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바이트 1권
01.
록시아스 폰 슈바르첸베어그는 XXXX년 전에 탄생했다.
그는 인간과는 다르게 출생했다. 아버지의 씨를 빌지 않았고, 어머니의 배 속에서 잉태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존재였다.
록시아스의 첫 기억은 검은 숲에서 시작됐다.
검은 숲은 이름 그대로 칠흑 일색이었다. 흑색 토양에서 자라난 식물들은 녹음이 짙다 못해 새카맸다. 서식하는 짐승들 또한 체모가 거뭇거뭇했다. 록시아스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하얬다. 그의 신체 중 흑색 머리칼만이 숲의 암흑과 어우러졌다.
검은 숲에서 최초로 눈을 뜬 록시아스의 육체는 이미 13세 정도로 성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지理智는 갓 태어난 신생아 수준이었다. 정신과 육체는 본능만을 따랐다.
굶주리면 사냥을 했다.
생존을 위한 행위는 교육 없이도 자연스레 저질러졌다. 그리고 아주 쉬웠다. 록시아스는 어떠한 짐승보다 빨랐고, 강했고, 잔인했다.
록시아스의 붉은 눈은 짐승의 체온을 어둠 속에서도 단번에 찾아냈다. 청각은 쿵, 쿵, 뛰는 생명의 박동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그의 육체에서 온전히 핏기가 도는 시뻘건 입술이 벌어질 때 드러나는 송곳니는 사냥감의 질긴 동맥을 간단히 뚫었고, 끊었다. 희생양의 목덜미에서 터지는 핏줄기는 행복에 겨운 록시아스의 웃음을 검붉게 적셨다.
사냥에 성공했을 때는 그렇게 만족스러웠지만 동물의 피로는 허기가 완전히 메워지지 않았으므로 록시아스는 끝없이 공복에 시달렸다.
채워지지 않는 기아에 허덕이던 록시아스는 검은 숲의 불가해를 파헤치던 용감한 탐험대에게 발견되었다.
탐험대는 실종되었다.
록시아스에게 사냥당한 것이다.
자신과 같이 이족 보행을 하는 생명의 피를 마신 그날. 록시아스는 난생처음 포만감을 경험했다.
한 달 사이 육체가 15세가량으로 급성장한 록시아스는 탐험대의 발자취를 되밟아 가며 숲을 벗어났다. 흑색 땅에서 멀어질수록 세상이 다채롭게 변했다.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 또한 풍요롭게 채워졌다. 공복을 확실하게 해결해 줄 훌륭할 정도로 맛있는 피 냄새가 공기 중을 잔뜩 떠다녔다. 기대감으로 달아오른 시뻘건 입술이 말라 갔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숲에서 나온 이후 록시아스는 언제나 포만했다.
검은 숲 바깥은 먹이가 충만했다. 그러나 낙원은 아니었다. 사냥감들은 감히 록시아스에게 덤벼들어 그를 귀찮게 했다. 어차피 그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거면서.
총명한 록시아스는 귀찮은 일을 덜기 위해서 사냥감들에게 호감 사는 법을 배웠다. 그들의 행동 양식과 생활 방식을 흉내 내기만 하면 됐다. 물론 낮에만. 밤에는 먹이들이 ‘잠’이라는 걸 하느라 시체처럼 얌전했으므로 편하게 먹어 치웠다.
줄줄이 생겨나는 시체에 ‘성직자’라는 자들이 마을을 돌며 ‘퇴마 의식’을 진행했다. 록시아스는 사냥감 무리에 섞인 채 그 광경을 무구한 미소로 비웃으며 구경했다.
‘내가 먹었는데.’
먹잇감들은 멍청했다. 그래서 록시아스에게 친절했고, 록시아스를 의심하지 않았다.
최초의 흡혈귀는 처음부터 ‘록시아스 폰 슈바르첸베어그’라고 불리지 않았다. 록시아스가 약 스물두 번째 마을에 방문했을 적, ‘수도사’라는 자가 그 이름을 붙여 줬다.
수도사는 최초로 록시아스의 정체를 알게 된 인간이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그는 수도원에 숨어들어 다른 성직자의 목덜미에 치아를 박아 넣던 록시아스를 목격했다.
당시 록시아스는 막 식사를 마쳤기에 배 속이 든든했으므로 수도사를 사냥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무어라 지껄이는 수도사를 한참이나 구경했다. 그리고 물었다.
“‘신’이 누구야?”
수많은 사냥감이 ‘신’을 부르짖기에 항상 궁금했다. 그러나 피가 빨린 먹잇감들은 말을 할 수 없기에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록시아스는 사냥감들의 행동 양식과 생활 방식을 흉내 내고 있었고, 사냥감이라면 젊든 늙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누구든지 ‘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사는 두려움에 몸서리치면서도 대답해 주었다.
“신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다… 너와 같은 존재 또한….”
록시아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재차 물었다.
“‘신’이 나를 만들었어?”
“그렇, 그렇다.”
“와아….”
감탄사를 흘린 록시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직자의 피가 덕지덕지 묻은 입술로 활짝 웃었다. 발랄하게 팔짝팔짝 뛰어 수도사의 앞에 털썩 꿇어앉았다.
“난 내가 누구인지 항상 궁금했거든. 그럼 ‘신’을 찾아가서 물어보면 되겠네. ‘신’은 어디에 살아?”
수도사는 신은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존재이며 만나기 위해서는 ‘천국’이라는 곳에 가야 하는데, ‘천국’은 죽어서, 그것도 선한 일을 아주아주 많이 하고 죽어야 갈 수 있는 세상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록시아스처럼 사람을 죽였다면 ‘천국’에는 절대 갈 수 없다고도 단언했다. 그에 실망한 록시아스는 변명했다.
“난 ‘사람을 죽인 게’ 아니야. ‘먹은 거’야.”
이 아이의 첫 번째 죄란 무지함이다.
불현듯 결백의 냄새를 맡은 수도사는 성직자의 피를 빨아 마신 살인자를 거두기로 결심했다. 록시아스가 인간 나이로 17세쯤 되어 보였을 시기였다.
수도사는 록시아스에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금기, 글 읽는 법, 인간 사회가 작동하는 순리 등을 알려 주었다. 록시아스는 수도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므로 그를 먹지 않기로 결정했다. 재미없어졌을 때는 또 모르지만.
록시아스는 글을 배우고 나서 수도원에 보관된 모든 서적을 독파했다. 한 가지를 이해한 다음에는 두 가지가, 그다음부터는 네 가지가, 여덟 가지가…. 수만, 수억 가지가 록시아스의 지식이 되었다. 록시아스는 더 이상 본능만을 좇거나 야만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사냥은 지속했다. 허기와 갈증은 오로지 먹이들의 신선한 피로만 대체될 수 있었다.
신체가 18세가량까지 성장했을 때 록시아스의 지성은 뭇 저명한 학자들 수준에 도달했다. 더는 수도사의 가르침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록시아스는 수도사를 사냥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갈급증을 느낀 어느 새벽이었다. 록시아스는 곧장 수도사의 방문을 두드렸다. 자다 깬 수도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록시아스는 문이 열리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었다. 송곳니로 주름진 목덜미를 찔렀다. 자신을 말리는 야윈 손을 쳐 냈다.
꿀꺽, 꿀꺽….
“록시, 록시! 그만두렴!”
꿀, 꺽.
수도사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록시아스는 자신이 수도사를 먹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 왜인지는 몰랐다.
그저, 그저, 그저, 그저, 그저… 그러니까.
“미안.”
송곳니를 거둔 록시아스는 고꾸라지는 수도사를 받아 들고 바닥에 눕혔다. 자신도 무릎을 접어 앉았다. 수도사가 목과 입에서 핏물을 질질 흘렸다. 경련하는 눈꺼풀로 자신을 쳐다봤다.
“실수였어. 피를 돌려줄게.”
난생처음 당황이란 것을 했다. 무언가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록시아스는 검은 숲에서 갓 눈을 떴던 때와 같이 본능만을 사용해 움직였다. 사냥감을 대할 때처럼 송곳니를 세우고, 자신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인간의 것과는 달리 냉랭한 혈액이 창백한 팔목에서 새어 나왔다.
“죽지 말고, 마셔.”
수도사의 입가로 팔목을 기울였다. 핏물이 푸르게 식은 입술로 뚝뚝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주르륵….
기적처럼 상체를 벌떡 일으킨 수도사가 록시아스의 팔목을 휘어잡았다. 번쩍 뜨인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으으….”
록시아스는 수도사에게 흡혈당했다. 사냥감의 입장이 되어 본 감상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수도사는 인중 주름이 꿈틀거리는 채로 록시아스의 혈액을 마셨다. 꿀꺽. 인중 주름이 펴진다. 꿀꺽. 얼굴 피부가 팽팽해졌다. 꿀꺽. 혈색이 돈다. 꿀꺽. 온 육신에 근육이 붙는다. 꿀꺽.
“그만 먹어.”
젊음을 되찾은 수도사의 단단한 어깨를 밀친 록시아스는 손목을 거뒀다. 자진하여 송곳니로 찢었던 상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죽지만 않으면 됐는데. 전보다 훨씬 나아졌네.”
록시아스는 몰라볼 정도로 모습이 달라진 수도사를 아래서부터 위로 치훑었다. 수도사도 주름 없는 말끔한 눈꼬리를 치키고는 본인의 발치부터 손가락 하나하나 빠짐없이 모든 곳을 훑어봤다.
“이… 이게, 이, 무슨.”
“수도사.”
한 발자국. 록시아스는 당혹한 수도사에게로 다가갔다. 이윽고 그를 올려다본 수도사의 눈동자는.
“눈이 빨개졌어, 나랑 똑같이.”
그리하여 록시아스는 두 번째 흡혈귀이자 첫 동료를 탄생시켰다.
다음 날 아침, 태양 빛을 내리쬔 수도사는 눈 깜짝할 새 재가 되어 흩날렸다.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허무한 죽음이었다. 허기에 나약한 록시아스가 배고파질 것을 예정하면서도 피를 나누어 목숨을 살려 준 보람이 없었다.
대체 왜?
수도사의 재탄생과 결말을 곁에서 지켜본 록시아스는 며칠간 피를 조금만 마실 정도로 슬퍼했으며 지난 일을 곱씹은 끝에 실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마을로 건너간 록시아스는 세 번째 흡혈귀를 창조해 냈다. 방법은 수도사에게 했던 것과 동일했다. 자신의 피를 인간들에게 먹였다. 그렇게 태어난 세 번째 흡혈귀 역시 햇빛에 노출되자마자 까만 먼지가 되어 증발했다.
이후 네 번째, 열 번째, 서른여섯 번째 흡혈귀 또한 같은 사인으로 명을 다했다.
록시아스는 한낮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홍채는 노란 볕을 흡수해도 숫제 붉었다. 그을리지 않는 피부는 늘 창백했다. 따스한 기온이 무색하도록 체온은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록시아스는 줄곧 살아 있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 흙이 바싹 마를 만큼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어도.
록시아스는 결론을 내렸다. 본디 먹이였던 자들은 흡혈귀가 되어서도 나약했다. 그러니 겨우 햇살에 부서지고 녹는 것이다. 안타깝다 못해 짜증 나는 존재였다.
서른일곱 번째 흡혈귀이자 서른여섯 번째 동료는 록시아스가 완전한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성장했을 시기에 만들어졌다. 15살 먹은 아이였고, 이름은 율리아. 사막 마을에 사는 고아였다.
사막을 횡단하던 도중, 록시아스는 물조차 쉬이 섭취할 수 없는 척박한 모래 위에서 죽어 가던 율리아에게 피를 나누어 주었다.
앙상했던 육체에 살집이 보기 좋게 오르고, 푸석푸석했던 뺨에 장밋빛 혈색을 되찾은 율리아는 록시아스를 ‘천사’라고 불렀다. 록시아스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도록 내버려 두면서도 냉소했다.
수많은 인간을 만나면서 록시아스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악마, 괴물, 짐승, 신, 천사, 요정…. 사냥감들은 저들 좋을 대로 록시아스를 판단했다. 그러니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록시아스 본인조차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으므로.
무수한 지식을 익혔어도 제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록시아스는 아마 영영 모른 채로 살게 될 거라고 가늠했다. 수도사의 말처럼 선한 일을 아주아주 많이 하여 천국으로 가 신을 만나 묻지 않는 이상.
하지만 살생이 본능이며 불멸한 록시아스에게 그러한 기회는 절대 오지 않을 터다.
율리아 이후로도 흡혈귀 수백 명을 탄생시켰다. 이전처럼 그들이 볕에 타 죽게 될 때까지 방관하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예전에 수도사에게 교육받은 것처럼 갓 흡혈귀가 된 자들을 지도했다. 실험을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을 알려 주었다.
흡혈귀로서 익혀야 할 상식은 이러했다.
첫째. 해가 떴을 때 외출하지 말 것.
록시아스를 제외한 흡혈귀 전부는 햇빛에 속수무책이었다. 무조건 주의해야 했다.
둘째. 흡혈귀는 각기 타고난 능력이 있으므로 이를 개발할 것.
사냥감들은 흡혈귀로 재탄생될 때 특별한 능력을 한둘씩 부여받았다. 어떠한 능력인지 스스로 각성하기 전까지는 창조자인 록시아스조차 모른다.
한편 록시아스는 마음만 먹으면 타 흡혈귀들의 능력을 저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
셋째. 이미 죽은 사냥감의 피는 섭취하지 말 것.
맛이 좋지 않고 건강에 나빴다. 죽지는 않지만 기력이 쇠한다.
넷째. 나, 록시아스에게 덤비지 말 것.
본래 사냥감이었던 것들은 종종 주제를 망각하여 건방지게 굴었다. 그러면 짜증이 났다. 참지 못하고 짜증을 부리면 그들은 너무 쉽게 죽었다. 자신이 창조한 흡혈귀들을 도로 살해하는 일은 영 불쾌했다. 그러니 애초에 아둔한 흡혈귀들이 분수를 알고 자신에게 시비를 걸지 말아 주길 바랐다. 기분이 정말이지, 찝찝해지니까.
간략하게는 이 정도였고, 생활에 더 필요한 지식과 지혜는 각자가 알아서 찾아야 했다. 록시아스는 수도사만큼 친절한 스승은 못 됐다.
그로부터 무료한 XXXX년이 지났다. 록시아스는 여전히 젊은 성인 남성처럼 보였으나 세상은 뒤바뀌었다. 사냥감들이 약간 더 똑똑해졌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진 흡혈귀들은 몇몇을 제하고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았다. 록시아스의 곁에 남길 자처한 자들은 이백 명 정도였다. 그들은 성채를 세워 함께 생활했고, 록시아스를 ‘폐하’라 칭하며 받들었다.
30년 후. 록시아스 폰 슈바르첸베어그 왕이 서거했다. 그리고 록시아스 2세가 즉위했다. 이어서 록시아스 3세, 록시아스 4세가 왕좌에 앉았다. 이름 옆에 붙는 숫자만 늘어났을 뿐이다. 역대 왕 모두가 실은 최초의 흡혈귀인 록시아스 폰 슈바르첸베어그였다.
록시아스 4세의 작고가 온 왕국에 퍼졌을 때. 록시아스는 지겨운 왕 노릇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라가 커지자 귀찮은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신의 충복 흡혈귀 중 하나를 골라 왕위를 물려준 뒤, 록시아스는 성을 떠났다.
그사이 흡혈귀는 더 이상 미지의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록시아스는 간만에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흡혈귀에 대한 갖가지 전설과 낭설, 그리고 진실을 잊을 새 없이 접했다. 독립한 흡혈귀들이 얼마나 날뛰었는지 알 만했다.
타 흡혈귀들과 달리 대낮에도 활동이 가능한 록시아스는 수 세기를 방랑하며 별의별 경험을 다 했다.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전쟁광이 지배하는 나라의 기사. 종교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의 성직자(퇴마 의식을 할 때마다 폭소를 참느라 고달팠다). 교수. 양치기(일하는 중 갈증이 나면 양 피를 마시기도 했다). 연극배우. 푸줏간 점원(가죽 벗겨진 고깃덩어리가 역겨워 오래지 않아 관뒀다). 농사꾼. 거지. 작곡가. 소설가. 깡패. 의사(피 냄새를 맡으며 인내해야 했으므로 가장 고된 직업이었다). 과학자. 노름꾼. 조향사. 마부(충동적으로 귀족 피를 마셔서 그 나라를 아예 벗어나야 했다). 통역사. 뱃사공 등등….
언젠가는 군인으로 지냈다. 세계적인 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인간들은 과거보다 훨씬 영리해졌다. 불꽃이 터지는 무기를 개발하여 서로를 쏘아 죽였다. 록시아스는 포탄과 총알 쏘기를 즐겼는데, 그 짓마저 지겨워지면 직접 육체를 이용해 적군을 살상했다. 먹어 치웠다. 피폐한 전장이 록시아스에게는 호화로운 식탁이었다.
먹고, 먹지 않으면 죽이고, 또 먹고, 멈추지 않고 죽이고.
인간들은 절망에 허우적거렸고, 록시아스는 단조로운 일상으로 인해 권태에 빠졌다. 군인 따위도 곧 그만둬야겠다, 생각했던 참이었다. 마침 종전되었다.
혼란한 전쟁판에서도 찢어져라 하품하던 록시아스는 세상을 찾아온 평화가 달갑지 않았다.
뭘 하지?
뭘 하든 종래에는 하나같이 시시해졌다.
록시아스는 도서관을 찾았다. 책을 읽다 보면 다음 계획이 떠올랐다. 한데 이번에는 마음에 차는 계획이 통 구상되지 않았다.
모조리 지루했다.
권태기와 방황기를 동시에 맞이한 록시아스는 전쟁으로 부서진 나라들을 전전하다가, 불현듯 검은 숲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검은 숲은 사라지고 없었다. 록시아스가 만든 흡혈귀들처럼 결국 빛에 전소되었을까.
고향을 잃은 록시아스는 재차 세상을 방랑했다. 따분해도 부지런히 이 일 저 일을 했다. 먹잇감들에게 공생을 허락하며.
간혹 지나치게 심심하다 싶으면 새로이 흡혈귀를 만들어 말동무로 삼았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였다.
록시아스가 구태여 손을 쓰지 않더라도, 수치스럽게도 흡혈귀들은 사냥감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야 그럴 만했다. 진화한 인간들은 아주 약아빠졌다. 멍청한 흡혈귀들이 섣불리 덤비면 안 될 만큼 말이다.
넌더리가 나는 시간은 어찌 되었든 멈추지 않고 흘렀다.
이제 인간들은 말 대신 자동차를 탔다. 서신을 기계로 주고받았다. 만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했다. 몇 개국을 제외하고는 계급 따위도 사라졌다. 아니, 화폐가 계급이 되었다.
검은 숲에서도 바깥세상에서도 먹이사슬 최상위에 앉았던 록시아스는 시대가 바뀌었어도 권력을 가졌다. 누가 돈을 벌기 어렵다고 했나. 록시아스에게는 쉬웠다. 여태껏 모든 일이 그러했듯이.
젊음과 불사. 강인한 육체. 고매한 이지. 경제적 풍요.
누구나 소원하는 바람들을 빠짐없이 소유한 록시아스는, 죽기로 작정했다.
유일하게 겪어 보지 못한 것이 바로 사멸이었으므로.
