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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19화 (19/31)

〈 19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19)

* * *

이건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라고.

아무리 어여쁘신 분이라 한들, 상대는 어머니시지 않나.

최후의 인내심을 발휘해, 황태자는 어머니를 밀치고 빠져 나왔다.

비틀비틀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결국 그가 다다른 곳은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태자 전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여기사 율리아 게일포드가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왜 네가 여기 있지? 기사단장이면 기사단장답게, 아랫사람을 부리도록. 문지기 같은 허드렛일 따위 직접 하지 말고 말이야.”

“죄송합니다, 태자 전하. 하지만 걱정이 돼서…….”

황후가 황태자를 호출하여,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황태자의 상처만 커질 뿐.

그것이 걱정되어 율리아는 황태자를 기다렸다.

그녀는 황태자가 슬플 때면, 오히려 일에 매달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돌아가.”

그러나 황태자는 율리아의 걱정을 물리쳤다.

미안하지만 지긋지긋했다.

원치도 않는 사랑을 강요하는 모습이.

언제나 율리아는 황태자가 자신을 되돌아봐주길 바라며, 끝없이 황태자의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율리아는 포기를 몰랐다.

황태자는 무시하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일거리가 필요해. 다행히 부지런한 모렐 재무관이 책상 위에 서류를 놓고 갔다.

짧게 메모로 급한 일은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상관없다.

자아를 잃고, 인간성마저 잃은 채, 카이사리아의 부속품이 되고 싶다.

늦은 저녁 시간, 황태자는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춥지 않으십니까?”

율리아가 물었다. 봄이지만, 저녁 날씨는 아직 쌀쌀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는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여기사답지 않게, 손수 차를 끓였다.

여기사임에도 차에 소양이 있는 것은, 본래는 율리아가 황태자비가 되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준비된 황태자비였었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진한 차가 우러났다. 차에 잠깐 눈길을 주었으나, 황태자는 결국 차를 마시지 않았다.

율리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 전하…….”

“왜? 또.”

“외롭지 않으십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군.”

마음이. 허하다.

언제나 황태자는 어머니께서 자신을 되돌아보아 줄 것이라 믿고,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매도, 저주. 허전한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오늘은 다를 줄 알았어.”

다르긴 달랐다. 오늘의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황태자를 비난하지도, 저주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사랑을 주셨다.

그런데 원치 않은 사랑이었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사랑받길 원했지, 다른 형태의 사랑을 갈구한 적은 없었다.

소피아 아르첼은 황태자에게서 남자를 보았고, 또 권력을 보았다.

그것은 타락이라고 해야 할지.

“이젠 나도 모르겠구나.”

끝내 눈물을 쏟지 않은 건, 그가 왕이라서였다. 하지만 외로웠다.

권력의 정점에 선 만큼, 기적의 현현인 만큼, 만인의 사랑을 받는 현왕인 만큼, 인간으로서의 그는 외로웠다.

그는 사랑을 몰랐다. 같잖은 찬양이 아닌, 진심어린 사랑을 받고 싶었다.

“눈물 흘리소서. 부디 울고, 잊어버리소서.”

율리아는 황태자 앞에서 무릎 꿇었다. 그의 차디찬 손을 붙잡고 울었다.

눈물로 그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핥았다.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았다. 어미 잃은 새끼 개가 주인의 손가락을 어미의 젖으로 착각해 빠는 것 같았다.

“너도 어머니를 잃었지. 율리아 게일포드.”

“네. 마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제가 일곱 살 적에.”

율리아는 손가락 핥기를 멈추었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떠올렸다.

“이세티아 가문에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과자와 케이크를 잔뜩 먹을 수 있단 기대에, 저는 들떠 있었습니다.

어머님의 무릎 위에서, 이세티아 가문은 아직이냐며, 보채기까지 했어요.

어린 저의 투정 탓에, 마부가 너무 서둘렀던 걸까요? 갑자기 마차가 기울었습니다.

어머님께선 다급히 저를 껴안으셨습니다. 눈을 떴을 땐, 어머님께서 피를 흘리고 계셨습니다. 저를 살리려다 그만…… 당신께선 몸을 가누시지 못하신 나머지……”

황태자는 눈물에 약했다. 저기 당당해야 할 붉은 머리카락의 여기사가, 소녀로 돌아가 울고 있다.

