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14/28)

- - - - - 해적 - - - - -

이렇게 잠을 한숨도 못 이룬 채 정비를 시작했다. 벗어던진 옷을 황급히 주워 입었고, 다시 페르시아스는 작아진 상태로 주머니 안으로 들어왔다. 매우 피곤해 보였는데 역시 주머니에 들어오자마자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원래 잠이 많은 그녀였지만 밤새도록 시달린 탓이다. 

잠이 들면 혼수상태에 빠져들 것 같아 침대에 기대며 앉아있었다. 문득, 카시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예전처럼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고? 이젠 내가 예전처럼 좋지 않다고? 칫...”

카시아... 보고 싶었다는 나의 진심어린 말에 그렇게 대구해 버리고 돌아서다니... 아마 내가 사라져버려서 속이 시원할 것이다. 그래, 나 없이 한번 잘해보라고 카시아! 

탈칵.

“랑스, 일어났어요?”

“에이미...”

“어머, 벌써 일어나서 다 준비해 놓으셨네? 해적들은 부지런한가 봐요. 쿠쿡. 페르시아스는요?”

단아한 사제복과 그에 잘 어울리는 오렌지색 머릿결, 어째 똑같은 사제복인데 에이미가 입었을 땐 저렇게 단정해 보이고, 칼리오페가 입었을 땐 섹시해 보이는지... 참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에이미는 나 같은건 안중에도 없고 그저 페르시아스만 보고 싶은가보다.

“안돼요. 페르시아스는 지금 잠들었어요. 근데 에이미는 몇 살?”

“저요? 열 아홉인데...”

“생각보다 늙었네요? 난 열 여섯인데...”

“피식, 첫눈에 동생인줄 알았지.”

“어쩐지 삭아 보이더라.”

어제 잠깐 만나고, 또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는데 황급히 친해지고 있는 우리들이었다. 이런 걸 공동체적인 유대에 이끌렸다고 말해야할까? 뭐 어쨌든 칼리오페를 지키기 위해서, 또한 신전을 남작에게서 안전히 지키고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린 반드시 절친해야만 하는 사이이니까. 뭐 이런 복잡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남다른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그녀들이었다. 에이미가 품안에서 앙증맞은 작은 천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뭐야? 옷 같은데... 매우 작아... 혹시?”

“헤헤... 밤새도록 뜨개질 했어요. 페르시아스한테 주는 선물이요. 여자가 다 벗고 있길래...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어요. 깨어나면 줘요.” 

“아... 고마워.”

자세히 살펴보니 부드러운 레이스가 달린 치마, 또 나시티라고 할 만한 매우 앙증맞은 작은 옷들 이었다. 모두 푸른색이라서 물빛 머릿결을 가진 그녀와 상당히 어울릴 것 같다. 물론 고맙긴 한데. 하지만... 안줘도 될 선물이었다. 옷을 매번 벗겨야 하잖아! 하하핫.

피곤에 감기는 눈을 애써 바로 뜨며 나긋한 분위기를 즐기고 있자 발자국소리가 이어졌다. 

“어머? 여기들 있었네. 어서 가자!”

준비를 마친 칼리오페.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거라 신경을 썼는지 평소 틀어 올렸던 머리를 길게 풀어 헤쳤다. 

그녀를 따라 도착한 마차에 올랐고 이어 마차는 출발했다. 역시 남작 놈이 보내준 마차라서 그런지 거칠게 달리고 있어도 크게 털컹이지 않았으며, 겉에서 보던 크기와는 달리 의자도 넓어 잠을 자기엔 안성맞춤 이었다. 고개를 벽에 기대었다. 에이미도 어젯밤 페르시아스의 옷을 만드느라 피곤했는지 나와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칼리오페만 무슨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지 내 옆에서 한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는 중이다.

이대로 거의 하루를 꼬박 가야만 수도인 파이라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 쿨...

마차에 들어서자마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칼리오페의 목소리에 잠을 깼다.

“랑스 일어나. 도착했단다.”

“으... 음...”

눈을 떠보니 내 눈 앞엔 그녀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나는 누워있었고, 그녀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서 상황을 확인해보니 나는 어느새 칼리오페의 무릎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으읏! 죄송해요.”

“쿡쿠... 괜찮아. 그나저나 어제 밤 네 방에서 규칙적으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리던데...”

“네? 예에엑!?”

젠장!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검술 연습했었니?”

“휴... 예, 예. 그랬어요. 하, 하하.”

피식웃으며 마차에선 내린 우리들이었다. 주변은 어느덧 깜깜한 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빛이 밝았는데 역시 수도라서 그런지 건물도 고급스럽고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건물들 뒤편에는 역시 외성으로 도시가 둘러싸여 있었고, 우리들의 눈앞에는 회색 벽돌로 지어진 굉장히 높은 건물이 솟아 있었다.

“우와... 엄청 크네요.”

“당연하지. 왕궁인데.”

“바보 랑스...” 

에이미가 내 옆구리를 콕 찌르며 해적촌놈, 촌티내지 마세요하며 키득 웃었다. 그렇구나. 이게 성이라는 거구나. 진짜 섬 구석에 틀어박혀 약탈 질이나 해왔던 해적인 나로선 처음 본다. 좋게 말하면 어설픈 해적들처럼 잡혀서 성의 깊숙한 감옥에 갇힐 일도 없으니까. 

칼리오페는 이 커다란 성의 내부를 잘 아는 것처럼 여러 방들을 방문하며 귀족들로 짐작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또 마주치는 어느 사람들은 사제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하며 깊이 머리 숙였다. 칼리오페는 의외로 사람들 사이에서 덕망이 높은 사제인가 보다.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4&WTV1471013=167808024&WTV1392781=25638129&WTV1357910=273489&WTV1357911=2330667&WTV246810=72&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8. 검술 대회&WTV9172643=“랑스, 이곳이 네 방이야. 검술대회 출전자들은 그 기간 동안 성안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이 있단다.”

모두가 함께 내가 배정받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제까지 내가 머물렀던 어느 방보다 고급스럽고 화사한 탓에 뭣하나 건들기도 무서울 정도였다. 칼리오페의 표정은 그저 그런 듯 담담했지만, 에이미 또한 이러한 호화스런 곳에서 머무는 것은 처음인지 눈빛조차 조심스럽게 변하며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고로 그녀도 촌년이라 말할 수 있겠다.

“잠깐 이리 모여봐.”

칼리오페는 품안에서 종이쪽지 한 장을 꺼내 들더니 테이블위에 쫙 펼쳤다. 역시 칼리오페를 제외한 나와 에이미는 손때가 묻을세라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며 앉았다. 의자에 깔아 논 하얀 모피는 어느 동물의 것인지 엉덩이에 촥 감겨오는 게 상당히 야릇한 기분이 든다. 에이미가 내 눈치를 보며 소근거렸다.

“설원에 사는 윈딩고라는 몬스터의 모피야.”

“컥... 몬스터...”

몬스터가 왜 몬스터인가. 인간에겐 아무런 이로운 점이 없어서 몬스터란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역시 사람의 두뇌와 손을 거쳐 이루어지는 개발성은 절대적으로 나누어진 쓸데없는 이름의 경계까지도 허물어 트려 자연스럽게 정해진 순환을 재배치시킨다. 지금 내가 깔고 앉은 윈딩고라는 불쌍한 녀석의 모피도 그렇고, 요정의 몸을 맛있게 휘저어버린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러니 요정을 취한 내가 최악이거나 대단한 게 아니고 사람이 원래가진 진취적인 확장성이 대단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더더욱 쉽게 말해 남자라면 누구나 고혹적인 페르시아스를 탐했을 것이다.

아무튼 매우 짧은 순간에 쓸데없이 복잡한 생각을 해버린 나였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종이를 훑어보았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랑스, 네 대진표야.”

