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103화 (103/104)

〈 103화 〉 103 ­ 키런 왕국 上

* * *

“흐학……!”

은송은 경악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조이는 갑갑한 헬멧. 시야를 가리는 글라스.

은송은 자기 뺨과 몸을 더듬다 고개를 숙였다.

“아.”

은송은 헬멧을 벗고 황급히 욕실로 달려갔다.

“……싸버렸네.”

이제까지 은송이 판타지아를 하고 실금을 한 적은 없었다. 판타지아에서의 여운에 빠진 적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두 가지가 다 해당됐다. 이제는 일상이 된 어른용 기저귀 착용. 근데 지금 그 기저귀가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평소처럼 애액만 흘리고 끝난 게 아니었다. 다리도 후들거렸고 땀이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뱃속에 섹스의 잔상이 남아있었다.

“으와아……”

다시 생각해보면 굉장한 상황이었다.

팔뚝만한 남성기가 뱃속을 휘저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항문 쪽도 범해졌다. 배는 빵빵해졌고 정액이 역류했다. 목이 졸려지고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쑤셔박혔다. 언젠가 세 기사와의 섹스를 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한 명이 너무 거근이라 처음은 뒤쪽으로 받고 나중에서야 앞을 썼지만 이번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써댔다.

“후……”

은송은 자신의 배를 더듬었다. 그러다 문득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정말 예쁜 몸이었다. 곳곳에 늘어진 군살 하나 보이지 않는 늘씬한 몸이었다. 그런 주제에 가슴이나 엉덩이, 허벅지의 볼륨감은 살아있었다. 피부는 깨끗했고 곳곳에 은근하게 근육이 잡혔다.

그리고 이런 몸이 마음껏 유린당했다. 동기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는 거 같았다. 지금 뱃속을 울리는 섹스의 잔흔이 그걸 증명했다.

“이상하지.”

은송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대강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

“……은송아.”

욕실 밖에는 은송의 엄마가 있었다. 분명 오늘은 늦게 들어온다고 해서 안심하고 했다. 애초에 2층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상 잘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냥 마주쳤다면 모르겠다.

문제는 엄마가 들고 있는 기저귀였다.

“너 이거……”

“어, 어……”

은송은 창백해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병원에 가봤니?”

“네?”

“요실금이 있다면 말을 하지 그랬니. 어른용 기저귀를 써야 할 정도였어?”

“아.”

은송은 그 말에 머리를 굴렸다.

“죄송해요. 일시적으로 그런 거라 해서…… 걱정 끼치기 싫었어요.”

“걱정할 수밖에 없잖니. 혹시 게임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 건……”

엄마는 그렇게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너무 게임 탓을 하면 안 좋지. 그래, 많이 나아지긴 했니?”

“네. 괜찮아요.”

“휴, 다행이구나. 무슨 일 있으면 꼭 얘기하렴. 안 그래도 대학 다니느라 힘들 텐데 학업 스트레스는 꼭 풀고.”

“네.”

“……정말 엄마나 아빠가 알레르기만 없었어도 네가 원하는 애완동물은 몇 마리든 데려올 텐데 말이야.”

“아니에요. 그런 걸로 서운해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엄마는 웃으며 은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날이 갈수록 예뻐지더니 마음도 예뻐지는구나. 그래도 다음부터 염색 같은 건 상의하고 하렴? 혹시 문신도 한 건 아니지?”

“아, 안했어요.”

“그럼 다행이구나. 가서 쉬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은송은 엄마가 가버리는 걸 보며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러다 뭔가 찝찝한 마음에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몇 분 뒤 다시 내려왔다.

‘기저귀까지 들켰는데 굳이 더 할 필요는 없지……?’

시간 가속은 다시 1배속으로 맞췄으니 잠깐 외출해도 문제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마트폰을 보며 밖에 나왔다.

“어?”

세영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거기에 적힌 건 특이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다.

‘골드로츠와 만나볼 거냐고?’

*

은송은 대강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해 들었다.

‘난처하네.’

골드로츠와는 더 엮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그가 도움 요청을 보내왔다. 키런의 왕 바틸카스가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러다 딱 떠오르는 게 있었다.

‘검과 그림자들.’

하나는 흡수해버린 마신의 일부 대신 즉석에서 만들어낸 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병대를 원하는 그들에게 넘겨준 그림자 병사들.

둘 중 뭐가 영향을 끼쳤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영향을 끼쳤다면 둘 중 하나는 분명했다.

