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3권) (5/6)

퍼스트 바이트 3권

The Very First Time

05.

방문이 닫혔다.

둘만의 공간에 격리되었다. 카밀은 그제야 록시아스의 손목을 놓았다. 제 손가락 모양을 따라 본래 색을 되찾아 가는 손목을 보며, 사과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다른 말이 더 급했다.

“록시.”

록시아스와 마주 선 카밀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폐부에 안개가 꽉 찬 듯했다. 숨을 들이마셨다. 단단한 어깨가 솟았다. 도로 호흡을 내뱉었다. 한숨이 길었다.

가면처럼 만면을 가린 손바닥을 물렀다. 록시아스와 즉시 눈빛이 엉켰다.

“키스해 주세요.”

참을성 없이 뱉은 마지막 부탁이었다.

“피 마시는 거 말고 진짜 키스요.”

부탁하는 카밀도, 부탁받는 록시아스도 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록시아스가 한 발자국을 디뎠다. 카밀이 눈을 깜빡였다. 그사이 찍힌 눈물이 금빛 속눈썹 사이사이에 걸렸다. 록시아스가 카밀의 얼굴을 향해 팔을 올렸다. 카밀이 눈을 재차 감았다가 떴다. 눈 모양을 따라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록시아스의 손바닥은 물길이 난 카밀의 뺨을 덮었다. 손끝에 부닥친 눈물이 부서졌다.

록시아스는 눈을 아예 감은 카밀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키가 훌쩍 큰 카밀에게 닿기 위해 목을 살짝 빼 들어야 했다. 입술이 열렸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꺾은 카밀은 록시아스의 팔뚝을 움켰다. 구겨진 흰 셔츠의 촉감이 바삭거렸다. 혀끝이 삐져나온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뺨에 놓인 록시아스의 손이 턱으로, 목덜미로 떨어진다. 어깨가 붙잡혔다.

맞물린 입 안에서 만난 두 혓바닥이 겹쳐졌다. 카밀은 입술을 조금 오므리며 록시아스의 혀끝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가 놓은 후, 아랫입술을 포개듯이 물었다.

이어 다시금 입술이 열리자 록시아스의 혀가 전보다 깊게 들어와 어금니를 쓸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혀 옆구리를 핥았다. 머지않아 록시아스가 카밀의 혀를 옭아매는 듯이 엉겨 왔다. 카밀의 혀는 그에게서 도망을 치는 것처럼 유유하게 미끄러져 록시아스의 입천장을 눌렀다. 록시아스는 입 안에 간지러운 느낌이 퍼지자 감은 눈을 미세하게 떨었다. 카밀은 눈을 감지 않았다. 자신과 입 맞추는 록시아스를 낱낱이 망막에 새겨 넣고 있었다.

고개 각도를 서로 바꾸던 중이었다. 카밀이 록시아스의 윗입술을 물었다. 이전처럼 살포시 물지 않았다. 송곳니가 노골적으로 입술 살을 갉았다. 금방 핏방울이 맺혔다. 그를 핥은 카밀은 록시아스의 팔뚝에서 손을 떼고 팔을 올렸다. 두 손으로 록시아스의 뺨을 감싸 고정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전혀 부드럽지 않았으므로 불편함을 느낄 만했으나 록시아스는 눈을 감은 채로 눈썹을 살짝 구겼다 펴기를 반복할 뿐 카밀을 꾸중하지 않았다. 내치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카밀이 하는 대로 이끌려 주고 있었다.

전에 없이 고분고분한 그 태도가 카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키스가 이어지며 체온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한데 카밀은 명치 아래로 냉기를 느꼈다. 록시아스의 입 속을 마음껏 헤집고 있는데, 외로웠다.

윗입술에 난 상처가 아물자마자, 입 속을 축축이 핥던 혀를 물린 카밀은 이번에 록시아스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세게. 붉은 살이 찢어져 더 새빨간 핏물을 흘렸다. 카밀은 그를 모조리 빨아 마시며 록시아스의 어깨를 눌렀다. 록시아스에게 제 체중을 실은 채로 발을 앞으로 옮겼다. 록시아스는 뒷걸음질 쳤다.

더는 밀려날 곳이 없었다. 종아리가 침대와 붙은 록시아스는 이윽고 매트리스 위로 주저앉았다. 카밀이 상체를 숙이며 록시아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록시아스의 등이 천천히 뉘어졌다. 키스는 끊이지 않았다.

흑발 위로 팔뚝을 내리고 록시아스의 머리를 감싼 카밀은 상대의 치열을 따라 혀를 옮겼다. 안쪽으로 퍽 깊숙이 자리한 치아부터 송곳니까지.

무릎을 록시아스의 다리 사이로 꽂아 넣었다. 록시아스가 자연스레 두 다리 사이의 간격을 넓혔다. 카밀의 자리가 넉넉해졌다. 록시아스의 송곳니에 갉힌 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밀은 일부러 상처를 냈다. 이어 하게 될 행위에 록시아스가 쉬이 흥분하지 않을까 봐 돌연 걱정된 탓이었다.

입 안에서 퍼진 피 냄새는 금세 록시아스의 비강까지 흘러들어 갔다. 꿀꺽. 록시아스가 목울대를 요란스레 울걱거렸다. 카밀의 허리와 목덜미 위로 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목덜미를 내리누르는 힘에 카밀은 상체를 낮췄다. 제 입에서 꿀이라도 샘솟는 양 자신에게 입 맞추는 록시아스의 가슴팍에 가슴팍이 딱 맞붙었다. 록시아스의 셔츠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이어 손바닥이 지나가자 록시아스의 복부가 경련하는 듯이 들썩거렸다. 차가운 손은 가슴까지 올라갔다.

서늘한 체온이 전해지자 록시아스의 유두가 대번 솟아올랐다. 카밀은 아래처럼 딱딱하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엄지로 눌러 문질렀다.

“…아.”

상처가 거짓말처럼 회복되어 더는 혈액을 내지 않는 혀를 집요하게 빨던 록시아스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홱 꺾었다.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졌다. 타액이 혓바닥 아래로 고이다 못해 입가로 새던 중이었다. 함빡 젖은 혀끝과 혀끝에 맺힌 타액이 가늘게 늘어졌다.

셔츠 아래에서 록시아스의 가슴팍을 희롱하던 손이 불쑥 위로 들어 올려졌다. 투둑. 록시아스의 살갗을 덮은 셔츠 단추가 쉽사리 풀렸다. 투둑, 투두둑. 몇 개는 아예 떨어져 나갔다. 머지않아 더는 잠글 수 없게 된 셔츠 사이로 하얀 상체가 드러났다. 그를 찰나 내려다본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시선을 맞췄고,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는 고개를 숙여 록시아스의 왼쪽 턱 아래에 콧날을 묻었다. 록시아스가 등을 껴안았다.

록시아스가 너그럽게 굴수록 카밀은 조급해졌다. 혼란스러워졌다. 외로워졌다. 마지막이기에 관대하게 굴어 주는 것이라면 절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록시아스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저 머리가 비어 버렸으면 좋겠다. 백치가 되어 감정을 몰랐으면 좋겠다. 흡혈귀는 아픔에 둔감한 존재인데, 어째서 감정에는 속수무책인지 억울했다. 그 본인이 사상 첫 번째 흡혈귀라고 말하는 록시아스에게 물으면 알까? 흡혈귀란 어째서 이 모양인지. 당신은 어째서 그 모양이며, 당신이 만든 자신 또한 어째서 이따위인지.

체중을 실은 무릎으로 록시아스의 허벅다리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록시아스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보지 않았다. 카밀은 계속해서 록시아스의 살갗에 코끝을 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를 돕기라도 하는 양 록시아스가 등에 얹은 손을 뒤통수로 옮겨 눌러 왔다.

“하아….”

록시아스의 입술이 귓가와 무척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호흡의 입자가 어느 정도로 세밀한지 눈으로 보이는 듯 생생했다. 카밀은 허벅지 안쪽을 쓸던 무릎을 조금 더 위로 옮겼다. 딱딱한 것이 닿았다. 록시아스의 성기가 제 무릎 뼈만큼이나 단단하게 발기한 것이다. 무릎을 움직이며 그곳을 문질렀다. 귓가에 스미는 호흡이 조금 더 짙어졌다.

오늘. 이 밤. 몇 시간이고. 어떤 짓을 하든 록시아스는 용서해 줄 것이다.

카밀은 직감했다.

자신을 서글프게 하는 관용이었고 기껍지 않은 기회였다. 하나 허투루 흘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실지 마지막이라면 마음껏 받아먹을 것이다. 영영 배가 부르도록…. 록시아스도 그러한 생각으로 자비를 베풀고 있을 테다. 잔인한 록시아스. 그를 너무 사랑해서 카밀은 또 그가 가리킨 가시밭길로 걷고 있었다. 사방에 난 샛길은 모조리 무시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하의 앞섶을 풀어 헤쳤다. 그러고 나서 줄곧 부드러운 살갗을 누르고 있었던 콧대를 물렀다. 눈을 떴다. 시야가 즉시 상대의 얼굴로 가득 메워졌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었다. 시야는 완전히 맑고 또렷했다. 그런데 록시아스의 이목구비가 잔뜩 풀어진 탓인지 그가 흐리게만 보였다.

자신과 록시아스의 사이에 짙은 안개가 드리운 듯했다. 이대로 록시아스가 사라질 것 같았다. 록시아스와 멀어질 것 같았다. 록시아스를 만질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록시아스가 증기 혹은 액체처럼 붙잡을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됐다.

***

“왜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요? 록시. 왜요? 마지막이라서요?”

나체가 된 록시아스는 자신의 허리를 뻐근할 만큼 강하게 부여잡은 카밀을 지그시 응시했다. 카밀은 질문을 던져 놓고 답을 듣지 않길 원하는 양 입을 맞춰 왔다. 앞서와 같이 깊은 키스는 아니었다. 표면만 스치듯 맞닿은 입술은 촉, 소리를 내며 금세 멀어졌다.

“내가 불쌍해서요? 록시는 죽을 건데, 내가 록시를 사랑하니까요?”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어떠한 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카밀이 또다시 입술을 내렸다. 카밀과 입술을 맞출 때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꼭 사냥감처럼. 위험을 감지하면 눈을 감는 사냥감처럼.

카밀이 불쌍해서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느냐고? 아니, 어쩌면 카밀이 두렵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신의 행동이 무엇에서 말미암았는지 깨우치지 못했으니 카밀에게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안 물을게요.”

멍청한 심경을 간파라도 당했나 보다. 카밀이 질문을 거두고 나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진한 키스가 다시 시작될 때까지.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록시아스는 절대 눈을 뜨지 않았다. 카밀의 혀 짓과 그의 향기, 손길에 정신을 빼앗기면서도 속내 한구석에서는 먼지 같은 걱정거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카밀이 울고 있지는 않을까?

록시아스는 카밀의 몸짓을 피부로 읽었다. 그가 반대 방향으로 턱을 기울였다. 자신은 그 반대로 고개를 꺾었다. 카밀이 혀끝을 감았다. 그에게 덩굴처럼 엉겼다.

카밀의 입 안은 자신으로 꽉 들어찼다. 한데 카밀의 음성이 귓전을 맴돌았다.

‘난… 록시를 사랑하고 넌 그렇지 않잖아. 성공하기 쉽겠지. 망설이지 않을 테니까.’

자신은 아직도 자신 있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을 카밀은 쉬이 말했다. ‘사랑’ 탓에 자신을 쉬이 죽일 수 없으리라, 망설일 것이라고 인정했다. 완벽히 해낼 수 있다며 의기양양해도 휴고에게 역할을 빼앗길 판이었으나 카밀은 솔직하게 시인했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카밀은….

타인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기적인 외톨이로 살아왔다. 하지만 록시아스는 지금, 카밀의 심정을 헤아리려 가슴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머리로는 카밀의 마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가슴을 움직여야만 했다.

관자놀이를 울리는 카밀의 목소리가 흐려지자 이번에는 휴고의 음성이 스쳤다.

‘줄곧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까?’

카밀의 질문에는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수 없었는데, 휴고의 질문에 대답하기란 손가락을 구부리기보다 쉬웠다.