***
카밀 마리아 힐렌브란트는 XXXX년도쯤 출생하였다. 정확한 출생일과 나이는 미지수였다.
고아원장은 성모 승천 대축일, 고아원 앞에 버려진 아기에게 ‘카밀’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마리아’라는 중간 이름을 첨부했다. 성인 ‘힐렌브란트’는 고아원 명칭이며, 부모란 자들에게 성조차 물려받지 못한 카밀 같은 아이들에게 평생 따라붙는 꼬리표였다.
유년기를 벗어난 카밀은 그를 버린 부모가 우연하게라도 조우한다면 후회할 만큼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드러내며 성장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나타난 그는 실지 마리아로부터 축복이라도 받은 것만 같이 고결한 분위기를 타고났다. 찬란한 성찬대를 연상케 하는 금발로 인해 더없이 영롱하게 빛났다. 천국을 그린 천장화의 하늘을 반사한 듯 푸른 홍채는 깨끗이 닦인 유리알처럼 맑았다. 그의 외모는 사람을 기만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다.
기만, 사기!
예쁜 외모에 마음을 빼앗겨 카밀을 입양하기로 결정했던 자들은, 머지않아 카밀을 파양하며 그런 유의 단어들을 내질렀다.
구제 불능! 악마! 고아 새끼! 이놈 새끼는 고아원이 아니라 감옥에 처넣어야 해!
모욕에 노출된 어린 카밀은 울지도, 화내지도, 변명하지도, 잘못을 빌지도, 듣고 배운 대로 저주를 되돌려 주려고 지껄이지도 않았다. 그저 풍성한 속눈썹을 팔랑, 내리고는 체벌을 기다리는 듯이 얌전히 있었다. 고아원장이나 교관이 카밀의 어깨를 꽈악 움키고는 “카밀, 정말 네가 그런 짓을 했어?”라고 물었을 때에야 카밀은 고개를 간단하게 까딱, 움직여 수긍할 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카밀의 수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토록 얌전하고 어여쁜 카밀이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런 짓’이란 천사 같은 카밀이 저질렀다기에는 퍽 경악할 만한 행패였다.
정원에 불을 지르고, 접시와 화병을 모조리 산산조각 내고, 침대 위에 압정을 빼곡하게 깔아 놓거나, 죽은 새를 오븐에 넣어 두며, 죽은 쥐를 냉장고에 보관했다. 목덜미에 잇자국 모양의 상처가 생긴 애완동물들은 카밀을 보면 하나같이 벌벌 떨고 낑낑거리며 도망쳤다.
카밀의 껍데기가 아무리 천사 같더라도, 사랑해 마지않는 애완동물에게 해를 가한 이상 그는 입양아 이전에 악마였다. 양부모들은 카밀을 사악한 씨앗이라 낙인찍었다.
파양을 결정한 양부모들은 카밀이 정신 감정 따위를 받도록 고아원장을 압박했다. 그리하여 카밀은 어른들 손에 이끌려 정신 상태를 검열당했다.
그 분야 전문가를 대동한 체계적인 검사 결과에 따르면, 카밀은 반사회성 인격 장애를 아슬아슬하게 면한 정상인이었다. 아울러 지능 수준이 평균을 훨씬 웃도는 영재로도 판정받았다.
이후 고아원 어른들은 카밀을 더더욱 감싸고 돌았다.
가엾고 사랑스러운 카밀. 원래는 착한 아이인데 낯선 환경이 두려운 바람에 지나친 어리광을 부렸던 거야. 앞으로 계속 우리와 함께 지내자꾸나. 너만 좋다면 말이야. 어떠니? 응? 카밀, 대답해 보렴. 얘, 카밀, 마리아, 카밀?
카밀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파양된 날로부터 2주 후, 카밀은 일곱 번째로 입양되었다.
양부가 될 사람은 고학력자에 부유한 사업가이며, 젊은 미혼자였다. 독신이라는 특이 사항이 입양 자격에 흠이 되지는 못했다. 입양 절차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카밀의 양아버지, 록시아스를 만난 고아원장과 교관들은 카밀의 미래에 영광만이 가득하리라 확신했다. 고아원 동기들은 카밀을 부러워했다.
독신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부모의 조건을 두루 갖춘 완벽한 폰 슈바르첸베어그 씨에게 호감을 느끼기란 짧은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마치 카밀처럼.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어도 진한 부자 사이가 될 거야.
고아원 사람들은 작별 인사를 건네며, 록시아스와 카밀이 닮지는 않았지만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인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록시아스는 카밀이 먼저 내민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카밀이 록시아스를 올려다보며 수줍은 햇살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그에 록시아스는 차양막 같은 흑발을 쓸어 넘기며 찰나 미간을 좁혔다가….
“내 걸음에 맞춰 걸어.”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엄격하게 읊조렸다.
“네, 선생님.”
카밀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검은 정장 바지가 미끄러지는 긴 다리가 옮겨졌다. 록시아스보다 키가 작은 카밀의 다리가 그를 따라 무리하게 보폭을 넓혔다. 그래도 카밀은 산홋빛 뺨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드디어, 선생님에게 인정받았다.
***
“지금부터는 이름을 불러.”
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그렇게 명령하며 시동을 걸었다.
법적으로 부자 관계가 되었으니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부적절했다. 아버지나 아빠 따위는 왜인지 불쾌했다. 이름이 최선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부모와 자식 간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흔했다. 더불어 친밀한 부자 사이를 위장하기에도 적절했다.
“네, 록시아스.”
앞서 입양을 여섯 번 경험하며 차를 탈 때는 안전벨트를 매야 한다는 규칙을 터득했던 카밀은 벨트를 쭈욱, 끌어 내리며 대꾸했다.
록시아스가 운전대를 돌리며 이어 말했다.
“‘록시’라고 부르는 것까지 허락해 줄게. 그리고.”
검은 세단이 도로에 진입했다.
“내가 말할 때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고 경청해.”
“네, 록시.”
카밀의 즉각적인 대답과 동시에 검은 구둣발이 액셀러레이터를 사뿐히 밟았다. 속력 계기판 속, 왼편으로 누웠던 빨간 직선이 순식간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잘못했으면 죄송하다고 해야지, 카밀.”
“죄송해요.”
안전벨트 버클을 끼우지 못한 채 손을 정지한 카밀이 무릎을 모으며 잘못을 빌었다.
“용서해 주세요.”
까딱, 까딱. 록시아스는 약지로 운전대를 두 번 두드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들면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할게요.”
“이제 안전벨트 매.”
“네, 록시.”
딸깍. 드디어 카밀은 언제든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교통사고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었다.
안전벨트… 하긴.
룸 미러로 카밀을 흘겨본 록시아스는 입매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쟤는 아직 사람이니까 사고가 나면 죽겠구나.
그럼 안 되지.
록시아스는 주행 속도를 현저히 낮췄다.
귀한 카밀, 날 죽이기 전까지 죽으면 안 돼.
***
젊음과 불사. 강인한 육체. 고매한 이지. 경제적 풍요.
누구나 바라는 것들을 빠짐없이 소유한 록시아스는 죽기로 작정했다. 유일하게 겪어 보지 못한 것이 바로 사멸이기 때문이었다. 몇 세기에 걸쳐 권태에 절여졌던 록시아스는 죽음이라는 낯선 행위에 단번에 매료된 것이다.
거슬릴 것이 없는 록시아스는 곧바로 바라던 바를 실행에 옮겼고, 1,056번의 자살 시도 끝에 자신은 스스로의 목숨을 거둘 수 없다는 절망을 깨달았다.
자살이 불가능하다면, 타살당하면 된다.
이윽고 록시아스는 잔인무도하기로 소문난 인간들, 맹수, 위험천만하기로 손꼽히는 금지禁地를 샅샅이 찾아다녔다.
도륙에 중독된 짐승과 자연 앞에 선 록시아스는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살인마가 휘두른 칼날은 록시아스의 흰 살결을 간지럽힐 뿐이었다. 전쟁광이 연달아 휘갈긴 총탄 또한 록시아스에게는 무력했다. 만물을 집어삼키는 거친 해양은 록시아스만 뱉어 냈다. 더하여 록시아스는 아무래도 텅스텐1)으로 빚어졌는지 끓는 마그마에 전신을 담가도 용해되지 않았다.
방법을 틀었다. 이번에는 화학 요법을 고안했다. 하나 각종 독극물은 소화되는지도 모르게 내장 안에서 증발했다.
그렇다면 창의력을 조금 더 발휘해서. 록시아스는 주식인 혈액이 아닌, 타 짐승이 먹는 음식물 섭취를 시도했다. 그러나 독극물도 분해하는 소화 기관이 아닌가. 평범한 음식물 따위로 죽기란 어림도 없었다.
록시아스는 연이은 실패에 크게 실망했다.
그러던 중, 실마리를 얻을 사건이 벌어졌다.
록시아스가 탄생시킨 서른일곱 번째 흡혈귀, 사막에서 말라 가던 고아 율리아가 별안간 방문해 온 날이었다.
‘아직 살아 있네.’
수 세기 만에 재회한 율리아에게 록시아스는 그렇게 인사했다. 칭찬이기도 했다. 머리를 조금만 써도 영생할 것을, 멍청한 흡혈귀 놈들은 나대다가 곧잘 죽어 버리는 통에 이토록 오래 살아남기란 드문 경우이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율리아는 인사 대신.
‘죽어!’
배은을 저질렀다.
율리아의 검지 끄트머리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록시아스의 빳빳하게 다려진 흰 셔츠로 불이 옮겨붙었다. 록시아스는 가슴팍부터 타원형을 그리며 타들어 가는 셔츠를 양쪽으로 당겨 찢어 벗은 뒤 내동댕이쳤다.
‘이 괴물! 당신이 나를 망쳤어!’
율리아가 달려들며 원망을 질렀다. 악에 받친 그 문장이 서른일곱 번째 흡혈귀의 유언이었다.
‘언제는 나더러 천사라고 했으면서.’
록시아스는 고대적 화산 폭발의 희생자처럼 까맣게 굳어 버린 율리아를 짓밟으며 중얼거렸다.
‘부정적으로 변했네.’
파삭. 율리아 형상을 띠었던 재가 바스러지더니 와르르 주저앉았다.
‘한심한 율리아….’
짜증이 솟구쳤다. 기분 전환 삼아 목욕을 하고 싶어졌다. 록시아스는 재를 지르밟으며 방을 나섰다.
욕실이었다. 거울을 지나치던 록시아스는 두어 걸음을 물렸다. 몸을 돌려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시선을 내렸다. 푸른 핏줄이 엽맥처럼 비치는 목, 그보다 아래. 가슴에 그을음이 있었다.
록시아스는 엄지로 그을음을 쓸었다. 검게 엉긴 자국은 닦이지 않았다. 상처이므로 닦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가 뿜어냈던 푸른 불꽃에 그슬린 것은 셔츠뿐만 아니었다. 용암에도 녹지 않는 육체가 화상을 입었다. 화상은 더디게 아물었고, 흉터로 남았다. 희망과 기회가 엿보였다.
거의 XXX년 동안 동료를 만들지 않았던 록시아스는 다시 수많은 먹잇감들에게 제 피를 마시게 했고, 새 흡혈귀들의 능력이 발현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후 능력을 자각한 흡혈귀들을 일일이 찾아갔고, 괜스레 시비를 걸어 자신을 공격하도록 종용했다.
하나 기대와는 달리 어떤 흡혈귀도 록시아스에게 상처를 내지 못했다.
록시아스는 율리아와 타 흡혈귀들의 차이점을 고민했고, 머지않아 하나의 답을 끄집어냈다. 율리아는 자신만큼이나 오래 산 흡혈귀였다.
인간은 세월이 지날수록 노후한다. 하나 흡혈귀는 세월에 구애받지 않았다. 도리어 연륜이 쌓여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록시아스는 나이 들 대로 들어 흡혈귀로서 힘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동료라면 자신을 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가정했다.
가설을 사실로 매듭짓기 위해서 록시아스는 까마득한 과거에 탄생시켰던 흡혈귀들을 찾아 나섰다.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믿기지 않지만, 믿기지 않도록 한심하지만, 대부분의 흡혈귀는 율리아의 반만큼도 나이 들지 못하고 죽어 버린 탓이었다.
현명하게 삶을 영위하는 흡혈귀들도 물론 몇 있었다. 록시아스는 그들과 상봉했다. 모두 새 생명을 부여해 준 록시아스를 잊지 않고 있었다.
하나 그 기특한 흡혈귀들까지 이제는 다 사라졌다. 록시아스와 재회한 지 하루도 넘지 않아 영생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록시아스는 실험을 위해 하는 수 없이 자신에게 덤비도록 그들을 부추겨야 했고, 통 넘어오지 않으면 먼저 공격했다. 아무리 슬기로운 흡혈귀라도 목숨이 걸린 판에는 난폭한 싸움꾼으로 변모했다.
초창기 동료들을 말살해야만 했던 다소 우울한 과정에서, 록시아스는 마침내 수확을 얻었다.
예순한 번째 흡혈귀, 프레데릭과 싸움이었다.
프레데릭은 손톱을 철 송곳처럼 첨예하고 단단하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데, 록시아스는 무시무시한 송곳으로 인해 왼쪽 허벅지 바깥쪽에 자상을 입었다. 자상은 낫지 않고 희미한 흉터로 변했다. 율리아에게 화상을 입었던 가슴팍에 남은 흔적과 같이.
‘아, 뭐야.’
찢어진 허벅지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프레데릭의 숨통이 끊어진 뒤였다. 따끔한 느낌조차 들지 않아 프레데릭이 제게 상처를 냈으리라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록시아스는 고통에 둔감한 데다가 조금이라도 다칠 성싶으면 의식하기도 전에 상대를 없애 버리는 자신이 미웠다. 10초만 일찍 알아차렸어도 프레데릭을 살려 두었을 터였다. 또한 자신을 죽이라 명령했을 것이고….
고작 고양이 발톱 같은 손톱으로 록시아스를 죽이려면 한참이나 걸리겠지만. 그나마라도 해서 록시아스의 소원을 이뤄 줄 수 있는 마지막 흡혈귀가 프레데릭이었다.
굉장히 아쉬웠지만 록시아스는 좌절하지는 않았다. 수 세기 역사를 지나며 힘을 단련한 흡혈귀는 자신을 해칠 수 있다, 고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 는 대단한 소득을 얻었으므로.
명확한 조건이 제시된 상황에서 계획은 순조롭게 세워졌다. 록시아스는 자신을 상대로 특화된 살인 병기를 키워 내기 위한 준비를 했다.
새로 만든 흡혈귀가 자신을 죽일 만큼 노련해지기까지는 몇백 년은 거뜬히 걸릴 테지만 문제없었다. 그야 불사인 자신에게 시간이란 함부로 소비해 버리고 말면 되는 것이니까. 인내심만 주의하여 발휘하면 될 테다. 혹 흡혈귀가 훌륭한 살인 병기로 성장하기도 전에 짜증이 치솟아 실수로 어찌해 버리지 않도록 말이다. 물론 짜증 날 일이 애초 생기지 않도록 혹독하게 교육할 참이다.
자신의 명령을 순순히 따라 자신의 바람을 실현해 줄, 순종적이고 영민하며 강력한 살인 병기를 상상하며 록시아스는 간만에 만면을 환하게 밝혔다.
막중한 임무를 도맡을 흡혈귀로 재탄생될 인간은 당연하게도 록시아스가 직접 골랐다. 록시아스는 몇 개국을 전전하며 고아원 수천 곳을 살폈고, 마음에 쏙 드는 아이를 발견했다.
독일 촌구석에 처박힌 힐렌브란트 고아원.
땟국물이 흐르는 아이들 속에서 홀로 하야말간 카밀 마리아 힐렌브란트.
피는 아무 먹잇감에서나 뽑아 마셔도, 그 외의 취향만은 까다로운 록시아스의 합격선을 찰나에 통과한 유일한 인재였다.
자신에게 특화된 살인 병기가 되기까지 오랫동안 두고 봐야 하니 이왕이면 예쁜 편이 좋았다. 총명함, 강인함, 충직함 따위는 만들어 주면 된다.
***
새벽 네 시 정각. 록시아스는 적막에 지배된 힐렌브란트 고아원을 침입했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고아들이 잠든 방까지 들어섰다.
새벽 네 시 일 분. 동기 다섯 명과 같은 방에서 잠들었던 카밀은 번쩍, 눈을 떴다. 어둠이 깔려 있어야 할 시야가 빛나는 물체로 가득했다.
‘안녕.’
광원이 말을 걸어왔다. 카밀은 눈을 재차 감았다가 떴다. 잠에 취해 몽롱하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빛이 명확한 형태를 입었다. 눈, 코, 입… 사람이었다.
‘누구세요?’
카밀은 동기들이 깨지 않도록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가 잠에서 깨 손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왜인지 싫었다.
‘네 이름부터 말해 봐.’
‘…카밀이에요.’
별똥별.
카밀은 눈앞의 록시아스가 자신을 찾아 고아원으로 내려온 별이라고 확신했다. 그야 야간에 저토록 빛나는 것은 별 말고는 없으며 자신은 외톨이었으므로.
‘별 요정님이에요?’
작년까지, 잠이 오지 않을 때 고아원장이 읽어 주던 동화가 있었다.
동화의 주인공은 카밀처럼 외톨이었다. 그런 주인공에게 어느 날 별에 사는 요정이 찾아와서 이르기를.
‘외로운 아이야. 이제부터는 내가 너의 반쪽이 되어 줄게.’
별 요정의 도움으로 빛나게 된 주인공에게 사람이 하나둘씩 모였다. 아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난 록시아스야.’
‘제게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왔어요?’
싫은데….
물은 후, 카밀은 요정에게 들리지 않도록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렸다.
외톨이라 별 요정이 찾아왔다는 점만 빼면 동화 속 주인공과 카밀에게는 공통분모가 없었다. 동화 속 아이는 외로워하며 언제나 친구가 생기기를 바랐으나 카밀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기억의 시작점부터 혼자였던 카밀은 자신의 머리칼과 뺨을 함부로 만지고 말을 걸며 대답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귀찮았다.
요정이 대답했다.
‘친구는 안 돼.’
‘네에…?’
실제 요정은 동화 속의 별 요정과는 달랐다. 별에서 살다 온 요정은 머리칼부터 손톱까지 금색으로 반짝거린다고 했다. 그런데 눈앞의 요정은 환하게 빛나기는 해도 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얗고 차가운 느낌이라 달님에 가깝다, 고 카밀은 생각했다.
‘너 친구 많아?’
게다가 동화 속 별 요정은 고아원장처럼 상냥한 말투를 썼는데, 실제 요정은 목소리가 부드럽기는 해도 친절한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사교적이면 귀찮은데.’
‘요정님이 아니에요?’
‘록시아스라니까 왜 자꾸 요정 타령이야. 잠이 덜 깼어?’
인간들이 지어낸 속설들 거의 다가 허무맹랑했으나 록시아스는 ‘금발은 멍청하다’라는 명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똑똑하게 만들어 줄게.’
카밀은 요정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연스레 대꾸했다.
‘고마워요, 록시아스.’
‘내 이름 부르지 마.’
