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 193. 위탁 운영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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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에는 몸을 씻을 공간이 없다. 나처럼 남자는 해가 지고 건물을 지키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버린 길드 뒤뜰의 우물가에서 몸을 씻을 수는 있지만, 여자들은 씻을 곳이 전혀 없다.
그러니 더운 주방에서 일한 애니나 수인들은, 결국 온종일 흘린 땀을 문 닫힌 주방에서 씻어야 하는 것이다.
뭐 전생에서도 대단위 부엌이 있는 곳에서는, 조리가 끝난 저녁에 식당 아줌마들이 몸을 씻곤 한다고 들은 적이 있으니. 나도 물을 떠다 주고 자리를 비켜 우물에서 몸을 씻고 온 것인데.
똑똑
“다들 씻으셨나요?”
“주인님 이제 들어오셔도 됩니다.”
노크하고 이제 들어와도 된다는 애니의 말에 안으로 들어가니, 완벽한 상황에 미소를 짓고 있는 애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니의 미소는 먹잇감을 완벽하게 궁지에 몰아넣은 승자의 미소.
‘대체 언제부터?’
애니는 생각보다 대단한 아이였다. 이걸 대체 언제부터 계획 한 걸까? 침대가 도착하고? 침대를 살 때부터? 아니, 내가 조리장을 맡아달라는 계획을 했을 때부터?
그렇다. 나는 애니에 의해 심각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다.
애니가 대체 언제부터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는 완벽한 계획 앞에, 외통수에 걸린 나는 황당해 말을 잃고 말았다.
아침에 도착한 침대를 배치할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방을 꾸미는 것은, 전적으로 애니에게 맡겼던 상황이고, 나를 비롯한 아내들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니 말이다.
애니는 우리 모두를 완벽하게 속여넘겼다.
먼저 애니의 계획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침대의 배치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길드의 주방에는 방이 두 개 딸려 있다. 그리고 애니의 요구대로 침대가 각자 두 개씩 자리를 잡았다. 물건을 넣을 상자도 두 개씩. 방이 엄청나게 작지는 않다. 이곳은 전생의 원룸 같은 곳보다 대체로 방이 넓다, 땅값이 전생처럼 미치게 비싼 건 아니니. 그러니 한방에 침대 서너 개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
그런 두 개의 방에 침대를 각각 두 개씩 넣었다.
얼핏 생각하면 각방에 침대 두 개씩을 넣었으니 잘한 것 아니냐 생각할 수 있다. 아내들과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하지만 이걸 생각해야 한다.
수인 둘이 식당 일을 보조해주고 잠을 자야 하니 침대 두 개는 한쪽에 있어야 한다. 우리 수인 둘은 여자이니. 그리고 애니의 방에도 침대가 하나가 있어야 한다. 애니가 자야 하니까.
그렇다면 가끔 들리는 나를 위한 침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지는데. 내 침대는 수인들의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왜냐고? 내가 오면 애니가 수인들과 같이 자고, 애니 방의 침대를 나에게 빌려주어야. 남자인 내가 혼자 자고 애니가 다른 여자 수인들과 같이 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침대는 각방에 두 개씩. 수인 둘은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이미 둘이 방에 문을 닫고 들어간 상태.
그렇다. 방이 넓음에도 나란히 딱 붙은 두 개의 침대에 앉은 애니가 흐릿한 미소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얇은 리넨 잠옷을 입은 채로.
마력 등의 불빛에 비친 애니의 잠옷 너머 살색이, 애니가 숨을 쉴 때마다 구겨진 리넨 천에 비쳤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문 앞에 선 내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가려 하자 애니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러셀, 거기서 만약에 다른 곳에 가서 자고 온다거나, 이상한 소리를 한다면. 나는 내일 바로 웜 포트로 돌아가겠어.”
역시나. 그 소리가 나올 것 같았어.
애초에 거절했으면 다른 방법을 찾거나 사업을 포기했겠지만, 이미 시작한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둔 반협박.
물론 애니가 그렇게 막 나가는 아이가 아니니 진짜 되돌아가진 않겠지만.
나는 멍하니 애니에게 물었다.
“대, 대체 언제부터?”
“러셀이 밤중에 조리장을 해달라고 고백할 때부터.”
‘애니야 그건 고백이 아니라 제안이라고 하는 거란다.’
대단한 녀석. 생각보다 애니는 똑똑한 아이였다. 상식이 조금 뒤틀린 것 같았지만.
“애니야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나는 이미 아내가 있잖아 너도 알다시피…”
“어머, 주인님 저희 그냥 잠만 잘 뿐인데요? 혹시 저한테 무슨 이상한 짓을 하시려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저건 화났다는 표현이겠지? 머리가 지끈지끈 해져왔다. 일단 야밤에 계속 문 앞에 서서 실랑이를 이어갈 수도 없고, 애니와의 이야기도 정리해야 하니 일단 애니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도 했다.
“알았어. 대신 진짜 잠만 자는 거다?”
“당연하죠!”
신이 난 애니의 목소리.
무차별 육체로 돌진해오진 않을 테고, 아마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분위기를 잡으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어떤 이야기든 애니를 천천히 달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그동안 쌓인 불만은 아무래도 내 탓이 크다고 볼 수 있으니.