폐광. 감히 다른 피를 마신 카밀과 그곳을 벗어나 집으로 가던 중 조우한 휴고. 그의 등장은 놀랍지 않았으며 반갑지도 않았다.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잊었다는 것은 그에게 흥미가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척하는 휴고의 가식과 그보다 더 어둑한 모서리에서 꾸물거리는 분노를 읽었다. 기억에서 지워질 정도로 관심 가지지 않았던 휴고, 수백 년 만에 만났으나 그의 속내를 간파하기란 흡혈처럼 당연하며 손쉬웠다. 노력조차 필요 없는 일이었다. 휴고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다. 카밀만 제외하고.

왜, 왜, 왜… 카밀의 마음을 짚어 내기란 이토록 어려울까. 카밀이 가슴팍을 갈라 그 속을 훤히 보여 주는데도 어렵다. 카밀의 진심을 전해 받고 있으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다. 왜, 왜… 카밀만.

또, 키스가 멎었다.

카밀이 울고 있지는 않을까?

“하… 록시.”

라고 걱정한 찰나, 록시아스는 갑작스레 몸이 들렸다.

카밀의 눈물을 직면하기 두려워 내리감고 있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자신이 누워 있던 자리에는 이제 카밀이 있었고, 자신은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카밀은 울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이었다.

“록시가 해 줘요.”

록시아스가 겪어 본 적 없는 슬픔에 담긴 카밀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매몰찬 체했다.

“내가 부탁 안 해도, 내가 먼저 안 해도 록시가 먼저 해 줘요.”

카밀은 제 복근 위에 주저앉은 록시아스의 허벅지 바깥을 움켰다.

“마지막이니까….”

“뭘, 먼저 해 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간 손이 록시아스의 허리를 붙잡아 위로 당긴다. 그에 록시아스는 저절로 무릎을 약간 세웠다. 하체가 카밀의 복근과 떨어졌다.

록시아스의 두 손목을 둘러 잡은 카밀이 말했다.

“키스랑.”

카밀이 록시아스의 왼손을 놓았다.

“다른 거 전부요.”

나머지 오른손도 놓았다.

“한 번만 먼저 사랑해 주세요… 내가 부탁 안 해도, 먼저 안 해도….”

***

“아, 읏.”

“…….”

유려한 선으로 그려진 턱께가 세로로 파였다. 카밀은 숨 막히는 광경에 넋을 잃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구멍이 훤히 보이도록 엎드린 록시아스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록시아스는 열심히 구멍을 지분거렸다. 아니, 더듬거린다는 말이 더 알맞았다. 차마 스스로 구멍 안을 애무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된 탓인지 손가락은 그 주변만 어설프게 배회했다.

이미 화끈거리도록 만져진 양 달아오른 분홍빛 구멍에서 눈을 떼지 않는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목청을 가다듬은 후, 읊조렸다.

“…넓혀요. 그렇게만 하면 내가 들어갈 때 아프잖아요.”

뒤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매트리스에 옆얼굴을 처박은 록시아스가 숨을 들이쉬더니 중얼거렸다.

“시키지 마… 알아.”

단 한 번 겪은 일이었으나 록시아스의 육체는 강렬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 구멍을 보듬은 후 일어날 행위를 고대하는 듯이 바짝 일어선 성기에서 선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두 끝에 맺힌 액체는 이윽고 뚝뚝 흐를 만큼 양이 많아져 시트에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하….”

한숨인지 신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진작 카밀에게 전부를 노출해 본 바 있으나 수치심은 당연히 찾아왔다. 타인의 이목을 고려하지 않는 록시아스라도 지금에서는 뻔뻔하기 힘들었다. 카밀의 시선을 의식하니 엉덩이가 자꾸만 내려갔다. 숨고 싶은 심정이 몸짓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카밀은 정말이지 록시아스가 먼저 엎드려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알아서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암울한 마음에 조각난 기쁨이 뿌려졌다. 엉망진창이었다. 카밀은 혹여 록시아스가 더 민망함을 느낄까 봐, 거듭 올라오는 한숨을 삼켰다.

록시아스는 여전히 구멍 주변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짓은 나아질 기미도 없이 숫제 어설프기만 했다. 이만하면 됐다. 자신 탓에 록시아스가 힘겨운 일을 억지로 하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그를 말릴 셈으로 입을 열었다.

“록시, 내가.”

“넣을 거야….”

한데 록시아스가 말을 잘랐다. 동시에 엉덩이 한쪽을 쥐어 바깥으로 밀더니, 중지를 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읏.”

스스로 하니 손가락 하나라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이전에 카밀이 자신을 어떻게 만졌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하나 떠오를 리 만무했다. 제정신이 아닌 채 받은 손길을 무슨 수로…. 되짚을 수 있는 기억은 카밀의 온도와 표정, 살갗의 촉감뿐이었다.

“록시가… 할 거예요?”

“응, 내가 해. 넌… 아, 보고만 있어.”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하지 않아도 사랑해 달라고 했다.

서툴다는 이유로 카밀의 마지막 간청을 헛것으로 만들기는 싫었다. 록시아스는 있는 줄도 몰랐던 일말의 양심을 발견했다. 카밀에게 더는 상처 주지 말아야 했다. 카밀의 눈물이 무서웠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머지않았다.

카밀이 하라는 대로 하는 중인데도 그를 갈기갈기 찢은 양 가슴이 저릿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후회였다. 덧없는 감정이라 생각하면서도 후회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기대려 하지 않고 스스로 본능을 찾으려 기를 썼다.

구멍이 손가락을 거부하는 양 잔뜩 오므라진 채로 벌름거렸다. 록시아스는 손목을 돌려 내벽을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어느 한 곳, 카밀이 만지자 이맛전으로 불꽃이 튀던 부분이 있었다. 그곳을 찾으려 끙끙거리며 시도했다. 고개를 더욱 숙이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

그냥, 카밀이 강제로 손목을 물리고 자신에게 넣어 주었으면 좋겠다.

앞섶이 묵직했다. 뒤로는 감흥이 없으니 앞이라도 만지고 싶었다. 한데 엎드린 자세로는 아무리 자신이라도 한쪽 팔을 쓰는 것이 최선이었다. 인간의 모양을 띤 육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애초 흡혈하는 괴물이라면 모양마저 괴물과 같든지…. 그런 모양새라면 카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것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하….”

“힘들어요?”

힘들다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마음껏 고개를 내저을 수도 없었다. 록시아스는 시트를 부여잡으며 그저 달뜬 숨만 내보냈다. 등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카밀이 움직인다. 자신에게로 올까.

나에게로 와서 나를 마음대로…. 상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록시아스는 허리를 튕겼다. 카밀이 닿아 왔기 때문이다.

“으읏…!”

“록시….”

어깨를 넘어와 귓바퀴를 두드리는 음성은 젖어 있었다.

카밀은 힘껏 발기해 복근까지 치솟은 제 성기를 둘러 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록시아스의 골반을 쥐었다.

“아프게 안 해요, 아직 안 넣을 거예요.”

…아니. 제발 넣어.

록시아스는 아랫입술을 더욱 강하게 물었다. 엉덩이 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손등이 살갗에 문질러졌다. 뜨겁고 단단했다. 보지 않아도 대번 알아차렸다. 카밀의 성기였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등과 손목에 굵직한 기둥을 붙이고 비볐다. 새어 나오는 선액이 록시아스의 살갗을 적셨다. 록시아스는 멈칫거리면서도 성실히 구멍을 쑤셨다. 카밀은 구멍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 놓인 손가락을 보았다. 고상한 손가락은 길쭉했으나 ‘그곳’에 닿기란 역부족일 테다. 자신의 손가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록시아스의 것보다 한 마디는 더 기다란…. 지금 록시아스는 자신이 필요했다.

구멍에 꽂힌 록시아스의 손을 당장 치우고 빈 공간에 자신을 욱여넣고 싶은 충동을 짓이겼다. 카밀은 억눌린 음성으로 물었다.

“록시, 엉덩이 더 들어 줄 수 있어요?”

내내 매트리스에 얼굴을 붙이고 돌아보지 않던 록시아스가 그제야 느릿하게 고개를 꺾으며 시선을 주었다. 그의 새빨간 눈이 불타고 있었다.

마른침을 넘긴 카밀은 조곤조곤한 투로 명령했다.

“힘들어도 엉덩이 더 들어요.”

돕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치면 록시아스의 자존심이 상할 터였다. 카밀은 록시아스를 배려하기 위해 명령했고, 그렇다고 건방져 보여도 안 되니 얌전한 말투를 썼다.

“어….”

록시아스가 무너지던 무릎을 세우고는 엉덩이를 높이 치켰다.

“잘했어요, 고마워요.”

카밀은 실지 칭찬하는 것처럼 록시아스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쥔 성기를 록시아스의 허벅지 사이로 밀었다.

“무릎, 더 모아요.”

“…….”

록시아스가 무릎을 모았다. 틈이 좁아진 허벅지가 성기를 압박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한쪽 골반을 붙들어 고정하고는 허리를 천천히 뒤로 물렸다. 이어 성기가 허벅지 틈새를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 도로 밀어붙였다. 찰싹. 살살 움직인다고 했는데 살갗이 부닥치는 소리가 컸다. 록시아스가 어깨를 떨었다. 의미 없이 구멍을 들쑤시던 손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카밀은 성기를 허벅지 사이로 느긋하게 마찰하며 말했다.

“멈추면 안 돼요. 잘 벌려 놔야 이따가 록시가 안 아파요.”

“아, 대충 해도, 괜찮아.”

구멍 안에 있는 것은 자신의 손가락일 뿐이며 카밀이 들쑤시는 것은 허벅지 사이인데, 록시아스는 마치 카밀에게 뒤를 꿰뚫린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속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대충 할 거예요?”

“…….”

“록시, 네?”

“허벅지로, 돼?”

카밀은 록시아스가 자신을 원하고 있음을 느꼈다.

“돼요. 록시 살이면 다 좋아요. 어디든지요.”

“그래….”

기적적으로 록시아스의 속을 겪어 봤다고 해서 다른 면이 시시해지지는 않았다. 언제나 록시아스가 부족했으므로, 카밀은 록시아스의 발톱에다 성기를 문질러도 만족했을 것이다. 애초 록시아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파정할 수 있는 그였다. 원래대로면 ‘허벅지에 문지르게 해 줘서 고마워요’라고 록시아스에게 키스를 퍼부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왜 안 움직여요.”

카밀은 허리 짓을 계속하며 록시아스의 등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

잊었던 바를 떠올린 듯 음절을 뱉은 록시아스가 어색한 손짓을 재개했다. 카밀은 허벅지 사이로는 자신을 품고 엉덩이 사이로는 손가락을 물고 있는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록시아스의 허리에 놓은 손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그 행동이 진득한 애무라도 되는 듯이 록시아스가 허리를 꼬았다.

“아, 아…!”

이전에 카밀의 중심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불가사의하도록 중지 하나만으로도 빠듯한 구멍에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갔다. 카밀의 것이었다. 록시아스는 본능적으로 제 손을 물리려고 했다. 한데 카밀에게 손목이 붙잡혀 불가능했다.

“나도, 아… 만지고 싶어요. 록시 안쪽.”

그렇다면 혼자 만지면 될 일이었다. 자신의 손을 물리지 못하도록 막을 이유가 없었다. 록시아스는 눈을 움직여 카밀을 노려보았다. 다만 그뿐. 하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 고분고분한 카밀은 손을 거둘 것이다. 자신 혼자 낑낑대기보다 카밀에게 도움받는 편이 훨씬 나을 터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록시도 계속해요.”

“그게, 잠깐… 윽.”

혼자 스스로 구멍에 손가락을 넣는 것과 카밀이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주는 것 그리고 구멍에 제 손가락과 카밀의 손가락이 동시에 들어가 있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체온이 온전히 전해지는 배 속에서 카밀이 지문으로 그의 손톱을 문질렀다. 그러다 손가락을 돌려 방향을 바꾸고는 내벽을 문지른다.

“하아.”

“록시가 찾는 데는.”

카밀이 읊조리며 손가락을 단번에 더 깊숙한 곳까지 찔러 넣었다.

“흣…!”

몸서리가 쳐졌다. 제 손가락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감각이 고작 카밀의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왔다고 대번 모습을 드러냈다. 목덜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턱이 저릿해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내 손은, 읏, 뺄래.”

“싫어… 같이 있어요.”

고집부리는 아이처럼 대꾸한 카밀은 깊게 자리한 손끝을 구부려 뻑뻑한 내벽을 훑었다. 경험은 고작 한 번이었으나 자신이 만져야 할 곳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록시아스가 원하는 부위를 그 덕에 일부러 피할 수 있었다. 록시아스를 더 안달 나게 만들고 싶었다.