고맙다고 했더니 요정은 반듯한 미간을 왈칵 구겼다.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멈춘 카밀은 어깨를 움츠리며 록시아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혹 아이가 록시아스라는 이름을 떠벌리면 안 될 일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 지켜야 할 절차가 무수했다. 록시아스는 평범한, 아니, 완벽한 양부모를 위장해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카밀을 입양할 예정이었다. 입양 절차가 퍽 번거롭기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납치해 버리고 싶었으나 그 후 실종이니 뭐니 하며 인간들이 떠들어 대면 더욱 귀찮아지리라.
‘선생님이라고 불러.’
‘네에… 선생님.’
카밀에게 호칭을 정해 준 록시아스는 이어 통보했다.
‘널 데려갈 거야.’
요정은 친구를 만들어 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카밀은 몸을 세워 앉으며 물었다.
‘저를요?’
‘왜, 싫어?’
카밀은 고아원에서 지내는 것과 요정을 따라갔을 경우를 비교해 보았다. 고아원 사람들은 제게 다정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거슬렸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고아원보다는 요정과 단둘이 사는 편이 훨씬 편할 듯했다.
‘좋아요.’
좋다고 할 줄 알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대개 인간들은 자신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끼니까. 자신이 먹잇감의 혈액에 이끌리듯.
‘응.’
짧게 대꾸하며 고개를 까딱인 록시아스는 허리를 숙여 카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아이를 천장과 가까워지도록 높이 들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별안간 공중에다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된 카밀은 뒤바뀐 시야에 눈을 깜빡거리며 요정님을 내려다보았다. 요정님은 위에서 보아도 희었는데, 새카만 머리카락 탓에 일전보다는 눈부심이 덜했다.
이상하게, 순간 카밀은 새하얀 요정님의 이마를 그림자처럼 덮은 까만 머리칼을 만지고 싶어졌다.
오밀조밀한 손끝이 흑색 앞머리에 닿으려던 찰나였다. 록시아스가 카밀을 도로 내려놓았다.
‘선생님, 저를 왜 들었어요?’
카밀은 목이 꺾일세라 록시아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록시아스는 아이의 손가락이 순간 닿았던 앞머리를 털듯이 쓸었다. 그 동작에 카밀은 평평한 목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크면 어떻게 되려나 하고 좀 봤어.’
‘왜요?’
‘어릴 때 예뻐도 커서는 못생길 수 있잖아. 짜증 나게.’
‘왜 짜증 나요?’
‘계속 같이 있어야 하니까.’
록시아스는 빠르고 무심하게 대답을 뱉어 냈다. 카밀이 재차 질문했다.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네가 말만 잘 들으면, 한 몇백 년은 같이 살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못 살아요.’
‘넌 그렇게 될 거야.’
‘어떻게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카밀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대꾸하던 록시아스는 꼬았던 팔짱을 풀었고, 카밀의 목과 달리 울대가 선명하게 불거진 길쭉한 목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카밀이 또다시 질문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일일이 질문하지 마.’
왜요?
카밀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물음을 꾹 삼켰다. 허리를 접은 록시아스가 카밀에게 얼굴을 바짝 붙이고는 마저 일렀다.
‘옳지, 말 잘 듣는다.’
카밀 마리아 힐렌브란트는 총명함이 0점. 강인함은 알 수 없음. 하지만 충직함에는 어느 정도 재능을 타고난 듯했다.
도로 허리를 편 록시아스는 옷감이 판판하게 떨어지는 복부를 쓸었다.
‘배고파. 갈래.’
이별을 빗대는 말에 카밀이 벌떡 일어섰다.
‘선생님. 저, 안 데려가요?’
카밀은 어쩐지 마음이 다급해졌다. 요정님이 자신을 꼭 데려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울지 않아도 촉촉하게 물기 서린 푸른색 홍채가 높다란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카밀은 여태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키가 큰 요정님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원장이, 교관이, 선생이, 동기들이 저보고 예쁘다고 했는데. 카밀은 그 익숙한 칭찬들을 느닷없이 떠올리며 앳된 이목구비를 와락 구겼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뭐가 예뻐! ‘저런 게’ 예쁜 거잖아!
록시아스는 자신을 향한 파란 눈동자에서 낯익은 욕망을 감지해 냈다. 수 세기가 지나며 세상의 색이 달라졌어도, 먹잇감들이 저에게 내비치는 눈빛은 여전했다.
‘카밀. 나랑 있고 싶지.’
‘네.’
카밀은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록시아스가 맹숭맹숭한 낯으로 이어 읊조렸다.
‘뻔하지.’
‘…….’
‘다들 그래. 하지만 모두가 기회를 얻는 건 아니야.’
무슨 뜻이에요? 카밀은 묻고 싶었으나 일전 일일이 묻지 말라던 꾸중을 떠올리고는 얌전히 입술을 물었다.
‘넌 운이 좋아. 카밀, 가만히 기다려. 다시 올 거야.’
‘그치만.’
‘너 내일모레 입양되거든.’
당장 떠나려는 듯이 구둣발을 옆으로 미끄러트렸던 록시아스가 고개를 꺾어 내려 카밀을 도로 흘끗 보더니 말했다.
‘그럼 내가 널 못 가지니까, 고아원으로 돌아와.’
‘…어떻게요?’
입양이라니. 고아원의 모든 아이들이 소원하는 꿈이었다. 하지만 카밀은 입양 소식에 기쁘지 않았다. 묻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질문하여 요정님 기분을 상하게 했을지에 대해서만 걱정했다. 마음이 이미 록시아스의 바짓가랑이에 철썩 엉겨 있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요정님은 정말이지 친절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을 지르든가. 뭐 그런 ‘나쁜 짓’을 하면 파양되겠지.’
그럼에도 단서는 던져 주었다.
‘꼭…!’
카밀은 말을 하다 말고는 눈을 동그랗게 떠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었던 요정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떠났다.
‘…….’
태어나자마자 핏줄과 이별했으며 별로 정들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함께 생활하던 수많은 동기가 입양되는 바람에 무수한 작별을 겪어야 했던 카밀은, 이때 난생처음 상실감을 배웠다.
‘꼭, 다시 오세요.’
왜 허전할까? 고작 방금 알게 된 사람, 아니, 요정님인데.
카밀은 침대로 돌아갔다. 이불을 목 언저리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길지 않은 평생 만났던 사람들은 전부 카밀이 예쁘다며 카밀의 금발을 쓰다듬고, 산홋빛 뺨을 만지고, 손을 쥐고 놓지 않으며 성가시게 굴었는데…. 요정님은 나를 한 번 번쩍 들었다 놓았을 뿐이지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았다.
…그럴 수 있나?
누구에게나 사랑받았으며 인형이라도 된 듯이 어루만져지기 일쑤였으나, 록시아스만은 예외였다. 예상 밖의 대접은 어린 카밀에게 파격으로 다가왔다.
록시아스가 고아원을 찾은 날로부터 이틀 뒤, 카밀은 정해진 대로 입양 절차를 밟았다. 부모가 될 사람들은 그저 그랬다. 새 가족은 카밀에게 특별한 감상을 안겨 주지 못했다.
입양되고 이튿날 카밀은 새 집 부엌에서 훔친 성냥으로 정원에 불을 질렀다. 햇볕이 따가운 날이었으므로 정원수와 잔디는 쉽사리 전소되었다. 카밀은 솟구쳐 오르는 불길과 연기를 가만히 응시하며, 요정님을 떠올렸다.
‘널 데려갈 거야.’
일렁이는 화마가 꼭 자신에게 끝없이 속삭이는 요정님의 입술처럼 붉었다.
‘카밀. 나랑 있고 싶지.’
사방으로 날리는 검은 연기가 요정님이 자신을 들쳐 안았을 때 보았던 새카만 머리칼 같았다. 손끝으로 스치기만 했던.
‘세상에! 카밀!’
양부모의 고함이 카밀의 등을 때렸다. 카밀은 가까워지는 달음질 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그럼 내가 널 못 가지니까, 고아원으로 돌아와.’
요정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요. 꼭 오실 거죠?
고아원으로 되돌아가 요정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요정님이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을까? 뺨을 쓸어 주지 않을까? 손을 잡고 같이 가자, 하고 말해 주지 않을까?
그리고….
카밀은 자신의 손길이 스쳤던 흑발을 털듯이 쓸어 냈던 록시아스를 되새겼다.
내가 요정님을 또 만져도 괜찮을까?
이번에는 내 흔적을 그렇게, 싫다는 듯이 털어 내지 않을까.
아름다운 탓으로 불친절이 결핍되어 있었던 카밀은 자신을 향한 최초의 무심함에 사로잡혀 버렸다. XXXX년을 살아온 록시아스의 일상적인 여유가 고작 열 몇 살인 카밀에게는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로 인하여 카밀은 또래보다 뒤늦게 욕망을 배웠다. 록시아스, 요정님에게 관심받고 싶은 욕심. 인정받고 싶은 욕구. 따라서 ‘나쁜 짓’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의욕.
카밀은 식물이었던 검은 재를 쥐었다. 버석거리며 손바닥 안에서 부서졌다. 뒤이어 어깨가 붙잡혀 몸이 돌아갔다. 어른의 큼직한 손이 뺨을 내려쳤다.
철썩!
‘제정신이야!?’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일갈한 양아버지와는 내일이면 남이 될 사이였다. 방금 따귀를 맞은 카밀은 칭찬을 받은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첫 번째 파양이었다. 록시아스는 양부모에 이어서 고아원장과 교관들에게 줄줄이 혼났지만 숫제 기분이 봄 꽃밭을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그리고 그날 새벽. 약속대로 록시아스는 카밀을 다시 찾아왔다. 하나 약속만 지켜졌을 뿐 카밀의 바람은 아무것도 실현되지 못했다.
‘다음에도 그렇게 해.’
요정님은 웃지도 않고 그렇게만 말했다.
말을 잘 들었다고 하면서 칭찬해 줄 줄 알았는데, 머리를 쓰다듬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뺨을 쓸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손을 잡고 ‘이제 가자’라며 날 데려가 줄 거라고 믿었는데!
처음으로 가져 본 소망이 헛되었다. 실망을 금하지 못한 카밀은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일어서기를 터득한 아기가 곧 걸음마를 떼듯이, 카밀은 욕념을 학습했으며 이어서 인내를 익혔다.
이후로 몇 년에 걸쳐 입양과 파양이 여섯 번 반복되었고, 일곱 번째 양부모가 고아원을 방문했다. 평소처럼 새벽이 아닌 대낮에.
카밀은 뛸 듯이 기뻐서 두어 번 탁, 탁, 발을 굴렀다. 정말 뛰지는 않았다. 요정님은 얌전한 아이를 좋아하니까.
하나 마침내 록시아스와 나란히 고아원을 벗어나게 되자 카밀은 자신도 모르게 요정님에게 손을 내밀어 버렸다.
손을 잡아 주세요, 잡아 주세요, 잡아, 주세요.
등 뒤로 고아원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요정님은 망설이는 듯하더니 자신의 손을 잡아 주었다.
드디어!
카밀은 광대가 아리도록 웃으며 요정님을 올려다보았다. 그에 요정님은 햇살과 섞이지 않는 새카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나중에는 저 머리카락도 만질 수 있겠지.
작은 성취에 큰 희망을 얻은 카밀은 더 먼 목표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내 걸음에 맞춰 걸어.’
‘네, 선생님.’
아직은 키가 작아 록시아스의 보폭에 맞추기 버거웠지만….
록시아스로부터 발현된 욕망은 야망 또한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카밀은 주저하지 않았다.
***
몇 개국에 각기 다른 명의로 여러 개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록시아스의 주거지는 독일 베를린, 그루네발트Grunewald 숲을 끼고 있는 동부 외곽에 위치했다. 과거에는 거처를 이곳저곳으로 옮기기 일쑤였으나 최근 약 60년간은 줄곧 이 저택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방문자를 짓누를 것처럼 육중해 보이는 철문이 부드럽게 입을 벌렸다. 검은 세단이 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창 밖으로 저택 정원 풍경을 응시하던 카밀은 다시금 고아원으로 내버려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도착한 곳이 여태껏 입양되며 지냈던 집들과는 달리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아원에 가까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록시는 자신을 데려갈 것이며 계속 같이 있을 거라는 말만 했지 어디로 데려가서 어떻게 같이 있을 것이라고는 알려 주지 않았다. 어쩌면 록시는 자신과 같은 고아들을 데려와 이곳에서 지내는 걸지도 몰랐다. 록시와 자신, 둘이서만 살기에는 지나치게 커다란 저택이니 아마도 예상이 맞을 터다.
나와 록시, 단둘이 아니야?
안전벨트를 쥔 카밀의 손에 악력이 꾸욱, 더해졌다.
차 시동이 꺼진 후에도 카밀은 록시아스로부터 어떠한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안전벨트를 풀지도 않았으며 ‘내려요?’ 따위 멍청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여섯 번 입양과 파양되는 과정부터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은근하게 양성되며 섬세하게 길들여지고 있었다.
먼저 록시아스가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카밀은 차 문을 열고 상체를 숙인 록시아스의 구부러진 등허리를 응시했다. 아슬아슬하게 천장을 스치고 멀어지는 까만 뒤통수를 보면서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내려.”
마침내 명령이 떨어졌다.
“네, 록시.”
딸깍. 안전벨트를 해제한 카밀이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하나 손잡이를 당기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반대편에서 이쪽까지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록시아스가 차 문을 열어 준 것이었다. 잠시간 부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이러한 작은 배려를 실천했으나 카밀은 처음으로 감동하였다.
록시아스의 손바닥 한 뼘보다 약간 더 큰 운동화 발이 땅 위로 안착했다. 염원하던 양육자의 보금자리를 향한 첫 내도였다.
저택과 정원의 면적에 비하여 설치된 옥외등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카밀은 어둑어둑한 풍광과 그보다 더욱 그림자가 짙은 발치를 번갈아 둘러보며 까만 정장 바지를 입은 다리를 쫓았다. 뵈는 것이라고는 숫제 거뭇거뭇했으나 기분만은 환했다.
산화된 석벽으로 이루어진 저택은 그림자에 도색되어 음산했다. 하나 카밀은 두려운 기색도 없이 록시아스를 따라 계단을 척척 올랐다. 휘이이, 날카로운 바람이 저택을 들렀다 갔다.
중세 건축물을 떠올리게 하는 고딕풍 경치와 달리 저택은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검정에 가까운 밤색 현관문에 당도한 록시아스는 얼핏 초인종인 듯한 기계에 검지를 올렸다. 삑, 집주인의 지문이 인식되자 간략한 기계음이 퍼졌다. 달칵. 현관문 잠금이 풀렸다.
“네 지문은 내일 등록할 건데.”
문고리를 잡고 선 록시아스가 말하다 말고 뒤를 돌아 카밀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안 닿나.”
신장 187센티미터인 록시아스에게 맞춰 설치한 지문 인식기는 또래보다 키가 작은 어린 카밀에게는 너무나 높은 곳에 있었다.
“해 봐.”
뻔히 닿지 않겠으나 록시아스는 괜스레 시켰다. “네, 록시.” 대꾸하며 록시아스를 지나친 카밀이 팔을 쭉 뻗었다. 짧은 검지를 한껏 폈을 때야 지문 인식기에 겨우 미쳤다.
“됐어.”
록시아스가 읊조리자 카밀은 발바닥 전체를 도로 땅에 붙이며 팔을 내렸다.
“키 좀 커.”
날 때부터 열세 살가량의 육체를 타고났던 록시아스는 작은 카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동안 안 크고 뭐 했는지. 카밀은 아직 록시아스가 원하는 이상에 턱없이 부족했다.
록시아스는 현관문을 밀어젖히며 카밀이 호리호리하고 가냘프게 성장하면 어쩌나 심려했다. 예쁘기만 한 종이 인형은 사절이었다.
“죄송해요.”
의지로 키를 키울 수 없는 노릇인데도 카밀의 가슴속은 크나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죄책감으로 꿈틀거리며 울적해졌다.
“죄송하면 커져.”
“꼭 커질게요, 록시.”
들어선 실내는 바깥에 비해 환했다.
카밀은 록시아스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풍성한 샹들리에를 쳐다보았다. 눈이 부셨다.
샹들리에 아래로 대리석 바닥이 주홍 불빛을 반사했다. 널따란 공간 너머로 대칭으로 펼쳐진 계단이 있었다. 록시아스가 왼쪽 계단을 올랐다. 주변을 구경하다 정신을 번뜩 차린 카밀이 그 뒤를 급하게 뒤쫓았다.
개수를 헤아릴 수 없는 높은 층계를 올라 당도한 2층에는 또다시 양쪽으로 복도가 뚫려 있었다. 록시아스는 재차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걸음에 맞춰 걷느라 숨이 차올랐으나 씩씩하게 견디며 복도를 지났다.
드문드문 벽 등이 설치된 복도는 어스레하며 차분했다. 조명 옆으로 자리한 문들은 어떠한 공간을 감췄는지 몰라도 줄줄이 닫혀 있었다. 카밀은 폐쇄된 문 뒤에는 록시아스에게 선택된 다른 아이들이 잠들어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대리석을 덮은 카펫이 발소리를 꺼트렸다. 괴괴하고 비밀스러운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카밀은 록시아스 너머로 보이는 새카만 공간을 주시하며 걷고 또 걸었다.
불가사의한 끄트머리에 닿기 전에 록시아스의 구둣발이 정지했다. 카밀은 록시아스와 아주 가까워졌을 때에야 발을 멈췄다.
정면을 채운 커다란 문은 역시나 굳게 닫혀 있었다. 록시아스가 개문했다. 길쭉한 인영과 그보다 훨씬 자그마한 인영이 실내로 모습을 감췄다.
록시아스가 따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어도 카밀은 들어선 공간의 용도를 대번 파악했다. 침실이었다. 카밀이 한 바퀴를 왕복하려면 몇 분은 뛰어야 할 듯한 광막한 방에는 대리석 바닥을 감추는 포근한 하얀 카펫, 그 위로 육중하게 자리한 킹사이즈 침대가 전부였다. 여타 가구나 장식은 없었다. 두 쪽 벽에 한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문구멍이 각각 뚫려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자.”
록시아스는 카밀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말하며 침실 오른쪽에 난 통로를 향했다. 카밀은 찰나 우물쭈물하다가 바로 달려 록시아스 뒤에 바짝 붙었다.
“여기서는 씻어.”
침실에 딸린 두 장소 중 하나는 욕실이었다.
침대 아래 깔린 카펫도 흰색이었고, 욕실의 타일 바닥과 벽 그리고 세면대 욕조 등등 모조리 하얬다. 겨우 수도꼭지 따위만 도금되어 노랬다.
아무래도 록시는 하얀색을 좋아하는 듯하다, 고 카밀은 록시아스에 대해 가늠한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록시아스가 셔츠 단추를 끄르며 말했다.
“하루에 목욕은 두 번, 세수와 양치는 세 번 해. 속옷이랑 옷은 목욕할 때마다 갈아입어. 더러우면 역겨우니까.”
고아원에서 지냈을 적에는 세수와 양치를 아침저녁으로 두 번,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 했다. 카밀은 그동안 록시아스가 자신에게서 악취를 맡았을까 불현듯 두려워졌다. 티셔츠 목덜미를 끌어 올려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나쁜 냄새는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니길 빌었다.
“네, 깨끗하게 씻을게요.”
“옷은 침실로 나가서 반대편 방에서 찾아 입어.”
툭. 마지막 셔츠 단추를 풀어낸 록시아스가 카밀에게 눈길을 던졌다.
“너, 취향 까다로워?”
