을 가져왔다.
진실을 캐면 캘수록 황태자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율리아 게일포드! 저들을 모두 체포하라! 전부 목을 베어 효수하고, 몸통은 개의 먹이로 주어라!
아니다. 계집년들은 살려두어라. 지하 감옥의 죄수들에게 던져주어 윤간당하도록 만들어라.
정액받이로 구르다보면 자신들의 죄를 깨닫겠지. 어마마마께서 겪은 고통에 비하면, 깨진 손톱 조각만도 못하겠지만……”
이성 잃은 황태자의 명령에 율리아는 몸을 떨었다. 가만히 허리춤의 칼을 만져보았다.
‘부디 카이사리아의 영광과 평화를 위하여, 정의롭고 명예로운 기사가 되어다오.’
칼을 하사하며 황태자가 율리아에게 당부한 말이었다. 과거의 황태자를 지금의 황태자보다 더욱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래서 율리아는 과거의 황태자가 내렸던 명령을 따랐다.
“죄송합니다. 태자 전하.”
“……!”
모두가 공범. 황태자의 체감 이상으로 많은 이들이 황태자를 존경했다.
그가 저지른 몇 가지 잘못을 알고도 묵인했다. 전부 황태자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점차점차 망가져가는 황태자를 보고 우려했다. 다들 황태자를 과거의 황태자로 되돌릴 방법을 고심했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만 없었다면. 황태자가 어머니에 대한 집착만 버린다면, 그는 분명 우리가 알던 성왕으로 돌아올 텐데.
“돌아와 주십시오, 태자 전하.”
“돌아와 줘, 황태자.”
“부디 돌아와 주세요, 오라버니.”
이구동성으로 그들이 황태자를 옭아매었다.
“후궁을 열이든, 백이든 들여도 돼. 이해할 수 있어.”
“그간 검소한 생활을 하셨으니, 조금쯤은 사치하셔도 됩니다.”
“분명 화가 많이 나셨겠지요. 우리들의 목을 베소서. 그것으로 화가 풀리신다면야. 대신 그것으로 분노를 잊고, 우리들이 알던 왕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여자. 부와 사치. 복수. 명예. 행복.
바라지도 않는 선물을 약속하며 희생을 강요한다.
황태자는 원하지 않았다.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어머니의 사랑뿐이었는데.
“너희들은 몰라! 어마마마가 내게 무슨 의미인지! 전부 후회하게 될 거야!
진실을 가르쳐 줄까?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지 않아! 증오하면 증오했지, 사랑한 적 없어!
나는 사랑을 모르니까!
내가 이 나라 카이사리아를 위해 희생했던 이유는…… 전부 ‘어머니께서 바라셨기 때문이다!’
어마마마께서 바라셨단 말이다. 부디 백성을 사랑하는 현군이 되라고…….”
황후는 황태자를 미워했다. 강간범의 씨앗, 황제 아슬란의 자식이니까.
하지만 소피아 자신의 아이이기도 했다.
정말 가끔씩, 황후는 황태자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식사 자리에 초대하기도 했고, 같이 산책하기도 했다. 비록 이 모든 노력은 어쩔 수 없는 환경과 실낱같이 희미한 의지 탓에 좌절되었지만.
그래도 황후는 황태자의 어머니였다.
‘태자. 좋은 왕이 되어야 한다. 이 어미를 황제의 전리품이 아닌, 현왕의 어머니로 역사에 남겨줄 사람은 오로지 너뿐이야.’
‘왕은 개인의 행복보다 전체의 이익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단다. 이를 공리라고 하지.’
‘아침에 뺨을 때려서 미안해.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손이 먼저 나갈까. 못난 엄마라서 미안해.’
황태자는 몇 안 되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아마 이 셋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는 마음에 새겨 넣었다. 어머니의 말씀을 자신의 행동 준칙으로 삼았다.
“이제. 질렸다.”
어머니께서 안 계시는데, 마음에도 없는 광대놀음이 다 무슨 소용일까.
딸깍. 하고 마음의 자물쇠가 풀렸다. 꾹꾹 황태자가 영혼 깊숙이 가두어 놓은 근심과 슬픔들이 풀려났다.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피곤했다.
“어마마마…….”
옥좌에 앉은, 영혼 없이 껍데기만 남은 어머니께 황태자는 안겼다.
차디찬 손가락에 뺨을 부비었다.
“전부 나가거라. 어마마마와 단 둘이 있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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