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Bite By Bite
틱, 탁. 틱, 탁…. 시곗바늘 소리가 규칙적으로 귓가를 간지럽혔다.
쿵, 쿵, 쿵, 쿵…. 심장 박동 소리가 규칙적으로 귀청을 울려 댔다.
그때, 카밀과 록시아스 둘 다 책을 펼친 채였으나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상대의 시선이 느껴지면 책에 정면을 박고 독서에 열중하는 체했다. 그러다가 상대의 시선이 거두어진 일순간, 활자에서 급히 거둔 눈길을 상대를 향해 옮겼다. 그러면 상대는 책을 읽는 척했다.
카밀이 상대를 감상할 차례였다. 나열된 문장을 훑던 때는 지루함으로 인해 버석했던 눈빛이 록시아스를 향하자마자 반짝거렸다.
암막 커튼을 등지고 앉은 록시아스를 비추는 빛이란 서재를 은은하게 밝히는 주황빛 조명뿐이었다. 이전에는 인간인 카밀의 시력을 위하여 밝디밝은 백색 조명 일색이었으나, 카밀이 흡혈귀가 된 후로는 록시아스의 본래 취향에 따라 사물을 어렴풋이만 비추는 어둑한 주황빛으로 바뀌었다.
푸른빛에 가까운 창백한 피부가 조명 탓에 온온한 색을 띠었다. 모난 곳 없는 이목구비를 따라 따뜻한 색채의 선이 덧그려져 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부분에는 응달이 깊게 고였다. 매사에 무심한 성정이 드러나는 인상을 결정짓는 가지런한 눈썹 아래, 그리고 높게 건설된 콧대 밑 부근이 가장 어두웠다.
록시아스의 뺨을 덮은 그림자는 간혹 움직이기도 했다. 새카맣고 촘촘한 속눈썹을 매단 눈이 깜빡거릴 때였다. 혹은 다듬을 시기가 온 앞머리를 짜증스러운 손길로 넘길 때라든가.
흰 종이에 검은 목탄으로 그린 듯한 록시아스를 강렬하게 물들이는 붉은 입술은 숫제 과묵하게 다물려 있었다. 과묵이란 저 입술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았다. 카밀은 잔뜩 벌어진 입술을 상상, 아니, 상기했다. 대화하지 않는데도 열린 채로 야릇한 숨소리를 흘리는 입술이었다.
카밀의 손가락에 걸린 종잇장이 와락, 구겨졌다.
록시아스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거둘 나위를 카밀에게 주듯이 아주 느릿하게…. 카밀은 눈길을 책으로 돌렸다. 이어 따가운 눈빛에 해부되기 시작했다.
카밀을 관찰하듯 훑어보는 족족 록시아스는 미간을 좁혔다. 시선과 연결된 대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오래 옆에 두고 보아야 하니 이왕이면 예쁜 편이 좋아서, 예쁜 카밀을 선택했다. 그리고 예쁜 아이였던 카밀은 아름다운 남성으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소년티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저렇게 눈을 내리깔고 책에 집중한 모습은 여태 순수함을 간직한 소년 같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고는 허공을 응시할 때면, 첫사랑을 상기하며 마음 졸이는 덜 여문 청년 같아졌다. 뭇 통속 소설에 등장하는.
이외 시간에는 모조리 성인 남성 같았다. 풋풋함을 입은 것은 티끌 한 점 없는 피부, 그뿐이었다. 어쩌면, 카밀은 언제나 아이였고 소년이었으며 남자였지만 록시아스 자신이 다르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카밀과 관계한 뒤부터, 아니, 카밀의 피를 입에 댄 후부터…? 누가 변화했는지 모르니, 언제부터 변화했는지 또한 불투명했다.
카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서른 발자국 남짓한 거리가 있었으나 코앞에 둔 듯 세밀한 관찰이 가능했다. 흡혈귀라서 다행이다, 라고 록시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다.
영영 본래의 푸른색으로 돌아가지 못할 붉은색 눈동자는 아이라면 띠지 못할 빛으로 반짝거렸다. 단순하지 않은 감정과 무거운 고뇌가 엉키며 일어난 불꽃 탓에 반짝거렸다. 웃는 얼굴일 때 가장 예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무표정하거나 미간을 좁힌 채 보내는 이유가 바로 그의 눈과 머릿속을 태우는 그 감정과 고뇌이리라.
그 감정과 고뇌의 뿌리는 자신, 록시아스였다.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집요하게 들러붙는 제 시선을 억지로 끌어내렸다. 흰 종이와 검은 글씨에 눈길을 꾸역꾸역 갖다 붙였다. 한데 정신은 곧장 다시, 또다시 카밀에게로 흐르고 카밀로 인해 작동했다. 화가 났다. 사흘 전 일 때문이다. 카밀과 섹스한 날이었다.
섹스한 일 자체에는 후회하지 않는다. 아쉬운 감상도 없었다. 불쾌하지도 않다. 도리어 편안해졌고, 만족스러웠다. 섹스할 때, 섹스가 끝난 직후까지는… 완벽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한데 문제는, 지금 록시아스를 하여금 분노케 하는 것은, 섹스 이후 카밀이 지껄인 말이었다.
‘사랑해요.’
이 말이 아니다.
‘죽는 날까지.’
이 말도 아니다.
‘…누가 죽는 날까진데?’
‘영원히, 라는 의미였어요.’
록시아스는 책장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어 대며, 카밀이 고백이랍시고 꺼냈던 반기叛旗를 곱씹었다.
‘우리 둘 다 안 죽을 거니까.’
카밀은 감히 그렇게 지껄였다!
그 불쾌한 문장은 카밀이 여태껏 뱉어 낸 어떠한 불응보다도 반항적이며 순리에 어긋나 있었다. 그를 어째서 거두어 키웠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 록시아스 자신의 계획을 이행하지 않고 죄다 허물겠다는 의미였다.
당황스럽지 그지없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화도 내지 못했다. 화낼 기력이 없었거니와, 그 말도 안 되는 말의 뜻을 곧장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간혹 속을 썩이기야 했으나 거반 순순하게 굴던 카밀이 그따위 생각을 품고 있다니!
록시아스는 후회했다. 그때 곧바로 화를 내야 했다. 혼쭐을 내 주어야 했다. 무슨 말을 하느냐며 그 입술을 꼬집어 줘야 했다. 기특하지 못한 생각을 품은 머리통을 갈겨 줘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시기를 놓친 분노는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다가 이내 화석이 되었다. 너무나 묵직하여 쉽사리 꺼내기 어려웠다. 알아서 증발하거나 용해되길 바랐다. 사흘 동안 침묵하며.
그러나 똘똘 뭉친 채 굳어 버린 화석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었다. 답답했다.
틱, 탁. 틱, 탁…. 시곗바늘 소리가 규칙적으로 귓가를 간지럽혔다.
쿵, 쿵, 쿵, 쿵…. 심장 박동 소리가 규칙적으로 귀청을 울려 댔다.
카밀과 록시아스 둘 다 책을 펼친 채였으나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때였다. 이윽고 탁, 하고 책이 덮였다.
읽는 체만 하던 책을 후련히 덮은 카밀이 말했다. 이번에 카밀은 록시아스를 훔쳐보지 않았다. 그를 향해 몸까지 돌려 똑바로 응시했다.
“록시, 책 더 읽을 거예요?”
록시아스는 대답을 하지 않고, 카밀에게 보란 듯이 그리고 들으라는 듯이 책장을 거칠게 닫았다. 탁. 그리고 말문을 열었다.
“카밀아.”
충동적으로.
“이리로 와 봐.”
카밀을 불렀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자, 카밀이 코앞에 있었다.
“왔어요, 록시.”
높게 걸린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든 록시아스는, 카밀이 듣기에 별안간 이상한 명령을 했다.
“나를 때려.”
“…네?”
“나를 때리라고.”
“록시를 어떻게 때려요?”
하하. 록시아스는 카밀이 우스운 말이라도 한 양 실소했다.
“죽여야 할 건데, 때리지도 못하면 어떡해.”
카밀은 눈꼬리를 떨어트렸다. 죽여야 한다. 록시아스를 향한 사형 선고가 마치 자신을 향한 공격처럼 께름칙하며 아팠다.
“…우리 둘 다 안 죽을 거라고 했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제 마음대로요.”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누가 허락해 줬어.”
허락받은 적 없다. 카밀은 입술을 굳혔다.
둘 다 죽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 그 말에 당장 록시아스는 침묵하였으나, 언젠가는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했다. 한데 지독한 말로 쏘아붙이거나 체벌하리라 생각했다. 다짜고짜 그를 때리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욕과 폭력은 얼마든지 허용할 수 있었으나 록시아스에게 행해지는 경우는 용납 못 했다. 누구든, 자신조차 록시아스를 해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때리라고? 욕을 내뱉으라고 시키면 벙어리를 자처할 판에, 때리라고!
카밀은 록시아스를 숭배하기에 록시아스에게 반항했다. 성전을 욕보일 바에야 탈교를 택한 것이다.
“안 때릴래?”
“못 때려요.”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사랑 고백을 한 카밀에게 록시아스가 배신감을 느꼈듯이. 카밀은 사랑 고백을 했으므로 록시아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죽는 날까지 사랑한다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말했는데. 그런 나한테 그를 죽이라고, 때리라고 하면 안 되잖아. 죽이라고 시킬 거였으면… 나를 안지 말았어야지.
툭. 발치에서 소음이 났다. 록시아스가 무릎에 올려 둔 책을 던지듯 내려놓은 것이다.
“카밀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지 마.”
록시아스는 읊조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고개를 아프도록 치올려야 맞춰지던 눈 높이가 얼추 비등해졌다. 여전히 카밀의 눈이 높은 곳에 있기야 했으나….
아, 카밀은 정말 많이 컸다. 이렇게 자랐는데, 겨우 이만큼 키웠는데, 날 죽이지 않겠다고?
“내가, 쓰레기를 데리고 살아야겠어?”
쓸모없는 쓰레기. 가시 돋친 욕설에 카밀은 상처받지 않았다. 자신은, 쓰레기가 맞을지언정 쓸모없지는 않으니까.
“데리고 살아 주세요.”
“그럼 시키는 대로 해.”
“데리고 살아야 줘요, 록시, 제발….”
“부탁하기 전에 네 할 일부터 해야지.”
“배 안 고프려면.”
“뭐?”
도리어 자신은 록시아스에게 무척이나 유용한 존재였다.
“저를 버리면, 뭐 먹고 살 거예요?”
그의 허기를 만족하게 할 유일한 ‘먹잇감’이 저였으므로.
“제 피밖에 안 마시잖아요, 록시.”
‘귀한’ 카밀은 자신의 가치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주제 파악이 덜된 줄로 여겼더니.
“카밀아, 카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마가 뜨거웠다. 록시아스는 마른 얼굴을 닦은 후, 물었다.
“그럼 어디 지하실에 묶여서 평생 피만 빨리면서 살래?”
명백한 협박이었으나 카밀에게는 달콤한 제의였다. 카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상대의 고집에 단념했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린 록시아스가 한숨을 연달아 내뱉고는, 암막 커튼에 가린 창가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읊조렸다.
“네가 원하는 대로, 넌 밥이나 해. 날 죽일 애는 또.”
아직 록시아스가 말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카밀은 뒤로 이어질 말을 추측했다. 아주 정확히. 그 말이 완성되지 않길 바라면서 다급히 입술을 뗐다.
“록시.”
하지만 록시아스는 기어이, 말했다.
“찾으면 돼.”
다른 아이를 찾겠다고.
그에 카밀은 물었다.
“미쳤어요?”
원래 록시아스에게 하려던 말은 ‘다른 아이를 찾지 말아 주세요’였는데….
“아니, 아니….”
표정 위로 당황이 그대로 떠오른 카밀은 목소리를 떨다가 다급히 ‘원래 하려던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록시, 그게 아니라… 다른 애를 데리고 오지 말아 주세요….”
“넌 정도도 모르고 건방을 떨다가 그따위로 사과하더라, 꼭.”
조용조용히 읊조린 록시아스는 무표정했으나, 카밀은 이제 록시아스가 실지 무감하여 얼굴을 굳힐 때와 분노하여 인상이 뻣뻣해질 때를 구분했다.
“죄송해요,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게 네 진심이야. 맞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됐어.”
“록시.”
매정하게 어깨 옆을 지나치려던 록시아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허락을 받지 못했으나 다급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록시아스가 가 버리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야 혼나는 편이 나았다.
카밀을 향한 록시아스의 눈빛이 매서웠다. 카밀은 몇 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정말이지, 다른 아이를 데려온다는 말은 너무했다. 록시아스가 ‘네가 싫어’라고 했어도 이보다는 불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록시아스가 어떤 식으로 말했건 그에게 ‘미쳤어요?’ 따위를 지껄여서는 안 됐다. 개에게 상처를 입힌 주인과 주인을 물어 버린 개. 둘의 경우에는 개가 더 나빴다. 권력자의 횡포보다 수하자의 하극상이 더 부적절했다.
“어떤 벌이든 받을게요.”
손이 내쳐진 카밀은 재차 록시아스의 옷깃을 붙들었다.
“가지 마세요.”
“말도 안 듣는 네 옆에 있어 줘야 하는 이유가 뭔데.”
아.
카밀은 일순 눈을 질끈 감았다.
록시아스에게 버림받게 될까?
버림받지 않으려면 그를 죽일 준비를 하고, 그를 죽여야 했다.
