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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26화 (26/31)

〈 26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26)

* * *

1년에 적게는 두 번. 많게는 네 번. 카이사리아의 수도 도시에 사교회 시즌이 다가온다.

지방 저 멀리 귀족들까지 모두 황궁에 모여 친목을 다지는 것이다.

젊고 생기 넘치는 영랑과 영애들은 사교회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사랑을 속삭인다.

사랑보다 야망이 우선인 어른들은 음침하게 음모를 주고받는다.

여러 우연과 사건사고가 겹쳐, 수많은 인파가 황궁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삼삼오오 모여, 황궁에 떠도는 더러운 뒷소문들을 연신 입에 올렸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과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동시에 아이를 낳았다는데, 참 별 일이 다 있기도 하지.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는, 황제가 아니라 아들인 황태자일지 모른다더라.

근친상간?

쿡쿡쿡. 그래.

위나 아르페지나가 낳은 아이는 아버지가 황태자가 아닐 수 있다더라. 황태자가 황태자비의 외도를 의심한다더라.

황태자가 아니라면 누구래?

글쎄. 혹시 친오빠인 루진 아르페지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남몰래 나 아닌 누군가의 상처를 헤집고 찢어, 맛보는 것이 즐거울 뿐.

그들은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승냥이들이었다. 그들 사이로 상처 입은 검은 사자가 지나가야만 했다.

승냥이들은 사자의 위엄에 겁을 먹을까, 아니면 이 때다 싶어 달려들까.

결과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의 황태자가 연회장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툭. 스르르르.

일순 연회장 안이 조용해졌다.

황태자의 붉은색 옷 소매가 그림자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날따라 황태자의 자태가 더없이 고결하고 성스러웠다.

우아하며 고독했다.

이 어린 사자는 티없는 맑음과 위엄으로 좌중을 압도하였다.

추문을 입에 담던 입술들이 전부 닫히고, 뻣뻣한 고개들이 영글은 밀과 보리처럼 숙여졌다.

밀과 보리를 키우는 농부처럼, 양을 지키는 목자처럼. 황태자는 자신이 그들의 주인임을 알리며 나아갔다.

“태자 전하.”

“미리 와 있었구나. 에스텔.”

침묵을 깨고 황태자에게 처음 인사 올린 이는 성녀 에스텔이었다. 무언가 예감한 듯 홀연히 찾아와, 속된 무리들 사이에 서서, 황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텔은 황태자가 어둠에 잠식되어 있으되,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만큼은 별처럼 깨끗이 보존하고 있음을 보았다.

“여전히 당신께선 저의 주인이시옵니다.”

에스텔이 하얀 속눈썹을 내리깔며, 황태자에게 마지막이 될 찬사를 바쳤다.

“모시겠습니다. 태자 전하.”

에스텔 다음으로, 여기사 율리아 게일포드가 다가와, 황태자의 길잡이를 자청했다.

오늘만큼은 황태자의 왼편을 탐내지 않고, 묵묵히 근위기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고맙다.”

황태자는 율리아의 헌신을 치하하였다.

“어디로든지 자유롭게. 쭉 걸어가십시오.”

“모렐 재무관.”

스쳐가듯 다가 와, 황실 재무관 모렐 카니나가 위로의 말을 남겼다. 겉보기엔 차가워도, 속은 따뜻한 인간.

요 사이 황태자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는데도, 모렐은 그런 황태자를 이해해주었다.

물론 친구 루진과 완전히 척진 건 아니었다. 모렐은 중립이었다. 그의 회색 머리카락처럼.

“제, 제, 제가 여기에 와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요! 아무튼 제, 제 잘못은 아닙니다요!”

“흠. 누구더라? 언뜻 보기엔 촌스럽지만, 요모조모 뜯어보면 꽤 괜찮은 노처녀를 내가 초대한 적이 있던가?”

“……있었습니다요.”

그녀는 궁정의 클로지아 마네였다. 마녀이면서, 황녀 아스트리아의 스승이기도 한.

“역시 아스트리아는 안 온 것인가?”

“죄송합니다요, 태자 나리.”

여전히 여동생은 골방에. 빈 요람을 흔들고, 서글픈 자장가를 부르며, 오빠를 몹시 원망하고 있겠지.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꼭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황태자는 아쉬움을 삼켰다.

자. 황태자가 맺은 협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만날 사람은 다 만나 보았다.

어느덧 이곳은 연회가 열리는 홀의 중앙. 만나야 할 여자가 둘 남았다.

그런데 이 둘 중에 딱 한 사람만을 택할 수 있었다.