같은 때, 벌어진 흰 셔츠 속과 비슷하게 하얀 살결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두고 있었던 카밀은.
“네에?”
그렇지 않아도 무구해 보이는 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분홍빛 입술을 오물오물 달싹였다가 망설임이 묻어난 음성을 냈다.
“어… 취향이 뭐예요?”
카밀은 ‘취향’이라는 단어를 아직 접해 보지 못했다. 그에 록시아스는 설명했다.
“좋아하는 게 취향이야. 취향이 아닌 건 재미없고 짜증 나고.”
아. 카밀은 입술을 열어 음절을 흘렸다.
재미있고 짜증 나지 않는 게 취향이구나. 그럼 내 취향은 록시네.
하지만 카밀은 ‘취향이 까다롭냐’는 물음에 대꾸하기 어려웠다.
“또 질문해서 미안해요, 록시. 그런데 ‘까다로운’ 게 뭔지 모르겠어요.”
고아원에서 지낼 적에도 학교는 다녔을 텐데 어떻게 이리 무식한지 의아했다. 록시아스는 인간들이 몇 세기 동안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이뤄 낸 공교육 시스템을 헐뜯었다.
돼지우리 같은 학교.
“싫어하는 거 많아?”
대부분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았으나 굳이 따지자면 록시아스 빼고는 ‘싫다’는 쪽이었으니 카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많아요, 거의 다 싫어요.”
“그럼 넌 까다로운 거야.”
“네….”
아직도 ‘까다롭다’의 의미를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카밀은 대답했다. 더 묻는다면 필시 록시아스가 귀찮아할 터였다.
“그럼 저는 취향이 까다로운 것 같아요.”
까다롭구나.
록시아스는 후줄근한 차림새인 카밀을 훑어보았다.
까다로운 주제에 저런 꼴로 사느라 고생했다.
안타까움에 록시아스가 혀를 차는데, 카밀이 덧붙였다.
“그리고 제 취향은 록시예요.”
또박또박 맑은 목소리로 취향을 밝힌 카밀은 동시에 산홋빛 뺨을 더더욱 붉게 물들였다. 배꼽 아래로 얌전히 모아 잡은 손은 저절로 꼼지락댔다.
순수한 고백에 록시아스는 무감하게 반응했다.
“응. 다들 그래.”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가장한 자만에 카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젖살로 통통한 광대를 올리면서 수긍했다.
“맞아요, 록시는 엄청나게 예쁘고 멋지니까 누구나 록시가 취향일 거예요.”
“그래.”
록시아스는 앞섶 풀린 셔츠를 벗어 내며 대강 뇌까렸다. 이어서 혈색 없이 창백하기만 한 손가락으로 벨트를 쥐었고.
“카밀아.”
“네, 록시.”
“나가.”
카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네에… 록시.”
록시와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으나 카밀은 철근같이 무거운 발을 움직여 욕실을 벗어났다.
록시아스는 조그맣고 노란 뒤통수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마저 탈의하기 시작했다.
“무식한 게 못된 것만 배워 놨어.”
어린놈 자식이 살가죽만 보인다 싶으면 빤히 관찰한다. 껄끄럽게.
갓 태어난 탓에 문명과는 거리가 멀어 수치도 모르고 알몸으로 검은 숲을 벗어났던 당시를 제외하고, XXXX살 흡혈귀 록시아스는 타인에게 맨살을 노출해 본 적이 전혀 없었다.
***
카밀은 록시아스가 목욕을 마칠 때까지 욕실 문 앞에 쭈그려 앉은 채로 한 시간 오십팔 분을 기다렸다. 시간이 재산이었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했을 록시아스는 무엇을 하든지 느긋했다.
축축한 훈기가 카밀의 숙인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머리를 핑 돌게 하는 향긋한 내음이 카밀의 비강 속으로 들이닥쳤다.
벌떡 일어선 카밀은 고개를 사선으로 꺾은 뒤 한껏 들어 올렸다.
“씻어.”
하얗고 보송보송한 샤워 가운을 입은 록시아스가 명령하며 카밀을 지나쳤다.
툭, 투둑. 물기를 털지 않아 가닥가닥 모인 젖은 흑발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대리석 바닥으로, 카밀의 어깨로 떨어졌다. 빨간 티셔츠에 동그랗고 작은 자국이 더욱 빨갛게 남았다.
“네.”
카밀은 즉시 답했으나 욕실로 들어가지는 않고 록시아스의 뒷모습을 응망했다.
찰박, 찰박. 시리지도 않은지 젖은 맨발로 대리석 바닥을 거닐었다. 록시아스의 발은 그의 낯빛과 다르지 않게 창백한 백색이었으며 하얀 대리석에서부터 솟아오른 듯이 보였다. 록시아스는 마치 움직이는 석고상 같았다.
툭 불거진 복사뼈가 걸음걸음마다 더욱 튀어나왔다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샤워 가운 아래로 드러난 늘씬한 종아리를 타고 수적이 주룩주룩 미끄러졌다.
카밀의 시선은 샤워 가운에 가려진 부분을 건너뛰고 곧장 위로 향했다. 록시아스의 길쭉하고 하얀 목덜미 가운데 둥글게 튀어나온 뼈가, 카밀의 새파란 홍채 속 까만 동공 중심에 박혔다.
눈길은 머지않아 록시아스의 머리칼에 종착했다. 카밀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끄트머리에 수분이 방울방울 맺히는 흑발을 자세히, 더 자세히, 집요하게 관찰했고.
“너.”
홱 몸을 돌린 록시아스가 차분하게 일갈했다.
“감상 그만하고 씻어.”
“아.”
제 눈동자 색채와 완연하게 대비되는 새빨간 눈동자를 면하자마자 가슴이 벌렁벌렁 난리를 쳤다. 카밀은 그 소란스러운 박동이 두려움 때문인지,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여타 감정 탓인지 인지하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목구멍을 한 번 조였다가, 카밀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그게… 록시, 어, 저, 혼자 목욕해 본 적이 없어서요….”
록시아스가 완만했던 눈썹을 꿈틀거리며 구겼다. 카밀은 호통 맞을 준비를 했다. 록시아스가 입술을 벌렸다.
“안타깝네.”
예상했던 정도보다 아이가 훨씬 멍청하였으나 인간 대부분이 원체 어쭙잖으므로 록시아스는 카밀의 아둔함을 감내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부터 혼자 목욕하는 데 익숙해져.”
몇백 년을 배울 터인데 익히지 못하면 그건 닭이나 돼지이지 사람이 아니다. 시간에 비례한 훈육이 카밀을 성장시킬 것이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훗날 카밀이 닭이나 돼지라고 판명된다면야, 아쉽지만…. 여하튼 지금은 너그러워도 괜찮았다. 겨우 반나절 지났을 뿐이니까.
그대로 등을 돌린 록시아스는 이전 카밀에게 일러 주었던 드레스 룸으로 사라졌다.
카밀은 티셔츠 끄트머리를 말아 잡으며 때늦은 대답을 허공에다 중얼거렸다.
“…네, 익숙해질게요.”
카밀이 예감했던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혼나거나, 씻는 법을 가르쳐 주거나.
자각하지 못했으나 카밀은 대단히 실망했다. 고개를 시무룩하게 떨구며 욕실로 들어갔다.
혼자 씻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은 머리를 쓰기도 전에 날숨처럼 튀어나온 거짓말이었다. 고아원 아이들은 사지가 멀쩡한 이상 다섯 살 때부터 홀로 씻기를 버릇 들였다.
***
카밀은 턱을 최대한 내려 가슴팍 부근에 코를 대고 킁킁거려 보았다. 욕실에 있는 목욕용품을 썼더니 제게서 록시아스와 똑같은 향기가 났다. 물을 아무리 끼얹어도 씻겨 내려가지 않던 찝찝한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깨끗해졌으니까 록시에게 칭찬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더 깔끔하게 씻지 못했느냐고 꾸지람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또다시 카밀은 두 가지 예상 답안을 고대하며 침실을 향해 뛰쳐나갔다.
발랄한 뜀박질은 곧 어둠에 가로막혔다. 침실을 밝혔던 조명이 전부 꺼져 있었다. 온통 칠흑이었다. 월광을 뿜어내는 듯 발광하는 희디흰 인영과, 뻘건, 두, 점만을 제외하고는.
카밀은 암흑을 더듬거리며 걸음을 뗐다. 목표 지점은 두 개의 붉은 안광이었다.
첫 만남부터 내리 통보와 명령만을 일삼는 거만한 저음이 들렸다.
“새벽 한 시에는 불을 끌 거야.”
“네, 그런데 너무 어두워서 잘 안 보여요.”
눈을 깜빡였는지 빨간 광점이 일순 자취를 감췄다가 도로 나타났다. 카밀은 그를 향해 계속 발을 디뎠다.
“카밀아, 낮보다 밤에 익숙해져야 해.”
“그럴게요, 록시.”
이어 록시가 물었고, 카밀이 대답했다.
“지금 뭐가 보여?”
“록시가 보여요.”
“그리고 또.”
“아무것도… 록시밖에 안 보여요.”
툭, 툭. 무언가 가볍게 부닥치는 소리가 났다.
“이리로 와, 침대로.”
“가고 있어요, 록시.”
“여기서 잠을 자.”
“네….”
록시와 같이 자나요? 아니면, 복도에서 보았던 닫힌 방 안의 다른 애들처럼 록시 없이 밤을 지내야 하나요?
저택에 자신 말고 또 다른 이들이 있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카밀은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도리어 입술을 앙다문 채로 걸음을 지속했다.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록시가 시킨 바를 시각이 알아서 충실히 이행하는 것처럼.
“저.”
마침내 카밀은 어둠을 거스르고 목표에 도달했다.
“왔어요.”
짤따란 열 발가락이 록시아스의 발 앞에 놓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응달에 스며들었던 록시아스가 아주 또렷이 보였다. 카밀은 무표정한 낯을 향해 손을 뻗고 싶었다. 하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주먹을 꽉 쥐었다.
툭, 툭.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록시아스가 다시금 매트리스를 두드렸다.
“이제 누워서 자.”
“네.”
침대가 높았다. 이불을 쥐고 뛰어오르다시피 해서 매트리스 위로 기어올랐다. 카밀은 록시아스를 면하여 모로 누웠다.
“록시는요?”
록시아스가 눈을 깜빡였다. 카밀이 눈동자를 내렸다. 고아원장이며 교관들의 손과는 달리 마디가 드러나지 않은 미끈한 손가락이 사아악, 천을 쓸었다. 침대보가 그를 따라 미세하게 주름졌다.
“난 잠을 안 자.”
토독, 토독. 검지와 중지가 카밀의 뺨과 닿아 있는 매트리스 근처를 번갈아 가며 리듬감 있게 두드렸다.
“넌 아침 여섯 시까지 자.”
카밀은 코앞에서 까딱거리는 손끝에서 눈을 떼고 록시아스를 바로 응시하며 용기 내 물었다.
“록시가… 깨워 주나요?”
붉은 눈동자 윗부분을 덮은 새카만 속눈썹이 더욱 아래로 내리깔렸다.
잠시간 카밀을 빤히 내려다본 록시아스가 입을 열었다.
“내일만. 내일모레부터는 알아서 일어나. 그리고 너, 내일부터 학교에 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록시아스를 볼 수 있다. 카밀은 입술을 모으며 광대를 들썩였다.
“좋아요.”
“키 크려면 자.”
록시아스가 일어섰다. 그때.
“록시.”
카밀이 록시아스의 셔츠를 붙잡았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저지른 제 행동에 찰나 당혹한 카밀은 손을 거둘 뻔했으나 이내 아귀를 더욱 꽉 오므렸다.
“어디 가요?”
“뭐야, 만지지 마.”
탁! 록시아스가 카밀의 손을 내쳤다. 순백한 낯에 그림자를 드리운 카밀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른 애들한테 가요?”
“밥 먹으러 가.”
“다른 애들이랑 밥 먹어요? 저는요? 저도… 저도 배고파요, 록시.”
“하.”
허기진 데다 카밀이 어리광까지 부리는 통에 급격히 치미는 짜증을 삼키려고 눈동자를 굴리며 치켰다가 내리뜬 록시아스는 카밀의 좁다란 가슴팍을 검지로 꾸욱 눌렀다. 카밀이 마치 세게 밀쳐진 것처럼 도로 뉘어졌다.
“다른 애들?”
“여기서 록시랑 사는 다른 애들이요.”
“카밀아, 많이 졸려?”
“여기, 고아원이잖아요…?”
“짜증 나게 헛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
그치만, 그치만….
카밀은 저를 따돌리고 다른 아이들과 저녁 식사를 할 록시아스를 상상하니 추하게 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눈물이 차올라 그렁그렁 맺혔다. 노란 속눈썹이 젖어 들며 금빛이 진해졌다.
“…헛소리해서 죄송해요.”
입술 바르르 떨던 카밀은 흐르는 눈물을 쓱쓱 닦아 내며 사과했고, 떨궜던 시선을 끌어 올렸다. 록시아스가 기척도 않고 사라진 뒤였다.
텅 빈 어둠에 카밀이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나 외로움 따위가 아닌 분노와 무력감이었다. 카밀은 아랫입술을 구겨지도록 깨물고는 눈물방울을 또륵또륵 흘렸다. 침대보를 구겨 잡은 손이 바들거리고 있었다.
한편, 가로등 불이 어스레한 야간 거리.
록시아스는 6일간 식사를 하지 않았으므로 매우 허기진 상태였다.
인간들이 신분을 보장받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록시아스는 짧으면 사흘, 길면 열흘까지 기간을 두고 사냥했다. 먹잇감들이 미개했던 시절에는 누구 하나 죽거나 사라져도 우스운 괴소문만 며칠 나돌고 말았는데, 현대에 와서는 실종이니 살인 사건이니 시끄러워지는 탓에 사냥 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만지지 마.’
록시아스는 자신을 붙들었던 카밀의 손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먹을 뻔했다.
***
갈증과 공복을 해결한 록시아스가 귀가했을 때는 새벽 두 시경이었다.
눈을 감은 채 습격할 수 있을 정도로 사냥에 노련한 록시아스는 피 한 방울조차 증거로 남지 않은 깔끔한 모습이었으나 버릇처럼 또다시 목욕했다.
카밀은 눈을 감은 채 쌔근쌔근 숨소리를 내며 록시아스의 기척을 엿듣고 있었다.
록시아스는 다른 애들의 존재나 이곳이 고아원인지 아닌지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고 그저 헛소리하지 말라며 일갈했다.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던 카밀은 여태 찜찜한 심정을 견디며 밤을 지새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 시간 오 분 경과. 전보다 일찍 목욕을 마친 록시아스가 척척한 발소리를 내며 침실을 가로질렀다.
카밀은 눈을 떴다. 하얀 목욕 가운에 싸인 뒷모습이 보였다.
록시아스가 물었다.
“왜 안 자?”
말을 엄청 안 듣네….
질문 후에는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카밀의 변명을 듣기도 전에 록시아스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검은 셔츠와 바지를 갖춰 입은 록시아스가 다시금 침실로 발을 디디자마자, 카밀은 울먹이며 읊조렸다.
“록시… 이리로 와 주면 안 돼요?”
자주 쓰지는 않았던 방법이지만. 지금과 같이 슬픈 표정을 지어내며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부탁하면 고아원에서는 누구든 기꺼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고는 했었다. 카밀은 이 진실하지 못한 수단이 부디 록시아스에게도 적용되길 바랐다.
록시아스는 두 팔을 포개어 베개에 올려 두고 그 위에 머리를 얹은 채 모로 누운 카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검은 숲이 낳은 흡혈귀는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카밀의 이목구비가 일그러지는 곡선 하나하나를 정확히 따라 훑을 수 있었다.
카밀은 마치 저를 먹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는 먹잇감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은 록시아스를 신 취급하며 자신을 물어 달라고 목덜미를 갖다 바치는 광신도의 형색 같기도 했다.
둘 중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명확히 지녀야만 나올 수 있는 기색이었다.
“네에…? 록시, 아니면 제가 록시에게 갈까요?”
“하.”
록시아스는 요망한 카밀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전과 다르게 맨발이 아닌 구둣발이 카밀에게로 직진했다. 금방 침대 앞이었다. 그렁그렁한 파란 눈동자가 치켜졌고, 건조한 붉은 눈동자가 하락했다.
“혼자서는 문도 못 열어, 목욕도 못 해. 잠도 못 자?”
탓하기가 목적인 물음이 동그란 귓가로 내려앉았다. 카밀은 안정감을 얻었다.
“대체 고아원에서 뭘 배웠어?”
“죄송해요… 무서워서 그랬어요.”
“뭐가 무서운데.”
“매일 고아원 동기들이랑 다 함께 자다가 혼자 자려니까 무서웠어요.”
거짓말. 록시아스는 카밀에게서 일말의 공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록시아스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아이의 속임수를 간파했으면서도 록시아스는 진실을 말하라고 다그치지 않고서 물었다. 처량했던 얼굴을 단번에 활짝 펴낸 카밀이 록시아스의 허벅지,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노래 불러 주면 안 돼요…?”
“그거 불러 주면 잘 거야?”
“네, 록시가 노래를 불러 주면 잘 잘 수 있어요.”
“카밀아, 너 되게 번거롭다.”
마치 칭찬하는 듯 나긋한 말투로 노골적으로 헐뜯은 록시아스는 이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신의 바지를 움킨 손은 탁 쳐서 떨어트렸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노래를 정말 좋아하는지 여하튼 방긋방긋 웃기 시작한 카밀의 눈자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눈 감아.”
“네, 록시….”
카밀이 속삭이듯 대답하자 록시아스는 손바닥을 거두었다.
빗자루로 써도 되겠네.
장밋빛 피부로 내려앉은 풍성한 금빛 속눈썹에 록시아스는 그런 생각을 했고, 혼잣말처럼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150년쯤 전이었나. 당시 유명했던 음악가가 작곡한 자장가였다.
안녕, 잘 자렴
아기 천사의 보호를 받으며
평화롭고 달콤하게 잠들렴
꿈속의 낙원을 보며
록시아스의 노랫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카밀은 여명이 밝아 올 무렵에 잠이 들었다.
***
키가 크면 작아진 옷은 저보다 왜소한 아이에게 물려주었고, 저보다 성장한 아이로부터는 큼직한 옷을 물려받았다. 이렇듯 검소한 고아원 생활 중에 카밀은 새 옷을 걸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제 몸에 맞춰 제작된 교복이 어색했다. 작아서 끼이는 옷이 더욱 편할 지경이었다.
카밀은 큰 바지가 흘러내리면 흘러내리는 대로 입었던 터라 처음 매 보는 멜빵에 엄지손가락을 걸고 퉁, 튕겨 보았다. 목 끝까지 잠근 셔츠 단추와 넥타이가 갑갑했다.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하얀 양말은 낯간지러웠다. 해진 운동화가 아닌 번쩍이는 검정 구두는 무거웠다.
그러나 록시아스의 칭찬 한마디가 이 모든 불편을 소화하도록 했다.
“예쁘네.”
“고마워요, 록시.”
단번에 귓바퀴까지 붉힌 카밀이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요.”
“응. 이제 나가자.”
카밀의 검정 구두보다 손가락 두 마디는 길쭉한 검정 구두가 앞섰다. 카밀은 록시아스를 쫓아 걷다가 무심코 내려다본 구둣발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록시아스와 자신의 구두 모양이 비슷했다. 신이 났다.