율리아가 가엾어진 황태자는, 그녀를 일으켜 끌어안았다.

“네 탓이 아니야.”

“태자…… 전하…….”

분명 황태자 전하를 위로해드리려 했는데. 오히려 자신이 위로받고 있었다.

죄송스런 마음에 율리아는 더더욱 눈물을 터뜨렸다.

“사랑받고 있었구나. 어머니께.”

“네…….”

“상실감이 컸겠구나. 잃어버린 온기가.”

“네. 전하…….”

황태자는 율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율리아는 몸을 둥글게 말고는, 황태자에게 계속 안겨 있었다.

마치 그의 품이 어머니의 품속 같았다.

이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율리아를 밀어내고, 배신하고 위나 아르페지나를 황태자비로 맞아들였어도.

그래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른다. 어머니의 품이 얼마나 따스한지.”

“태자 전하…….”

“전혀 모르겠어…….”

나의 왕께서 울고 계신다. 그가 주신 은혜에 율리아는 답례하고 싶어졌다.

아니. 답례를 빌미로 나의 욕망을 채우려 한 것일지 모르지.

율리아는 개의 본능에 몸을 내맡겼다.

감히 황태자의 옷에 손을 댔다. 단추를 하나하나 풀고는, 그의 가슴을 핥았다.

“하지마라.”

육체의 위로를 황태자는 거절했다.

율리아를 다독이면서도, 카이사리아의 미래를 생각했다.

“네가 애라도 덜컥 베면 카이사리아는 혼란에 빠진다. 위나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이 방법 외엔, 남자를 위로하는 법을 저는 모릅니다.”

위나 아르페지나는 도도한 고양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주인의 애간장을 녹였다.

율리아 게일포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개였다. 주인이 바라봐 줄 때까지, 꼬리를 흔드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보복할 테면 하라고 하지요. 얌전히 당해주겠습니다.”

“왜 이제 와서?”

“태자 전하께서 고뇌하시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율리아는 희생하길 원했다. 대가없는 선행. 그것이 황태자가 진정 바라왔던 것임을 그녀는 몰랐었다.

황태자 본인조차 몰랐다. 그저 그는 자신 안에 차오르던 슬픔의 무게가 줄어들었음만을 느꼈다.

처음으로 율리아가 여자로 보였다.

자신이 먼저 여자를 욕망하게 된 것이 처음이던가.

조금은 거칠게 율리아를 밀어 넘어뜨렸다.

책상 위의 서류가 흩어졌다.

율리아는 식탁 위의, 먹음직스런 육고기가 되었다.

황태자는 급히 겉껍질을 벗겼다.

드러난 속살.

한 입 크게 베어 물어본다.

“아♡”

율리아가 신음을 흘렸다. 잠시 황태자는 가슴 베어 먹기를 멈추고 물었다.

“왜 좋아하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안기는 것이니까. 절로 환호성이 나옵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역시 아바마마를 사랑하지 않으신 거로군.”

황태자는 어둠에 사로잡혔다.

꽤나 먼 과거. 아홉 살 때쯤 일이던가.

모후 전하와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황제는 황후를 일주일째 찾지 않았고, 황후는 드디어 황제가 자신에게 질린 것 같다며 기뻐했다.

기운을 차린 황후가 황태자 남매를 찾았다.

그때도 그랬다. 황태자와 황녀, 남녀 쌍둥이를 앞에 두고,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약속은 채 하루도 가지 못해 깨졌다.

저녁 식사 자리. 황제가 난입했다. 어린 쌍둥이 남매 앞에서 황제는 황후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먹어치웠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말아요!’

모후 전하께서 울부짖었다. 황제는 듣지 않았다. 그는 황태자를 바라보며 외쳤다.

‘보이느냐? 태자. 약한 것은 밑에 깔리고, 강한 자는 위에서 군림한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성행위란, 남자가 여자의 속살을 찢고 범하는 것이다.

황태자의 여동생, 아스트리아가 바닥에 토하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여동생의 등을 토닥여 주느라, 어머니를 도와드릴 수 없었다.

변명이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무서웠어.

그래서 어머니를 외면했어.

“읏♡ 읏♡ 읏♡.”