왼편에 치명적인 은방울꽃이 한 송이, 오른편엔 가련한 노란 병아리가 한 마리.

황태자는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

오른편 저쪽 끝에서, 황태자비의 애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황태자는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를 끝까지 외면했다.

위나는 쓰라린 좌절을 못 이기고 털썩 주저앉았다.

“태자비 저하! 괜찮으시옵니까?”

“저하. 부디 체통을…….”

황태자비의 최측근, 니나와 발레리가 쓰러지려는 황태자비를 부축했다.

“저는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힐끗 바라 보니, 아르페지나 공작 루진이 저편에서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자기 부인도 데려왔군.’

루진 아르페지나의 곁에는 부인인 테오도라 이세티아도 있었다.

황태자를 독살해서라도, 루진을 카이사리아의 새 주인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여자.

하필 황태자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체질인 바람에, 모든 계획이 좌절되었었다.

하지만 황태자를 독살하지 않고도, 테오도라가 카이사리아의 새 안주인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오늘 연회가 끝나고 열릴, 내일의 의회에서 황태자는 끌어 내려질지 모른다.

‘이미 각오한 바이다.’

가지고 싶으면 가지라지. 카이사리아의 황관.

그저 오늘은 내일의 걱정을 잊고 현재를 즐기도록 하자.

황태자의 걸음 그 끝에는 그녀가 있었다.

모후 소피아 아르첼이.

“태자.”

어머니께서 청아하고도 상냥한 미소를 보여주셨다.

달빛을 머금은 은방울꽃 소피아 아르첼. 그녀가 황궁 사교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 전에는 황제 아슬란의 전리품으로서 침실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였으니까.

구경거리로 끌려나온 것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사교회장에 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소피아 아르첼 안의 상처가 지워졌다는 뜻. 그리고 황태자가 완전히 황후의 소유품이 되었다는 뜻.

“어마마마. 저와 춤이라도 추시겠습니까?”

사교회의 첫춤은 사교회를 연 주인이 추는 것이 관례다. 이곳은 황궁이므로 황제와 황후가 첫춤을 추는 것이 맞았다. 황제가 부재중이라면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황태자가 황태자비가 아닌, 황후를 선택했다는 것에서 관중들은 옳은 듯 틀린 듯, 더없이 기묘한 어긋남을 느껴야 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음악에 함께 은과 흑이 어우러졌다.

모자의 춤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

화려한 연회가 이어졌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교회의 첫춤을 마친 황태자는 모후 소피아 아르첼을 연회장의 상석으로 모셨다.

“후. 몹시 목이 마르구나, 태자.”

손수건으로 가슴에 맺힌 땀을 닦으며 황후가 말하였다. 천연인 듯 황후의 생각 없는 몸가짐 하나하나가 황태자에게 유혹으로 다가왔다.

황태자는 어머니의 오른손을 잡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마실 것을 내어 오게 시키겠습니다, 어마마마.”

근처의 시녀를 시켜, 와인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찰나를 틈타, 어머니를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친애를 넘어선 끈적끈적한 무언가. 어머니에 대한 황태자의 집착은 도를 넘었다.

우려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지금 황태자는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니라 연인 대하듯 행동하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황태자는 오히려 황후와 한 몸처럼 엉겨 붙었다.

“적당히 하렴, 태자.”

나무라는 듯하였으나, 황후의 표정은 그다지 화나 보이지 않았다.

그녀 또한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아들을 홀릴 정도의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그리고 카이사리아의 권력이 누구 손에 있는지를,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똑똑히 각인시켰다.

“크흠!”

적당히 하라는 뜻인지, 여기사 율리아 게일포드가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율리아는 주인 따라다니는 개처럼 황태자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녀뿐만이겠는가. 성녀 에스텔도 애써 쓴웃음 지으며, 뺨을 긁었다. 그녀도 황태자 근처에 남아 있었다.

“마실 것을 가져왔습니다.”

나나이젤 가의 노부인, 시녀장 에크모르가 손수 쟁반에 와인 2잔 따라 가져왔다.

“골라 보십시오.”

“농담이 지나치군. 에크모르.”

한 잔은 에스프리드산 화이트 와인. 다른 한 잔은 셰르링산 레드 와인.

둘 다 최상급의 맛과 향으로 유명한 와인들이었다. 의미 없는 선택지가 황태자에게 주어졌다.

분명 무언가의 은유일 테지. 미안하지만 황태자는 이미 선택을 끝낸 참이었다. 그의 선택은 모후 소피아 아르첼이었다.

부디 마음을 돌리시라 수백, 수천 번을 탄원하여도, 결코 바뀌지 않을 선택.