‘일단 만나봐야 하나.’

문제는 게임 속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만난다는 점이었다. 어째선지 골드로츠가 온라인에서는 만나기 힘들다고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을 제안했다. 그것도 니스를 통해 부탁을 던진 것이다. 정확히는 그림자를 쫓는 별을 통해 버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은송은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연락처를 부탁했다.

세영:괜찮겠어?

혹시 무슨 이상한 짓 하면 말해. 알았지?

이상한 짓. 은송은 키득거리면서 답장하려다 문득 궁금한 게 있었다.

세영이도 변했을까?

당장 세영이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자신도 세영의 변화를 모를 수 있었다. 심지어 동혁이 사진을 보여줄 때까지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세영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무려 온라인에서 몇 번 스킨십을 벌이지 않았던가.

그 생각을 하니 괜히 민망해졌다. 게임은 게임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며 벽을 나누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게임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두근거리다 못해 몸이 후끈댔다.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지금 물어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고 말한 것도 세영이었다. 동혁이처럼 과몰입하지 말란 말을 듣거나 다른 조치를 취할 게 분명했다.

‘뭐, 내가 알기 전에 동혁이가 먼저 알겠지.’

은송은 그렇게 생각하며 결심을 굳혔다.

*

은송은 골드로츠와 만나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제안을 수락해서 그런지 1시간 뒤에 찾아가겠다는 말만 남기고 연락이 끊어졌다.

은송은 카페 언저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았다. 거기에는 은송이 골드로츠와 나눈 대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화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기사에 몰입하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게 이모티콘이 가득했다. 잘못 알고 보면 동성친구랑 대화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수다스럽고 발랄했다. 괴랄하기 짝이 없는 갭. 은송은 웃음을 삼키며 결론부터 생각했다.

‘마검에 취했다.’

지금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왕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했다. 은송에게 은밀히 도움을 청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단 소리였다.

그래서 은송은 그와 만나기로 했다. 시시껄렁한 책임감과 양심의 가책이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그래서 메신저로 넘길 상황에서도 만나기로 결심했다.

‘이상해. 정신력이 강하면 마기에 넘어가지 않을 텐데.’

한 나라의 왕이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하지만 은송은 뮬러 7세 역시 마기에 굴복했단 사실을 잊어버렸다. 하물며 마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검이었다. 억제를 못했을지언정 정제는 완벽했다. 그야말로 고순도의 마기가 집약된 검이었으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만나서 얘기부터 나누고……’

“저기­”

은송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골드로츠와 전혀 딴판으로 생긴 남자가 서있었다.

“혹시 버트……”

“아, 골드로츠­”

골드로츠라 불린 남자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웃음조차 평범하게 보이는 이 남자. 골드로츠의 아바타와 달리 배도 좀 나오고 얼굴도 별로였다.

“박병식이라고 합니다. 그냥 병식이라고 불러주세요.”

“은송이라고 해요.”

*

“처음 메시지로 말씀 드린대로 상황이 조금 안 좋아요.”

“그렇게나요……?”

“네. 저도 몇 번 대면했을 때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나빠지고 있어요. 당신이 준 병사를 대동했을 때도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최근 만났을 때는 그 상태가 더해졌어요.”

병식은 주문한 음료를 들어보였다.

“분명 그는 기사도에 집착하고 있었고 열등 의식도 품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베톰 왕국에 나이트 마스터란 칭호를 뺏기고서도 ‘알카이드 나이트’란 명칭을 쓰며 안위를 추슬렀죠. 누가 보면 자기 위안이라고도 보겠지만 열등감을 갖고 끙끙대는 것보단 낫더라고요.”

“근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요?”

“네. 마치 누가 등을 떠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착하고 있어요. 갑작스럽게 군사 훈련을 감행하고 군비를 늘리고 있어요. 원래 키런 왕국은 일반 병사들도 단련을 시키지만 근래 정도가 심해졌어요. 당장 전쟁이라도 벌일 거 같은 움직이죠.”

“전쟁……”

은송은 손을 꼼지락댔다.

“제가 드린 그 검 때문에 그런 거죠?”

“그건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검에서 손을 떼지 않고 항시 품고 다니고 있어요. 국보이자 왕가의 징표인 『심연』을 대신했다고는 하나 그렇게 지니고 다닐 물건이 아니에요. 점점 심성이 바뀌어가는 시점도 그때부터였으니 대략 맞을 거예요.”

“그러면 제가 드린 그림자 병사들도 위험해요. 당장 떼놔야 해요.”