“아, 거기서… 더….”

조금만 더 손가락을….

말을 잇지 못한 록시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으읏!”

참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온 록시아스는 인내에 재능이 없었다. 오래 견뎠다. 카밀이 정확한 곳을 누르자 온몸이 펄떡거렸다.

“아, 아…!”

머릿속에서 회색 연기만 피워 내던 불꽃이 눈 밖으로 튀어 나갔다. 빛이 번쩍였다. 배 속부터 돋은 소름이 피부 전체로 퍼졌다. “아, 록시.” 뒤쪽에서 짧게 흐른 목소리가 귀에 닿자마자 녹았다.

“만지자마자 쌌어요.”

“하아, 내, 내 손 빼게….”

“저 때문에 쌌어요, 아니면 록시 손 때문에 쌌어요?”

“너….”

너, 카밀 너 때문이잖아.

책임을 명확하게 짚는 말이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입 안에서 부서졌다. 록시아스는 사지를 바르르 떨며 어깨를 내렸다. 하반신은 카밀이 붙들고 있는 통에 억지로 자세를 유지했다.

***

“먼저 닦을까요?”

허벅지 사이에서 앞섶을 물린 카밀이 구멍에는 손가락을 여태 넣은 채로 물었다. 어디를 닦자는 것인지 질문이 명확하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숨을 몰아쉬다가 마른 목을 한 번 울걱거리고 나서 물었다.

“어디를.”

“앞이요. 뒤는 아직 우리 손가락밖에 안 들어가서 깨끗….”

“됐어.”

카밀의 말을 자른 록시아스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뒤에서 손가락을 물리고 카밀의 손목 또한 잡아 뺐다. 카밀은 가만히 있었다. 이어 록시아스는 정면이 천장을 향하도록 몸을 뒤집고 나서 도로 엎드렸고, 카밀을 향해 기어가는 자세로 다가갔다. 무릎을 세워 앉은 채인 카밀의 복근과 앞섶이 얼굴과 가까웠다.

눈동자를 치켜떴다. 상대는 자신을 내려다봤다. 지그시… 두 사람은 일순 숨조차 쉬지 않고 서로를 눈에 담았다. 록시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는 빨간 눈이 더 어울려.”

시트 위에 놓인 손이 카밀의 무릎을 타고 허벅지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파란 눈이 낫다고 생각했거든.”

“…그랬어요?”

손끝이 골반을 스쳤을 때, 카밀의 울대가 높이 치솟았다가 내려앉았다. 이어 록시아스는 대답하며.

“응. 그랬어.”

카밀의 성기를 감아쥐었다. 카밀은 즉시 크게 놀란 듯 어깨를 튕겼다.

“록, 시.”

“왜.”

가시지 않은 흥분이 겉돌아 뺨은 평소보다 붉었으나 록시아스는 퍽 초연한 낯이었다. 카밀은 우아한 손가락에 붙들린 자신의 앞섶과 록시아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록시아스와 눈빛이 부딪혔을 때, 자신도 모르게 당황을 크게 내보였다. 록시아스가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무서워? 전처럼 눈이라도 가려 줄까.”

무섭냐고?

무서웠다. 록시아스가 그답지 않은 행동을 보이면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은 어느 날부터 록시아스가 정한 궤도만을 돌며 살았다. 그러니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에 면역이 부족했다. 의외성을 띤 일은 카밀로 하여금 갖가지 상상을 하도록 부추겼고, 상상의 결말을 대게 비극이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더욱 그랬다. 마지막이니까. 록시아스는 정말이지 마지막답게 자신을 ‘예뻐해 주고’ 있었다.

“눈 가리는 건… 혼나는 거예요?”

“아니, 배려. 네가 무서워하니까.”

얌전했던 손에 록시아스가 살짝 악력을 더했다. 하나 카밀은 괴로운 듯이 미간을 좁혔다.

“배려, 하, 배려하지 말아 줘요.”

“왜?”

“평소처럼 해 주세요.”

“평소처럼?”

“네, 평소처럼… 충분하지 못한 제가 록시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처럼, 부족한 제가 잘못해서 록시에게 벌 받는 것처럼요. 록시가 저를 가르치고 고쳐서 계속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처럼… 요.”

휴고의 등장으로 무소용해진 자신의 역할을 뼈저리게 의식하고 있는 카밀이었다.

지금 뱉은 말로써 자신이 록시아스에게 더는 필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으나, 지금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그대로인 록시아스와 영원할 것처럼 밤을 보내고 싶었으므로.

머리칼이 어깨에 닿도록 고개를 기울인 록시아스가 물었다.

“혼내 달라는 거야?”

카밀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넌 혼나는 걸 즐기지.”

“맞아요.”

“내가 쓰다듬어 주지 않아서 차라리 맞기를 바랐고.”

“…네.”

“가엾은, 하….”

얼굴을 바로 세운 록시아스는 단어 사이를 한숨으로 채웠다.

“카밀아.”

카밀은 자신을 다정하게 부르는 록시아스를 향해 팔을 들었다. 손끝이 록시아스의 살갗과 아슬아슬한 거리만 남긴 채 어깨부터 목덜미를 지나 뺨에 다다랐다. 찰나 그는 록시아스의 얼굴께에서 손을 잘게 떨었다. 이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은 듯이 떨림을 멈추고는 손을 더 위로 올렸다. 검은 머리칼까지. 손가락 사이사이를 흑발로 빼곡히 채우고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네, 록시.”

자신을 쳐다보는 록시아스의 눈이 순수하게 샛말갛다.

“아까는 사랑해 달라고 그랬잖아.”

“네, 그랬어요.”

록시아스의 순수함을 포착하게 된 것은 자신이 그보다 낡아 버렸기 때문일까.

“그런데 이제는 혼내 달라고?”

“맞아요.”

“뭐가 진심이야.”

“둘 다요.”

카밀은 자신과 존재부터 다른 록시아스와의 거리를 셈하며 흑색 머리카락을 장난치듯 만지작댔다.

“둘 다?”

“난 항상 똑같은 의미로 말했어요.”

머리카락이 스쳐 간지러운지, 록시아스가 이마 쪽으로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카밀의 중심을 놓았다. 자세를 바꾼다. 카밀과 같이 무릎을 세워 앉았다.

“혼내 달라는 말이랑 사랑해 달라는 말은 같아요.”

“그게 어떻게 같아.”

“록시가 해 주는 건 뭐든 좋아서, 록시가 뭘 하든 나한텐 다 같아요.”

“장난치지 마.”

이윽고 록시아스는 정수리를 헤집는 카밀의 손을 탁, 쳐 냈다. 그러자 카밀은 이번에 록시아스의 허리를 감았다. 당겼다. 가슴팍이 붙고 복부가 붙고 허벅지가 붙었다. 코끝과 코끝이 붙었다.

자신과 록시아스 사이의 거리를 완전히 좁힌 카밀이 미소 지었다.

“장난친 적 없어요, 한 번도.”

“그렇겠지.”

“록시.”

불러도 불러도 대답을 또 원하게 하는 이름을 입술에 걸쳤다. 그러고 나서 카밀은 록시아스의 뒤통수를 살포시 눌러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게 했다. 오늘 계속 그랬듯, 록시아스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옆얼굴을 카밀의 가슴팍에 붙인 록시아스는 카밀을 올려다보려다가 이내 눈꺼풀을 내리고 허공을 응시했다. 머리맡에서 목소리가 흩날렸다.

“심장을 꺼내서 보여 줄게요.”

심장 박동이 항시 귓가를 공기처럼 맴돌고 있으므로 구태여 꺼내서 보여 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왜.

“쓸데없는 짓이야.”

“내 심장은 록시 손에 놓이면 너무 빨리 뛰어서 터질지도 몰라요. 확인해 볼래요?”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가슴팍과 바짝 붙은 귓가로 줄곧 전해지는 박동 소리가 차분했다. 거짓말이었다면 빠르게 뛰었을 것이다.

“카밀아, 미쳤지?”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왔다. 록시아스는 허공에서 시선을 거두고 얼굴을 홱 꺾어 카밀을 올려다보았다.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지.”

몸이 붙을 때부터 유지되던 카밀의 미소가 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차피 록시가 죽으면 따라 죽으려고 했잖아요. 상관없어요.”

“네 심장.”

록시아스는 카밀의 양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밀쳤다. 허리를 끌어안은 힘이 거세기에 쉬이 떨어져 나가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카밀은 순순히 매트리스로 무너졌다. 록시아스는 자신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는 카밀의 허벅지 위로 올라앉았다.

“필요 없어.”

카밀은 록시아스의 양쪽 골반을 거머잡았다.

“록시, 궁금하지 않아요?”

“뭐가.”

의아한 것들이 손꼽을 정도라면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었다. 하나 어느 때부터인가 카밀을 향해 묻고 싶은 질문이 수많았다. 록시아스는 겹겹이 쌓인 의문들을 ‘뭐가’ 한 마디에 함축시켰다.

카밀의 눈이 록시아스의 얼굴에서 가슴까지로 내려갔다. 골반에 놓였던 왼손도 가슴으로 올라간다.

톡, 톡. 검지와 중지를 모아 록시아스의 가슴을 두드린 카밀이 읊조렸다.

“내가 흡혈귀로 변했는데, 왜 여전히 록시가 내 피를 원하는지.”

“…….”

“우리 둘 다 흡혈귀인데 어째서 서로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세상에는 예외라는 게 있어.”

“하필 왜 우리가 그 예외일까요?”

아무리 록시아스라 할지라도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불가사의한 일에 대해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신이 그렇게 만들어서?”

한때, 불가해한 일들은 전부 신의 뜻이라 어떤 수도사가 가르쳐 주었다.

“신을 본 적 있어요?”

“아니.”

“신을 믿어요?”

“…아니.”

가슴에 얹힌 손바닥을 주르륵 미끄러트린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에 깍지를 꼈다.

“난 믿어요.”

“네가?”

“네.”

깍지 낀 손을 당겨 입술로 가져간 카밀은 이윽고 록시아스의 손등에 짧게 입 맞추고는 고백했다.

“록시가 내 신이에요.”

입술에서 손등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카밀이 읊조릴 때마다 입술의 감촉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입김이 살갗을 데웠다.

“…….”

“이제 그만해요, 록시.”

“뭘?”

“이야기요. 그만하고 아까 하던 거 마저 해요.”

“…그래, 그러자.”

얽힌 손을 풀어냈다. 카밀에게서 손을 거둔 록시아스는 앉은 자리에서 조금 더 앞으로 몸을 옮겼다.

“카밀아.”

발기한 성기를 잡아 내렸다. 다른 손으로는 카밀의 성기를 감싸 올렸다. 자신의 것과 카밀의 것을 맞붙여 두 손으로 움켰다.

“눈, 가려 줄까?”

“하… 아니요. 록시를 보면서 하고 싶어요.”

“혼나고 싶다며.”

물음에 일순 고민하는 듯 눈동자를 치킨 카밀이 곧 시선을 도로 제자리에 두며 말했다.

“손을 묶어 주세요.”

“손을?”

“네, 록시가 하는 대로 당할 수 있게요.”

즉시 카밀은 손목을 겹쳐 록시아스에게 내밀었다. 록시아스는 근처에 널브러진 셔츠를 향해 팔을 뻗었다. 곧 손에 잡힌 셔츠가 무자비하게 찢겼다. 길쭉한 넝마가 된 셔츠를 팽팽히 당긴 록시아스가 그것으로 카밀의 손목을 묶었다. 아주 단단히, 몸부림쳐도 풀리지 않도록 매듭지었다.

“마음대로 찢거나 하면 더 크게 혼날 줄 알아.”

꿀꺽. 록시아스에게 속박당한 카밀이 목울대를 넘겼다.

“네… 록시.”

“착하지.”

한마디 칭찬을 건넨 록시아스는 여태 자신을 향해 뻗어 있는 두 손에 입술을 내렸다. 그제야 카밀은 묶인 손을 머리맡으로 가져갔다. 팔이 위로 당겨지자 카밀의 가슴팍이 부풀어 더욱 널찍해 보였다.

“네, 착하게 굴게요.”

“응, 그래.”

록시아스는 양손으로 감싼 두 성기를 부드럽게 쓸기 시작했다. 즉각 카밀의 입술이 벌어졌다. 금방도 달아오른다. 카밀의 귓가가 발갛게 익었다. 록시아스는 자신의 혈색도 꼭 그와 같이 물들 것이라 예상했다.

