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빗줄기가 거셌다. 하지만 카밀은 궂은 날씨에도 바다를 헤엄쳐야 했다.
바람과 손잡은 파도가 휘몰아쳤다. 빗방울이 수면에 무늬조차 내지 못하고 해양에 스몄다. 카밀은 비처럼 가라앉고 떠밀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호흡을 위해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들면, 세차게 일렁거리는 부표 위에 고요하게 서 있는 긴 다리가 있었다. 목표는 언제나 그 다리, 한결같았다.
채찍 같은 물결이 살갗을 강타했다.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면 송곳 같은 비에 찔렸다. 수중은 언제나 그렇듯 얼음장이었다. 그래도 카밀은 이를 악물고 살아남기로 했다. 검은 천에 가려진 흰 발목을 오늘은 잡아 볼 수 있을까. 오로지 목표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탁. 카밀이 부표를 짚었다. 이제 록시아스가 말할 차례였다.
“육지로 돌아와.”
오늘도 카밀은 흡혈귀의 발목을 잡아채는 데 실패했다. 부표 대신 발목에 손을 뻗으면 되는데, 막상 다다르면 어김없이 부표에만 손을 댔다.
가슴을 부풀리며 호흡한 카밀은 도로 잠수했다. 헤엄쳤다. 바다에 발가락 끝도 담그지 않았으나 비로 인해 푹 젖은 록시아스가 모래사장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마를 덮은 흑발 끄트머리에 모인 물방울이 툭, 매끄러운 콧대를 타고 내렸다. 꼬았던 팔짱을 푼 록시아스는 무겁게 내려온 앞머리를 넘겼다. 빗물이 걸린 까만 거미줄 같은 속눈썹이 세찬 빗발을 버텼다. 록시아스는 단 일 초라도 카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해양을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선박조차 항해를 물린 지독한 날씨였다. 인간의 몸으로 부표까지 헤엄쳐 온 것부터 이미 기적이었다. 카밀이 육지로 돌아오던 중 별안간 파도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곧장 뭍으로 건져 줘야 하니 록시아스는 방심하지 않았다.
파도와 인간. 카밀은 둘 중 어느 쪽이 더욱 악착스러운지 겨루기라도 하는 듯했다. 록시아스는 찰나 수면 위로 올라오며 드러나는 형형한 푸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을 갈망하는.
자신이 카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처럼, 카밀 또한 자신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앞만 보는 것이다. 록시아스 자신만, 보는 것이다.
내가 저 인간의 원동력이다. 생존 본능의 근원이다. 또한….
지난밤을 상기하기 시작한 록시아스는 밤이 저물고 나서도 머리 위로 둥둥 부유하는 장면을 곱씹었다.
‘인간들은 몽정할 때 꿈을 꾼다던데, 너도 그랬어?’
‘…….’
‘응? 카밀아.’
‘…….’
‘대답 안 해?’
부끄러워하는 것 같으나 평소 수줍어할 때와는 표정이 미묘하게 달랐던 카밀이 한참 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옷부터 입고 오면 안 될까요?’
그제야 록시아스는 여태 맨다리인 카밀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카밀은 뒤꿈치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재빠르게 드레스 룸으로 사라졌다. 5분 경과. 새 잠옷을 걸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즉시 록시아스가 대답을 부추겼다.
‘카밀아, 이제 말해. 꿈을 꿨어?’
수치심이 치솟을수록 새빨갛게 달아오르던 입술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가, 이윽고 천천히 떨어졌다. 자백을 앞둔 죄수라도 된 것처럼 카밀은 목소리를 꺼내기 직전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네, 꿈을 꿨어요.’
이어 질문이 날아왔다.
‘어떤 꿈?’
카밀은 취조당하는 듯 곤란한 기분에 휩싸였다.
‘바다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어요. 매일 하던 대로요. 부표까지 갔다가 육지로 되돌아갔어요.’
말투가 평소보다 느리며 어눌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는 기어 들어갔다.
‘물에서 나와서, 그래서, 걸었어요.’
‘응.’
땅굴이라도 있다면 당장 숨어들 듯했던 카밀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더 이상 순수함만 담기지 않은 짙푸른 눈동자가 새카만 그림자 같은 록시아스를 담았다.
‘잘 왔어, 라고….’
그때 카밀은 치욕을 물리치고 있었다. 마치 자꾸만 정면으로 들이닥치는 파도를 떠밀고, 떠밀고, 또 떠밀 듯이.
‘록시가 말했어요.’
‘…….’
아.
카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키가 크고, 조금 더 똑똑해지고, 직접 만든 요리는 제법 맛있어졌고, 수영은 걷는 것만큼이나 익숙해졌다. 그러한 변화가 당연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그동안 고백을 준비할 나위는 없었을까. 꼭 이런 식이어야만 했을까….
여유를 주지 않고 흐르는 야속한 시간을 붙들어 원망을 쏟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밀은 찰나 동안 천천히… 받아들였다.
삶은 창피하고 괴로운 거구나.
하지만 죽지 못하니 부딪칠 수밖에.
‘록시는…. 록시는 옷을 입지 않고 있었어요.’
‘…….’
‘그리고 제게 가까이 와서, 말했어요.’
잠에서 막 깨어난 후에 당황하여 꿈을 곱씹을 겨를이 없었는데 불구하고 카밀은 장면 전부를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발바닥에 밟혔던 모래, 록시아스의… 몸과 목소리. 말투. 자신의 등줄기로 흐르는 물과 땀. 심장 소리.
‘카밀아, 왜 그러고만 서 있어, 라고요.’
‘…….’
‘그래서 제가 록시에게 얼른 옷을 입으라고 말했어요. 록시는 아니라고 하면서 고개를 저었고… 바람이 불어서 록시의 머리카락이 날렸어요. 록시의 얼굴이 가려졌어요, 저는.’
아주 어렸던 때, 닿으려고 했으나 실패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손가락에 감아 보길 원했던 흑발의 감촉.
‘록시의 얼굴이 보고 싶었어요. 머리카락도 만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록시의 머리카락을 넘겼어요….’
탁.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 둘러 잡은 손바닥의 차가운 체온. 온 살갗에 퍼져 나가는 소름. 짜릿함.
‘그런데, 그런데 록시가 제 손목을 잡았어요.’
‘응.’
‘떨고 있는 건 나라고, 말하면서… 떨지 말라면서… 그리고.’
심신을 결박하는 존재감. 강력하고 아름다운 눈빛.
‘제게 키스했어요, 록시가.’
영혼까지 삼키는 입술. 속을 까맣게 태우는 불덩이 같던 혀.
그 모든 환상은 카밀의 뼈에 새겨졌다.
파도를 뚫은 금발이 가까운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어제 일을 곱씹던 록시아스는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카밀의 환상이었다.
만족스러운 심정을 만면 아래로 감춘 록시아스는 끝내 뭍으로 도달한 기특한 카밀을 마중했다.
“카밀아.”
“하아, 하아….”
무릎을 짚고 서서 호흡을 고르는 카밀이 찡그린 눈으로 록시아스를 올려다보았다.
“잘 왔어.”
카밀의 몽환 속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뱉은 록시아스는 이어 등을 돌렸다. 거뒀던 미소를 도로 끌어올렸다.
표정은 숨겼으나, 이어진 말에는 일부러 웃음기를 더욱 많이 담았다.
“집에 가자.”
앞으로도 계속, 나만을 그리고 나만을 뒤따라.
가엾은 카밀. 하지만 넌 행복해질 거야. 완벽한 존재가 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차오르는 숨을 아직 진정시키지 못한 카밀은 또다시 멀어지는 인영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고, 쌕쌕거리며 대답했다.
“하아… 네에, 하, 록시.”
사박, 사박, 사박….
젖은 모래사장 위. 한 흡혈귀와 한 사람의 발자국이 짙고, 깊게 이어졌다.
***
수 세기에 걸쳐 숨 쉬었으며 앞으로 그 몇 배의 세월을 거듭할 흡혈귀, 록시아스. 카밀은 그가 영생에 질리다 못해 자살을 강구했으며, 그 수단으로 자신을 양육하기로 한 결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록시아스를 죽일 수 있을 리 없으므로 외면하고 있지마는.
결국에는 정신이 돌아 버려 록시아스를 죽일 마음이 생긴다고 가정해도, 햇빛마저 태우지 못하는 흡혈귀를 어떻게 살해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록시아스는 계획을 자세히 읊어 주지 않았으며 그저 강하고 똑똑해지기만을 거듭 강조할 뿐이었다.
어떻든지 불멸을 끝내기 위해서는 보통 인간이어서야 안 될 것이다. 이에 카밀은 자신을 모질고 거칠게 대하는 록시아스를 이해했다. 당근과 채찍만으로는 결코 록시아스의 염원을 이룰 만한 인재가 되지 못할 테니까. 당근은 거두고 양손에 채찍을 쥐고 혹독하게 휘둘러야 저처럼 부족한 인간이 그나마 단단해질 테니 말이다.
단 한마디 칭찬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의 포옹도 허락되지 않았다. 카밀은 입양된 후로부터 여태껏 그토록 쓸쓸하게 교육되었고 폭력적으로 양성되었다. 반쪽으로 잘린 록시아스를 향한 마음과 함께. 카밀은 그렇게 자랐다. 끊임없이 목마른 고독은 어느새 일상이었다.
그러나.
말라서 갈라지는 목을 긁고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카밀은 자신을 향한 록시아스의 희미한 애욕을 감지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없어지면 록시아스는 그를 죽일 또 다른 인간을 찾아야 했으므로 현재 ‘살아 있는 것 중’ 록시아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 감히 확신했기 때문이다. 종종 록시아스가 ‘귀한 카밀아’라고 불러 주기도 했고.
오만을 덧붙인 합리화. 카밀은 그것으로 간신히 목을 적시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에 보답이라도 받듯이, ‘치욕스러운 그날’ 이후 자신을 대하는 록시아스의 태도가 얼핏 상냥해졌다. 아주, 아주, 아주 미세한 변화였으나 워낙 록시아스의 애정에 목말라 있었던 카밀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한데 그 반가울 법한 록시아스의 기복에 카밀은 되레 나날이 위태로워져만 갔다. 욕심 탓이었다.
‘잘 왔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꿈’에 대해 털어놓았던 바로 다음 날. 어떠한 성과를 내도 냉정했던 록시아스가 훈련을 마친 자신을 그렇게 칭찬해 주었다. 꿈속에서 들었던 그대로, 똑같은 목소리와 똑같은 말로.
짠물만 들이켜다가 한 번 단맛을 경험한 카밀은 이전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갈증만 해결하면 되었으나 이제는 허기에까지 노출된 것이다.
허기는 기대였다. 꿈과 똑같이 ‘잘 왔어’라고 말해 주었던 록시아스가 다음번에는 자신의 손을 잡아 주고, 살결을 쓸어 주고, 포옹해 주고, 귓가로 따뜻한 숨결을 속삭여 주고, 차가운 바다에서 헤엄쳐 나와 하얀 입김을 뿜어 대는 자신의 입술에…, 하는 그런 기대.
하지만 록시아스는 정말이지 미미하게 상냥해졌을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미 단맛을 깨우친 카밀의 욕망은 다신 이전처럼 검소해지지 못할 것인데.
당연한 순서로 기대는 절망을 낳았다. 카밀이 환상으로부터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잔인한 예상을 통보받은 뒤였다.
록시아스가 사냥을 나간 새벽녘, 홀로 남은 카밀은 종종 원망 섞인 눈물을 훔쳤다.
차라리 계속 모질지 그랬어요… 나를 칭찬해 주지 말고,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더러 더럽고 음흉한 놈이라 욕하며 때리지 그랬어요. 그러면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만큼 록시를 욕심내지 않았을 거예요. 그저 눈만 마주쳐도 기뻤어요, 예전의 나는요.
록시아스의 체온이 단 한 번도 스친 적 없는 침대, 보드라운 천에 얼굴을 파묻은 카밀은 종종 욕망 섞인 눈물을 토해 냈다.
그런데 이제는 록시와 눈이 마주쳐도 기쁘지만은 않아. 눈이 마주치면, 입술도 맞대고 싶어졌어요. 칭찬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나는,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길 원해요.
물론 록시는 아무것도 이뤄 주지 않을 거예요. 알아요. 록시 잘못이 아니에요. 섣불리 기대하고 괜히 상상한 제가 나빴어요. 나는 나쁜 인간이 됐어요, 록시.
착한 아이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어.
죄송해요, 록시. 거짓말을 했어요. 저는 사실 착한 아이였던 적이 없어요. 아마도 록시는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록시가 어떤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록시는 다 알면서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잖아요. 내가 혼자 깨달을 때까지 나를 내버려 두잖아요. 외로워요. 항상 록시와 함께인데도 외로워요.
“하아….”
아, 록시.
“하.”
가짜 발작을 멈추기 위해 록시아스가 잇자국을 새겨 준 목덜미, 살갗 위로 둥글게 앉은 피딱지에 오른쪽 손바닥을 올린 카밀은 왼쪽 손바닥으로 방치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어루만졌다.
“흐!”
나는 록시가 선택한 인간이에요.
그래서 록시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많은 걸 배웠어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이런 감정까지, 배웠어요.
“으읏…!”
이렇게….
지저분한 것까지, 배워 버렸어요.
록시는 가르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나는 배웠어요….
***
사냥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요새 식욕은 자제력 부족했던 어린 시절로 역행이라도 한 것처럼 폭발했다. 허기를 참을 수 있는 기간은 최대 이틀이었다.
고장 난 듯한 미각이 문제였다. 어떤 피를 마셔도 끔찍하도록 불쾌한 맛만 느끼는 혀가.
황량한 고속도로 한가운데. 록시아스는 걷고 있었다. 아니, 멈췄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트럭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빠앙-!
고속도로 중간에 솟아오른 기다란 인영에 트럭 운전자는 클랙슨을 울렸다.
“씨발! 뭐야 저거, 사람이야?”
검은 그림자는 소란스러운 클랙슨에도 비켜서지 않았다. 운전자는 욕설을 내리 짓씹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트럭이 급정차하며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렀다.
“저 미친 새끼가….”
운전자는 헤드라이트 빛을 받아 하얗게 날아간 인영을 노려보며 차창을 내렸다. 동시에 인영이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하얀색 페인트를 부어 놓은 듯했던 얼굴이 이목구비를 드러냈다. 이윽고 그가 완전히 내려간 차창 앞에 서자, 운전자는 창턱에 팔뚝을 걸치고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 새벽에 고속도로 중간에 떡하니 서 있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틀림없었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록시아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위험한 자가 아닐 거라 오해한 운전자는 험상궂던 표정을 한층 누그러뜨렸다. 적당히 겁을 주면 비켜설 터였다.
“야 이 자식아, 미쳤어! 안 비켜?”
진짜 미친놈 맞군.
일갈에 행인은 도리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운전자는 자기 선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경찰 혹은 정신 병원에 신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볼품만은 정말이지 멀쩡하다 못해 영화배우인가 싶을 만큼 번지르르한 미친놈이 말했다.
“너 채식주의자야?”
“에이 썅, 재수 없게….”
달리던 차를 멈춰 세우고 묻는 말이 채식주의자냐니. 별 또라이를 다 본다. 운전자는 오늘 일진이 영 별로인 것 같아 혀를 찼다.
대답을 듣지 못한 흡혈귀는 먹잇감에게 다시 물었다.
“너 채식주의자야?”
“쯧쯧….”
“너 채식주의자냐고.”
“야,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 어?”
“대답 안 하면 그냥 먹을게.”
채식주의자의 혈액은 기름기가 적어 맑기는 했으나 맛은 별로였으므로 최근 입맛이 없는 록시아스는 이왕이면 사냥감이 가리는 음식 없이 섭취하는 자이길 바랐다. 하나 세 번이나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으니 그저 먹을 수밖에. 먹고 나면 알겠지. 맛이 없으면 뱉으면 되고.
슥. 록시아스는 창턱에 걸린 운전자의 두툼한 팔뚝에 손바닥을 올렸다.
젠장, 진짜 단단히 미친 새끼군.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뼈마디조차 새하얀 손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운전자는 팔뚝을 휘둘러 행인의 손을 뿌리쳤다.
“안 꺼져?”
“곧 갈 거야.”
턱. 행인이 읊조리며 차 문 손잡이를 당겼다. 차 문은 당연히 잠겨 있었다.
정말 잠겨 있었는데.
트럭 문이 흡혈귀를 환영하듯 활짝 열렸다.
“너만 먹고.”
둔한 운전자는 이제야 위험을 감지했다. 욕을 뇌까리며, 문을 도로 닫기 위해 상체를 뻗었다. 얼음장 같은 손에 팔이 재차 붙잡혔다. 당겨진다. 미친 행인은 힘이 너무나 셌다. 뿌리칠 수 없었다. 몸이 기울었다. 트럭 밖으로 떨어졌다.
죽음의 그림자.
자신을 덮쳐 오는 까만 형상에 운전자는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으나 목덜미에 무언가 닿는 순간, 하려던 말과 행동을 전부 잊고 반항을 거뒀다.
“…….”
맛없네.
남자의 피를 단 한 모금 마신 후 그러한 판단을 내린 록시아스는 입 안에 남은 혈액을 뱉으며 남자의 동맥을 엄지로 눌렀다. 꾸욱. 뚫린 잇자국 사이로 핏줄기가 뿜어졌다. 컥, 커억. 남자가 눈을 뒤집으며 입으로도 핏물을 줄줄 토했다. 록시아스는 두꺼운 목을 아예 둘러 잡았다. 악력을 가했다. 두둑. 단단한 목뼈가 수수깡처럼 쉽사리 부러졌다.
“못생긴 게 맛도 없어.”
목이 부러져 얼굴을 괴상한 각도로 비틀고 고꾸라진 먹잇감을 트럭과 함께 잿가루로 만들며, 록시아스는 자신의 목울대를 쓸어내렸다.
아직 목이 마르다. 계속 목이 마르다. 그러나 그 어떠한 피도 충분하지 못했다. 입맛이 까다로워졌다. 그러니까….
‘록시아스!’
몇 년 전.
‘여기, 제 목… 제 목을 물어 주세요! 여기예요.’
발작을 일으킨 카밀의 피를 맛본 뒤부터.
스스로 목을 조르기라도 할 듯 자신의 목을 감싸 잡은 록시아스가 아스팔트 바닥으로 향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여기서 한 명 더 기다릴까.
채워지지 않은 식욕 탓에 몸속 전체가 텅 빈 것 같았다. 머리는 팽팽 돌았다.
트럭과 남자였던 잿더미가 바람결을 따라 빙글빙글 돌다가 흩어져 검은 은하수처럼 날아가 고속도로를 떠났다.
자신의 목에서 손을 거둔 록시아스는 이내 이마를 짚었다. 어지럽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흡혈귀의 약점이라면 햇빛, 불, 그리고 허기였다. 개중 록시아스에게는 허기만이 해당되었다. 굶으면 죽지는 않으나 이성을 잃었다. 이전 자살하기 위해 이 짓 저 짓 시도하다 깨달은 바였다.
독극물을 마셔도 멀쩡했다. 피가 아닌 음식을 먹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굶는다면?
물음표가 떠오른 후부터 약 한 달 반 동안 록시아스는 식사를 중지했다. 처음 2주 정도는 견딜 만했다. 3주째부터는 괴로울 정도로 허기졌다. 그래도 버틸 만했다. 피를 마시지 않은 지 한 달째가 되던 날부터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그다음, 한 달 하고도 사흘째에는 난생처음으로 누워 봤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하고도 2주째, 록시아스는 영문 모를 장소에서 눈을 떴다. 공기까지 울리는 커다란 음악 소리. 빨갛고 파랗고 간혹 하얗게 터지는 조명. 술 냄새. 담배 냄새. 땀 냄새. 그리고 피 냄새.
아무리 록시아스라도 그 정도 짙게 쌓인 피 냄새는 처음 맡아 보았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클럽 안을 바글바글하게 채운 인파, 살을 맞대고 괴성을 지르며 춤을 추고 있었을 그 사람들 전부가 목을 물어뜯겼으니까.
파랗고 간혹 하얗게 터지는 조명도 온통 새빨간 공간을 제 색으로 물들이지는 못했다. 빨간 불빛만이 본연의 색으로 빛났다.
전쟁터.
제가 만든 집단 살육 현장을 둘러본 록시아스는 옛날 언제인가 호화로운 식탁으로 삼았던 전장을 상기했다. 자신이 눈뜬 곳은 그 전장과 다르지 않았다.
오래 굶으면 나도 모르게 사냥을 하는구나.
하나를 배운 록시아스는 발치에 엎드려 누운 시체의 등에 불을 지폈다. 불은 다른 시체로, 또 다른 시체로, 바닥으로, 기둥으로, 스피커로, 디제이 테이블로, 천장으로 옮겨붙었다. 새카만 연기로 은폐된 지하 클럽을 빠져나온 록시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는 어떤 방법으로 죽음을 시도할지 고민하며 귀가했다.
이마를 감싼 손바닥을 올려 머리칼을 쓸어 넘긴 록시아스는 이어 미간을 눌렀다.
어지럼증은 사냥을 거른 지 한 달 정도 돼야 나타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않고, 이상했다. 어떤 피든 간에 맛이 형편없어 식사량이 줄기는 했어도 아예 굶은 것은 아닌데, 어째서 현기증까지….
카밀이… 또 언제 발작을 하지?
하루, 이틀… 일주일 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카밀의 피를 머금었던 날을 계산하던 록시아스는 미간에서 뗀 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맨손이었다.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장갑을 끼는 것조차 잊고 사냥을 하러 뛰쳐나왔다.
특히 맛있다고 느꼈던 피가 있기야 했었다. 하나 한번 사냥한 먹잇감은 살려 두지 말자고 스스로 규칙을 세웠으며 꼬박꼬박 지켜 왔으므로 다시 그 피를 찾는 일은 없었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다. 세상에 깔리고 널린 것이 먹잇감이었으며 자신은 언제든지 사냥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특정인의 피를 이토록 갈구했던 적은 없었다. 마치 발작과도 비슷한 현상이다.
하기는 본래 흡혈귀에게 허기란 발작처럼 제어 불가능한 것이기야 했다. 제아무리 무수한 지식에 통달하고 수많은 자를 통독해 본 록시아스라도 식욕 앞에서는 한 마리 짐승일 뿐이었다.
록시아스는 고속도로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 툭, 두드렸다.
검지로 툭, 두드릴 때면 ‘이곳에서 한 번 더 식사한다’라는 선택지를 되뇌었다. 이어 중지로 툭, 두드릴 때면 ‘집으로 돌아간다… 카밀이 있는 집으로’라는 유혹에 이끌렸다.
허기를 무기로 앞세운 본능이 록시아스를 종용하고 있었다.
뭘 고민해.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어차피 먹어 봐야 기분만 더러워지는 맛이겠지. 배도 부르지 않고 말이야. 괜한 짓 말고 집으로 돌아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카밀에게로 가. 부드러운 목덜미를 물어. 간단하잖아. 카밀은 네가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어 줄 때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니까.
록시, 록시아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참는 건 너와 어울리지 않아. 언제나처럼 마음대로 저질러. 당장 로스톡으로 돌아가, 카밀의 피를 마시라고! 단번에 전부 삼켜 버리는 거야! 널 끔찍하게 괴롭히는 갈증을 해결할 쉽고, 유일한 기회야!