그를 죽이거나, 그에게 버림받은 뒤 스스로 죽는 두 가지 비극적인 선택지가 카밀의 양손에 쥐어졌다. 쥐고자 한 적이 없다. 마음이 문드러졌다.
“록시가 없으면, 죽어요. 저….”
용서받기 위해 섣불리 뱉은 말이 아님을 안다. 록시아스는 이전 자신이 며칠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이 자살을 시도했던 카밀을 떠올렸다. 죽으라고 허락한 적도 없는데, 소중하게 대해 줬더니 함부로 목숨을 버리려고 했던 카밀….
“누가 없어진대.”
록시아스는 옷깃을 당기는 카밀의 손을 덮어 쥐었다.
“같이 있어.”
뭐가 그리 무섭지?
카밀은 떨고 있었다.
“달라지는 건 없어. 널 대신할 애가 생길 뿐이야.”
카밀의 진동이 더욱 거세졌다. 카밀은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뭐가 저렇게 서글프지? 그가 하기 싫다는 일을 누군가에게 대신 시키겠다는데. 난 없어지지도 않고, 그대로일 거라고 말했는데.
“카밀아, 왜 울어?”
이만큼 화가 난 적도 처음이라 당장 카밀을 내치고 싶다. 그런 심정을 꾹 참으며 봐줄 만큼 봐주고 있다. 왜 우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카밀은 그가 어째서 눈물을 쏟는지 설명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누굴 데려오면 죽일 거예요.”
필요 이상으로 예쁜 카밀은 우는 모습조차 지나치게 가련했다.
“록시 빼고 다 죽일 수 있어요. 죽어도 상관없어.”
그런 얼굴로 잔인한 결심을 선포한다.
“이 집에는 록시랑 나, 우리 둘만 있어야 해요.”
“그건 네 소원일 뿐이야.”
카밀이 독하게 굴수록 록시아스 또한 모질어졌다.
“망상이고.”
“…왜요? 대체 왜.”
록시아스가 모질어질수록 카밀은 우울해졌다.
“왜 그렇게 죽고 싶은데요?”
‘소중한 카밀아. 너는 나를 죽여야 해.’ 언제나 그렇게만 말했다. 어째서 죽어야 하는지 설명 들은 기억은 없다. 그리고 자신은 구태여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록시아스를 낱낱이 알고 싶었으나 그의 죽음에 관해서라면 백치를 자처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악몽을 입에 올리고 머릿속에 보관할 필요는 없으니까.
“알려 주세요. 왜 죽고 싶은지.”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 했다. 록시아스는 진심으로 죽기를 원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은 진심으로 록시아스 곁에서 영원하기를 바란다.
“이유를 알아야, 록시를 죽이고 나서….”
어긋난 태엽을 풀어야 한다. 불규칙한 초침에 그저 불안해만 할 때는 지났다. 록시아스의 시계는 벌써 몇 세기나 어긋난 채였다. 진즉 묻고, 들었어야 했다. 반대 방향으로 거스르는 시곗바늘을 그저 붙잡아 억지로 고정할 게 아니라, 바르게 돌아가도록 고쳤어야 했다. 너무… 늦지 않았길 빌었다.
“마음 편하게 따라 죽을 테니까.”
말을 마친 카밀은 입술을 물었다. 더는 입을 열지 않겠다는 것이다. 록시아스가 말문을 열 때까지.
이내 다행히도.
“진작 물어보지 그랬어. 카밀아… 나는.”
록시아스는 죽고자 하는 이유를 망설임 없이 밝혔다.
“지루해서 죽고 싶어.”
기나긴 역사를 관통하여 생성된 결단은 그토록 간략하게 설명되었다.
“다 지겹고, 무의미해서….”
***
흡혈귀로서 익혀야 할 상식은 이러했다. 첫째, 낮에는 외출하지 말고, 불을 멀리할 것. 둘째, 흡혈귀는 각기 타고난 능력이 있으므로 이를 개발할 것. 셋째, 이미 죽은 사냥감의 피는 섭취하지 말 것. 마지막으로, 넷째. 나, 록시아스에게 덤비지 말 것.
본래 사냥감이었던 것들은 종종 주제를 망각하여 건방지게 굴었다. 그러면 록시아스는 짜증이 났고, 짜증을 부리면 걔들은 너무 쉽게 죽었다. 자신이 직접 창조한 흡혈귀들을 도로 살해하는 일은 영 불쾌했다. 그러니 애초 아둔한 흡혈귀들이 분수를 알고 자신에게 시비 걸지 말아 주길 바랐다. 기분이 정말이지, 찝찝해지니까.
‘기껏 가르쳐 줬더니.’
록시아스는 ‘얼떨결에’ 죽인 동류를 내려다보며 뇌까렸다. 아니, 무언가 본다기에는 바닥에 먼지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다.
‘덤비지 말라고 했잖아.’
붉은 시선이 고정된 바닥은 황무지보다도 황량했다. 그런데도 록시아스는 아래에 무언가 있는 양 계속해서 읊조렸다. 완전한 혼잣말이었다.
‘한심하다….’
흡혈귀가 자신에게 대든 것에 울컥 짜증이 치밀었고….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벌을 주려던 것뿐이었다.
‘약해 빠졌고.’
자신과 동류라고 불러 주기에도 민망하도록 흡혈귀들은 너무나 나약했다. 날벌레만큼이나 허무하게 죽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기어오르지 말라고 경고했다. 죽지 말라고, 가르쳤다.
‘멍청한 것들.’
그들이 나약한 데다가 아둔한 탓에 그는 곧잘 억울해졌다. 이왕 흡혈귀로 만들어 주었으니 오래 살라고 낮에는 나가지 마라, 불에 가까이 가지 마라, 능력을 개발해라, 좋은 피만 마셔라, 나에게 덤비지 마라, 그렇게 당부했던 것인데…. 또 죽었다. 또 죽여 버렸다. 답답하다. 불쾌하다. 찝찝하다.
‘만들어 주면 뭐해, 어차피 죽을 거면서.’
뒈진 놈은 따로 있는데 마치 자신이 썩은 시체가 된 양 더러운 기분이었다.
한참 바닥을 응시하던 록시아스는 발을 돌렸다. 등을 돌렸다.
한 놈이 사라진들 상관없다. 흡혈귀야 몇이든 만들 수 있다. 하나가 사라져 생긴 빈자리는 다른 머리로 채워 넣으면 된다.
하지만 이미 오염된 기분은 정화되지 않았다. 머리 하나가 사라질 때마다 가슴속으로 오물이 쌓였다.
검은 숲의 아이는 어른이 되지 못한 채로 구정물에 빠졌다. 눈이 멀고, 귀머거리가 되고, 숨이 차는 줄도 모르는 천치가 되고, 악설은 버릇이 되었다. 성장하지 못했다.
하나 록시아스는 자신이 제자리를 걷는 줄도 몰랐다. 그를 둘러싼 풍경은 계속 바뀌었으니까.
***
‘카밀아, 나는 지루해서 죽고 싶어. 다 지겹고, 무의미해서….’
소원이 포기뿐인 자에게서 지친 기색을 읽은 카밀은 눈을 감았다. 아래 속눈썹에 걸려 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길게 미끄러졌다. 한참 후 도로 눈을 뜨자, 눈꺼풀 뒤로 고여 있던 눈물이 장대비처럼 주룩주룩 흘렀다.
“알겠어요….”
카밀은 일그러진 표정만큼이나 엉망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해했어요.”
자신을 담을 때면 늘 청청하던 눈이 대번 황폐하게 메마르자, 록시아스는 드디어 카밀이 고집을 꺾었음을 느꼈다. 기쁘지는 않았다. 반항을 거두고 원래대로 고분고분해진 카밀에게 살해될 날만 남았을 터, 즐거워야 맞으나 미소조차 떠오르질 않았다.
“그만 울어.”
“…….”
두 손을 모아 얼굴을 파묻었다가, 딱 한 번 어깨를 크게 들썩인 카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눈물을 갈무리하려던 것 같은데, 그는 계속 울었다. 눈시울은 점점 더 붉어지고, 눈물 줄기는 갈수록 굵어졌다.
“그럼, 그러면요.”
우느라 도톰하게 부어오른 빨간 입술 사이로 침잠한 저음이 새어 나왔다.
“같이 죽어요, 록시.”
다 지겹고 무의미하며 지루해서 죽고 싶다고 말하던 록시아스만큼이나, 카밀에게서 미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 무의미해서 죽고 싶다면… 지금 난 록시한테 아무런 의미도 아닌 거죠.”
카밀은 고개를 숙였다. 우울함에 목을 졸린 듯했던 표정 위로 그림자를 가면처럼 썼다.
“내가 너무 기대했나 봐요. 맞다, 록시가 기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들어서 이렇게 됐나 보다.”
넋 나간 이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안개처럼 뿌옜다. 똑바로 경청하기에는 흐렸고, 외면하려 흘려듣기에는 방 안을 가득 떠다녔다.
“그래도 끝까지 함께하면 조금은 생기겠지. 의미가….”
록시아스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답답해졌다. 불쾌해졌다. 찝찝해졌다. 카밀을 죽인 것도 아닌데, 마치 제게 덤볐던 흡혈귀들을 ‘실수로’ 죽여 버렸을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억울했다.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만 하는지 납득되지 않았다.
너는 나를 죽여야 한다, 고 카밀에게 몇 번이나 분명히 일렀다.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기야 했으나, 카밀이 구태여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를 속이거나 기만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래야 할 필요도 없었고….
제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한다고 했던 건 카밀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하지 않겠다고 뻗대니 도리어 자신이 황당해야 맞다. 카밀은 저따위 가여운 모양으로 울지 말아야 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쪽은 카밀이니까.
그러므로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네가 왜 울어? 울 자격도 없는 게’라고 비아냥대려고 입을 뗐다.
“…내가 뭘 잘못했어?”
한데 튀어나온 말은 영 달랐다.
“그래서 우는 거야?”
울 만한 상황이 아니다. 카밀이 그만 울었으면 좋겠다.
“아니요, 록시는 잘못 없어요. 내가… 내가 한심해서 우는 거예요.”
하지만 네가 책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잖아.
카밀이 눈물을 한 방울 흘릴 때마다 그에게 사과하라며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몇 년이에요….”
흥건한 얼굴을 아무렇게나 쓸어 닦은 카밀이 말했다. 손이 지나지 않은 눈 앞머리에 고인 물기가 조명을 머금어 주황색으로 반짝거렸다.
“록시한테 몇 년은 몇 초나 마찬가지겠지만… 저한테는 긴 시간이었어요.”
그다음, 카밀이 무어라고 말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팔짱을 낀 록시아스는 이어질 음성을 기다렸다. 눈물을 훔쳐 낸 것이 무색하게 또다시 뺨에 물길이 새겨진 카밀은 공기를 끌어모으듯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 동안, 록시한테 어떤 의미도 못 된 내가 너무 한심해….”
카밀을 둘러싼 공기가 비참하게 흘렀다.
“그래서 우는 거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카밀은 폭포수 같은 눈물을 터뜨렸다. 눈꺼풀이며 입술이며 만면이 땡땡하게 부어올랐다. 못생겨지면 록시가 싫어할 텐데, 어금니를 다물고 울음소리를 삼키기밖에 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안 울고 싶은데….”
그만 우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 역시 배운 적 없으므로.
록시아스는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어떤 말이든 뱉어 내야 할 것 같았지만, 머릿속으로 떠오른 문장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밀아, 울지 마’라고 말하기에 카밀은 눈물짓기 위해 태어난 양 울고 있었다. 울음을 그치지 못할 이에게 그리 명령했다가는 지켜지지 않을 것이 뻔하므로 도리어 록시아스만 화가 날 터였다. 어떻게 하지, 어떡하지, 어떡해야….
카밀이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그 처량한 움직임이 파동이 되어 다가왔다. 갈팡질팡하던 록시아스의 마음을 휩쓸었다. 마음이 넘어졌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났다. 짜증이라기에는 서글프고, 슬픔이라기에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속을 뒤집었다. 울음소리를 꾸역꾸역 삼키는 입술을 보기 괴로웠다. 그래. 차라리 카밀에게 눈을 떼기로 했다. 눈물로 그을린 얼굴에서 시선을 거둔 록시아스는 이마를 짚었다.
“…….”
“…….”
침묵이 시렸다.
천장까지 솟은 책장이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가 어렴풋이 날렸다. 주황색 조명이 항상 제자리에 있는 것들을 여전한 각도로 비췄다. 미동조차 하지 않아 서재 풍경의 한 부분이 된 듯한 두 흡혈귀를 비췄다.
한 시간. 그들은 시곗바늘이 한 바퀴를 돌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정지한 세상에 던져진 것처럼…. 두 사람의 침묵을 변명하듯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와 시곗바늘 굴러가는 소음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두 시간째. 카밀은 드디어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참한 심정은 여태 절망에 잠겨 있었다. 마음이 새카만 바다 밑으로 침수되었다. 록시아스가 제 가슴에 걸어 놓은 닻이 너무나 육중했다. 가라앉고, 가라앉았다. 다시는 뭍으로 떠오를 수 없을 듯이.
“…록시.”
울적한 저음이 록시아스를 불렀다. 그에 록시아스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두 시간 반만의 거동이었다.
“응.”
“그래서.”
평소처럼 록시아스를 붙잡지도, 버릇처럼 록시아스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지도 않는 카밀이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어요?”