“아...”

“전에 엿들어서 알겠지? 그 돼지 남작이 네 예선은 이미 통과시켜 놓았어. 바로 32강 토너먼트에 진출해있지? 원래라면 도착하는 즉시 예선전을 치러야했어. 지금 성의 지하에는 예선전을 치루는 검사들로 엄청 북적거릴걸.”

“그 빙신트 남작이라는 사람 여러모로 쓸모 있네요? 살려두길 잘했네...”

에이미가 키득키득 웃었다.

“키득 키득, 빈센트 스윙스터야.”

“아무튼. 그래서 몇 명을 이겨야하나... 음. 한명이기면 16강이고 두 명 이기면 8강... 셋, 네 명만 이기면 끝이네요?”

“그래. 화끈하지? 그런데 조심해야할 놈... 아니 년이 있지. 아니 놈도 있고, 두 명이나 있구나.”

년이라. 역시 화끈한 사제님이다.

“누군데요?”

“전에 잠깐 마주쳤지? 데미안 트라이더라는 곱상하게 생긴 열다섯 꼬마야. 최근 검술가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는데... 기사단에서 그 애를 영입하려고 주기적으로 남작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나봐. 어쨌든 지금은 빈센트가 양자로 삼아서 호위기사 겸으로 데리고 있지. 검술도 검술이지만 누가 어린아이를 경계하겠어? 방심하다 목이 달아나버리니까 어쩌면 안성맞춤이겠지.”

맞는 말이다. 처음 놈의 일격을 당할 때. 난 빈센트 옆에 누가 서있는 줄 신경도 안 썼으니까. 

“어쨌든 데미안이란 아이는 처음 이 대회에 출전하는 거야. 만약 8강에 오르면 그 애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전에 탈락이 되면 탈락된 쪽은 자연히 내기에서 지게 되는 거고.”

“그래요. 그 애 다음으로 경계할 만한 대상은요?”

“그렇게 말한다면 모두다라고 말해야 하겠지. 하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요주의 해야 할 계집이 한명 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계집이라... 잠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다시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하아... 누구냐면... 다름 아닌 이 나라 은백합 기사단의 단장. 스카디 데 사이르. 현재 도박장의 투표율은 그녀가 압도적이야. 아까 다리우스 공작이 돈 좀 걸라고 꼬득였는데 어찌할 까 망설이는 중이야. 너한테 걸까. 스카디라는 기사단장에게 걸까... 데미안은 충분히 이길 수 있겠지? 네가 지면 난 병신같은 빙신트한테 팔려간단다... 훌쩍.”

"피식, 병신같은 빙신트 남작이라..."

귀족들도 도박을 해요? 하고 물으려 하였지만, 그녀의 고민이 자못 심각한 것 같아서 조용히 찬장을 열었다. 어디... 힘 좀 쓸게 없나... 작은 찻잔은 집어 들었다. 귀하게도 수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굉장히 단단한 것 같다. 벗어놓은 OPG를 끼기 전에 빈 찻잔을 칼리오페에게 내밀었다.

“목마르지 않아요?”

“응?”

칼리오페가 든 찻잔을 노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운디네, 따뜻한 물이 필요해. 한없이 부드러운 네 살결처럼 말이야.” 

조르르르륵 

“어어!? 물이 차올랐어!?”

칼리오페와 요정의 힘을 대충 짐작하는 에이미 마저도 경악에 눈이 커져 버렸다. 칼리오페는 내 아까운 정력을 소비하여 애써 만들어 놓은 물을 마실 생각은 안하고 내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랑스, 너 마법도 부려?”

“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령술이에요. 우연히 요정을 얻게 되어서...”

페르시아스가 잠들어 있는 주머니를 쓸어 만졌다. 깨워서 보여주고 싶었지만 내 충족을 위해서 피곤한 녀석을 깨우긴 싫었다.

칼리오페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검술 대회에서 마법을 부릴 생각이니? 그러면 실격 돼. 오디세우스만큼 강압적인 건 아니지만, 관중들이 보인 앞에서 마법을 쓰게 되면 당장 마녀로 몰려서 잡혀가고 말거야.”

씨익 웃었다.

“걱정마세요. 제 무기는 그것뿐만이 아니니까요.”

OPG를 착용했다. 아무래도 잔에 따른 물은 마실 생각을 안 하니 잔을 들어 그 아래 받혀진 접시를 들었다. 그리고 살포시 가루로 만들어 부슬부슬 테이블 위로 뿌렸다.

“히익!”

“하악!”

에이미는 부슬부슬 떨어지는 접시의 가루를 보며 위자에서 앉은 채로 넘어져 버렸고, 칼리오페는 믿어지지 않는 눈빛으로 가루가 된 접시를 찍어 먹어보곤 퉷하고 뱉었다.

“랑스... 너 괴물이야!?”

“아니요. 카린소 해적이요.”

“거짓말...”

“아, 정확히 말하자면 카린소 해적단의 다섯 번째 해적 왕, 골든 스페로우 호의 선장입니다.”

내 말에 둘 다 또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그녀들이 이왕 놀랜 거 한 번에 다 놀래어 주려는 계획이었는데 역시 잘 먹혀드는 것 같다. 어쨌든 난, 이번 시합이 끝나면 바로 떠나버려야 하니까. 아쉬운 마음에 모든 사실을 말해주기로 계획했던 터였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네가 오디세우스의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또 결과적으로 너 때문에 그쪽 사람들이 우리 수도원에 거주하게된 거구나? 묘한 우연이네...”

칼리오페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에이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알았어. 믿을게 랑스, 내일 시합 꼭 우승해야 돼? 응원할게.”

“아,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너도 푹 쉬렴.”

“랑스, 잘자...”

“에이미도.”

어쩐 일인지 다급하게 밖을 나서는 그녀들 이었다. 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겠지. 주머니 안에 든 페르시아스를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꺼내며 윈딩고의 모피 안에 감싸주었다. 

그리고 난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 - 해적 - - - - -

“와와와와와!“

시끄러운 함성, 둥글게 펼쳐진 관중석엔 빽빽한 군중들이 꽉들어 차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좋은 자리에는 딱 봐도 ‘나 귀족이다’라고 과시하는 사람들이 거만하게 턱을 괴고 있었다. 그곳에 칼리오페가 앉아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에이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한쪽에 마련된 공간엔 이 대회에 출전한 서른 두 명의 기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역시 그곳엔 노랑머리 데미얀이 제일 두드러지게 보였고, 또 유력한 우승 후보인 기사단장이란 여자는 누군지 잘 모르겠다.

검술대회의 규칙은 이러하다. 네모났게 만들어놓은 시합장 밖으로 이탈하면 장외로 패배, 전투 불능이 되었을 때 패배, 의도적으로 도망만 다니거나 지루하게 시간끌기에도 실격, 행여 사악한 술수, 즉 마법이란 거겠지. 아무튼 마법을 사용하면 끌려가서 사망,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어도 의의 없음. 난 시합장 위로 올라오기 전에 그것에 서명을 하고 올라온 상태다. 그러니 마음껏 놈을 죽여도 되지만... 피식, 왼손으로 복부나 갈겨주지.

“흐흐흐... 짝딸 막한 꼬마 놈이군. 어떻게 예선을 통과했냐? 호오 그렇군. 귀족이 니 애비지?”

빌어먹게도 내가 본선 첫 경기이다. 눈앞엔 거대한 모닝스타를 휭휭 돌리고 있는 떡대가 서 있었다. 레이하이딘하고 비슷한 체격이었지만 근육도 없고 배만 뚱뚱하게 튀어나온 녀석이라 내가 보기엔 그저 우스워 보일 뿐이다. 내 주머니 안에 숨어들어가 있는 페르시아스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키득키득 웃는 느낌이 났다.