카밀이 죽을까 봐 그래? 그래서 망설이는 거야?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너, 지금 먹잇감 걱정을 하는 거야?
그까짓 거, 죽어 버리면 또 새로운 인간을 데려다가 키우면 되잖아. 안 그래?
안 그러냐고.
록시아스.
툭, 툭…. 록시아스는 손짓을 멈췄다. 그러나 선택의 갈림길에 선 자신을 한 방향으로 잡아끄는 유혹은 여전했다.
“…하.”
그냥 먹을까?
결단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순간이었다. 부웅! 헤드라이트를 켠 스포츠카가 길게 늘어지는 빛처럼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록시아스의 코트 자락이며 머리칼이 스포츠카를 쫓고 싶다는 듯이 그 방향을 따라 휘날렸다.
록시아스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지 않고, 뒷목을 감싼 채 고개를 느릿하게 돌렸다. 돌리다가, 정면이 하늘을 향했을 때 정지하며 눈을 떴다. 까만 동공이 새빨간 홍채를 모조리 채울 것처럼 확장되어 있었다. 마주한 보름달처럼.
밤하늘을 관망하던 록시아스는 고개를 바로 세웠고, 혼잣말했다.
“그래, 뭐….”
그냥 먹자.
흡혈귀는 스포츠카가 지나간 길을 그대로 밟았다.
***
“하, 미친….”
인간 말을 제대로 배울 적에 수도사와 함께 지냈던 탓인가, 비속어를 즐겨 사용하지 않는 록시아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빨간 스포츠카를 잡아 세워 운전자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피를 머금은 뒤였다.
“살려, 살려 주세요…!”
겨우 혈액 한 모금 빼앗긴 것으로는 죽지 않았다. 운전자가 록시아스에게 빌었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차를 닮은 새빨간 눈이 자신을 응시한다.
고삐 풀린 말처럼 질주하는 차를 뜀박질로 앞섰고, 맨손으로 잡아 세웠던 괴물이 “하.” 조소를 흘렸다. 치켜 올라간 왼쪽 입꼬리에 자신의 핏물이 아주 약간 묻어 있었다.
흡혈귀…!
상상, 혹은 책이나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괴물.
괴물이 입을 열었다.
“맛도 없고, 못생기고.”
“살려 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조용히….”
“목소리도 짜증 나는데, 그래도 살고 싶어?”
“제발….”
“자살하고 싶었던 적 없어? 있었을 것 같은데.”
신랄한 인신공격에도 운전자는 반박하지 않았다. 괴물의 입술이 닿았던 목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눈물만 줄줄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자칫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울컥, 상처를 가린 손바닥 새로 검붉은 핏물이 새어 나왔다.
“자살하고 싶었던 적 있지? 응?”
“아뇨, 아니요, 살고 싶습니다….”
“아니, 지금 살고 싶으냐고 물은 게 아니고.”
맛도 없고 못생기고 목소리는 찍찍 울어 대는 쥐새끼 같은 데다가 말귀도 못 알아듣는 멍청한 사냥감이었다. 록시아스는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뜨거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짜증 난다. 이딴 식사에 시간을 허비하다니 화가 났다. 이럴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 카밀을….
참. 카밀을 안 먹으려고 이 새끼를 따라왔지?
시야를 가르는 현기증으로 정신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아!”
별안간 소리를 지른 록시아스가 고개를 쳐들고 자신의 앞머리를 마구 구기고 흩트렸다. 그에 운전자는 자신이 괴물의 신경을 건드린 줄로 생각하여 어깨를 떨었다.
“왜!”
구둣발로 아스팔트를 연달아 내려치며 악을 지른 록시아스가 이내 홱, 벌벌거리며 자신을 응시하는 운전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너는 맛이 없어? 응?”
달빛으로 이목구비 선이 조각된 옆얼굴은 누가 보아도 유려했으나 그를 면한 운전자는 악몽에 사로잡힌 듯 공포에 질려 끄윽, 끄윽, 소릴 내며 오열했다. 눈물로 범벅된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몇 보 떨어져 있었던 괴물이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왜 죄다 맛이 없어! 왜!”
그가 본 마지막 얼굴이었다.
막 두 번째 사냥을 마친 록시아스는 여전히 배를 주렸다. 현기증은 일각이 다르게 심해졌다. 정신은 예민해졌고 감각은 날 섰다. 아주 멀리 있는 사냥감들의 박동조차 느낄 수 있었다. 고속도로 너머 풀밭을 지나는 하찮은 짐승들의 맥박까지도 잡아낼 수 있었다.
굶은 게 아니다. 그런데 육체는 마치 오랜 기간 기아에 허덕였다는 듯이 생존 위기를 감지하며 날뛰었다.
먹어, 먹어, 그냥 먹어!
카밀의 피를 처음 맛보았던 날에도 이렇게 두 명을 사냥했었다. 그때는 아직 미각이 잘 작동했으므로 그럭저럭 만족하며 배를 불렸다. 하지만….
이상함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검은 숲을 막 벗어났던 어린 시절은 한참 전이지 않나. 그토록 식욕이 치솟아 한꺼번에 한 명 이상 사냥했던 일은 최근 백 년 넘게 전무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문제의 시작을 짐작했어야 했다.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카밀이 잘 큰다면, 그렇게 세월만 흘려보내고 나면 지장 없이 목표를 이루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순탄할 줄로만 알았던 길에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었다. 카밀을 먹고 싶어 안달 난 록시아스, 자신.
내가 누구에게, 무엇에게 안달을 낸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충동은 낯익었으나 갈망은 낯설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록시아스는 자꾸만 조급해지는 걸음을 늦추며 이성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카밀을 먹으면 계획이 무산된다.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 용납할 수 없다. 모사꾼이어야 할 자신이 도리어 방해꾼이 되다니. 아무리 자신이라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먹지 마.
록시아스는 자신에게 명령했다.
카밀을 먹지 마.
그러자 현기증의 근원일 속삭임이 도로 튀어나와 귓가를 간지럽혔다.
먹어도 돼. 그냥 먹고 다른 인간을 찾으라니까?
록시아스는 속삭임에게 반박했다.
안 돼. 거의 다 컸어. 조금만 더 키우면 돼. 코앞이야.
속삭임이 지지도 않고 재차 말꼬리를 물었다.
조금만? 앞으로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하잖아. 그동안 이렇게 살 거야? 걔가 죽으면 다른 피 맛을 느끼게 될 수도 있을지 몰라.
끈질긴 것은 록시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년이 걸리든, 별거 아니야. 카밀은 내가 선택한 인간이야. 카밀 같은 인간을 또 찾을 수 있을까?
속삭임이 즉답했다.
찾을 수 있지, 그럼.
“…….”
일순 입을 다문 록시아스는 미간을 구겼다.
나는 왜 카밀을 먹지 않고 버티지?
갈증에서 자라난 충동이 속삭이는 대로 카밀의 피를 취하고 또 다른 인간을 데려와도 된다. 지구상에 인간은 벌레만큼 수많았으며 끊임없이 자손을 잉태했다. 샅샅이 뒤진다면 여러 방면에서 카밀보다 뛰어난 인간을 발견할 가능성도 있을 터였다. 또한….
그를 죽이는 데 특화된 살인 병기가 되기까지 오랫동안 두고 봐야 하니 이왕이면 예쁜 편이 좋았다. 총명함, 강인함, 충직함 따위는 자신이 만들어 주면 된다, 고 확신했기에 카밀을 골랐다. 안일했다. 날 때부터 덩치 크고 두뇌 회전이 빠른 인간을 택했어야 맞다. 카밀이 아무리 눈부시도록 아름다워도 미모로는 흡혈귀를 죽일 수 없으니.
죽음을 향한 포부는 어쩌면 카밀을 발견했던 그 순간부터 틀어졌는지도 모른다. 카밀의 특출난 외모에 사로잡혀 눈이 멀고, 카밀의 특별한 맥박에 귀가 먹고… 여태껏 접하지 못했던 최고의 피 맛을 감지한 본능에게 이성을 잡아먹혀 카밀을 데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과였다.
실지 둔했고, 또래보다 체구도 작았으며, 잘난 것은 얼굴뿐인 듯했던 카밀은 흡혈귀가 지정해 놓은 상향 표준에 빠르게 근접했다.
카밀은 이제 제법 머리를 굴릴 수 있게 되었고, 몸집은 또래와 비교할 수 없도록 단단해졌으며 키는 록시아스를 따라잡기까지 단 5cm를 남겨 두고 있었다. 외모는 마치 질 줄 모르는 꽃처럼 나날이 만개하기만 해서, 외출이라도 할 때면 괜한 눈길을 받기 일쑤라 가둬 두고 싶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충직함과 순정은 또 어떠한지. 카밀은 훈련 잘된 개보다도 속을 덜 썩일 것이다. 록시아스를 향한 순수한 애착은 줄리엣을 따라 독극물을 마신 로미오의 사랑보다도 진할 것이다. 순수함이 곧 순결하지는 않았으나…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카밀은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인재로 성장했으며, 앞으로는 더욱 완벽해질 터.
뛰어난 인재는 준비되었다. 이제 시간만 할애하면 됐다.
목숨을 버리고자 했던 결심을 겨우 욕구 따위에 패배해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그토록 혐오하던 멍청한 먹잇감들이며 동료 흡혈귀들이나 저지를 법한 실수였다. 록시아스 자신은 그러면 안 됐다.
자신에게 배신당하고 싶지 않은 록시아스는 저택에 다다랐다.
점점 악랄해지는 현기증이 시야를 뒤흔들고 있었다. 지문 인식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보였다. 아니, 세 갈래… 네 갈래…. 몇 번이나 허공을 가른 손가락이 겨우 인식기 위로 안착했다.
오늘 밤만 무사히 보내고… 내일 다시 사냥해. 아무리 맛없어도, 역류할 만큼 배불리 마시는 거야. 그럼 현기증도 사라지고, 카밀을….
삑. 개문을 알리는 기계음이 퍼졌다.
동시에 삐익-. 이명이 관자놀이를 관통하기 시작했다. 현관으로 들어서던 록시아스는 눈썹을 짚었다. 삐익-.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삐익-.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카밀이 있는….
쿵, 쿵! 카밀의 박동이 닫힌 문도 뚫고 복도까지 울리고 있었다. 쿵, 쿵! 잠을 자는지 소리가 평소보다 얌전했다. 쿵, 쿵! 뭇 사냥감들이 풍기는 악취와 달리 비누 냄새가 묻어난 향기로운 살갗 냄새가 박동과 함께 새어 나왔다.
쿵, 쿵! 침실에 다다르자 카밀의 맥동이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 선명했다. 침실 문은 록시아스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 뼘 정도 열려 있었다. 우뚝, 록시아스는 멈춰 서며 조금 휘청거렸다. 삐익- 이명과 쿵, 쿵! 맥박 소리가 현기증에 보탬이 되어 머릿속을 더욱 엉망으로 짓뭉개고 있었다.
카밀을 먹으면 안 돼. 카밀의 향기가 난다. 카밀을 먹으면 안 돼. 카밀의 심장이 뛰고 있다. 카밀을 먹으면 안 되지만, 쿵, 쿵! 거의 다 자란 심장이 향기로운 피를 가득 머금은 채 흡혈귀를 유혹하고 있었다.
끼익, 문을 밀어젖혔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이 탁, 벽에 부닥치기 전 록시아스는 이미 잠든 카밀의 전신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르게 누운 카밀은 새액, 새액, 가볍게 호흡하고 있었다. 들숨 날숨에 따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고, 그를 따라 움직이듯 흡혈귀의 까만 동공이 확장되었다가 축소되기를 반복했다.
수면 중인 인간은 아주 무방비했다.
흡혈귀가 먹잇감을 빤히 내려다본 지 약 삼십 분. 카밀은 그제야 피부로 쏟아지는 송곳날 같은 시선을 감지했다.
찰나 뒤척인 카밀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잠긴 목소리를 냈다.
“…록시, 왔어요?”
“…….”
흡혈귀는 이명과 맥박에 청각을 점령당했으므로 카밀의 말소리 따위 듣지 못했다.
“…록시?”
카밀은 눈을 비벼 잠기운을 완전히 떨쳐 낸 뒤, 록시아스를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이상했다. 록시아스는 어딘가 고장 난 듯 보였다. 붉은 월광 같은 홍채 속 까만 동공이 확장과 수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월식이 거듭되는 풍경 같았다.
“록시?”
숨은 쉬기나 할까, 싶도록 음전하게 호흡하던 입술은 말할 때가 아니고서야 언제나 예사스럽게 다물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침묵하면서도 살짝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비어지는 숨소리는 꼭 오래 달음박질한 사람처럼 격양되어 있었다.
“록시.”
부자연스러운 록시아스의 상태에 얼굴을 와락 구긴 카밀은 누인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록시아스에게로 팔을 뻗으며 물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탁!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손목을 잡아채는 거센 악력이었다. 손목이 끊길 듯한 통증에 미간을 더욱 찡그린 카밀은 푸른 혈관이 불거진 하얀 손등을 다른 쪽 손으로 감쌌다.
“록시, 무슨 일….”
그리고 그때.
걱정 어린 말을 미처 다 뱉지 못한 카밀은 도로 침대에 뉘어졌다. 얼음을 덧쓴 듯 시린 손바닥에 두 팔목이 결박되어 정수리 위로 끌어 올려졌다. 본능적으로 버둥거린 다리는 록시아스의 무릎에 허벅지를 찍혀 얌전히 고정되었다.
“로, 록시?”
흡혈귀에게 포박당한 카밀은 반항할 생각이 없었으나 영문 모를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했다.
“쉬이….”
입술을 모은 록시아스가 바람 소리를 냈다. 이어 입꼬리를 쭉 찢어 웃는다. 첨예한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격렬히 크기를 바꾸던 새카만 동공은 확장된 채로 정지했다.
“카밀아.”
젖살이 거의 다 빠져 제법 남자에 가까워진 카밀의 얼굴에 얼굴을 붙인 록시아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읊조렸다.
“미안.”
“왜….”
왜 미안해요?
묻고자 했던 질문은 목구멍 아래로 삼켜졌다.
“아, 아…!”
흡혈귀는 송곳니를 정확히, 맥박이 울리는 지점을 찾아 찔러 넣었다. 칼날 같은 선단이 살결을 짓누르고 침범해 들어갔다. 이어 질긴 동맥에 구멍을 냈다. 상처 입은 혈관이 퐁, 퐁, 피를 뿜어냈다. 붉은 방울이 흰 살갗 위로 올라와 맺혔다.
꿀꺽, 첫 모금.
“하.”
찰나 목덜미에서 입술을 뗀 록시아스는 턱을 쳐들더니.
“진짜 맛있다….”
핏물 묻은 입가를 활짝 당겨 웃었다.
“…….”
꿀꺽. 카밀은 만면이 희열로 물든 흡혈귀를 올려다보며 넘어가는 것도 없이 마른 목을 움직였다.
다시, 흡혈귀가 목덜미를 물었다.
꿀꺽, 꿀꺽, 꿀꺽…. 먹잇감을 포박하는 것도 잊은 흡혈귀는 둘러 잡았던 손목도 놓은 채 식사에 집중했다.
“읏!”
혈색이 빠른 속도로 창백해져 가는 카밀은 하얗게 질린 아랫입술을 물며 혈액이 빨리는 고통을 견뎠고, 자유로워진 손을 꾸물꾸물 움직였다.
지금이 기회였다. 록시아스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줄곧 해 보고 싶었던 것을 이룰 기회.
드디어!
카밀은 턱 아래를 간지럽히는 흑발을 거머쥐었다.
꽉, 세게, 더 세게…!
뒤통수가 휘어 잡혔으나 아랑곳하지 않은 흡혈귀는 간혹 고개의 각도만 바꾸며 혈액에 취해 갔다.
아, 너무 향기로운 피.
생명을 갈취당하는 중이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은 카밀은 휘감은 흑발에 코끝을 갖다 댔다.
아, 록시한테 내 피 냄새가 나.
합의 없이 이루어진 식사는 포식자와 피식자를 모두 만족시켰다.
카밀은 혈관이 비워짐에 따라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이런 때에 넋을 놓아서는 안 됐다. 흑발을 더욱더 강하게 움켰다. 위로 조금 당기자 끌려온 록시아스의 이마가 제 턱과 달라붙었다.
자신의 피를 게걸스레 취하는 록시아스를 눈동자만 내려 확인한 카밀은 자꾸만 미소가 맴도는 입술을 살짝 움직여 벌렸다. 이어 혀끝을 내밀었고, 콱, 앞니로 깨물고 씹었다. 원하던 바대로 입 안에 비릿한 향이 감돌기 시작했다. 핏물이 새어 나오는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입술이 혈액으로 도색되어 한층 더 농농해진 카밀은 흑발을 또다시 위로 당겼다. 식사를 방해받은 록시아스가 그제야 자신에게 시선을 뒀다. 결국 미소를 숨기는 데 실패한 카밀은 웃음소릴 내며 속삭였다.
“여기에도 피가 있어요….”
붉은 눈동자가 자신의 입술에 시선을 던졌다. 순조로웠다.
“아까운 피가 흐르고 있어요.”
변성기를 지나 낮아진 부드러운 음성이 미끼가 되어 흡혈귀를 끌어당겼다. 록시아스는 천천히… 느릿하게 턱을 올렸다. 던져진 먹이를 살피는 경계심 많은 짐승처럼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슬쩍 기울이며, 피로 젖은 입술을 세심한 시선으로 훑었다.
“여기도 빨리 먹어 주…!”
이어 마저 부추겨지기 전,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댔다. 아까운 피가 낭비되고 있는 입술을 빨았다. 벌어진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입천장이며 치아까지 닿지 않은 곳 없이 모조리 핥았다. 피가 샘솟고 있는 혀끝을 입술 사이에 넣고 빨아당겼다.
목적을 달성한 카밀은 눈을 감고 행위에 집중했다. 록시아스가 자신 안에 더욱더 오래 머무르도록 하기 위하여 먹힐 듯 먹히지 않을 것처럼 혀를 미끄러뜨렸다.
먹잇감이 얌전하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둥그렇게 굴려지고 휘어지며 도망치는 혀를 자신의 혀로 결박하고 싶다는 듯이 감아올렸다. 그러나 향긋한 혀끝은 자꾸만 멀어졌다.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자신의 입 안으로 불쑥 들이닥쳐 혓바닥과 입천장, 어금니를 누르며 핥아 피를 묻혔다가 이내 갑자기 빠져나가 멀어졌다.
괘씸한 먹잇감이었다.
더는 자신을 약 올리지 못하도록, 록시아스는 카밀의 얼굴을 감싸 고정했다. 수시로 고개 각도를 바꾸며 카밀의 입 안을 탐닉했다. 피로 젖은 손과 입가가 말갛던 카밀의 뺨을 적색으로 더럽혔다.
깨물린 혀의 상처가 크지 않았으므로 머지않아 피는 멈췄고, 록시아스는 여전히 카밀과 입술을 포개고 있었다. 목덜미 가득 솟아나는 피를 직접 마셨을 때보다, 목구멍이 도로 마를 정도로 약간의 피만 새어 나오는 입 속이 더… 더 향긋했다.
입 안이 혈액 아닌 타액으로 축축해졌다. 불그죽죽한 입가가 재차 투명하게 젖어 들었다.
이번에는 카밀이 록시아스의 뺨에 손바닥을 포갰다. 앞으로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욕심은 매초 불어났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오래….
록시아스의 혀 짓이 점점 둔해졌다. 반면 카밀의 불안은 점점 더 날뛰었다. 영원히 록시아스와 입술을 맞대고 싶었다. 피를 다 빼앗겨도 괜찮았다. 결국 죽겠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이렇게 맞는 죽음이라면 백 번도 겪을 수 있었다.
카밀은 시트와 바짝 닿아 있던 등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록시아스의 혓바닥을 누르며 깊숙한 곳까지 혀를 밀어 넣었다.
이내 상체를 완전히 세웠을 때, 그의 뺨을 짓누르던 손바닥이 떨어져 나갔다. 카밀은 제 허벅지 위로 안착한 손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가, 입술에 입술을 더욱 파묻으며 고개를 사선으로 꺾었다. 코끝이 휘며 스쳤다. 록시아스의 어깨를 눌렀다. 얽힌 다리를 풀고 무릎을 굽혀 세웠다.
흡혈귀는 이제 먹잇감의 아래였다.
그사이 멀어진 두 입술이 핏물 섞인 분홍빛 타액으로 간신히 연결되어 있었다.
툭, 툭. 상처가 아물지 않은 목덜미로부터 삐져나온 핏물이 록시아스의 뺨과 턱으로 낙하해 미끄러졌다.
두 사람은 뒤바뀐 위치에 놓인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
묘한 시선의 교류와 침묵을 먼저 끊어 낸 쪽은 카밀이었다.
“록시.”
자신의 몸속에 돌던 피을 뒤집어쓴 록시아스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덜 마른 혈흔이 손길을 따라 길게 번졌다. 이어 카밀은 살짝 벌어진 입술 끝을 엄지로 누르며 마저 말했다.
“어지러워요… 죽을 것처럼 어지러워요.”
피를 훔친 엄지를 제 윗입술에 갖다 대며 계속 읊조렸다.
“록시가 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데요, 록시.”
“…….”
“오늘 발작도 안 일으켰는데, 왜 날 먹었어요?”
물음이 끝나는 순간, 록시아스가 재빠르게 카밀의 어깨를 움켰다. 초를 세기도 전이었다. 그들은 다시 제 위치를 찾았다.
상위, 포식자, 록시아스.
하위, 피식자, 카밀.
배부른 포식자가 입을 열었다.
“먹고 싶어서.”
붉은 홍채를 잡아먹을 듯 확장되었던 새카만 동공은 어느새 제 크기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말 안 했나.”
록시아스는 조곤조곤 말하며 카밀의 목덜미로 시선을 내렸다. 송곳니가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내리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 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힘이 강했다. 카밀이 괴롭다는 듯이 눈썹꼬리를 내렸다.
“윽….”
“내가 먹어 본 피 중에 네 것이 제일 맛있어.”
“…….”
“그래도 널 죽이면 안 되니까 참았거든.”
“아… 목, 아파, 요.”
“근데 난 참는 걸 너무 못해.”
하. 말꼬리에 아스라한 한숨을 딸려 내보낸 록시아스는 카밀의 목에서 손바닥을 거뒀다. 깊었던 잇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카밀은 내내 크게 느껴지던 맥박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은 제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새로 묻어나는 핏물이 없었다.
“어떻게….”
“아팠으면 미안.”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먹잇감의 상처를 지워 낸 록시아스는 그만큼 말끔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카밀의 위에서,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래도 안 죽였으니까 됐지?”
선처를 구하는 물음이 아니었다. 자신의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물음이었다. 그에 카밀은 고개를 한 번 까딱, 끄덕였다. 하나 솔직한 심정을 내포한 입술은 아무런 대답도 뱉지 못한 채 꾹 다물려 있었다.
그대로 죽었으면, 더 행복했을걸.
내 피가 못 참을 만큼 맛있었으면… 정말 끝까지 못 참아야 했잖아.
또한, 록시아스는 어떠한 심정을 감추고 외면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목욕해.”
“…네, 록시.”
“시트도 새 걸로 바꿔.”