붉은 머리카락의 여기사. 율리아 게일포드가 뜨거운 교성을 토했다.

어느새 그녀는 책상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다리 사이의 연한 틈바구니를, 황태자의 죄악이 왕복했다.

그런데 율리아는 괴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쾌락에 젖어 헐떡였다.

“좋으냐?”

“네♡ 좋습니다♡”

율리아는 황후 소피아 아르첼과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

머리카락은 장미처럼 붉고, 피부는 살짝 그을려 갈색 빛을 띠었다.

어머니가 겨울의 눈꽃이라면, 율리아는 여름날의 들장미.

황제가 겨눈 창끝에 어머니는 부셔졌지만, 율리아는 황태자를 받아들이며 즐거워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기에, 이 차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암캐.”

“네♡ 저는 태자 전하의 암캐입니다♡”

가벼운 매도에, 율리아는 더욱 기뻐하며 황태자를 흡입했다.

그 강한 조임이 황태자를 좀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재밌군. 즐거울 정도야.”

황태자비가 교성을 지를 적엔 반대로 화가 났었다. 마치 위나 아르페지나가 모후 전하를 모독하는 것만 같아서.

위나는 은근 황후 소피아 아르첼을 많이 닮았다. 연약한 겨울의 눈꽃이라는 점이.

차이가 있다면, 어머니는 그대로 얼어붙어 뾰족한 겨울의 가시가 되셨고, 위나는 황태자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버렸다는 차이가 있었다.

왜 녹았어? 왜 헐떡이며 즐겼어? 도도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면, 차라리 아끼고 동정했을 것을.

“전하. 좀더♡”

율리아가 뜨거운 한숨을 토했다. 충분히 달궈진 황태자는 그의 열병을 율리아에게 쏟아내었다.

***

욕망이 사그라들고 나면 찾아오는 것이 이성. 황태자는 앞으로의 일을 근심했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고민했다. 봄의 정원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유리창에 맺힌 자기 자신뿐이었다.

황태자는 자기 자신을 노려보았다.

“태자 전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오늘 일은 황태자비에게 비밀로 하겠습니다.”

“…….”

아직 나체 그대로인 율리아 게일포드가 조심스럽게 황태자에게 아뢰었다. 황태자는 대답이 없었다.

와락 겁이 난 그녀는 더욱 고개 숙여 사죄드렸다.

“압니다. 황궁에는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심어놓은 감시의 눈이 많다는 것을요.

분명 들키겠지요. 그렇다면 제가 무릎 꿇고 황태자비에게 용서를 빌겠습니다.”

“그딴 건 이제 걱정의 축에 들지도 못해.”

위나 아르페지나와 율리아 게일포드. 두 사람의 문제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것에 있었다.

위나는 황태자를 독점하고 싶어 했고, 율리아는 위나를 밀어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젠 율리아가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아마 율리아는 황태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명령한다면, 바로 자신의 목을 그을 것이다.

지금의 율리아 게일포드는 황태자에게 근심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이신지요?”

황태자는 답했다.

“어마마마. 모후 소피아 아르첼.”

황태자는 창문에서 눈을 뗐다. 뒤돌아 율리아를 보았다.

격렬한 성관계에 율리아는 허리가 빠져 주저앉아 있었다.

수줍게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가리는 모습이, 살짝 귀여워 보였다.

조금은 웃고 말았다.

“어마마마께서 변하셨어. 남자를…… 아니, 황제를 찾으시더군.”

황후가 아들인 황태자를 유혹하려 들었다. 그 심리를 황태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권력이 문제라면, 그런 것 없이도 황태자는 어머니를 존중해 드렸을 텐데.

혹시 음심이 동하셨던 걸까? 어마마마께선 그런 걸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하마터면 저지를 뻔한 근친상간의 금기 앞에서, 황태자는 고민을 거듭했다.

무엇이 어머니께 좋은 일인지 몰라서.

이를 율리아에게 사실 그대로 털어놓을 수 없으니, 황태자는 모후 전하께서 ‘황제’를 찾는다 거짓말을 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태자는 미래의 황제이며, 현재도 실질적인 카이사리아의 지배자니까.

“좋은 일입니다.”

율리아는 황후가 ‘황제 아슬란’이 오랜 기간 침실을 방문하지 않아 걱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국은 부부. 황후 전하께선 황제 폐하를 사랑하고 계셨군요.