중간에 서있는 신사복 차림의 남자가 삐익하고 큰 휘파람을 불었다. 경기 시작이다.

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4&WTV1471013=170145480&WTV1392781=25639163&WTV1357910=273489&WTV1357911=2330760&WTV246810=73&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8. 검술 대회&WTV9172643=“와와와와와! 꼬마 잘해라! 와와와!”

의외로 엄청난 덩치에 맞서는 비운의 소년을 응원하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이러한 환영도 사뭇 좋은 느낌이란 걸 늦게야 눈치 채고 관중석을 향하여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이런 방심한 나에게 떡대가 갑자기 돌격해 왔다. 내 머리위로 빠르게 휘둘러지는 철퇴를 몸을 비틀어 피했다. 쾅! 

“뭐하는 서커스지...?”

엄청난 크기의 모닝스타. 그것을 가볍게 피하자 나를 응원하던 관중들이 일제히 조용한 침묵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의 움직임 치곤 꽤 놀라웠나보다. 더 놀랍게 해줄게 관중님들. 이름도 기억안나는 덩치가 입을 열었다.

“죽어라 꼬마!”

“너 나 죽일 셈이냐?”

“그래. 죽여도 별 상관없지. 크크큭.”

나는 무엇이든 빨리 배운다. 그리고 난 짧은 기간이지만 매우 신성한 신전이란 곳에서 생활했다. 누구에게 말은 안했지만 난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친절한 사제들의 기품부터 시작하여 굉장한 의식절차와 내가 상상도 못했던 섬세한 단어들까지. 신성한 문전 앞에서 아름다운 사제님에게 배운 단어를 가르쳐줄 겸 입을 열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단어. 최대한 크게 말해줘야겠다.

“씹할!”

“뭐?”

내 앞에 있는 놈만 아니라 모든 관중들의 표정이 희한하게 일그러졌다. 유일하게 환호하는 칼리오페 사제님.

“꺄아! 랑스 멋져!”

“뭐 이런 불순한 꼬마가...!”

나 참, 열 받아서 욕을 한마디 뱉은 꼬마와 그 꼬마를 철퇴로 쳐 죽이려는 어른 중 누가 더 불순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나로선 모르겠다. 역시 나를 죽이려 휘둘러지는 철퇴, 저것에 맞아 죽으면 끔찍하게 죽어가겠지. 그러나, 덩치 큰 놈의 약점이 있다. 나는 철퇴가 휘둘러지는 와중인데도 천천히 걸음을 뻗어 놈의 가슴 안으로 파고들었다. 철퇴가 무거워 자신의 안쪽으로 파고들어오는 날 막을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난 검을 뽑아들지도 않은 채 놈의 양 무릎을 때렸다. - 따악!

“흐아악!”

따악! 따악! 따악! 

“흐악! 그만! 으아악!”

최대한 살며시 때리는 척 했지만 놈은 휘두르던 모닝스타도 놔두고 자신의 무릎을 황급히 감쌌다. 무릎 뼈가 아작나는 소리가 났다. 우드득...! 놈이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번엔 머리를 때리는 게 좋겠군.

예상치 못한 광경에 침묵이 짙어졌다. 공포에 일그러진 놈의 신음성만 크게 메아리쳤다. 놈의 얼굴 앞으로 다가가 검을 뽑아들어 휘둘렀다.

“꾀에에엑”

“쳇... 싱거운 놈.”

놈의 목젖에 검을 갖다 대었을 뿐인데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별것 아닌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있는 심판을 바라보았다.

“이봐 심판? 이놈 기절했어.”

“아. 아... 아! 랑스 클란츠. 승!”

와아아아아아아!

이제야 침묵이 깨어지고 시끄러운 함성이 메아리쳤다. 멋지게 손을 흔들며 시합장을 내려와 대기소로 걸어왔다. 칼리오페가 생긋 웃었고, 나 또한 화답하였다. 자 이제 네 명만 이기면 되는 거지? 의외로 간단하겠어.

수고했다며 어떤 병사가 차가운 물을 가져왔다. 떠주는 물이었기 때문에 호의를 받아들여 벌컥벌컥 마셨다. 우웃, 너무 차가운 걸?

“다음 순서는 데미안 트라이더 대 블루조아 스토커!”

약간주의대상 데미안, 다름 아닌 그 소년이 바로 다음 경기였다. 상대는 블루조아라는 여자인데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고, 두 개의 단검을 휘두르는 암살자 스타일이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는지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바람처럼 휘몰아치며 데미안을 압박해 갔다. 몸도 날렵한데다가 짧은 단검을 빠른 속도로 휘둘렀기 때문에 그것보다 큰 동작을 요구하는 검술자로선 여간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검을 빼들고 여자의 검격을 맞받아치는 데미안도 역시 곤란한 듯 뒷걸음치며 여자와 거리를 벌렸다. 다시 좁혀져오는 블루조아. 자신보다 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는 적이 좁혀올 때엔 빠른 찌르기만큼 효과적인 방어 법은 없다. 역시 데미안도 나의 생각처럼 빠른 찌르기로 상대를 위협하였다. 이번엔 반대로 블루조아 쪽에서 방어를 펼치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의외로 쉽게 이길 것 같다. 저 상태로 밀고 나가면 장외로 데미안의 승이다. 하지만 블루조아도 바보는 아닌 모양이다. 허리에 찬 비수를 데미안에게 던졌고, 데미안은 예상치 못한 암기에 놀라며 빠른 방어검술을 펼쳤다. 쨍강! 쨍! 째쟁! 쨍!

“와아아아아아... 저 꼬마도 최고다!”

“와아! 어린놈들이 꽤 하는데? 파이팅이다! 와아아!”

“와아아아아아!”

사람이란 예상하는 것 이외의 변칙에 쉽게 흥분하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을 과격하게도 만들도 들뜨게도 만들 수 있는데 역시 자신의 일이아닌, 관중들은 객관전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과격해지지 않고 너그럽게 들뜰 수 있었다. 반대로 블루조아라는 여자의 얼굴엔 패색이 짙었다. 데미안은 그녀가 펼친 접근 전에 빠른 찌르기로 공식처럼 대응하며 자신을 위협했지만, 그것은 자신보다 떨어지는 검술자의 것이었다면 별로 위협이 되지 않을 터였다. 블루조아는 한차례 그러한 상황을 격음으로서, 충분히 자신의 기량이 데미안 보다 떨어진 다는 걸 인정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데미안이 검집을 집어넣었다. 블루조아는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시합중에 뭐하는 거냐!”

나는 데미안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데미안... 저놈... 발검술이다. 어떻게...?”

블루조아가 데미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쓰러졌다. 데미안이 한차례 뽑아든 롱소드가 스르릉 검집에 들어갔다. 발검술이다... 정말 발검술이다!

“데미안 트라이더 승!”

“와아아아아!”

데미안의 검은 롱스워드. 보통 한쪽 날의 카타나 계열이 아닌 이상 발검술을 죽어도 흉내 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해적들 사이에서만 물려져 내려오는 검술이 있다. 그런 발검술을 롱소드로 구현해 낸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섬의 위대한 해적왕이 창안하였다는 롱소드 발검술. 나 또한 그것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훅스턴에게 구박당하며 배워왔던가!? 무엇보다 내가 커틀라스가 아닌, 롱소드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발검술 때문이 가장 크다. 그런데 놈이! 어떻게 저 놈이...!?

역시 내 옆자리에 앉는 놈. 놈에게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였지만 어느새 악취나는 빈센트 남작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오 우리 데미안 잘했다. 크크크. 곧 있으면 저 랑스라는 바보꼬맹이구나. 죽을 준비해라 꼬마. 크크크.”