“네.”
록시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을 나섰다. 1층 욕실을 향했다.
피로 물들어도 새카만 흑발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다음, 카밀은 침실에 붙은 욕실로 들어섰다.
1층 욕실. 록시아스는 셔츠 단추를 끌러 내며 고개를 젖혔다. “하….” 배꼽 아래에서부터 끌어 올려진 숨이 무거웠다.
2층 욕실. 고개를 숙인 카밀은 뒷덜미를 잡아 웃옷을 단번에 벗었고, 타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1층 욕실. 록시아스는 거듭 한숨을 쉬었다.
2층 욕실. 카밀은 하의 또한 망설임 없이 벗어 내렸다. 이제는 어린 티보다 젊은 느낌이 더 짙은 나신이 완전히 드러났다.
1층 욕실. 록시아스는 벨트에 손가락을 붙였다가, 뗐다.
2층 욕실. 카밀은 수도꼭지를 열었다. 세찬 물줄기가 터져 나와 욕조 바닥을 내리쳤다. 고요하며 건조했던 공기가 소란스러워졌으며 습해졌다. 카밀은 조금 전까지 흡혈귀에게 피를 빼앗겨 창백해진 만면을 마른 손바닥으로 쓸어내렸고, 손끝이 입술에 닿았을 때 동작을 멈췄다.
내 안에 아직 록시의 숨결이 남아 있을까.
록시 안에는 아직 내 피가 남아 있겠지.
1층 욕실. 록시아스는 드디어 벨트 버클을 풀었다.
2층 욕실. 자신의 속에 흡혈귀의 숨결이 남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었으나, 그토록 닿기를 염원했던 흑발의 감촉은 지문 아래 스민 듯이 손바닥 가득 또렷이 맴돌고 있었다. 그 손으로, 카밀은 자신의 허벅지께를 만졌다. “하….”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젖혔다.
1층 욕실. 록시아스는 자신의 맨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당혹감이 고스란히 어린 눈동자로.
2층 욕실. 욕조 속 수면이 상승할수록, 카밀의 호흡은 가빠지고 있었다. 불거진 목울대가 치솟았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예전처럼 미숙하지 않은 카밀은 음습한 욕망에 더는 수치스러워하지 않았으며 당황하지도 않았다. 태연하고 능숙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카밀과 달리 진득한 성장기를 선사 받지 못했던 최초의 흡혈귀 록시아스는 어떠한가.
1층 욕실. 텅 빈 욕조는 채워질 줄 몰랐고, 록시아스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허벅지 사이, 몇 세기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욕구가 드디어 존재감을 드러낸 탓이었다.
뭐지?
언젠가부터 만사에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던 록시아스는 끝내 의문했다. 이러한 신체 변화가 의미하는 바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내가 왜?
“…….”
화석처럼 굳은 권태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육체의 생김이 인간과 완전히 동일하더라도 쓰임에서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특히 생식에 관련된 부분이 그랬다. 종족 번식을 하고자 하면 특정 행위가 아닌 누구에게든 자신의 피를 나누기만 하면 되었기에 생식기는 록시아스에게 ‘다소 거추장스러운 장식’일 뿐이었다.
성욕에 있어서도 그랬다.
본디 인간이었던 흡혈귀들은 성적 쾌락을 잊지 못하여 후대를 생산할 수 없음에도 번식 행위를 이어 나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피로 배 속을 채우는 포만감보다 성적 충족감이 더욱 만족스럽다고 했다. 록시아스는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욕으로 말미암은 희열은 고사하고 결핍조차 느껴 본 바가 전혀 없었으니까. 검은 숲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록시아스에게 최고의 환희란 포만감이었다.
포만감. 그래, 그것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에 록시아스는 조금 전의 식사를 탓했다. 특정 피에 그토록 이끌렸던 적이 처음이니 육체적으로 어떠한 증세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본래 정신과 육체는 아울러 움직이는 것이다.
“…하.”
록시아스는 줄곧 튀어나오는 한숨을 내리눌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타인의 몸이며 삶조차 마음대로 휘두르던 흡혈귀는 정작 지금 자신의 몸을 어찌 달래야 할지 고뇌하며 욕실을 서성거렸다.
두터운 이지를 겸비한 록시아스는 물론 이런 상황을 단번에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론적으로만.
헐벗은 몸으로 백치처럼 헉헉대는 인간들이며 인간이었던 흡혈귀들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었다. 대단히 추잡한 광경이었다.
지금, 아무리 보는 이가 없다고 하여도 록시아스는 그따위 천한 짐승과 같은 행태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다.
하체가 영영 이런 꼴로 머무르지는 않겠지. 록시아스는 확신하며 욕조 앞에 섰다. 수도꼭지를 열었다. 차오르는 물에 손끝을 적셔 얼굴을 씻었다. 살갗에 말라붙어 있었던 피가 녹아 흘렀다. 굳으며 사라진 듯했던 향기로운 피 냄새가 도로 코끝을 맴돌기 시작했다. 물에 희석되어 분홍빛을 띤 혈액으로 젖은 손끝을, 록시아스는 입가로 갖다 댔다. 무의식에….
미쳤지.
만취한 듯 눈꺼풀이 풀리던 록시아스는 혀끝을 내어 손가락을 핥기 직전, 수도를 타고 흐르는 물처럼 떠나가려던 정신을 바로잡았다. 일순 아득해졌던 물소리가 도로 또렷해졌다. 욕조가 어느새 반이나 차 있었다.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담그기 전, 록시아스는 먼저 샤워기 아래 서서 피부를 깨끗이 닦았다. 카밀의 피가 한 방울도 남지 않도록. 카밀의 피 냄새가 조금이라도 섞인 물속에서 목욕을 한다면 도로 이성을 잃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갈 것만 같았다.
분명 배가 부른 상태이다. 하나 자신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완벽히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성장과 정지만 겪어 보았던 록시아스는 도태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불쾌했다.
커다란 변화가 찾아오는 데는 사소한 계기면 충분했다.
무엇을 잃고, 얻는 것은 일순간에 이루어졌다.
반면 깨우치기까지는 몇 날 며칠이 소요될지, 굵직한 역사를 밟으며 살아온 흡혈귀조차 알 도리가 없었지만.
핏물을 흔적 없이 닦아 낸 후, 욕조에 발끝부터 담그고 서서히 전신을 내렸다. 잔잔했던 수면이 물결치며 올라와 이윽고 바깥으로 넘쳐흐른 물이 타일 바닥을 때렸다. 록시아스는 세차게 요동하는 물결 아래, 윤곽이 곡선으로 구겨지는 자신의 하체를 들여다보았다.
그대로였다.
손바닥에 물을 담은 록시아스는 이미 말끔한 얼굴을 거듭 씻었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거듭 얼굴을 적시고, 적셨던 록시아스는 잠긴 수도꼭지를 다시 열었다. 세찬 물줄기가 수중을 가른다. 세수할 때 나는 소음보다 더 큰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머지않아서 많아진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쳤다. 록시아스는 제 뺨을 후려치는 기분으로 계속해서 얼굴에 물을 끼얹고 있었다. 부닥치고 떨어지고 흩어지는 물소리가 불협화음처럼 섞인 채 퍼져 시끄러웠다.
하지만 아직도, 록시아스는 수중에 머리를 처박고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장을 뚫고 내려오는 카밀의 소리가 너무 선명했다.
빼앗긴 피를 생산하려 열심히 활동하는 젊은 심장의 박동이 너무나 우렁찼다. 구멍 난 천장에 빗줄기가 새듯, 습한 호흡에 섞인 저음이 아래로 끊임없이 흘러내려 왔다. 척척한 마찰음도 함께였다.
…록시, 아… 록시.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록시아스는 고개를 들어 올려 천장을 쳐다보았다.
피가 말라붙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고로 위층에서 새어 들어오는 축축한 소란은 노골적인 음란이었다.
카밀이 언제부터인가 종종 자위한다는 것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그 행위를 견인하는 욕정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카밀이 몽정을 했을 때 꿈에 나온 상대가 자신이라고 고백했으며, 간혹 사냥을 다녀온 새벽녘에 지금처럼 제 이름을 부르는 음습한 목소리를 엿들었기 때문이다. 은밀한 행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실로 들어서면, 끈적한 내음이 카밀의 인사보다 먼저 자신을 반기기도 했었고.
스스로 달래는 카밀을 여태까지는 방치하고 있었다. 그야 흡혈귀가 되어서도 버리지 못하는 뿌리 깊은 본능을 통제하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또한 자신이 도화선인 정염은 곧 자신을 향한 순정의 굳은 기반이었기에 구태여 억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아… 록시….
“…….”
물속으로 몸을 더 깊게 파묻은 록시아스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욕조 난간을 세게 부여잡았다. 허벅지 사이가 불편했다.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눈을 감았다. 반달 곡선으로 치켜진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창백한 눈가로 옮겨져 뺨을 타고 흘렀다.
이어 록시아스는 만면으로 물줄기를 전달하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고, 갈피를 잃은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하아, 하아….
첨벙. 록시아스의 팔이 수면을 치고 가라앉았다. 빈손이 허벅지를 쥐었다. 꽉…. 물었던 아랫입술을 놓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치아는 힘껏 다물려 있었다.
록시, 흐….
허벅지를 더욱 강하게 움켰다. 사냥할 때도 아닌데 뾰족하게 자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록시아스의 고개는 여전히 천장을 향해 들어 올려진 채였으므로, 당겨진 목이 더욱 길어 보였다. 그 중간에 자리한 불거진 울대가 높게 치솟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하아… 좋아해….
손톱에 찔린 허벅지에서 핏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새빨간 줄기가 맑은 물을 흐리며 퍼져 나갔다. 록시아스는 반대쪽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눈자위를 덮었다. 시각이 차단되자 청각은 더욱 능력을 발휘했다. 카밀의 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선명했다. 위층 욕실에서 벌어지는 음란한 손동작 하나하나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다.
좋아해, 하, 록시….
카밀의 목소리는 여름날 폭우와 비슷했다. 뜨겁고, 축축하고, 사정없이 내려와 무엇이든 빈틈없이 내려쳤다. 그 끓는 빗줄기에 젖어 들수록 록시아스는 허벅지를 쥔 손끝에 더욱 악력을 실었다. 정확히 맞물린 가지런한 치아를 더욱 힘주어 물었다. 턱뼈 부근이 길게 팼다.
죽기 위해 키운 아이.
입양했고, 자신의 성을 부여했으나 일반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를 가진 관계는 아니었다.
그래도….
더군다나 카밀은 아직 흡혈귀도 되지 않은 인간. 거의 다 여물었으나 완벽하지는 못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전에 없이 향기롭고 맛 좋은 피를 가졌다고 한들….
록시, 아, 좋아해요… 좋아해서, 죽어도 괜찮다고… 하, 생각했어.
카밀이 날 상대로 무슨 짓을 하든, 나는 카밀을 상대로 발정하지 않을 것이다.
허벅지에 박힌 손톱은 자존심을 대변하듯 더욱 날카롭게 돋았고, 살갗을 길게 할퀴며 장골까지 옮겨졌다. 깊숙이 호벼진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물었다. 하나 록시아스는 계속, 계속해서 자흔을 만들었다. 카밀이 뿌리는 빗줄기가 멎을 때까지.
다신, 다시는 실수라도 카밀의 피를 취하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하며 오랜 시간 욕조에 머물렀던 록시아스는 일출이 시작되기 직전 2층으로 올라갔고, 바로 몇 시간 전 어떠한 추태를 부렸든 간에 순백만이 드러난 말간 얼굴로 잠에 취해 있는 카밀을 깨웠다.
짧은 시간만 눈을 붙인 판에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으므로 짜증스러울 법도 한데, 카밀은 주변이 환해지도록 활짝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록시.”
팔짱을 낀 록시아스는 어떠한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카밀은 입을 다물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록시아스의 눈동자가 어쩐지 전보다 많이, 붉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 피를 마셔서?
상상을 기반으로 한 설렘을 묻힌 의문을 떠올렸을 때였다.
“카밀아.”
“네, 록시.”
록시아스가 한겨울 나뭇가지에 맺힌 고드름처럼 냉랭하며 뾰족한 음성으로 말했다.
“앞으로 자위하면서 내 이름 부르지 마.”
“…네?”
“아니다. 자위하지 마. 정 못 참겠으면 나한테 허락받고 해. 가끔 허락해 줄게.”
“저, 혹시 어제….”
“아가야.”
들었어요?
묻기 전, 록시아스가 말을 가로챘다.
“앞으로는 나 좋아하지 말고, 복종만 해.”
가지런한 금빛 속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명령에, 카밀이 최초로 반항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되묻기까지 했다.
“왜요?”
“시키는 대로 해, 그냥.”
“어떻게요?”
카밀은 물으며 몸을 일으켰다.
좋아하지 말고, 복종만 하라고?
출항이 취소될 만큼 악독한 날씨에 바다로 뛰어들라고 하였어도 시키는 대로 했다. 무엇이든 록시아스가 명령을 하면 네, 하고 순순히 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좋아하지 말라고, 그건 안 됐다.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가르쳐 주지 그럼.
이번에도 록시아스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스스로 해내라고 말한다. 불가능한 것을.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요?”
제 마음을 록시아스가 아예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심한 태도에 한 번도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그저, 지금까지처럼만 살아도 된다고 혼자 타협했었다.
자신은 순정을 바치고, 록시아스는 당연하게 받고.
그냥 그러면 되는데, 왜 좋아하지 말라고 하지?
카밀은 록시아스의 팔목을 붙잡았고, 즉시 내쳐졌다.
“어떻게 좋아하지 않고 복종만 해요?”
뿌리쳐진 제 손을 잠시간 내려다본 카밀은 마른 얼굴을 쓸었다가, 읊조렸다.
“좋아해서 복종하는 건데.”
차라리 죽으라면 죽겠다. 이건 아니었다.
충성, 순정, 애정, 욕정.
전부 내가 멋대로 시작했지만.
“난 못 해요…. 록시가 모른 척해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요.”
록시도 그걸 필요로 하잖아. 그걸 이용해서 날 좌우했잖아.
모른 척했던 쪽은 록시아스뿐만이 아니었다.
“응.”
단호하게 불응하는 카밀을 응시하며, 록시아스는 하나를 깨우쳤다.
“그래 그럼.”
여태껏 카밀은 반항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반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네 멋대로 해 봐. 카밀아….”
머지않아 흡혈귀가 될 카밀. 그동안 키만큼 자아도 훌쩍 자랐구나.
작고 귀여웠던 카밀, 그에 맞춰 너무 귀여워만 해 줬다. 이제는 그만해야겠다. 몸집이 큰 짐승일수록 단단한 목줄과 사슬을 써야 하는 법이었다.
“할 수 있으면.”
“네. 좋아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록시아스가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제 마음대로요.”
카밀은 정말이지 잘 자랐다.
“응.”
“네.”
제가 자라 봤자지만.
***
칼을 먼저 휘두른 쪽은 언제나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록시아스가 아닌, 제 품에 숨긴 칼을 뒤늦게 알아차린 카밀이었다.
‘네. 좋아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록시아스가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제 마음대로요.’
순정을 향한 맹세는 애착을 사수하기 위한 반항 어린 선포이기도 했다.
***
둘 사이에 새로 싹튼 묘한 기류를 외면한다면야 하루는 이전과 똑같이 흘렀다. 록시아스는 침대맡에 앉아 있었고, 눈을 뜨자마자 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카밀은 아침 햇살이 무색해지는 미소를 머금은 입술로 인사한 뒤 목욕을 했다.
비누 향기를 묻히고 나오면 록시아스가 머리를 말려 주었다. 위이잉. 시끄러운 헤어드라이어 소음이 두 사람 곁을 맴도는 침묵을 날려 보냈다. 차가운 손끝이 관자놀이와 광대, 귓가 등을 스칠 때마다, 카밀은 내리깐 속눈썹을 떨었다. 록시아스 또한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열렬한 체온에 더는 무감하지 못했다. 목울대가 자꾸만 치솟았다.
뜨끈한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금발 아래, 뼈가 툭 불거진 길쭉한 목덜미가 있었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록시아스는 그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시 물어 버리고 싶어서.
카밀의 피를 마신 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며, 이후 절대로 마시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식사 중인 카밀의 건너편에 자리한 록시아스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며 어젯밤 했던 다짐을 거듭 되뇌었다.
먹지 마. 먹고 싶어 하지 마.
영문 모를 패배감이 어깨를 눌렀다. 가슴이 불유쾌하게 울렁거렸다. 화가 났다.
…내가 굶는데, 넌 태연하게 배를 채우고 있어.
“그만 먹어.”
말아 쥐었던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린 록시아스는 카밀의 앞에 놓였던 그릇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명령했다.
별안간 밥그릇을 빼앗긴 카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록시.”
하나 금세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카밀은 냅킨으로 입가를 훔쳤다. 록시아스는 하얀 냅킨에 문질러질수록 벌게지는 입술을 보다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카밀은 어디 한 군데 먹음직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필….
물 먹은 꽃잎 같은 입술에서 겨우 시선을 뗀 록시아스가 일렀다.
“양치하고 와.”
“네.”
틈도 없이 척척 대꾸한 카밀이 일어섰다. 의자를 제자리에 넣고, 테이블을 돌아 록시아스의 옆에서 멈췄다. 록시아스는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로 손이 들이닥쳤다. 언제 저렇게 커졌는지 모를 손이….
드륵. 카밀은 록시아스 앞에 놓인 그릇을 챙겨 뒤돌았다. 반이나 남은 음식은 버리고, 빈 그릇은 물로 씻은 뒤 식기 세척기에 집어넣었다. 평소대로.
다음 목적지는 1층 욕실이었다. 양치에 할당된 시간은 10분.
그 10분이 지나 욕실을 나서면 록시아스가 벽에 기댄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없었다.
“양치했어요, 록시.”
그리 말하면 눈을 한 번 짧게 깜빡여 주어야 하는 록시아스는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척조차 없었다. 복도를 지나 도달한 거실에도, 다시 들어선 부엌에도 없었다.
호흡처럼 당연해진 일과가 틀어진 순간. 젖은 면사포 같은 불안이 카밀의 얼굴을 덮었다. 숨이 턱 막혔다. 록시아스가 사냥을 나가는 새벽 시간을 제하면 그들은 종일 함께였다. 그래야만 했고.
“록시?”
원래대로라면 록시아스를 따라 3층 서재로 갈 차례였다.
아, 서재에 있을 거야.
자취를 감춘 흡혈귀의 동향을 가늠한 카밀은 계단에 발을 디뎠다. 층계를 밟으며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록시아스는 지켜보고 있었다.
발소리가 2층으로 넘어가자 록시아스는 등을 돌려 벽에 이마를 붙였다.
“하.”
벽을 때린 한숨에 조소가 섞여 있었다.
‘오늘 발작도 안 일으켰는데, 왜 날 먹었어요?’
‘먹고 싶어서. 내가 말 안 했나.’
‘윽….’
‘내가 먹어 본 피 중에 네 거가 제일 맛있어.’
‘…….’
‘그래도 널 죽이면 안 되니까 참았거든.’
‘아… 목, 아파, 요.’
‘근데 난 참는 걸 너무 못해.’
참을성 없는 자신을 향한 신랄한 비웃음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 카밀의 피를 더는 취하지 않겠노라 결단했으나 카밀의 손등에 난 뼈와 어우러지며 피부 위로 불거진 핏줄을 끊임없이 떠올리는 자신을 향한 조롱이었다.
며칠만, 아니, 하루만이라도 넘겼다면 이토록 자괴감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카밀이 마지막으로 발작을 일으켰던 때가 언제였더라?
발작자의 피를 마시는 행위는 발작을 멎게 하기 위한 치료의 일환이었다. 그러니 발작하는 카밀에게 송곳니를 박아 넣는 것은 결심에 반하는 행위가 아닐 터였다.
여전히 벽에 이마를 기댄 록시아스는 눈을 깜빡이며 머릿속으로 날짜를 거슬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발작 간격은 스무 날을 넘기지 않았으니 머지않아 카밀은 발작할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록시아스는 자신의 기억력을 맹신했다.
때가 오기까지만 참으면 된다. 아니, 참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벌어질 일을 예견하며 대비하는 것뿐이다.
필사적으로 합리화를 마친 록시아스는 앞니로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가 놓았다. 벽에서 이마를 뗐다. 몸을 돌렸다. 3층 서재로 갈 참이었다.
***
손톱을 무는 버릇은 없었다. 하나 서재는 물론이거니와 2층과 3층 전체를 뒤져도 록시아스가 보이지 않는 통에 카밀은 본능처럼 손끝을 잘근잘근 씹는 것으로 불안을 표출했다.
다시 1층부터 찾는 거야.
그렇게 판단했을 때였다. 툭, 앞니에 물린 손톱이 부러졌다. 덜렁덜렁 떨어진 손톱 밑으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동시였다. 카밀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림자가 서재에 드리워졌다.
“록시!”
상처가 나든 말든, 록시아스를 발견하자마자 물었던 손끝을 뱉은 카밀이 근심 어렸던 표정을 대번 밝히며 달음질쳤다.
“찾았어요. 왜 욕실 앞에서 안 기다렸어요? 어디 갔었어요?”
연속된 질문은 귀를 거치지 못하고 뭉개졌다. 록시아스는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푸른 눈동자의 시선도 감각하지 못한 채, 카밀의 손끝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손톱이 깨져 핏물이 배어 나오는 빨간 손끝을.
홱, 록시아스가 카밀의 손목을 잽싸게 잡아채더니 들어 올렸다.
“다쳤네?”
손목을 꽉, 누르자 손가락이 약간 구부러졌다. 록시아스는 다른 손으로 카밀의 검지 마디를 감쌌다. 악력을 주자 손가락이 희게 질린다. 깨진 손톱 아래로 맺힌 핏방울이 손마디를 타고 죽 흘렀다.
그를 빤히 응시하던 록시아스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피가 나고….”
“어디 갔었어요?”
동시에 카밀이 물었다.
“록시, 욕실 앞에서 왜 날 기다리지 않았어요?”
“피가 계속 나.”
“록시.”
툭, 툭. 카펫을 적시는 피는 겨우 몇 방울이었다. 그러나 흡혈귀를 유혹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손끝에 방울방울 맺혔다가 흐르는 핏방울이 마치 해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록시아스는 쉽사리 휩쓸렸다. 이성이 빠르게 침잠했다.
“왜….”
카밀은 앞머리만 꺼낸 추궁을 도로 삼켰다. 대답을 듣기보다 중요한 순간을 맞이한 탓이었다. 록시아스의 눈동자를 확인한 뒤였다. 어젯밤, 별안간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던 때와 똑같이 동공이 팽창한….
어쩌면 이제.
“…그래요. 피가 나요.”
록시는 내 피에… 나에게.
“응, 그래. 피가 나네.”
“그렇게 보고만 있을 거예요?”
시도 때도 없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 걸까?
“록시가 피를 닦아 주면 안 될까요?”
그러면 좋을 텐데.
소원을 되뇐 카밀은 팔을 더 앞으로 뻗었다. 빨갛게 물든 손끝이 록시아스의 입술에 더욱 가까워지도록. 록시아스가 그의 홍채와 동일한 색채에 빨려들도록. 적은 양의 피라도, 거부할 수 없이 이끌리도록.
‘오늘 발작도 안 일으켰는데, 왜 날 먹었어요?’