“아.”

“하….”

머지않아 손만으로는 부족해졌다. 록시아스는 허리를 앞뒤로 흔들며 제 것이 카밀의 성기와 비벼지게 했다. 둘이서 흘린 체액으로 기둥이 젖어 자꾸만 미끄러졌다. 비벼지는 부분이 수시로 바뀌었다. 록시아스의 손바닥과 카밀의 복부가 젖었다. 귀두가 손바닥 안에서 왕복할 때마다 찔걱거리는 소리가 퍼져 질척한 분위기를 대변했다.

“하, 하아.”

“아… 읏.”

이전 꼿꼿했던 록시아스의 상체가 앞으로 쏟아졌다. 카밀은 가까워진 록시아스를 잡아당겨 입을 맞추고 싶었으나 묶인 손을 떠올리고는 주먹만 쥐었다.

얼마 후 록시아스는 성기에서 손을 떼고 카밀의 복부를 짚어 몸을 지탱해야만 했다. 고꾸라지기 직전이었다.

“흐, 으읏…!”

“아…!”

앞으로 내밀었던 허리가 제자리로 빠지자 록시아스가 허벅지를 덜덜거리며 사정했다. 이어 카밀이 치아를 악물고는 정액을 쏟았다. 희끄무레한 액체가 들썩거리는 복부와 그 위 손등에 떨어졌다. 약간은 카밀의 가슴께까지 튀었다.

숨을 몰아쉰 록시아스가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 확인하는 양 카밀을 보았다. 자신을 보며 하고 싶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듯 카밀의 풀린 눈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벌어져 있는 입술이 움직였다.

“록시, 이제, 아.”

숨을 먼저 내보내고 겨우 말을 꺼내던 입술을, 록시아스는 틀어막았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먼저 해 주겠다는 약속을 무르지 않을 작정이었다. 카밀은 구태여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전부 선사해 줄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는 만족시켜 줄 수 있었다.

록시아스는 이전 찢어 낸 셔츠 조각 중 나머지를 찾아 들었다.

“입, 막아 줄까? 아니면 알아서 다물래?”

“…막아 주세요.”

대답에 따라 록시아스는 셔츠 조각을 카밀에게로 가져갔다. 카밀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거 말고 록시 입술로요.”

느른하게 풀려 있던 록시아스의 미간이 대번 구겨졌다.

또, 카밀이 먼저 말하게 했다.

제가 카밀보다 앞서는 것은 살아온 시간뿐인 듯했다. 록시아스는 자책하며 몸을 바짝 숙여 카밀의 면전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머리맡에 놓인 카밀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자신을 만지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자신에게 먼저 손대게 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카밀을 만질 생각이다. 카밀의 잘생긴 뺨을 감쌌다. 야릇하게 벌어진 입술에 입술을 내렸다. 천 쪼가리는 내던졌다.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고 혀가 여러 모양으로 얽히며 촉촉한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렸다. 키스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나 이전 한 번 사정한 성기가 다시 일어서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단단한 것들이 서로 비벼지고 있었다. 록시아스는 천천히 카밀의 가슴팍에서 손을 미끄러트렸다. 갈라진 복근을 지났을 때 손가락은 그들이 앞서 뿌려 놓은 정액으로 끈적했다. 그 손가락을 자신의 뒤로 가져갔다. 허벅지를 조금 공중으로 띄웠다.

손끝에 묻은 체액을 엉덩이 사이에 대강 묻혔다. 이어 복부에 남은 정액을 다시금 훔쳐 카밀의 성기에 발랐다. 기둥의 길이만 해도 제 손바닥을 활짝 편 것보다 길었으므로 꼼꼼히 바르기 위해서는 왕복하여야 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제 속으로 들어설 선단을 제일 젖도록 했다.

“하… 넣을, 거야.”

허벅지를 일으킨 록시아스는 꼿꼿하게 일어선 카밀의 성기를 쥐어 뒤로 가져가며 말했다. 카밀은 눈길을 아래쪽으로 내렸다가 도로 올리며 마주친 시선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 록시아스가 신음을 숨기듯 턱을 떨어트렸다. 동시 투명한 의자에 앉은 듯한 자세로 바꾼 하체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귀두와 입구가 정확히 맞물렸다. 록시아스는 가슴이 부풀도록 깊게 숨을 들이쉬었고, 멈췄다.

그때. 카밀은 록시아스를 거스르고 하체를 치올렸다.

“아아…!”

대번 허리를 고꾸라트린 록시아스가 입을 잔뜩 벌리며 비명 같은 소리를 토했다. 폐부에 애써 몰아넣은 숨이 한 번에 쏟아졌다. 카밀이 들어온 만큼 몸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제가 나서서 록시아스를 꿰뚫은 카밀의 사정 또한 녹록지 않았다. 록시아스의 안에 들어선 선단이 그대로 뭉그러질 듯했다. 심하게 조였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고된 감각과 달리, 록시아스가 미리 꼼꼼히 바른 체액 덕에 삽입은 뻑뻑하지 않고 수월했다. 턱이 세로로 파이도록 어금니를 악문 카밀은 또다시 허리를 들어 록시아스를 치받았다.

“흐, 아윽…!”

단번에 뿌리까지 들어갔다. 카밀의 치골이 록시아스의 볼기를 때리며 살갗에서 철퍽, 소리가 퍼졌다.

입을 다물기로 해 놓고 막지 않으니 카밀이 마음대로 지껄였다.

“숨, 쉬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도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복근이 갈라진 자리에 고인 그림자가 한결같은 명암으로 굳어져 있었다.

“너무, 후, 좁아….”

“허리, 허, 으읏, 허리 내려….”

록시아스가 더듬거리며 카밀의 복부를 손끝으로 할퀴었다. 그제야 카밀이 숨을 쉬었다. 복근 사이사이가 더더욱 짙게 패었다가 설핏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하아.”

호흡을 흘린 카밀은 록시아스가 시키는 대로 허리를 내렸다. 속을 무리하게 넓히던 남근이 빠져나가자 내벽이 함께 딸려 나가는 듯했다. 록시아스는 주저앉을 뻔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했다. 성기가 물러나는 시간이 체감상 아주 길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짧지 않은 시간일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크기이니….

“윽, 흐으.”

얼핏 우는 소리를 낸 록시아스가 입술을 말며 카밀을 따라 천천히 하반신을 낮췄다. 반대로 귀두가 도로 깊숙이 들어왔다. 배 속이 들어차는 느낌이 여실했다. 어디까지 닿는지 맨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럴 리 없는데도 내장이 다 뒤집혀 몸이 망가질 것 같았다.

“카밀, 하아… 아, 넌 그렇게, 생겨서….”

청순하게 생긴 카밀은 성기 빛깔조차 고왔다. 그러나 크기는 전혀 곱지 않고 무자비해 속을 짓누르고 허리를 뻐근하게 두드렸다. 말을 다 내뱉지 못한 록시아스는 덜덜거리는 눈꺼풀을 꾸역꾸역 들어 올려 자신의 복부를 보았다.

“하읏!”

그때 카밀이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조금 물렀다가 빠르게 치올리기를 반복한다. 근육이 짜여 있어 그저 얇지만은 않은 뱃가죽 위로 성기 앞머리가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것이 드러났다. 흔들리는 시야로 전해지는 광경인데도 명확했으며 노골적이었고 외설적이었다.

자신의 배 속에서 카밀이 움직이고 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게 섞인 정액을 제 속에 펴 바르고 있다. 자신에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흉터를 새기고 있었다. 카밀이.

***

다짐이 무색해졌다. 록시아스는 결국 주저앉아 카밀이 처박는 대로 흔들리기만 했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카밀은 섹스로 록시아스를 궁지로 몰았다. 록시아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으면서 기회고 의지고 빼앗아 갔다. 록시아스는 두 손이 결박당한 카밀보다 자유롭지 못했다.

처음에는 록시아스가 카밀을 깔고 앉은 자세였으나 한 차례 분출하고 난 뒤에 카밀이 몸을 벌떡 일으키는 바람에 전복되었다. 숨을 고르며 탈력감에 빠질 나위조차 카밀은 주지 않았다. 그는 묶인 두 팔 안에 록시아스를 가두고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지금의 행위가 섹스 아닌 식사였다면 카밀은 태어나 한 번도 식사해 보지 않은 짐승이었을 것이다. 본능적이며 야성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아아, 으윽, 읏!”

“하아, 하, 록시, 록시….”

또한 마구잡이로 휘젓는 듯 움직이면서도 용의주도했다. 카밀은 광인처럼 몸을 놀리면서도, 면밀한 학자처럼 록시아스가 자지러지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 타격했다. 속이 다 벌어지고 안쪽 살갗은 빠르고 오랜 마찰로 인해 화끈화끈 쓰라린데, 고통에 흐느끼려 하면 즉시 쾌감이 온 육체를 점령해 왔다. 록시아스는 아파서가 아니라 기뻐서 울었다.

“흐윽, 으으… 아, 흐, 읏!”

“울지, 하아, 울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하, 우는 얼굴도 좋아요….”

다정한 말투로 이기적인 말을 하는 카밀은 록시아스를 부술 작정인 것처럼 쑤셨다. 록시아스는 흡혈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카밀이 흡혈귀임을 섹스를 통해 비로소 실감했다.

문질러지는 접합부에서 질은 소음이 연속적으로, 짧은 간격으로 퍼져 시끄러웠다. 밖으로 쑤욱 빠져나오는 기둥이 지속적인 마찰로 흰 체액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름 한 점 없이 미끈하게 펴진 입구에서는 하얀 거품이 일었다가, 세게 치받는 살갗으로 인해 터져 사라졌다.

공중에서 껄떡거리는 록시아스의 성기에서 맑은 색채의 선액이 길쭉하게 늘어졌다가 불규칙한 곡선으로 휘어져 이리저리 튀었다. 깔끔했던 백색 침대 시트가 여기저기 투명한 무늬로 요란하게 장식되었다. 뒤엉킨 피부 또한 갈피를 못 잡고 흐르는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흣, 끝… 아! 끝내, 응? 카밀…!”

이 순간이 지속되길 바라면서 입으로는 솔직하지 못한 부탁이 튀어나왔다. 록시아스는 눈가를 연신 적시며 제발 끝내 달라고 애걸했다. 그럴 때마다 카밀이 묶인 손으로 뒷 머리칼을 헤집었다. 모가지가 맥없이 마구 흔들려 양 관자놀이가 카밀의 팔뚝에 이리저리 부닥쳤다. 어떨 때는 고개가 앞으로 쏠리는 탓에 이마가 카밀의 턱에 닿았다.

그러면 카밀은 이마에 키스해 주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록시…. 절절한 고백에 록시아스가 건넬 수 있는 대답이란 그만하라는 거절뿐이었다. 하지만 카밀은 멈추지 않았다. 록시아스도 그가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멈추지 않길 바랐다.

카밀이 상체를 일으켰다. 카밀의 팔뚝에 갇힌 록시아스는 그를 따라 상반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반신이 결합된 채였다.

돌덩이처럼 딴딴한 허벅지에 올라앉은 록시아스는 카밀이 움직이지 않는데도 허리를 꼬아 댔다. 카밀이 숨만 쉬어도, 쇠꼬챙이나 마찬가지인 살 기둥이 배 속에서 사방으로 난리를 부리는 것 같았다.

눈가가 아려서 눈물을 멈추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울고 또 우는 록시아스는 퉁퉁 부은 입술을 열었다. 뱉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저 뭍으로 끌려 올라온 어류처럼 뻐끔거리기만 했다. 그러면 카밀이 입술을 겹쳐 혀를 집어넣었다. 아래가 얌전해지면 도리어 위로 록시아스를 쑤셨다.

“하아, 하아….”

“사랑해요, 아, 록시.”

키스가 끝나자 카밀은 추삽질을 재개했다. 입 맞추며 묻은 타액을 미처 닦지도 못한 입술을 잔뜩 벌린 록시아스가 고개를 한껏 치켜들었다. 그는 이제 신음을 지르는 것조차 잊는 듯했다. 우는 소리가 듣기 좋았는데,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록시, 록시.”