그리고 희망찬 미래를 묻는 양 웃었다.
“우리한테.”
“우리….”
마치 제게 덤볐던 흡혈귀를 죽여 버렸을 때와 흡사한, 불편하고 불쾌하며 답답하고 찝찝한 기분에 억울해했던 록시아스는 뒤늦게야 어째서 자신이 그러한 감상에 빠져야만 했는지 깨우쳤다.
“왜 우리야.”
왜냐하면.
“같이 죽기로 했으니까요.”
자신이 카밀을 죽였기 때문이다.
“록시랑 나랑요.”
“카밀아.”
“록시가 바라는 대로 할게요.”
“넌….”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하든….”
비가시적인 흉기가 록시아스의 뒤통수를 타격했다. 록시아스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가, 거울이 된 카밀이 그를 투영해 낱낱이 밝혔다.
“죽지 마.”
“어차피 록시한테 혼날 수도 없을 테니까.”
“너는 안 죽어도 돼.”
“내 마음대로 죽어도 되잖아요.”
머리가 울렸다. 검지와 엄지로 관자놀이를 감싼 록시아스는 이내 뇌까렸다.
“응석 부리지 마.”
“와….”
어깨를 늘어뜨리며 영문 모를 감탄사를 흩뿌린 카밀은 중얼거렸다.
“이게 응석으로 보이는구나….”
서재에 그림자처럼 드리운 흐린 공기가 발치로 내리깔렸다. 두 사람을 연결 짓는 감정의 고리가 팽팽히 당겨졌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요.”
정수리가 묵직한 인영으로 뒤덮였다. 관자놀이에서 손을 뗀 록시아스는 얼굴을 들었다. 어느새 다가와 발부리를 붙이고 선 카밀이 끓는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록시 앞에서 죽어 버리고 싶어.”
“왜 그따위 짓을 하고 싶은, 데?”
카밀에게 턱밑이 붙잡혀 물음이 끊겼다.
괘씸한 카밀. 미친 카밀. 정신 나간 모양으로 화를 내다가 울다가 웃다가 또다시 화를 내며 속을 뒤집어 놓는 카밀, 의 목을 둘러 잡았다. 하나 록시아스는 카밀처럼 마음껏 화낼 수도 없었다. 카밀이 죽을까 봐.
“록시가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서요.”
그런데 이토록 그를 어여삐 여기는 제 심정도 모르고 카밀은 죽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협박한다. 어여삐 여기고… 고집을 부리고… 협박….
찰나 카밀에게서 눈길을 물린 록시아스는 손을 떨었다.
자신은 카밀을 어여삐 여긴다. 카밀은 고집을 부린다. 협박이었다. 죽는다고…. 카밀이의 죽음은 자신에게 협박이 될 수 있었다.
공포를 마주한 듯 떨리는 손이 이윽고 힘을 잃고 카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사랑은 바라지도 않아.”
반대로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두른 손아귀에 더욱 힘을 실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뭐든 아무거나. 록시한테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가 되었으면 해요.”
록시아스는 아팠다.
“나를 데려와서 이만큼 미치게 만들어 놨으면, 그 정도 책임감은 느껴도 되잖아요… 제발.”
카밀에게 죄이는 턱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곳이 아니라, 고통은 흉부 언저리에서 말미암았다.
“부탁이에요, 록시아스.”
책임을 모르도록 무지하며 무지한 만큼 이기적인 탓으로 카밀을 감정적으로 살해한 과실을 저지른 록시아스에게, 처벌이 다가왔다.
수 세기에 걸쳐 쌓아 놓은 지식은 지금 이 순간 록시아스에게 무의미했다. 용암에도 녹지 않는 불사의 육체 또한 무소용했다. 정신은 까마득해지며 모든 것을 잊었고, 흉터 하나 나지 않은 가슴팍은 도려내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널 어떻게, 기억하면 되는데….”
록시아스는 물었다. 수도사에게 답을 구하던 결백한 아이처럼.
“왜 아무것도 몰라요? 록시는, 하….”
제 손아귀에 붙잡힌 록시아스의 표정이 야속하도록 무구했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한숨이 길게 끌려 나왔다.
록시아스는 황야를 떠다니는 안개였다. 그를 통과할 수는 있으나 붙잡을 수는 없는 아지랑이였다.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고, 기억하지도 않고, 증발하지도 못하고 허공만 유랑하는 불우한 물안개였다.
그런 그에게 제 흔적을 새겼다고 여기며 성취감을 간직해 온 자신이 한심했다.
“나랑 왜 잤어요?”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수도사만큼 인자한 대답을 돌려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록시아스를 향한 애욕이 거북하도록 넘쳤다. 애정은 다른 색을 입지 못하도록 새빨갛게 물들었으며, 집착은 거뭇하게 부패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요?”
그것만 담아 놓기에도 비좁은 마음이 배신감과 상실감으로 깎여 나갔다. 자리할 곳을 잃은 인내는 바깥으로 쫓겨났다. 참을 수 없어졌다. 그래서 카밀은 감히 언성을 높이며 록시아스를 다그쳤다.
“대답해요!”
“난….”
꼬인 혀가 목구멍에 들어박힌 양, 록시아스는 말을 잇기 어려웠다.
의심의 여지 없이 완성한 퍼즐이 애초부터 틀렸다며, 카밀이 조각을 모조리 빼 버렸다. 뒤섞어 놓았다.
결국 록시아스는 한마디도 변명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또 한 번 카밀에게 대답을 구했다.
“너를 어떻게 책임지면 되는지, 말해 봐.”
턱을 죄던 카밀의 손이 목을 따라 내려갔고, 이내 툭 떨어졌다. 록시아스는 차라리 카밀에게 죽을 듯이 목을 죄이면 낫겠다고 일순 생각했다. 그러면 욱신욱신한 가슴팍이 덜 아프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수도사처럼 상냥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모질지도 못한 카밀은, 록시아스를 품에 안았다.
생소하도록 언성을 높일 만큼 분노하고 있으면서, 어째서 욕을 퍼붓거나 때리지 않고 포옹할까. 한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때부터 자신을 한 품에 가릴 수 있을 만큼 클 때까지 카밀을 곁에서 보아 왔는데, 지금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죄다 의아했다.
등을 감싼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마주한 가슴팍이 틈새조차 없도록 맞붙었다. 록시아스는 겨우 고개를 위로 당겨, 카밀의 어깨에 박힌 콧대를 허공으로 꺼냈다. 그래도… 숨이 찼다.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이 요동치며 가슴을 때렸다. 울음을 그친 카밀은 아직도 속으로 울고 있었다.
귓바퀴 언저리에서 카밀의 목소리가 흘렀다.
“나를 상처 내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만 상처 내요. 다른 애를 데려오거나 하면 죽일 거야.”
목소리가 닿는 귓가가 시큰거렸다.
“그리고 내 손에 죽을 때 떠올려 줘요.”
팔뚝과 등을 부여잡은 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새카만 뒤통수를 덮었다.
“록시를 없애는 나를….”
카밀이 스쳐 지나가는 모든 곳이 아릿했다.
“록시가 먹이고, 빼앗아서 만든 나를….”
말꼬리를 흐린 카밀은 록시아스를 놓아주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면 록시는 책임을 다한 거예요.”
피부 가죽이 멀어진 카밀을 향해 당겨졌다. 카밀이라는 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카밀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멈출 수도 없었다. 오감이 카밀에게 묶인 듯했다. 록시아스는 불합리한 감각에 허덕이며 얼굴을 구겼다.
카밀은 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록시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록시아스는 마치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자신으로 인해…. 착각일 터다. 그가 자신으로 인해 허물리고 깨우쳤다고 수십 번 착각하지 않았었나. 그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믿지 말아야 한다. 믿음이라는 망상은 곧 악몽이므로.
둘뿐인 암실에 감금되기를 자처했던 두 사람은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했다.
록시아스는 불시에 자신을 나약하게 만든 병마를 가졌고, 카밀은 잠을 자지 않는데도 눈을 감게 만드는 악몽을 꾸었다.
그들은 그렇게 마주 보고 있었다.
***
“이제 록시 피는 안 마실게요.”
카밀은 느닷없이 그렇게 통보했다. 기묘하고도 흉흉한 기류가 삭풍처럼 두 사람을 갉고 지나간 때로부터 다음 날이었다.
“뭐?”
구색 맞추기로 늘 켜 놓던 조명조차 꺼진 어둑한 방, 어둠은 문제가 아니라는 듯 거침없이 신문을 읽어 내리던 록시아스가 고개를 들며 의문에 찬 음절을 내뱉었다. 신문을 느른하게 붙들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바스락, 하며 종이가 구겨졌다.
선택의 여지 없이 록시아스의 피를 마셔야 살며, 누구보다 록시아스의 피를 갈구하는 유일한 이인 카밀이 말했다. 록시아스 자신의 피를 마시지 않겠다고. 터무니없는 선고였다. 차라리 개가 개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는 편이 신빙성 있겠다.
활짝 펼친 신문을 반으로 접어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은 록시아스는 다소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무슨 헛소리야.”
어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읽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에도 관심 두지 않고 오직 록시아스만 바라보고 있던 카밀은 이미 대답을 준비한 듯 곧장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연습할 거예요. 록시 피를 마시지 않아도 살게끔.”
하. 록시아스는 헛웃음을 토했다.
바로 몇 시간 전, 자신을 죽인 뒤에 따라 죽겠다고 한 주제에 무슨 연습을 해? 우습기 짝이 없다. 카밀은 줄곧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정도가 아주 심각했다. 어리광을 질병으로 칠 수 있다면 카밀은 당장 입원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게 될까?”
물음에 조소가 다분했다. 하나 동요하지 않은 카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해야죠.”
어디서 주워 온 가당찮은 오기인지. 록시아스는 카밀이 더더욱 우스워졌고, 불쾌해졌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피를 마실 거, 아니야?”
“…….”
“내가 죽은 다음에는 밥 먹을 필요가 없겠지. 너도 죽겠다며.”
이제야 카밀은 당황한 기색을 조금이나마 내비쳤다. 록시아스는 치올린 입꼬리를 유지했다. 그러게 말이 되는 어리광을 부려야지, 비웃던 때였다. 발치로 시선을 떨어트린 카밀이 중얼거렸다.
“사는 동안에도 괜찮아지고 싶어서 그래요.”
철없는 카밀을 낚아 올리고는 내려갈 기미가 없는 낚싯바늘처럼 곡선을 그리던 입꼬리가 대번 직선으로 굳어졌다.
“록시가 기대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제 알겠어요. 기대하면 안 되겠어요. 힘드니까…. 그래서 그래요.”
카밀은 말을 이었다.
“록시가 뭐라도 허락해 주면 기대하게 되니까. 허락받을 일을 안 만들려고요.”
카밀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은 똑똑히 기억한다. 분명히 자신이 그렇게 명령했다. 그랬는데….
록시아스는 그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힘주어 물었다.
순종이 불복이 된 꼴이었다. 아니, 기대하지 않고 제가 시키는 바대로만 한다면 잘된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불복으로 느껴질까. 카밀의 황당한 어리광에 휘둘리다 보니 제 사고 또한 우스꽝스레 흘러가는 듯했다.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들었다. 돌이킬 수 있을까….
“굶어서 비실대는 꼴을 어떻게 봐, 짜증 나게. 그냥 마셔.”
확실한 것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지껄인 말은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굶으려면 굶어 보라지. 카밀이 ‘제발 록시 피를 다시 마시게 해 주세요’라고 빌 때까지 버려둘 셈이었다. 한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어제부로 하나부터 열까지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삼키고자 하면 뱉어지고, 뱉고자 하면 삼켜졌다. 알고자 한 것은 점점 미궁으로 빠졌고, 은닉하고자 한 것은 낱낱이 노출되었다.
허술해진 자신을 인지하자 록시아스는 불안해졌다.
나 왜 이래….
“왜 그래요, 대체….”
록시아스가 왜 그런지 궁금한 것은 카밀도 마찬가지였다. 록시아스가 욕을 퍼부어도 미소 짓던 카밀은, 록시아스의 허락에 도리어 힘 빠진 얼굴로 한숨을 뿌렸다.
“록시가 그럴수록, 저 힘들어요. 록시도 이제 확실하게 해 주세요.”
나는 왜 이러고, 카밀은 또 왜 저러는가. 록시아스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카밀에게 조금 더 허락하고, 조금 더 즐길 말미를 주었을 뿐이다. 되레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그럴수록?”
“록시가 저를 친절하게 대할수록, 이요.”
“그게 잘못이야?”
“아니요, 잘못이 아니라….”
말꼬리를 흐린 카밀은 발치에서 록시아스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상대와 눈높이가 일치하였을 때 다물린 입을 도로 열었다.
“나쁘게 굴어도 록시를 사랑할 거니까, 잘해 주지 않아도 돼요. 잘해 주지 마세요.”
“널 어떻게 대할지는 내가 정해.”
“…아무튼, 오늘부터 다른 피를 마실게요.”
카밀이 말을 돌렸다. 록시아스는 방향을 틀어 멀어진 말을 붙잡아 되돌리지 못했다. 잠시간 배신감에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밀이 다른 피를 마실 수 있다고, 가령 마실 수 없더라도 그러겠노라 마음먹었다는 사실이 뒷목을 뜨끈하게 달궜다. 자신이 카밀에게 필수 불가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나를 위해 만든 카밀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도 록시는 제 피를 마셔 주세요.”