‘먹고 싶어서. 내가 말 안 했나.’
‘윽….’
‘내가 먹어 본 피 중에 네 거가 제일 맛있어.’
‘…….’
‘그래도 널 죽이면 안 되니까 참았거든.’
‘아… 목, 아파, 요.’
‘근데 난 참는 걸 너무 못해.’
참는 것을 너무 못하는 록시아스가 또 한 번 자신을 먹어 버리도록 말이다.
“아까워요. 록시가 먹어 주면 좋겠어요.”
빨아. 내 손가락을, 내 피를 빨아.
부탁하는 어조 밑바닥에는 강요가 깔려 있었다.
여태 카밀의 손목을 단단하게 쥔 록시아스가 눈을 치켜뜨고 카밀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그럴까?”
손만 커진 것이 아니었다. 이제 카밀을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록시아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야 했다. 반전된 시선의 위치.
자신보다 덩치 큰 먹잇감. 예견된 포만감. 결핍된 정신의 풍족.
흡혈귀는 입맛을 다셨다.
그냥 입에 넣기만 하면 되는데, 허락을 다 받고.
록시아스를 내려다보는 카밀이 웃었다.
“네, 그러세요.”
구부러진 채였던 손가락을 폈다. 곧바로 손끝이 록시아스의 입술에 닿았다. 아랫입술을 눌렀다.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어제 이 입술을 입술로 느꼈는데, 뭘 또 새삼스럽게.
“그래, 그럼.”
웃는 표정, 이라고 카밀은 찰나 록시아스의 만면을 스친 변화를 정의했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손가락을 천천히 삼키는 입술은 약간 벌어져 있을 뿐, 웃음기를 띠고 있지는 않았다.
톡. 손가락에서 흐른 핏방울이 록시아스의 턱에 떨어져 길게 미끄러졌다. 그를 닦지도 않은 록시아스는 혀끝을 내어 카밀의 손가락을 훑었다. 피가 맺히는 부분은 가장 나중에. 손가락이 시작되는 마디부터 타고 올라갔다.
검은 실크를 확대한 듯 촘촘하며 새카만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빨간 눈동자. 얼음으로 빚은 듯 창백하고 미끈한 뺨을 지나면 다시 빨간 입술이 있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는 또다시 빨간 혀끝이 나릿하게 유영하며 역시나 빨간 피를 훔쳐 마시고 있었다.
샅샅이 새빨간, 흡혈 현장.
색정적이었다. 관조하는 것만으로 마치 금기를 깨트린 파륜자가 된 듯한 감상을 선사하는 광경이었다. 쾌감과 죄악감이 아울러 카밀을 결박했다. 록시아스로 인해, 자신이 록시아스에게 베풀게 되었으므로 발생한 쾌감. 자신으로 인해 록시아스가 자신을 지배하므로 발생한 죄악감.
이제라도 록시를 말려야 할까?
카밀은 자신의 손끝을 문 입술이 동그랗게 모인 순간에 아주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돌려 록시아스의 입천장을 만진 시점에서 고민을 파기했다. 하찮은 사념은 모조리 산산조각 냈다. 머릿속에 머무르도록 허락된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좋아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록시아스가 하라는 대로 할 것이다.
좋아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록시아스가 바라는 대로 할 것이다.
내 마음대로.
록시는 자신의 피가 가장 맛있다고 했다. 그래서 먹고 싶었다고도 했다. 지금도 그랬다. 피 몇 방울에 홀려 눈이 풀렸다. 나 따위 것에 허락까지 구했지.
‘…그럴까?’
네, 그러세요. 정말이지 록시 마음대로 하세요. 먹고 싶은 만큼 먹어요. 그것이 곧 내 마음이니까요.
카밀은 일부러 송곳니를 찾아 지문을 갖다 댔다. 가장 뾰족한 부분을 누르고, 쓸었다. 피부가 찢어지며 쓰린 통증이 팔목을 타고 목덜미까지 찌릿하게 전해졌다.
더 마셔요, 더.
서서히, 팔을 높이 올렸다. 툭툭 떨어지는 핏물이 허공을 갈랐다. 턱을 치켜든 록시아스가 입을 벌린 채 혀를 꺼내 받아 마셨다.
다 줄게요.
받지 못하면, 줄 때까지 주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는 것이 고스란한 애정이 아니어도 좋았다. 근본적이며 사소한 욕구만으로도 만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령 그것이 식욕이라도 말이다.
갈비뼈 아래로 품기만 했었던 칼날을 꺼내 든 카밀은 록시아스가 여태껏 자신에게 디밀었던 방패와도 같은 금욕을 벴다.
록시아스가 세운 수많은 벽으로 이루어진 숲. 카밀은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빽빽한 벽을 남김없이 벌목할 날을 상상하며. 발가벗겨진 록시아스의 땅에 자신만 뿌리내릴 적시기를 고대하며.
이제 막 벽 하나를 무너트린 셈이었다.
팔을 한계까지 들어 올린 카밀은 물었다.
“록시, 맛있어요? 내 피.”
흐르는 혈액을 향해 벌어진 입술은 지금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오로지 섭취를 위한 입구였다. 그러니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다만 행위가 있었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팔뚝을 잡아 내렸다. 손목을 강하게 휘어잡고, 이전처럼 손가락을 핥았다.
나를 착취할 때 가장 아름다운 록시.
푸른 눈이 최고치를 경신한 행복으로 인해 번쩍거렸다.
카밀은 록시아스가 제 손가락에 이어 손목에 치아를 박아 넣는 동안,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아.” 송곳니로 피부가 뚫리자 짤막한 신음이 터졌다. 록시아스에게 당하는 고통은 곧 관능이었다.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발끝이 닿을 법한 거리였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귓가로 고개를 기울이고는 속삭였다.
“진짜 맛있게 마시네요….”
흑발에 코끝을 살며시 묻었다.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도로 숨을 내쉬기에는, 비강을 점령한 향기가 너무나 달콤했다.
“좋다.”
빠르게 중얼거린 카밀은 허리를 숙이며 무릎을 접고는 천천히 온몸을 내렸다. 록시아스에게 붙들린 팔만이 제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눕기 직전이 되자 록시아스와 팔은 저절로 따라 내려왔다.
등허리와 뒤통수가 바닥에 붙었다. 반듯하게 누운 카밀 위에 록시아스가 엎드린 자세로 올라탔다. 카밀은 제 상체 아래로 얽힌 네 다리를 보았다. 자신의 다리 옆 록시아스의 다리 옆 자신의 다리 옆 록시아스의 다리.
한쪽 무릎을 세워 록시아스의 종아리에 발을 갖다 댄 카밀은 같은 때, 손날로 록시아스의 이마부터 턱 끝까지를 쓸어내렸다. 조심스레…. 손이 떨렸다. 감히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손대고 있었으므로.
“정말 똑같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를 코앞에서 낱낱이 감상한 카밀은 그렇게 읊조렸다. 어린 눈으로 처음 마주했던 록시아스의 모습을 상기한 것과 동시였다.
“난 이만큼이나 컸는데 록시는 하나도 안 변했어요.”
출혈 부위에만 이목을 쏟으며 자신을 한순간도 바라보지 않는 눈, 카밀은 그 눈 위에 자리한 가지런한 눈썹을 엄지로 쓸며 읊조렸다.
“록시가 흡혈귀라서 다행이에요. 계속, 영원히 변하지 마세요.”
다음으로는 뺨을 감쌌다. 온도는 서늘하지만 감촉은 보드라운 살결과 손바닥이 맞닿자, 목덜미에 쏠려 있었던 열이 삽시간에 퍼져 손끝과 발끝까지 타 버릴 듯 뜨거워졌다.
“그리고 나는 계속 자랄 거예요….”
홱. 카밀은 힘을 준 손목을 치웠다. 별안간 멀어진 먹잇감에 기분이 상했는지, 눈썹을 미세하게 꿈틀거린 록시아스가 손목을 도로 붙잡았다. 다시 떨쳤다.
감싼 뺨에서 손바닥을 미끄러트린 카밀은 이어 록시아스의 턱을 살짝 쥐어 올려 정면이 자신을 면하게 했다. 새빨간 시선은 숫제 피만 찾고 있었지만.
“록시, 록시. 손목 말고… 날 봐요, 여기.”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 카밀은 록시아스의 입가와 자신의 목덜미가 가까워지도록 어깨를 조금씩 틀었다.
“여기를 물어 주세요.”
아.
목덜미, 어제 물렸던 부위로 송곳니가 정확히 파고들었다.
물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카밀의 입술이 무언가 뱉어 낼 듯 말 듯 벌어지더니 파르르 떨렸다. 금빛 속눈썹은 한껏 내리깔렸다. 하나 눈을 감은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흩날리는 흑발을 보아야 하니까.
흡혈귀가 해갈한 뒤 정신을 되찾기 전에 실컷 즐겨야 했다.
“제발, 더 아프게 물어 주세요….”
꿀꺽, 꿀꺽…. 자신을 마시는 소리에 따라, 제 피부와 록시아스의 입술이 반복적으로 붙었다가 떨어졌다.
까만 뒷머리를 눌러 록시아스의 입술이 아예 제 목덜미에 스미는 상상을 하며, 카밀은 다섯 손가락을 록시아스의 등 위에 살며시 올렸다. 일렁거리는 등뼈와 근육을 은밀하게 어루만졌다.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는 지배자의 아래에서 누리는 일탈은 그 어떤 오락보다 짜릿했다.
더 거세질 수도 없을 것 같았는데, 심장이 갈수록 과격하게 뛰었다. 박동 소리는 록시아스에게도 들릴 터였다. 끓어오르는 체온도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전부 들키고 있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카밀은 제 신체 부위 중 가장 뜨거운 곳으로 손을 내렸다. 반대쪽 손으로는 록시아스의 허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보이는 것보다, 하… 말랐네요, 록시.”
워낙 키가 크고 어깨가 곧아 겉으로는 늘씬하고도 단단해 보이는 몸매였다. 하나 직접 만져 보니 마른 느낌이 강했다. 군데군데 만져지는 툭 불거진 뼈마디와 얇은 허리 탓인 듯했다. 한 품에 둘러 안을 수도 있겠다, 고 카밀은 생각했다.
“만지니까 알겠어…, 아.”
찢어진 부위를 송곳니로 다시금 긁히는 바람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확 젖히며 눈살을 찌푸린 카밀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허벅지에 올려놓고만 있었던 손으로 다급하게 바지 버클을 풀었다.
“더 찢어 주세요.”
그리고 카밀은 록시아스의 허리춤을 더욱 세게 움켰다. 록시아스는 자신에게 송곳니를, 자신은 록시아스에게 손톱을 박아 넣고 있는 가학적인 상황. 자극이 차고 넘쳤다.
카밀은 풀어 헤쳐진 바지춤 위를 쓸기 시작했다.
“죽고 싶어요.”
흥분에 속아 지껄인 막말이 아니었다. 록시아스 아래에서 신음하며 방울방울 피어나는 수치심에 떠밀려 뱉은 사죄도 아니었다. 그저 진심으로,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죽임당하길 원했다.
“지금, 하아….”
당장.
“읏….”
꿀꺽. 마지막 한 모금이었다. 왼쪽 목덜미에서 취하는.
얼굴을 쳐든 록시아스가 이번에는 오른쪽 목덜미를 물었다.
가학당하는 영역이 확대될수록, 아래 또한 더욱이 단단해졌다. 알맞던 바지가 갑갑해졌다. 하나 록시아스와 다리가 얽혀 있기에 하의를 벗어 내릴 수가 없었다. 카밀은 옷 위로 제 것을 만지며 안달 나는 기분에 입술을 말았다. 그에게 붙잡힌 록시아스의 셔츠는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가학적인 식음, 피학적인 수음.
어느 것을 저지르는 쪽이든 제정신은 아니었다.
정해진 궤도를 탈선한 이 미친 일과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
피를 빼앗겨서, 혹은 전신을 맴돌아야 할 피가 특정 부위에 집중된 탓으로 아득해져 가던 정신을 아예 놓아 버리기 직전이었다. 카밀은 제 목을 빨아 당기는 힘이 미약해진 것을 겨우 알아차렸다. 흡혈귀가 곧 식사를 마친다는 의미였다.
록시아스의 종아리에 붙였던 발바닥을 떼고, 앞섶이 풀어 헤쳐진 하의를 갈무리했다. 일탈의 증거는 겨우 그것으로 은닉되었다. 증거가 남은 쪽은 여러 군데 혈흔을 묻힌 록시아스뿐이었다.
유일무이하도록 훌륭한 맛에 홀렸으나, 취할 때는 정작 음미하지 못했다. 록시아스는 이성을 서서히 되찾아 가며 그제야 입 안 가득 만연한 향기를 알아차렸다. 붉은 홍채를 뒤덮을 듯했던 까만 동공이 제 크기로 돌아간 뒤였다.
“하.”
‘실수’를 범한 현장을 내려다본 록시아스는 불그죽죽한 입가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닦아 내며 헛숨을 토했다. 동시에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가슴이 울대까지 울리도록 요동치고 있었다. 추위며 더위를 느끼지 못한다마는, 몸에는 냉수에 뛰어들고 싶을 만큼 열이 올라 있었다.
“미쳤나….”
호흡에 맞춰 혈액이 비집고 나오는 상처를 손바닥으로 누른 록시아스는 혼잣말로 자신을 책망했다. 수면을 취하거나 혼절해 본 적이 없었으나 아마 별안간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정신이 채 말끔하지 못했으며 방금까지의 상황이 몽롱하게만 머리맡을 떠다녔다.
반면 록시아스의 표정이며 손짓과 발짓, 그가 혀끝을 어떤 모양으로 구부려 피를 핥았으며 송곳니를 어디에 어떤 각도로 꽂아 넣었는지 낱낱이 기억에 새긴 카밀은, 눈꼬리를 적시며 괴로운 체했다.
“아팠어요, 록시….”
속눈썹을 내리깔며 가엾은 기색을 만든 카밀이 읊조렸다.
“많이요.”
그를 줄곧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록시아스는 누르고 있던 부위에서 손을 뗀 뒤 카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치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고쳐 주고 있잖아.”
자책하고 있으면서도 카밀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으므로 어조가 굉장히 뻔뻔스러웠다.
아프다며 우는소리를 하면서도 흡혈귀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카밀은 실망하지 않고 대꾸했다.
“네, 고마워요.”
“응.”
맞대꾸한 록시아스가 카밀의 손을 떨궜다. 깨진 손톱이 예쁜 모양을 되찾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문과 손목에 난 상처가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날아간 손을 쥐었다 편 카밀은 역시 말끔히 치료된 제 목덜미를 쓸었다. 손을 대고 나면 다친 곳이 치유된다니. 두 번 겪어도 놀라웠다.
나는… 한심하게도 카밀의 피 냄새를 맡은 순간 의지를 잃고 결심도 저버렸으나, 할 만큼 했다.
그렇게 합리화를 한 록시아스는 혈색은 다소 창백하지만 어쨌든 상처는 아물었으니 고통은 없을 카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동시에 몸을 일으켜 카밀에게서 떨어졌다. 더는 카밀과 접촉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방금까지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팍이 맞닿도록 가까웠지만, 예정된 대로 멀어지는 록시아스를 쳐다보던 카밀은 상체를 세웠다. 등을 돌리고 고개만 자신을 향해 기울인 록시아스가 입꼬리를 꿈틀거리더니 짧게 이른다.
“오늘은 쉬어.”
카밀은 재빠르게 뛰어 록시아스의 등 뒤로 바짝 붙었다. 아까와 같이 록시아스에게 손대지 못하고.
“록시, 어디 가요?”
물었다. 그리고 애걸하는 양 물기 어린 음성으로 이어 말했다.
“해안으로 가요. 훈련할 수 있어요. 록시가 고쳐 줘서 이제 아프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
록시아스는 대답 한 마디 건네주지 않고 매정하게 시선을 거둔 뒤 발걸음을 놀렸다. 카밀이 그 뒤를 따랐다. 록시아스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에 따라 카밀 또한 빨리 걸었다. 곧 두 사람은 계단에 다다랐다. 록시아스의 까만 구둣발이 한 계단을 내려갔다. 카밀의 운동화 발이 이어 한 계단을 내리밟았다. 두 번째 계단. 록시아스가 사라졌다.
“하….”
왜, 어디 가.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뭐라도 하라고 가르쳐 줘야죠, 록시.
자신의 그림자만이 드리운 텅 빈 계단을 응시한 카밀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말라붙은 핏물 탓에 뺨이며 턱이 거칠었다.
두 번째 층계에서 멈춰 선 카밀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피투성이. 그제야 제 몸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를 맡았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록시.
목욕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고, 카밀은 제 머리칼을 짜증스럽게 헝클었다.
아무 말도 안 해 줬잖아. 목욕하라는 말도 안 했는데, 왜 해.
판단은 오로지 록시아스의 한마디 말에 따랐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었다.
카밀은 록시아스를 찾아 헤맸던 아침과 달리 다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왜인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틀리지 않은 예상이었다. 곧 2층 욕실에서 새어 나오는 물소리를 들었으므로.
욕실 문 앞에 선 카밀은 노크했다. 굳게 닫힌 문이 즉시 열릴 것이라고 상상하진 않았다. 다시 노크했다. 기척이라도 들려주면 좋을 텐데, 카밀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물소리뿐이었다. 바닥을 내리치는 굵은 물줄기… 아마도 록시아스는 욕조에 물을 받고 있으리라.
다시 노크했다. 두 번, 똑똑. 기척은 여전히 문을 넘어오지 않았다. 이어 세 번째 노크를 한 카밀은 문 옆에 몸을 기댔다.
‘목욕하고 있으니까 방해하지 마. 너도 씻어.’ 그런 말도 안 해 주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과묵한 록시아스는 이제 필요한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카밀은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명령이 없다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마음대로 하면 되었다. 카밀은 목욕을 마친 록시아스가 나와 무언가 시키거나, 꾸중하거나, 아무튼 무엇인가 하기 전까지 욕실 앞에서 기다릴 참이었다. 물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콸콸….
카밀은 욕조로 쏟아지고 있을 물을 머릿속에 그렸다. 벽 너머로 내내 물소리가 들려오니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카밀은 눈을 감았다. 상상의 시작이 되는 장면이 곧 망상의 목적은 아니었다.
욕조가 깨끗한 물로 가득 찼다.
주름 한 점 없는 검정 바지를 걸친 긴 다리가 우뚝 서 있다가 욕조로 다가간다. 조금 더 위로…. 검붉은 피로 더러워진 흰 셔츠에 감싸인 상체가 있다. 굽혀지는 늘씬한 허리는 아까 만져 보았다.
마른 목을 움직인 카밀은 망상을 이어 갔다. 유일한 소음인 물소리도 계속되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잠근 록시아스는 욕조 물에 손가락 끝을 담근다. 수면이 가늘게 찰랑거렸다. 물 온도는 적당할 것이다. 그에 만족한 록시아스는 셔츠의 세 번째 단추를 푼다. 맨 위 두 칸은 이미 풀려 있었다.
자신과 비슷하게 불그죽죽하고 길쭉한 록시아스의 목을 되새긴 카밀은 아랫입술을 핥았다. 망상과 물소리는 지속되고 있었다.
궂은일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아 본 듯 고운 손이 툭, 투둑, 여유로운 손짓으로 단추를 끌러 낸다. 옷으로 가려져 빨간 물이 들지 않은 가슴팍이 하얗게 드러났다.
물소리가 난다.
벗은 셔츠를 바닥에 내린 록시아스가 벨트 위로 손을 올린다.
물소리가 났고, 카밀은 눈을 번쩍 뜨고 현실로 돌아왔다.
왜 아직도 물소리가 나지?
각 욕실에 놓인 욕조는 보통보다 컸으나 물을 꽉 채우기에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문을 넘어오는 소음은 이전과 달랐다. 철썩, 철썩…. 흘러넘친 물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였다.
쾅, 쾅! 벽에서 급히 등을 뗀 카밀이 문을 두드렸다.
“록시!”
소리치며 거듭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록시, 안에 있어요?”
기어이 카밀은 문고리를 잡았다. 돌렸다. 잠겨 있었다.
“열어 봐요! 록시!”
쾅! 카밀이 어깨로 문을 들이받았다. 흑색 나무 문은 다르르, 찰나 진동했을 뿐 멀쩡했다. 다시 한번, 또 한 번.
쾅! 쾅! 록시! 쾅…!
하아, 하아….
완력을 받아 내며 덜컹거리는 문 뒤, 록시아스는 머리를 감싼 채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한 구둣발이 욕실 안을 하릴없이 맴돌고 있었다. 욕조에서 흘러넘친 물이 발길질에 이리저리 튀었다. 바짓단이 젖었다.
카밀의 상상과 달리 록시아스는 단추 하나 풀지 않은 채였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록시아스가 한 행동이란 수도꼭지를 열고, 달아오른 숨을 내쉬고, 거울에 자신의 꼴을 비추고, 믿을 수 없어 아예 직접 허벅지 부근을 내려다보고… 자괴감에 무너지고, 갈수록 뜨거워지는 호흡을 견디는 것뿐이었다.
또.
정신을 놓고 카밀의 피를 마셨다.
그리고 또.
이성을 붙잡은 후인데도 육체를 통제할 수 없었다.
록시아스는 눈동자를 눈꼬리로 옮겼다. 머리를 감싸고 있는 채였으므로 시야의 반절이 팔목에 가려져 있었다. 덜컹거리는 문이 빼꼼히 보였다. 카밀은 겉보기뿐만 아니라 실제 힘도 강인하게 성장했다. 문이 곧 부서질 기세였다.
가라고 해야 해.
아랫입술을 깨문 록시아스는 문을 향해 비틀비틀 걸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열로 부푼 아래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지에 스쳤다. 아울러 수치에 스친 자존심이 뭉텅뭉텅 깎여 나갔다.
도자기 같은 창백한 피부 아래로 수모를 매장한 록시아스는 문 앞에 섰다. 그와 카밀의 거리는 단 한 발자국.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머지않아 작살날 문 하나뿐.
벽이 허물어지기 직전이었다. 록시아스는 목소리를 꺼냈다.
“카밀.”
그 단 한마디가 카밀의 극단적인 상상과 날뛰는 불안을 단번에 잠재웠다.
“…록시?”
카밀은 어깨에 힘을 풀고 짚은 문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는 말했다.
“록시.”
“…….”
“뭐 해요? 거기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문지방 아래로 넘어와 발부리를 타고 올라왔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록시아스는 하얗게 질린 심정에도 붉기만 한 입술을 크게 움직이지 않으며 읊조렸다.
“목욕했어.”
즉답이 날아왔다.
“근데 왜 계속 물을 틀어 놔요?”
“…….”
“물이 지금, 넘치고 있는 것 같은데. 맞죠?”
“네? 록시.” 대답이 조금 늦자 재촉한다. 록시아스는 입을 크게 벌렸다가 꾹 다물었고, 다시 열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카밀에게 전해지지 않길 바라며.
“가. 너도 목욕이나 해.”
“안 돼요.”
“더러우면 짜증 나니까.”
“아무래도 이상해요. 목욕은 록시 얼굴을 본 다음에 할게요. 문 열어 주세요.”
“하…. 왜 말을 안 들어?”
버림받을까? 록시가 나를 버릴까?
