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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20화 (20/31)

〈 20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전 (20)

* * *

“오라버니. 저는 지금 행복해요.”

금발벽안의 그녀는 카이사리아의 황태자비.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한 듯, 오라버니 루진 아르페지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 임신한 것 같아요. 진짜 황태자의 아이에요.”

“음……. 축하한다. 위나.”

오빠된 입장에서 여동생의 임신은 심란하다고 해야 할지.

볼따구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싸가지가, 사춘기를 거치며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미녀로 변모하더니, 결혼하고 임신까지 했다.

이제 한 아이가 어머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반응이 시원찮네요. 오라버니는 기쁘지 않으세요?”

“아니, 기쁘긴 기쁜데……. 으음. 모르겠다. 그냥 현실감이 없어.”

“쿡쿡쿡. 이상해.”

위나는 입가를 가리고 조신하게 웃었다. 기묘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나는, 율리아 게일포드가 개잡년이니, 황녀 아스트리아는 근친을 꿈꾸는 미친년이라느니, 온갖 저주와 욕설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루진의 여동생 위나 아르페지나는 황태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위나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애타는 짝사랑에 위나는 하루하루 망가져갔다.

왕으로서의 황태자는 루진도 존경했지만, 매제로서의 황태자는 루진을 화나게 만들었다.

남의 집 귀한 여동생이란 말이다. 왜 황태자는 위나를 아껴주지 않는 걸까.

그런데 특별한 계기도 없던 것 같은데, 황태자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황태자비를, 루진의 여동생을, 위나 아르페지나를 사랑해주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사랑을 받을수록 위나는 독기를 잃어갔고, 이제 새하얗게 웃을 줄 알게 되었다.

“좋은 변화이긴 한데. 하, 모르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글쎄요. 그런데 굳이 그 이유를 따져 물을 필요가 있나요? 앞으로 저는 더더욱 행복해질 거예요!”

위나는 자신의 배를 상냥히 쓰다듬었다. 아직은 날씬하고 평평한 배. 이것이 부풀어 오를수록, 위나의 행복은 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다.

“…….”

하지만 루진의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젊은 날의 호기심으로 루진은 마도학에 손댄 적 있었다. 얄팍한 재능 탓에 마법은 부릴 수 없었지만, 대신 마력을 감지하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또렷이 보인다. 황태자를 휘감고 있는 어둡고 탁한 기운이.

그것은 점차점차 짙어져, 루진의 눈엔 황태자가 모노톤으로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부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불길하다. 파멸이 섬찟 다가오는 듯이.

***

“각자 보고해봐.”

루진, 모렐, 율리아. 각기 카이사리아의 재상, 재무관, 기사단장 직을 가진 내정의 핵심축들이었다.

그들은 정무, 회계, 군사 등의 일을 황태자에게 차례대로 보고하였다.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귀족들이야 항상 불만이 가득합니다만, 우려할 수준은 아닙니다.”

“황실의 재정은 풍족합니다.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여도 좋고, 감세 정책을 펼쳐도 좋습니다.”

“군사들 쪽은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평화가 길어지니 기강이 헤이해진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너무 평화로워서 문제라……. 아이러니하군.”

황태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년간 이어진 흉년의 여파는 예상 외로 손쉽게 걷어낼 수 있었다.

성녀 에스텔이 바다에서 생선이 잔뜩 잡히도록, 초목에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도록 기적을 베풀어준 덕분이었다.

“기적이란 건 참 좋아. 이렇게나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을. 성녀 에스텔의 노고에 감사하며, 교단에 넉넉히 기부금을 건네도록.”

황태자의 지시에, 모렐은 안경을 살짝 치켜 올렸다.

“알겠습니다. 허나 태자 전하. 기적에 너무 의존하시면 곤란합니다.

과거 교권이 너무 커진 나머지, 그들이 황권마저 넘보려 했던 일이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걱정마라. 이제 그들은 내가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어. 과거처럼 날뛰는 일은 없을 것이야.

그리고 율리아.”

“예. 전하.”

“일이 없어서 늘어지는 군사들은 데려다가 농사라도 시키도록. 둔전이다. 혹시라도 또 있을지 모를 흉년에 대비해, 황실의 창고에 곡식들을 그득히 쌓아놓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태자 전하.”

카이사리아의 내정은 착착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안정기에 접어든 듯 보였다.

진실은 모래 위에 펼쳐진 신기루에 불과했지만.

황태자는 아슬아슬한 모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각종 개혁 정치에 대한 불만은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누르고 있었다.

치안과 군사 분야는 황태자와 내연 관계에 있는 율리아 게일포드가 책임져주고 있었다.