사지가 엉켜 있었으나 카밀은 마치 록시아스가 실종된 양 그 이름을 애달프게도 불러 댔다. 그러지 않을 때는 조용한 입술로 록시아스의 얼굴과 목을 핥았다. 턱과 귓불을 깨물고, 불거져 나온 울대를 혀로 감싸 빨았다. 카밀이 지나간 살갗은 불그죽죽해졌다.

“록시, 울어 줘요, 더….”

“으, 으응, 흑….”

제정신이 아닐 것이 표정만으로도 뻔히 보이는데 록시아스는 카밀이 보채자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입 밖으로 아무렇게나, 아무 말이나 흘려도 곧 울음이었다.

“나를 위해 울어 줘요….”

“응, 흐윽, 그, 으래, 아!”

하반신을 돌려 깊숙이 맞물린 속을 헤집어 놓던 카밀이 별안간 움직임을 그쳤다. 그에 “더어, 더….” 중얼거린 록시아스가 이내 스스로 허리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어깨를 튕기거나 손톱을 세워 카밀의 등을 긁었다. 등에 남겨지는 상처가 깊고 짙을수록, 카밀은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록시, 사랑해요.

***

증발하고 증발하다가 바닥에 찔끔 고인 마지막 이성이 모조리 날아갔을 때, 묶인 손목이 풀렸을까. 아니면 묶인 손목이 풀렸을 때 이성이 날아간 것일까.

“윽, 읏, 흐으으.”

“아, 하아, 하아….”

제 체중을 지탱할 여력이 없어 바짝 엎드린 인영 뒤를 치받는 카밀의 손이 자유로웠다. 뭉개졌다가 기어이 폭발하고 만 욕망을 전시하듯, 록시아스의 허리춤을 붙잡은 손과 팔뚝 위로 강하게 불거진 핏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평소 록시아스가 속으로 버릇처럼 감탄하던 카밀의 얼굴은 더는 순백하지 않았다. 행위를 마치면 돌아올지 모르나 지금만은 오로지 퇴폐적이었다. 근사한 얼굴선을 따라 흐른 땀방울이 록시아스의 살결 위로 뚝뚝 떨어졌다.

섹스에 중독된 광자처럼 멈추는 법도 잊고 몇 번이고 사정했다. 안을 채우다 못해 밖으로 흘러나온 정액이 두 사람의 허벅지에 잔뜩 묻어 있었다. 허옇게 말라붙을 새도 없었다. 그들의 피부는 계속해서 젖기만 했다.

여러 번 사출하고 난 뒤 지성인으로서 위기를 감지한 두 남자는 자제를 발휘해 접합부를 떨어트렸다. 그러고 나서는 자연스레 키스했고, 곧이어서는 방금까지 키스했던 상대의 입술에 자신의 생식기를 물렸다. 흡혈귀답지 않게 흡혈하지 않고 상대가 분출한 씨물로만 목구멍을 닦았다. 서로의 정액은 색 없는 혈액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놀랍게도 포만감을 느꼈다. 허기는 겪어 본 적 없는 미지의 감각인 듯 멀었다.

부른 배를 쉬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카밀과 록시아스는 다시 하체를 붙였다.

바르게 누운 록시아스의 다리 사이에서 추삽질하던 카밀은 바닥에서 흐느적거리는 두 발목을 들어 올렸다. 넓게 벌리니 자신이 드나들고 있는 구멍이 가감 없이 노출되었다.

처음에 옷을 벗겼을 적에는 그저 분홍빛이던 입구가 이제는 새빨갰다. 제아무리 회복력 뛰어난 육체라도 하여도 끊임없이 괴롭히면 부어오른 모양으로 가라앉지 못했다. 카밀은 제가 색을 입히고 선을 다듬은 체부를 감상하며 희열을 만끽했다. 누구도 록시아스를 이렇게 만들지 못할 터였다. 그래, 누구라고 할지라도….

“내가….”

발목을 제자리에 두고 몸을 기울였다. 록시아스의 어깨맡에 팔뚝을 놓고 체중을 지탱한 채로 흑발 속에 손가락을 꽂아 넣으며 속삭였다.

“만든 록시아스.”

“…으.”

피는 무한히 만들어져도 정액은 한계치가 있었나 보다. 록시아스는 안을 찔리고 머지않아 희끄무레한 액체 몇 방울을 흘린 이래로 소리도 잘 내지 않고 발발 떨기만 했다. 복부와 허벅지는 경련이 심했는데, 마치 오르가슴에 연이어 노출된 듯한 양상이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흔들리는 속눈썹에 입술이 간지러워졌다.

“나는….”

거친 행위를 어느새 멈춘 카밀이 록시아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꼬리가 잘린 문장은 한참 후, 카밀의 손이 록시아스의 이마로 옮겨졌을 때에야 이어지기 시작했다.

“죽게 못 놔둬.”

열기가 올라오는 이마에 가닥가닥 달라붙은 까만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카밀은 중얼거렸다.

“당신은 화를 내겠지만.”

새겨듣는 이가 없으니 혼잣말이었다.

“화내도, 어떡할 거야.”

마지막 문장은, 카밀이 록시아스의 목을 틀어쥐었을 때 한숨과 함께 공기를 갈랐다.

“당신은 다 내 건데….”

***

록시아스는 송곳니를 거뒀다. 입 안에 남은 혈액을 혀로 샅샅이 훔치는 사이, 카밀의 저항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카밀은 몸을 늘어트리며 눈을 깜빡였다.

세상 모든 빛이 집 안으로 모인 양 시야가 번쩍였다. 눈이 시렸다. 각막을 찌르는 광파를 물리치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다가 재차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흰 천에 덮인 듯한 시야가 천천히 회복되었다. 눈앞에 놓인 물체가 서서히 선을 이루더니 색을 덧입기 시작했다. 하얀 종이에 그림이 그려지는 광경을 보았다.

완성된 그림은 새까맸다.

광원에 먹힌 세상이 본모습을 되찾은 뒤, 카밀이 마주한 것은 콧대를 누르는 하얀 베개와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침대 헤드였다. 이어 카밀은 등허리를 누르는 무게를 느꼈다. 일순 진공 포장된 듯하였던 청력은 생체에서 퍼져 나오는 소음들을 도로 경청했다. 뒤통수부터 엉겨 오는 호흡 소리와 맥박 소리였다.

‘록….’

‘카밀아.’

‘…….’

‘정신 차렸어?’

***

카밀은 밤새 수난을 당한 이가 자신이라는 듯 지친 안색을 두르고 눈꺼풀을 내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수면에 빠진 모습 같기도 했으나 흡혈귀인 그가 잠을 잘 리 없었다. 지나치게 기나긴 섹스 시간을 계산할 수는 없어도, 그 후 카밀이 꼼짝도 않은 시간은 셈할 수 있었다. 섹스가 끝난 뒤 시침은 벌써 세 바퀴를 돌았다.

“일어나.”

록시아스는 자신을 향해 모로 누운 카밀의 팔뚝을 치워 내려 했다. 역시나 카밀은 자지 않고 있었다. 이 묵직한 팔뚝은 떨어트리려고 할 때마다 힘을 싣고 버텼다.

“카밀아.”

짐짓 다정하게 부르면 카밀이 눈을 뜨리라 생각했다.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카밀은 숱이 빼곡한 금빛 속눈썹을 무겁게 들어 올렸다. 조명 하나 비추지 않는 방은 새카맸고 카밀의 뺨에 드리운 속눈썹 그림자 또한 평소보다 짙었다. 록시아스는 속눈썹이 아닌 그림자 위로 손끝을 내렸다. 카밀이 손목을 감싸왔다.

“…네, 록시.”

실지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카밀의 저음은 더욱 침잠되어 있었다. 록시아스는 길게 뻗친 속눈썹 그림자를 무늬처럼 입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카밀을 두드렸다.

“일어나.”

“조금만 더요….”

인간이었던 어릴 적에도 잠투정 한 번 하지 않았던 카밀이었다. 그는 하지 않아도 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니꼽지는 않았다. 달래 줘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소중하고 가엾은, 카밀이니까.

“조금만 더 안아 주세요.”

카밀이 커다란 몸을 어울리지 않게 꼼지락대며 붙어 왔다. 안아 달라고 해 놓고는 자신이 먼저 안겨 온다. 무거운 팔뚝이 등허리에 감기고 호흡할 공간이 극도로 좁아졌다. 카밀의 맥박이 직접 가슴을 울렸다. 그의 피 맛을 그대로 재현한 듯 향기로운 살 내음이 정신을 채웠다.

“당분간 못 안으니까….”

당분간. 록시아스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카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당분간, 이 아니라 영원히일 텐데.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카밀은 이제 단어조차 멋대로 바꿔 뱉었다. 소원을 착각으로 변질시킨 카밀이 착각을 진실이라 철석같이 믿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래, 조금만 더.”

“몇 시예요?”

록시아스는 카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져 벽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아침, 맞죠?”

“응.”

“그럼 한 시간만 더 이러고 있어요.”

겨울의 밤은 길었다. 추위에 숨은 아침 해는 일곱 시가 넘었을 때야 모습을 완연히 드러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기 전까지, 카밀은 록시아스와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

손님방에서 역겨운 피 냄새가 진동했다. 카밀과 록시아스는 막 침대를 벗어난 티가 역력했던 노곤한 얼굴을 와락 구겼다.

시체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은 휴고가 그들을 맞이했다.

“푹 쉬었습니까?”

집주인은 손님이 팽개친 시체에 시선을 꽂았다. 시체는 동맥이 지나가는 자리가 모조리 뚫려 피범벅이었다. 본래 피부색이 붉었으리라 착각이 일 정도였다.

“휴고.”

차갑게 식은 먹잇감에서 거둬진 날카로운 눈빛이 휴고를 향했다. 그에 휴고가 불그죽죽한 입가를 손등으로 대충 쓱 닦고는, 체포되는 범법자처럼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록시아스.”

“누가 이 집에서 밥을 처먹으라고 허락했어?”

“이해해 주십시오. 느긋하게 식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밖보다는 이곳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본디 비열한 성정인 휴고는 막무가내로 건방 떨고 있었다. 록시아스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는 굽신거리지 않았다.

“그러게 손님을 심심하게 두지 말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자신이 그를 죽여야 한다니.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나 마찬가지였다. 피식자 눈치를 살피는 포식자는 없다.

“더러운 거 당장 치워.”

록시아스는 시체와 휴고에게 번갈아 혐오를 뿌리며 명령했다. 그에 휴고가 카밀을 보았다.

“예쁜아, 이것 좀 치워 줄래?”

그러자 카밀이 발을 움직였다. 차분하고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이윽고 그는 시체 앞에 섰고, 깨끗한 구둣발로 시체를 툭, 걷어찼다.

“네가 치워.”

“…하하.”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휴고는 숙인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그러다가 웃음소리가 뚝 끊겼을 때, 표정을 모르는 이처럼 굳은 얼굴을 카밀에게 내보였다. 위협이었다. 시건방진 아이를 겁주기 위해 발바닥에 무게를 실으며 걸어 나갔다. 시체를 걷어차느라 핏물이 튄 구두코 앞에 붙어 섰다.

“개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카밀의 뺨에 콧대를 들이댄 휴고가 퍽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읊조렸다. 카밀은 먹잇감 하나 치우자고 혼신을 다해 상대를 위협하는 휴고가 우스웠다. 우스운 만큼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대꾸해 주었다.

“제가 먹은 것도 못 치우는 쪽이 개, 아니야?”

“뭐라고.”

눈썹을 꿈틀거린 휴고가 고개를 물렀다.

“주인이 예뻐해 준다고 아무한테나 덤비면 쓰나.”

하나 아직도 둘 사이의 거리는 적개심을 또렷이 감지할 수 있을 만치 가까웠다.

“모두가 널 귀여워하지는 않아, 아가야.”

툭, 툭. 휴고가 발부리로 시체를 건드렸다.

“치워.”

하. 카밀이 들릴 듯 말 듯 하게 웃었다.

웃어? 휴고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재차 명령했다.

“치워.”

“난 더러운 거 못 만져.”

말간 얼굴로 뻔뻔스럽게도 말한다. 기가 막혔다. 록시아스가 얼마큼 오냐오냐하며 키웠는지 알 만했다. 가소롭다. 허울 좋은 껍데기를 내세워 되바라지게 구는 놈들이란 정작 알맹이는 보잘것없었다. 휴고는 손가락을 늘리듯이 쫘악 폈다가 주먹을 쥐었다.

“이 쓰레기랑 똑같이 만들어 줄까?”

“싫어.”