불응을 문책당한 카밀은 잠시 당황했다.
“…….”
아니, 이 정도 반항으로는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그 확신이 뭘 근거로 떠올랐을까, 카밀은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믿기로 했다. 록시아스는 절대 자신을 버리지… 버릴 수 없을 것이라고.
“문 열어 주지 마세요, 그럼.”
“카밀아.”
“록시가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게만 해 주세요.”
“미쳤지…?”
화가 났을까? 평소보다 더욱 느릿한 어조이나 조금 상기된 듯한 음성이 카밀을 주춤하게 했다. 그러나 카밀은 물러서지 않았다.
“말 안 들어서 죄송해요.”
“죄송하면 말을 들어.”
“혼날게요.”
괘씸한 카밀. 욕실을 나가면 목을 졸라 버릴 것이다. 숨이 멈추기 직전 놓아준 뒤, 두고두고 벌할 것이다. 감히….
“그래, 그럼.”
버릇없는 카밀을 향해 악심을 품은 록시아스는,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멋대로 해….”
더는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성욕이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인가?
“아….”
시간이 지나도 흘러가지 않으며 머무는 것이었나? 온갖 잡념을 끌어모아 머릿속을 헤집어도 끝내 버티고 서서 이성을 짓밟는 것이었나?
혼란스러운 심신에 자문하는 록시아스의 귓가로 카밀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면, 돕게 해 주세요.”
그렇지, 그럴 리 없다. 내가 카밀에게, 인간 따위에게… 그럴 리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뭐든지 할 테니까요.”
록시아스는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흡혈귀로서 타고난 청력은 손바닥 밖의 이야기를 전부 흡수했다.
“록시아스.”
순정을 가득 발라 놓은 목소리는 한결같았고, 지금 록시아스에게 폭력이었다.
“…그런데 궁금해요.”
하아, 하아, 하아…. 도저히 잦아들지 않는 자신의 호흡 소리가 카밀의 음성과 뒤섞여 귀청을 자근거렸다.
“저한테서 지금, 제 피 냄새가 나요. 그리고… 하나도 안 좋아요. 그냥 피 냄새니까요.”
잠시 말을 쉬는 카밀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미세한 소리까지, 록시아스를 파고들었다.
“냄새도 그렇고 색깔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 거랑 똑같은 피인데. 록시가 왜 좋아할까?”
“…….”
“록시가 왜 가장 맛있다고 했을까?”
정작 록시아스 자신이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왜 하필 카밀의 피가 가장 맛있는지. 어째서 다른 피들과 달리 배를 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어떻게 해서, 모른 채로 살아갈 수 있었던 괴상하고 야릇한 감각에 눈뜨도록 했는지!
“그래서 기대하게 됐어요. 원래는 기대 안 했는데.”
록시아스는 갈림길에 섰다. 자유로이 택할 권리를 빼앗긴 채.
“내 피를 가장 좋아하는 록시아스가.”
언제나처럼 두 가지, 서너 가지, 혹은 전부를 취하기란 불가능했다.
“나를 가장 좋아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존심. 그리고 카밀.
“록시는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둘 중 무엇을 버리느냐.
“하아, 아, 미친.”
“…록시? 거기에 있어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자신을 찌르기 위한 칼로 키웠으나, 카밀이 이런 식으로 제게 칼날을 들이밀 줄은 미처 몰랐다. 아마 카밀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은 상대는 분명했으나, 탓할 대상은 오로지 자신이었다. 카밀을 택했으며, 키웠고, 그의 피에 끌리고, 이따위 경망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자신 말이다.
“하, 미쳤다고….”
깨물린 아랫입술에서 핏줄기가 미끄러졌다. 록시아스는 폐부에 들어찬 뜨끈한 공기를 뱉어 낼 때마다 함께 목구멍을 넘어오는 신음을 가슴팍 아래로 꾹꾹 눌러 담았다. 호흡, 그 당연한 생존 행위가 벅찼다.
“록시? 목소리가 왜 그래요?”
“말하지 마!”
가까워진 죽음으로 인한 모멸감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능적으로 살려 달라고 빌면서도 굴욕에 무릎 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나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토록 경멸하던 먹잇감들과 멍청한 흡혈귀들을 비웃지 말아야 했다며 후회하고, 지금 이 충동을 시인해야만 할까?
“록….”
“입 닥쳐, 미칠 것 같으니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닌, 불에 달궈진 사슬 같은 욕정에서 해방해 달라며 사정해야 할까?
굴욕조차 셈하였던 록시아스는 계획 밖의 색욕에 좌절했다. 평생 성취만 이룩했던 그는 좌절에 무지했으며 나약했다. 지금 그가 내세울 수 있는 무기란 자존심 하나뿐. 그러나 지금은 그 날 선 자존심도 일각이 지나기 무섭게 닳고 있지 않은가.
“…읏.”
록시아스는 허리를 숙였다. 이마를 물바다가 된 바닥에 붙였다. 바닥을 짚은 손이 구부러졌다. 부여잡고 버틸 만한 것은 손가락 틈새를 쉽사리 빠져나가는 물 말고는 없었다. 손바닥이 축축한 맨바닥을 긁다가, 주먹 쥐어졌다. 둥글게 말린 손날이 타일을 내리쳤다. 록시아스의 만면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의미 없는 폭력이 지나간 자리로 툭, 투둑, 록시아스의 입술에서 흐른 핏방울이 낙하했다. 빨간 것은 즉시 물웅덩이에 섞여 제 색을 잃었다.
그리고 “록시!” 문이 또다시 덜컹거렸다.
내가 나갈 때까지 거기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엎드린 채 고개만 홱 돌린 록시아스는 문을 노려보았다. 쾅! 쾅! 저 굉음처럼 카밀도 욕실 안으로 침범할 터였다. 카밀을 차단할 유일한 물리적 수단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고통을 감내하는 경각은 영원과도 같았으나, 달갑지 않은 침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태껏 중 가장 소란스러운 굉음과 함께 문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고, 록시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록시!”
망가진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선 욕실에서 카밀이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가득 찬 욕조에서 흘러넘친 물로 침수된 타일 바닥, 그에 무릎을 파묻고 엎드려 어깨를 떨고 있는 록시아스의 말린 등허리였다.
왜 그러고 있어요?
질문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물웅덩이를 밟아 헤친 카밀은 록시아스를 향해 무릎을 접었다.
아파요?
물음이 담긴 손을 록시아스의 어깨에 올린 순간이었다.
“만지지 마!”
몸을 재빠르게 모로 돌린 록시아스가 카밀의 손을 내쳤다.
“록….”
“보지 마!”
카밀을 매섭게 쏘아보는 록시아스의 눈가가 붉었다.
언제나 푸른빛을 띨 기세로 창백하기만 했던 록시아스가 눈가를 붉히고 있다. 그럴 수도 있구나… 근데 왜?
함락된 무적을 면한 카밀은 경악 이전에 의문을 먼저 떠올렸다.
“왜 그래요?”
“나가….”
“록시.”
“나가…!”
뾰족하게 외치던 록시아스가 별안간 입술을 물더니 눈살을 구겼다. 잇새로 신음이 비어졌다. 어깨와 가슴팍은 크게 들썩거렸다. 그리고 다리가…. 록시아스의 온몸을 살피던 카밀의 시선이 허벅다리에서 멈췄다.
늘씬한 다리 폭에 맞춰 재단된 바지는 예정에 없던 신체 변화를 여실히 내보이고 있었다. 그를 확인하고는 일순 흔들린 새파란 눈동자가 이내 싸한 광채를 띠었다.
카밀은 록시아스가 무엇을 감추는지 깨닫지 못할 만큼 어리지 않았다.
“…괴로워요?”
은폐에 속아 넘어가 줄 만큼 무르지도 않았다. 록시아스가 그리 키웠기 때문에.
“괴로워 보여요, 록시.”
“하, 닥쳐… 응?”
“너무, 많이 힘들어 보여요.”
누가 포식자이고 누가 피식자였나. 눈을 적신 록시아스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카밀에게 굴욕적으로 패배했다. 새파란 시선이 자신의 수치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었다. 종종 홀린 듯 감상하고는 했던 예쁜 입술은 다물려 있었으나, 모욕적인 환청이 귀청을 간지럽혔다.
내가 바라봐 주니까, 더 미치겠죠? 네? 록시.
“아니, 아니야.”
록시아스는 고개를 미약하게 도리질 치며 주저앉은 자세로 뒷걸음질했다. 카밀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데도, 강압적인 눈빛과 음험한 환청은 점점 가까워졌다. 몸에 엉기며 살갗을 기어 다녔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나더러 멍청하다고 그랬으면서. 실은 록시가 더 멍청한 거 아니에요?
“제 도움이 필요하면, 돕게 해 주세요.”
포기는 쉽고, 또, 포기하면 쉬워져요. 알면서….
“뭐든지 할 테니까.”
부탁해 봐. 그럼 해 줄게.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어.
“명령해 봐요, 록시.”
일이 끝난 뒤에 당신은 모르는 척하면 돼. 기억나지 않는 체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고고하게 굴어. 내버린 자존심을 주워서, 어떻게, 깨끗이 빨아서 쓰든가. 멋대로 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요.”
언제나처럼 손가락 하나조차 휘두르지 않고 몇 마디만 지껄여. 내가 그대로 해 줄게요.
“록시가 원하는 대로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록시가 괴로우면, 슬퍼요….”
카밀은 마치 록시아스의 혼란과 고뇌를 고스란히 흡수한 듯이 고통에 전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지어낸 표정이었다. 록시아스는 카밀이 지금보다 키가 반절도 안 되었을 적부터 간혹 무의식적으로 위선을 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만 있었다. 자신을 살해할 인재가 갖춰야 할 덕목에 인격적 우수함은 없었으므로 카밀이 파렴치한으로 성장하든 말든 방관했다.
“하아, 그딴 표정 집어치워.”
저 무구한 얼굴에 이토록 흔들릴 줄 예상했다면 절대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싫어요?”
한 발자국 다가온 카밀이 물었다.
“그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오지 마!”
“눈을 어떻게 떠야 하는지, 입술은 얼마큼 벌려야 하는지 말해 주세요.”
셋, 네 발자국 다가온 카밀이 명령을 졸랐다. 그를 피하려 몸을 물리던 록시아스는 끝내 욕조에 등을 부딪쳤다.
“록시가 말해 줄 게 많아요. 지금 이렇게 더러운데… 록시가 목욕하라는 말도 안 해 줘서 못 했어요. 피 냄새가 너무 나요.”
“오지 마, 응? 카밀아….”
“…정말 이해가 안 되네.”
카밀이 혼잣말인 듯 읊조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낼지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짜증 난다는 듯 눈썹을 구기고 입꼬리를 말면서.
“나더러 록시를 죽이라고 시킬 거면서, 왜 그것보다 별것도 아닌 일은 시키지도 않아….”
저 들으라고 지껄인 혼잣말이 분명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록시아스는 속눈썹을 내렸다. 더는 카밀을 쳐다보고 있을 수 없다는 양. 아래를 향한 시야로 자신의 두 다리가 들어왔다. 무언가 흘러나오며 젖은…. 바닥에 고인 물 탓은 아니었다.
카밀을 외면하면 욕정의 형상이, 욕정의 형상을 회피하면 또다시 카밀이 있었다.
“록시.”
하…. 이름을 부르고 한숨을 쉰 카밀은 이윽고 록시아스의 발치에 꿇어앉았다.
“제가 도와주는 게 싫어요?”
눈앞에 있는 카밀이 뇌까리는 것인지, 아니면 아까의 환청이 재개된 것인지 분간하기에 이성이 너무나 무질서한 상태였다.
“그럼 알아서 해요. 나도 알아서 할게요. 록시는 보고만 있어요. 보다가 마음에 안 들면 혼내도 좋아요. 그만하라고 해 주세요. 언제든지 멈출게요. 아니면, 혹시라도 마음에 들면…. ”
말을 끝마치지 않은 카밀은 잠시 시선을 사선으로 내려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이번에는 지어낸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대로, 진실만을 덧입은 무표정한 이목구비가 록시아스를 향했다.
“오래 살았고, 똑똑하고, 너무… 예쁜 록시가 왜 이런 건 모를까.”
“…….”
“…싶지만.”
서슬같이 파란 안광이 작정한 듯 록시아스의 젖은 허벅지를 훑으며 희롱했다.
“알려 줄게요.”
무릎 꿇은 카밀이 허벅지만 세워 앉았다. 단단하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던 허벅지가 본래 길쭉한 모양새로 돌아왔다.
“내가 알려 줄 때도 있어야 공평하잖아요.”
이어 카밀은 팔을 엮어 티셔츠 끝을 잡아 벗었다. 성장기를 지나며 매일같이 고된 훈련에 깎이고 다듬어진 단단한 상체가 드러났다.
하루도 빠짐없이 마주했던 맨몸이었다. 그러나 록시아스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눈썹을 구부러트리며 눈자위를 경련했다. 매음굴에서 지저분한 광경을 목격했을 적처럼 혐오감에서 비롯된 반응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는 동안 카밀은 바지 버클을 내렸다.
“록시가 날 싫어하게 될까 봐….”
풀어진 앞섶 아래, 묵직한 실루엣을 향해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걱정되지만… 하아.”
옷 위로 자신의 것을 쓸어내린 카밀이 한숨 같으나 한숨은 아닌 호흡을 내쉬며 턱을 조금 젖혔다.
“무관심한 것보다는 낫겠지.”
어렸을 적. 칭찬에 인색한 흡혈귀에게 귀염받는 편보다 꾸중받는 편을 택했다. 록시아스를 한참 올려다보아야 했으며, 록시아스의 걸음을 따르려면 뛰어야 했던 아이는 이제 록시아스를 내려다보았으며, 머지않아 흡혈귀로 재탄생하여 록시아스와 같은 보폭으로 걷게 될 터였으나 속은 여전했다.
움직이기 불편했으므로 카밀은 하의를 조금 더 끌어 내렸다.
그만….
굶주린 상태에서 싱싱한 피를 마주하였어도 이런 심정은 아닐 것 같았다.
그만하라고 해야 해.
록시아스는 입술을 달싹였고, 끓어오를 대로 끓어오른 뜨거운 눈빛으로 카밀을 관조했다. 벌어진 가슴팍이 넓은 시야를 채웠다. 카밀이 불온하게 호흡할 때마다 들썩이는 복근이 짙게 갈라지거나 혹은 더더욱 짙게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허리선은 늘씬했다. 그리고 그 아래, 도드라진 장골이 빼어난 몸매를 강직하게 마무리하였으며… 그 더 아래는….
오늘 아침, 시야로 불쑥 들이닥친 카밀의 손을 보며 언제 저렇게 커졌는가, 놀라워했다. 고작 그것에 놀랐다. 록시아스는 자신의 얼굴을 단번에 가릴 듯 큼직한 손, 이 감싸 잡은 카밀의 성기에 숨을 먹었다.
언제 저렇게 커졌는가?
아니, 그것은 잘못된 질문이었다. 야릇하게 문질러지는 저 성기에 대해 묻자면, 어떻게 저렇게 커졌는가? 라는 질문이 맞았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제 몸에 고정된 새빨간 시선으로 수치심을 느꼈다. 만족감과 함께. 왜냐하면, 어차피 록시아스 또한….
“하… 그래요.”
풀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제 괴로워하지 마요….”
자신을 따라 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수치스러워도 수치스럽지 않았다.
“록시.”
최초였다. 두 사람에게 공평한 시간이 왔다.
멋대로 주물렀던 세상이 이제는 자신을 쥐고 놀렸다. 더는 선택을 미룰 수 없었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수음하는 카밀을 감상하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러한 불상사가 일어날 터였다. 록시아스는 자존심을 버리기로 했다. 이미 구겨지고 찢긴 것은 도로 수거할 수도 없을 것이다. 굴복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상의까지 벗을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벨트로 손을 뻗었다.
어쩌면 나쁘지 않은 결정일 터다. 그야 카밀의 피를 눈앞에 두었을 때처럼 본능만을 사유하는 짐승이 되어 카밀에게 자신을 만져 달라며 애걸하는 것보다야 스스로 해결하는 쪽이 백번은 나으므로.
물에 젖은 손가락이 가죽 벨트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사탕 같았다. 자신의 몸이, 아니, 아마도 카밀과 자신의 몸 둘 다. 척척한 감각은 오로지 자신의 살갗에서 느껴졌으며, 달콤한 체향은 카밀로부터 풍기고 있었다.
목전으로 다가온 해방을 인지하자, 손길을 맴돌던 망설임은 온데간데없었으며 재빠르기만 했다. 벨트 버클을 풀어낸 록시아스는 이어 단추를 끌러 내고, 지퍼를 내렸다. 하의를 완전히 벗기도 전이었으나 벌써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래요. 이제 괴로워하지 마요… 록시.’
그렇게 속삭이는 음성은 웃는 듯도 했으며 화가 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정말 카밀이 말한 것인가? 환청일까? 록시아스는 취기가 오른 양 해롱거리는 의식 속에서 불필요한 정답을 고르며, 하의를 내렸다.
“하아, 하아….”
이것이… 내 것이 맞나?
자신의 발기한 성기를 처음 제대로 면한 록시아스는 의문했다. 아랫배가 간지럽고 등허리와 허벅다리가 꼬이는 감각은 또렷했으나 시각으로 감지한 제 육체에서는 도통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까. 헐벗은 하체가 제 몸이 아닌 듯하니 예상했던 정도보다 부끄러움이 덜했다.
기쁜 심정을 숨기지 않고 입술로 곡선을 그린 카밀은 밑을 빤히 응시하다가, 백치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흡혈귀에게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록시아스의 명령을 기다릴 때도 저런 얼굴을 할까 궁금해졌다. 하기야, 딱 저만큼만 사랑스러웠다면 록시아스가 항시 냉정하게 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록시아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보였다.
입꼬리를 조금 더 치올린 카밀은 록시아스와 마주한 눈동자를 내려 자신의 중심을 가리켰다.
“록시.”
록시아스에게만 친절을 받아 보지 못했던 카밀은 록시아스에게만 친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보기만 한다고 나아지지 않아요.”
부드럽게 성숙된 저음이 차근차근, 록시아스에게 일러 주기 시작했다.
“저처럼 해요, 손을 써요….”
사냥할 때조차 손을 많이 쓰지 않는 록시아스의 손바닥은 갈라지거나 굳지도 않고 보드라웠다. 얼마큼 참았는지는 몰라도, 요도에서 선액을 질질 흘리는 발정 난 성기를 달래기에 충분히 훌륭한 도구일 것이다.
혀로 아랫입술을 훑는 듯했다가, 아예 입술을 말아 문 록시아스가 천천히 손을 옮겼다.
“손바닥으로 감싸고… 손가락으로만 잡아도 돼요. 좋을 대로 만져요.”
어르고 달래는 듯한 어조는 음험하기도 했다. 카밀은 죄를 부추기는 뱀처럼 속삭였고, 느릿하고 끈적끈적하게 움직였다. 놀랄 만큼 어리숙한 록시아스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제대로 습득할 수 있도록.
보란 듯이, 아니, 록시아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카밀은 제 성기에 붙인 손가락을 폈다가 도로 구부리며 기둥을 고쳐 잡았다. 불거진 핏줄에서 울리는 박동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같은 때, 록시아스가 자신을 따라 그대로 이행하며 입술을 놓더니 숨을 뿌렸다.
“하아.”
“하…. 그래, 그렇게요.”
손날과 맞닿은 뿌리 부분이 불룩거렸다.
“빨리 배워야 해요. 왜냐하면….”
아랫배와 틈 없이 맞닿을 만큼 치솟은 성기를 억지로 잡아 내려 앞머리를 록시아스를 향해 기울인 카밀은 손목을 조금씩 돌리며 기둥을 문질렀다. 기특한 록시아스가 자신을 따라 했다. 자신의 눈과 아랫배를 번갈아 훑으며, 바닥을 짚은 왼손을 구부리면서, 은밀하게 모은 허벅지를 점차 넓게 벌리면서.
“록시가, 아, 그렇게 봐 주니까 참기 힘들어.”
핏줄 돋은 기둥을 지나친 손바닥이 귀두를 감싸 둥글렸다. 앞머리로 흐르던 선액이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사이에 발렸다.
“하아, 아….”
록시아스가 가슴을 들썩거리며 신음했다. 금욕을 설교하듯 경건하던 이목구비가 일그러지며 망가졌다.
“하, 말도 안 돼….”
수십 수백 번 그렸던 은밀한 망상 중에서도 지금 록시아스의 모습보다 음란한 장면은 없었다. 카밀은 일순 어금니를 물었다. 괴로웠다. 팔을 뻗기만 하면 닿을 만한 거리에 록시아스가 있었으나 정작 만질 수 있는 것은 제 몸뿐인 탓이었다. 팔을 뻗어 주기만 하면 몸을 바칠 수 있는데, 결코 그러지 않을 록시아스 탓이었다.
“우리, 하아, 다시는 이 짓 하지 말아요.”
“…아, 읏.”
“진짜 미치기 전에….”
진짜 미쳐서 록시아스한테 달려들기 전에. 그 말을 간소화시킨 카밀은 침 고인 입 안으로 혓바닥을 굴렸다. 입맛을 다시듯이.
욕망의 목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던 록시아스가 이렇게 부러웠던 적이 없었다. 내가 록시아스였다면. 카밀은 허무맹랑한 상상을 했다. 참을성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저질러도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 록시가 자신이었다면, 저 손길로 자신을 멋대로 주무르고, 저 입술로 자신을 마음껏 취할 텐데. 온갖 불순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음을 묻힌 저 혀로 나를 핥을 텐데. 내 혀를, 내 입술을, 내 턱을, 목울대를, 빗장뼈와 가슴팍을, 아랫배를….
노골적인 상상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카밀의 손짓은 거칠어졌다.
록시아스는 어느새 스스로 잘하고 있었다. 더는 카밀이 하는 대로 쫓지 않으며 카밀과 엇박으로 수음하고 있었다.
굶주린 카밀은 먹음직한 상상을 지속하며, 하의를 발목에 걸친 채 허벅다리를 벌리고 자위하는 록시아스를 음미했다. 여태껏 자신에게 꽂힌 붉은 눈동자는 내리깔린 까만 속눈썹으로 완전히 가려졌다가 다시 반쯤 보이기를 반복했다. 입술은 깨물었다가 놓았다. 어깨를 떨며 고개를 확 젖히고 숨을 터뜨리며 신음하기도 했다. 타일 바닥에 놓인 손은 얌전하게 오그라져 있었으나 간혹 느닷없이 허벅지를 기어올라 손톱을 세워 피부를 긁었다. 탓에 록시아스의 왼쪽 허벅지에 기다랗고 빨간 자국이 남았다가 사라졌다가 다시금 남았다.
“흣, 아…!”
“하….”
이제 록시아스는 몇 번이고 겪어 보았다는 듯 능숙하게 수음했다. 야릇한 소리를 억지로 삼키지도 않으며 벌어진 입술을 혀로 훑고는, 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치켰다. 정확히는 비웃는 것처럼.
카밀은 절정에 이를수록 풀어지던 미간을 와락 구겼다.
“하아, 아… 하.”
아, 하, 웃겨. 귀엽고 가엾은 카밀아.
“흐읏, 카밀….”