“…….”
나를 위해 만든 카밀인데, 하나도 모르겠다. 타인 같다. 아니, 애초 타인이 맞았다.
“록시가 저를 마시고 나면, 사냥하러 나갈 거예요.”
왜 사람 마음은 못 읽는지. 불도 피우고, 물도 주무르고, 돌산도 옮길 수 있다. 한데 그 가공할 만한 능력이 죄 쓸모없게 느껴졌다. 록시아스는 지금, 카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지 못해 가슴속이 꽉 틀어막혔다. 카밀이 그를 무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록시도 같이 나갈래요? 아니면 저 혼자 갔다 올까요?”
록시아스는 찰나조차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같이 나가.”
그것으로 무기력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네, 록시.”
카밀이 웃었다. 자를 때가 되어 눈썹 아래로 내려온 금발을 넘겼다. 웃느라 접힌 모양까지 완벽한 눈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를 피해 시선을 틀었다. 카밀의 미소를 마주하기 껄끄러웠다. 의식적으로 꼿꼿이 세운 어깨가 늘어지니까…. 카밀은 자꾸만, 자신을 미련하게 만들었다.
***
사선으로 꺾은 고개를 높이 쳐든 카밀은, 제 목덜미에 입술을 붙인 록시아스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감긴 듯한 눈꺼풀 틈새에 자리한 눈동자를 록시아스의 이목구비에 고정했다. 흘러내린 흑발에 덮인 반듯한 이마와 매끄러운 콧날을 훑었다. 눈빛에 닳지는 않을 테니, 실컷.
그러다가 별안간 눈을 치켜뜬 록시아스와 시선이 얽혔다. 송곳니에 찢긴 목덜미를 맴도는 아릿한 고통이 단번에 날아갔다. 쾌락뿐이다. 록시아스와 눈만 마주쳐도 기쁨뿐이다.
“아….”
“하.”
배를 채운 록시아스가 살갗에서 멀어졌다. 송곳니가 거두어지기 무섭게 상처는 아물었다. 허전하다. 흡혈귀가 된 이래로 아쉬운 점이라면, 록시아스의 자취가 오랫동안 남지 않는단 것이었다.
카밀은 치켜든 턱을 내리며, 록시아스의 어깨를 놓았다. 외로웠다. 록시아스가 스치고 지나간 후에는 언제나 고독이 찾아왔다.
록시아스는 입가에 묻은 불그죽죽한 물기를 손등으로 쓸어 닦았다. 그를 바라보던 창백한 카밀은 마른세수를 했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흔적을 지우고, 카밀은 망막에 들러붙어 영 떨어지지 않는 록시아스의 잔상을 지웠다.
그리고 상대를 지워 내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은, 짐짓 일상적인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카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사냥하러 갈게요.”
“그래.”
“…록시도 같이 갈 거예요?”
질문에 록시아스가 눈빛을 뾰족하게 세웠다.
“그럼 가지 말까?”
즉시 카밀은 도리질 쳤다.
“가요, 같이 가 주세요.”
록시아스의 입술이 일순 꿈틀거렸다. 웃는 모양을 내려다가 만 것이다.
“당연하지.”
입가에서 훔친 혈액으로 얼룩진 손이 카밀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쓸어내리며 지났다. 카밀의 흰 셔츠에 붉은 자국이 길게 남겨졌다. 등을 돌린 록시아스가 방문을 통과한다. 카밀은 그 까만 실루엣을 뒤따랐다.
층계를 내리밟고, 육중한 현관문을 지났다. 밤바람이 몸에 휘감긴다. 앞서가는 흑발이 흩날렸다. 그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거슬리도록 짙었다. 록시아스의 등허리를 옥죄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깔끔하게 다려진 검정 셔츠 깃 위로 드러난 흰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싶은 욕망이 곤두섰다. 갈증이 날뛰었다. 카밀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 쥐었다. 제발 참아. 스스로 되뇌었다. 다른 쓰레기나 먹어…. 뇌리를 향해 기어오르는 본능을 꾸역꾸역 가로막았다.
완벽한 먹이를 따르며 그가 흩뿌리는 체취에 현혹되다 보니 어느새 쓰레기 소굴에 당도했다. 이전에 와 본 적 있는 폐광이었다. 무용해진 황원이자 오물이 모이는 집합소였다. 카밀은 삽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록시아스는 벌써 암담한 입구 속으로 사라졌다. 놓치면 안 된다. 발을 놀렸다. 자갈이 우둑우둑 밟혔다. 사냥감들의 맥박 소리가 얼키설키했다. 거슬린다. 폐광 깊숙이 들어갈수록 강해지는 악취는 더더욱 거슬렸다.
찌꺼기들은 찌꺼기답게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 돌이 깔렸든 모래가 깔렸든, 마치 그곳이 푹신한 융단이 깔린 잠자리라도 되는 듯이.
각종 약물에 전 찌꺼기들 위로 록시아스와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카밀은 있는 대로 눈살을 구겼다. 아무리 그림자뿐이라도, 록시아스가 더러운 것들에게 닿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록시아스를 앞질러 막아섰다.
“록시는 더 뒤로 가 있어요. 냄새나잖아요.”
“여기 서 있을게.”
록시아스의 그림자가 아직도 쓰레기를 덮고 있었다.
하나 록시아스는 그대로 걸음을 멈춰 버렸다.
“빨리 먹어. 역겨우니까.”
쓰레기는 넷이나 되었으나, 어떤 쓰레기를 골라 흡혈할지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실루엣으로 인해 발부리가 거뭇하게 얼룩진 쓰레기를 내려다보았다.
“네, 록시.”
당장 그에게 달려들었다. 꺼려지는 일일수록 망설이지 말고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 록시아스의 명령에 따라 고문과 같은 훈련을 강행하며 깨우친 진리였다.
하지만 너무 빠르지는 않게.
카밀은 록시아스와 마주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고, 쓰레기의 멱을 잡아 올렸다. 너무 빠르지는 않게. 꿈틀거리며 새는 발음으로 중얼거리는 쓰레기의 울대를 엄지로 꾹 눌렀다. 조금 느린 듯하게. 엄지가 파고든 쓰레기의 목에서 핏물이 샜다.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느린 듯하게. 자신에게 쏟아지는 록시아스의 붉은 눈빛을, 꼭 같은 붉은 눈빛으로 되돌리며 쓰레기의 피를 핥았다. 느리게. 뻥 뚫린 피 구덩이에 입술을 붙였다. 아주 느리게. 록시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우악스레. 조금만 더… 굼뜨게.
카밀은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틀며, 더러운 피를 음미하는 척했다. 생각보다 맛있다는 듯이. 불과 몇 분 전 자신의 피로 생기를 되찾은 록시아스가 혈색을 잃어버린다. 거의 다 되었다…. 쓰레기의 피를 한 모금 넘겼다. 일부러 넘어가는 소리가 우렁차도록 신경 썼다. 꿀꺽.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다가오는 줄도 모르게 코앞으로 다가온 록시아스가, 쓰레기를 카밀에게서 빼앗아 내던졌다. 이윽고 펄펄 끓는 저음이 벌어진 입술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더러운 거 입에 대지 마.”
그렇게 뇌까린 록시아스는 별안간 분풀이하듯 쓰레기를 밟아 찌그러트렸다. 깔끔한 걸 좋아하면서. 더러운 건 못 견디면서.
바짓단이며 허리춤까지 냄새나는 피로 범벅된 록시아스는 얼굴을 거칠게 쓸며 다시금 카밀에게 다가갔다. 바짝. 그 사이로 개미 한 마리나 겨우 지나갈까 싶도록. 그리고 감정이 절제되지 않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다른 피, 마시지 마.”
“…….”
카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거의 다 되었으나, 아직 아니었다.
이어서 록시아스의 손이 정면으로 다가왔다. 뺨을 감싼다.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이 피부로 전달됐다. 환호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한마디를 기다리며 참았다. 조금만 더.
“내 피만 마셔.”
그렇지. 드디어.
“응? 대답해, 카밀!”
됐다.
‘이제 록시 피는 안 마실게요.’
이 말인즉, ‘이제 록시를 불안하게 만들 거예요’라는 의미였다.
‘지금부터 연습할 거예요. 록시 피를 마시지 않아도 살게끔.’
록시아스가 제게 피를 주지 않고는 못 견디게끔. 그가 독점욕을 인정하게끔.
“네, 록시….”
진심을 따라 활짝 웃는 대신 울상을 지어낸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바닥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잘못 생각했어요. 역시 록시 피가 아니면 안 돼….”
록시아스는 안도했다. 다신 제 피를 먹지 않을 듯이 고집을 피웠던 카밀이 순순히 포기했다. 그럼 그렇지. 자신의 것이 아닌 피에 입맛이 돌지 않는 주제에 무슨 수로 자신을 거부할까. 카밀의 본능은 자신만 원한다. 자신이 카밀에게만 식욕을 느끼는 된 것처럼.
하지만 안도가 곧 용서는 아니었다.
자신에게 눈을 떼고 있지 않으면서, 타인의 살갗에 입술을 붙인 카밀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자신이 아니면 손가락 하나조차 스치기 싫다고 해 놓고서, 망설임 없이 다른 핏줄에 송곳니를 꽂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피로 목구멍을 적셨다. 더럽게.
역한 광경이었다. 카밀은 얼핏 쓰레기의 피에 만족한 듯한 표정까지 지었다. 꿀꺽. 카밀이 토악질조차 않으며 오물 같은 피를 넘긴 순간, 도리어 자신의 속이 메스꺼워졌다. 몇 발자국 멀리 자리한 카밀에게 모르는 새 뒤통수를 맞은 양 머리가 얼얼했다.
막 흡혈귀가 되었을 적에 첫 사냥을 나가면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처럼 죽상을 하더니…. 고분고분한 체, 애처로운 체, 어리숙한 체, 괜찮은 체, 온갖 체란 체에 능숙한 카밀은 어쩌면 그때조차 연기했던 것일지 모른다. 가슴 안쪽에서 배신감이 터진다.
폭발하는 가슴을 안은 채, 록시아스는 카밀의 손목을 잡아챘다.
“집에 가자.”
카밀이 타인의 혈액을 묻힌 입가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 록시.”
손목을 둘러 잡은 악력이 뼈를 부러트릴 듯이 억셌으나, 폐광에서 멀어질수록 카밀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
폐쇄된 응달을 벗어나자 광활한 어둠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석탄 산업의 쇠퇴로 광산이 문을 닫고 가치를 잃은 폐광 도시의 새벽은 괴괴했다. 여전한 땅에서 매일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도시민들은 고단한 하루를 마친 뒤 곯아떨어졌다. 풀벌레조차 잎사귀에 몸을 누인 시각이었다.
밤거리를 지나는 두 흡혈귀 언저리로 떠다니는 소음이란 깊게 잠든 숨소리와 휴식을 취하는 심장 소리, 서로에게서 울려 퍼지는 맹렬한 박동이 전부였다. 발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밤에만 먹잇감을 찾아 나서는 사냥꾼들의 걸음은 으레 은밀했다. 막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넘어간 시간이었으므로 요란하게 걷는 취객조차 없었다. 그랬었다.
돌길을 성큼성큼 지나던 카밀과 록시아스의 발걸음이 멎었다. 별안간 앞을 막아선 인영에 귀가를 방해받은 탓이었다. 록시아스는 이맛살을 구겼다. 카밀은 코앞에 나타난 불청객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의 걸음을 붙잡을 수 있다면 필시 보통 인간은 아닐 터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과 동일한 속도로 걸을 수 있는 흡혈귀가 아니고서야….
아니나 다를까, 까만 공중에서 빛나는 눈이 붉었다.
불청객이 입을 연다. 무척 들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록시아스!”
그는 예의 없이 나타났고, 느닷없이 록시아스를 친근하게 불렀으며, 품으로 뛰어들어 포옹했다. 카밀은 주인을 위협하는 괴한에게 달려드는 개처럼 반사적으로 불청객의 어깨를 쥐어 내팽개치듯 록시아스에게서 떨어트렸다.
“록시, 아는 사람이에요?”
“나 알아?”
상대와 일순간 닿았던 옷자락을 툭툭 털어 낸 록시아스가 물었다. 카밀이 록시아스에게 질문을 던진 것과 동시였다. 이어서는 정체불명의 남자, 흡혈귀가 록시아스와 카밀을 번갈아 보며 읊조렸다.
“나를 기억 못 하는군요.”
그렇게 말한 이의 표정은 마치 오랜 유대감을 상실한 양 슬퍼 보였다. 록시아스는 의아했고, 카밀은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섭섭하네요.”
록시아스는 유감을 여과 없이 내비치는 남자를 훑었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듯 자연스레 행동하는 흡혈귀가 그저 낯설지만 않았다. 하기야 흡혈귀라면 자신을 거치지 않았을 리 없으니.
겉보기로 많이 셈해 봐야 30대 초반 가량인 남자는 금발이었다. 하나 카밀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영 다른 백색 금발이었다. 백색 금발… 북쪽 지역에서는 흔한 머리카락 색이었고, 과거 그쪽에서는 흡혈귀를 손에 꼽을 만큼만 만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남자의 정체가 불현듯 떠올랐다.
“휴고.”
창조자에게 이름이 불리자 남자의 얼굴에서 대번 화색이 돌았다. 전전긍긍하는 표정이 어울릴 만큼 날카로운 인상의 휴고가 활짝 웃으며 록시아스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접어 앉았다.