대꾸하는 투가 앙칼지고, 장난스럽다. 휴고는 뒷덜미를 뜨끈하게 데우는 열을 식히려는 양 한숨을 길게 토했다.

“하아, 멍청한 개새끼한테 시킨 내 잘못이군.”

지금 이 이상 카밀과 붙어 봐야 이득 없는 소모였다. 모르긴 몰라도 록시아스가 퍽 애정을 주는 개인 듯하니 그 앞에서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가는 무슨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록시아스에게 해 줘야 하는 임무가 있으니 죽이지야 않겠지만 다리 한쪽쯤은 잘릴 수도 있을 터다. 애새끼… 따위야 록시아스를 죽인 뒤 처리해도 늦지 않는다.

어금니를 딱딱 부딪은 휴고는 걸음을 물러 카밀과 거리를 두었다.

“자.”

무슨 속셈인지 자신들을 그저 관조하기만 하는 록시아스에게로 발을 미끄러트렸다.

“록시아스.”

“휴고.”

눈길이 닿자마자 휴고와 록시아스가 동시에 상대를 불렀다. 휴고는 버릇처럼 턱을 끄덕여 창조자에게 발언권을 우선으로 양보했다. 록시아스는 당연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치워.”

씨이팔. 휴고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욕설을 혓바닥에 놓고 굴렸다.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턱 위로 구부러진 혓바닥 실루엣이 툭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깨끗하게 치우겠습니다, 분부대로.”

시체를 들쳐 올려 어깨에 짊어진 휴고는 방을 나서며 짓씹었다.

어떻게 죽이라고 하든,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

쓰레기를 처리하고 돌아온 휴고는 세수를 했는지 만면에 덕지덕지하던 핏자국이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끄트머리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짜악, 짝! 손뼉을 쳐 두 남자의 이목을 가져왔다.

요란스러운 돼지.

록시아스는 퍽 건들건들한 걸음걸이로 자신을 향하는 휴고를 보며 혀를 찼다. 인간일 적에도 귀족 출신이 무색하게 천박하기로는 해적 놈들을 넘어서던 자였다. 그래도 자신을 따르던 때에는 데리고 다니기 부끄럽지 않도록 내숭을 부리는 듯했는데, 비속한 본성은 몇 세기를 살든 변하지 않았다.

그런 놈을 어째서 동류로 만들어 주었는가, 하면 충동 탓이었다. 록시아스는 자신이 동네 이발사를 자처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의 금발을 가지고 싶어서, 두고 감상하고 싶어서 흡혈귀로 만들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 일이며 기억할 영양가도 없는 일이니 어렴풋했다.

여하간 금발, 그래, 금발이었다. 가문이 몰락하고 폐인으로 전락한 휴고는 추했으나, 그의 금발만은 반짝반짝 예쁘기도 했다. 카밀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의 취향도 어찌 보면 참 지독했다. 이상하게도 옛적부터 금발이 좋았다. 두 인간이 본인들을 흡혈귀로 만들어 달라고 애걸하면 개중 머리카락이 금빛인 자를 택했다. 둘 다 금빛이 아니면 금색에 더 가까운 머리카락을 골랐다. 이유는 모른다. 취향이란 게 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이끌리지만 왜 그런지는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그리고 제 취향은 록시예요.’

어린 카밀이 대뜸 휴고를 지우고 나타났다. 록시아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귀여운 것. 카밀은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이나 할까? 지금 다시 취향이 무엇이냐 물으면 여전히 나라고 대답할까?

“…….”

“…시아스.”

허공을 훑으며 조용조용 미소를 띄우는 록시아스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휴고가 먼저 록시아스를 불렀다. 그래도 록시아스의 정신은 저 멀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카밀이 록시아스를 불렀다.

“록시.”

짧게 울린 저음에 록시아스는 단번에 공중에서 시선을 뗐다. 놀랍도록 빠른 효과였다. 또다시 박수를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휴고는 카밀을 애송이로 여기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록시아스를 저 정도로 구워삶았으면 전에 없이 대단한 놈이긴 하다.

록시아스가 대꾸했다.

“왜.”

카밀은 눈짓으로 휴고를 가리켰다.

“왔어요.”

“그래.”

록시아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찰나 그에게서 시선을 뗀 카밀은 시계를 확인했다. 록시아스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짧을지, 알아야 했다.

록시아스는 휴고의 앞에 섰다. 아닌 체하면서 외모에 신경을 기울이는 편인 휴고는 얼굴과 손을 말끔하게 닦고 왔다. 이런 점이 봐줄 만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복잡한 심경이 읽히는 자들은 때로 아주 유쾌한 유머로 소비되었다.

조소를 숨기지 않고 입 끝을 치올린 록시아스가 물었다.

“휴고, 네 능력이 뭐였더라?”

그 말은 ‘내가 어떤 방법으로 죽지?’와 동일한 물음이었다.

“그것조차 잊었습니까? 내가 몇 년이나 당신을 따라다녔는지 아십니까. 섭섭하군요.”

이마를 짚은 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말처럼 섭섭해 보이지 않았다. 록시아스의 특출난 무심함을 모르지 않으니 실망하지도 않은 것이다.

“당신이 내게 준 능력은….”

이어 휴고는 말하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이겁니다.”

그의 손끝으로 파란 불꽃이 피었다. 길쭉하게 솟은 불꽃이 잘게 일렁거렸다. 후. 휴고가 그것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결코 연약하지 않을 흡혈귀의 불꽃은 촛불처럼 스러졌다.

“불타 죽는 게 가장 고통스럽다고 들었습니다, 록시아스.”

푸르뎅뎅한 화마를 숨긴 휴고는 록시아스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창조자와 마주 보고 선 그는 록시아스의 어깨로 손을 올렸다가, 손가락을 구부리더니 팔을 떨어트렸다. 아직 만지도록, 그를 해하도록 승낙받지 못했다.

“괜찮겠습니까?”

겁을 먹는다면 뿌듯했겠지만.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어 봐.”

역시나 록시아스는 눈썹 한 올 흩트리지 않고 초연한 낯짝이었다.

“처음 죽는 거니까, 기념할 수 있게.”

“처음 죽는다… 라고.”

자신을 저주받은 몸으로 탄생시킨 록시아스에게 가진 증오와는 별개로, 록시아스의 사고방식은 퍽 매력적이었다. 인간이었던 기억이 있거나, 인간과 함께했던 경험을 겪은 자들이라면 지니기 어려운 사고방식이었다. 그 독특한 태도로 인해 그는 뭇 이들에게 신 취급을 받았으며 절대자로 추앙받았다.

“부활하기라도 할 거란 말입니까?”

하지만 그는 신이 아니다.

“그럴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겠군요.”

산송장을 만드는 병마일 뿐이며, 죄악을 전파하는 사탄일 뿐이다.

“그래.”

동족의 원증과 결의를 전해 받은 록시아스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원인을 밝힐 수 없는 불안감과 당연한 긴장이 사무치면서 동시에 기대감이 휴고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창조자와 동류는 그렇게 만족스러운 협상을 마쳤다.

“그리고….”

록시아스는 불만족을 침묵으로 표출하는 또 하나의 동류로 발길을 뻗었다.

“카밀.”

곧 이루어질 계획을 확신하며 흡족해진 마음이 그에게 다다를수록 파동을 만들었다. 지진이 닥친 연약한 땅덩이처럼 갈라진다. 겨우 파묻었던 연민이 싹을 틔웠다.

카밀은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했다. 그래서 더더욱 가여웠다. 그는 이제 울지 않았다. 죽음을 고집하는 자신을 붙잡지도 않았다. 자신의 연민을 끄집어내 볼모로 잡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지 않고 얌전하게 굴며 그의 특기인 순종을 피력할 뿐이다.

“네.”

카밀은 고요했다.

“…….”

“말해요, 록시.”

카밀이 고요하기 때문에 록시아스는 흐트러졌다. 록시아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숙이는지도 모르게.

“록시아스.”

록시, 록시, 록시아스.

머리맡에서 자신의 이름이 세 번 반복되어 울린 후에야 록시아스는 고개를 되돌려 카밀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고통스러울 텐데 괜찮겠냐는 질문에 할 수 있는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어 보라고 대답했다. 그에 휴고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다.

록시아스는 물리적인 접촉 없이도 제 만면을 꿰뚫는 카밀의 눈빛을 뒤집어쓰며, 생각했다. 본래 계획대로 카밀의 손에 목숨을 빼앗긴다면 그 어떤 방법보다 고통스러울 거라고.

다른 이는 자신을 한계로 내몰지 못한다. 그러나 카밀은 가능하다.

뒤늦은 깨달음을 은폐한 록시아스는 평이한 음성으로 지시했다.

“죽지 마.”

카밀에게 하는 마지막 명령이었다.

“내가 죽어도 넌 죽지 마.”

카밀이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한다는 뜻일까, 싫다는 뜻일까.

“네가 해야 할 새로운 일을 찾아.”

언제나 카밀에게 따뜻하지 못했다. 그러기를 다행이었다. 내내 차갑게 굴었으니 마지막까지 매몰찰 수 있다… 가슴이 찢긴다. 카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카밀의 속눈썹이 낮은 위치로 떨어지는 순간순간마다 뱃속이 울렁거렸다. 눈자위가 딱딱하게 굳는다. 낯설고 불쾌하며 끔찍한 감정이었다. 록시아스는 처음 느끼는 감각을 견디려 치아를 악다물었다.

“록시.”

반대로 카밀은 입술을 열었다.

“지겹겠지만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

“정말, 죽고 싶어요?”

앞으로 사용되지 않을 록시아스의 송곳니는 마지막으로 제 아랫입술을 물어 찢는 데 쓰였다. 핏방울 맺힌 입술이 답했다.

“…응.”

“하….”

기다란 한숨이 록시아스를 공격했다.

“그래요, 알겠어요.”

카밀에게 모질고 싶은 록시아스의 심정만큼 두 사람은 떨어져 있었다. 몇 걸음.

“슬플 거예요.”

그 거리를 카밀이 좁혀 왔다.

“슬픔은 남겨진 사람 몫이니까.”

록시아스는 뒷걸음치지도 못했다.

“그치만, 록시아스….”

카밀의 맥박과 음성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

“슬픔은 오래가지 않을 거예요. 기억은 짧고 시간은 기니까요.”

목소리가 코앞에서 전해질 만큼 가까워졌다.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록시아스의 이마에 카밀이 입을 맞췄다.

“그게 당신의 행운이고 기적이에요.”

그런데.

“나는 받지 못한….”

발부리를 향한 시야에 들어서 있었던 카밀의 발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숨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었던 음성이 아주 빠르게 멀어졌다.

카밀이 지나친 궤도를 따라 급히 몸을 돌린 록시아스가 외쳤다.

“카밀!”

뻔하지. 이럴 줄 알았다.

휴고는 나는 듯 재빠르게 접근해 오는 카밀을 보며 미소 지었다.

주인의 죽음을 보고만 있는 개가 세상 어디에 있나.

“그만!”

사색이 된 록시아스는 또다시 외치며 튀어 올랐다.

말려야 한다. 카밀을 말리는 것이 아니다. 휴고를 말려야 했다. 흡혈귀가 된 지 고작 일 년도 안 된 카밀은 휴고에게 승산이 없었다. 덤벼드는 카밀을 두고 보며 미소 짓는 휴고의 여유로움이 그 증거였다.

휴고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말릴 수 있다. 휴고가 손끝으로 그 조악한 불꽃을 피우기 전에….

그러나 휴고에게 먼저 다다른 쪽은 카밀이었다. 정확히는 휴고가 카밀에게 뛰어간 것이다.

“하하! 멍청한 놈.”

휴고는 손바닥으로 불덩이를 만들며 호쾌하게 웃었다.

예뻐하기만 하고 제대로 가르치지는 않았나 보군.

안이한 록시아스와 어리석은 카밀을 실컷 비웃으며 불덩이에 형형한 빛을 더했다.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로 갈퀴 같은 불꽃들이 활활 타올랐고, 휴고는 그것을 카밀을 향해 쏟아 냈다.

그와 동시에 카밀이 휴고의 목에 팔을 둘렀다. 푸른 불길이 카밀의 상체로 옮겨붙었다. 록시아스가 소리를 질렀다.

“카밀!”

록시아스는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만큼 굼뜨지 않았다. 휴고의 머리채와 카밀의 팔뚝을 손쉽게 붙잡았다. 하하! 휴고는 록시아스에게 들으라는 듯이 더욱 요란하게 웃었다. 카밀은 고요했다.