몇 차례 경기가 끝나고 다음 순서는 요주의 인물들의 차례였다. 

“여러분이 기대하시는 다음 순서를 소개하겠습니다. 다음 순서는 은백합 기사단 단장인 스카디 데 사이르, 그리고 자작! 필립 오키르!”

어디선가 걸어 나오는 스카디 데 사이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몸에 딱 맞는 멋들어진 순백의 메일(mail)을 입고 차분히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에 관중들이 숨을 죽였다. 정말 은백합 기사단 단장이라더니 모든 게 은빛처럼 하얗다. 머리색도 카린소 섬의 육백살 먹은 마녀, 류지아 만큼 순백의 머릿결이다. 류지아는 단발인데 반해 스카디란 여자는 긴 생머리였다. 갑옷에 가려져 가슴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성용 메일이라 그런지 잘록한 허리와 늘씬한 다리는 그대로 드러났다. 키도 굉장히 크다.

그 앞에 서 있는 필립이라는 자작은 날렵한 에스톡을 뽑아 들었다. 육중하며 날카로운 투핸드소드와 가는 세검의 대결이라...

“와와와와! 단장님 화이티이이잉!”

“꺄악! 멋져요 단장님!”

“스카디! 스카디! 스카디!”

불쌍한 자작, 모든 응원단들이 멋진 기사단장만 응원했고, 필립은 완전히 묻혀버렸다. 그러나 그는 인격이 된 것인지 정중히 상대에게 인사한 후 검을 뻗었다. - 챙! 채챙! 챙! -  

“오오!”

오호? 저 남자 꽤 하는데? 의외로 주춤하며 남자의 검을 막아낸 스카디, 역시 의외의 상황에 모든 관중들이 숨을 죽였다. 그러나 이어 스카디의 반격이 시작됐다. 동작은 매우 컸지만 무거운 투핸드소드로 세검을 막아내고 또 받아치는 빠르기는 굉장한 기술이 없으면 안된다. 더군다나 검의 궤도도 약간 희한했다. 보통 검이라면 급소를 노리며 공격을 해야 하는데, 저 여자는 팔이나 다리, 심지어는 발바닥(?)을 노리는 게 아닌가? 그 남자도 예상외의 공격에 이상한 눈빛을 보이며 몸을 피했고, 또 바닥을 스치는 투핸드 소드를 피하여 허공에 붕떠 올랐다.

“어어!?”

그리고 스카디는 허공에 뜬 자작을 몸을 순식간에 검의 옆 몸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 쾅! -

절대 불변의 법칙, 허공에 뜬 사람의 몸은 결코 검의 궤도를 피할 수 없다. 막을 순 있지만 저런 가느다란 세검으로 투핸드 스워드를 막는 다는 건 미친 짓이다. 스카디란 여자... 일부러 남자를 상처 입히지 않고 장외 판정을 받아내려고 처음부터 검의 궤도를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돌린 것이었다. 실로 대단하다 말할 수 있겠다.

“스카디 데 사이르 승!”

이렇게 경기는 흘러갔다. 16강에서 만난 상대도 나에게 복부를 얻어맞고 싱겁게 끝나 버렸고, 나는 이번에도 병사들이 대접하는 식수를 벌컥 벌컥 들여 마셨다. 요주의 인물인 여기사단장과 데미안 또한 손쉽게 토너먼드에 진입했다. 앞으로 저 둘을 포함한 세 명만 더 잡으면 된다. 그리고 마침내 8강의 첫 경기가 시작됐다. 

“자자! 다음 8강의 첫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멋진 꼬마들이죠? 데미안 트라이더 대! 랑스 클란츠!”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4&WTV1471013=172478756&WTV1392781=25639548&WTV1357910=273489&WTV1357911=2330794&WTV246810=74&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8. 검술 대회&WTV9172643=“와아아아아아아아아! 데미안 파이팅!”

“무슨 소리! 랑스 화이팅이야!”

“랑스! 랑스! 까악! 뭉개버려!”

“우리 데미안! 그 똥내 나는 놈을 죽여라!”

물론 마지막에 호들갑을 떠는 것은 칼리오페 사제와 악취나는 빈센트 남작이다. 

내 눈앞에 데미안이 서있다. 물론 난 반드시 우승해야만 하지만, 요놈도 이겨야 칼리오페가 빈센트에게 무참히 잡아먹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해답을 얻어야 할 한가지 문제가 더 있다.

“너 어디서 그런 검술을 배웠냐?”  

“......뭘”

참 말이 짧은 녀석이다. 답답한데. 그럼 어디 실력 좀 보자. 짧고 빠른 검격이 오갔다. - 챙! 채채챙! 챙챙! -

역시 비슷해. 잠시 물러난 뒤, 몸을 화살처럼 튕기며 찔러 들어갔다. 검 끝이 정확히 맞닿으며 서로의 몸이 튕겨졌다.

“역시 비슷해.”

“...너...?”

놈도 놀란 모습이었다. 닮았다 정말 닮았다. 나보단 약간 딸리지만 분명 나의 검술과 비슷하다. 전통적인 해적들의 검술과 유사하단 소리다. 녀석의 발검 동작을 봤을 때 설마 했다. 혹시 이놈의 천재라서 언뜻 스쳐본 해적의 발검을 흉내 내 자기 것으로 만든 게 아닐까하는 기괴한 망상도 해보았지만 역시 직접 부딪혀보니 모든 면에서 해적들의 검동작이 베어 나왔다.

“누구에게 배웠냐? 그 검술.”

데미안은 눈을 크게 뜨고 사색이 되어버렸다. 상당히 긴장한 모습이었다. 물론 내 목소리는 그에게만 들리게 낮게 낮추어 말했기 때문에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군중들로선 웅성웅성 거릴 뿐이다. 놈이 긴장한 이유... 어쩌면 알 것 같다.

OPG를 낀 왼손으로 검을 바꿔 쥐었다. 실수한 듯 가슴을 내밀었다. 빠르게 찔러오는 검을 내려치며 데미안의 옆을 스쳤다. 놈의 귓가를 향해 짧게 스치며 입을 열었다.

“너 해적이냐?”

까아아아아앙!

순간적인 탄력을 이용한 뒤 돌아치기. 눈에 선히 보인다. 좋은 자세다. 이제 이어지는 연결동작은 아래를 노린 후, 반대쪽으로 끊어치기, 에이 느리다 느려. 나는 네가 돌 방향에 이미 와 있다고. 이제 어쩔꺼야?

“흠이라면 연계 동작이 좀 느린데? 누가 가르쳐줬냐.”

데미안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이를 드러냈다. 역시 해적이다. 저토록 몸에 베인 동작은 해적처럼 태어날 때부터 검을 쥐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아직도 으르렁거린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데? 역시 보통 놈은 아니겠어. 바다를 다뤘던 눈빛이야.

“뭐하냐 데미안! 촌놈을 어서 죽여!”

“오호호호호, 우리 랑스가 한수 위인 것 같은데요. 빙신트 남작?”

“뭐!? 빙신? 지금 뭐라 그랬소!”

“어머? 빙신이라니요? 왜 갑자기 욕을 하세요? 호호호호호”

칼리오페와 빈센트 남작의 대화가 경기장을 크게 울려 퍼진다. 존경받아 마땅할 사제의 비아냥거림. 그리고 그것을 귀담아 듣는 병사들과 관중들도 와하하! 하면서 웃어댔고, 빈센트 남작은 그야말로 뻘겋게 잘 익은 과일처럼 돼 버렸다. 그들을 바라보고 다시 데미안을 보았다.