15분을 달린 세단은 카밀이 등교할 새 학교에 도착했다. 일반 공립 학교와 다른 학교는 록시아스의 세단과 비슷한 차들이 정문 앞에 줄줄이 세워져 있었으며 학생들은 하나같이 카밀과 똑같은 교복을 갖춰 입었다.
차에서 내린 후 보호자와 함께 정문을 지나는 학생은 카밀뿐이었다. 학생들의 시선이 못 보던 얼굴로 자연스레 집중되었다. 카밀은 흥미와 신경을 모조리 록시아스에게 쏟아부었으므로 저를 향한 관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록시아스며 카밀이며 흘리는 기색이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전학 수속은 진작 마쳤으나 콧대 높은 사립 학교는 소수 정예의 일원으로 간택된 학생과 그 보호자를 반드시 대면하길 바랐으므로 록시아스와 카밀은 교장과 면담했다.
젊은 록시아스를 부모가 아닌 수행인이라 착각한 교장이 인사를 나누자마자 무례를 범했으나 록시아스는 시종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카밀은 저와 단둘일 적과는 묘하게 다른 록시아스를 만끽하느라 바빴다. 그에 교장은 카밀이 대단히 예쁘지만 다소 산만한 아이일 것이라 함부로 예상했다. 섣부른 평가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면담 자리를 파한 뒤에 교장은 손수 학교 시설을 안내하였고 이 시각부터 카밀이 들어야 할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까지 바래다주었다.
“자, 카밀. 이제 친구들과 같이 공부해야지?”
교장이 카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교실 문고리를 잡았다.
록시아스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반갑지 않은 시간이 왔다. 카밀은 입술을 말아 물며 록시아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에 눈동자를 내려 시선을 마주한 록시아스가 교실 문을 향해 턱짓을 했다.
“가.”
“록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내린 카밀이 은근슬쩍 록시아스의 검지를 쥐었다. 록시아스는 버릇처럼 작은 손을 냉랭하게 내치려다가, 교장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허리를 숙여 카밀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귓가에 닿은 흡혈귀의 호흡은 차가웠으나 도리어 카밀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간지러운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카밀아, 넌 멍청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당장 들어가.”
고조가 거의 없는 말투에 카밀은 절벽에서 추락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쿵, 쿵, 쿵. 점잖은 교복 아래 숨은 가슴이 경박하게 날뛰었다.
“이따가 데리러 올 거야. 알았어?”
물음표를 끝으로 록시아스는 허리를 폈다. 이어 시선이 마주친 교장에게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카밀이 아버님을 참 잘 따르는군요.”
“네, 좀.”
교장의 눈길이 닿지 않는 순간에 카밀의 손을 뿌리친 록시아스는 작은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이따 봐.”
“…네에.”
카밀이 대답한 것과 동시에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록시.”
등교 첫날부터 카밀은 학교가 싫어졌다.
록시아스와 단절된 공간으로 떠밀린 카밀에게 수 쌍의 눈이 모였다. 카밀은 교사로 보이는 어른에게 인사하기 전, 복도가 투영되는 창을 확인했다. 록시아스는 벌써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시선을 처박았다가 도로 끌어 올렸다. 노골적인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빛들을 훑어보았다. 성가셨다.
교사는 카밀에게 마카를 쥐여 주며 직접 이름을 쓰라고 시켰다. 카밀은 귀찮은 시선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면한 백색 보드 위에 까만 마카를 미끄러뜨렸다.
카밀 마리아 힐렌브
지웠다. 다시 썼다.
카밀 마리아 폰 슈바르첸베어그
록시아스에게 부여받은 새 이름을 또박또박 쓰며 카밀은 입꼬리를 구겼다. 미소라기에는 쓰고 찌푸린 표정이라기에는 만족이 표현되어 있었다.
이름을 다 적어 내린 후, 다시금 동기들 쪽으로 방향을 튼 순간. 카밀은 창밖에서 자신을 주시하던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황급히 입꼬리를 얌전하게 폈다. 록시아스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사라졌다.
“여러분.”
교사가 카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카밀은 창밖에 놓아둔 미련을 곱씹으며 지긋지긋한 눈빛들을 마주했다.
“새로운 친구 카밀이랑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요.”
네에! 열여덟 명의 학생들이 교사에게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때였다.
“선생님!”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질문해도 돼요?”
“물론이지요, 도미닉.”
교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미닉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시피 큰 음성으로 물었다.
“쟤, 여자예요, 남자예요?”
교사는 일순 당황하며 카밀을 내려다보았다. 낯선 환경에 놓여 곤란한 질의를 받은 전학생은 무표정했다.
“여자죠?”
“내 생각에는 아니야. 카밀, 남자 맞죠?”
텃세나 놀릴 의도가 아니었다. 전학생이 교실로 들어선 순간 모든 학생이 궁금해한 바였고, 도미닉이 대표로 물은 것이었다. 교사는 도미닉과 아이들에게서 악의를 읽지 못했다.
나도 참, 아이들을 뭘로 생각하고.
교사는 찰나 학생들을 불신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하기야, 눈앞에 둔 사람에게 성별을 묻기란 예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대상이 카밀이라면 영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성별이 모호해 보였다. 아니, 성별이 무의미하도록 아름다운 외모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카밀, 네가 너무 예뻐서 친구들이 궁금한가 봐. 대답해 주겠니?”
학생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인 교사는 혹 카밀이 놀랐을까 싶어 좁다란 등을 살살 쓸어내리며 달래는 투로 대답을 부추겼다. 그러니까 교사조차 카밀이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대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밀이란 이름으로 가늠하자면 남자아이겠지만.
장미 꽃잎으로 절인 듯이 선명하게 붉은 통통한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모두 카밀의 성별이 밝혀지는 순간을 고대하며 침묵했다. 카밀은 짐짓 수줍은 듯이 내리깐 금빛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조리 있게 읊조렸다.
“남자야, 멍청이들아.”
교실은 경악에 물들었고, 카밀은 수업을 마저 끝내지 않고도 록시아스와 재회할 수 있었다.
***
‘슈바르첸베어그 씨. 다시 학교로 와 주셔야겠습니다. 카밀이 첫날이라 긴장한 탓인지 실수를 한 모양이에요. 너무 혼내지는 마십시오. 아이들이란 당황하면 돌발 행동을 저지를 수 있으니까요.’
학교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록시아스는 자세한 경위를 듣기 전이었으나 ‘그럴 줄 알았다’라고 생각했다.
교실에서 쫓겨나다시피 끌려간 교사 대기실에서 카밀은 ‘멍청이’라는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한 학생치고는 매우 얌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오래되지 않아 록시아스가 돌아왔을 때, 교사들과 짤막한 대화를 나눈 록시아스가 차가운 손으로 자신의 손을 거세게 붙잡았을 때, 키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험악하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질질 끌고 갔을 때, 세단에 몰아넣었을 때, 난폭한 운전으로 눈 깜짝할 새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실내로 던지듯 밀쳤을 때, 카밀은 ‘이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은닉했다.
“카밀아.”
록시아스의 음성은 평온했다. 표정은 만취한 사람처럼 나른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를 처벌하는 어른의 기세가 아니었다.
실지 록시아스는 등교 첫날 일탈을 저지른 카밀에게 그다지 화나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카밀을 거칠게 다루었던 이유는 타인들의 앞이기 때문이었다. 엄격한 보호자를 연기했던 것이다.
“아가야.”
또한, 학교를 벗어나고 나서도 카밀을 혹독하게 대한 이유라 하면 카밀이 본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록시아스는 사냥감을 굴복시킬 가장 효과적인 방도가 폭력과 강제력이라고 확신했다.
“말했잖아. 넌 멍청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응?”
흡혈귀의 그림자가 아이의 전신을 완전히 뒤덮었다.
“말을 안 들어서 오늘 수업을 못 듣게 됐어. 너는 하루 더 멍청하게 살게 된 거야.”
카밀은 자신을 위압하는 록시아스를 올려다보았다. 육식 동물에게 제압당한 초식 동물 같은 표정을 준비한 뒤였다.
“록시… 죄송해요. 그렇지만, 애들이 저를 놀려서,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었어요.”
도미닉과 학생들은 그를 놀리려는 의도로 질문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거짓된 변명을 늘어놓은 카밀은 록시아스의 동태를 살폈다. 팔짱 낀 록시아스의 하얀 손을 주시했다.
자신을 밀친, 자신을 스친, 자신을 만진, 저 손.
다시 한 번만….
“멍청이더러 멍청이라고 말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맞기 위해 부적절한 언사를 내뱉었다. 카밀은 재차 ‘그럴 줄 알았다’라고 환희하길 소망했다. 하지만 손바닥은 날아들지 않았으며 들려오는 호통조차 날카롭지 않았다.
“응, 나도 너한테 멍청이라고 하는 거 후회 안 해. 이해해.”
“…록시, 저, 학교 안 다니면 안 돼요?”
비아냥이 전부라 실망한 카밀은 거듭 록시아스를 자극하려 시도했다. 멍청하고 못되고 게으른 아이라며 록시아스가 자신을 혼쭐내 주기를 간곡히 바라며.
일전 파양 당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카밀은 록시아스가 영 칭찬에 인색하니 혼나는 편이 더욱 쉽다고 판단했다. 머리칼을 쓰다듬어지든 뺨을 맞든 록시아스의 손길만 스치면 되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
록시아스는 금발에 파묻힌 작은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단언했다.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어.”
원하는 것을 준다.
유혹적인 문장에 카밀은 가련했던 표정을 단번에 지웠다.
“어떻게요?”
이렇게 내버려 두다가는 카밀이 살인 병기는커녕 연기자로 성장할 듯하여 록시아스는 올바른 계획을 설명해 주기로 했다.
“카밀아, 나는 네가 예쁘고 시키는 대로 잘해서 여기까지 데려와 준 거야.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돼.”
무릎을 접어 앉아 카밀에게 눈높이를 맞춘 록시아스는 머리가 덜 자란 인간 아이를 위하여 조곤조곤 알아듣기 쉽게 일렀다.
“항상 예쁘게 지내. 특히 넌 멍청한 편이라 더 예뻐야 해. 그리고 내가 하라는 것만 해. 내게서 뭔가 바라고 멋대로 행동하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아.”
록시아스가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네가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해 줄 거야. 잘 들어.”
“네에, 록시.”
카밀이 고개를 서너 번 씩씩하게 주억거렸다. 록시아스가 엄지손가락부터 접으며 말했다.
“첫째.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학생이 돼. 오늘 보니까 죄다 돼지 새끼들 같던데 그중에서 일 등도 못 하면 안 되지.”
“네… 꼭 일 등 할게요.”
“응, 못 하면 돼지 새끼라고 부를 거야. 둘째.”
검지가 접혔다.
“목욕도 스스로, 잠도 스스로, 밥도 스스로 챙겨 먹어.”
“…어려울 것 같지만 노력할게요. 그런데 잠은 록시랑 같이 자면 안 돼요? 밥도 록시랑 같이 먹고 싶어요.”
“난 잠을 안 잔다고 했잖아, 그리고 밥도 안 먹어.”
“하지만 어제 밥을 먹으러 간다고 했잖아요.”
“하아.”
왜, 같이 안 자고 안 먹느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뺨이라도 치지.
온순한 이목구비를 달고 감히 다그치는 표정을 지은 카밀에 록시아스는 헛숨이 나왔다. 알고 보니 카밀은 건방지기까지 했다. 예쁜 것 말고는 장점이 도저히 없다.
“이제부터 설명해 줄 거야. 그리고 다신 그딴 표정 짓지 마. 덜 예쁘니까.”
불쾌한 기분을 여실히 드러낸 어조에 카밀은 아차 싶어 내색을 갈무리했다. 더해서 귀여움받아도 모자라는데 덜 예쁘다는 말을 들으니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괴감을 터뜨리려는 듯이 아랫입술을 꽈악 물었다.
록시아스는 중지를 접으며 말을 이었다.
“셋째. 나는 흡혈귀야.”
희멀건해지도록 깨물리던 아랫입술이 놓였다. 카밀이 눈과 입을 동시에 잔뜩 벌리며 되물었다.
“흡혈귀요?”
“응.”
마치 인간이 ‘나는 인간이다’라고 고백하는 듯한 태도였다. 카밀은 연달아 질문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록시아스를 알면서도 거듭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요, 피 마시는 흡혈귀요? 록시가?”
“그래, 그거야.”
먹잇감에게 존재를 들켰던 어리석은 동료들 덕분에 흡혈귀에 대하여 구구절절 밝히지 않아도 되니 편리했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던 흡혈귀들에게 처음으로 기특한 감정을 느낀 록시아스는 하려던 말을 지속했다.
“그래서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어. 아니다, 밥을 먹긴 먹지. 피를 마셔. 그러니까 잠 같이 자자고 하지 말고, 밥 같이 먹자고도 하지 마.”
카밀은 작년, 고아원 동기가 생일 선물로 받았다며 자랑했던 <요괴 이야기>라는 소설책에서 흡혈귀에 대해 읽은 기억이 있었다. 흡혈귀의 특징을 몇 가지 떠올려 보았다. 어떤 것은 록시아스를 보고 적은 듯이 맞아떨어졌고, 어떤 것은 전혀 달랐다.
“그렇지만 록시는 낮에 돌아다녔잖아요? 흡혈귀는 낮에 밖으로 나가면… 죽는데.”
바로 명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난 안 죽어. 마늘, 십자가, 심장에 말뚝 박기… 그런 거 전부 틀렸어. 다 해 봤는데 안 죽었거든.”
이어서 록시아스는 약지를 접었다. 본론이었다.
“넷째. 그래도 난 죽을 거야. 그래서 널 데려왔어.”
이때, 록시아스는 카밀을 만난 이래 처음으로 먼저 시늉 따위의 목적 없이 카밀의 손을 감싸 잡았다. 얼굴은 한껏 내밀었다. 날카로운 콧대와 아직 작지만 오뚝한 콧대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산 자와 죽지 못하는 자의 호흡이 만나 엉켰다. 욕망을 배워 가는 푸른 눈동자와 본능조차 포기해 가는 붉은 눈동자가 대비되는 서로를 담았다.
“카밀아, 네가 날 죽여 줘야 해.”
아찔했다.
그토록 가까이 마주 보길 바랐던 빨간 눈동자와 시선이 깊이 얽힌 순간이었으나 도리어 카밀은 두려워졌다. 무릎을 꿇고 있는 쪽은 록시아스였으나 자신이 패배자가 된 듯한 절망에 휩싸였다. 동물적이고도 본능적인 굴복이었다.
내가, 이런 걸… 어떻게 해야 한다고?
“잘… 잘, 모르겠어요, 록시.”
록시아스가 모두 접고 홀로 남은 새끼손가락으로 카밀의 부드러운 뺨을 훑고 내려갔다.
“아직 몰라도 돼. 공부부터 열심히 해. 똑똑하고 강한 남자가 돼, 아가야.”
그토록 염원하던 손길이었으나 카밀은 기뻐하지 못했다. 도리어 어깨가 움츠러들며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야 날 죽일 수 있지.”
“록시….”
카밀은 급격한 현기증을 느꼈다. 붉은 눈동자 한 쌍이 네 쌍으로, 여덟 쌍으로 퍼졌다.
“저… 어지러, 워….”
흐느적거리는 발음처럼 힘없이 쓰러져 버린 인간을 받쳐 지탱한 흡혈귀는, 웃었다.
한 품에 안기고도 남은 작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이나 쓰다듬어 주었다.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다.
***
카밀아, 나는 네가 예쁘고 시키는 대로 잘해서 여기까지 데려와 준 거야.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돼. 항상 예쁘게 지내. 특히 넌 멍청한 편이라 더 예뻐야 해. 그리고 내가 하라는 것만 해. 내게서 무언가 바라고 멋대로 행동하면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아.
네가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해 줄 거야. 잘 들어.
첫째.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학생이 돼.
둘째. 목욕도 스스로, 잠도 스스로, 밥도 스스로 챙겨 먹어.
셋째. 나는 흡혈귀야. 그래서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어. 아니다, 밥을 먹긴 먹지. 피를 마셔. 그러니까 잠 같이 자자고 하지 말고, 밥 같이 먹자고도 하지 마.
넷째. 난 죽을 거야. 그래서 널 데려왔어.
카밀아, 네가 날 죽여 줘야 해.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카밀은 록시아스가 세운 규칙을 계명 삼아 충실히 이행했다.
우선 카밀은 항상 예쁘게 보이기 위해 애썼다. 록시아스 앞이라면 결코 못난 표정을 짓지 않았으며 머리 모양과 옷매무새가 단정하도록 버릇처럼 거울을 보았다. 커서 못생겨지면 어쩌지, 하고 막연한 고민도 했다. 그보다 더한 고민은 여전히 록시아스보다 작은 자신의 키였다. 나이는 차오르는데 록시아스와의 눈높이는 여전히 먼 듯해서 마음이 퍽 조급했다.
여하간 이러한 고뇌를 품으며 성실한 나날을 보내는 카밀은 아둔함에 치를 떠는 록시아스에게 인정받도록 총명한 학생이 되고자 노력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사건은 베를린에서의 등교 첫날로 끝이었다.
그해 여름 학기 이후로 카밀의 성적표에는 우수함을 나타내는 글자 이외 다른 표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공부보다야 스스로 목욕하기, 잠자기, 밥 챙겨 먹기 따위는 우스울 만큼 쉬운 일이었다. 하나 ‘혼자 하기’ 쉽다뿐이지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거슬러 부쩍 성장한 카밀은 이제 아주 어린 아이가 아닌데도 잠잘 때 록시아스가 옆자리에 누워 자장가를 불러 주길 바랐고, 목욕할 때 같은 욕조에 함께 몸 담그는 상상을 했으며, 밥 먹을 때는.
“록시가 피 마시는 걸 보고 싶어요.”
혼자 식사하는 시간보다 ‘밥 먹으러 간다’라며 외출한 록시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욱 괴로웠다. 이제 저택은 고아원이 아니며 다른 아이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을 알면서도 불안했다. 아니꼽다.
“사냥에 데려가 주면 안 돼요?”
몇 년 전, 록시아스는 자신을 흡혈귀라고 고백하였고 실제로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 준 바가 없지만 그렇다고 진짜 흡혈귀인지 확신할 만한 증거를 보여 준 적도 없었다.
“얌전히 있을게요.”
새벽녘에 나가서 사냥을 하는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는지 직접 목격하지 않고서야 결코 알 수 없을 터였다.
“록시에게 방해되지 않게요….”
카밀은 막 입양되었을 적보다 굉장히 영특해졌으며 순수함을 다소 잃었다.
“네에? 록시.”
이제는 록시아스가 자신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어떤 새벽을 지내는지 두 눈으로 지켜보지 않고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정말 흡혈귀라면 록시아스가 다른 사람 목덜미를 어떻게 물어뜯는지도 궁금했고.
록시아스는 동행을 쉽사리 허락했다.
“옷 입어.”
언젠가는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조를 것이라 예상했던 바였다. 자신의 가슴팍까지 오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던 카밀에게 자신이 흡혈귀라 알렸을 때부터였다. 카밀은 몇 년이나 인내하다가 부탁했을 터였다. 가끔은 성취를 던져 주어도 되었다. 더군다나 몇 년 후에는 흡혈귀로서 삶을 살 카밀에게 미리 간접 체험을 시켜 놓을 기회이기도 했다.