“드디어 나를 떠올렸군요.”
양쪽 뺨이 길게 갈라지도록 미소 지은 남자는, 카밀과 닿아 있지 않은 록시아스의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그에 분노한 카밀이 달려들기 직전, 록시아스가 “누가 함부로 손대래.”라고 핀잔하며 휴고를 뿌리쳤다.
숫제 웃는 휴고가 몸을 일으켰다. 록시아스가 그에게 물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카밀은 이어 록시아스에게 이전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록시, 아는 사람이에요?”
자신과 휴고 사이로 막아서듯 자리한 카밀의 손목을 끌어당긴 록시아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내가 흡혈귀로 만든 앤데… 언제더라.”
“753년 전이죠.”
“그래. 그쯤.”
능청스레 대화에 참여한 휴고에게 시선을 옮긴 록시아스는 힘이 들어간 카밀의 손목을 검지로 어루만지며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재차 던졌다.
“그래서… 죽은 게 아니었어?”
“왜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까?”
“안 죽은 애들을 전부 찾아갔었거든.”
“당신 손에서 태어난 흡혈귀들 전부를요?”
“그래.”
“확신합니까?”
오래도록 흡혈귀로서 삶을 영위한 동류가 자신에게 물리적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깨달은 이래로, 지난날 창조한 동족들을 찾아 나섰다. 아주 멀리에 있는 흡혈귀의 기척까지는 몰라도 근처에 있는 동류의 소리는 귀를 기울이면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며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얼굴들을 만났다. 기어이 조우하지 못한 자들은 죽었다고 여겼고.
“널 보니까 확신하면 안 되겠어.”
어디에서 꼭꼭 숨어 지냈는지…. 록시아스는 어쨌든 휴고처럼 여태 자신과 마주치지 않고 생존해 있는 동류가 몇은 더 있을 법하다고 가늠했다. 그러는 동안 눈길이 자연스레 카밀을 향했고, 휴고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추궁 같은 물음이었다.
“네가 내 눈에 안 띄었잖아.”
“…엇갈린 겁니다.”
줄곧 록시아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휴고가 카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카밀은 처음부터 끝까지 휴고를 노려보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안녕.”
휴고가 인사를 건넸고, 카밀은 입을 다문 채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마치 록시아스가 만든 흡혈귀를 모조리 알고 있다는 투였다.
“흡혈귀가 된 지 오래 안 됐지?”
“…….”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구나.”
휴고는 자신보다 키가 조금 더 큰 카밀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었다. 마치 꼼꼼히 검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카밀을 왕복한 눈동자는 록시아스와 얽힌 손에서 잠시간 정지했고, 이내 그와 똑같은 붉은빛 눈동자를 향해 되돌아갔다.
“살갑게 손을 잡고 있군요.”
시선은 카밀에게로 쏟아졌으나, 목소리는 록시아스에게 건네졌다.
“록시아스가 이러는 건 처음 보는데….”
머리카락 한 올만 스쳐도 짜증 내지 않았나. 방금 나한테도 그랬고.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을 뇌까린 휴고는 이어 평이한 어조로 마저 말했다.
“그 얼굴로 록시아스를 꼬드겼나 보구나.”
“너는.”
내내 조용하던 카밀이 입을 열었다.
“내가 부러워?”
“허….”
일순 눈을 동그랗게 키운 휴고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물었다.
“록시아스랑 함께 지내나?”
“…….”
침묵을 긍정으로 여긴 휴고는 이어 질문했다.
“함께 지낸 지는 얼마나 됐지?”
“…….”
“일 년? 십 년?”
“…….”
“백 년?”
카밀을 반사하는 휴고의 안광 속으로 꿈틀거리던 장난기가 물러가고, 그 대신으로 멸시가 일렁거렸다.
“핏덩이가….”
삽시 고개를 불쑥 내민 휴고가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은 카밀의 뺨을 따라 콧대를 기울이고는 뇌까린 뒤, 어깨를 바로 세워 록시아스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록시아스.”
물어뜯겠군.
당장에라도 자신에게 달려들 듯한 어린 흡혈귀의 비우호적인 안광을 고스란히 느끼며, 휴고는 천연덕스럽게 제안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당신 집에서 차 한잔 대접해 줄래요?”
그에 카밀은 다급히 록시아스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우리 둘의 집에 저 남자를 초대하지 마세요, 라고 하마터면 내지를 뻔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도록 맹숭맹숭한 낯빛인 록시아스가 입을 열었다.
“따라와.”
…허락한다.
“기쁘군요.”
휴고는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카밀은 아랫입술만 물었다. 록시아스가 승낙한 이상 제가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손아귀에 얽힌 록시아스의 체온으로 마음을 애써 다독였다.
“가자.”
“네…. 록시.”
언제인가 록시아스는 다른 흡혈귀를 죄다 그의 손으로 죽였노라 밝혔다. 한데 별안간 나타난 휴고란 남자는 누구일까. 그는 록시아스를 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750년 전에 흡혈귀가 되었다고? 모르는 것이 이상하다. 록시아스가 아무리 본인에 대해 일일이 밝히지 않는 편이라고는 해도, 몇백 년이고 알고 지냈다면… 그래서 뭐?
카밀은 한 발자국 앞서가는 록시아스의 손을 더욱이 강하게 쥐었다.
저자가 록시아스를 잘 알아봤자, 자신만큼은 모르리라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자신보다 록시아스와 깊은 관계라면, 관계였다면, 죽여 없애면 된다. 록시아스에게는 나만이 유일해야 하니까.
휴고가 그저 손님으로만 왔다 가기를 바랐다.
멀리서, 록시아스와 자신만의 공간을 덮은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The Very First Time
01.
하늘을 향해 높게 치솟은 철제 대문은 굳게 잠긴 채였으나 카밀이 흡혈귀로 재탄생한 이래 구태여 여닫지 않았다. 록시아스와 카밀 그리고 휴고는 유령처럼 담벼락을 가벼이 넘어 저택 마당으로 발을 디뎠다. 공기를 고요하게 가르던 발질이 느려진 그들은 현관문에 다다랐다.
“동화 속 집 같군요.”
휴고는 창조자의 주거지를 둘러보았다.
관리되지 않은 마당은 잔디가 길게 자라 있어 구둣발을 덮고도 남았다. 정원수는 제멋대로 자라거나 나뭇잎이 죄 떨어져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몸집이 커다란 저택은 돌벽이 산화되어 새카맸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전설 속 흡혈귀의 무시무시한 저택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한 장소였다.
“흡혈귀라고 광고라도 할 셈입니까?”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었으나 록시아스며 카밀은 휴고에게 힐끔 눈길만 던질 뿐 가느다란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머 감각이 부족한 창조자였다. 멋쩍어진 휴고는 괜스레 어깨를 으쓱거렸고, 이내 끼익 고음을 지르며 입을 벌리는 육중한 현관문 안으로 록시아스와 그의 ‘아이’를 따라 들어섰다.
실내는 어두컴컴했으나 발길을 지속하거나 앞선 두 인영을 관찰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창조자의 흑발은 어둠 속에서 더욱 짙었으며, 애송이의 금발은 어둠이 무색하도록 반짝거렸다.
취향이 여전하시군.
휴고는 금발에서 흑발로 안광을 옮기며 조용히 입꼬리를 세웠다.
얼핏 록시아스는 아무나 무작위로 골라 동류로 만드는 듯 보였으나, 여태껏 그가 골라낸 흡혈귀들은 대게 금발 머리였다. 그를 추종하던 흡혈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무의식중에 금발을 고르는 것인지, 확실한 취향을 인지하고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아 모르지만.
록시아스와 카밀은 손님과 동행하였어도 구구절절 집에 관하여 안내하는 법 없이 로비를 지나쳐 층계참을 올랐다. 다행인 점이란 손님인 휴고 또한 이래저래 묻거나 집 안을 구경시켜 달라는 둥 부탁하지 않는 것이다. 방랑벽이 있는 록시아스가 내일 당장 떠날 수도 있는 보금자리에 관해 물어봐야 시간 낭비라고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도리어 많았다. 퍽 오랜만에 만나지 않았는가.
막 2층 복도에 발바닥을 붙인 휴고는 계속하여 두 흡혈귀를 뒤따르며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지냈습니까?”
등도 돌리지 않고 숫제 걸음을 옮기는 록시아스에게서 즉시 대답이 날아왔다.
“얼마 안 됐어.”
“전에는 어디 있었습니까?”
“로스톡.”
“그리고요?”
“베를린… 함부르크, 오슬로, 오울루, 살레하르트.”
“당신이 살레하르트에 80년 동안 머물렀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록시아스는 침묵했다. 휴고를 무시했다는 쪽이 정확했다. 하나 휴고는 거듭 질문을 꺼냈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선 복도의 중간쯤 온 참이었다.
“예쁜이는 언제부터 키웠습니까? 살레하르트에서는 혼자였다고 들었는데요.”
‘예쁜이’란 카밀을 지칭했다. 휴고는 앞서는 금발의 반응을 살폈다. 예쁜이라는 말을 질리도록 들었는지 금발은 기분 나쁜 내색조차 없다. 그는 그저 록시아스를 졸졸 쫓을 뿐이었다.
복도 끝, 왼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록시아스가 말했다.
“‘예쁜이’는 휴고, 네 새끼손가락만 할 때부터 키웠어.”
“아하.”
“왜.”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던 록시아스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는, 휴고를 돌아보았다.
“내 예쁜이가 마음에 들어?”
휴고에게 쏟아져 내리는 눈빛이 사나웠다. 턱을 치켜 록시아스와 눈을 마주한 휴고는 보란 듯이 만면을 활짝 폈다.
“감히 어떻게 당신 걸 탐내겠습니까.”
“그래. 관심 꺼.”
고저가 불분명한 음성으로 읊조린 록시아스는 걸음을 재개했다. 따가운 안광이 제게서 거둬지자 휴고는 얼굴을 굳혔다.
이상하군.
록시아스와 퍽 오래 떨어져 있었으나, 멀었던 시간보다 그를 따르며 함께한 시간이 더욱 길었다. 무언가에 소유욕을 드러내는 것은 록시아스답지 않았다. 아무리 화석 같은 자라도 오래 살다 보면 변하는 것인지.
이제 3층이었다.
“휴고.”
손님을 향해 구둣발을 미끄러트린 록시아스는, 바로 오른쪽에 난 문을 눈짓하며 일렀다.
“들어가서 기다려.”
록시아스가 눈짓한 곳을 찰나 훑었다가, 도로 록시아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휴고는 섭섭하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뇌까렸다. 말투는 장난스러웠다.
“나 혼자 말입니까.”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더 있어.”
“외롭습니다.”
“외로우면 다시 나가서 짝을 찾든지.”
변함없이 유머 감각이 부족하다고 했던가. 틀렸다. 아무래도 못 보고 지낸 사이 록시아스는 겉모양을 빼고는 죄 변한 듯했다. 휴고는 터지는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얌전히 처박혀 있어.”
“그럼요.”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죽일 거야.”
“…알겠습니다.”
무얼 숨기고 있기에?
의문을 입에 올리지 않고 참아 낸 휴고는 굳게 닫힌 방문을 열었다.
손님의 발길이 오랜 기간 끊겼던 접견실이 깔끔하게 보존된 모습으로 휴고를 맞이했다. 그 안으로 들어선 휴고는 일부러 문을 닫지 않았으나, 곧 방문은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닫혔다.
밀폐된 공간에서, 휴고는 청각을 곤두세웠다. 두 흡혈귀의 기척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꽤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쾅.
문을 패대기치듯 거칠게 닫자마자 록시아스는 카밀의 멱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아.”
벽에 등을 갖다 박힌 카밀은 입술을 벌리며, 제 멱살을 휘어잡은 록시아스의 손등 위로 살포시 손가락을 올렸다.
“록시.”
‘내 피만 마셔.’ 그렇게 말하던 록시아스는 눈빛으로 불꽃을 내뿜었다. 집에 가자며 보채듯이 손목을 당겼다. 하나 그가 드러낸 불꽃과 갈고리는 불청객의 등장과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그 탓에 입 안으로 쓴맛이 맴돌던 차였다. 기어이 끌어낸 록시아스의 질투와 집착을 환기시킨 휴고란 놈이 미웠다. 그랬는데….
짜악! 날아온 손찌검에 카밀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록시….”
붉게 올라온 뺨을 감싼 카밀은 돌아간 고개를 바로 세웠다.
처량하게 뜬 눈이 놀란 사슴의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록시아스는 카밀이 가엾지 않았다.
자신을 시야에 두고 뻔뻔스레 다른 피를 넘기던 카밀이 머릿속에서 물러갈 줄을 모르고 동동 떠다녔다. 귀가하던 내내, 별안간 나타난 휴고를 붙이고 집으로 돌아와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던 내내… 록시아스는 당장 카밀을 아무 방에나 처넣고 추궁하고 싶은 충동을 수십 번 삭였었다.
바깥에서, 휴고의 앞에서 내리 억누르고 있었던 감정을 대뜸 폭발시킨 록시아스는 제 이마를 감싸며 바닥을 향해 한숨을 내뱉었다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쳐들고는 낮게 말했다.
“네가 왜 맞았을까, 말해 봐.”
묻는 말에 카밀은 대꾸하지 않았다. 록시아스의 손바닥이 또 한 번 날아왔다. 파찰음이 퍼지고, 가라앉고 있던 뺨이 다시 화끈거렸다.