문득 에이미가 말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들은 오디세우스에서 도망친 주민들을 받아줬다고, 빈센트는 그것을 빌미삼아 자꾸 수도원에 찾아와 칼리오페를 괴롭힌다고. 놈은 상대의 약점을 잡는데 능숙하다. 설마 데미안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데미안. 저 돼지한테 약점을 잡힌 거냐?”

“.......”

놈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역시 그렇군. 

“이봐 뭘 멍청히 서있어? 어서 덤벼봐!”

다시 오른손으로 검을 바꿔 쥐었다. 데미안이 검을 뻗었고, 나는 그것을 가로 막았다. 이어 당연히 이뤄지는 힘겨루기. 내 해적 문신이 새겨진 손목을 빠르게 걷어 올린 후 다시 뒤 덮었다. 오직 놈만 볼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매우 빠른 동작으로 한 것이라 가까이 있는 데미안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데미안의 눈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난 카린소 섬의 해적왕이다. 데미안. 나와 같이 가자.”

까아앙!

거리가 멀어졌다. 데미안의 눈동자가 놀라움에 떨렸다. 그가 다시 부딪혀 왔다. 역시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려고 가까이 붙으려는 의도였으니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정말... 정말 해적이야?” 

“피식, 나도 발검술을 보여줄까?”

“아... 아니... 그럼 어떻게 여기 있는 건데! 너희 해적단은 훅스턴을 쫓는다고 들었는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넌 어쩌다가 여기 왔냐?”

“난 서쪽 미망 해적단 장로의 아들이었어.”

“설마...”

“그래, 너희 훅스턴이란 자가 침략해서 모두 죽었지. 나는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고.”

데미안이 불쾌한 눈짓으로 빈센트 남작을 가르켰다. 귀여운 눈동자다. 그런데 놈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놈은... 양성애자야.”

“컥...”   

“내가 해적이란 걸 약점 삼아서... 매일...”

“그만 말해도 돼.” 

빌어먹을 저 빈센트 남작... 죽여 버리고 말겠다.

“데미안, 같이 떠나자. 이 시합에서 물러나줘.”

“우승할 자신 있어?”

“당연하지. 내가 봐준 거 모르냐?”

“...역시 그랬군. 그럼 뒷일을 부탁할게.”

“떠나기 전에 남작을 죽여 버리겠어.”

“아니, 어차피 내가 죽일 테니 넌 안 건들어도 돼.”

놈은 그러고서 뒤로 물러났다. 역시 연극을 하기 위한 자세를 갖췄다. 발검술이다.

나 또한 같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뽑는 동시에 놈의 옆구릴 살짝 스쳤다. 피식... 찰과상 정도겠지.

“랑스 클란츠 승!”

“와와와와와와!”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고 역시 칼리오페의 요사스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얏호! 랑스 파이팅! 정말 우승하겠다! 호호호호 어쩌죠 빙신트 남작? 아고 아까워라. 내가 황홀하게 해주려 그랬는데! 호호호호”

“으으으... 멍청한 데미안!”

피식... 멍청한 데미안이라? 넌 이제 그 멍청한 데미안에게 뒤진 셈이야.

시합장을 걸어내려 오자 역시 어느 병사가 다가와 수고했다며 물을 한잔 건넸다. 벌컥 마신 뒤 약간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화장실로 이동했다. 페르시아스가 답답했는지 요동을 쳤기 때문이다.

‘에휴,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몸도 거칠게 움직이고... 히잉...“

“미안 미안, 대신 오늘밤엔 저번에 했던 그거 해줄게!”

‘뭐요?’

“교미! 하하하하!”

‘시, 싫어...’

이제 페르시아스는 에이미가 만들어준 단아한 옷을 입고 있었다. 벗고 있을 때도 좋았지만 감추어진 아름다움 또한 대단히 매혹적이다.

“랑스?”

“어랏... 칼리오페! 여기는 남자 화장실...!”

“어머 귀여워라! 이게 너랑 에이미가 말하던 요정이었구나?”

‘아, 안녕하세요.’

페르시아스는 생긋 웃으며 칼리오페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칼리오페는 한동안 경직되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데다 말까지 하는 요정이 자신의 어깨위에 있으니 그럴만하지.

그나저나 아까부터 에이미가 보이지 않는데.

“칼리오페? 에이미는요?”

“마을로 돌아갔어.”

“네? 왜요?”

“후훗... 곧 알게 돼. 물론 네가 우승을 못한다면 모를 테지만... 이 요정 이름이 뭐야?”

“페르시아스요.”

“호호. 이름도 어쩜 그리 예쁘니?”

‘헤에에에’

에이미가 마을로 돌아갔다고? 무슨 일을 꾸미는지 나로선 궁금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랑스야. 너 꼭 우승해야 돼. 나 너한테 몽땅 걸었거든. 호호.”

“으이구... 사제라면서 도박까지 하셨어요?”

“뭐 어때? 여자랑 돈은 많아야 좋은 거잖니? 호호호.” 

“그래요. 실망시켜 드릴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오늘이 지나면 떠나겠구나?”

“예? 예... 그러겠지요.”

진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그래서 제안했다.

“함께 가실래요?”

“엑... 사제직은 어쩌고?”

“뭐 어때요? 사제 같지도 않은데.” 

“...미안해.”

“그래요...”

시합 종소리가 울렸다. 준결승이구나. 아쉬운 마음은 다음 상대에게나 풀어야겠다.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4&WTV1471013=174812850&WTV1392781=25640043&WTV1357910=273489&WTV1357911=2330838&WTV246810=75&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8. 검술 대회&WTV9172643=“랑스 클란츠 승!”

“와아아아아아!”

“꺄악! 랑스 대단해! 벌써 결승이야!”

“크크크... 빌어먹을 놈... 다음 번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크큭...”

뭐야. 저 빙신트 남작 놈은 아직도 안 죽었나? 내가 죽을 거라니, 행여나 내가 지더라도 숭고한 기사단장님은 남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는 여인이 아니다. 아무튼 준결승이라지만 역시 별것 없었다. 상대는 얼굴이 새까맣고 깡마른 인간이었는데 특이한 것이라고는 요상한 원거리 무기와 종이처럼 흩날리는 칼날을 사용하는 것이다. 놈에게 물어보니 원거리 무기는 차크람이라 하였다. 근데 고것이 기묘한 게 분명 피했는데 불구하고 다시 되돌아와서 내 어깨를 스치고 간 것이라 처음엔 여간 당황할  밖에 없었다. 종이처럼 흩날리는 여러 개의 칼날은 우르민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말 한번 움직일 때마다 칼날이 파도처럼 흩날려서 궤도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성을 가다듬었다. 부메랑처럼 귀찮은 차크람은 실프를 조용히 불러 궤도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맞선 상대가 말도 안 되는 이변이냐며 눈이 휘둥그레 떴지만 어쩔 것인가. 결국 차크람은 경기장 밖으로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다음은 우르민을 박살내버렸는데 역시 가냘픈 칼날들이 춤을 추는 것이라 OPG를 낀 괴력으로 놈의 칼날을 한번 후려쳤더니 춤추던 칼날들은 모조리 후두둑 끊어지고 말았고, 자신의 무기가 모두 사라지자 놈은 곧바로 항복해 버렸다.

“와아아아아아! 대단하다 저 꼬마!”

“꺄악! 우리 딸 소개시켜줄까?”

내 인기가 경기를 거듭할수록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딸을 소개시켜주겠다는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하하하... 큭...? 헉!?”

멋지게 손을 흔들며 시합장을 내려와 대기소로 향하는 순간 엄청난 현기증이 일어나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코에서 무언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으잉? 뭐야... 코피?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무리랄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왜 코피가 난단 말인가? 페르시아스와 나눈 격렬한 정사 때문에? 말도 안 돼...

황급히 칼리오페와 병사들이 몇 명 달려왔다.

“랑스! 괜찮니?”

“아... 왜 이러지.”