성녀 에스텔도 마찬가지. 그녀의 신성력은 황태자에게서 기인한 것이었다. 대규모 기적을 베푼 에스텔은 신성력을 충전하기 위해 황태자를 찾아올 것이다.

‘남창이나 다름없군.’

정실 하나에 애인이 둘. 전부 특상급의 미녀들로만. 누군가는 행복한 고민이라며 비아냥거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황태자는 여자들과의 잠자리를 그닥 즐겨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곤했다.

더군다나 황태자비가 율리아, 에스텔과의 관계를 눈치 채게 된다면, 패악질을 부릴 것이 뻔해서.

황태자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리고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분명 아침에 날 찾아오라 했을 터인데! 이 어미의 말이 말 같지가 않아?”

회의실의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그녀가 등장했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

가만히 입 다물고 있으면 청순가련한 미녀였을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독스런 분노가 얼굴에 서려 있었다.

황후는 다짜고짜 아들의 뺨을 때렸다.

황태자는 순순히 어머니의 분노를 받아들였고, 옆에 선 모렐이 황태자 대신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거 놔! 천한 것이! 네가 지금 누구에게 손을 대고 있는지 알아?”

루진은 난감해했고, 율리아는 황태자의 심정을 헤아려 나서지 않았다.

모렐만이 황후의 팔을 막아선 채,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모렐은 다혈질. 황제 아슬란마저도 들이받던 성미를 그대로 내보였다.

“천박한 여자. 황후면 황후답게 처신 잘하시오.”

“그래. 내가 바로 카이사리아의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다. 황태자의 친모. 내가 천한 여자라면, 황태자도 천해.

네가 뱉은 말은 황실 모독이야. 감당할 수 있겠어? 모렐 재무관.”

황후는 황태자의 입 안에 돋은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따갑다. 하지만 뱉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혈연으로 이어진 어머니시니까.

“그만두게, 모렐 재무관. 그리고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오늘 일만 마저 처리하고, 바로 어마마마를 뵐 생각이었습니다.”

황태자는 어머니와 모렐을 분리시켰다. 언제나 상처만을 안겨준 어머니였으나, 그럼에도 황태자는 어머니를 존중해드렸다. 그는 어머니의 손등에 키스하며 예를 갖추었다.

“노여움을 가라앉히시옵소서. 그리고 저와 산책이라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어마마마.”

***

“음흠흠♪”

황태자가 내게 복종하고 있다. 그는 나의 소유다. 아들의 소유권을 재확인한 황후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아들의 손을 잡고 황궁의 복도를 거니는 황후는, 천상 소녀 같았다.

마치 열일곱 살 된 소녀 같으시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발랄한 매력을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 뽐냈다.

“들어 와.”

황후는 황태자를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방문을 닫으며, 문 앞의 시녀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령했다.

시녀 플리아네 셰르링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다소곳이 목례로 답하였다.

방해받을 염려가 사라진 황후는 이만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명령했다.

“무릎 꿇어.”

복도에선 열일곱 왕녀 같으셨던 분이, 지금은 여왕님으로 변모하셨다.

황태자는 잠자코 어머니의 명령을 좇았다. 그녀의 발 아래에서 무릎 꿇었다.

“너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느냐? 태자.”

“하나뿐인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허울뿐인 이 껍데기에 영혼을 불어넣어 주신 여신이시며, 이 보잘 것 없는 노예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계신 여주인님이십니다.”

“그래. 너는 내 것이야. 황태자. 너의 그 상처처럼 검은 머리카락도. 그믐날의 밤하늘 같은 눈동자도. 전부 내 것이야.

그리고 이것도 나의 소유지.”

황후의 발이 황태자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그녀의 구두가 황태자의 남성성을 툭툭 건드렸다.

어머니의 기행에 황태자의 그것이 당황해선 일어섰다.

황태자는 복종하면서도 반항했다.

“어마마마.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음? 장난?”

황후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반항기의 아들이 몹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깨물어 먹어버리고 싶었다. 상하관계를 다시 가르쳐줄 겸, 황후는 농익은 장난을 하나 더 던졌다.

구두를 벗어버리고, 하얀색 사이 하이 삭스도 벗어, 맨다리를 드러냈다.

가느면서도 탄력 있게 쭉 뻗은 다리는 황후 소피아 아르첼의 은밀한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자. 핥아.”

황태자에게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망설임은 있었다. 그러나 하얀 은방울꽃의 유혹을 끝내 뿌리치진 못했다.

황태자는 어머니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붙잡고, 발등에 키스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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