“어마마마께서 먼저 고르시겠습니까?”

황태자는 결정권을 어머니께 넘겨 드렸다.

“글쎄…….”

황후는 볼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아랫것들이 주인을 모독하기 위한 장난이었다.

화이트 와인이 사실은 식초라거나, 레드 와인에는 역겨운 돼지 피를 섞어놨거나 하는 장난.

순순히 당해주는 것도 주인다운 아량이지만,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망신당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에크모르. 그대가 먼저 마셔……”

“그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어마마마.”

“세상 쓰잘머리 없는 문제들에만 원칙을 따져대는구나. 우리 태자.”

꼼수가 막힌 황후는 결국 화이트 와인을 골랐다.

“고르신 것에 이유가 있으십니까? 어마마마.”

“꼭 이유가 필요한 거니?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레드 와인의 빛깔이 피 같아서 싫어.”

“그렇군요…….”

황태자는 남은 레드 와인을 가져왔다.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투과하는 빛과 향을 확인했다.

“저기……”

율리아 게일포드가 황후와 황태자의 와인 선택 문제에 끼어들었다.

“주제넘은 행동이란 것은 압니다. 허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 보아라.”

“화이트 와인의 빛깔이 눈꽃처럼 하얗습니다. 마치 황후 전하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레드 와인은…… 마침 태자 전하께서 입으신 옷이 붉은색입니다.”

“그래서?”

“저 와인은 황후 전하와 황태자 전하, 두 분 모자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황후 전하께는 레드 와인을, 태자 전하께는 화이트 와인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어째서지?”

“어머니에겐 아들이, 아들에겐 어머니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레드 와인은 아들을 뜻하고, 화이트 와인은 어머니를 뜻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품듯 레드 와인을 마시고, 아들은 어어니를 그리듯 화이트 와인을 마신다.

결론적으로 과거의 상처를 잊는 화해의 잔이라는 뜻.

“훌륭한 해석이야. 아부 솜씨가 늘었구나, 율리아.”

허나 황태자는 굳이 잔을 어머니와 바꾸려 들지 않았다.

“음?”

황후가 먼저 화이트 와인을 반 잔 마셔버린 탓이었다. 아까부터 목이 마르다 하셨으니. 식초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황후는 기분 좋게 화이트 와인을 홀짝였다.

피처럼 진한 레드 와인은 여전히 황태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와인 잔을 손가락으로 튕겨 소리를 냈다. 자연스럽게 주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냐, 아님 멍청한 척 하려는 것이냐? 율리아 게일포드. 가장 간단명료한 해석이 근처에 있는 것을.

화이트 와인의 불순한 하얀 빛은 뒤덮인 진실, 레드 와인의 피처럼 붉은 빛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상징하지.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모자 사이의 금기.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져 묻는 것 아닌가?”

모자간의 근친상간뿐이겠는가. 황태자는 부친인 황제도 자기 손으로 죽였다.

황태자는 카이사리아 최고 법관직을 겸한다.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 일반 백성이 이와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다면, 황태자는 망설임 없이 사형을 언도하였을 것이다.

천륜을 어긴 행위다.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패륜이다.

불의하게도 황태자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도 관대하였다.

죄는 죄. 원칙엔 예외가 없어야 했는데. 이제야 죄값을 치른다며 황태자는 자조하였다.

“완전무결하지도, 전지전능하지도 못했던 너희들의 왕을 용서하라.”

그것이 황태자의 유언이었다. 망설임 없이 황태자는 적포도주를 쭈욱 마시고 삼켰다.

역시나. 와인에서 피 맛이 났다.

처음부터 알아보았었다. 이 셰르링산 레드 와인에 불길한 마력이 흘러넘치는 것을.

이것이라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자신의 숙명을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황태자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크윽!”

시야 한 쪽이 붉게 물들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황태자에게 걸린 존재의 저주가 허물어졌다.

“?”

하지만 그뿐이었다. 무디어졌던 색감과 청각이 돌아왔다.

황태자는 놀라는 사람들의 얼굴과 웅성거리는 소리를 선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태, 태자…….”

무너진 쪽은 모후 소피아 아르첼이었다.

“쿨럭……!”

“어마마마!”

황후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하얀 드레스가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 안 돼. 어 어마마마…….

구, 궁정의를 부르거라! 어서!

어, 어마마마……. 눈을 떠보세요, 어마마마. 부디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가지마세요. 제에바알……”

황후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피를 머금은 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후는 아들의 손을 딱 한 번 꽉 하고 쥐어 주었다. 그리고 이내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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