해칠 각오를 다졌던 자와 해치는 자, 말리는 자. 세 흡혈귀가 실타래처럼 무차별적으로 얽혔다.

록시아스는 휴고에게서 떨어트리기 위해 카밀의 팔을 당겼다.

이상했다.

불길함이 목을 조였다.

당기는 힘보다 버티는 힘이 셌다. 카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래, 카밀은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강인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그의 강인함은 자신 앞에 서면 무력해야 했다.

최초의 흡혈귀가 자신의 절대적 역량을 의심하던 찰나, 텅! 둔한 소음이 울렸다.

내내 느긋한 얼굴이던 휴고가 눈을 크게 벌려 떴다. 그의 등에 부닥쳐 덜덜거리며 진동하는 것은.

“아아, 씨팔.”

유리였다. 벽에 난 유리란, 창이겠다.

오전이었으나 해가 뜨고도 남았을 시각이었다.

유리가 깨지기라도 하면, 들이닥치는 바람에 암막이 휘날릴 것이다. 햇살이 침범할 테고, 빛에도 끄떡없는 록시아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까만 재로 변할 것이다.

“영 백치인 줄 알았더니.”

창조자의 개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을 없앨 셈이었다.

이윽고 휴고는 뒤늦게, 괴이함을 감지했다.

“이 새끼….”

왜 아직도 살아 있지?

새파란 화마에 휩싸인 카밀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휴고를 응시했다.

스스로 내뿜은 푸른빛을 반사하는 휴고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요동치는 눈알이 자신을 확실히 비추고 있음을 확인한 카밀은, 입을 벌렸다. 록시아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말을 입 모양으로 만들어 휴고에게 전했다.

‘안녕.’

삶을 단단히 쥐고 있을 때의 죽음은 추상적이다.

삶이 작별을 고하는 최후의 순간을 맞이해서야 죽음은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낸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카밀을 떨치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휴고는 자신의 종말을 직감했다. 등이 다시금 유리창에 갖다 박혔다. 이번에는 텅, 처럼 둔탁한 소리가 아니라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창문이 깨졌다.

극단적인 국면이 세 흡혈귀의 뇌리에 아주 천천히, 잔인하도록 느긋하게… 박혔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휘이잉, 바람이 들이친다. 휘몰아친다. 휴고의 금발과 그보다 샛노란 금발, 그리고 새까만 흑발이 흩날렸다. 펄럭, 두 목숨을 보장하던 암막이 천장으로 휘날렸다.

“안 돼!”

록시아스는 있는 힘껏 카밀을 당겼다. 카밀을 당겼다. 당기고 또 당겼다. 그러나 카밀은 당겨지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당겨지지 않는 거야. 나한테로 와.

“카밀!”

휴고는 그만 놓고 내 품으로 들어와.

“제발….”

햇살이 공기를 데우며 스며 들어온다. 흩날리는 금빛 머리칼이 반짝거렸다. 창백한 피부는 온온한 색채를 덧입는다. 흑발만이 여전했다.

휴고는 카밀의 목을 틀어쥐었다. 살갗에 손톱이 박힐 만큼 세게.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같이 죽어 주마.

홀로 무사할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창조자는 꽤 괴로워 보였다. 슬퍼 보였다. 록시아스의 저런 얼굴은 처음 본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 하하…. 실없이 웃음이 났다. 죽여서 복수하려고 했더니, 과연…. 록시아스에게 더없이 끔찍한 형벌이란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 개의 죽음이었다.

흩날리는 금발이 까맣게 탄다. 온온한 색채를 덧입은 피부도 까맣게 탄다. 버석하게 마른다. 조각조각 갈라진다. 알알이 부서진다. 잘게 부스러진다. 휘이잉… 차디찬 삭풍이 나부낀다. 펄럭… 암막이 너울거린다. 새카만 재가 공기처럼 동동 떠다닌다. 바람을 따라 모양을 이루며 날아간다. 머지않아 회색 하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니야….”

록시아스는 빈손을 보았다. 노오란 햇빛이 손바닥에 내려앉아 있을 뿐이다. 얼굴을 번쩍 들어 시선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낱낱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있어야 할 형상은 없다.

“아니야…!”

아니라고 믿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뺐다. 아래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 정원이, 위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흐린 하늘이 공허하게만 뚫려 있었다. 없었다.

“아냐, 아니야.”

록시아스의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록시아스가 숨 쉬는 공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흑발만이 여전했다.

“아니, 아니라고.”

아니라고 되뇌어도, 없었다.

“왜….”

고요했다.

“아니, 아닌데… 왜…?”

어디에도 없는 카밀은 소리조차 남기지 않았다.

카밀의 심장 박동이 들리지 않는다.

‘슬플 거예요. 슬픔은 남겨진 사람 몫이니까.’

록시아스만이 남겨졌다.

***

역할을 잃은 암막은 숫제 나부꼈으나 이제는 밤이었다. 칼바람은 더욱 날카롭게 휘몰아쳤으며, 깨진 유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실외와 실내를 넘나들던 햇살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달빛이 어스레하게 드리우는 창가 앞. 록시아스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더듬는 중이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으로 전부 느낄 수 있었다.

촉각. 얇고 숱 많은 금빛 머리칼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하얗고 매끄러운 살결이 지문으로 읽혔다. 동동 울리는 박동이 손아귀에 잡혔다.

후각. 꽃내음보다 향기로운 피 냄새가 콧잔등에 묻었다. 닦고 또 닦아도 닦이지 않는다. 더불어 자신에게서는 감지하지 못했으나 카밀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온 집 안에 가득 차던 비누 냄새가 비강 안을 떠돌았다.

청각. 록시, 록시, 록시아스, 하며 자신을 부르는 음성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반복되고 반복되며 자꾸만 허공을 기웃거리게 했다. 술래잡기하는 듯이 모습은 내보이지 않고 계속 부르기만 했다.

미각. 다른 피는 마시지 못하도록 만든 카밀의 피 맛이 혓바닥에 박제되었다. 단맛이 입 안을 끊이지 않고 감돌았다. 넘어가는 것이 없어도 삼키고 삼키니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앞의 모든 감각이 어우러져 통각이 되어 록시아스를 찌르고 가격했다.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데 피부가 너덜너덜해졌다. 놀란 심장이 빠듯하게 조여 오고 가슴이 쓰라렸다. 원래부터 냉랭한 몸을 가진 주제에 한파를 겪는 듯 식은땀이 흘렀다. 물 한 방울 없이 사막을 횡단한 미아처럼 어질어질했다. 희망이 멀다.

‘록시.’

하지만 자신을 괴롭히는 모진 현상은 환상이다. 괴로울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예고 없이 벌어진 악몽은 단지 꿈이었다. 그래. 나는 꿈을 꾸는 거야. 잠을 자 본 적도 없는 록시아스는 그렇게 믿었다. 너무 지쳤어. 그래서 이제 잠을 잘 수 있는 거야. 오랜 잠에 빠진 거야.

꿈결 같은 카밀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그렇지만 록시는 낮에 돌아다녔잖아요? 흡혈귀는 낮에 밖으로 나가면… 죽는데.’

맞아. 똑똑한 카밀은 가르치기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카밀이 낮에, 바깥으로, 몸을 던졌을 리 없다.

‘버리면 죽어 버릴 거예요.’

록시아스는 아직 카밀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려는 생각 따위 장난으로도 해 본 적 없었다.

‘아니, 아니에요. 록시. 죄송해요.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 버릴 거면 죽여 주세요.’

그러니까 카밀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카밀아. 서러워?’

분명 서러운 게 있어서 나를 놀리려고, 나에게 복수하려고 잠깐 숨었을 뿐이다. 창문을 깨고 휴고를 바깥으로 내던진 뒤 그는 어딘가에 몸을 숨겼을 터였다.

‘네, 서러워요.’

‘그러지 마.’

‘…….’

‘슬픔은 아무 도움도 안 돼.’

슬픔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자신이 뱉었던 말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유익하지 않은 슬픔을 떨칠 수가 없었다. 카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카밀은 무사하다고 세뇌하면서도 비통에 찌들었다.

‘머리 말려 주는 거 오늘로 마지막이야. 흡혈귀는 감기에 안 걸리니까, 내일부터는 안 말려도 돼.’

카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장맛비처럼 멈추지 않고 내렸다.

‘아… 그러네요. 록시, 근데 여기가 덜 마른 것 같아요.’

‘어디?’

‘여기요.’

돌아오면 다시 머리를 말려 줄게. 록시아스는 상대 없는 허공에 대고 약속했다.

‘근데 너 치약 묻었어.’

‘이제 됐어요?’

‘아니. 아직도 묻었어.’

‘아직도요?’

‘응,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록시가 닦아 주면 안 될까요?’

치약을 묻히고, 역겨운 쓰레기에 절어도 닦아 줄 수 있어. 더럽다고 타박하지 않을게.

처음부터 카밀은 더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는 늘 깨끗했다. 덕분에 그의 티끌 한 점 없는 마음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흡혈귀는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아요?’

‘안 피곤해.’

‘…되게 좋다. 원래 잘 시간에도 록시를 볼 수 있겠네요. 종일.’

그런데 왜 나는 못 본 체, 안 본 체했을까.

그토록 이기적으로 굴어 놓고, 정작 카밀에게는 똑바로 주시하기를 강요했다.

‘눈 제대로 뜨고 봐. 네 삶의 마지막 낮이니까.’

자신의 어리석은 이기심과 미련한 고집을 똑똑히 보게 했다.

‘록시. 저는 계속, 해가 질 때만 기다렸어요. 달이 뜰 때만… 록시와 보내게 될 새벽만을 기다렸어요.’

착해 빠진 카밀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더불어 계속 기다렸다고 했다. 그와 보낼 새벽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카밀과 많은 새벽을 보냈다. 여명조차 존재하지 않는 암흑 속에서도 카밀은 어두워지지 않고 항상 빛났다. 반짝거리며 자신의 시선을 붙잡고, 자신의 어둑한 시야를 찬란하게 비췄다.

하지만 록시아스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지 않았다.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지. 게으름과 안이함의 대가로 벌을 받았다.

‘내 피를, 어디로 마시고 싶어?’

‘입술이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가 나빴더라도…. 사실은 카밀에게 최선을 다했다.

‘선물이야, 소중한 카밀아.’

‘고마워요, 록시.’

누구에게도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삐뚜름한 애정이라도 누구에게나 주던 것은 아니다. 카밀에게만 주었다. 수많은 흡혈귀를 탄생시켰어도 아무에게도 축언해 준 적 없다. 그들의 새 생명을 기뻐해 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움받았고 저주받았다.

카밀 네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면 안 되잖아. 이렇게 벌을 주면 안 된다. 이건 몹쓸 장난으로 여기지도 못한다. 그러기에는 너무 아프다.

‘록시가 저를 만들었으니까, 저는 다 록시 거예요.’

내가 만든 넌 내 건데.

왜 허락도 없이 사라졌어?

어디로 갔어.

‘마음대로 가지세요.’

당장 돌아와.

‘록시가 괴로우면 저도 힘들어요.’

록시아스는 몸을 구부려 바닥에 누웠다. 앉을 기력마저 상실감에 빼앗겼다.

‘아프든 말든 그냥 상처 주면 되잖아요, 사랑하지도 않는데 무슨 상관이야.’

상실…. 자신이 카밀에게 주려고 했던 것, 기어이 주었던 것이다. 카밀은 어떻게 견뎠을까.

하물며 상실뿐이던가.

‘착각이에요. 소중하면 저한테 이러지 말아야 하잖아요….’

외면과 방치로 카밀을 농락했다. 소중하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

록시아스는 눈을 감았다. 뜨든 감든 별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눈물로 눈앞이 흐렸다.

‘그래도 괜찮아요. 록시가 나쁜 게 아니에요. 록시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제가 나빠요.’

카밀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나빴다. 나쁘다는 말이 후할 만큼 악독했다.

‘그냥 상처 주세요.’

그냥 상처받아. 넌 그래야 해.

록시아스는 자신을 비난했다.

카밀이 겪은 고통의 곱절만큼 아파해. 카밀이 흘린 눈물만큼 울어. 그래도 다 갚을 수 없을 테니까.

죽지 못하니 영원히 후회하겠지.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나 죽을 자격도 없다.

‘사랑해요.’