“잠깐만.”

칼리오페는 눈을 감고 내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손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오자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 도차 고개를 숙이며 숙연한 태도를 갖췄다. 그들이 웅성거렸다.

“와아... 신성마법이다.”

“역시 칼리오페 사제님이셔...”

잠시 눈을 감고 기이한 힘을 부렸던 칼리오페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코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랑스! 너 독약 먹었니?”

“쿨럭, 쿨럭, 네에?”

“틀림없어! 독약이야. 이미 심각하게 중독됐잖아!”

멀리서 날 바라보며 씨익 웃는 빈센트 남작의 얼굴. 설마...

“쿨럭! 칼리오페, 빈센트 남작 놈 이번 경기에 돈 걸었죠?”

“응? 그걸 왜 물어!”

“말 해봐요. 그놈 누구한테 얼마나 걸었어요?”

“당연히 사이르 단장에게 모조리 걸었지. 삼천 골드쯤 걸었을 걸? 분명히 그녀가 이길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던데 설마……!?”

젠장, 역시 이상하다 했다. 놈이 결승전에서 내가 죽을 거라더니... 역시 병사를 시켜 독을 탔구나!

“쿨럭... 아까부터... 그러니까 매번 경기가 끝날 때 마다 쿨럭, 병사가 한명 찾아와서 저에게 물은 건넸어요. 역시... 그때 의심을... 쿨럭!”

“랑스!”

“아...! 제 가방에 힐링 포션...!”

“안 돼!”

“왜요? 쿨럭... 쿨럭...”

“힐링 포션을 몸의 신진대사를 말도 안 되게 촉진시켜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약이야. 그런데 독에 중독된 사람이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될까? 즉사야!”

그렇구나. 독은 자연치유가 안되며 퍼져야 효력을 발생하는데 그러한 상황에 포션을 먹고 신진대사를 빨리 촉진시킨다면 그래, 그거야 말로 바로 사망이지.

“울컥!”

“랑스!”

이젠 입에서 피비린내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울컥하고 피를 토해냈다.

“랑스 똑바로 누워봐!”

“쿨럭... 쿨럭!”

칼리오페가 눈을 감고 시르케처럼 무언가 빠르게 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르케의 주문보다 조금 엄숙한 느낌이 든다. 이어 그녀의 양손에 반짝이는 빛 무리가 맺혀가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보는 관중들은 신성한 무언가라도 보는 듯 고개를 조아렸고, 또 어떤 이는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칼리오페가 내 가슴에 손을 뻗자 두 손에 맺혔던 빛무리가 내 몸으로 흡수되는 듯싶더니 점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이제 좀 괜찮니 랑스?”

칼리오페는 매우 힘이든 것처럼 땀을 닦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터져 나오는 기침과 흐르던 코피는 멈추고 몸이 말짱해진 기분이 든다.

“하아... 랑스, 아직 다 낳진 않았어. 그러니까 다음 시합 땐 너무 무리하지 마. 일단 이정도가 지금은 한계야... 더 무리하면 나까지 쓰러질 테니까... 다 끝나면 치료해 줄게. 알았지?”

몸을 일으켜 보았다. 약간 어질어질 했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 없었다. 그러자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신의 기적을 본 것 마냥 호들갑을 떨었다. 사람들은 기적과 이적에 너무도 약하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운 신성사제 칼리오페. 이래서 칼리오페가 성안에서도 그토록 영향력이 있었구나. 푸훗... 만약 이 소란스런 군중들이 페르시아스나 시르케의 마법을 본다면 그야말로 신의 강림이겠군.

“고마워요 칼리오페.”

“푸훗. 꼭 이겨?”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날 지켜보는 빈센트 남작을 쏘아보았다. 그 옆엔 데미안이 있었다. 데미안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시합장을 향해 걸었다. 저 백발의 기사단장은 어느새 상대를 제압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자자!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백합기사단 단장이신 스카디 데 사이르공!”

“와와와와와와! 스카디씨! 꼭 이겨요! 돈 많이 걸었어요!”

“아름다운 그녀와 상대하는 멋진 열여섯 소년 랑스 클란츠입니다!”

“와와와와와와! 파이팅! 꼬마 잘해라!”

“그럼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상패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승할 경우엔 기사 작위로 임명받을 수 있는 상패, 그리고 일천 골드입니다! 준우승일 경우에는 금화 오백골드가 되겠습니다!”

시합장의 옆쪽으론 어느새 높은 트로피와 돈이 가득 든 주머니가 노여 져 있었다. 돈이다. 돈이 이렇게 귀한줄 몰랐는데... 그나저나 저 심판자식 뇌물을 얻어먹었나보다.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며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내가 독이 퍼지길 기다리는 것이겠지. 내 시선을 살핀 스카디는 고맙게도 검을 먼저 뽑으며 경기를 재촉했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아직 독이 깨끗이 해도 안됐는지 비릿한 단내가 남아있다. 그래도 힘내자. 이곳에서 치룰 마지막 싸움이니까! 

“이봐 심판 뭐해? 어서 시작해!”

“어어? 알겠습니다.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 속에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나로선 지체할 틈이 없었으니까. 그녀로선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을 테니까. 채재재쟁!

두 손으로 움켜쥔 스카디의 투핸드소드가 나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검신이 매우 길었기 때문에 내가 팔을 뻗는다 해도 그녀에게 닿질 않는다. 그녀의 검격을 위로 올려쳐내며 한 바퀴 빙글 돌고, 그녀의 옆구리를 노렸다. 

츠캉!

“막았다!”

빠르고 깊게 스치고 갔는데 그녀는 그걸 막았고, 노출된 등 뒤를 노렸다. 평소 같으면 쉽게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일순간 가슴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주춤해 버렸다. 어쩔 수 없지.

‘노움!’

빠각 - 스카디가 밟고 있던 지면의 한부분이 미세하게 솟아오르며 그녀의 몸이 흐트러졌다. 기회다! 왼손으로 검을 바꿔들었다. 장외로 만들기 위해 검의 옆면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 까아아아앙! -

“그, 그걸 막았어?”

물론 스카디는 OPG의 힘에 의하여 주루룩 옆으로 넘어졌지만 그대로 몸을 던져 도약하여 찔러 들어왔다. 이게 기사들의 싸움 방식인가!? 레이하이딘 만큼이나 저돌적이다! - 까까강! 까강! 까까아아앙! -

생각보다 쉽지 않다! - 까아아아앙!

한차례 크게 부딪혀 반동을 이용해 거리를 두었다. 허리를 굽히고 자세를 낮게 잡으며 검의 손잡이를 꼭 쥐었다.

“오오오...”

관중들이 숨을 죽였다.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어 내 허리를 바라보았다. 칼리오페가 사준 두 개의 검. 허리에 검이 보인다.

스카디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양손으로 손잡이를 굳게 움켜쥐고 칼날이 비스듬히 앞으로 뻗은 정자세. 저 검의 정자세 한 가지만 봐도 그녀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과연 존경할 만하다.

“정체가 뭐죠? 정말 대단한 실력인데요?”

“...그냥 평범한 소년인데요?”

“믿어지지 않아요. 힘도 엄청나고 검의 자세나...... 상처도 입은 것 같은데 그런 몸으로 이렇게 까지 절 몰아세우다니... 저희 기사단에 들어오지 않으실래요? 제 기사 단장 직을 당신에게 물려줄 수도 있으니까요.”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5&WTV1471013=177165576&WTV1392781=25643222&WTV1357910=273489&WTV1357911=2331126&WTV246810=76&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8. 검술 대회&WTV9172643=정중히 고개를 저었다. 허나, 정말 존경받아 마땅한 여자다. 자신의 부와 지위를 집어 던질 정도로 강자에 대한 존중? 예의가 대단하다. 이런 게 바로 기사라는 것인가... 순백의 아름다운 머릿결과 복장. 어느 귀족과 다르게 깨끗하게 다가온다.