“……이미 늦었어요. 호위로 둔 황금늑대 기사들도 물렸어요. 저를 포함하여 몇 귀족들이 간언했지만 듣지도 않아요.”

은송은 한숨을 뱉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조력을 구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저는 만트라 대협곡에 있어요. 서둘러 가도 얼마나 걸리지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러자 병식이 고개를 저었다.

“은송 씨가 오실 필요는 없어요.”

“네?”

“제가 필요한 건 은송 씨 휘하의 인물들, 그리고 은송 씨의 지인들의 도움입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저지른 일이고……”

“제 실수기도 하죠. 얘기는 들었습니다. 『심연』이 현재 모으고 있는 세트 아이템이었다면서요?”

“맞아요.”

“사실을 말했어도 드릴 수는 없었을 테지만…… 적어도 그 일의 책임은 당신에게만 있는 게 아니에요. 무엇보다 지금 세트 아이템 수집이 코앞에 있으시다죠?”

“아……”

병식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뻔뻔하게 부탁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현실의 저와 다른 그 세계가 너무 좋아요. 게임 중독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 세계가 너무 즐거워요.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아요. 골드로츠가 있는 키런 왕국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건 막고 싶어요. 부탁드립니다.”

그의 진심은 전해졌다. 그저 게임에 미쳐사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보통 게이머들은 말도 잘 못하고 자기주장만 강한데 이 남자는 아니었다. 판타지아에 푹 빠져 있었고 그걸 위해 자존심도 굽힐 줄 알았으며 예의도 있었다.

이제껏 보아온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은송은 그저 부탁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가볍게 얘기해도 될 것이다.

“얘기는 해볼게요. 그래도 크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들의 도움만 있다면 저희 선에서 충분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본래 이것도 키런 왕국이 감당해야할 일. 오히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병식은 그렇게 말하다 말고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몰입을 잘 해서…… 오프라인에서는 안 그러려고 하는데 조금 격앙됐네요.”

“아뇨. 이해해요. 그만큼 재밌는 게임이니까요. 현실을 도외시하고 집중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 가요……?”

병식의 표정은 오묘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얘기가 많이 나오지 않나요? 현실에서도 그 얘기만 하고 게임에서 벌인 범죄의 대상이 된다든지…… 좀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종종 있잖아요.”

“그게 판타지아 하나에 국한되는 건 아니니까요. 미성년자 사용에는 조금 회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게임이에요. 정말 사실적이거든요. 그건 병식 씨도 해봐서 아시잖아요?”

“……네, 그래서 그래요.”

병식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주 가끔 골드로츠일 때와 착각하고는 해요. 은송 씨가 말한대로 정말 사실적이고 실감나죠. 특정 몇 가지 행동을 제외하면 전부 생생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종종 현실과 혼동하게 되더라고요.”

병식은 은송을 보았다.

“특히 저처럼 현실과 괴리감이 있게 생긴 사람은 도피처로 생각하죠.”

은송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당장 은송 자신도 아바타를 만들 때 현실과 다르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 말에 공감하려다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한 발 늦게 떠올렸다.

“그래서 은송 씨처럼 캐릭터랑 별반 차이 없는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오히려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무서웠고요. 그래서 오프라인에서 만나자는 말도 섣불리 꺼내지 못했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하신 거예요?”

“온라인에서 만나기에는 서로 상황도, 입장 차이도 있으니까요. 은송 씨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최대 배속으로 당겨서 사용해서 오프라인 쪽이 더 나아요. 그래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연락만이라도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힘드셨다면 메시지만으로 얘기하셨어도 됐잖아요.”

“진심이 전해지지 않으니까요. 텍스트로는 제 진심을 말할 수 없으니까요.”

병식은 정말로 힘든 건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이 정도로 뭘요. 부디 일이 잘 풀리길 바랄게요.”

“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은송은 병식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판타지아에 접속했다.

“후아……”

버트는 기지개를 키며 일어났다. 배는 언제 부풀었냐는 듯 잠잠했고 몸도 개운했다. 비린내도 나지 않았고 기분도 좋았다.

“루하다.”

“여깄습니다, 그릇이시여.”

루하다는 그림자에 솟아올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멜그라우 씨는 어디 갔어?”

“근처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여기 아래에 있는 건……?”

“마땅히 그릇을 눕힐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기에 데려왔습니다.”

두 머리의 용, 알터&크레그는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 반응을 보고 루하다가 뭘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지만 그냥 넘기기로 했다. 녀석들의 등이 바위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딱딱하긴 매한가지였기에 내려올 생각이어서 그랬다.