눈을 나릿하게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카밀은 록시아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날 만지고 싶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만 있는 기분이 어때. 난 상관없어. 이렇게 혼자 잘하고 있잖아. 고통스러운 건 너뿐이야. 그런데 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즐기고 있네. 천하게….
이전 록시아스를 고문했던 환청이 카밀에게로 옮겨져 카밀을 벌했다.
“아… 록시….”
겨우, 이따위 걸로 우리가 동등해질 거라고 믿었어? 응?
“카밀, 만족해…?”
공정하게 나눈 줄로 알았던 수치심이 오로지 카밀의 몫이었음을, 환청은 카밀에게 가르쳤다.
“너무, 아, 너무 만족해요.”
카밀은 자신의 시간과 록시아스의 시간의 간극을 되새겼다. 시간은 공평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록시아스가 앞서고 있었다. 록시아스가 빠르기 때문일까, 자신이 지나치게 느린 탓일까.
“응… 하아, 그래.”
목을 세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욕조에 머리를 기대며, 희미하던 미소를 명확한 웃음으로 만들어 보였다.
‘이제 괴로워하지 마요….’
안일했다. 겁쟁이처럼 굴었다. 추잡하게 여겼기에 멀리했던 행위는 눈물이 비집어질 만큼 생경했으나 반면 생경한 만큼 자극적이므로 쉽사리 익힐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운데. 정말이지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하… 하아, 하하…!”
쓰지 않는 손으로 눈자위를 덮은 록시아스는 사정을 유도하는 손짓을 더더욱 빨리하며, 웃음 섞인 신음을 가감 없이 내질렀다.
이윽고 카밀을 향해 정면을 바로 세운 록시아스가 앞머리를 쓸어 넘겨 “아.” 찌푸린 미간을 드러내고는 읊조렸다.
“내가 봐 줄 때 싸 봐. 참기… 하, 힘들다며.”
외설적인 비아냥이 카밀을 짓밟았다.
“아….”
“미치지 말고… 소중한 카밀아.”
일이 끝난 뒤에, 네가 주제넘은 일을 모르는 척해 줄게. 귀엽게 군 셈 쳐 줄게. 대신 넌 건방 떤 죄를 반성하면서 언제나 그랬듯이 고분고분하게 굴어. 엎드려서, 내가 내버린 자존심이나 핥아. 공손하게.
명령대로.
이미 짓눌린 카밀은 더욱이 납작 엎드렸다.
“록시가 시키는 대로, 아, 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한계였다. 카밀은 상박을 불끈거리며 성기를 애무하는 속도를 더했다. 여유롭게 명령하였으나 손길은 자신과 다르지 않게 다급한 록시아스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절정에 근접하며 자꾸만 감기는 눈을 뜬 채로, 그림자 진 금빛 속눈썹을 떨면서.
다음번에는 더욱 모질고 가학적인 명령이 제게 떨어지길 소원하면서, 카밀은 파정했다.
비슷한 때, 고개를 고꾸라트린 록시아스가 구부린 등을 떨었다. 록시아스는 제 구둣발에 묻은 카밀의 정액을 내려다보며, 첫 절정을 맞이했다.
“…….”
“하….”
여분의 사정감을 내쫓을 동안, 두 사람은 난잡한 꼴인 서로를 빤히 훑었다.
가쁜 호흡이 잦아들었다. 더는 환청도, 신음도, 젖은 살갗을 문지르는 소음도, 명령도, 대답도 없었다. 내내 욕조에서 범람하는 물만이 소란스러웠다.
Bread And Butter
01.
로스톡에서 몇 번의 계절을 반복해서 겪자 록시아스와 카밀을 알아보는 것을 넘어 알은체하는 마을 사람이 늘어났다. 작은 변두리 마을에 오래 머무르기에 두 사람은 너무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록시아스가 이사를 결심하게 된 것은 카밀의 생일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록시. 마트에 가야겠어요.”
텅 빈 냉장고 문을 닫은 카밀이 구부린 등을 펴며 말했다.
아직 흡혈귀로 태어나기 전인 카밀은 하루에 몇 번씩 인간의 음식을 섭취해야 했으므로 주기적으로 장을 보았다. 록시아스는 본인이 사냥할 때를 제하고는 결코 카밀을 혼자 두지 않았으므로 장보기는 언제나 둘이 함께 이루어졌다.
“응.”
대꾸한 록시아스가 팔짱을 풀었다.
“나가자.”
“네.”
10월에 접어들었으나 아직은 두꺼운 외투가 필요할 만큼 춥지 않았다. 카밀과 록시아스는 셔츠만 걸친 모습으로 외출했다.
“걸어가.”
카밀이 마당에 주차된 차 앞에 서자, 록시아스가 카밀을 지나치며 일렀다.
두 사람의 집은 로스톡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중심가로 가기 위해서는 차를 모는 편이 편리했지만 간혹 록시아스는 일부러 걷는 편을 택했다. 카밀은 그것이 운동, 혹은 훈련의 일환이겠거니 여기며 한 번도 군소리 않고 록시아스를 따랐다.
순간 이동을 하는지, 아니면 순간 이동처럼 보일 만큼 빨리 걷는지, 아무튼 마음먹으면 단숨에 마트까지 도달할 수 있는 록시아스는 카밀과 걸을 때면 ‘보통 사람’ 걸음걸이를 유지했다. 하나 ‘보통 사람’이 걷는 속도라 할지라도 몇 년 전에는 카밀이 뛰다시피 해야 겨우 따라잡을 만큼 빨랐다. 물론 카밀이 록시아스의 신장을 넘어선 지금은 달랐다. 카밀은 록시아스에 맞춰 걸음 속도를 늦췄다.
두 사람은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바다와 가까울수록 겨울이 이르게 찾아오는 듯, 해안가를 통과하는 바람은 차디찼다. 거세기도 거세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리고, 셔츠가 펄럭거렸다. 카밀은 방파제에 부닥치는 물살을 흘겨보았다. 일순 강풍이 불어닥치면 높게 치솟았다 부서지는 파도의 끝자락이 록시아스의 바짓단을 적셨다.
“록시. 잠깐만요.”
느닷없이 발을 세운 카밀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에 걸음을 멈춘 록시아스가 뒤를 돌아 카밀을 내려다보았다. 카밀은 운동화 끈을 다시 매고 있었다.
“이제 됐어요.”
운동화 끈을 가지런하게 묶은 카밀이 도로 일어섰다. 록시아스는 맹숭맹숭한 표정으로 등을 돌려 걸음을 재개했다. 그를 뒤쫓는 카밀은 자연스레 방향을 틀어 방파제 쪽으로 자리했다. 더는 튀는 물살에 록시아스의 바짓단이 젖지 않았다.
해안가를 벗어나 민가가 이어진 도로로 들어섰다. 워낙 과묵한 록시아스로 인해 두 사람의 산책은 항시 고요했으며 그에 카밀도 구태여 불만 품지 않았다. 록시아스의 발소리와 제 발소리가 겹쳐지는 규칙적인 소음에 집중하다 보면 가슴이 평화로이 가라앉는 듯해서 도리어 좋았다.
하지만 근 며칠은 달랐다. 명화 속 인물처럼 은밀하게 다물린 카밀의 입술은 할 말을 뱉을 듯 떨어졌다가 도로 붙기를 걷는 내내 반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이래 카밀은 궁금한 것이 아주 많아진 것이다. 세상을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우기 시작한 유년기로 회귀한 양 말이다.
‘그날’이란 록시아스가 자신의 피를 두 번째로 마신 날이었다. 식사를 마친 록시아스가 별안간 욕실에 몸을 숨긴 날이기도 했다. 평소와 다른 록시아스를 마주하려 문을 부수고 욕실을 침범한 날이기도 했다. 몸이 달아 어쩔 줄 모르는 록시아스를 앞에 두고 건방을 떨었던 날이기도 했고….
무엇이 ‘그날’ 록시아스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수많은 질문 중 가장 해결이 시급한 궁금증은 단연코 그것이었다.
‘그때, 왜 그랬어요?’라고, 혹은 ‘록시, 혹시 내 피를 마시고 흥분했어요?’라고 묻고 싶었다. 하나 묻는다 해도 대답이 보장되지 않았다.
망설이는 동안 질문은 금기가 되었다. 록시아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굴었으나, 카밀은 제가 그날에 대해 한 마디라도 꺼낸다면 록시아스가 아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막연한 불안을 느꼈다. 그날 겪어 본 록시아스는 예상 밖으로 수줍음이 많은 편인 듯했으니까, 곤란한 화두와 맞닥뜨리면 도망갈 수도 있었다.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버린 것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겁에 질린 고양이처럼.
더군다나 거짓말이란 손쉬운 대응책이 존재하는 한 록시아스는 능청스레 질문을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다짜고짜 묻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약 한 달 전, 카밀은 발작을 연기했다.
록시아스가 제 피를 마신 탓에 아래를 세웠는지만 알아내면 되었다. 그 답만 알면, 곁가지로 돋은 질문들은 자연스레 해결되거나, 해결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록시아스가 자신으로 인해 발정하였는지만 알면.
그러나 기대와 달리 수확은 없었다. 흡혈을 당하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록시아스는 까만 동공을 커다랗게 키우며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카펫이며 벽에 피가 튀도록 게걸스레 자신을 마셨다. 그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정신을 차린 흡혈귀는 곧장 집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3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3일. 그동안 카밀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로스톡을 뛰어다니며 록시아스를 찾아 헤맸다. 평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하며 길고 긴 3일이었다.
록시에게 버림받았다, 고 결론을 내렸다. 카밀은 죽기로 했다. 부엌으로 뛰어가 식칼을 빼 들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칼날을 제 모가지로 겨눴다. 그대로 찌르기만 하면, 록시아스라는 주체를 잃고 껍데기만 남은 삶을 끝낼 수 있을 터였다.
칼날이 목에 박히는 기분은 록시아스에게 물렸을 때 기분과 흡사했다.
목이며 입으로 울컥울컥 피를 토해 내며 바닥으로 쓰러진 카밀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록시아스의 기척이며 발소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기대했다. 하지만 저 혼자뿐인 집은 내내 잔인하도록 고요했다.
카밀이 다시 눈을 떴을 때도, 그토록 그리던 까맣고 하얗고 빨간 실루엣이 돌아왔음을 알아차린 뒤에도 집 안은 한결같이 조용했다. 칼에 찢긴 카밀을 말끔히 치료한 록시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냐, 묻지도 않았다.
이후 카밀은 질문하지도, 발작을 연기하지도 못했다. 록시아스가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 봐.
3일간의 부재는 감히 록시아스를 시험한 카밀에게 내려진 벌이었으며, 동시에 다시는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였다.
입술은 우물쭈물했으나 걸음은 제 역할에 충실했다. 어느새 마트에 다다랐다. 카밀은 능숙하게 바구니를 잡아 들었다. 동선은 록시아스를 따랐다.
무엇을 두고 살지 말지 고민할 찰나 따위는 없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을 쫓아 마트 한 바퀴를 돌며 카밀은 딱 필요한 음식 재료며 생필품만을 재빨리 골라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았다. 장보기에 할당된 시간은 20분 남짓이었다.
평일 이른 오전, 마트는 한산했다. 계산대 네 곳 중 두 군데만 열려 있었으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두 남자는 맨 오른쪽 계산대에 섰다. 카밀은 바구니에 담긴 물건을 차근차근 계산대에 올렸고, 록시아스는 안에 든 것이라고는 카드 한 장뿐이라 납작한 지갑을 꺼냈다.
계산원이 포장된 굴라쉬4)용 고기의 바코드를 스캔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카밀이 인사를 되돌렸으며, 록시아스는 눈인사만 했다. 직원은 물건들을 차례차례 스캔하며 카밀과 록시아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객을 면한 직원의 사무적 친절이라고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삑. 스캔한 우유를 옆으로 넘긴 직원이 입을 열었다.
“항상 이 시간에 오시네요.”
“…….”
이번에 카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과 인사 이외의 대화를 하려면 록시아스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록시아스를 바라보았다. 록시아스는 직원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감정을 읽을 수 없도록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직원은 대단한 호의를 얻은 양 얼굴을 활짝 펴 웃었다.
“반가워서요. 항상 여기서 계산을 하시잖아요.”
삑. 양파 가격을 찍은 직원이 내리 말했다.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일하는데, 그때마다 오셔서 신기했어요.”
“…….”
“마트 말고 해안가에서 마주친 적도 있는데, 물론 저만 알아봤던 것 같지만.”
카밀은 록시아스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았다. 직원은 이전보다 느린 손짓으로 가격표를 스캔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작고, 사는 사람도 적은 동네니까 이런 일이 많기는 한데.”
삑. 스캐너를 지난 치약이 옆으로 넘겨졌다.
“워낙 눈에 띄니까. 이런 시골에서는요.”
삑. 마지막으로 칫솔이 스캔 되었다. 직원이 계산대를 두드렸다.
“42유로 31센트예요.”
그리고 고개를 바짝 세워 록시아스와 카밀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형제예요? 안 닮았는데. 친구? 대학생?”
“…….”
록시아스는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두르며 카드를 내밀었다. 직원은 눈치가 없는 체하는 것인지 아니면 뻔뻔한 것인지, 카드를 받지도 않고 이어 물었다.
“아, 무례했다면 미안해요. 근데 궁금했거든요.”
“…….”
“일하는 시간에 그쪽들이 항상 온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물어봐 달라고 하도 그래서….”
카밀은 계산된 물건들을 봉투에 집어넣으며, 수다스러운 직원과 짜증을 내고 있는 록시아스를 번갈아 보았다.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만날래요? 제 친구들이랑 같이요.”
무례를 무릅쓰면서까지 장황하게 늘어놓던 말의 목적이 드디어 나왔다. 그제야 직원은 내내 허공에 내밀어진 채였던 카드를 받아 계산을, 하려고 했으나 록시아스가 손을 거뒀다.
헛손짓을 한 직원이 일순 동그랗게 뜬 눈을 도로 접으며 미소를 짓고는 록시아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에 시선조차 주지 않은 록시아스는 줄곧 다물고 있었던 입술을 열었다.
“카밀아.”
내뱉은 말은 직원이 아닌 카밀을 향했다. 물건을 담던 손을 멈춘 카밀이 즉답했다.
“네, 록시.”
계산대에서 몸을 돌린 록시아스가 카드를 지갑에 도로 넣으며 일렀다.
“나가자.”
“…네.”
계산하지 않았으므로 물건을 챙길 수는 없었다. 봉투를 내려놓은 카밀은 마트 입구로 몸을 돌렸다. 록시아스를 앞설 수 없었으므로 구둣발 소리가 날 때까지 우두커니 기다렸다.
“저기요.”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뻔뻔한 것이었다. 만면에 어린 미소며 목소리에 두른 친절을 사그라트린 직원이 계산대를 짚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를 찰나 흘겨본 록시아스는 끝까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구둣발을 뗐다.
그날 오전과 오후, 카밀은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저녁은 걸렀다. 록시아스가 별안간 차에 타라고 이른 탓이었다.
외투를 재빠르게 걸친 카밀은 어디 가느냐 묻지도 않고 얼른 차에 올랐다. 시동이 걸렸다. 룸 미러에 비친 집이 점차 자그마해지더니 점이 되어 사라졌다. 카밀이 기억하는 로스톡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록시아스는 운전대를 돌리며, 마트 직원의 면상을 떠올렸다. 짜증이 솟구쳤다.
어딜 주제넘게….
반대 차선을 지나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카밀을 훑던 직원의 눈빛과 겹쳐 보였다. 록시아스의 콧잔등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런 눈으로 봐.
까만 구둣발이 액셀러레이터를 지르밟았다.
***
고개가 저절로 고꾸라졌다. 등허리며 사지가 전류에 노출된 듯이 찌릿하게 떨렸다. 모든 근육이 일순 수축했다가 몸을 가눌 수조차 없도록 풀어졌다. 죽기 직전 이런 느낌이 들까, 하고 록시아스는 생각했다. 수면욕이 없는 육체인데도 눈꺼풀이 감겼다. 좁아진 시야로 자신의 구둣발이 들어왔다. 깨끗하게 닦여 번쩍거렸던 가죽이 카밀의 정액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
‘하….’
첫 사정은 강렬하였고 그만큼 여운 또한 길고 짙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검은 숲의 아둔한 짐승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쉬지 않고 가동되던 이성을 휴식시키는 기분이란…. 인간들은, 인간이었던 흡혈귀들은, 그리고 카밀은 몇 번이고 이러한 기분에 취했던 것이다.
록시아스는 체액이 흐르는 발부리에서 시선을 떼어 제 앞에 꿇린 무릎으로 옮겼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훈련시킨 보람이 여실한 카밀의 육체를 치훑었다.
어쩌면 카밀이 저렇게 클 동안 실감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누구를 멍청하다며 폄하할 자격이란 없을지도 몰랐다. 성욕으로 말미암은 쾌감을 겪어 보지도 않고 등한시하였던 것만 보아도… 아니, 실지 이전 성적 욕망이란 자신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비존재한 것을 어떻게 감지한단 말인가.
하지만 하나를 깨우쳤다고 하여도 오랜 삶을 통한 경험과 갖가지 지식이 촘촘하게 엮여 완성된 자아는 굳건했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쉽다고 누가 말했던가. 록시아스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발정 난 꼴을 카밀에게 들키고 음란한 행태를 전시하듯 저질렀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떠한 생각으로 그랬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그때는 그저… 마치 환각 상태에 놓여 있었던 양 이성적일 수 없었다.
그러한 추태는 단 한 번이면 족했다. 한번 맛을 보니 갈증은 더욱 심해졌으나, 거듭 실수를 저지르기에 록시아스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진작 나가떨어진 자존심과는 별개로.
카밀에게 목숨을 구걸할 작정까지 한 통에, 어째서 그런 것을 꺼리는지 록시아스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정의한 상하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일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가 단순히 수치스러운 탓일까? 아니면….
어찌 되었든. 재차 성욕에 머리를 조아리고 바지를 벗게 되더라도 카밀 앞에서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혼자 해결하면 될 일이니 카밀의 되바라진 도움을 구할 필요는 더욱이나 없었다. ‘그런 날’은 정말이지 ‘그날’이 마지막이다, 라고 록시아스는 결심을 되새겼다.
단발성일 실수를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것은 우습다고 여겼기에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평소처럼 굴었다. 카밀 또한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록시아스를 대했다. 겉보기로는 그렇게 평범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카밀을 흡혈하고 싶은 충동이 록시아스를 휘감았다. 카밀의 목덜미 아래에서 퍼져 나오는 맥박이 록시아스를 유혹했다. 군침을 돌게 하는 향긋한 체향이 부추겼다. 나를 마셔요.
사냥은 전보다 규칙적이며 자주 이루어졌으나 결론적으로 근래 록시아스가 마신 피란 카밀의 것뿐이었다. 카밀이 아닌 가엾은 희생양들의 혈액은 록시아스의 목구멍을 넘어가기 전 바닥에 뱉어졌다. 오랜 옛날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적, 썩어 가는 병자들의 피도 이토록 역겨운 맛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종래 록시아스는 사냥을 휴식했다. 실질적으로는 포기였다.
그렇다면 카밀이 발작을 일으키는 순간이 유일한 식사 시간이었다. 다행으로 때는 록시아스가 한계에 다다르기 전 찾아왔다.
술에 취한 양 눈꺼풀이 풀리고 양 뺨이 상기된 카밀은 바닥을 기다시피 록시아스에게 다가와 바짓단을 붙잡으며 애걸했다. 발작하는 언제나처럼.
‘록시, 제 피를 마셔 줘요. 제발요, 록시, 네?’
거절할 이유도, 선택권도 배고픈 흡혈귀는 가지지 못했다.
몸을 숙여 카밀과 시선을 맞춘 록시아스는 선이 고운 턱을 매만지며 허락을 말했다.
‘응, 카밀아.’
허기질 대로 허기진 참이었다. 기꺼이 카밀의 목을 물었다. 하얀 살결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 감상은 이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도록 익숙했으며 당연했다. 송골송골 맺히다가 이내 주룩주룩 흘러 혀를 적시는 피의 맛은 질릴 리 없도록 황홀했다. 이성을 챙기기란 불가능했다.
배 속이 채워지면 정신 또한 돌아왔다. 흡혈귀의 정신과 먹잇감의 정신 모두.
발작이 잦아든 카밀은 우선 눈물 젖은 제 눈가를 닦았고, 이어 핏물로 범벅인 록시아스의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에 록시아스는 눈을 한 번 깜빡였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밀의 피를 마시고 나니 예정된 대로 아래가 묵직해진 록시아스는 한 사람의 맥박만이 느껴지는 낡은 술집 문을 열어젖혔다. 어둑한 조명이 드문드문 비출 뿐인 실내는 손님의 불건전한 육체를 숨기기에 알맞았다.
다른 손님의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않는 술집의 주인은 구식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축구 경기로 무료함을 달래다 못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기척을 숨긴 흡혈귀는 구태여 주인을 깨우지 않고, 화장실로 향했다.
‘하아….’
의도치 않게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누르는 것만 빼고는 전부 쉬웠다.
일을 마친 록시아스는 겉보기에 전과 다르지 않았으나 괜스레 찝찝하여 손을 여섯 번 씻었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목욕을 할 참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그대로 술집을 떠나면 되었다. 하나 언제 잠에서 깼는지 모를 주인과 눈이 마주친 것이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술집 주인은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손님을 가장한 흡혈귀가 대답했다.
‘아까.’
‘아아….’
나직한 탄성은 대답이라기에 모호했다. 주인은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얼굴로 손님을 빤히 쳐다보다가, 읊조렸다.
‘…저기.’
록시아스는 이어질 말을 단번에 그리고 정확히 짐작했다.
‘내 피, 피, 피를 마셔 줄래요? 피, 피요!’
발작이었다.
카밀의 피 외에는 입도 대지 않는 흡혈귀는 심지어 약 한 시간 전에 식사를 마쳤으므로 포만했다. 하지만.
점차 몸을 심하게 경련하며, 질질 흐르는 눈물에 젖은 입술로 ‘제발 내 피를 마셔 줘요. 부탁해요! 당장!’ 외치는 발작자에게 흡혈귀가 다가가 섰다.
록시아스는 주인의 팔을 낚아챘다. 그대로 손목에 송곳니를 찔러 넣었다.
흡혈의 목적은 섭취가 아닌 실험이었다. 혹시 자신은 발작자의 피만을 제대로 맛볼 수 있게 되었을지 몰랐다.
발작자는 희귀했다. 여태껏 대략 오십 명 정도 보았고, 카밀 이후로는 한 명도 구경하지 못했을 정도이니.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금이 기회였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참으로 뜻밖의 수확이었다. 덕분에 록시아스는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다.
기분이 진창을 구르게 된 이유로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술집 주인은 발작자임에도 불구하고 카밀과 전혀 다르게, 반면 다른 먹잇감들과 비슷하도록 피 맛이 형편없었다.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둘째. 이로써 발작자라도 카밀이 아니라면 먹을 만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록시아스는 죽기 직전까지 높은 확률로 카밀의 피만을 마셔야 할 지경에 처했다.
셋째. 하지만 역겨운 피를 입에 댄 보람도 없이, 피 맛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발작자이냐 아니냐에 달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못된….’
카밀은 발작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카밀은 거짓말을 했다. 발작자를 연기하여 자신을 속였던 것이다. 거짓과는 거리가 먼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주 어렸던 때부터 지금까지. 바로 오늘까지!