조용히 발을 내 밀었다. 이제 내 몸도 슬슬 한계가 다가온다. 

“그럼 갑니다. 훌륭한 기사단장님.”

“하아.. 네. 어쩔 수 없네요.”

긴장감이 흘렀다. 중독된 이런 몸으로 과연 통할까? 

검에서 주저함이란 패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빠르게 발검하였다. 이번엔 막히면 진다!

- 채애애애앵! -

  

결국 막혔다! 하지만 이 순간 훅스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고맙다 훅스턴!

“꺄아!”

“이... 이겼다!”

스카디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장외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시합장 밖으로 떨어진 스카디를 한참 확인한 후에야 심판이 내 손을 들어주었다.

“랑스 클란츠! 우승!!”

“와아아아아아아! 이겼다!”

“아이고 내 돈! 다 잃었네!”

“와하하하하하하! 난 대박 났다! 와하하하하하!”

시합장 밖으로 보기 좋게 떨어진 스카디의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그녀의 손은 잡고 높이 들어 올려 주었다. 그녀와 마주보며 숭고한 기사에 대한 존경심을 품으며 고개 숙여 절했다. 너무 순식간에 이겨버린 상황. 그녀도 나도 약간은 어리둥절하다. 아까의 상황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다시 독 기운이 퍼지는지 머리가 아찔아찔 한 상황이었다. 물론 왼손의 힘이 내가 압도적으로 강한 상황이다. 왼손으로 그녀의 진을 빼버린 후 천천히 승부를 낸다면 그야말로 손쉬운 경기였지만, 독에 중독한 몸으로 그렇게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이 경기에 이기려면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빠르게 승부를 보는 게 현명하리라. 

혼신의 힘을 다해 발검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기 좋게 내 검을 막았다. 이후 이루어진 내 동작은 나도 모르게 몽롱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애초에 칼리오페가 사준 검은 2개. 오른손으로 발검한 내 검을 스카디가 막아내자 나는 손에 쥔 검을 놓쳤다. 빠른 찰라 OPG를 낀 왼손으로 남아있는 한 개의 검을 뽑아들었다. 검의 옆면으로 그녀의 복부를 강하게 때렸다.

 내가 OPG를 낀 왼손으로 발검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익숙한 오른손이 빠르기 때문이다. 발검이란 속도를 중시하기 때문에 OPG를 착용한 느려터진 왼손의 힘은 필요 이상으로 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오른손에만 의지했는데 문득 훅스턴의 옆구리에 상처 낼 때의 상황이 떠오른 것이다. 그 당시 집어던진 로리안의 레이피어는 훅스턴이 간단히 막아냈었지만, 두 번째 이어진 부러진 칼날을 막지 못하여 옆구리를 참혹하게 당했다. 그렇다면 떠올린 것이다. 

한 차례 막는 공격에 곧 바로 이어지는 두 번의 연계 발검술.  

“축하해 랑스!”

나는 독에 중독 되서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어느새 칼리오페가 상패와 상금을 받아왔다. 약간 비틀거리며 칼리오페의 어깨에 기대었고, 칼리오페가 관중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자 관중들은 어린 소년 검객과 신성한 사제의 오붓한 정을 환호하며 정겹게 소리 질렀다.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떠나가지 않고 이를 갈아대는 빈센트 남작,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죽이기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기회가 필요한 것이다.

“랑스 가슴을 내밀어봐 일단 중독된 것부터 치료하자.”

“피곤해 보이는 데 괜찮겠어요? 조금 더 버틸 수 있겠는데...”

“피식, 괜찮아요. 피곤해 보여도 죽진 않을 테니 걱정 마.”

아까처럼 길바닥에 주저앉진 않았다. 대기석의 의자를 찾아 앉았고, 칼리오페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어루만졌다. 군중들이 다시 소란스럽다. 반은 내 이름을 크게 소리치며 딸을 소개시켜주겠다느니 사인을 해달라느니 난리가 아니다. 물론 칼리오페님에게 기도를 부탁한다며 소리치는 놈들도 있었다. 나의 독을 몰아내고 있는 칼리오페... 그래도 사제였구나. 아니, 그녀의 외모를 천천히 둘러보다 보면 거의 여신 수준이다. 한때는 카시아가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예니나 서리하를 보았을 땐 또 그녀들의 매력에 빠져들었었지만, 이젠 내 눈앞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여신이 가장 아름답게 보였다.

아무튼 우릴 향해 소란 떠는 군중들을 막고 있는 것은 성의 경비대들이다. 빌어먹을 남작 녀석, 경비 놈을 시켜 내게 독을 먹이... 아니 가만? 경비라고!?

“조심. 칼리오페!”

“꺄아!”

“큭...!”

이런! 조금 더 경계했어야 했다. 몰려드는 군중들을 막던 병사들, 그들 중 한명이 내게 독을 탔던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왜 안했을까! 다행히 우릴 향해 날아온 두 개의 단검은 내가 맨손으로 쳐냈다. 한 개는 손목을 살짝 스치며 빗나갔지만 독이 거의다 중화되었고, 또 힐링 포션까지 있는 나로선 걱정할 상처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저놈! 놈! 역시 해적이다!”

모두가 크게 소리친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놈의 손가락은 옷이 찢어져버린, 또 그 안에 해적 문신이 드러나 버린 나의 손목을 가르켰다.

“빌어먹을!”

“해... 해적이다...”

모두가 경직됐고 빈센트는 그야말로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이를 드러냈다. 놈이 크게 소리쳤다.

“놈을 잡아라! 그 옆에 공모한 칼리오페도 마녀로 체포한다! 뭣하느냐!”

이런 상황에서도 칼리오페의 표정은 더 없이 침착하다. 오히려 우리상황을 지켜보던 군중들의 표정이 시퍼렇게 변할 정도였다. 그럴 만도 하지.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신성한 여신이 마녀로 취급받는 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거겠지. 나야 그렇다치고 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험난한 시험을 주는 빈센트 남작 너는...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빈센트의 살찐 가슴에 피 묻은 검날이 솟아 나왔다. 푸욱...

“컥... 으아악... 데미... 데미안.... 네놈이!”

"죽어라 돼지."

"으... 으아아아... 꾁!"

빈센트 놈의 심장을 통쾌하게 찔러버린 데미안이 소리쳤다.

“뭐해 랑스! 어서 도망가자!”

피식 웃으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독 때문에 아직도 어질어질 하지만 충분히 도망칠 여유는 된다. 칼리오페의 손목을 콱잡고 검을 뽑아들며 달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수가 꽤 많군. 

그때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와아아아아아! 도망가세요!”

“와와! 병사들은 뒈져라!”

"칼리오페님 어서 도망가세요!"

군중들이 병사들의 사지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우리들의 도주로까지 훤히 넓혀주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상황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어...?”

칼리오페가 속삭였다.

“피식... 이럴 줄 알았지. 그동안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했던 보답을 받는 거야. 어서가자.”

그렇구나!

칼리오페와 난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앞엔 데미안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어서 도망가라며 응원하는 군중들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 - - - - 해적 - - - - -

  

“헥... 헥! 에이미는요?”

“걱정 말고 어서 달려!”

해적 두 명과 사제한명이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말을 탈줄 몰랐기 때문에 내 뒤에 타고 있는 중이고, 상금과, 칼리오페가 딴 엄청난 도박금은 데미안이 갖고 있었다. 지금쯤 우리 뒤를 미친 듯 쫓아올 병사들을 떠올리며 말을 박차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도중에 우리를 검문하는 녀석들은 없었다. 수배가 내려지는 전령지보다 우리의 속도가 더 빠른 셈이다.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하아... 하아... 도착했다...”