“네! 록시.”
취침을 위해 잠옷을 걸쳤던 카밀은 즉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환복했다. 겨울이었으므로 두꺼운 니트를 입고 나서 두툼한 외투까지 걸쳤다. 록시아스는 추위를 느끼지 않았으나 한겨울에 봄가을 차림이라면 수상하게 여겨지므로 가벼운 코트를 걸친 뒤 가죽 장갑을 꼈다. 전부 검은색이었다. 이제는 사냥할 때 거의 실수하지 않지만, 드물게 피가 튀기도 했다. 밝은색은 혈흔이 여실히 남으므로 검은 의류가 가장 적합했다.
카밀이 막연하게 상상했던 흡혈귀의 사냥이란 무작정 밤거리로 뛰쳐나가 으슥한 골목에 당도하여 행인 중 아무나 골라 다짜고짜 목덜미를 뚫어 피를 갈취하는 것이었다. 하나 록시아스의 사냥은 그리 안일하거나 충동적이지 않았다.
순간 이동으로 거리를 가로지르거나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사냥감을 노리지 않고, 록시아스는 먼저 세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은 카밀은 룸 미러에 비친 흡혈귀의 새카만 머리칼과 빗은 듯 가지런한 눈썹, 그리고 숱이 풍부한 속눈썹에 반절이 가려진 붉은 눈동자를 훔쳐보았다 그는 살기와는 거리가 먼 저런 무심한 낯을 해 놓고, 사람을 죽일 터였다.
도시 외곽으로 향하리라는 카밀의 예상과 달리 세단은 베를린 중심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세단은 알렉산더플랏츠2)에서 정차했다.
“내려.”
“네, 록시.”
새벽이라고는 하나 베를린에서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에서 사냥이라니 말이 안 됐다. 카밀은 록시아스를 쫓으면서도 걷는 걸음걸음마다 의문과 불안을 곱씹었다.
이윽고 흡혈귀와 카밀은 하케셔 마크트3)로 들어섰다. 가게가 죄 영업을 종료한 새벽의 쇼핑 거리는 한산했다. 가로등이 토해 내는 주황 불빛과 드문드문 자리한 선술집의 네온사인만이 밤길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곳이라면 괜찮을 거야.
황량한 가두에 가슴을 쓸어내린 카밀은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록시아스의 걸음이 미묘하게 다급해진 탓이었다.
가장 밝은 빛이 비치는 곳에 가장 어두운 응달이 있었다. 록시아스를 따라 도착한 굴다리 아래에서 카밀은 신문에서 읽었던 구절을 기억해 냈다.
화려한 소비 중심지의 이면. 자본주의에 내몰린 자들이 추위를 벗 삼아 잠들어 있다.
터벅, 터벅. 카밀의 발소리가 굴다리를 울렸다. 록시아스의 구둣발은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카밀은 발짓을 조심스레 바꾸었다. 사냥에 방해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굴다리를 반쯤 지났다. 록시아스가 멈춰 섰다. 카밀은 평소와 달리 록시아스와 스칠 듯 말 듯 가까운 거리가 아닌 조금 멀찍한 곳에서 발을 세웠다. 지금은 더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매서운 겨울바람은 온갖 누더기를 겹쳐 덮은 노숙자들을 비웃듯이 굴다리 아래까지 침범했다. 휘이이, 사나운 소리가 휘몰아쳤다. 추위와 긴장으로 짙어진 카밀의 장밋빛 뺨을 갉고 지난 삭풍이 록시아스의 검은 코트 자락을 펄럭, 흔들었다.
귀가 시려 외투에 달린 모자를 덧쓴 카밀은, 멈춰 선 채로 미동하지 않는 흡혈귀를 주시했다. 깔끔하게 정리되었던 흑발이 왜풍에 흩어져 내려와 하얀 이마를 덮고 있었다. 록시아스의 붉은 눈이 어떠한 빛을 띠고 있는지 모호했다. 그리고….
슥. 가죽 장갑 끄트머리를 당겨 정리한 록시아스가 허리를 굽혔고, 도로 세웠다. 그사이 카밀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흡혈귀의 식사거리가 될 예정이었던 노숙인은 변함없이 록시아스의 발치에 누워 있었다.
록시가 뭘 하는 걸까? 무얼 기다리는 걸까?
그러한 의문을 떠올릴 때였다. 고요하게 잠든 줄 알았던 노숙인이 사지를 꿈틀거리며 경련하기 시작했다. 쪼륵, 쪼르륵…. 물이 새는 것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카밀은 록시아스에게로 달렸다.
흡혈귀와 나란히 서게 된 카밀은 식탁이라기에는 더러운 땅을 내려다보았다. 쪼르륵, 쪼륵…. 새어 나와 땅을 적시는 것은 물이 아니라 노숙인의 목덜미에서 흐르는 핏물이었다.
“…언제, 록시, 언제 먹었어요?”
카밀은 발부리로 다가오는 혈액을 피해 뒷걸음치며 물었다. 입가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록시아스가 오른손에 낀 가죽 장갑을 벗더니, 이마로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방금.”
방금, 언제?
“하지만 못 봤는걸요.”
찰나 눈을 깜빡였던 때를 제하고는 록시아스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카밀은 재차 눈동자만 내려 노숙자를 확인했다. 시체였다. 굴다리가 퍼붓는 어둠에 파묻혔어도 알 수 있었다.
록시아스는 허연 피부가 그대로 드러난 오른손에서 검지만 펴며 읊조렸다.
“잘 봤어야지.”
흡혈귀의 검지가 가리킨 시체에 별안간 불이 붙었다. 죽은 살갗이 녹아내렸고 노숙인의 안위를 책임지던 옷가지들이 뭉그러졌다. 그 아래 깔린 피 웅덩이가 일렁거리는 불덩어리를 비췄다.
탄내가 비강을 침범하기 바로 직전, 록시아스는 오른손에 장갑을 도로 끼며 돌아섰다.
“가자.”
여름철에는 사냥 시 대부분 멀리 나서야 하기에 번거로우나 겨울철은 편리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불을 피웠다가 변을 당하는 노숙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덕이었다.
완전 범죄로 식사를 끝마친 흡혈귀는 굴다리를 벗어났다. 카밀은 잿더미로 변해 가는 시신과 몸집을 불리는 화마를 뇌리에 새기며 흡혈귀의 발자취를 되밟았다. 발소리는 여전히 카밀의 것뿐이었다.
***
카밀의 생애 사상 록시아스는 가장 충격적인 존재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성인이 된 카밀에게 흡혈귀의 식사를 엿본 일은 가장 자극적인 사건이었다.
바람이 불어 검은 코트가 펄럭였다. 표정을 감춘 흡혈귀가 장갑을 매만진 후 허리를 굽혔다. 금세 바로 섰다. 싸늘하게 식은 사냥감이 바르르 떨며 영혼을 잃었다. 그 불가사의했던 사냥 장면은 며칠 동안이나 카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당연하듯 우등생 자리를 도맡던 카밀은 백색 보드 위로 그려지는 어제의 광경에 집중을 빼앗겼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수업이 끝난 뒤였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린 사냥감처럼 혼이 나간 카밀은 맥없는 동작으로 주섬주섬 필기도구를 챙겼다. 강의실을 벗어나기 직전인 교수가 무어라고 당부했으나 흘려들었다. 강의를 함께 듣는 학생 몇 명이 말을 걸어왔지만 듣지 못했다. 타닥, 타닥. 아득한 기억 속에서 타오르는 붉은 불길이 귓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빨간 눈동자가 시야를….
“카밀아.”
카밀로부터 넋을 갈취한 근원인 흡혈귀만이 카밀을 깨울 수 있었다.
“…네?”
어깨를 튕긴 카밀은 되묻듯이 대답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그냥… 오늘 강의에 집중하지 못했어요. 성적이 떨어질지도 몰라요.”
오늘만이 아닐 텐데.
사냥에 동행했던 이후 급격히 미련해진 카밀을 향해 혀를 찬 록시아스는 더 군말하지 않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세단이 학교를 빠져나갔다.
투둑, 투둑. 오전부터 내내 잿빛이었던 베를린 하늘이 기어이 비를 쏟아 냈다. 빗방울이 차창에 곤두박질치고는 미끄러져 내렸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밀은 또다시 무의식을 통해 빗줄기를 핏줄기로 대치시켰다.
투둑, 투둑. 두근, 두근. 카밀의 작은 심장이 점점 박동 세기를 키웠다.
투두둑, 쏴아아…. 비가 거세졌다. 그에 장단을 맞추기라도 한 듯 심박이 더더욱 격렬해졌다.
예민한 흡혈귀 록시아스는 먹잇감이 될 만한 생명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누구이든 간에 그로부터 퍼져 나오는 맥박을 감지할 수 있었다. 카밀의 가슴팍에 파다한 소음이 갈수록 성가셨다. 영영 주름이 패지 않을 매끈한 미간을 일자로 좁혔다. 참아야 할 이유가 없으니 일갈했다.
“시끄러워.”
“록시!”
그와 동시에 카밀이 별안간 내질렀다. 운전대를 꺾은 록시아스가 카밀을 흘겨보았다.
“왜.”
저택에 거의 다다랐다. 회벽 기둥에 달린 철문이 보였다. 세단의 속력이 줄었다. 반면 쏴아아… 쾅, 쾅! 폭우는 더 드세졌으며 카밀의 심장은 더욱 과격하게 내달렸다.
곧 세단이 섰고, 철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카밀이 또다시 외쳤다.
“물어 줘요! 제 목덜미를 물어 주세요! 제발!”
“…….”
대답 대신이라도 되는 듯이 운전대를 톡, 손끝으로 두드린 록시아스는 이어 세단을 철문 안으로 미끄러트렸다. 카밀이 거듭 소리쳤다.
“록시, 나, 록시에게 물리고 싶어요! 록시가 내 피를 먹어 줬으면 좋겠어요…!”
“하아.”
끼익, 쾅. 세단이 멈춤과 동시에 철문이 닫혔다. 같은 때 한숨을 뿌린 록시아스는 운전대를 꽈악, 쥐었다.
“록시! 너무 괴로워요… 계속…!”
“입 다물어.”
“록시가 사냥하는 걸 본 이후로 계속!”
“입 다물라고 했어.”
곤란했다. 록시아스는 검지와 중지를 겹쳐 미간을 꾸욱 눌렀다가 고개를 돌려 카밀을 응시했다. 제게 피를 선사할 존재가 아닌, 반대로 제 피를 선사 받은 뒤 흡혈귀로 재탄생하여 자신을 살해할 의무가 있는 카밀.
‘발작’이 올 줄 알았다면 사냥을 구경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하필 카밀이 ‘발작’에 걸릴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그야 ‘발작’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발작’이란, 흡혈귀가 사냥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흡혈귀의 어떠한 행동이나 흡혈귀 그 자체를 목격한 후에 자신의 혈액을 흡혈귀에게 바치고 싶어지는 현상이었다. 쉽게 말하면 흡혈귀에게 정신적으로 매혹당하여 스스로 먹잇감이 되려 안달 나는 정신병이었다.
록시아스는 발작을 일으킨 먹잇감을 ‘발작자’라 칭했으며, 발작자를 대략 오십여 명 정도 만났다. XXXX년간 흡혈귀를 목도한 자들은 셀 수 없으며 개중 오십여 명 정도란 매우 적은 수였다.
게다가 발작자는 대개 흡혈귀와 마주치자마자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발작 비스름한 낌새도 내비치지 않았던 카밀이 발작자라니, 예상치 못했다.
카밀은 거듭 록시아스에게 자신의 피를 마셔 달라며 애걸했다. 록시아스에게 입양된 이래로 단 한 방울도 눈물을 보인 적 없던 카밀은 눈가와 코끝이 새빨개지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울고불고했다.
차에서 내린 록시아스는 보닛 앞을 돌아 반대편에 당도했다. 차 문을 열자, 좁은 공간에서 자신을 찾으며 숫제 눈물 짓는 카밀이 보였다.
“나와.”
명령하자 카밀은 통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제발 제 목을 물어뜯어 주세요, 따위를 되뇌며 비틀비틀 밖으로 빠져나왔다. 록시아스는 차에서 나온 카밀을 번쩍 들어 둘러멨다. 탁, 다소 신경질적으로 차 문을 닫고는 넓은 보폭으로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현관문까지 걸음 했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 지문을 인식하는 몇 초가 록시아스에게는 영겁 같았다. 그야, 정말이지 신선한 피를 보유한 카밀의 심장이 어느 때보다 격렬한 뜀박질로 존재를 알리고 있었고, 록시아스는 굴다리에서 행했던 지난 사냥을 마지막으로 줄곧 식사하지 않고 굶은 채였기 때문이다. 위험했다.
삑, 개문을 알리는 기계음이 들리기 무섭게 문을 밀어젖혀 실내로 들어선 록시아스는 카밀을 내려놓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카밀이 무릎을 질질 끌어 록시아스의 발부리께로 기어 와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저 너무너무 힘들어요, 괴로워요! 록시…!”
처절하게 흡혈을 구걸 중인 카밀을 내려다본 록시아스는 붙잡힌 쪽 다리를 뒤로 물렀다. 상체가 기운 카밀이 그대로 바닥에 이마를 붙이다시피 엎드려 오열하며 ‘마셔 줘, 마셔 줘, 마셔 줘’라고 반복했다.
카밀의 굽은 목덜미가 코앞에서 바라본 듯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티끌 하나 없는 말간 피부가 투명했다. 꿈틀거리는 동맥이 비쳤다. 꿀꺽. 허기를 간직한 흡혈귀가 입맛을 다셨다.
“…아가야.”
“록시!”
고개를 홱 쳐든 카밀이 진창으로 젖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애원을 보냈다. 록시아스는 일부러 대리석 바닥으로 눈동자를 굴려 카밀의 시선을 피했다.
여태껏 만났던 발작자들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자진하여 식사를 갖다 바치는데 구태여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록시아스는 망설임도, 고마운 마음도 없이 그들의 핏줄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성분은 같아도 사람마다 다른 혈액 맛에 미소 짓기도,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며 갈급을 해결했다. 그렇게 오십여 명 남짓했던 발작자들은 모조리 피가 말라 절명했다.
하나 카밀에게 그래선 안 됐다. 귀한 인재인 카밀은 죽으면 안 됐다. 록시아스는 난생처음 먹잇감을 앞에 두고 고뇌했다. 익숙하지 않은 인내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카밀의 우는 소리와 박동 소리가 겹쳐 생긴 소음이 저택을 채우고 록시아스의 뒤통수를 울렸다.
“록시아스!”
카밀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애써 대리석 바닥으로 처박아 두었던 시선이 도로 카밀에게 닿았다.
“여기, 제 목….”
조금….
“제 목을 물어 주세요! 여기예요.”
꿀꺽. 거듭 마른침을 넘긴 록시아스는 본능을 억누르며 가능성을 셈하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만,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흡혈하면.
어릴 적에는 마셔도 마셔도 배가 고팠던 탓에 사냥감의 피를 깡그리 갈취했으며, 그 후에도 굳이 먹잇감의 목숨을 보전해 줄 필요가 없었으므로 다르지 않았다. 제 배만 부르면 되었다. 그렇게 흡혈귀의 식사는 항시 이기적이고 일방적이었다.
하나 현재 상황은 정반대였다. 허기보다 카밀의 발작 증세 완화를 우선으로 고려해야 했다. 이대로 놔두면 카밀은 흡혈귀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인해지기도 전에 아예 미쳐 버릴 터였다.
정말이지 조금만, 살갗이 크게 찢기지 않도록 송곳니를 조심스레 그리고 얕게 찍어 넣고 혈액은 딱 몇 방울만… 그러면 카밀도 만족하고 자신 또한 흡족할 상호 이타적인 식사가 되지 않을까. 죽음 없이.
식사량을 조절해 본 적이 없었던 록시아스는 과연 혈액 몇 방울만 맛본 뒤 흡혈을 그만둘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하였으나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저대로 카밀을 방치해서는 안 됐다.
마시자.
한두 방울만.
마음을 정한 록시아스는 카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에 파묻혀 물기를 줄줄 쏟아 내는 푸른 홍채를 마주 보았다. 이런 꼴이면 추할 법도 했으나 카밀은 항시 예뻤다. 그래. 이만큼 고운 인재를 실수로 잃는다면 그야말로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카밀아.”
“네, 네에, 록시.”
카밀은 무거운 눈두덩이를 겨우 올리며 흡혈귀를 바로 응시했다. 부디 제 간절한 심정을 공감하여 자신을 흡혈해 주길 염원하면서.
발작에 이성과 본능을 아울러 잡아먹힌 카밀은 목숨 부지에 대한 걱정이며 공포 따위는 깡그리 잊었다.
대개 턱을 젖혀 올려다보아야 했던 록시아스는 코앞에서 마주 보니 더더욱 불가사의했다. 자신을 착취해 주길 원하라고 강요하면서 동시에 흡혈귀에게 스미고 싶은 충동을 종용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목덜미에는 팔을, 허리에는 다리를 감아 당겼다. 단단한 상체에 몸통을 바짝 접합시켰다. 이대로 녹아 록시아스에게 배어들면 좋겠다, 고 소원했다.
그러나 불가능하니 록시아스의 안에 제 피가 돌도록 할 것이다.
카밀은 흡혈귀에게 제 목덜미가 잘 보이도록 고개를 틀어 꺾었다.
“어서, 어서요, 록시….”
쿵, 쿵! 쿵!
“카밀, 아가야.”
록시아스가 입술을 벌려 송곳니를 드러냈다. 냉기 같은 날숨이 뱉어지고, 이어 들숨은 카밀의 맥박음과 함께 삼켜졌다.
턱을 사선으로 기울인 흡혈귀가 속삭였다.
“안 아프게 물어 줄게.”
첨예한 치아가 부드러운 살결을 눌렀다. 찍었다. 뚫고 들어갔다. 일순 몸을 바르르 떤 카밀이 록시아스의 목덜미와 허리를 옥죈 사지에 힘을 풀었다. 팔다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카밀의 육체는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무게는 솜털 같았다. 카밀을 가벼이 지탱한 록시아스는 혈액이 방울, 방울, 맺히는 살갗에 입술을 내렸다. 한 방울, 피가 혀끝에 스민다. 맛이 느껴진다. 달았다. 두 방울, 달콤했다. 세 방울, 황홀했다. 네 방울, 다섯, 그리고 조금만 더….
더 마시면 카밀이 죽는다.
감미에 취해 눈꺼풀을 늘어트렸던 록시아스가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카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급히 거뒀다.
카밀의 가슴을 터뜨릴 듯했던 고동이 멈췄다. 아니,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상태를 살폈다.
이윽고 허공에 대롱대롱 늘어져 있던 사지가 꿈틀, 움직이더니 올라왔다. 이전과 같이 록시아스의 허리와 목덜미를 옭아맸다.
마지막으로 서서히 얼굴을 끌어 올린 카밀은.
“하아, 하아… 고마워, 고마워요.”
미세하게 야윈 듯한 카밀이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록시.”
발작이 멈췄다.
그날 새벽. 록시아스는 한꺼번에 두 사람을 사냥했다.
***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카밀은 짧으면 이틀, 길면 2주에 한 번씩 발작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혈액을 몇 방울 ‘마셔 주었다’. 흡혈된 뒤에는 즉시 발작이 멎었으나 안심할 바는 못 되었다.
