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12화 (112/352)

〈 112화 〉 110. 수리아 나파로아 4

* * *

푹신한 이실리엘의 허벅지가 느껴졌다.

“러셀, 얼굴 좀 이리로. 어쩜 코뼈가 부러진 건 아닐까요?”

리젤다가 내 턱에 흐른 피를 닦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핑크 돌격 이후 나는 응접실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 후 이실리엘의 다리를 베고 누워 리젤다의 간호를 받는 중이었다.

코피 정도야 괜찮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피가 많이나 응접실에서 눕게 되었던 것인데.

이게 상황이 참 애매한 게, 내가 누워있는 반대편에는 네 왕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분홍 머리의 수리아 왕녀가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높은 분들을 앞에 두고 제가 이러는 것이 아닌데…”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반대편분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양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냥 누, 누워계십시오.”

“맞습니다. 편히 편히 누워계시죠.”

“저, 저 때문에 죄, 죄송합니다.”

“아니, 그래도 국왕님들 앞에서 벌러덩 누워서 이게 아닌데…”

다시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한 분이 벌떡 일어나서 내 쪽으로 와 내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엘튼의 왕이라고 하셨었나.

“제발,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거 허리만 일으키면 넷이 경기를 일으키는데 높은 분들 네 분이 내 행동에 저러는 모습을 대체 언제 본단 말인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국 내 행동에 참지 못하고 한 분이 외쳤다. 제일 다혈질로 생긴 하툰의 왕 그리프라는분.

“불! 불경! 계속 누워있지 않으면 불경으로! 다스리겠습니다!”

나는 하툰 왕의 반칙에 결국 얌전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할 걸 그랬나?

잠시 후 수리아 왕녀가 누워있는 나에게 다시금 사과하려고 일어났다가 테이블 위로 곤두박질치려는 걸, 옆에 있던 왕들이 잡아채 불상사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 무슨 연유가 있으신 것 같은데?”

“그것이….”

사과와 함께 시작된 왕녀의 설명은 역시나 제약과 서약 때문이라고 했다.

기사서임을 받으며 특별한 존재에게 선택된 왕녀는 자신의 힘을 더 키우고 싶어 서약과 맹약을 했다는 것.

서약과 맹약은 리스크가 클수록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그렇기에 그녀는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제가 당신의 위대함을 적들에게 알리겠나이다. 그러니 적들이 저의 앞에서 바로 설 수 없게 해주시고, 만약 그러하지 않을 때는 제가 그들 앞에서 쓰러지겠나이다.’

문제는 자신에게 취해 중2병 같은 한껏 멋들어진 문구를 포함한 것이 문제였다.

대충 의미만 보면 모시는 분의 영광을 위해 적들을 모두 뚝배기 깰 힘을 달라는 것 자신의 목숨을 걸 테니 말이다.

그런데 해당 신이 좀 빡 대가리였는지 당신의 힘으로 적들이 말 그대로 왕녀의 앞에 설 수 없게 되고 평상시에는 왕녀가 쓰러지게 된다는 능력을 줬다는….

더군다나 힘을 받은 대상이 눈과 얼음의 여신이었으니.

결국 그녀가 적으로 규정한 대상은 빙판에 자빠지듯 계속 넘어지고 적이 없을 때는 그녀가 빙판에 미끄러지듯이 넘어진다는 것. 평소에는 말이나 당나귀를 타고 생활한다나?

정말 웃픈 현실이었다.

나만큼 불쌍한 새끼가 또 있었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머저리 같은 여신이었다. 눈과 얼음의 여신 빡 대가리 체크다.

“아니, 섬기는 존재가 하는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니! 그간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수리아 왕녀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딱한 사정은 제가 잘 알았으니 좀 전에 일어났던 일은 괘념치 말아 주시길. 그간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습니까?”

같이 신에게 굴림 당한 입장에 왕녀를 이해해줄 사람은 나뿐이리라.

내 말에 수리아 왕녀는 그동안 정말 힘들었던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저런 딱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으면.”

나는 품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 이것을…”

“흑… 이건?”

“편하게 눈물 닦는 데 사용하시고 버리셔도 됩니다.”

잠시 후 왕녀가 진정되고 이들이 들린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다고?

“덕분에 저희가 엘프님들과 오해도 풀고, 협력 관계도 맺을 수 있어서, 이렇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현자님 덕분에 당분간 아니 앞으로 예산 걱정도 덜었습니다. 북부는 아무래도 몬스터 때문에 예산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북부 다섯 왕국을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아니, 자네 무슨 자네가 대표라고 다 같이 감사드리면 되지.”

“아니, 이 사람들 현자님 앞에서….”

역시나 재미있는 분들이었다. 근데 그 현자 타령은 좀.

“그 현자라는 말씀 좀, 제발.”

