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109. 수리아 나파로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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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미친놈이 사고를 친 게야. 뒈질 것이면 혼자 뒈질 것이지, 왜 나른 사람들을 끌고 들어간단 말인가.
다른 국왕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백단목은 대수림의 엘프에게서만 구할 수 있는 것, 엘프들이 잘 거래해주지도 않는데 저것이 저만큼 있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고, 가끔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는 하툰의 국왕이 가져온 것이기에 다들 기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때 얼굴에 거만한 미소를 머금은 하튼의 국왕 그리프가 자신의 품 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고이 접힌 고급스러운 천 한 장을 꺼냈다.
섬세란 어울리지 않는 자인데, 손끝으로 아주 조심스레 꺼내 드는 것이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이 소름이 돋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천을 잘 펴 안에서 처음 보는 형태의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자랑하듯이 말했다.
“에헴…. 다들 잘 들으라고 귀들 잘 닦고.”
“인간의 국왕께 엘프들을 대표해서 인사드립니다. ……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작은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에스미가. 가장 드높은 엘프.”
“크하하핫 들어는 봤나? 가장 드높은 엘프? 그분의 친필 편지라네! 난 이것을 가보로 간직할 것이야! 아… 에스미가 드높은 엘프이시여…”
그리프는 눈을 감고 에스미가의 이름을 음미하는 듯이 말했다.
“뭐?! 뭐라고 높은 엘프 중, 가장 높으신 분이란 말인가? 엘프의 국왕 같으신 분인가?”
“아니, 그런 분이 왜 자냬 따위에게 편지를 보내신단 말인가? 보내시려면 나에게…”
“가보라고? 언제부터 외교 문서를 사적으로 소유하게 되었지? 모든 외교 문서는 한겔에 보관하게 되어있으니 내어놓으시게.”
“잠, 잠깐만 저도 잠시만 보게 해주세요.”
하툰의 국왕이 투척한 백단목 보다. 드높은 엘프의 편지 한 장에 회의실이 불타올랐다. 수호자만 해도 엄청난 존재인데 그들을 다스리는 수장이라고? 높은 엘프 중에 가장 높은 엘프라니 국왕들이 열광할 만했다.
다들 몰려들어 편지를 확인하다 한겔의 국왕 아서가 화를 버럭 내며 외쳤다.
“이 미친놈, 이 귀한 것에 고기 기름을 처발라 손자국을 내다니!”
“제정신인가? 자네?”
“아니 드높은 엘프님의 친필 서한을 고기 기름 묻은 손으로 만졌다고요?”
“그리프에게 많은 걸 기대 말게 그나마 편지가 제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야.”
다른 왕들의 비난을 받으며 그리프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정말 억울했다. 저건 손가락을 쪽쪽 빨며 양고기를 뜯었던 수호자님 때문인데 말이다.
“이 친구들 내가 아무리 생각이 없기로서니 그랬겠나. 그 내가 그런 게 아니라… 그 수호자님들이… 저녁 식사하시다가…”
“이 친구가 이젠 우릴 병신으로 아는 게구먼 수호자님들이 식사하고 가셨다는 거짓을 우리가 믿을성싶나?”
크람의 국왕 스테판이 별 웃기는 소리도 다 들어본다며 그리프를 비난했다. 같은 엘프지역 후방에 있는 스테판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경계심이 높은 건지 인간들이 준 것은 물 한잔도 마시지 않는 분들인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을…
“아니, 이 친구들이 사실이래도.”
“어…. 그러고 보니 손자국이 작아요. 마치 여성 손 같은.”
관찰력이 뛰어난 수리아 왕녀가 편지를 살펴보다 말했다. 다 같이 살펴본 편지에 찍힌 기름 자국은 그리프의 손자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가냘파 보였던 것이다.
“아니, 이게 사실이라고?”
다들 놀라서 그리프를 바라보고 있는데 머리를 긁적거리던 그리프가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더니 외쳤다.
“아, 그러고 보니 내 부탁할 게 있네! 그…. 혹시 음식 잘 만드는 요리사 아는 사람 없나? 그분들이 우리 성 식사가 맛이 없다고…. 다음에 또 오신다는데…”
세 왕과 왕녀는 그리프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식사하시고 맛까지 평가하고 가셨다고?
그나저나 뭘 대접했기에 맛이 없다고 한 것일까?
넷 중에 입맛이 가장 깐깐한 수리아 왕녀가 물었다.
“대체 뭘 대접했기에 그런 평가를?”
“40년 된 아벨루스 포도주와 육 개월 미만의 양을 구워서 대접하고, 수프와 에든 치즈 그리고 흰 빵이었는데 맛이 별로라고 하시더군”
북부는 비교적 검소한 식사를 하는 편이다. 몬스터와 마물과 싸우며 생존이 먼저인 북부에서 음식에 돈을 쏟아붓는 것은 이해 못할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리프의 식사는 쓸데없는 돈을 쓴다며 아서의 짜증을 끌어내기 충분한 메뉴였는데도 평가가 별로라고?
40년 된 아벨루스 포도주는 한 병에 10 금화에 에든 치즈도 한 덩이 1 금화나 하는 것인데?