‘카밀.’
아, 왜 눈치 못 챘지.
이마를 짚은 록시아스는 술집 주인의 시체를 가루로 만들며 탄식했다.
발작자는 흡혈 당한 후에도 발작을 멈추지 못했다.
하기야. 여태까지는 발작자를 만나면 피를 갈취한 뒤 곧장 죽여 버렸으니, 다른 발작자와 카밀의 다른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법도 했다.
록시아스는 카밀이 거짓말하지 않았을 경우 또한 고려해 보았다. 혹 카밀이 돌연변이라든가.
하지만 직감은 카밀이 결백하지 않노라 말하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카밀이 발작을 꾸며 냈다는 결론만이 명백했다.
나를 죽여야 하는 소중한 카밀. 나에게 순종하는 귀여운 카밀. 나를 사랑하는 가엾은 카밀… 그러나 나를 기만한 괘씸한 카밀. 똑똑해진 카밀은, 아니, 어쩌면 날 때부터 총명한 카밀은 자신의 관심과 손길, 심지어는 욕망을 얻어 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 깨우침으로 자신을 흔들고, 내젓고….
‘록시가 괴로우면, 슬퍼요….’
생긴 대로 자랐구나.
한 떨기 장미처럼 어여쁜 카밀을 떠올린 록시아스는 헛숨을 내뱉었다.
예뻐서 골라 줬더니. 말라 죽지 않도록 물을 준 은인을 그 보잘것없는 가시로 찌르는 장미.
다가오는 이번 카밀의 생일은 여느 생일과는 달랐다. 그날 카밀은 예정된 대로 흡혈귀로 다시 태어난다. 인간인 지금이야 가시를 얼마큼 뾰족하게 세우든 우습지만… 흡혈귀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햇수를 거듭해 자신을 살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진 카밀이 가시를 휘두른다면 모든 계획, 시간, 노력은 쓰레기가 될 것이다. 그를 말리기 어려울 테니까.
싹을 잘라야지.
더는 카밀의 피에 홀린 꼴을 보여서야 안 됐다. 카밀로 하여금 그의 피가 쓸모없다고 믿게 해야 했다. 내가, 제 피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라야.
술집 주인의 흔적을 깔끔하게 지운 록시아스는 해안가로 향했다.
다른 피를 마실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본능에 지워진 본능을 되찾기 위해서는 피나는 연습이 불가피했다. 해양을 방문한 록시아스는 뱃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물었다. 피란 피는 죄 먹어 치웠다. 그리고 뱉어 냈다. 게워 냈다.
‘…….’
배가 고팠다. 배 몇 척을 유령 선박으로 만들어 침몰시켰는데도, 굶주렸다.
‘벌써….’
3일이 지나 있었다.
‘도망치지는 않았겠지.’
바다 한가운데, 파도를 밟고 우두커니 선 록시아스는 자신에게 헤엄쳐 오는 카밀을 보았다. 그 환각은 록시아스로 하여금 결핍을 더욱 또렷이 실감하게 했다. 기어이 록시아스는 진짜 카밀을 향해 달렸다. 자신과 가까워지려 물살을 끝없이 가르는 카밀을 따돌리며.
그때, 진짜 카밀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어 가고 있었다.
카밀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록시아스는 기분이 아주, 아주, 더러워졌다.
진창을 구르던 기분이 아예 곤죽이 된 이유로는 한 가지가 있었다.
한 가지. 카밀에게 살해되기 전까지 자신은 결코 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이상 카밀의 피로부터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한 가지. 하지만 카밀은 죽음으로써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한 가지. 카밀, 카밀, 카밀, 카밀, 카밀! 카밀! 카밀! 카밀!
카밀!
그 한 가지에 록시아스는 주저앉았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는 목덜미를 눌러 치료하며, 록시아스는 악몽을 꾸었다. 잠도 자지 않는데….
시커먼 악몽 속. 홀로 빛을 받은 채 서 있는 카밀이 말했다.
‘좋아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록시아스가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죽으라고 명령한 적도 없는데 죽기로 작정한 주제에….
‘제 마음대로요.’
록시아스는 맥박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카밀을 빤히 관망하며 혼잣말했다.
“아니. 이제부터 넌 아무것도 마음대로 못 할 거야.”
안일하게 시간이나 세던 사이, 주도권 쟁탈전은 이미 시작한 채였다. 선두는 카밀이었다.
하지만 얼마큼 앞서간다고 한들… 그 목에 채운 목줄은 자신이 쥐고 있다. 확실하게.
***
“내려.”
난폭하게 차를 세운 록시아스가 일렀다.
“네, 록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카밀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 손잡이를 잡기 직전 흘끗 룸 미러로 본 록시아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록시가 어째서 화가 났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내미는 짧은 순간, 고민이 머릿속을 지나쳤다.
저녁에 출발하여 여섯 시간 남짓을 쉬지 않고 달렸다. 까맣기만 하던 하늘로 여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카밀은 노을과 비슷하기도, 완전히 다르기도 한 빛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특별한 감상은 들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하늘은 같았다.
점차 밝아지는 하늘로부터 시선을 거둔 파란 눈동자는 록시아스를 담았다. 이어서는 낯설지만 곧 익숙해져야 할 풍경을 새겼다.
카밀은 초행이었으나, 물론 록시아스에게는 낯익은 장소였다. 록시아스는 로스톡에서 유일하게 챙겨 온 열쇠 꾸러미를 꺼낸 뒤에 차 문을 닫고, 새 보금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록시아스가 그동안 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거처를 마련했던 덕분으로, 하루아침에 거주지를 옮겼다고 한들 하룻밤 지낼 곳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록시아스는 팔목이 들어가고도 남는 커다란 쇠고리에 주렁주렁 달린 수백 개의 열쇠를 물끄러미 보다가 용케 하나를 골라잡고는 문구멍으로 들이밀었다. 열쇠가 부드럽게 밀려들어 갔다. 이윽고 돌리자, 달칵 소릴 내며 현관문 잠금이 풀렸다.
안으로 들어서는 록시아스를 뒤따르며,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입양되었던 날을 떠올렸다. 새로운 집이 베를린에서 살던 집과 흡사한 분위기를 띤 탓이었다. 정원수가 많지 않아 잔디만 깎으면 금세 말끔해질 듯한 황량한 정원이며 역사가 깊어 보이는 저택, 그 모든 공간을 가라앉히는 무겁고 음산한 공기가 특히 닮아 있었다. 실내 또한 베를린 집과 유사한 느낌을 풍겼다. 구조는 달랐다.
조명을 밝힌 록시아스는 불 켜진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다가 제게 눈길을 주는 카밀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여기서 살 거야.”
그들에게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명령과 수용, 그리고 이행이면 되었다.
“좋아요, 록시.”
카밀은 샹들리에가 초라해지도록 찬란하게 미소 지으며, 즉답했다. 록시아스가 그를 빤히, 오래도록 응시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민망해져 미소를 거둘 만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카밀은 결코 낯빛을 어둑하게 바꾸지 않았다. 이윽고 록시아스는 물었다.
“카밀아, 뭐가 그렇게 좋아?”
그러면서 카밀의 턱을 붙잡았다. 카밀은 록시아스가 제 얼굴을 이쪽저쪽으로 돌려 보는 동안 얌전히 있었다. 대답만 하고.
“록시가 저를 데려와 줘서 좋아요. 안 버리고.”
카밀은 턱을 누르는 엄지의 차가운 체온을 느꼈다. 록시아스는 손가락을 데우는 홧홧한 입김을 느꼈고, 카밀에게서 손을 거두면서.
“버림받기 싫으면.”
입술을 열었다.
“잘해야지. 응?”
“…….”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를 왜 버려, 내가.”
입가에 박제된 듯했던 미소가 급격히 사그라졌다.
역시… 록시아스는 나에게 화났다.
사죄나 변명은 이유를 듣고 난 후에 해야 순서가 맞았다. 카밀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멀어졌던 손가락이 도로 다가왔다.
카밀의 다물린 입술 옆을 툭, 건드린 록시아스가 차분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네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 널 버릴까 했어. 하자 있는 쓰레기를 원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카밀아, 네가 귀여워서 용서했어. 네가 바라는 대로 네 피도 마셔 줬지.”
…들켰다.
카밀의 눈동자가 일순 아래로 하향했다. 록시아스는 말을 이었다.
“예쁨받고 싶으면 예쁜 짓을 해. 나쁜 짓 말고. 거짓말이 나쁜 줄 알잖아. 그치? 카밀, 아가야.”
“록시.”
이제 카밀이 사죄하거나 변명할 차례였다.
“…죄송해요.”
사죄를 먼저 했다.
“잘못했어요. 제가 나빴어요. 반성할게요. 다시는 안 할 거예요, 거짓말….”
이후 흐려지는 말꼬리 뒤로 변명을 붙였다.
“거짓말하지 않으면, 록시한테 관심받기 어려워서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나더러 예쁘다고 하는데, 록시는 아니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너무 어려웠어요. 예쁜 짓이 어떤 건지 배우기 전이라서요. 록시가 가르쳐 주지 않았잖아요. 예쁜 짓, 나쁜 짓, 다….”
추궁으로 변질되어 가던 변명을 잠시 삼켰다. 카밀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도로 록시아스를 마주 보았다. 흡혈귀를 애착하는 안광에 물기가 어렸다.
“그래도 이제는 알았으니까, 뭐가 나쁜지, 뭐가 맞는지, 다 알겠으니까… 버리지만 마세요. 네? 록시. 저번처럼… 갑자기 사라지면 안 돼요…. 제가 잘할게요.”
촉촉한 벽안을 비집고 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또르르 흘렀다.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놓은 카밀은 마지막으로 협박을 뱉었다.
“버리면 죽어 버릴 거예요.”
하지만 신뢰를 저버린 통에 자신의 으름장이 과연 록시아스에게 위협이나 될지. 카밀은 충동적인 공갈을 즉시 후회했다. 잘못 뱉었다.
“아니, 아니에요. 록시. 죄송해요.”
자신이 해야 할 말은, 그러니까….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
카밀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동안에도 한 번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일 초라도 한눈파는 순간 록시아스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버릴 거면 죽여 주세요.”
록시아스는 카밀이 또다시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실만을 고백하는 중인지를 가늠했다. 속눈썹을 떨며 뺨을 적시고, 빨간 입술을 말하는 중간중간 앞니로 물었다가 놓는 낯짝은 어떠한 죄를 지었어도 쉬이 사면될 만큼 가련하고 깨끗해 보였지만, 단번에 의심을 정리하기에 카밀은 너무나 요망했다.
“…….”
“하지만요.”
용서할 권한이 있는 자에게 침묵이란 권력이었으나, 용서받아야 하는 자의 침묵은 저항으로 간주되었다. 자비를 얻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구걸해야 했다.
“록시가 알고 있는 ‘발작’이 아니라고, 전부 거짓말이었던 건 아니에요.”
카밀은 말 없는 록시아스를 향해 거듭 젖은 목소리를 냈다.
“‘발작’만 아니었지. 다 진심이었어요. 록시에게 내 피를 주고 싶었어요. 록시가 내 피를 마셔 주길 바랐어요. 왜냐하면 록시가 다른 인간들 피를 마시는 게 싫어서요. 나도 피가 있는데, 내 피가 있는데 왜 다른 사람들 걸 마시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록시가 다른 것들 목을 빠는 게 정말 미치도록 싫었어요.”
그러나 관용이며 연민을 자아내고자 읊기 시작한 말은 되레 점점, 억눌린 감정에 대한 토로와 결핍된 애정에 대한 불평이 되어 갔다. 록시아스에게 예쁨받으려면 착한 말만 해야 하는데, 입이 자꾸만 숨겨 둔 마음을 멋대로 지껄였다.
“저, 앞으로 절대 절대로 거짓말 안 할게요. 대신….”
록시아스는 이맛살을 구겼다. 이어질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록시는 내 피만 마셔 주세요. 제발….”
영악한 카밀은 자신이 아니면 안 될 상대의 입장을 십분 활용해 부탁 같은 제안, 제안 같은 강요를 했다.
“록시도 내 피가 제일 맛있다고 했잖아요.”
“아가야.”
그에 코웃음을 친 록시아스는 드디어 침묵을 깨고, 카밀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를 통보했다.
“잊었어? 이번 네 생일.”
카밀의 생일은 6일 후.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흡혈귀로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아….”
카밀은 축축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눈과 입술을 크게 벌렸다.
그랬다. 자신은 여태껏 중 가장 특별한 생일에 록시아스와 같은 흡혈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흡혈귀의 동족이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
“내가 아무리 개 같은 흡혈귀처럼 보여도, 동족은 안 먹어.”
흡혈귀가 흡혈귀를 먹잇감 삼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삼아 본 적도 없거니와.
“어차피 먹고 싶지도 않아질 거고.”
삼을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흡혈귀란 그렇게 태어났다. 동족의 피 냄새와 맥박에는 무감하도록 말이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어리광은 그만 부려. 응?”
록시아스는 오래간만에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
카밀은 급격히 울적해졌다. 록시아스가 한마디만 뱉어도 네, 네, 꼬박꼬박 튀어나오던 대답조차 잊고 눈시울만 붉혔다.
록시아스를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잃은 셈이었다.
카밀의 생일까지 겨우 6일만 남았다. 길면 2주 넘도록 사냥을 쉰 적도 있는 록시아스가 허기를 인내하기에 어렵지 않을 기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흡혈귀가 되겠지…. 어째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후회스러웠다. 마지막 발작, 그때가 록시아스에게 물리는 마지막 기회인 줄 자각하고 있었더라면, 좀 더…!
좀 더 마실 걸 그랬어.
후회는 카밀의 몫만이 아니었다. 태연자약한 얼굴인 록시아스 또한 은밀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아울러 우려했다. 카밀의 피를 마시지 못하게 되면 무엇으로 배를 채울까…. 더해서는 궁금증이 일었다. 과연… 흡혈귀가 되었다고 피 맛도 달라질까?
아니다. 물음표를 떠올리기 무섭게 록시아스는 생각을 지웠다. 카밀의 피를 원하는 것은 카밀에게 권력을 쥐여 주는 꼴이었다. 이로써 카밀의 피를 향한 갈구는 끝나야 했다. 순간이었다지만, 카밀의 피를 내리 취할 여지를 고민한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고작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카밀이 선두에 달릴 수 있는 유한한 시간이었다. 이후로는 자신이 죽음을 맞을 때까지 카밀을 앞설 것이다. 카밀은 목줄에 영영 매인 채로 제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다닐 테고.
멍하니 선 카밀을 응시하며, 록시아스는 보란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들으라는 듯이 웃음기를 섞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밀아.”
카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잔 떨림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이어 어깨를 약간 기울인 록시아스는 바닥을 향한 카밀의 정면에 얼굴을 붙였다.
“서러워?”
젖은 눈가를 엄지로 훔쳐 주며 묻자, 카밀이 턱을 미세하게 주억거렸다.
“네, 서러워요.”
“그러지 마.”
“…….”
록시아스는 카밀의 뺨을 감싸 들어 올렸다. 자신을 보게 했다. 승리를 확신하고 미소를 띤 자신의 얼굴을.
“슬픔은 아무 도움도 안 돼.”
잠시 방황하였고 혼란했으나 결국에는 전부 제 뜻대로 될 터였다.
“즐겨. 응?”
그러니 카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나위를 선사하여도 되었다.
“생일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반갑지 않은 휴식이 내려졌다.
“…그럴게요, 록시.”
거부할 자격은 없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바닥에 뺨을 붙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록시아스는 뺨으로부터 손을 올려 금빛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그래. 이렇게 고분고분하니까 너무 예쁘다.”
칭찬해 주었다. 잘못을 저지른 카밀이 다시는, 관심 주지 않고 가르쳐 주지 않은 당신 잘못이라며 탓할 수도 없게.
***
휴가라고는 하나, 어릴 적부터 내리 지켜 온 생활 습관에서 벗어나지 않은 날이 이어졌다. 이전과 똑같은 매일인 것이다. 오전 일찍 눈을 뜨고, 목욕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독서하고, 생각하고, 점심을 먹고, 운동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목욕하고, 잠이 들고…. 배경이 로스톡에서 이름 모를 도시로 바뀐 점만 달랐다.
이사한 지 3일째. 그리고 흡혈귀가 되기 3일 전.
<영원히 새로운 날들: 의식의 저편에서 육체적 실존과 삶의 의미를 보다, 임사臨死 체험>
카밀은 막 완독한 책의 제목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록시아스가 독서를 마치는 오후 세 시 정각이 될 때까지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이윽고 책 제목을 아예 외워 <영원히 새로운 날들 의식의 저편에서 육체적 실존과 삶의 의미를 보다 임사 체험>을 눈 감고 83번 되뇌었을 때, 탁, 록시아스가 책을 덮었다. 그때만을 기다린 카밀은 즉시 입을 열었다.
“록시. 궁금한 게 있어요.”
허벅지 위로 책을 내려놓은 록시아스가 질문을 허락한다는 듯 턱짓했다. 즉시 카밀은 재차 입을 뗐다.
“어떻게 흡혈귀가 돼요?”
록시아스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차, 싶어 카밀은 다급한 마음을 갈무리하여 제대로 또박또박 질문했다.
“록시가 어떤 방법으로 저를 흡혈귀로 만드는지 알고 싶어요.”
“응.”
꼰 다리 방향을 바꾼 록시아스는 내내 질문할 순간만을 기다려 온 카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곧 알게 되잖아.”
“미리 듣고 실수 안 하려고요.”
짐짓 순한 어조였으나, 록시아스는 그에 묻어난 미세한 짜증을 감지했다. 하나 모르는 체하며 성의 없이 읊조렸다.
“네가 실수할 건 없어.”
“어떻게 하는 건데요?”
싫어도 머지않아 알게 될 텐데 무엇이 짜증 날 정도로 급할까. 록시아스는 카밀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궁리를 한번 들여다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얌전한 언행 뒤로 또 무슨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을지. 귀엽게.
“간단해.”
허벅지에 놓아둔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록시아스는 말하며 책장으로 향했다.
“평소랑 반대로.”
팔을 뻗은 록시아스가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네가 내 피를 마시면 돼.”
“그게 다예요?”
“응. 그게 다야. 돼지 새끼도 할 수 있는 쉬운 일.”
책장을 등진 록시아스가 뇌까리고는 카밀을 향해 손가락을 휘저었다.
“다 읽었으면 꽂아 놔.”
쭉 뻗은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동자를 기울인 카밀은 이어 책을 집으며 다리를 세웠다.
“네, 록시.”
책은 록시아스가 뽑았던 책 바로 옆자리에서 골라낸 것이었으므로, 카밀은 벽을 채운 책장 중 록시아스가 있는 쪽으로 걸었다. 록시아스의 대답을 양분 삼아 생각을 정리하며.
흡혈귀가 되기 위해서는 흡혈귀의 피를 마셔야 한다. 그리고 흡혈귀는 흡혈귀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개 같은 흡혈귀처럼 보여도, 동족은 안 먹어. 어차피 먹고 싶지도 않아질 거고.’
하지만 마시지 않을 뿐이지, 마실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흡혈귀가 흡혈귀의 피를 마시면 어떻게 될까?
탁. 빈자리에 책을 꽂아 넣은 카밀은 책장 칸을 짚은 채로 고개를 기울여 록시아스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든, 카밀은 록시아스가 자신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수단을 취하고자 했다. 그를 죽이라는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일 말고, 함께 살아야만 하는 법 말이다.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채로 영원히 함께…. 일단 흡혈귀는 웬만해서 죽지 않는 것 같으니, ‘영원히’는 이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다음은.
***
생일 하루 전.
덜 여문 존재인 인간으로서의 마지말 날.
오전 6시.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운 카밀은 눈을 뜨기도 전에 입술부터 달싹였다. 이윽고 몸을 모로 돌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고, 곧장 시야로 들어찬 매일 마주하여도 항시 반가운 인영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록시.”
“응, 안녕.”
돌아오는 짧은 인사가 하루를 살아 낼 원동력이 되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받은 원기에 무구한 미소로 화답하며 시트를 걷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침대 아래 가지런히 놓인 실내화에 발을 집어넣었다.
“이제 목욕해.”
“네, 록시.”
오늘 하루의 시작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 화석처럼 굳어 버린 일과는 내일, 흡혈귀로 태어난 후부터 달라질까? 카밀은 그새 잠기운이 달아난 머릿속으로 티끌 같은 질문을 모으며 욕실 문을 밀었다. 문틈 사이, 침대맡에 앉아 자신 쪽을 응시하는 붉은 눈과 시선이 닿았다. 탁, 문이 닫혔다.
죽지 않고 다른 존재로 환생하면 어떤 기분일까. 카밀은 한 꺼풀 한 꺼풀 차례로 옷을 벗으며 당장 내일 겪게 될 감상을 가늠해 보았다.
어색할까? 상쾌할까? 아무렇지도 않을까?
나신으로 샤워기 앞에 섰다. 샤워기 헤드가 제 정수리보다 낮게 걸려 있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 록시아스가 샤워를 한 것이다. 카밀은 샤워기 헤드 높이를 올려 고정했다. 물을 틀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냉수에 가슴팍이 튀어 올랐다. 물줄기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살갗이 수축되었다. 한 발자국 앞으로 옮긴 카밀은 뒤돌아 정수리를 적셨다.
오전 6시 58분. 록시아스와 같은 향기를 두른 카밀은 욕실 문을 열었다. 내내 찬물로 씻었는데도 욕실 안은 훈기가 만연했다. 마른 공기가 들이닥치자 숨이 탁 트이는 듯했다. 이윽고 열린 문으로 록시아스가 들어오자, 가슴속이 도로 꽉 막혔다. 얼음물에 별안간 담긴 심장도 지금보다 요동치지 못할 것 같았다. 록시아스를 앞에 두면 도저히 얌전하지 못한 가슴은, 흡혈귀가 되어서도 똑같을까?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은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등을 보였다. 록시아스가 머리를 말려 줄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눈을 감고 머리칼과 목덜미, 뺨 등을 스치는 손끝에 몰두했다. 시끄러운 헤어드라이어 소음이 점점 멀어졌다. 록시아스와 같은 흡혈귀가 되기란 기껍지만, 지금은 그저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찰나의 소원은 헤어드라이어 소음이 끊기고, 차가운 손가락이 멀어지며 스러졌다.
“머리 말려 주는 거 오늘로 마지막이야.”
록시아스에게 선고받는 끝은 무엇이든 달갑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카밀은 등 뒤에 우뚝 선 록시아스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친 록시아스가 이어 말했다.
“흡혈귀는 감기에 안 걸리니까, 내일부터는 안 말려도 돼.”
“아….”
과거, 로스톡에 이사 온 지 며칠 안 됐을 적에 감기를 호되게 앓았다. 그에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 록시아스가 ‘머리를 제대로 안 말려서 감기에 걸린 거야’라고 꾸중한 뒤부터 매일 아침 목욕 후에 젖은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감기 따위에 걸릴 위험이 사라진다면 머리를 말려 줄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다.
불변적인 일과의 첫 번째 변화. 록시아스가 더는 머리카락을 말려 주지 않는다. 눈자위가 뜨거워질 만큼 아쉽다.
카밀은 입 안으로 혀를 한 번 굴린 뒤에 대꾸했다.