문제는 학교에서 터졌다.
강의가 한창 진행되던 중, 카밀은 발작하여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흡혈되길 갈구했다. 식은땀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록시를 불러요, 죽을 것 같아…! 당장 내 피를 마셔 줘!’ 기이한 말을 뇌까렸다.
이상 행동을 보인 학생의 가족은 학교로 긴급 소환되었다.
록시아스는 설마 대학에까지 호출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퍽 짜증이 났으나, 천만다행인지 카밀의 보호자로서 학교를 방문한 날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카밀이 그날로 학생 신분을 벗었기 때문이었다.
카밀 마리아 폰 슈바르첸베어그의 정신 상태는 매우 불안정하여 학교 등 공동체 생활 및 사회활동을 영위하기에 부적절하므로 재택 학습 등 보호자의 보호 아래 시행 가능한 교육 방식을 권유하는 바이다.
정신 의학자 ‘게오르그 비어만’이 작성한 소견서에 따라 교육 기관은 카밀이 무기한 휴학 혹은 자율 학습 중 하나를 선택할 권한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카밀은 휴학도 자율 학습도 선택하지 않았고 망설임 없이 자퇴서를 제출했다. 록시아스는 재택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카밀의 교육을 전적으로 도맡게 되었다. 참고로 ‘게오르그 비어만’은 록시아스가 정신 의학자로 활동할 때 쓰는 이름이었다.
카밀은 그리하여 치를 떨던 일반적인 교육 과정에서 탈피하게 되었고, XXXX세인 보호자 록시아스의 결정에 따라 베를린을 벗어나 독일 최북단에 위치한 소도시 로스톡Rostock으로 이사했다.
북유럽 지역과 가까운 로스톡은 기후가 베를린보다도 사나웠으나 해안을 끼고 있었으므로 바다를 그리워하는 독일인들이 꾸준히 찾는 관광지였다. 덕분에 먹잇감이 떨어질 리 없었고 주민 거반이 노인들이라 소란스럽지도 않으니 흡혈귀와 인간이 내밀히 생활하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카밀의 생활은 거주지와 함께 달라졌다. 베를린에서는 등하교를 제외하고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카밀이 로스톡에서는 오전부터 저녁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록시어스의 지도하에 행동해야 했다.
기상 시간만은 오전 여섯 시로 이전과 같았다. 다만.
“좋은 아침이에요, 록시.”
“안녕.”
이전에는 새벽에 나가 오전 여섯 시가 넘은 후에야 저택으로 돌아와 카밀의 등교를 도왔던 록시아스가 이제는 카밀이 눈뜨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매일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그 변화는 카밀로 하여금 아무리 달콤한 꿈을 꾸었어도 일말의 미련 없이 잠기운을 털어 내도록 했다.
“이제 목욕해.”
“네, 록시.”
록시아스는 항상 같은 명령으로 카밀에게 하루의 시작을 알렸고, 카밀은 같은 대답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목욕은 한 시간 이내로 끝내야 했으므로 카밀이 깨끗한 모습으로 욕실을 나왔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솔직하게, 군말 없이 따르기야 했었지만 사실 이전에는 하루 두 번 목욕이 귀찮고 부담스러웠다. 하나 이제는 달가웠다. 왜냐하면 록시아스가 머리카락을 말려 주었기 때문이다. 로스톡에서 보내는 24시간 중 카밀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록시아스가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한 것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감기에 걸려 앓아누운 카밀에게 혀를 차며 ‘머리를 제대로 안 말려서 감기에 걸린 거야’라며 꾸중하고 나서부터였다.
록시아스가 씻은 뒤 물기를 닦지 않기에 따라 했었을 뿐인데.
한겨울 로스톡을 젖은 머리로 배회하다 걸려 버린 감기가 기분 좋은 결과를 낳았다.
카밀은 머리를 덮은 수건 위로 록시아스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수건이 치워졌고 위이잉, 헤어드라이어 소음과 뜨거운 바람이 관자놀이와 뒤통수에 닿았다. 그것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머리칼과 귓가, 목덜미를 스치는 록시아스의 체온 낮은 손끝 덕분이었다.
머리가 마르면 잠옷에서 일상복으로 환복한 뒤 1층 부엌으로 내려갔다. 식사 메뉴는 록시아스가 정해 주었고, 준비는 전처럼 카밀 스스로 해결했다. 오늘 록시아스는 견과류를 곁들인 시리얼과 우유를 먹으라고 했다.
태생부터 흡혈귀인 록시아스는 사실 인간의 주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맛은 헤아리지 않고 필요 영양소의 수치만 고려했다. 그래도 카밀은 불평 한 번 없이 하루 세 번 록시아스가 시키는 대로 요리를 만들어 말끔히 비웠다.
밥을 먹을 때마다 반대편에 앉아 카밀을 지켜보던 록시아스는 ‘저게 맛있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밀은 음식을 들고, 입 속으로 넣고, 씹고, 삼키는 내내 록시아스와 마주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붉은 눈에 빠져 있자면 음식 맛이 까마득해졌다. 그 탓에 접시가 빈 줄도 모르고 허공에 스푼을 놀리면.
“양치하고 와.”
줄곧 시선이 맞닿은 채였는데 언제 빈 접시를 알아차렸는지 록시아스가 다음 할 일을 말해 주었다. 그러면 카밀은 “네.” 꼬박꼬박 대꾸한 뒤 접시를 식기 세척기에 넣고 1층 화장실로 가 양치를 했다. 양치에 할당된 시간은 10분이었다.
정확히 10분 뒤에 상쾌한 치약 향이 감도는 입 안으로 혀를 굴리며 거실로 나오면 록시아스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카밀은 교차된 긴 다리부터 눈길을 끌고 올라가 셔츠가 늘씬하게 떨어지는 상체,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어 놓아 드러난 빗장뼈 사이, 울대뼈가 툭 불거진 길고 긴 목, 갸름한 턱선… 을 재빠르게 치훑은 뒤 록시아스를 향해 보고하듯 말했다.
“양치했어요, 록시.”
그러면 록시아스는 눈을 한 번 짧게 깜빡였다. 검은 종이를 오려 붙여 놓은 듯한 속눈썹이 말끔한 피부에 붙었다가 들어 올려지고, 새빨갛지만 열정을 품었다고 보기 어려운 만사무심한 홍채가 형광등 불빛을 흡수하며 루비처럼 반짝거렸다.
꿀꺽. 록시아스와 달리 평평한 목울대를 지닌 카밀은 마른침을 넘기며 생각했다.
지금 피를 빨아 달라고 보챌까.
그러고 나서 이내 생각을 물리쳤다.
안 된다. 겨우 그저께 발작을 일으켰다. 너무 자주 발작하면 록시아스가 병약한 자신에게 질려 버릴 수도 있으므로 참아야 했다.
발작. 록시아스는 자신의 어리광을 그렇게 명명했다. 덧붙었던 설명에 의하면 ‘발작’은 흡혈귀로 인해 발병하는 정신 질환의 일종이라고 했다. 록시아스가 여태껏 만났던 발작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질환. 그렇다면 카밀 자신은 발작자가 아니었다. 질환은 낫고 싶다고 낫는 친절한 현상이 아니며 아프고 싶을 때 아플 수 있는 자율적인 행위 또한 아니기 때문이었다. 카밀은 원하는 대로 발작을 일으키며 의지대로 인내할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발작’이라는 질환을 핑계로 꾀병 부렸던 것이다. 이전 실제 ‘발작’의 존재는 알지도 못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자유며 혈액이며 목숨까지 죄다 록시아스에게 헌납하길 바라는 마음조차 속임수는 아니었다.
굴다리에서 돌아왔던 날로부터 줄곧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시달렸다. 정확히는 타인에게 입맛을 다시며 그 혈액을 취한 록시아스에게. 저급한 주제에 감히 록시아스에게 목덜미를 물리는 영광을 얻은 더러운, 사냥감에게…!
거기까지 파고드니 멈출 수 없었다.
그래, 어찌 보면 발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썹은 자꾸만 구겨지고 차마 욕설을 뱉지 못하는 입술이 경련하며 목이 타고, 가슴 안쪽이 오물 묻은 불덩이로 달궈지는 듯했으니까. 지독하게 서럽고 괴로웠으니까.
‘날 물어 줘요! 제 목덜미를 물어 주세요! 제발! 록시, 나, 록시에게 물리고 싶어요! 록시가 내 피를 먹어 줬으면 좋겠어요…! 록시! 너무 괴로워요… 계속…! 록시가 사냥하는 걸 본 이후로 계속!’
계속,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록시아스가 자신 이외 다른 ‘먹잇감’을 가지지 않길 바랐다.
카밀은 ‘발작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질투는 발작처럼 카밀을 뒤흔들었다. 카밀은 채 굳지 않은 땅이었으며 질투는 강진이었다. 카밀은 갈라지고 쪼개졌다. 화사한 꽃과 싱그러운 풀이 꺾이고 보들보들한 흙이 흩어졌다. 지하 깊숙이 숨어 부글부글 끓기만 했던 용암이 터져 나왔다. 욕망이었다.
종래 카밀은 ‘발작’을 이용해 학교를 그만둘 수 있었으며 록시아스에게 종일 양육될 수 있었고 록시아스에게 피를 바칠 수 있었다. 유일한 먹잇감이 된 것은 아니라 퍽 아쉬웠지만.
“…….”
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뒤쫓는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인 카밀이 멀뚱히 서 있었다.
툭, 툭. 검지로 난간을 두드리자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린 카밀이 그제야 그를 뒤따른다. 시선을 물리고 걸음을 재개했다.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는 독서를 했다. 록시아스는 학교에서 배울 법한 과목을 카밀에게 가르치는 대신 카밀 스스로 책을 골라 읽도록 했다.
3층 전체를 이룬 서재는 도서관을 연상케 했다. 개중 카밀의 지적 수준에서 이해할 만한 서적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카밀은 그중에서 하루 한 권을 골라 완독해야만 했다.
세 시 정각이 되면 록시아스가 책을 덮었다. 탁, 책장 닫히는 소리에 카밀 또한 독서를 중지했다.
책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정해진 시간 내로 책을 끝까지 읽었든 읽지 못했든, 내용을 파악했든 파악하지 못했든 간에 카밀은 40분 동안 무엇이라도 떠들어야 했다.
오늘은 노화에 관련한 책을 읽었다. 문장마다 의학 용어가 잔뜩 쓰여 있었으므로 카밀은 검은 것은 글씨이고 흰 것은 종이라는 심정으로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대개 전문 서적보다 소설이나 수필을 선택하던 카밀이 그 책을 펼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라는 세포가 달라서 동물마다 수명이 다른 거래요. 신기해요. 그래서 흡혈귀는 몇 살까지 살아요? 록시.”
감상이라고 하기 민망한 말을 아무렇게나 뇌까리던 카밀은 자신을 눈빛으로 ‘멍청하다’라고 꾸중하던 록시아스에게 불쑥 물었다.
록시아스는 즉시 입술을 움직였다.
“카밀.”
“네.”
카밀은 대답을 기다리며 덮은 책 모서리를 지분거렸다. 록시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봐. 책 대충 읽으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질문을 위해 대충 고른 책을 대충 읽고 대충 감상을 지껄였던 자신을, 록시아스는 알면서도 그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카밀은 책상 아래로 손을 내려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바보!
“…네, 죄송해요. 그렇지만 록시가 질문받는 걸 싫어할까 봐 그랬어요.”
“싫긴 싫어.”
“…….”
“그리고 어설픈 속임수는 더 싫어.”
록시아스는 책상 아래를 흘끗 보더니 턱짓하며 “허벅지 꼬집지 마.”라고 나긋나긋 핀잔했다. 곧장 허벅지에서 뗀 손을 책상 위에 도로 올린 카밀은 흡혈귀는 몇 살까지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속임수를 쓰는 게 싫다, 고….
혹시, 내가 ‘발작’을 연기했다는 걸 록시가 눈치챘을까?
아냐. 그렇다면 분명 혼냈을 거야… 감히 그런 거짓말을 했다면서 날 버렸거나… 거짓말이 들키면 록시가 날 버릴까? 나는 록시에게 버림받을까?
흡혈 당하지도 않았는데 카밀은 온몸에 피가 싹 빠져나가는 듯한 한기에 던져졌다.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록시아스에게 내쳐지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공포였다.
…역시, 록시아스는 내가 꾀병 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야. 날 버릴 거야.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지금 암시를 준 거야. 사과해야 해. 죄송하다고 빌어야 해. 날 버리지 말아 달라고….
공포를 양분으로 먹고 자란 비약적인 상상이 헛된 결심을 부추기고 있을 때였다. 록시아스가 말했다.
“흡혈귀의 수명은 흡혈귀마다 달라. 인간하고 똑같아. 멍청하고 운이 나쁠수록 일찍 죽어.”
“…….”
꼰 다리 방향을 바꾼 록시아스는 고개를 잔뜩 숙인 카밀의 턱을 붙잡아 구태여 자신을 응시하도록 했다. 카밀은 눈물을 쏟아 낼 듯한 얼굴이었다. 자주 접하는 표정이었으므로 록시아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또 울면 뭐 어떻고. 어쨌든 지금 카밀은 조금 혼나야 했다.
“대답해 주고 있잖아. 카밀아, 집중해야지.”
“죄송, 해요.”
“응, 똑바로 잘 들어.”
“네에… 록시.”
뭐가 서러운지, 꿈틀거리는 작은 턱을 놓아준 록시아스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흡혈귀의 수명은 흡혈귀마다 다르니까 정확히 몰라. 그리고 난 한, XXXX살쯤에 죽겠지.”
XXXX살에 죽을 거라니 오만하게 여겨질 법했으나 록시아스는 마음만 먹으면 영생을 사는 존재였으므로 실은 체념적인 단언이었다.
머지않아 카밀은 흡혈귀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쉽사리 죽이기 위해서는 XXXX년 정도 더 흡혈귀로 지내며 힘을 갈고닦아야 할 터였다. 나름의 계산하에 나온 예상 수명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록시가 몇 살인데요?”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이라 조금 놀란 카밀은 록시아스가 한 백 살쯤 됐겠지 예상했다. 모르는 게 없으니 그 정도 나이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외모만 보면… 글쎄. 대학에서 가장 젊었던 강사 또래 정도일까.
최초의 흡혈귀는 카밀의 틀린 예상을 비집으며 나이를 밝혔다.
“XXXX살.”
몇 살?
카밀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네?”
“XXXX살.”
이번에 카밀은 더욱 또박또박 되물었다.
“록시가 XXXX, 살이에요?”
이에 록시아스 짜증을 표출하듯 도로 또박또박 되뇌었다.
“응. XXXX살이야, 아가야.”
카밀은 겨우 두 자리 수의 시간을 산 자신과 수 세기를 살아온 록시아스가 몇 살 차이인지 잠시 셈해 보았다. 학교에서는 수학 시험을 칠 때도 계산기를 사용했으므로 암산에 단련되지 않아 쉽지 않았다. 아무튼 자신과 록시아스 사이에 몇 세기 정도의 간극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록시아스가 나이를 속이지만 않았다면.
아무리 흡혈귀라지만 수 세기를 살았다기에 록시아스는지나치게 젊어 보였다. 카밀은 할 말이 있는 듯 아닌 듯 우물쭈물하며 록시아스를 대놓고 관찰하다가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XXXX살로 보이지 않는 걸요.”
“난 안 늙어.”
“록시는….”
말을 꺼내던 카밀이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궁금한 점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기야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보라고 방금 록시아스가 허락해 주었으니 질문해도 괜찮겠지. 도로 말문을 열었다.
“몇 살 때 흡혈귀가 됐어요?”
대낮에 외출하여도 타 죽지 않으며 관에서 수면을 취하지도 않는 걸 보면 록시아스는 흡혈귀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영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대개 흡혈귀는 본디 인간이었다가 다른 흡혈귀로 인해 인생을 마치고 재탄생된다고 알려졌으니 그것을 고려하여 물었다.
누가 록시를 만들었을까? 아니, 누가 록시를 흡혈귀로 만들었을까?
“하.”
록시는 카밀의 질문이 어리석다는 듯 조소했다.
“그게 왜 궁금해?”
질문을 되돌려 받을 줄은 몰랐기에 카밀은 당황했다.
왜 궁금하냐고? 그건….
“록시가 말하지 않길 원한다면 전 대답을 듣지 않아도 괜찮아요.”
카밀은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결하는 편보다 고분고분하게 굴기를 택했다. 그에 록시아스는 곧장 “그래.” 무정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제 점심을 먹을 시간이야, 카밀아.”
“…네, 록시.”
아쉽고 궁금해하는 쪽은 언제나 카밀이었다.
***
상상하고 상처받고 좌절하는 것 또한 카밀의 몫이었다.
세월의 흐름은 한 사람에게 할당된 시간의 양과 달리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자연의 이치는 만물로 하여금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도록 했다. 인기척. 손길. 꽃잎. 파도. 바람…. 이러한 순리에 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간은 흡혈귀의 삶을 스치며 권태라는 자취를 남겼다. 고아원에서 지내던 카밀을 방문한 시간은 성장이라는 형적을, 록시아스의 눈길 아래에서 지내던 카밀을 관통한 시간은 욕망이라는 얼룩을 남겼다.
얼룩은 점점이 퍼져 나가더니 끝내 카밀을 완전히 적셨다. 온통 축축해진 카밀은 조금만 시린 바람이 불어도 살갗이 찢기는 듯한 추위를 느끼며 떨었다.
불현듯 불어와 온몸을 흔들어 놓고는 금세 자취를 감췄다가 온온한 볕이 비춘다 싶으면 몸집을 불린 채 또다시 들이닥치는 잔인하고 싸늘한 풍랑은, 사랑이었다.
고아원에서의 첫 만남. 아마도 그때 록시아스에게 첫눈에 반했으리라. 겨우 몇 년 전이었으나 벌써 멀찍한 과거를 되짚어 보니 진실이 선연했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몰랐다.
첫 애착은 강풍이었다. 눈을 뜰 수 없도록 만드는, 그래서 무엇도 알아차리지 못한 새 멀리 떠밀려 가도록 만드는…. 도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후에는 이미 늦었다.
강풍에 떠밀려 도달한 곳은 가시밭길이었다. 뒷걸음쳐도 아프고 앞으로 가려고 해도 아팠다.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사지가 긁히고 가슴이 찢겼다. 록시아스를 향한 제 마음을 깨달은 뒤, 록시아스와 한 지붕 아래서 지내는 매일은 카밀에게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 머리맡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록시아스에게 묻고 싶어졌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나요? 내가 잠든 동안에도 나를 보고 있었나요?
목욕을 하면서도 질문은 계속되었다.
내가 눈을 감은 동안에, 록시는 무얼 했나요? 내가 아닌 다른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었나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러면 나는….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 젖은 머리칼을 록시아스가 말려 줄 때도 물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요? 록시아스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말을 저는 믿지 않을 거예요. 그건 너무 불공평해요. 나는 나의 모든 처음을 록시아스에게 주고 싶은데, 나의 처음이 록시아스에게는 처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밥을 먹을 때마다 반대편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며 ‘저게 맛있나’ 하는 표정을 짓는 록시아스에게 고정한 눈빛으로 묻고 또 물었다.
내 피는 맛이 없어요? 내가 발작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셔 주지 않을 만큼? 참을 수 있을 만큼?