“진짜로 마시지는 말았어야지.”
“…….”
“구역질 나는 척이라도 하든지.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저도 싫었어요.”
“그래, 지금처럼 뻔뻔하게.”
“록시 피만 마시라고, 록시 입으로 듣고 싶어서 그랬어요.”
“질리게 하지 마.”
카밀의 멱살을 던지듯 놓은 록시아스는 두 걸음 물러섰다.
“화나게 해서 죄송해요.”
그에 카밀은 록시아스를 향해 세 걸음 나아갔고, 록시아스는 더 발을 물리지 않았다. 거리가 이전보다 가까웠다.
“그리고… 기뻐요. 록시가 저 때문에 화나서요.”
카밀은 말을 이으며 록시아스의 손목을 잡아 들었다.
“용서해 주면 안 돼요? 록시….”
카밀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져, 종래 그의 호흡이 뺨을 스칠 정도가 되었다.
“…….”
록시아스는 용서를 구하는 카밀을 조금 더 벌할 셈인 듯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서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록시아스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카밀은 눈꼬리를 낮게 내렸다.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눈을 수시로 깜빡였다. 미끈한 볼에 드리운 속눈썹 그림자가 짙어졌다가 흐려졌다.
“네? 록시. 아니면, 용서하기 싫다면 벌이라도 주세요….”
붙든 손목을 잘게 흔들며 카밀은 자신의 죄에 대한 판결을 거듭 촉구했다. 그러고 나서는 록시아스의 손을 얼굴께로 올려 손바닥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일순 손가락을 구부린 록시아스가 이윽고 입술을 벌렸다.
“카밀아. 내가 좋아?”
카밀은 즉시 대답했다.
“아니요.”
의외의 대답에 록시아스는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에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은 카밀이 록시아스의 미간에 엄지를 살포시 가져다 대고는 들뜬 어조로 고백했다.
“사랑해요.”
엄지 아래 눌린 미간이 더욱이 구겨졌다. 고백을 들은 록시아스가 덩달아 웃어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나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니 제아무리 거부에 익숙한 카밀이라도 서글펐다.
카밀이 미간을 주무르든 말든 가만히 보고만 있던 록시아스는 머지않아 카밀의 손목을 잡아 끌어 내렸다. 카밀이 머물렀던 자리를 닦듯이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는 사이 튀어나온 한숨이 손바닥에 부닥쳐 스러졌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록시아스는 미동하지 않았다. 카밀의 서글픈 심정에 불안이 송이송이 피었다.
“록시.”
카밀은 다시금 록시아스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하나 록시아스에게 내쳐졌다.
“…아직도 화가 났어요?”
“…아니.”
또다시 묵직한 숨을 뿌린 록시아스가 그제야 손을 거두고 얼굴을 보여 줬다. 그는 카밀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하루 대부분 그가 짓는 무심한 낯과도 판이했다.
“화 안 났어.”
“그럼 왜….”
…혹시.
록시아스가 바란 대로 영특하게 자란 카밀은 록시아스의 낯선 표정도 금세 읽었다.
찰나 금빛 속눈썹이 내리깔리고 그 아래 자리한 붉은 눈동자가 구석으로 굴렀다. 시야에 닿지 않는 곳, 바깥, 복도를 한참 지나야 당도할 수 있는 거리의 방 안에 자리한 손님을 향해….
도로 시선을 록시아스에게로 옮기고, 자신과 꼭 같은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카밀은 불길함을 확신했다. 동시에 수천 개의 바늘 같은 공포가 뒷덜미에 콱콱콱 박혔다.
카밀이 록시아스의 표정에서 읽은 감정이란, 연민이었다.
그럼 왜….
혹시….
카밀은 어느 문장 하나 끝맺지 못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록시아스에게 뭐라고 애걸해야 록시아스가 저 흡혈귀에게 가지 않을까. 록시아스를 어떻게 막을까. 자신이 가진 무기란 감정적 호소뿐이었다. 록시아스를 말려 세울 힘이란 손톱만큼도 가지지 못했다. 자신은 무력하고 하찮았다. 그렇기에 별안간 나타난 흡혈귀에게 록시아스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카밀아.”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록시아스. 그에게 이름을 불리는 것이 이토록 달갑지 않은 적이 없었다.
“록시.”
네, 라는 대답은 뺐다. 록시아스가 이어 꺼낼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목에 손바닥을 올렸다. 악력을 싣지 않은 허술한 아귀로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록시아스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말했다. 중지에 걸린 울대가 불쑥거린다.
“저요….”
허리를 숙인 카밀은 록시아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배고파요.”
“…….”
상대의 고집을 꺾을 정도로 사랑스럽지도 않은 데다가 나약한 탓에 카밀은 비겁한 거짓말쟁이가 되어야만 했다.
“록시 피 마시게 해 주세요.”
“너, 지금.”
“록시아스, 제발요.”
그가 가진 록시아스를 가둘 수단은 몇 없었다. 개중 가장 효과 좋은 패를 꺼낸 카밀은 고개를 천천히 꺾어 록시아스의 목에 입술을 붙였다.
“부탁이에요. 지금 당장.”
허락이 떨어지기 전이었으나 송곳니부터 세웠다.
록시아스의 피를 잔뜩 빨아서, 배가 터지도록 흡혈해서, 록시아스를 끝까지 취해서, 록시아스가 비틀거릴 때야 그만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휴고, 이름밖에 모르지만 더 알고 싶지도 않은 방해물을 죽일 것이다. 방법은 고민할 거리도 안 되었다. 곧 해가 뜰 테니.
“아… 그래, 마셔.”
마지못해 승낙한 록시아스는, 이미 카밀에게 물린 뒤였다.
록시아스의 목에 입술을 붙인 카밀의 행위는 흡혈보다 애무에 가까웠다.
앞서 피부 아래로 찔러 넣은 송곳니를 뒤로 물려야만 마실 만큼 충분한 혈액이 나오는데, 카밀은 송곳니를 그저 깊숙이 고정해 놓고는 보들보들한 맨살을 혀끝으로 나릿하게 훑기만 했다. 피는 송곳니 주변으로 송골송골 맺히는 것만 취했다. 애초 목적은 식사가 아니기에 배를 불리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얼마 후에야 송곳니를 물렸다. 구멍이 난 자리로 샘솟은 핏물이 뻗은 목을 따라 흘러내렸다. 카밀의 혀가 그를 쫓듯 아래로 미끄러졌다. 록시아스가 고개를 젖히며 카밀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목에 닿은 입술이 빗장뼈 부근까지 갔다가 도로 올라왔고, 울대를 감싸 간지럽도록 연하게 빨아당겼다. 숱 많은 금발이 턱밑을 간지럽힌다. 록시아스는 턱을 더욱이 들쳐 올렸다.
턱선을 그리며 올라간 혀가 도로 내려간다. 송곳니가 뚫어 놓았던 자리는 이미 아물었다. 길쭉하게 흘러내린 모습으로 굳어지고 있는 핏자국만이 시작되려다가 끝난 흡혈의 흔적이었다. 록시아스는 아릿한 통증이 이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카밀에게 피를 마시지 않느냐며 꾸중하지 않았다. 카밀의 혀가 빗장뼈를 지났고, 카밀이 제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데도 그랬다.
툭, 툭. 마지막 단추가 끌러졌다. 카밀의 혀가 피부를 지그시 누르자, 훤히 드러난 가슴팍이 눈에 띄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가슴 중앙에 콧대를 묻은 카밀은 이내 록시아스의 셔츠 자락을 바깥으로 당겼다. 금발을 헝클던 손이 떨어지고 셔츠가 자연스레 록시아스의 몸을 벗어났다. 걸친 것 없어진 팔이 도로 카밀의 어깨춤으로 올려졌다.
미끈한 가슴을 부드럽게 맴돌던 입술이 유두를 스쳤다. 록시아스는 치올렸던 고개를 떨어트렸다. 제 가슴 부근을 간지럽히는 금발이 보였다. 그 뒤통수에 손가락을 꽂아 넣었다. 손바닥에 힘을 주고, 눌렀다. 서서히 무릎을 접어 가던 카밀이 단번에 꿇어앉으며 앞서 슬며시 물었던 유두에서 입술을 뗐다. 고개를 올려 자신을 쳐다본다.
“…….”
찰나 공유된 그윽한 시선으로,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카밀은 이왕 얽힌 눈빛을 구태여 풀지 않은 채 록시아스의 벨트에 손가락을 걸쳤다.
“서서 말고 앉아서 받아요, 록시.”
버클을 끌러 내다가 별안간 그렇게 말한 카밀은 벌떡 일어서 록시아스를 들쳐 안았다. 록시아스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를 침대로 데려갔다. 베개를 세워 놓은 침대 헤드에 등을 받치게 했고, 자신은 퍽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 벗겨지다 만 앞섶을 완전히 풀어 헤쳤다.
바지와 속옷을 긴 다리 아래로 끌어 내리는 것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찍이 발기하여 하의가 벗겨지자마자 튕겨 나와 아랫배에 딱 달라붙어 있는 성기를 감싸 쥐고 입술 안쪽으로 밀어 넣을 때까지, 하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누구도 망설임이 없었다.
허리에 힘을 풀며 헤드에 등을 더욱 깊숙이 기댄 록시아스는,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자리한 카밀의 정수리를 퍽 자상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하나 질고 추잡한 소음이 나도록 성기를 세게 빨아들이는 입술 탓에 머지않아 그만두었고, 카밀의 머리칼을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쥐고 당겼다. 그에 뒤통수가 젖혀져 턱이 들린 카밀의 입술에서 성기가 퉁겨지듯 빠져나갔다.
카밀은 타액이 샌 입술을 다물지 않은 채 록시아스를 바라보았다. 록시아스는 슬쩍 악력을 풀었다. 숱 빼곡한 머리칼이 희끔한 손가락 사이를 지나 제자리로 내려앉았다.
“…아팠어?”
도로 고개를 내리지도 않고, 입술을 닦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카밀에게 록시아스는 물었다. 카밀이 얼굴을 좌우로 간단하게 흔들었다.
“아니요.”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해.”
카밀의 어깨를 슬쩍 밀친 록시아스가 다리를 모았다. 그에 록시아스의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갖다 넣은 카밀이 록시아스의 어깨와 허리를 붙들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요, 록시. 궁금해서요.”
“뭐가.”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전처럼, 반갑지 않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눈길을 잠시 돌린 카밀은 억지 자백을 하는 이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걸 나 대신으로 쓸 거예요?”
‘저것’이 휴고를 뜻한다는 것은 부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나 ’나 대신’이 어디까지를 이르는 것인지는 정확히 듣지 않고서야 알기 힘들었다. 록시아스는 물었다.
“너 대신?”
“저거한테 날 대신해서 록시를 죽이라고 시킬 거잖아요.”
록시아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표정을 일그러트린 카밀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까, 록시가 날 불쌍하게 봤잖아요.”
“…….”
“쓸모없어진 내가 불쌍해요…? 아니, 아니야. 이걸 물어보려고 한 게 아니에요.”
카밀은 동요했다. 그는 전선이 닳은 조명처럼 위태로웠다. 불시 지나치게 환히 타올랐다가 돌연 새카맣게 죽었고, 바라보는 이까지 정신이 나가도록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깜빡거렸다. 록시아스가 보기에 그랬다.
“정신 차려.”
록시아스가 카밀의 뺨을 검지로 밀며 일렀다. 그때였다. 대뜸 록시아스를 밀어붙인 카밀이 언성을 높였다.
“저거랑도 이렇게 할 거예요?”
“이렇게?”
“나 대신이잖아요. 그럼 나 대신 록시 좆도 빨겠지. 틀려요?”
록시아스는 끔찍한 모욕을 받은 양 만면을 일그러트렸다.
“궁금한 거 다 물었어?”
물은 록시아스가 그에게 닿아 있는 손을 전부 뿌리치고는 침대를 벗어났다. 록시아스를 악력으로 붙잡을 수 없는 카밀은 멀어진 몸이 옷을 도로 꿰입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이윽고 철컥, 벨트가 채워졌고, 금속에서 떨어진 손이 공중을 가르더니 카밀을 향해 날았다. 파찰음과 함께 카밀의 고개가 꺾였다. 카밀은 마치 시위라도 하는 듯, 따위를 맞는 찰나에도 눈을 부릅뜨고 록시아스를 응시했다.
한 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연달아 몇 번 더 카밀의 뺨을 갈겼다. 이어서는 멀찍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셔츠로 눈길을 던졌다가, 카밀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따라와.”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는 록시아스의 얼굴이 돌아가고, 카밀은 흑발과 마주했다. 흑발은 금세 멀어졌다. 록시아스는 급한 사정이라도 생긴 것처럼 걸음을 빨리했다.
흑발을 쫓기 전, 카밀은 록시아스가 챙기지 않은 셔츠를 바닥에서 주워 들었다. 셔츠를 와락 구기며, 홧홧한 뺨을 빈손으로 닦았다. 록시아스의 발소리가 벌써 멀찍한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가늠하기는 쉬웠다. 손님방이었다.
***
손님을 다짜고짜 방에 감금시키고는 사라졌던 집주인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에 기댔던 등을 뗀 휴고는 자리를 털고 ‘평범하게’ 의자를 찾아 앉았다. 그러자마자 벌컥, 문이 열렸다. 조금이라도 굼떴다면 바깥소리를 엿듣던 꼴을 들킬 뻔했다.
