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레이즈 (8)
* * *
세상에, 이젠 하다 하다 저런 꼬마애를 상대로 경쟁심을 불태우나? 그래도 생각은 있는지 다행히 레이즈의 기억속에서 보았던 상대가 기겁해 할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심한 경우를 보았었기 때문일까? 솔직히 저정도의 위협이라해야 되나? 그래, 거래라 하자. 거래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하인젤도 똑같은 생각인지 프로즐 공녀와 놀아주는 레이즈를 흐뭇해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엣... 그럼 안되겠네... 왜냐면 알렉님이랑 나는 약혼하기로 했거든!”
하하하... 꼬마야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범죄자가 될 생각은 없단다.
‘이미 하인젤이랑 레이즈 데려온 것 부터 범죄 아니냐고?’
어허, 그건 다른거지. 엄연히 그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고, 얘들이 다 크고 그런 생각이 든거니까 나는 정상인거다. 라는 신의 비아냥이 없으니 뭔가 허전한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역시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애들이 뭘 알겠어. 이때는 그냥 부모가 하는 이야기 잘 믿고 잘 듣는게 좋은거지.
“하하하... 공녀님, 꼭 원하지 않는 약혼을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그런건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ㄱ...”
“네! 그래서 말씀드리는거에요! 저는 알렉님이 좋거든요!”
…예? 아니, 아가씨 저희 오늘 처음보는 거잖아요. 뭔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그러시면 제가, 어쩌면 공녀님도 곤란해 지실수 있어요.
역시나 공녀의 당돌한 말에 레이즈는 물론이고 귀엽다는 눈으로 공녀를 바라보던 하인젤조차도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걸 넘어서 어느새 나와 공녀 사이에 스윽 다가와 벽을 만든다.
“...공녀님, 제가 대신 그 아까 반짝반짝거리는 걸 만드는 법을 알려드릴 테니 잠깐 같이 가시죠.”
그 다음 하인젤이 조용히 다가가 공녀의 주의를 돌리려 노력한다. 다행히 공녀도 크게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닌지 하인젤의 말에 기뻐하며 총총걸음으로 따라갔다.
“...”
“...”
그리고 남은 건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이즈와 공작가 측에서 대신 협상을 진행하러 온 집사였다.
“흠 흠... 서로의 의중은 제대로 확인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아, 그리고 공녀님께는 제가 잘 설명드리겠습니다.”
역시 집사는 괜히 된게 아닌지 눈치빠른 집사가 빠르게 자리를 비우려 했다. 여기서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는지도 잘 아는 듯 공녀에게도 설명을 해준다 한다.
“...짜증나.”
나와 단둘이 남게 되니 레이즈의 입에서 나지막히 짜증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일까, 분명 나는 잘못한게 없는데 괜히 눈치보이는 이 상황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치를 봐야할 것 같은 상황에 흘긋 흘긋 눈치를 보고있으니 그게 또 마음에 안드는 건지 레이즈가 혀를 한번 찬다.
“쯧... 아니, 왜 또 눈치를 봐. 자긴 잘못없는거 알면서.”
근데 님이 자꾸 눈치 주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눈치 봐야지…
“아흐, 진짜. 으으, 짜증나 근데 뭐 어쩔수도 없고 으으으. 그냥 얼굴을 뭉개버릴까...”
저기 다 들리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남의 얼굴 뭉개겠다는 말은 좀...
나도 답답하고 그녀도 답답한 상황에 레이즈는 잇소리를 내며 짜증을 내다 그냥 하고싶은대로 하겠다는 건지 내게 와락 안겨왔다.
“...미안.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거야. 마침 시내로 나왔으니 데이트나 좀 할까?”
내게 어리광부려오는 그녀를 받아주고 토닥거리며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원래 어쩔수 없는 상황이 스트레스를 주면 그냥 그 상황을 외면하는게 그나마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그리고 나중에 차분해지고 나서 해결 방법을 모색해야지.
“데이트...? 그게 뭐야?”
아, 그러고 보니 얘네들이랑은 아직 한번도 집밖으로 나가거나 한적이 없었지. 생각해보면 나는 골드르크의 금지옥엽이나 다름없는 취급이었다. 9살때 시장에 갔다 온후로 백작가 밖으로 나간적이 없던 것 같다.
“이따 하인젤 오면 말해줄게. 좋은거니까 기대하고 있어.”
그리곤 나는 레이즈를 껴안은 채로 그녀의 등뒤로 팔을 돌려 현설이와 며칠간 못했던 문자를 나누려 했지만 바쁜건지 아니면 화가 난건지 문자를 읽지 않고 있었다.
연인을 껴안고 있으면서 그 와중에 다른 연인과 대화하려니 뭔가 양심에 찔렸기에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아... 진짜...”