기대도 해 보았다.
뭐든지 알고 있잖아요. 혹시 내 발작이 거짓이라는 것도 진작 눈치챘나요? 하지만, 그러니까, 내 피가 맛있기 때문에 모르는 척해 주며 내 피를 마시는 건가요? 그랬으면 좋겠다….
접시를 식기 세척기에 넣고 1층 화장실로 가 양치를 하는 10분 동안에도, 카밀은 거울을 통해 자신이 아닌 록시를 보았다.
예쁘고 깨끗하게 자랄게요. 그러니까 나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록시가 수 세기 동안 만났던 사람 중에 내가 제일 예쁘다고 말해 주세요. 내가 제일 좋다고,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나를 좋아해 줘요, 사랑해 줘요. 내가 록시에게 그런 것처럼.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는 독서를 했다. 일 년이 지나고 나니, 어려운 어휘 대부분이 더 이상 이국의 말처럼 생소하지 않았다. 카밀은 열심히 지식을 쌓았다. 똑똑해지려고 노력했다. 록시아스에게 사랑받고 싶은 열망이 학구에 대한 열정으로 치환되었다.
탁. 세 시 정각이 되면 록시아스가 책을 덮었다. 카밀 또한 독서를 중지했다. 이제는 정해진 시간 내에 한 권을 다 못 읽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책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카밀은 여섯 시간 동안 배운 바를 성실히 피력했다. 일 년 전 이맘때, 미처 답을 듣지 못했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였으므로 그 일을 간혹 떠올리며.
몇 살 때 흡혈귀가 됐어요? 누가 록시를 흡혈귀로 만들었어요? 사람을 흡혈귀로 바꾸려면 그 사람 피를 마셔야 하죠? 맞죠? 그럼, 그 흡혈귀가 록시의 피를 처음으로 마신….
툭. 록시아스가 검지로 책상을 짧게 두드렸다. 카밀은 기계적으로 읊던 감상을 멈췄다. 바깥으로는 결코 꺼내지 못할 것만 같은 상념도 함께 멎었다.
“40분 지났어. 이제 점심 먹어.”
“네, 록시.”
점심은 아침과 식사 메뉴만 다를 뿐 과정은 같았다. 록시아스가 이것을 먹어라, 정해 주면 카밀이 스스로 요리했다. 마주 앉아서 카밀은 배를 채우고, 록시아스는 그런 카밀을 관찰하듯 바라봤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빈 접시를 식기 세척기에 넣었다. 다음은 10분간 양치질을 했다.
오후 다섯 시부터는 운동을 했다. 사실 록시아스는 양육에서 책 읽기보다도 운동을 더욱 신경 쓰고 있었다. 제아무리 카밀이 지식을 쌓는다 한들 수 세기 동안 이론과 경험을 축적한 자신을 넘어서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게다가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서라면 명석한 두뇌보다야 강인한 육체가 더더욱 요긴할 것이다.
나중, 카밀은 때가 되었을 때 만약의 경우 생존 본능이 발동한 자신을 악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어야만 했다. 록시아스는 뇌리에 박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미래 자신에게조차 가차 없을 예정이었다. 방어권 따위 가지면 안 됐다. 카밀에게 이길 수 있어서야 안 됐다, 즉 카밀은 자신에게 패배할 만큼 어정쩡하게 강해서는 안 됐다. 그렇기에 나날이 카밀의 육체를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칼날 같은 냉풍이 휘몰아치는 로스톡의 겨울 바다. 카밀은 매일 그곳에 던져졌다.
파도가 난폭한 괴물처럼 카밀을 집어삼켰다. 카밀은 사지를 휘적거리며 사나운 물결에 대항했다. 록시아스가 지정한 부표까지 헤엄쳤다가 돌아와야만 훈련을 끝낼 수 있었다.
카밀은 기적처럼 부표 위에 서 있는 흡혈귀를 향해 물살을 갈랐다. 물은 금방이라도 동사할 듯 차가웠으나 목표 지점을 보고 있노라면 심장은 식지도 않고 갈수록 뜨거워졌다.
“하아, 하아….”
흡혈귀만큼 창백하게 질린 손이 부표를 짚었다.
무릎을 접어 앉은 록시아스가 부표에 매달려 숨을 고르는 카밀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이제 돌아와.”
카밀은 부표를 밟고 선 록시아스의 발목을 낚아채고 싶었다. 항상.
그러나 명령과 함께 록시아스는 사라지는 줄도 모르게 육지로 가 버렸다.
뭍을 향해 몸을 돌렸다. 높은 파도가 뒤통수를 내리쳤다. 록시아스가 넘겨 주었던 금발이 가닥가닥 젖으며 도로 아래로 처졌다. 바다 한가운데 표류한 듯한 카밀은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고, 물살을 또다시 갈랐다. 새빨간 눈동자가 등대처럼 항로를 밝혀 주고 있었다.
***
이제 돌아와.
그 명령은 언제나 지켜졌다.
드디어 육지에 발을 딛고 섰다. 갑자기 두 다리가 생긴 인어라도 된 것처럼 땅을 밟은 감각이 어색했다. 밀려온 바닷물이 발뒤꿈치를 적셨다. 차박, 차박. 젖은 발바닥이 바다와 조금 멀어졌다. 차박, 차박… 더, 더, 훨씬 더 멀어졌다. 반면 흡혈귀와는 가까워졌다.
불바다에 내던져졌어도 기어이 헤엄쳐 나오도록 종용할 법한 유혹적인 붉은 홍채. 밤바다를 보호색으로 입은 듯한 흑발. 하나 암흑을 물리치는 새하얀 살결….
록시아스가 칭찬을 했다.
‘잘 왔어.’
발가벗은 채로.
‘카밀아.’
‘록시…?’
차박, 차박. 물기 어린 발소리는 록시아스의 것이었다. 석상처럼 굳은 카밀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물줄기와 식은땀이 섞여 카밀의 몸을 타고 흘렀다.
모래가 달라붙은 발가락이 카밀의 발치에 아슬아슬하게 섰다.
‘왜 그러고만 서 있어.’
‘록시, 왜, 왜 벗고 있어요? 추워요… 얼른 옷을 입어요.’
‘아니.’
록시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내 정면을 향한 얼굴이 바람에 흩날리는 흑발에 조금 가려졌다. 카밀은 용기 내 손을 움직였다. 체온을 되찾아 가는 산홋빛 손끝이 흑발을 넘겨 거뒀다. 그리고 록시아스의 관자놀이를 지나던 때.
‘카밀.’
탁, 록시아스가 카밀의 손목을 낚아챘다. 온기 없는 흡혈귀의 손바닥은 겨울 바다 아래보다 차가웠다. 잡힌 손목부터 시작한 소름이 신경을 타고 오르내리며 카밀의 전신을 전율시켰다.
‘떨고 있는 건 너잖아.’
‘손목… 아니, 얼른 옷부터….’
카밀의 목소리는 작은 발질에도 부서지는 모래처럼 나약하게 흩어졌다. 이어 말하는 록시아스의 음성은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흙처럼 축축했고, 부드러웠으며.
‘떨지 마, 카밀아.’
카밀의 발목부터 푹푹 빠져들게 만든 뒤 다리를 휘감고 올라가 기어이는 머리끝까지, 금발 한 올 한 올까지 남기지 않고 집어삼켰다.
‘록시…!’
사지는 결박당했고 입술과 성대만이 자유를 허락받았다. 카밀은 몸을 겹쳐 오는 록시아스를 계속해서 불렀다. 부르기만 했다.
‘록시, 록시….’
그러나 곧 목소리조차 빼앗겼다.
흡혈귀의 입술은, 그가 지닌 색깔처럼 홧홧했다.
“록…!”
눈을 번쩍 뜬 카밀이 상체를 튕겨 세우며, ‘록시’가 되다 만 음절을 질렀다.
바닷가가 아니라 침대 위였다. 몸은 그대로 축축했다. 온전히 식은땀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옷 아래는…. 카밀은 이불을 살며시 들춰 제 하체를 응시했다.
“…….”
새벽 3시 반.
자신의 욕망을 대면해 버린 카밀은 꿈을 곱씹을 새도 없이 수치와 자괴에 두들겨 맞고는 넋을 잃었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서 록시아스에게 미움받을 거야.
록시, 아, 록시아스.
카밀은 혀에 맴돌자 가슴팍이 찌르르한 그 이름을 떠올린 즉시 손바닥을 거두고 주변을 홱홱 둘러보았다.
“하….”
불 꺼진 방 안. 자신은 혼자였다. 카밀은 처음으로 록시아스의 사냥이 달가워졌다. 고마울 지경이었다.
부리나케 침대를 벗어나 욕실로 향했다. 록시아스가 귀가하기 전에 서둘러 몸을 닦고, 속옷을 갈아입고, 이 추태의 증거를 인멸해야만 했다.
***
콘크리트가 두껍고 높게 발린 담장에 길고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막 교도소에서 빠져나온 록시아스는 검은 가죽 장갑을 두른 손으로 툭, 코트 앞섶을 털었다. 미세한 먼지가 신경에 거슬렸다.
식사를 마친 후였는데도 록시아스는 오래 굶주린 것처럼 예민했다. 육체적 포만감이 정신적 만족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맛 좋은 혈액을 접한 지 일 년이 넘었다. 먹잇감은 차고 넘쳤으나 맛이 보장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은 특별식을 먹고자 로스톡 밖까지 왔다. 교도소로 사냥을 나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식습관에 길든 수감자들은 맛이 꽤 괜찮았다. 기억 속에서는, 분명히 그랬다.
젊고 불순한 냄새를 풍기지 않으며 심박 수가 안정적인 인간으로 고심하여 골라 취했지만, 오늘 먹잇감은 그 세심한 고민이 무색해지도록 형편없는 맛이었다. 록시아스는 불쾌한 맛을 물리려는 듯이 혀끝으로 입 안쪽 살을 훑었다. 이쯤 되니 자신의 미각에 문제가 생겼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차를 끌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록시아스는 도보로 귀가할 참이었다. 구둣발을 놀렸다. 한 걸음. 회색 담벼락 어디에서도 흡혈귀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두 걸음. 횡단의 흔적 없이 말끔한 검정 구둣발은 약 30km 떨어진 로스톡까지 한달음에 내도했다.
저택, 2층. 복도에 들어서기 전 록시아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세 시 삼십팔 분. 차 없이 나갔다 온 탓에 평소보다 일찍 사냥을 끝내고 집에 도착했다. 카밀은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오전 여섯 시 전까지 느긋하게 목욕을 즐긴 후 카밀을 깨우면 될 터였다. 뭐, 알아서 제시간에 눈을 뜨긴 한다마는.
…그러면 될 터였는데. 오감이 록시아스에게 틀어진 계획을 알렸다.
카밀은 분명 잠에 빠져 있을 시각. 물소리가 복도까지 나와 록시아스를 마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 냄새, 비누 냄새, 카밀 냄새, 땀 냄새… 랑 이 냄새는.
한쪽 눈썹을 구긴 록시아스는 여유를 거두고, 로스톡까지 왔던 때와 같은 속도로 발을 놀렸다. 순식간에 침실이었다. 이어 욕실 앞이었다. 욕실 문을 지났으며, 세면대에 팔을 담그고 있는 카밀과 눈이 마주쳤다. 필요한 부분만 장밋빛 혈색을 머금었던 카밀이 단번에 얼굴 전체를 붉혔다.
“록, 록시?”
“안 자고 뭐 해?”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
내가 사냥 나가는 걸 고까워하면서, 왜 이렇게 빨리 왔느냐고?
카밀답지 않은 물음이었다. 대답 대신 눈썹을 들어 올린 록시아스는, 쏴아아… 물이 쏟아져 나오는 세면대로 시선을 옮겼다. 찰랑거리는 수면 아래 담긴 것은 카밀의 손목과 천이었다. 제대로 본 것이 맞다면 천은 카밀의 잠옷 바지와 속옷일 테다.
머지않아 눈길을 더 끌어 내린 록시아스는 확신했다. 카밀은 상의 아래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고 있었다.
험한 꿈을 꾸고 깨어나기 쉬운 새벽. 별안간 하의를 손빨래하는 카밀. 그리고 물 냄새와 비누 냄새, 카밀의 냄새와 땀 냄새 사이를 겉도는… 체액 냄새. 아주 오래전 사냥을 위해 종종 찾았던 매음굴에서 맡은 향유 냄새와 엉켜 있던 그 냄새.
감각이 짚어 낸 증거들은 록시아스에게 현재 상황의 경위를 설명했다. 카밀이 구태여 변명할 새도 없이.
몽정.
“카밀아.”
“록시, 저, 이건, 그게….”
몽정이 아니라면 야뇨였다. 하나 야뇨를 저지를 나이는 아니었다. 카밀은 훨씬 어렸던 과거에도 배뇨 실수라고는 몰랐었다.
“설명 안 해도 돼.”
인간 남성이라면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설명을 들을 이유도 없었다.
“깨끗이 씻고 옷 갈아입고 다시 자.”
몽정 후 몰래 뒤처리를 하다 들킨 카밀이 지금 이 순간 얼마큼 창피하고 얼마큼 죽고 싶은가 상관없이 록시아스는 여느 때와 같이 무심히 반응하고는 욕실을 나갔다. 그 맹숭맹숭한 태도는 카밀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 실지 록시아스는 무감했다. 창피를 당한 인간의 심리적 혼돈이란 록시아스에게는 경험 없이 이론적으로만 습득한 지식이었으므로 그가 지금 카밀의 심정에 공감하며 보듬어 주기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쏴아아…. 물이 계속해서 세면대로 퍼부어졌다. 꾸륵, 꾸륵. 세면대에 난 구멍이 넘치기 일보 직전인 물을 꾸역꾸역 받아 마셨다. 수면 아래, 카밀의 손은 바지와 속옷을 꽈악 움킨 채로 정지했다.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보다 훨씬 무거운 수치심이 카밀을 짓눌렀다. 훨씬 커다란 자괴감이 카밀을 후려쳐 으깼다. 카밀은 세면대에 얼굴을 담갔다. 그대로 익사하고 싶었다.
같은 때. 욕실에서 멀어진 록시아스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느긋한 동작으로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토독, 토독. 수면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임에도 졸린 듯한 표정인 채로 셔츠 단추를 끌러 냈다.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무심코 내려다보게 된 자신의 두 다리에서, 욕실에서 보았던 카밀의 벗은 두 다리를 상기했다.
돌이켜 보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카밀은 키가 많이 자랐다. 처음 데려왔을 적에는 허리춤에 겨우 닿는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자신의 콧잔등 언저리까지 올라오는 듯했다. 카밀이 그만큼 성장할 때까지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망’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인간을 양육함에 있어서 자신이 놓쳐 버렸던 부분을 불현듯 발견했다.
시간문제였다. 카밀은 동물 혹은 인간으로서 주어진 본능과 규율에 완연히 눈뜰 것이다. 종족 번식을 위한 감정적 착각, 사랑이라든지. 육체적 행위, 섹스라든지. 종족 보존을 위한 심리적 약속, 연애라든지. 사회적 제도, 결혼이라든지….
사랑, 섹스, 연애, 결혼.
모든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이며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록시아스는 유려하게 뻗은 입매를 단단하게 굳혔다.
성애를 깨우친 카밀은 그를 떠나려고 할 것이다. 본디 멍청하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나. 고아원에서 빼내 먹여 주고 입혀 주고 가르쳐 준 그에 대한 은혜를 모조리 잊겠지. 그를 향했던 순정 또한. 그의 사랑을 안달 냈던 눈빛도 ‘애인’의 차지가 되겠지.
그렇게 괘씸하게 되도록 둘 수 없다.
아, 그 어리바리했던 아이를 내가 어떻게 키웠는지. 그리고 앞으로 카밀은 더욱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다. 완벽하게. 내가 그렇게 만들고 있고, 만들 거니까.
머지않아 카밀은 흡혈귀로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카밀이 사랑을 하게 된다면 아무 소용도 없어진다. 인간들은 나이, 국적, 종족 따위를 뛰어넘는 사랑을 더욱 숭고하게 여기므로. 험난한 사랑을 지속하는 자신에게 심취하므로.
나의 목표이자, 카밀의 임무.
나의 죽음.
겨우 종족 번식을 위한 어리석은 본능으로 인해 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야 안 되지. 절대로.
사랑? 섹스? 연애? 결혼?
카밀은 개중에 어떤 것도 경험해서는 안 되며, 이뤄서도 안 된다. 또한 경험할 수 없을 것이고,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고 있고, 만들 거니까.
굳었던 입매가 시원스레 휘어졌다. 록시아스는 잠시간 멎었던 몸을 움직였다. 가벼운 옷을 꺼내고 입었다.
편안한 차림이 된 록시아스는 침실 문을 넘어오는 그림자를 알아차렸다. 정리를 마친 카밀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 앞을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시침이 조금만 옮겨지면 카밀의 기상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자도록 해야 했다. 록시아스는 드레스 룸을 벗어났다. 곧장 자신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카밀과 마주 섰다.
“카밀아.”
바닥에 시선을 처박고 있는 카밀의 금발 정수리만 보였다. 록시아스는 새삼스레 카밀의 키가 부쩍 자란 것을 실감했다. 어쩌면 곧 자신만큼 클 수도 있겠다.
록시아스는 자신의 발치에 놓인 발도 훑어보았다. 손바닥만 하던 발은 이제 자신의 발 크기와 얼핏 비슷하도록 컸다. 어쩌면 자신만큼 크는 게 아니라, 자신을 넘어설 수도 있겠다. 긍정적인 일이었다.
“카밀아.”
두 번째로 불리자 카밀은 더 이상 바닥만 응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강제당하는 듯 고개를 끌어 올렸다. 올려다본 록시아스는 웃고 있었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네, 록시.”
나는 울고 싶은데. 창피해서 죽고 싶은데.
파란 눈동자가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카밀은 얼른 록시아스에게서 도로 눈길을 거뒀다. 할 수만 있다면 록시아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며칠만, 아니, 몇 시간만…. 그 끔찍하게 수치스러운 조우를 잊을 시간이 필요했다.
도망치고 싶다. 록시아스는 꼭 카밀의 그러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되레 카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왜 울려고 그래?”
속삭이는 것만 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음성이 묻은 이마가 간지러워지는 듯해서 손바닥을 올려 긁적거렸다. 이어서는 아직 눈물이 흐르지 않은 눈가를 문질렀다.
“안 울어요.”
“울려고 했잖아.”
“아니에요, 록시.”
“응.”
록시아스는 긁은 자국이 발갛게 남은 카밀의 이마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종일 카밀을 곁에서 지켜보며 모든 행동을 지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육체를 감시한다고 마음마저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치올린 록시아스가 말을 꺼냈다.
“인간들은 몽정할 때 꿈을 꾼다던데.”
“…….”
“너도 그랬어?”
생리적 현상이었으나 심리가 완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록시아스는 알고 싶었다. 카밀이 꿈을 꾸며 욕구를 배출했다면 그 꿈에 누가 나왔을까.
“응? 카밀아.”
누가 저 귀여운 카밀의 성적 판타지가 되었을까. 얼른 카밀이 말해 주면 좋을 텐데.
죽여 버리게.
나의 순종적인 카밀을 빼앗길 수는 없으니까.
“대답 안 해?”
사랑, 연애 감정.
귀한 카밀은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나만 알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