막 방으로 들어선 집주인에게로 짐짓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 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채였던 록시아스가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탓이었다. 아니, 벗는 거야 그럴 수 있는데….
“강아지 산책이라도 다녀왔습니까?”
“휴고.”
이내 발치에 그림자를 드리운 록시아스가 짜증이 잔뜩 뭉쳐 있는 저음으로 그를 불렀다.
들켰나.
휴고는 평이한 낯을 유지하면서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렸다.
조심한다고 했으나 아무래도 기척을 훔쳐 들었던 것을 걸린 듯했다. 아예 모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만…. 잠청이 큰 죄도 아니련만, 록시아스가 죽을죄라 여기면 죽을죄였다.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그새 그 성질머리를 잊고 있었다. 안이했다.
“말해요, 록시아스.”
변명보다 잠자코 벌을 받는 편이 그나마 록시아스의 화를 덜 돋울 터였다. 휴고는 최대한 예의 차린 낯을 만들고 나서 록시아스를 올려다보았다. 록시아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아직도 내게 충성해?”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오래간만에 조우한 ‘추종자’가 그 행태를 감시하였으니 영 부자연스러운 의문도 아니었다. 휴고는 일순 질끈 감기는 눈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충성하지 않으면 굳이 당신을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역정이 깃든 낯에는 충직에 대한 감복이 조금이라도 스치지 않는다. 휴고는 다시 벌어지는 록시아스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또다시 질문이 날아왔다.
“내가 시키면 무엇이든지 할 거야?”
이 역시 조금 전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휴고는 즉답했다.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어차피 불복해도 죽지 않습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록시아스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등 뒤로 선연히 느껴지는 카밀의 기색을 낱낱이 흡수하며.
“그럼 내가 좆을 빨라고 시키면, 할래?”
“…….”
이번에는 영 대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휴고는 고민할 나위를 벌기 위해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스레 “흠….”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머리를 늘렸다.
단순히 충의를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럼 좆을 빨라고 진짜 시킬 셈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손가락만 스쳐도 질색하며, 팔을 함부로 움켰다는 이유로 동류를 죽인 적도 있지 않은가. 애초 록시아스답지 않은 물음이었다. 영 가늠해 보아도 질문한 저의가 잡히지 않았다. 하나 시간을 더 끌면 록시아스가 분노할 것이다.
휴고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시키면 하기야 하겠지요. 근데 안 시킬 거잖습니까.”
“내가 안 시킬 것 같아?”
“…시키려면, 하고 나서 날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죽이기는 왜 죽여?”
“당신에게 손댔다고 죽은 놈들이 한둘이어야지요.”
“그랬어?”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손가락으로 다 못 셉니다.”
‘이 정도 대답이면 족하겠지.’
휴고가 아닌 록시아스의 생각이었다.
“들었지.”
얼뜨기 같은 낯짝이 된 휴고에게서 등을 진 록시아스가 카밀을 면하고는 읊조렸다.
“아무도 널 대신 못 해. 카밀아.”
***
휴고 바이스만은 753년 전 록시아스에 의해 흡혈귀가 되었다.
인간일 적 그는 귀족 가문 출신 기사였으며 방탕한 행태를 일삼았다. 권력과 부를 남부럽지 않을 만큼 가졌으며 외모까지 출중하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에게 세상은 만만한 무대였으며 인생은 패배할 일 없는 도박판이었다.
그런 이에게도 몰락은 있었다.
그의 나라가 격전으로 무너졌다. 가문의 울타리가 스러졌다. 승전을 확신하여 전쟁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터였다. 집을 잃고 나서야 뒤늦게 빈 주머니를 알아차렸다. 권력과 부를 잃은 휴고에게 남은 것이란 젊음과 오만 그리고 절망이었다.
가난하면 마음대로 술에 취할 수도 없었다.
휴고는 엘리트 출신 가정 교사며 아카데미, 고급 서적 따위에서조차 배우지 못한 교훈을 파락한 삶으로부터 깨우쳤다.
함몰한 현실의 끝을 제정신으로 맞이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자살을 결심한 휴고는 마지막으로 진탕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종전 이후 주머니는 내내 비어 있었다. 결국 그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듯 빛나는 금발을 팔아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썩어 땅과 섞일 몸, 머리카락. 하루 더 지녀 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머리카락을 팔고 싶다.’
이발사를 대면하자마자, 휴고는 그렇게 말했다. 술 한 잔 마실 돈도 없어 머리카락을 팔아 치울 처지에 놓였는데도 귀족 말투가 여태 혀에 붙어 있었다. 그 탓에 괜스레 여기저기서 시비가 붙기도 자주 붙었다. 아차 싶었다. 머리카락을 사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지만 이발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야 손님이 들어올 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머리카락을, 팔고 싶습니다.’
말투를 의식하여 정중히, 휴고는 재차 말했다.
뒷모습만 보인 이발사는 흑발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드문데.
신기로운 색을 지닌 뒤통수를 뚫어지라 보며, 휴고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장사 안 합니까?’
이번에도 대답이 없으면 다른 이발사를 찾아갈 심산이었는데, 이발사가 용케 그 속내를 읽었는지는 몰라도 몸을 돌리며 눈길을 주었다.
흑발 이발사의 눈동자는 빨갰다.
‘금발이네. 잘 팔리겠다.’
그것이 록시아스와 휴고의 첫 대면이었다.
그날 휴고는 바라던 대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흡혈귀로 환생했다.
인생에 떠밀려 벼랑 끝에 발을 디디고 서 본 자들은 흡혈귀가 되면 ‘새 삶’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며 창조자에게 맹종했다. 휴고도 딱 그런 부류였다. 그는 자신의 ‘창조주’에게 영원을 바치리라 다짐했다.
그 다짐은 록시아스가 홀연히 사라진 뒤 맹종의 자리에 또 다른 감정이 앉을 때까지만 유효했다.
***
“그건, 아무도 널 대신 못 해. 카밀아.”
그렇듯 자신만만하게 단언한 록시아스는 칭찬해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 카밀은 생각했으며 곧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록시아스가 칭찬을 바랄 리 없을 터였다. 칭찬을 바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도리어 자신이 감복하여 록시아스에게 감사를 표하면 표할 상황이었다.
“…왜.”
록시아스는 새카만 속눈썹을 내리고는 시야를 좁히며 입술을 열었다.
“아무 말도 안 해?”
우뚝 선 카밀은 록시아스의 예상대로, 피어나는 꽃처럼 어여쁘게 활짝 웃으며 기뻐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울지도 않았다.
“네가 바라는 대답을 들려줬잖아.”
고작 대답으로 충족될 욕망이 아니었음을 록시아는 미처 알지 못한 것이다. 상대의 무지에 익숙한 카밀은 그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금세 록시아스의 발치에 도달했으며 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록시아스가 그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좁고 날카로운 콧날을 비추는 빛살이 조금 자리를 바꾸었다. 치켜뜬 붉은 눈동자가 인공조명을 받으며 새빨갛게 빛났다. 아래를 향한 카밀의 눈동자는 그림자가 고여 검붉었다.
“…록시.”
카밀이 손에 쥐고 온 셔츠를 펼쳐 들이밀었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록시아스는 일순 입꼬리를 꿈틀거렸다가, 발부리를 돌려 카밀에게 등을 보였다. 두 팔을 올리자 손가락 끝으로 셔츠 소매가 올라왔다. 휴고는 카밀이 주는 대로 옷을 받아 입는 록시아스를 대단히 진기한 불가사의를 발견한 이와 같은 눈길로 관조했다.
곧 셔츠로 어깨까지 덮인 록시아스는 스스로 단추를 잠그며 입을 열었다.
“휴고가 널 대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카밀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정면을 응시하며 눈썹을 좁혔다. 이어질 말을 기대하지 않는 그 표정을 마주하였으나 록시아스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휴고가 너 대신 맡을 일이 있는 거야.”
“내가 대신 맡을 일이 무엇입니까?”
말꼬리가 휘발되자마자 물어 온 것은 휴고였다.
“당신이 입을 옷까지 챙기는 예쁜이도 제치고 해야 할 일이 뭘까.”
뒷말을 느른하게 늘린 휴고는 무엇을 상기하려 애쓰는 듯이 눈동자를 천장으로 끌어 올렸다가, 곧 의자에 묻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록시아스, 당신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까?”
카밀은 록시아스가 죽음을 철회하기를 바랐으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수긍하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록시아스는 카밀이 오해를 거두고 상처받지 않기를 기대하며 자신에게 맹목적인 미소를 지어 주기를 상상하고 있었다. 휴고는 자신이 그 두 사람 사이에 드리운 내막의 틈을 비집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세 사람의 머리 위로 답을 찾지 못한 궁금증이 동동 부유하고 있었다. 흡혈귀들은 누가 먼저 답을 들을지 쉬이 예상했다.
휴고가 떠난 빈자리에 털썩 앉은 록시아스가 다섯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리듬감 있게 두드리다가, 몸을 기울여 턱을 괸 자세로 목소리를 꺼냈다.
“아마도.”
목표를 죽음으로 지정한 이래 자신을 따르던 흡혈귀들을 죄 떨구고 홀로 세상을 유랑했다. 그러나 죽기 위해 그들을 떠나기로 결심하지는 않았으니, 휴고의 물음에 맞다고 대꾸할 수도 있었고 아니라고 대꾸할 수도 있었다.
제 역사를 타인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록시아스의 대답은 휴고의 의문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나 휴고는 더 묻지 않고 발을 놀렸다. 방 한편으로 도달한 그는 책상과 얌전히 맞물린 의자를 끌어 록시아스의 앞에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앉았다.
휴고가 마주 앉자마자 록시아스는 괴었던 턱을 바로 세우더니 카밀 쪽을 턱짓하며 명령했다.
“카밀이 앉을 의자도 가져와.”
이 집에 손님으로 머무르고 있는 휴고였으나 록시아스는 명령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명령하는 쪽도, 받는 쪽도 당연시했다. 휴고는 즉시 몸을 세우고 방에서 사라졌다. 어디서 가져오라고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곧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만이 거주하는 널찍한 저택에 의자는 필요 이상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예쁜아, 앉으렴.”
휴고는 가져온 의자를 록시아스와 자신의 자리 가운데 세우며 놀림 투로 권했다. 이어 명령하는 록시아스나 그를 받드는 자신만큼이나 익숙하게 자리를 잡는 카밀을 노골적으로 흘겼다. 록시아스에게 거느림 당하며 살았을 터인 카밀의 몸짓이며 태도에서 ‘추종자’ 특유의 비굴함 따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예쁜이’라고 록시아스가 퍽이나 예뻐하며 키웠는지.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록시아스의 곁에 붙어 있던 놈 중 이런 자는 전무했다.
록시아스는 카밀과 휴고를 번갈아 보았다. 제가 창조한 자들을 훑는 눈망울에 인자함이나 애정은 희미했다. 그 무심함에 적응할 대로 적응한 두 흡혈귀는 록시아스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침묵했다.
꼰 다리 방향을 느긋하게 바꾼 록시아스가 이윽고 입술을 움직였다.
“카밀아.”
군림할 대상이 목전에 두 명뿐이라도 충분히 오만한 눈동자가 카밀에게 고정되었다.
“네가 이야기해 봐.”
무엇을요, 록시? 카밀이 묻기 전에 록시아스는 지시를 정리했다.
“휴고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카밀이 단번에 표정을 무너트렸다. 순종적인 눈동자가 발치로 추락했다.
카밀이 행하고 싶지 않으나, 남에게 맡기기는 더더욱 원치 않는 일을 휴고의 몫으로 인정하며 휴고에게 전달하라는 것이다. 록시아스는 잔인했다.
“그래. 얘기해 봐.”
휴고는 어딘지 신이 나 보였다. 입꼬리가 샐쭉 올라가 있었다. 카밀은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록시아스가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록시아스가 시키지 않은 일이므로…. 허벅지 위에 올린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마디가 희게 질린 주먹은 마치 대리석 조각상의 일부 같았다. 앞니로 물린 아랫입술도 꼭 그처럼 창백했다가, 놓였을 때 평소보다 농농하게 붉은 기를 띠었다. 그 입술이 달싹이다가 기운 없는 음성을 흘렸다.
“록시가 원하는 게 있어.”
휴고 자신이 알고 있는 록시아스라면 원하는 바야 금세 취했을 터다. 그러니 이렇듯 누군가를 앉혀 두고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눈앞의 록시아스는 다른 이의 입을 빌려 소원을 밝히려 한다. 그의 힘과 의지로도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원하는 것? 록시아스가?”
카밀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미간 사이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가 도로 금발에 덮였다. 일순 휴고는 록시아스의 취향이 금발이긴 하지만, 카밀이 검은 머리를 가졌거나 머리칼이 아예 없더라도 그를 거둬 키웠으리라 생각했다. 취향이 무용한 미모였다. 어디서 저런 것을 주웠는지…. 왜 주웠는지, 갈수록 궁금해졌다.
카밀의 시선은 아래를 향했으나 바닥에 머물지 않고 허공을 읽고 있었다. 그런 채로 그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지루해서, 다 지겹고 무의미해서 죽고 싶어.”
어째서 그토록 죽음을 희망하는지, 카밀을 설득하기 위해 록시아스가 꺼낸 이유였다.
“…라고 그랬어. 록시가.”