“그러네요.”
마지막이니 뻔한 떼를 써도 용서받지 않을까. 카밀은 제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잠시 쓸었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록시, 근데 여기가 덜 마른 것 같아요.”
“어디?”
록시아스가 허리를 기울이며 물었다. 냉기 같은 입김이 귓바퀴에 닿았다. 카밀은 목덜미부터 어깨로 퍼져 나가는 유쾌한 소름을 감내하며, 뒷머리를 지분거렸다.
“여기요.”
“응.”
금발은 가을볕에 노출된 갈대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그러나 록시아스는 다시 헤어드라이어를 집어 들었다. 우습고도 깜찍한 카밀의 어리광, 마지막이니 눈감아 주었다.
***
일상복으로 환복한 카밀은 록시아스와 함께 부엌으로 내려갔다.
인간으로서 마지막 아침 식사. 메뉴는 샐러드와 구운 베이컨 그리고 스크램블드에그였다. 마실 것은 물 한 컵으로 충분했다.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카밀은 그저 생명 유지를 위해 섭취하듯 무심하게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씹고, 넘기길 반복하며, 매일 마주하는 록시아스를 귀한 보석을 구경하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록시아스는 본능적으로 먹길 원하는 ‘먹잇감’을 두고 하는 인내도 오늘로써 끝이다, 라고 되뇌며 카밀을 관조했다. 참 먹음직하게 생겼다, 고 생각하며 군침을 삼켰다. 저 낯은 흡혈귀가 되어서도 송곳니를 제외하면 여전할 터였다. 아니, 여전하다 못해 영원할 것이다….
조금 남은 베이컨 조각을 씹어 넘긴 카밀이 물 한 모금을 들이켠 후 말문을 열었다.
“록시. 저는 인간이었으니까, 흡혈귀가 되고 나서도 인간 음식을 먹고 싶어 할까요?”
늘어진 자세로 앉은 록시아스는 허리를 숙여 팔꿈치로 테이블을 짚은 뒤 턱을 괴며 대꾸했다.
“그런 애들도 있긴 있었지.”
인간이 먹는 음식이란 흡혈귀에게 하등 도움되지도 않으며 포만감을 선사하지도 못하였으나, 인간일 적 느꼈던 맛을 잊지 못하여 혈액 말고도 ‘보통 음식’을 먹는 흡혈귀들이 간혹 있었다.
탁. 포크를 내려놓은 카밀은 냅킨으로 입가를 훔쳤다. 하얀 천 뒤로 숨은 입가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나 이내 냅킨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물었다.
“록시 말고도 다른 흡혈귀가 있어요?”
실지 묻고자 했던 질문은 ‘저 말고 다른 흡혈귀를 만든 적이 있어요?’였지만.
팔을 뻗은 록시아스는 카밀이 내려놓은 냅킨을 손끝으로 지분거리며 싱거운 어조로 읊조렸다.
“있었는데, 다 죽었어.”
즉시 카밀은 되물었다.
“전부요?”
“응. 다.”
“왜요?”
“내가 죽였어.”
죽을 만했으니까, 록시가 죽였을 것이다. 카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일어서 의자를 제자리로 밀어 넣은 카밀은 빈 접시를 챙겨 식기 세척기에 집어넣었다.
“양치하고 와.”
“네, 록시.”
때맞춰 명령이 날아왔고, 카밀은 대꾸하고는 1층 욕실로 향했다. 록시아스는 그를 뒤따랐다. 하나 발소리는 카밀의 것뿐이었다.
양치에 주어진 시간은 단 10분이었으나, 세면대 앞에 서자마자 칫솔에 치약을 올리지 않은 카밀은 3분 정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입꼬리에 검지를 걸고는 당겼다. 치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송곳니라 부르기에는 뭉툭한 치아. 곧 록시아스의 것처럼 뾰족하게 자라날 테다.
흡혈귀의 치아를 가지게 된 자신을 상상한 카밀은 입꼬리를 놓은 뒤, 흡족한 얼굴로 양치를 시작했다. 줄곧 지켜져 왔던 양치 시간은 그날 최초로 10분을 넘겼다. 심지어는 늦은 주제에 입가에 치약 거품을 조금 묻힌 채로 욕실을 나섰다. 일부러.
카밀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자신을 기다리던 록시아스와 마주 서자마자 물었다.
“록시. 저도 록시처럼 송곳니가 자랄까요?”
벽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팔짱을 풀어낸 록시아스는 시선을 카밀의 입가로 하향시키며 입을 열었다.
“응. 근데 너 치약 묻었어.”
그에 창피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은 카밀은 손등으로 턱을 성의 없이 닦았다.
“이제 됐어요?”
“아니. 아직도 묻었어.”
딱 한 번. 카밀은 천치처럼 이미 깨끗한 뺨이나 쓸었다. 그리고 눈썹을 들어 올리며 록시아스를 향해 얼굴을 기울였다.
“아직도요?”
“어,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록시가 닦아 주면 안 될까요?”
그를 빤히 바라보던 록시아스가 헛숨을 뱉으며 읊조렸다.
“까불어.”
그리고 엄지로 카밀의 입가를 눌러 닦았다. 카밀의 입꼬리는 록시아스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고도 한참 후까지 치올라가 있었다.
오늘, 은근히 요구하는 ‘생일 선물’에 록시아스는 일일이 응해 주고 있었다. 최고였다.
***
짙은 녹색 카펫을 가로질렀다. 앞선 구둣발이 멈춰 서자, 카밀도 걸음을 세웠다.
천장까지 뻗어 있는 책장을 가장 윗부분부터 서서히 훑어내린 록시아스는 가슴께 높이 칸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카밀은 그 바로 옆에 꽂힌 책을 골랐다. 제목이 <성공의 법칙>이라는 것은 소파에 앉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록시아스가 책을 반 정도 읽어 내릴 동안 카밀은 겨우 책장을 두 장 넘겼다. 푸른 눈동자는 줄곧 지루한 활자가 아닌, 책에 몰두한 록시아스의 이목구비에 머물러 있었다.
총 648페이지 중, 451번째 장을 넘긴 록시아스는 독서를 중지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밀과 시선이 마주쳤다. 성가시고 집요한 눈빛은 마주하기 전부터 느끼고 있던 바였다.
“뭘 봐?”
카밀은 내리 외면하고 있었던 책으로 일순 눈길을 내렸다가, 도로 록시아스를 향해 끌어 놓으며 읊조렸다. 다소 상기된 어조였다.
“떨려서… 책에 집중이 안 돼요.”
“잠이라도 자.”
꼰 다리를 푼 록시아스는 읽던 페이지 모서리를 접으며 나긋한 투로 일렀다.
“밤잠이든 낮잠이든 내일부터는 자고 싶어도 못 자.”
“흡혈귀는.”
카밀은 허벅지에 얹은 책을 아예 덮으며 말을 이었다.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아요?”
거의 같은 때 책장을 닫은 록시아스가 답했다.
“안 피곤해.”
“…진짜 좋다.”
고개를 푹 숙이며 혼잣말한 카밀은 이어 웃음이 만개한 얼굴을 록시아스에게 보이며 말했다.
“원래 잘 시간에도 록시를 볼 수 있겠네요. 종일. 그리고 록시랑 같이 사냥….”
말꼬리가 늘어지며 웃음은 자취를 감췄다.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는 록시아스를 눈앞에서 잠자코 두고 볼 수 있을까. 자신 없었다. 또한 록시아스만이 닿아 본 입술로 다른 살갗을 머금어야 한다니 영 찝찝하고, 더러웠다. 그렇다. 더럽다. 그렇듯 불결하며 불쾌한 변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록시아스가 흡혈귀인 자신의 피를 마실 수 있는가 시험할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자신 역시 록시아스의 피를….
“…사냥도 하고요.”
끈질기게 록시아스만을 파고들던 벽안이 움직여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겨우 정오. 흡혈귀가 되기까지 열두 시간이 남았다. 열두 시간이나. 카밀은 시곗바늘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약 올리는 양 오늘따라 느리게 돌아가는 것만 같은 초침, 분침, 시침을 억지로 잡아 돌려 버리는 상상을 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자정 열두 시를 가리키도록.
고집스러운 상상은 이윽고 한만한 저음에 의해 깨졌다.
“어. 실컷 봐. 사냥도 질리도록 하든가.”
자리를 벗어나는 기척에 카밀은 다시금 록시아스에게 눈길을 던졌다. 원래라면 록시아스는 오후 세 시까지 독서할 터였다.
완독하지 못한 책은 구태여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았다. 테이블에 책을 아무렇게나 둔 록시아스는 창가를 향해 걸었다. 서재는 삼 면이 책장으로 채워져 있었고, 남은 한 면 전체는 창이 뚫려 있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는 듯하던 록시아스는 홱 몸을 돌려 카밀을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다가가던 카밀이 발길을 멈췄다. 정오의 빛을 등진 록시아스에게 사고를 빼앗겼다.
“카밀아.”
몸 선을 따라 금빛을 입은 록시아스가 불렀고, 조금 뒤늦게 카밀이 대답했다.
“…네, 록시.”
“이리로 와.”
카밀은 조종당하는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록시아스에게로 나아갔다. 창으로 들이치는 일광이 너무 강해 눈이 부셨다.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그 짧은 사이 검은 구둣발 앞에 다다랐다. 그러한 순간이었다.
“그러면 안 돼.”
탁. 이마께로 들어 올린 팔목을 록시아스에게 붙잡혔다. 끌어 내려진다. 빛살이 다시금 안구를 찔렀다. 눈살을 찌푸렸다.
록시아스가 살갑게 조언하는 듯도, 매섭게 채근하는 듯도 한 말투로 명령했다.
“눈 제대로 뜨고 봐.”
카밀은 눈부심을 견디며 눈꺼풀에 힘을 줬다. 하나 좁아진 미간은 영 풀어질 줄 몰랐다. 심지어 차디찬 손가락으로 인해 앞머리가 쓸려 올라갔다. 직사광선에 눈자위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이어서는 등까지 떠밀렸다. 햇빛과 더더욱 근접했다. 낯이 뜨거웠다. 록시아스가 어깨를 둘러 잡는다. 자신과 나란히 서서, 자신의 귓가로 턱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네 삶의 마지막 낮이니까.”
내 삶의 마지막 낮.
‘머리 말려 주는 거 오늘로 마지막이야.’
록시아스에게 선고받는 끝은 무엇이든 달갑지 않다고 했던가. 예외를 간과했다. 때때로 어떠한 종국은 새로운 궤도를 만드는 희소식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을 한참 겨누어 보던 카밀은 어린 시절 어느 날의 새벽을 떠올렸다.
짧다면 짧은 생애를 나누는 막은 언제나 그리 밝지 못했다.
첫 번째 막. 자신이 탄생한 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여도, 세상에 나온 지 오래되지 않아 부모로부터 버려졌으니 축복이며 광영이 거세된 출생이었을 것이 자명했다. 아마도 제 평생 중 가장 깜깜한 단면이리라.
두 번째 막은 벌써 아득해진 과거, 암흑으로 도색된 힐렌브란트 고아원에 그림자처럼 스며 들어온 흡혈귀와의 첫 만남이었다. 록시아스는 별보다 찬란하고 달보다 환한 광원이었으나 사방은 숫제 어스레했다.
그리고 곧 열릴 세 번째 막은….
카밀은 환한 창에 눈길을 붙인 채, 제 어깨를 잡은 차가운 손을 조심스레 감쌌다. 여태 귓가로는 시린 숨이 규칙적으로 닿아 오고 있었다. 그에 맞춰 일어나는 저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끊임없이 왕복했다.
꿀꺽. 울대를 움직인 카밀이 입을 뗐다.
“록시.”
“응.”
허락도 없이 손을 잡았다며 꾸중하지도 않은 록시아스는 짐짓 상냥하게 대꾸했다. 덕분에 카밀은 용기를 얻었다. 눈이 시릴 뿐인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낮도 밤도 가질 수 있는 록시아스는 카밀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밀은 예정대로 마주한 얼굴에 속수무책으로 이성을 수탈당했다. 어떤 말을 하려고 했더라, 잠시 되뇌어야만 했다… 그래. 세 번째 막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체온을 전해도 저온을 유지하는 손등을 감싸고만 있었던 카밀은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록시아스의 손 마디마디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고백했다.
“저는 계속, 해가 질 때만 기다렸어요.”
“…….”
자신을 눈동자에 담을 뿐, 침묵만 되돌려 주는 록시아스에게 연거푸 고백했다.
“달이 뜰 때만… 록시와 보내게 될 새벽만을 기다렸어요.”
삶의 첫 번째 막은 새카만 야간이었으며, 두 번째 막은 달빛이 드리우던 첫새벽이었다. 그리고 이어질 세 번째 막은 밝아 오는 여명이었다. 하나 일출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제 생애를 밝힐 조명이란 오직 달빛뿐. 카밀 자신의 시야를 사로잡고 발길을 이끄는 것은 영영, 오직 록시아스뿐이리라.
“지금도 기다리고 있어요.”
카밀은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실었다.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 있었지만 록시아스의 표정에서 그의 심중을 읽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더욱 손가락을 강하게 얽어맸다.
한참 후에야 록시아스는 입을 열었다.
“응, 알아.”
다시금 입술을 붙인 록시아스는 손끝을 세워 카밀의 손등을 지그시 눌렀다. 카밀이 악력을 풀며 손가락을 일순 떨었다. 이어 록시아스는 카밀에게서 떼어낸 시선을 창가로 고정했다.
“나도 기다렸어.”
흡혈귀가 기다린 밤이란 영면을 뜻했다. 카밀이 고대한 밤과는 의미가 달랐다. 록시아스가 그린 새벽에는 달이며 별 따위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그저 새카맣기만 하겠지.
“…알아요, 록시.”
어금니를 물었다가 뒤늦게 대꾸한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머물러 있었던 시선을 도로 올려 창가로 돌렸다.
햇살은 숫제 두 사람을 열렬하게 찌르고 있었다. 잊힐 것을 미리 알고서 끝내 발악하듯이.
***
오후 5시. 카밀은 록시아스와 함께 집 안의 모든 창문을 암막으로 가렸다.
***
오후 9시 12분부터 한 시간가량. 두 사람은 각각 1층 욕실과 2층 욕실에서 목욕을 했다.
오후 10시 8분. 목욕을 마친 카밀은 물기 흐르는 나신을 수건으로 닦고, 젖은 머리칼은 대충 털어서 말렸다. 그를 비춘 거울로 물방울이 튀었다.
카밀은 손바닥으로 거울을 쓸어 제 모습을 명확히 마주했다. 제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곧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가슴팍이 뜨끈해지기야 했지만 겉으로는 티 나지 않았다. 다행일까? 조금 더 긴장하고 설레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까? 아니, 인제 와서 그런 연기는 무소용했다. 카밀은 초연한 기색을 띤 채로 옷을 입은 뒤 욕실을 벗어났다.
오후 10시 21분. 촉촉한 발바닥이 타일과 맞붙었다. 막 수중에서 나온 록시아스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체인 채로 욕조 마개를 잡아 뺐다. 다 식은 물이 꾀르륵 소릴 내며 하수구로 빠져나갔다. 록시아스는 곱게 접힌 수건을 꺼내 온몸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훔치다가, 천장을 쳐다보았다. 2층 욕실에서 더는 물소리가 나지 않았다. 카밀은 진즉 목욕을 마친 것이다. 하지만 카밀의 맥박 소리는 종일 끊이지 않고 귓구멍을 울려 댔다.
샤워 가운만 덜렁 걸친 록시아스는 목이 말랐다. 턱 끝부터 목젖 아래까지를 쓸어내리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홍채의 붉은색이 옅어진 것은 착각일까? 모른다. 식사를 오랫동안 하지 않아 속이 마르는 듯한 느낌만 확실했다. 이러한 고난은 오늘로써 종료된다. 카밀은 동족이 되므로….
2층, 카밀이 기다리고 있을 층계를 오르는 동안 록시아스는 타들어 가는 목을 몇 번이고 쓸어 만졌다. 이윽고 도달한 2층 복도 끝에 걸린 시계로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10시 56분이었다.
수 세기를 살아온 자신 아닌가. 두 시간 정도야 눈을 깜빡이며 버틸 만한 시간이었다.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 평소보다 발을 느리게 옮겼으나 어느새 침실에 다다라 있었다. 록시아스는 제대로 말리지 않아 물기가 뚝뚝 흐르는 앞머리를 넘기며 잠시 마른침을 삼켰고, 재차 맨발을 옮겼다.
침실 안으로 한 발자국을 디디자마자,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록시.”
조명 하나 켜지지 않은 침실은 커튼까지 모조리 내려 빛 한 점 없었다. 하나 흡혈귀의 어둠을 뚫는 시력은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은 카밀을 또렷이 읽었다. 밤바다처럼 어둡고 푸른 카밀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혹은 해일에 휘어 잡힌 파도처럼 일렁이던가.
“제 옆으로 와 주면 안 돼요?”
카밀이 부탁했다.
늘 피지배자, 그리고 피식자인 카밀은 언제나 짐짓 싹싹하며 처연한 말투를 사용했으나 록시아스는 그가 명령에 익숙한 천성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왜냐, 매번 카밀은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때만을 골라 간청했기 때문이다. 타인을 강압할 역량이 풍부한 아이는 을의 처지로 자라며 그 방식대로 명령하는 법을 저절로 깨우친 것이다.
그 증거 혹은 결과로 록시아스 자신은 카밀의 곁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후 11시 6분이었다.
까맣고 하얗고, 두 눈동자와 입술은 새빨간 록시아스가 침대맡으로 오자 카밀은 이불 속으로 몸을 뉘었다.
“록시.”
록시아스를 향해 모로 돌아누운 카밀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겹겹이 쌓인 고민을 겨우 꺼내 놓는 듯한 어조였다.
“손… 잡아도 돼요?”
아직 대답하기도 전이었으나 자신에게 뻗어 오는 손을 내려다본 록시아스가 말했다.
“그렇게 해.”
이윽고 자신의 팔목부터 잡더니 손등을 감싼 카밀의 손은 뜨거웠다. 머지않아 싸늘하게 식을 체온이었다. 록시아스는 손을 뒤집어 카밀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붙였다. 그러자 카밀이 손가락을 살며시 구부렸다. 손끝이 스친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45분 남았어요.”
흑발 뒤 벽시계에 일순 시선을 던졌던 카밀이 읊조렸다.
“45년 같아요. 일분일초가 너무 느리게 지나가요.”
동의하는 바였다. 록시아스는 고개를 까딱였다. 카밀은 시계 초침 소리에 온 청력을 집중한 듯했다. 그리고 자신은 카밀의 박동 소리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이리 가까운 데다가 겨우 손바닥이라고는 해도 살갗까지 맞대고 있으니 당장 그 피를 마셔 버리고 싶은 충동이 휘몰아쳤다. 흡혈귀로 만들기 전에 딱 한 모금만 마실까, 아니야, 하며 자신을 부추겼다가 스스로를 말려 세웠다.
“참으면, 싫어도 때가 올 거야.”
록시아스는 카밀을 다독이는 체하며 자신을 타일렀다. 조금만 더 인내하면, 아무리 카밀의 피를 갈구한다고 하여도 결코 취할 수 없을 때가 온다. 본능에 휘말리지 않으며 카밀을 완벽히 다스리게 될 때를 맞이한다.
한참 록시아스의 손바닥을 간질이던 카밀은 이어 네 손가락을 휘감아 잡았다.
“록시.”
“응, 카밀아.”
록시아스는 엄지에 닿는 카밀의 손등 뼈를 지그시 눌렀다가, 다정한 양 어루만졌다.
“제가 록시 피를 마시면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
“저는 록시처럼 송곳니가 뾰족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마셔야 해요?”
손등 뼈를 지분거리던 엄지가 우뚝 멈췄다. 록시아스는 우울하게 가라앉은 것 같기도, 차분한 듯도 한 음성을 내어 말했다.
“내가 내 살을 찢어서, 네게 내 피를 먹일 거야.”
“하지만….”
“너는 그냥 받아 마시기만 하면 돼.”
눈꼬리를 내린 카밀이 붙잡은 손을 은근하게 끌어당겼다.
“록시가 아프잖아요.”
“안 아파.”
“제가 록시 피를 얼마큼 마셔야 해요?”
이끌려 간 창백한 손은 이제 카밀의 가슴팍과 가까웠다. 쿵, 쿵, 쿵. 전해져 오는 박동으로 인해 손끝이 떨렸다. 록시아스는 그에 손가락을 말아 쥐려고 했으나 카밀에게 얽매인 통에 할 수 없었다.
“…글쎄. 사람마다 달라. 근데 넌 덩치가 크니까, 반 정도는 마셔야 할걸.”
“반이나요?”
불사의 몸이라고는 하지만, 피가 반이나 동난다면 당연히 괴롭지 않을까.
놀란 카밀은 무의식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쥔 손을 그 과정에서 놓쳤다. 록시아스는 이때다 싶어 손을 재빨리 거두었다가, 도로 뻗어 카밀의 어깨를 눌러 눕게 했다.
“아가야, 겁나?”
엄지와 검지를 쭉 펴도 폭이 남는 널따란 어깨를 가졌으나 여태 아가라고 불리는 카밀은 얼굴을 저었다.
“아니요. 겁은 안 나요. 록시가 아플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무용한 걱정에 혀를 차려고 했다. 그러나 록시아스는 혀를 앞니에 붙였다가 이내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기묘한 기분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팍을 맴돌았다.
겁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것’이 아플까 봐 걱정되어 망설인다. 어떻게 그러지?
이해 불가한 감정적 논리였다.
“록시?”
“…응.”
흡혈귀에게 시선을 거두는 유일한 찰나는 시간을 확인할 때뿐인 카밀은 지금 막 오후 11시 40분이 된 것을 보았다.
“20분 남았어요.”
“딱 20분만 자.”
“…그럴까요?”
“그래.”
“네, 록시.”
고작 20분은 흥분된 심정을 끌어안고 잠들기에 너무나 짧았다. 그래도 카밀은 눈꺼풀을 얌전히 내렸다. 이목구비를 무방비하게 이완시켰다. 하나 귀청은 느슨히 하지 못했다. 딱딱하게 흘러가는 초침 소리를 낱낱이 잡아냈다. 톡, 톡, 톡, 톡, 톡….
“보통은….”
느른한 음성이 초침 소리에 매달리거나 그 사이사이를 핥고 빠져나갔다.
그리고 톡, 톡, 톡, 톡, 톡… 10분 전.
“팔목을 물어뜯어.”
톡, 톡, 톡, 톡, 톡… 5분 전.
“근데 너는.”
“…….”
카밀은 여전히 잠든 체했다.
톡, 톡, 톡, 톡, 톡… 2분 전.
“내 피를.”
톡, 톡, 톡, 톡, 톡… 1분 전.
“어디로 마시고 싶어?”
톡, 톡, 톡… 30초 전.
눈을 뜬 카밀이 말했다.
“입술이요.”
톡, 톡, 톡… 15초 전. 록시아스는 제 아랫입술을 물었다.
톡, 톡… 10초 전. 찢겨 피가 흐르는 입술이 열렸다.
“선물이야, 소중한 카밀아.”
톡, 톡. 정각.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록시.”
카밀이 두 팔을 뻗었다. 록시아스가 그를 향해 얼굴을 기울였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