“호칭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럼 저희가 어떤 호칭을”

한창 현자 타령으로 정신이 없을 때 한쪽에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던 하툰의 왕 그리프가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그 러셀님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의 말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말씀하시지요.”

“제가 얼마 전에 저희 성에서 수호자님 네 분을 손님으로 맞았는데, 저희 성 음식이 맛이 없다며. 분명 러셀님의 이름을 언급했던 게 기억이 나서 말입니다. 혹시?”

아, 아마도 롤리엘네 애들이 그리프님의 성에 방문한 것 같았다. 아니, 거기까지 가서 내 요리 자랑을 해줬다고? 하 이거 부끄럽네.

“아 제가 본업이 여관 주인이다 보니. 아! 그럼 저녁을 제가 대접할까요?”

이건 먹어봐야 알지. 설명을 어떻게 하나?

“옛!?”

아니 여관 주인이 요리한다는데 왜들 그리 놀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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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삭스의 수리아 나파로아 왕녀.

북부 무력 최고의 정점. 북부의 봄 벚꽃이라는 이명이 그녀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수식어지만 그녀는 요즘 아주 복잡한 일들로 고민이 많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가장 큰 고민은 계승 문제. 에삭스 국왕의 혈통 중 남자는 이미 전장에서 모두 사망했으며 남은 것은 오직 여자인 자신뿐이었다.

에삭스가 아무리 남자 계승 원칙이라도 그녀의 무력이라면 결코 계승 구도가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했음에도, 그녀의 사촌 오라버니 헥터가 주장하는 대로 ‘평소에 잘 서지도 못하는 왕을 어떻게 모신단 말이냐’는 주장이 가문 내에서 지지받는 처지니까 말이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앓아누우신 요 몇 달은 더 심해졌다.

긴급회의에 참여하게 된 것도 왕의 대리인이 가는 것이니 가문 내에서 반대할 법도 했지만, 자신을 이곳에 보내두고 무슨 짓들을 하려는지 긴급회의 요청이 오자마자 반대파에서 자신을 추천했다.

회의 장소로 향하는 내내 말에서 몇 번이나 떨어져 굴러야 했다.

저주받을 능력.

왜 이딴 능력을 원했을까? 아니다,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여신의 이름으로 내 앞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고, 여신의 이름을 빛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서약이었을 것인데. 왜 이런 능력이 된 것일까?

전장에서 무적이라면 무엇하나. 평상시에 항상 살얼음을 걷는 기분인데.

자신의 계승 문제도 다 이 능력이 문제였다.

그래도 참석한 회의는 놀라운 것들도 많이 접하고 예산이 늘어났다는 내용도 전할 수 있으니 괜찮은 성과였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 네 왕은 엘프님들의 선물 덕에 예산이 늘어난 것이지만 자신의 공으로 늘어난 것으로 해준다고까지 하셨다.

하긴 사촌오빠 헥터를 약한 놈이 정치에만 매달려 왕위를 얻으려는 쓰레기 같은 놈으로 평가하는 분들이니, 같은 위치가 된다는 것을 용납하기는 힘드시리라.

그러나 빠르게 정리될 줄 알았던 회의는 조금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거 이렇게 도움을 받고, 고마움을 전하지 않는다면, 북부 왕들의 체면 문제 아니겠나?”

누군가의 말에서 시작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예산이나 엘프와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만드셨다는 그분께, 그리고 특이한 마물을 잡아내 화이트힐을 지켜냈다는 그분께, 감사함을 전달하기 위해서 인사를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네 왕국의 왕들이 말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다들 ‘이럴 게 아니라, 이 자리에서 당장 출발하지?’라는 의견까지.

그래, 솔직히 누군가 궁금하긴 했다. 외교나 예산을 떠나서 지금 높은 엘프님과 인간 남자의 사랑 이야기는, 북부 사교계 여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랑 이야기니까 말이다.

높은 엘프님과 여행을 다녀왔다는 벨 공녀에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사교계 여자들의 입과 입을 거쳐 자기 귀에까지 흘러 들어왔었다.

뱀의 왕에게 죽을뻔한 그녀 앞에 뛰어들어 뱀의 왕에게 ‘내 다리를 가져가라, 그러나 그녀는 내어줄 수 없다!’라고 외치셨다고 했던가.

이런 남자가 아직도 있다니, 음유시인의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자신도 그 대목에서는 엄청나게 설렐 정도였다.

결국 화이트힐까지 홀리듯 따라가 며칠을 기다려 그분을 만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분께 인사까지 드릴 수 있었으니.

그러나 기쁨도 잠깐 자신의 저주받을 능력이 다시금 발목을 잡았다.

첫인사에 그분의 얼굴에 머리를 처박아 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아 저주받을 능력이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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