때마침 프로즐 공녀를 보낸 하인젤이 한숨을 쉬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게 안겨있는 레이즈를 보곤 잠깐 멈칫하더니 그대로 걸어와선 내게 철푸덕소리까지 내면서 기대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둔다고 해야되나? 뭔가 쿨한척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컨셉을 유지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쌓여있는 스트레스를 푸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나보다.
뭐, 이러면 나야 좋지 솔직히 저 차가운 느낌의 외모를 가진 하인젤이 이렇게 귀엽게 달라붙는 데서 오는 만족감은 이루 말할수가 없다.
“자, 데이트 가자.”
그렇게 당분간 그녀들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다가 어느정도 진정된 것 같았기에 말했다시피 데이트란걸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근데 그 데이트란게 뭐야?”
“음... 그냥 연인들끼리 서로 꽁냥대면서 노는거야.”
레이즈의 물음에 나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데이트가 극장이나 수족관을 관람하거나 하는 등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도 있지만 나는 그냥 평범하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서로 장난치고 웃고하는게 개인적으로 더 좋았다.
‘그리고 뭐, 공연을 가거나 어디 놀러가는 건 저쪽 가서 하는게 더 낫지.’
이 세상은 교통도 불편하고, 오락도 별게 없다. 특별한 경험은 이곳보다 저쪽에 가서 하는게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시간이 많은것도 아니고.
하지만 공작가의 저택을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하니 그때부터 두 메이드는 귀신같이 거리를 벌려 공손하게 나를 쫓아왔다. 마치 흔한 귀족과 그 수발을 드는 메이드들처럼.
갑자기 왜 그런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밖에 나올일이 없어서 그런거였지 원래 이 상황이 정상인 거였다. 단지 내가 집에 있을 땐 다른 외부인이 없어서 내게 허물없이 대한거였고. 이런걸 보면 그녀들도 아예 사리분별을 못하진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원한건 주종관계가 아닌 대등한 연인관계라고.’
남들이 보고 수군거리면 어떤가, 원래 내 세상도 아니고. 또 그녀들이 내 연인이 아닌 것도 아닌데.
저벅저벅 길을 걷다 갑자기 멈추니 나를 따라서 그녀들도 걸음을 멈춘다. 그 상태에서 뒤를 돌아보니 두명다 살짝 고개를 숙인채 두손을 가지런해 배꼽앞에 모으고 있는게 영락없는 엘리트메이드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바로 성큼성큼 다가가 손을 낚아채...
휙!
낚아채려했으나 두명 다 빠른 반응속도로 내 손을 피했버렸다. 어라? 이게 뭐지?
내가 살짝 멍한 표정을 지으며 둘과 번갈아 눈을 마주치길 잠깐, 이번에도 둘이 거의 동시에 손을 뻗어 내 양손을 낚아채듯 잡아간다.
“아, 아니 주인님, 이게 그 저희가 피할려고 피한게 아니고 그...”
“알렉? 잠깐 내 말좀 들어봐 그 내가 싫어서 그런게 아니고”
그리곤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와다다 말을 쏟아내며 변명아닌 변명을 한다.
“응... 아니 나도 이해는 하지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뭔가 가슴이 쓰라린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러자 레이즈가 다급히 몸을 한발짝 앞으로 내딛으며 내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잡아끈다.
“미안... 괜찮아? 가슴 만질래? 이거 좋아하잖아.”
오... 말랑말랑하고 탱글탱글해
세상사람들 생각하는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기분안좋아? 가슴 만질래? 는 이세상에도 존재하나 보다. 내가 레이즈와 사랑을 나눌때마다 거의 항상 가슴을 만지다 보니 저런 생각이 나온 것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하인젤이 이걸 보더니 잠시 고민하는 척 하다가 내 손을 아래쪽으로 잡아 끄는게 아닌가.
“자... 잠깐, 잠깐만 나 기분 풀어졌어 풀어졌으니까 잠깐 힘좀 빼볼래 하인젤?”
길 한복판에서 가슴만지는 것은 어떻게 변명할수 있다고 해도 그곳은 아니지 않은가 그곳은... 다행히 내가 재빨리 눈치를 채고 버텼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방심했으면 큰일날뻔 했다.
“...왜죠, 저보단 언니가 더 좋은건가요? 왜 제 엉덩이는 안되고, 좋아하시는 언니의 가슴은 그렇게 만져대시는 거죠.”
이미 큰일 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레이즈와 비교하자면 하인젤의 가슴은 조금... 아니, 꽤 작았다. 레이즈가 대충D~E정도라면 하인젤은 B에서 간신히 C정도? 물론 그것도 큰거지만, 내게 있어서 하인젤의 매력포인트는 가슴보다 저 탱글탱글한 엉덩이와 허벅지였기에 관계를 가질때마다 가슴보다 저길 집중적으로 만졌다 보니 하인젤이 저런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그래도 길거리에서 허벅지나 엉덩이는 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내가 처음 생각했던 소중이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아니, 내가 한쪽만 편애할리는 없잖아. 그냥 가슴이면 몰라도 길 한복판에서 엉덩이나 허벅지 만지는건 좀 그래서 그래.”