애니가 우측 침대로 넘어가고 나는 좌측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차렷한 자세로 마치 관에 들어간 모습으로 누워있는 나.
어떻게 말을 꺼낼까? 무슨 말을 걸어올까? 한참을 고민할 때.
마력 등이 애니에 의해서 꺼지고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방안에는 나와 애니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들리고 있었다.
그 조용한 한밤중의 정적을 깨고 애니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셀…. 자?”
나는 갑자기 들려온 애니의 목소리가 핸드폰 메시지의 알림음으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항상 이렇게 해지고 잠들 때쯤 헤어진 여친이나 썸 타는 여자들에게 문자가 오는 건 전생의 국룰이니까 말이다.
‘오빠 자?’로 시작되는 ‘그’ 문자 말이다.
애니의 물음에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단둘이 있는 방이 어색했던지, 애니는 말투는 어느새 평소의 애니로 돌아와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너 같으면 잠이 오겠니 애니야?’
내 대답은 들은 애니는 곧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했다.
“그… 요즘. 러셀은 아내가 많이 생겼더라… 셋째 마님의 언니에, 또 다른 두 분… 벌써 여섯인가?”
거기서 일단 하나는 아니지만, 따로 애니의 말을 정정할 수는 없는 일. 나는 잠자코 애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는 늙은 노총각이었는데… 푸훗”
왠지 웃어버린 애니. 그래, 그랬었다. 너도 그리고 나도 혼기 놓친 시골 처녀와 다리 병신 노총각. 부족한 사람들이었지.
“나는 러셀, 그때는 우리 둘이, 제법 잘 어울리는 줄 알았어… 아니, 내가 조금 아까워서, 러셀에게 시집가준다면 러셀이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러셀은 대단한 사람이었더라고. 그냥 바보같은 시골 계집아이의 착각이었던 거지….”
애니는 여기까지 말하고 뭔가를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어둡고 조용한 방안 애니가 잠시 숨을 멈추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방안에 점차 애니의 가슴 뛰는 소리가 커지는가 싶더니.
내 눈을 질끈 감기게 하는 애니의 질문.
“러, 러셀 옆에. 나, 나도 아니, 제일 끝도 좋으니까 내, 내 자리는 없을까?”
아니, 질문을 가장한 다이렉트로 박히는 고백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 이럴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런데 애니의 고백은 왜 이렇게 가슴을 아프게 할까?
애니를 천천히 달래겠다는 생각은 나의 오만이었다. 진심으로 마음을 부딪쳐오는 사람을 무엇으로 달랜단 말인가?
내 말주변이 그리 좋지도 못하거니와 세 치 혓바닥을 놀려 그녀에 마음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그녀에 대한 교만이자 모욕이었다.
그렇기에 애니의 질문에 대답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주저가 애니에게는 부정의 의미였던지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질문을 급하게 수정했다.
한밤중 어두운 밤 안임에도 애니의 표정이나 움직임이 엘프의 활을 들었을 때처럼 뚜렷하게 머릿속에 새겨졌다.
“아, 아니다 내주제에 아내라니. 러셀은 나 같은 시골 계집아이랑은 다른 사람인데. 그, 그냥 나는 여기 방에 항상 있을 테니까, 가끔이라도 와서 아, 안아주면 안 될까? 그… 처, 첩처럼 말이지.”
애니의 그 말에 가슴이 더 아려왔다.
하지만 애니가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애니의 눈이 열린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주르륵 토해내기 시작했다. 좀전의 득의양양했던 미소도 어색한 유혹도 마치 거짓처럼 사라졌다.
투둑 툭
침대 위에 남겨진 것은, 우리의 첫 만남 때와 같이 엄마인 한나 씨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불안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동생들을 다독이던 작은 소녀였다.
작은 소녀의 입에서 투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흑… 내, 내가 먼저였는데… 둘째 마님보다, 끄흑… 셋째 마님보다도 내, 내가 먼저였는데… 나, 나도 기다리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끄흐흑….”
그리고 어느새 침대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애니의 모습이, 창문에 흘러든 달빛 속에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애니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얼굴을 타고 턱에서 떨어져 애니의 얇디얇은 리넨 잠옷 위로 떨어져 내리고, 그렇게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을 맞은 애니의 가슴으로, 젖어버린 얇은 리넨 천이 달라붙고 있었다.
“흐흑… 러, 러셀. 마, 말하기 힘들면. 하, 하나만 대답해줘… 흑…”
애니가 눈물 속에 목소리를 쥐어짜 간절하게 물어온다.
“무, 무엇을?”
나는 간신히 한마디를 뱉어낼 수 있었다. 바보 같은 놈.
“나는 절대. 끄윽… 아, 안 되는 거야? 끅…”
“첫째 마님처럼 예쁘고 마음씨가 곱지도, 흐흑… 둘째 마님처럼 귀족이 아니라서? 셋째 마님처럼 가슴이 크거나 부자의 딸이 아니라? 흑… 아니면 사제나, 공주님, 무희가 아니라서? 흐앙… 그냥 시골 계집애라서? 나, 나는 여자의 마지막 자존심도 다 버리고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절대 안 되는 거야? 흐윽 끄윽…”
풋풋하게 시작한 소녀의 고백은 어느새 눈물바다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절절한 고백은 내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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