역시 ‘아버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순간 황태자는 벌에게 쏘인 듯, 따끔한 느낌을 받았다. 황급히 율리아를 다그쳤다.

“방금 뭐라고 그랬지?”

“아.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께선 이미 돌아가셨는데…….”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 ‘레온 게일포드’가 옳았다는 게 무슨 뜻이지?”

레온 게일포드. 현 게일포드 가의 가주이며, 공작. 율리아 게일포드의 부친.

“화내려는 게 아니야. 어마마마의 태도 변화에 내가 혼란스러워서 그래. 왜 레온 게일포드는 어마마마께서 아바마마를 사랑하게 될 거라 믿었지?

가르쳐줘. 내가…… 어마마마와 화해하게 되는 계기가 될 지도 몰라.”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황제 아슬란을 증오한다. 황제가 그녀를 강간, 능욕했으니까.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관계였다. 대체 게일포드 공작은 무엇을 보고, 황제와 황후가 서로 사랑하게 될 거라 믿었던 걸까.

“그것이……”

잠시 율리아는 뜸을 들였다. 지금부터 자신이 내뱉은 말이 화가 될지, 복이 될지 가늠하려 들었다.

황태자가 애타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위하여.

결국 율리아는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 실프러시아가 멸망한 당일의 이야기입니다. 실프러시아의 눈꽃의 성을 점령한 황제 폐하께선, 궁전 안의 실프러시아 왕족과 귀족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죽이라 명령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의 아버님, 레온 게일포드 공작께서도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폐하의 명령대로 눈꽃의 성을 돌아다니며 적들을 도륙하셨습니다.”

율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황태자의 얼굴 표정은 평온하였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아버님께선 실프러시아 왕녀가 숨어있는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령대로 왕녀를 죽여 없애야 했으나……”

은빛 순수한 실프러시아의 왕녀. 바로 황태자의 어머니. 소피아 아르첼.

“아버님께선 차마 왕녀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분을 조심히 모시고 가, 황제 폐하께 보여드렸습니다.”

“왜?”

“아버님께선 운명을 느끼셨대요. 이 분이야말로 황제 폐하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실 별의 불꽃이라고.

카이사리아의 황후가 될 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셨대요.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고요.

본디 황제 폐하께선 자신과 잠자리를 한 여자는 모조리 죽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외의 황족은 언제든지 황제 자리를 가로채려 들 수 있으니까.

황제 아슬란은 황제가 된 후, 자신의 형제와 다른 황족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다.

“태자 전하. 황제 폐하께선 황후 전하를 몹시 사랑하셨습니다.

비록 그 형태는 삐뚤어졌을지 모르겠으나…….

부디 의심치 마십시오. 그렇기에 황제 폐하께선 실프러시아 왕녀 소피아 아르첼을 황후로 삼으셨고, 황후 전하께선 황제 폐하의 자식인 당신을 낳으신 겁니다.

당신께옵선 사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틀렸다. 황제는 자신의 저주를 아들에게 떠넘기고 싶어 했다.

황후는 아들 황태자에게 영혼이 속박되어, 자살할 수 없었다.

사랑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액받이 인형이었고, 저주 그 자체라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렇군.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 같아. 서툴러서 제대로 표현 못했을 뿐, 두 분은 운명처럼 만나, 사랑하셨음이 틀림없다.

그 사랑의 결실로 내가 태어난 것이야. 고맙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가르쳐 주어서.”

마음이 차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정말 다행히도, 황태자는 거짓말이 특기였다.

시커멓게 물들어버린 속과는 다르게, 기쁨과 감동을 꾸며낼 수 있었다.

감격해서 우는 척 뒤돌았다.

손으로 가린 입가가 빠드득 분노를 머금었다.

‘레온 게일포드……!’

그 새끼가 어마마마를 황제에게 제물로 던져주었다 이거지?

폭군인 황제를 여자로 길들이려고.

어떻게 할까?

레온 게일포드에게 복수할까? 아니면 복수 이상의 상처를 새겨줄까.

그러나 황태자는 이내 복수심을 놓아버렸다.

“어마마마…….”

모후 소피아 아르첼에 대한 연민이 복수심 이상으로 커졌기 때문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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