이야기 상대는 휴고였으나 카밀은 록시아스를 향해 눈동자를 올렸다. 책망이 고스란히 록시아스에게 전달되었다. 록시아스가 짧은 찰나 눈을 깜빡였다. 의자 팔걸이를 조용조용 두드리던 손짓이 동시에 멈췄다.
“흐음.”
휴고가 턱을 감싸며 숨소리를 냈다.
“그래서 내가 록시를 죽이기로 했고.”
록시아스를 집요하게 쫓던 카밀의 시선이 휴고에게로 날아갔다.
“네가 왔어.”
카밀은 휴고에게 공격성을 숨기지 않았다. 휴고는 그런 카밀을 건방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카밀이 간략하게 늘어놓는 이야기는 웃음이 자꾸만 삐져나올 만큼 흥미로웠다. 전부 예상 밖이었다. 자신의 등장이 록시아스와 피비린내 나는 어린 흡혈귀에게 그러하듯이.
“네가 있으니까, 이제 록시는 더 기다리지 않아도 돼….”
손길 드문 가구 위에 누운 먼지 덩어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쓸모없는 쓰레기가 된 양 무력했다. 해야 하는 말이 바싹 마른 감정과 함께 흩날리려고 한다. 카밀은 그를 붙잡아 기어이 입 밖으로 냈다. 록시아스가 그러라고 했기 때문에.
“네가 나 대신 록시를 죽여야 해.”
“이해가 안 되는데. 너는 록시아스를 죽일 수 없고, 나는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휴고는 물었다.
“나와 네게 어떤 차이가 있지?”
두 흡혈귀는 서로를 치훑었다. 금발에 붉은 눈, 서리 같은 혈색. 가지고 있는 색채가 비슷하니 그들은 얼핏 닮아 보였다. 게다가 한 창조자로 말미암아 탄생하였다. 뿌리가 동일했다.
그러나 그들을 구성하는 이외 요소는 죄 달랐다.
“난.”
카밀이 던질 말을 미리 부정하는 듯 휴고는 이맛살을 구겼다.
“록시를 사랑하고 넌 그렇지 않잖아.”
분노와 질투, 허망함이 함께 용해된 저음이 이어졌다.
“성공하기 쉽겠지. 망설이지 않을 테니까.”
휴고가 반박할 차례였다.
“내가 록시아스를 어떻게 여기는지, 네까짓 게 어떻게 알지?”
휴고는 아주 앳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묵은내가 풍기지도 않는 젊은 흡혈귀를 쏘아보았다. 카밀이 흡혈귀로 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일 년? 길어 봐야 백 년 남짓일 터였다. 그에게서는 아직 인간의 냄새가 났다. 인간의 육체에서 풍기는 추상적 내음을 그만큼 오래 산 흡혈귀라면 쉬이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새파란 카밀이 록시아스를 얼마큼 사랑한다고 한들, 제가 록시아스를 추앙한 시간과 마음이 그보다 곱절일 터라. 게다가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온 감정 중 가장 유약하다. 지독하기야 맹목적인 숭배가 훨씬 지독하다. 사랑 따위를 들먹이다니. 어리고 어리석으며 쓸데없이 감상적이었다. 저도 한때는 그랬다. 비웃음이 절로 났다.
흡혈귀가 된 이래 숫제 록시아스를 둥지처럼 여기며 따랐지만 록시아스는 누구의 삶도 건드려 본 적 없다는 듯 방랑했다. 그는 누구도 그를 따라오지 않길 바랐으며 귀찮게 여겼다. 그래도 그를 경외했다. 인생이 고달파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신도처럼 의심하지 않으며 맹목적으로 그의 발자국을 되밟아 걸었다.
그러기를 몇 세기였다. 영겁을 소유한 존재에게는 소박한 세월일 수 있으나, 록시아스에게 퍼부었던 충성심은 결코 소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록시아스는 변치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향한 충직이며 애정에 반응하지 않았다. 뭇 흡혈귀들의 경신을 독차지한 것을 호흡처럼 당연히 여겼다. 그리고 흡혈귀들은 창조자의 오만을 교리처럼 받아들였다.
어느 날, 휴고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창조자 록시아스의 오만은 무책임의 방증이었다. 미리 땅을 벗어났어야 할 영혼들을 묶어 두고는 그대로 방치하였으나 일말의 책임을 입지 않은 무성의함의 증명이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신실한 맹종은 명을 다했다.
복종을 지속하기 위해, 이슬처럼 증발한 록시아스를 찾아다녔다.
배신감과 분노를 알아차린 후에는 복수를 이행하기 위해 록시아스의 자취를 뒤졌다. 땅과 땅의 경계선을 수만 번 넘으며, 바닷물처럼 넘치고 흐르는 시간을 소비하며.
휴고는 록시아스가 사라진 이후를 상기했다. 자연스레 한 얼굴이 떠올랐다. 세월이 땅속으로 앗아 간 연인이었다.
죽음을 앞둔 연인을 살리고자, 함께 영겁을 지내고자 흡혈귀로 만들려고 했다.
하나 병상에 누운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유언했다.
‘빛에 거부당하는 인생은 저주야. 내게 저주를 내리지 마. 휴고, 당신한테는 미안해. 하지만… 나를 죽게 내버려 둬. 죽지 않는다고 사랑까지 영원한 건 아니잖아. 난 자신 없어….’
인간도 시체도 아닌 채로 일생 어둠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한다. 겨우 조우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먼저 떠나보내야 한다. 영원한 것은 자신의 육체뿐이다. 그 외 것은 죄 썩거나 바스러져 증발한다. 단연 축복이 아닌 저주다. 막 재탄생하였을 적에는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저주를 복록이라 여기며 신의 허울을 입은 사탄에게 무릎을 꿇었다.
창조자에 대한 맹신이 반감으로 뒤바뀐 경우는 록시아스의 곁을 맴도는 동안 어렵지 않게 보아 왔다. ‘저주를 내린’ 록시아스를 죽이기 위해 날뛰었던 수많은 흡혈귀를 알고 있다.
그들의 이름과 얼굴은 흐릿하나, 그들이 내뿜었던 분노의 열기는 여태 생생했다. 떠올리자면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그들은 현재 흡혈귀로서도 존재하지 못했다. 록시아스에게 새 생명을 부여받고, 록시아스로 인해 영생이 허물어진 자들이었다. 전부 록시아스를 죽이려다 도리어 본인의 삶을 갈취당했다.
흡혈귀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인간이었던 자신은 그저, 술 한 모금이 필요해 머리칼을 팔려던 것뿐이었다. 하나 록시아스는 머리칼을 자르고, 인간으로서의 생명 줄까지 거세했다.
다른 흡혈귀들 또한 비슷한 비화를 가졌다. 그들 대부분은 록시아스에 의해 괴물의 생을 강요당했다.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변신에 당사자들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반영될 수 없었다. 록시아스가 인간을 흡혈귀로 만드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큰 노동력이 요구되지도 않았다. 록시아스에게는 모든 것이 손쉽다. 고초를 겪는 자들은 항시 따로 있었다.
카밀은 휴고의 속내를 낱낱이 읽었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단언했다.
“록시를 죽이고 싶잖아.”
“내가?”
카밀을 조소하면서 동시에 그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록시아스가 카밀을 옆구리에 끼고 그저 백치처럼만 키우지는 않은 듯했다.
“그렇게 보이나?”
그렇다.
휴고는 흙탕물을 묻히고 바닥을 기던 처참한 삶을 새로이 씻어 준 창조자를 죽이고 싶었다. 복수하기 위해 록시아스를 찾아 헤맸다. 영생은 축복이 아니며 저주였다는 것을 깨우치고 나서부터. 떠나간 사랑이 당신은 저주받았노라 일깨워 준 다음부터.
카밀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여.”
이윽고 두 흡혈귀의 눈길이 그들을 관망하던 창조자에게로 옮겨졌다. 톡, 톡, 톡. 록시아스가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정지시켰다. 록시아스의 시선은 먼저 휴고에게, 그리고 카밀에게, 이윽고 도로 휴고에게로 가 머물렀다.
휴고는 무표정했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록시아스의 낯빛 역시 평이했다. 그들은 방금 먼 나라에 사는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어떤 목적을 품고 있는지 전혀 가늠하지 않는 듯이 맹숭맹숭한 얼굴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록시아스.”
오가는 침묵 속에서 더 위협당한 쪽이 먼저 입을 열 터였고, 그는 휴고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까?”
록시아스는 되물었다.
“내가 무엇을 묻길 바라?”
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찰나 번쩍이다가 새까맣게 침잠하고는 다시금 빛을 받은 시야로 록시아스가 서서히 가득 찼다. 록시아스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분노가 선연한 얼굴보다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더욱이 휴고를 두렵게 했다.
“예쁜이 생각처럼, 제가 정말 당신을 죽이고 싶은가. 궁금하지 않으냐고요.”
“안 궁금해.”
록시아스는 단칼에 대답했다.
“어차피 넌 날 죽여야만 하니까.”
그에 휴고는 격노와 쾌락이 혼재된 모순적인 기색을 덧썼으며, 카밀은 거듭 좌절과 우울에 숨이 막혔다. 록시아스만이 초연했다.
“휴고 네가 그러고 싶든 아니든 상관없어.”
“…당신다운 대답이군요.”
또다시 록시아스에게 휘말리고 있었다. 태풍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록시아스에게 휘둘리게 되었다. 휴고는 마음을 단단히 잡으려 노력했고, 그 증거로 온 힘을 손끝에 실어 주먹 쥐었다.
“나와 마주쳤을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록시아스는 느긋하게 몸을 세웠다. 휴고는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줄곧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까?”
보고 있지 않았다면 어디로 이동하는지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록시아스가 기척 없이 걸어 발을 세운 곳은 카밀의 의자 뒤였다. 카밀은 고개를 꺾어 록시아스를 올려다보았다. 허리를 숙인 록시아스가 카밀의 턱을 감싸며 휴고를 마주 보았다.
“카밀에게 들켰잖아.”
그 말인즉, 어리다는 이유로 카밀을 얕본 휴고에 대한 훈계이자, 감히 록시아스를 기만하려고 들었던 교만에 대한 경고였다. 인간 냄새를 다 털어 내지 못한 카밀에게 속내를 들켰다. 록시아스 자신이라고 몰랐을 리 없다, 고.
꽉 쥐었던 주먹을 냅다 편 휴고는 식은땀이 어린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댔다.
“그런 날….”
말을 하다 만 휴고가 꿀꺽, 큰 소리가 나게끔 목울대를 울렸다.
“아직 살려 둔 걸 보면 당신이 정말 죽고 싶긴 한가 보군요.”
속셈을 들켰으니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맹종이 보존된 체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볍게 장식된 감언으로 목숨을 보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록시아스를 죽일 자는 이 공간에, 아니, 전 세계에 오직 자신뿐이었다. 휴고는 입술에 박제시켜 두었던 억지 미소를 거두었다. 다신 꺼낼 일이 없으리라.
“하지만 당신 예쁜이는 퍽 슬퍼 보이는데요.”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었다. 휴고는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몰라도, 카밀이 록시아스의 애완견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며 피부로 느껴지는 실상이었다. 진한 마음은 냄새를 풍기는 법이었다.
혹 자신이 록시아스를 죽였을 때, 카밀이 자신에게 덤비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야 했다. 카밀이 애송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 그것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흡혈귀는 각자 특정 능력을 타고난다. 카밀이 어떠한 능력을 갖췄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안심하기에 일렀다. 괜스레 귀찮을 건더기를 남길 만큼 자신은 해이하지 않았다.
“복수한답시고 평생 따라다니기라도 하면 아주 귀찮을 텐데.”
탁. 휴고가 말하던 중, 카밀이 제 뺨을 덮은 록시아스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당신 말이라면 죽으래도 들을 것 같으니, 내 앞에서 약속을 받아 두세요. 당신이 죽은 뒤에도 날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들었어?”
잡힌 손목을 아랑곳하지 않은 록시아스가 검지로 카밀의 뺨을 푹 파이도록 누르며 물었다. 카밀은 입술을 열었다. 록시아스의 검지가 더욱 깊숙이 볼을 후볐다. 자그맣게 벌어져 망설이던 입술이 종래 답했다.
“들었어요, 록시.”
록시아스는 자신의 당부를 카밀이 배반하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다. 카밀을 향해 굽혔던 허리를 세우며 그의 뺨에서 손을 거두었다. 시선은 휴고에게로 건너갔다. 가식과 허울을 버린 휴고는 볼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큰시큰한 살기를 표출하고 있으니, 자신을 죽이는 일이야 카밀의 말마따나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성공하리라. 만족스러웠다.
카밀은 여태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을 닫을 생각도 않고 록시아스의 손목만 세게, 더 세게 움켰다. 흰 피부가 카밀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가까워질수록 창백하게 질렸다. 록시아스는 대화가 파하고 그 악력에 이끌려 침실로 끌려갈 동안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손님방에 홀로 남은 휴고는 더 이상 다른 이들의 기척을 엿듣지 않았다. 우두커니 앉아 움직일 순간만을 기다렸다.
되레 죽을 각오를 다지고 록시아스를 노렸다. 하나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영생을 저주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순적인 자신을 향한 혐오감만이 가슴속을 돌아다녔다. 목덜미부터 시작해 온몸이 차갑게 식는다. 긴장할 것도 없는데 긴장되었다. 긴장이 아니라면, 목적을 쉬이 달성할 수 있다는 예감에 대한 기쁜 전율이었다. 격렬한 감정을 정확히 명명할 수 없었다. 너무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