카밀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나를 사랑하는 카밀이 날 용서해 주지 않을까, 이렇게 후회하는 나에게 한 번쯤은 기회를 주려고 돌아오지 않을까?

하지만 빛은 한 번 빼앗아 간 동족을 절대로 돌려주지 않는다.

…이게 수도사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지옥인가 보다.

***

해가 떴다. 역시나 태양은 카밀을 돌려주지 않았다. 머리맡과 등허리로 쏟아지는 뜨끈한 빛살이 그를 힐책했다.

울고불고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침이면 나타나는 훈훈한 바람이 그를 조소했다.

카밀은 너 때문에 죽었잖아. 네가 그런다고 잘못을 갚지는 못해. 죽음으로 갚을 수도 없으면서, 왜 태어났어?

록시아스는 송곳 같은 힐난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게… 난 왜 태어났지.

자신에게 악마며 괴물이라고 악담하던 자들을 이제야 이해한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목숨은 재앙이었다. 홀로 남기 쉬운 영생은 저주였다. 확정된 불행이었다.

날 왜, 태어나게 했어!

수 번 들었던 원망을 되뇌었다.

“죽게 해 줘….”

그러나 다른 흡혈귀들처럼, 록시아스는 직접 원망할 대상을 가지지 못했다. 온통 새까만 숲에서 눈을 뜬 기억만 있을 뿐, 자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지 못했다.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죽여 줘.”

그래서 아무도 탓할 수 없다.

“만나게 해 줘….”

애원할 대상조차 록시아스에게는 선사되지 않았다.

“나랑 카밀을 바꿔… 그 애는 죽으면 안 돼….”

떼를 써도 들어줄 상대가 없으니 혼잣말이었다.

“제발, 내가 잘못했으니까, 카밀을 살려 줘.”

록시아스는 그렇게 끊임없이 고독에게 애걸했다. 침묵에게 부탁했다.

“무엇이든 할게, 어떤 벌이든 받을 거야….”

소원이 간절해질수록 그는 비참해졌다.

“제발.”

후회는 협상해 주지 않았다.

***

록시아스 폰 슈바르첸베어그는 XXXX년 전에 탄생했다.

그의 출생은 보통 인간들과는 달랐다. 아버지의 씨를 빌리지 않았고, 어머니의 배 속에서 잉태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존재였다.

첫 기억은 검은 숲에서 시작됐고….

기억의 시발점이 곧 존재의 시발점은 아니었다.

허허벌판에 별안간 개화한 들꽃일지라도 흙 아래 뿌리를 두고 있으며, 뿌리는 씨앗에서 움튼다. 그와 같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록시아스의 기원은 분명히 실재했다. 검은 땅 밑에.

***

‘카밀아. 사랑이 뭐야?’

이제는 묻지 않아도 된다.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이요?’

‘그래, 사랑.’

‘왜요, 사랑이 왜요, 록시?’

‘날 사랑한다며.’

‘네, 록시. 사랑해요.’

‘그럼 너는 사랑이 뭔지 아는 거잖아.’

‘말해 봐, 사랑이 뭔지. 네가 배운 사랑은 뭐야?’

‘록시아스요.’

하지만 자신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물어 줄 상대가 떠났다. 사랑 고백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같이 죽어요, 록시.’

나도 그러고 싶은데, 살을 태우고 목을 그어도 너를 따라갈 수 없다.

‘전부 무의미해서 죽고 싶다면… 지금 난 록시한테 아무런 의미도 아닌 거죠.’

이제는 의미가 생긴 탓에 죽고 싶어졌다.

카밀아, 너는 내게 어떤 의미냐면….

마음을 전하려면 죽어야만 한다. 천국에서 너를 만나야 한다. 하지만 지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죄를 너무 많이 지었다.

‘내가 너무 기대했나 봐요. 맞다, 록시가 기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들어서 이렇게 됐나 보다….’

네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됐다….

‘그래도 끝까지 함께하면 조금은 생기겠지. 의미가….’

끝까지 함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남았어요? 우리한테.’

‘우리… 왜 우리야.’

‘같이 죽기로 했으니까요.’

너의 시간을 모조리 빼앗아서 미안해.

‘마음 같아서는, 지금요. 록시 앞에서 죽어 버리고 싶어.’

‘왜 그따위 짓을 하고 싶은, 데?’

‘록시가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서요.’

카밀은 옳았고 성공했다. 록시아스는 이미 죽은 카밀을 영영 잊지 못할 테니까.

‘사랑은 바라지도 않아.’

사랑을 포기하게 해서 미안해.

‘나를 데려와서 이만큼 미치게 만들어 놨으면, 그 정도 책임감은 느껴도 되잖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록시아스.’

망가진 마음을 이따위 사죄로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널 어떻게, 기억하면 되는데….’

‘왜 아무것도 몰라요? 록시아스는.’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한 번만 먼저 사랑해 주세요… 내가 부탁 안 해도, 먼저 안 해도….’

도리어 이제는 한 번만 내 사랑을 받아 달라고 부탁해야 했지만, 거절조차 돌려받지 못하게 됐다.

카밀이 사라진 지 이틀이 지날 동안 록시아스는 자신의 핏줄을 긋고 긋고 또 그었다. 바닥을 채운 피 웅덩이 위로 떨어진 살점들이 나뒹굴었다.

‘혼내 달라는 말이랑 사랑해 달라는 말은 같아요.’

록시아스는 깨달은 사랑만큼 자학했다.

‘그게 어떻게 같아.’

사랑과 학대는 같았다.

‘록시가 해 주는 건 뭐든 좋아서, 록시가 뭘 하든 나한텐 다 같아요.’

막 목을 그은 록시아스는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이번에는 손이 닿는 대로 발목을 그었다. 그다음에는….

‘심장을 꺼내서 보여 줄게요.’

심장을 꺼내서.

‘록시가 내 신이에요.’

카밀에게 바치자.

카밀에게 순종을 약속했다.

‘록시, 울어 줘요, 더…. 나를 위해 울어 줘요….’

마음으로 바칠 수 있는 것은 전부 꺼내 카밀에게 선물하자.

‘슬플 거예요. 슬픔은 남겨진 사람 몫이니까.’

그것이 남겨진 나의 몫이다.

‘그치만, 록시아스….’

내가 모르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알며, 어긋난 내 밑에서 자라면서도 언제나 옳았던 카밀이었다.

‘슬픔은 오래가지 않을 거예요. 기억은 짧고 시간은 기니까요.’

하지만 그 말만은 틀렸다.

기억은 시간과 함께 영속한다.

살아 있는 한 카밀을 잊지 못할 것이고, 그의 시간은 영원했다.

‘그게 당신의 행운이고 기적이에요.’

그게 그의 불운이고 비극이었다.

‘나는 받지 못한….’

카밀아, 네가 받지 못한 것들 전부를 되돌려 줄게.

상처가 낫기 전에 그 위로 또 다른 상처를 새기며, 록시아스는 중얼거렸다. 카밀이 받지 못한 것들을 나열했다. 그것들은 감정이기도 했고 추억이기도 했으며 물질이기도 했다. 카밀에게 주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 전부를 카밀에게 쥐여 주자.

스스로 벌을 가하며 몸부림치는 록시아스의 그림자가 피 웅덩이와 섞여 일렁거렸다. 깨진 창문 앞에서부터 샘솟은 핏물이 문지방을 넘었다. 록시아스가 흘린 피는 이윽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카밀과의 나날을 되짚는 행위처럼, 카밀의 발자취를 낱낱이 따르는 것처럼 바닥을 기었다. 뚝, 뚝…. 1층으로 향하는 계단, 첫 번째 층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피보다 눈물을 더 많이 흘린 록시아스는 그대로 지옥에 있었다.

뚝, 뚝… 떨어지던 핏방울이 핏줄기로 변해 층계를 미끄러졌다.

피와 눈물을 엇비슷하게 쏟아 낸 록시아스는 산 자라면 걸음 할 수 없는 악몽 속에 있었다. 여전히.

카밀이 몸을 던진 방을 제외하고는 집 안 모든 창이 암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날 밤은 달빛이 유독 어두웠으나, 어차피 암흑 일색인 장소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제는 1층 바닥 구석구석까지 핏물이 고여 있었다. 얼핏 까만 카펫이 깔린 듯도 보였다.

“…….”

하지만 발길이 닿자 찰랑거리는 웅덩이에 카펫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온 바닥을 채운 액체로 인해 걸음걸음마다 신발과 바짓단이 얼룩졌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1층을 지난 걸음은 곧 뜀박질로 바뀌었다. 피바다가 철퍽거리느라 소란스러웠다.

“카밀… 카밀아.”

록시아스는 카밀을 찾고 있었다. 애타게 부르다 보면 간혹 카밀이 나타났다. 만질 수도 없고 아무런 말도 들려주지 않았지만 보이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환각이라도 감사했다.

“아….”

오늘은 몇 번이나 카밀을 불렀을까, 알 수 없지만.

“카밀아.”

드디어 카밀이 와 주었다.

록시아스는 방금 분지른 발목으로 절룩거리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스스로 베고 꺾어 너덜너덜한 팔을 뻗었다.

“어서 와.”

만남은 항상 짧았다. 카밀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니 시간을 허비해서야 안 됐다.

전에는 카밀에게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그보다 나중에는 가지 말라고 붙잡으려다가 카밀이 떠나 버려서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사랑한다고는 고백했다.

이번에는 매달리지 말고, 얌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보고 싶었다고도 말할 거다. 그리고 심장을 선물할 거다. 아무래도 머리카락은 너무 사소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을 주면 카밀이 조금이나마 더 오래 머물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카밀은 자신의 피를 좋아했고… 그러니까 심장도 좋아해 줄 거다….

“사랑해.”

록시아스는 고개를 들어 올려 카밀에게 눈을 맞췄다.

“보고 싶었어.”

속마음을 싹싹 긁어 털어놓았다.

“후회해.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금세 회복하는 불사의 몸은 잠시라도 벌을 주지 않으면 피가 멎었다. 이래서야 그 없이도 윤택하게 지낸다고 오해를 받을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다행으로 눈물은 계속 흘렀다. 이 눈물로, 카밀이 제 마음을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하….”

카밀이 발을 움직였다. 떠나려는 걸까.

“가지 마, 카밀아.”

마음이 다급해진 록시아스는 가슴에 손톱을 꽂아 넣으며 애원했다.

“조금만 더 있어 줘, 기다려… 선물을 주고 싶어.”

눈시울이 흠뻑 젖은 탓에 카밀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기 힘들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금방 꺼내니까, 조금만 참아 줘….”

카밀이 기뻐하는지 화를 내는지 알아야 하는데.

“심장을 줄게.”

가슴 안으로 손끝을 밀어 넣었다.

“아.”

아프지 않다. 다만… 카밀이 선물을 받지 않고 떠날까 봐 조급할 뿐이었다. 록시아스는 더 빨리 가슴팍을 가르기 위해 다른 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

만질 수 없는 카밀, 매달리려고 하니 떠나 버렸던 카밀이, 록시아스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만해요, 록시.”

아무런 말도 들려주지 않던 카밀이 목소리를….

기적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확신했었다. 록시아스는 손목으로 전해지는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부정했다. 이건 전보다 생생한 환상이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닿을 수도 있고 말도 하는 환상은 물리적인 힘까지 썼다.

카밀에게 잡아당겨진 손이 가슴팍에서 떨어져 나갔다. 손끝 모양대로 난 다섯 개의 구멍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졌다.

“록시가 이렇게… 미안해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안 그랬어.”

물론 눈앞의 카밀이 진짜이길 바라지만, 카밀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만. 그러기에는 맥박이 들리지 않았다. 실제라면 카밀의 심장 박동이 방 안을 요란하게 채웠을 터였다.

“울지 마세요, 록시, 내가 왔어요. 카밀이에요. 록시가 만든, 록시를 사랑하는 카밀이에요. 그리고, 그런데….”

게다가 그의 평생 동안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내리 상처만 주었으며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던지도록 했으니, 진짜 카밀은 지금처럼 자신에게 서글픈 목소리로 사과할 리 없을 테고, 이렇게 눈물을 닦아 주지도 않을 거고, 저렇게 서글프게 울지도 않을 것이다.

“심장은 내가 주기로 했잖아요.”

그래, 정말 환영이 맞았다.

“받아… 주세요.”

카밀이 내민 손에 심장이 들려 있었다.

록시아스는 이미 처참한 얼굴을 더욱 와락 일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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