그제야 여기가 길 한복판이라 생각했는지 하인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나면 그녀들이 입고있는 메이드복은 치마가 발목까지 오는 기다란 원피스였거든.
이 원피스 들은 볼륨감을 살리기 위해 골반 부근에 뼈대를 심어 놓았기에 현실적으로 종아리라면 몰라도 옷 위로 엉덩이나 허벅지를 만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이는 곧 하인젤이 길 한복판에서 치마를 걷어 내 손을 거기에 넣으려고 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저렇게 날 생각해 줬다는게 기뻤기에 각자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이었던 그녀들의 손을 잡는 건 성공했다.
그녀들도 충격효과 때문인지 어느새 내 손을 꼭잡고 나란히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아이고, 도련님. 거기 아가씨들과 참 잘 어울리십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것 같은데...”
역시 이러고 걸으면 연인처럼 보이는 걸까? 귀족에게 말을 거는게 쉽지 않을텐데도 용감하게 호객행위를 하던 상인이 다가와 말을 건다.
‘뻔히 속이 보이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이런게 길거리 데이트의 묘미지.’
무례하다고 생각한 건지 표정이 살짝 찡그러진 하인젤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문질러주며 아까 그 호객행위를 하던 상인의 가판대로 걸어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여기 아가씨들과 어울리는 머리핀, 목걸이, 반지가 있습니다요!”
역시 평민이 파는거라 그런지 값비싼 보석들도 없고, 약간은 서툰 조각들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녀들은 막상 장신구를 보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 여기 이 목걸이랑 팔찌는 어때?”
파상풍등의 위협이 있었기에 귀걸이는 선택사항에서 제외였다. 그녀들의 시선이 반지에 딱 박혀있었지만 반지만큼은 이런 곳 보다는 조금 더 제대로 된 곳에서 맞추고 싶었기에 일부러 목걸이와 팔찌를 추천했다.
‘솔직히 가공기술은 현대가 더 나으니까.’
그녀들도 내가 대놓고 다른 장신구를 말하니 반지쪽에 살짝살짝 시선이 가긴했지만 그래도 말했던 팔찌와 목걸이를 살핀다.
‘아 그냥 반지를 맞출까...?’
저렇게 아쉬워하는 걸 보면 또 사주고 싶어졌지만, 그래도 나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그 자식에겐 다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사실 내가 그녀들을 키운거나 다름없으니 맞지않나? 싶다가도 왠지 그런 생각을 해버리면 내가 쓰레기가 되는 것 같아 애써 생각을 털어냈다.
“아, 이건 어때 알렉님? 이 목걸이 어울려?”
목덜미가 닿을랑, 말랑한 짧은 머리카락을 가져 목덜미가 잘 보이는 그녀였기에 저 클로버모양 장식이 달린 목걸이가 참 잘 어울렸다.
“응, 어엄청 예뻐.”
“히히히...”
내가 거의 척추반사 급으로 칭찬해주니 배시시 웃으며 기뻐해주었다. 캬... 이러면 선물해주는 맛이 나지.
“주인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주인님께서 골라주시면...”
하지만 하인젤은 내게 선물 받고싶다는 것을 확실히 어필하는 조금 더 고단수의 수를 두었다. 마침 나도 그녀와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물방울 모양의 반짝거리는 돌이 박힌 팔찌 하나를 골라주니 그녀가 고개 숙이며 감사해 했다.
조금 딱딱한 반응 아니냐고? 노노,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왜냐면 나와 꼭 맞잡고 있는 손을 격하게 문질러 대며 애정을 표하고 있었거든.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부끄러워서 겉으로는 저렇게 딱딱한 반응을 하는 것 같았다.
진짜 다들 너무 귀엽다니까.
귀족인 만큼 항상 돈은 들고 다녔기에 값을 지불하고 나오니 상인이 고개 숙이며 감사해했다. 근데 소매치기 같은 걸 경계해서 돈은 레이즈가 들고 다녔기에 지불은 레이즈가 하니 뭔가 내가 사주는게 아닌 것 같은 이상한 느낌…
“감사합니다 주인님. 평생의 보물로 간직하겠습니다.”
“아읏… 진짜 진짜 사랑해 알렉♡“
하인젤은 평범하게 인사를 건내오고 레이즈는 내게 안겨오며 살짝 달콤한 숨을 내뱉어 왔다. 설마 그런 기분이 든건가?
그래도 하인젤은 정상이라 다행... 아니다, 그말 취소다. 하인젤의 맞잡은 손이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고, 자세히 보니 하인젤이 살짝살짝 다리를 움직이는게 저거 분명 허벅지 비비고 있는거다.
아니, 이정도로 기뻐할 만한 일인건가...?
그리고 다음은 뭐... 왔을때와는 달리 그녀들이 앞서서 걸으며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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