비싸다고 맛있는 건 아니지만 저건 정말 나쁘지 않은 메뉴인데 말이다.
“그, 수호자님들 입맛이 고, 고급이신가 보군요.”
네 왕과 왕녀는 ‘수호자님의 입맛은 고급이다.’라는 정보를 꼭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소란 끝에 이날 회의는 엘튼의 왕이 가지고 온 걷는 늑대를 잡은 인물과 북부에 엄청난 예산과 엘프와의 교류라는 선물을 가져다준 인물이 동일 인물임이 회의 막바지에 밝혀졌다.
걷는 늑대에 관한 내용과 함께 엘프와의 교류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보고를 위해서 회의에 참석했던 헤럴드의 말이 결정적 힌트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늑대를 은화로 만든 화살로 잡아냈다는 말이지? 그게 높은 엘프님의 남편분이고 또 그분이 엘프들과 교류와 이런 엄청난 선물을 받게 해주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그분이 러셀님이라고?”
“옛 러셀, 이명은 대늪지의 현자님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네 왕과 한 왕녀가 이렇게 외쳤다.
“대늪지의 현자!”
이실리엘, 로리엘들과 함께 숲길을 걸어 다시 화이트 힐 까지 빠르게 돌아올 수 있었다. 갈 때는 오 일정도 걸렸는데 돌아올 때는 사흘 만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걷는 것이 훨씬 빨라져 생각보다 속도가 더 났기 때문이었다.
역시 뭐든지 아이템 빨 이라니까.
며칠을 걸어 숲길 입구로 나오자 입구에서 빼앗겼던 동전 주머니도 밖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은화가 몇 개나 들어있었기에 가슴이 쓰렸는데 다시 동전 지갑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에 한동안 보지 못한 리젤다를 곧 만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한껏 고조 되고 있었다.
리젤다를 만나기 위해서 화이트 힐에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리젤다가 아닌 다른 인물들을 만나기 전까지엔 말이다.
나를 맞이하기 위해서 몰려나온 인물 중에는 거물 다섯이 끼어있었다.
아니, 왜 북부 다섯 왕국의 왕들이 다 몰려와서 우리를 맞이해 주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더군다나 네 명의 왕과 한 명의 왕녀가 먼저 인사를 해오는 상황.
“북부의 다섯 국왕이 대늪지의 현자님을 뵙습니다.”
‘뭐라고?’
다섯 왕의 뒤에 서 있는 헤럴드님을 보자 함박웃음을 짓고 계셨다. 뭔가 잘했다는 듯이.
하…. 영감님 감성, 진짜 이거 아니라니까요!
늑대 가져가실 때 조용히 처리해주기로 해놓고 대대적으로 광고해도 이렇게 다 몰려오진 않을 것 같은데…
당황이 되는 상황에서도 인사는 해야 했다. 국왕을 앞에 두고 무례를 범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처음 뵙겠습니다. 러셀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 이실리엘이고요. 그리고 여기도 아내인 리젤다입니다.”
분명히 달려와 안기고 싶었을 텐데 왕들이 인사를 하겠다고 앞에 서니, 뒤에서 주춤대는 리젤다를 잡아끌어 품에 안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실리엘입니다.”
“러셀 저는 인사를 먼저 나눴어요. 사흘 전에…”
“뭐?”
리젤다가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북부는 항상 경계 상태 아니었나? 다섯 분이 다 여기 와있으면 어쩌자고…
각 왕과의 인사가 이어졌다.
당황하고 놀란 상황임에도 한가지는 확실히 느껴졌다. 북부의 왕들은 일반적인 왕들이랑 다른 것 같다고 말이다. 뭐 이실리엘의 남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평민인 나에게 상당히 정중하고 배려심 있는 모습들에 호감이 싹튼다고 할까?
“저는 엘튼의 왕 헥토르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하툰의 왕 그라프 3세 대수림을 맡고 있죠.
그렇게 네 왕의 인사가 끝나고 웬 분홍 머리 여자가 인사를 해왔다.
“에삭스의 수리아 나파로아 왕녀입니다. 아버지께서 노환으로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당히 맑고 투명한 목소리였다. 크리스탈 유리잔이 울리는 소리 같은.
그리고 이 세계에는 특이한 머리카락 색이 참으로 많은데도 불구하고 분홍 머리는 처음이었다.
신기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관찰하며 인사를 나누던 순간이었다. 먼저 허리를 숙인 왕녀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나도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는데 내가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분홍색 정수리가 갑자기 순식간에 커지더니 내 시야를 뒤덮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와 충격.
뻐억
“커흑”
후두둑
갑자기 맨땅 그것도 평지에서 미끄러진 핑크 머리가 앞으로 돌진하며 내 얼굴을 처박았던 것이다.
“러셀! 피, 피가!”
이실리엘이 놀라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홍 머리의 박치기를 당한 나는 쌍코피를 흘리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는데, 강한 충격에 머리를 흔들며 주변을 살피자 내 주변에 있던 네 왕이 머리를 움켜잡는 것이 보였다.
이실리엘을 구할 때 말고는 내 몸에서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죄, 죄송합니다. 이게 그러니까…”
세상이 분홍색으로 물드는 충격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