드디어 신전이 보이는 켄베라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직 이곳도 우리들의 대한 소문은 전혀 모르는지 평화로워 보였다. 이런 안도와 어울리는 짙은 석양이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풋... 이제 이곳의 유일한 악덕 남작이 죽었으니 더욱 평화로워질 거다. 잠시 늦춰진 걸음걸이 속에 페르시아스를 불렀다.

“페르시아스. 실프랑 운디네 좀 불러줘, 나 너무 지쳐서 그러는데 네가 불러줄 수 있지?”

‘에휴... 나도 지친데. 힝... 알겠어요.’

데미안 조차 내 손에 아름답게 서있는 페어리를 보고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촉촉한 이슬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이 와중에도 칼리오페 사제는 예쁜 종족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귓속말로 자신이 딴 돈을 다 줄 테니 파는 건 어떠냐고 장난 식으로 말해서 지친 와중인데도 피식 웃어버렸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신전으로 향하려 했지만 칼리오페는 방향을 다른 쪽으로 유도했다.

“이대로 항구로 가자 랑스.”

“왜요?”

“후후... 가보면 알게 돼.”

항구라... 그렇구나. 일단 배를 사야지. 그리고 곧바로 선원 몇 명을 모집한다. 선원은 배를 운행할 수 있는 최소인원... 대략 우리들 까지 포함해서 열 명이면 충분할까? 그리고... 

칼리오페도 반드시 함께 데려간다.

“랑스, 네 배야. 어때?”

“네에?”

도착하자마자 항구에 있는 가장 큰 선박을 손가락질하며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아, 저걸 사자고요?”

“아니. 이미 네 배야.”

“네에에?”

그러고선 그녀는 크게 소리쳤다.

“에이미! 출항준비 다 됐니?”WTVSUCCESS=TRUE&WTV382229=1267328635&WTV1471013=179540515&WTV1392781=25649492&WTV1357910=273489&WTV1357911=2331695&WTV246810=77&WTV2571219=173&WTV124816=fantasy&WTV987904=1&WTV491322=9. 재회&WTV9172643=높은 장루를 향해하던 것인지 밧줄을 타던 에이미가 크게 소리쳤다.

“앗? 사제님이임! 랑스 우승했어요오오?”

“어서 준비해! 곧바로 출발 안하면 경비대가 몰려올 거야! 그리고 나 이제 사제 아니야 마녀됐어!”

“에에에? 마녀라고요오. 왜요오오오?”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시야가 흐릿하게 보였고 가슴이 울렁였다. 그녀가 앞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에이미가 먼저 마을로 출발했던 이유는 역시... 

“이미 배는 구입해 두었어. 나 이래보여도 꽤 부자거든. 네가 우승을 못해도 꼭 보내주고 싶어서...”

“고마워요.”

어쩌면 약간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는 단 한마디. 하지만 목이 메어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해적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두 명의 여사제에게는 반드시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답을 해드리겠다.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랑스, 선원은? 우리끼리 출항하긴 배가커서 힘들 텐데.”

그때 등 뒤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르르...

“해적 놈들을 잡아라!”

“큭!”

짧은 사이 수배지가 이 도시에 내려졌나보다. 이 마을의 병사들로 짐작되는 약간수의 병력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다. 어림잡아 백여명 정도. 데미안과 난 긴 거리를 이동하였기 때문에 약간 지쳐있는 상태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쓸어버릴 수 있는 수였다. 무엇보다 지금 난 힐링 포션이 두 개씩이나 있으니까.

“데미안, 일단 출항하기 전에 몸 좀 풀자.”

“피식. 알았어.”

그러나 칼리오페가 내 손을 저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

“네?”

그녀는 다시 함선의 장루 쪽을 바라보더니 에이미를 불렀다.

“에이미? 내가 말한 대로 했니?”

“아? 네에에에에. 잠시만요!”

순간 배의 선상으로 하나 둘씩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커틀라스를 빼들고 내 뒤에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들은 피부가 곱상한 편이다. 절대 선원으로 보이진 않는다. 선원이라고 말한다면 굉장히 어쭙잖은 선원으로 밖에 보이질 않잖아?

우릴 쫓아오던 병사들도 갑자기 나타난 커틀라스의 무리들을 본 후 흠칫거리며 우뚝 멈춰서 버렸고, 나와 데미안 또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경계를 풀지 않았다.

“칼리오페? 이들은...?”

“누구긴, 선원들이지. 아니, 이제부턴 해적이구나.”

“이 배의 선원들이요? 직접 고용했다고요?”

“아니, 모두 자원했어. 내가 전에 말했잖아. 네가 오디세우스의 짓밟힐 뻔 했던 로즈마리에서 살려준 사람들, 너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이 우리 마을로 숨어들어왔다고... 넌 모르겠지만 네가 이 마을로 들어섰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널 알아보고 신전을 방문했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널 위해서 해적으로 자원하겠다면서. 네가 선한 일을 베풀었기 때문에 보답 받는 거야.”

눈을 크게 뜨고 한명, 한명 살펴보았다. 정말이다! 이제 보니 몇 명은 거리에서 끌려가던 예니를 구할 때 응원하던 아저씨들이다! 그들이 외쳤다.

“선장님! 우리도 이제부턴 해적입니다! 와하하하!”

“당신들... 가족들은요?”

제법 해적처럼 자세를 고쳐 잡고 대꾸했다.

“와핫핫! 모두 노총각 들이나 가족들이 없는 놈들만 지원했다오. 캬캬캭”

“하하하하. 당신이 언젠간 출항할거라는 걸 알고 우리도 나름대로 항해술을 갈고 닦았지 부려먹기 무리 없을 거요!”

“와하하하! 해적답게 저 놈들 먼저 처리하면 되겠군?”

우릴 잡으러 몰려든 병사들은 멍청하니 서서 덤벼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대로 출항해도 아무런 문제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아직은 성실하고 평범했던 선원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긴 싫었다. 피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씨익 웃으며 소리쳤다.

“모두 선박에 올라탄다! 도망가자!”

“와와와! 출항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와는 정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칼리오페!?”

“랑스. 그동안 즐거웠어.”

“무슨 말이에요!?”

“난 이제 사제직도 박탈당했고... 그래도 주제에 사제였다고 너희들하곤 동행할 마음이 안 생기네... 이제 빈센트 남작도 죽었고, 감옥에나 가서 여생을 편하게 지낼까봐. 에이미를 잘 돌봐줘. 그 애도 나처럼 사제를 해먹기에는 글러먹은 년이니까. 내가 딴 돈도 필요 없으니 전부 다 가져가고. 참고로 말하지만 에이미 고년도 술 잘 마셔...”

장난인줄 알았는데 정말 맞은편에 서있는 병사들의 무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열심히 연습했지만 시합 때는 별로 사용하지 못했던 정령술을 부렸다.

“노움! 잡아!”

콰당! 앞을 멍청하게 걸어가던 칼리오페는 갑자기 튀어나온 흙더미에 보기 좋게 걸려넘어져 버렸다. 

“꺄악! 랑스 뭐해!?”

“시끄러워요!”

내 품에 안겨서 격렬히 반항하는 칼리오페 사제. 젠장! 눈물 나겠군. 완강한 오우거의 힘에 붙잡힌 칼리오페는 결국 배안에 함께 승선했다. 그녀가 한말은 황당하게도 이렇다.

“아... 신성하고 덕망 높은 아름다운 사제가 해적 놈에게 붙잡혀 버렸어... 훌쩍”  

돈, 배, 선원, 칼리오페, 에이미, 데미안까지. 이제 얻을 건 다 얻었다. 

"어서 닥치고 출항!"

- - - - - 해적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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