탓­

버트는 가볍게 내려앉고 이름 없는 산 꼭대기에 서있는 멜그라우를 보았다.

“역시 사과해야겠지?”

“그릇께서 잘못하신 건 없습니다.”

“그럴 때는 사과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라고 물어본 거고.”

“알겠습니다. 그래도 그릇께서 잘못하신 건 없습니다.”

버트는 푸하 웃어버리고 일어났다.

“고마워, 루하다.”

“아닙니다.”

“사과하고 올게.”

“다녀오십시오.”

버트는 한 걸음에 날아 산 위에 안착했다. 멜그라우는 저 멀리 협곡을 보고 있었다.

“여기 대협곡이 어떻게 만들어진지 알고 있어?”

“아뇨.”

“그 거대한 리아주크가 손가락으로 콕 찍어서 만든 거야.”

“……네?”

“그리고 이 산은 두 손으로 뭉쳐서 만든 거고.”

버트의 기억에는 리아주크가 그렇게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대는 리아주크와 싸워본 적이 있었고 그 본체도 보았을 테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엄청 컸나 보네요.”

“컸지. 네가 날 밟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컸어.”

“그건 죄송해요. ……다른 것도 죄송하고요.”

“뭐가?”

멜그라우가 돌아보니 버트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게 마기를 쓰면 종종 주체를 못해서요. 멜그라우 씨가 저를 덮친 것도 마기 때문이고……”

“아아, 확실히 갑자기 너를 품고 싶었다. 내 알을 잔뜩 낳게 하고 싶어서 아랫도리가 근질거렸지.”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괜찮고말고.”

“그럼 지금도 죽고 싶으신가요……?”

멜그라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버트는 그의 욕망을 진즉 알고 있었다.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상대의 내면을 훑어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같은 드래곤인 스터그에게도 했으니 멜그라우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부질 없지. 너한테 죽은들 진짜 마신한테 죽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죄송해요. 당신의 욕망보다 제 욕망을 먼저 이루어서.”

“걱정 마. 덕분에 새로운 것에 눈을 떴으니까.”

“네?”

멜그라우는 씩 웃었다.

“꽤나 재밌는 일이었어. 우리 드래곤들은 생식이 급급하지 않아. 스터그처럼 특별한 경우 외에는 아이를 갖지 않지. 당연히 유열을 위한 섹스나 스킨십, 애정 행각도 전부 하지 않아.”

“그런데 왜……”

“왜?”

“전부 제 기능을 하나요?”

“나야 모르지.”

멜그라우는 더 먼 곳을 보았다.

“리아주크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가.”

“드래곤을 만든 것도 리아주크에요?”

“신이다. 다른 잡다한 신과 달리 진정한 창조주지. 당연히 나를 비롯한 이 땅의 모든 걸 빚어낸 게 리아주크다.”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없잖아요? 블랙스타에서나 성신이라 불리고 다른 곳에서는 리아주크가 성신이란 것도 모르잖아요.”

“글쎄. 인간들끼리 떠드는 건 나도 잘 몰라. 굴에 처박혀 산 나보다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샤누흐나 엔실라가 더 잘 알겠지. 아, 아니면 마르가트를 찾아가 보던가. 그 녀석은 아예 한 나라에 눌러살고 있으니까.”

마르가트. 또 다른 드래곤인 듯 했다. 게다가 나라에 머무르고 있는 드래곤이라니.

‘설마 베톰 왕국에 있는 사람인가? 그게 아니면……’

버트는 간단한 추측을 하다 엔실라의 이름을 듣고 그녀를 떠올렸다.

‘아직 길들이지 못했지.’

버트는 엔실라가 네 발로 기는 상상을 했다. 멜그라우한테는 이리저리 깔리고 험하게 굴려지고 싶다면 엔실라는 반대로 험하게 다뤄주고 싶었다. 로이첸의 여왕 케틀라이아는 욕망을 이뤄주기 위해 못 살게 굴었다지만 버트가 바라고 한 건 아니었다. 스터그는…… 논외.

‘나 뭔가 드래곤과 상성이 좋은가?“

버트는 심각하게 고민하다 말고 짐승 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다름 아닌 멜그라우의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크르륵­

“크흐, 오늘은 저걸로 해야겠군.”

“네?”

멜그라우는 가볍게 턱짓했다. 거기에는 늘씬하게 빠진 푸른 드래곤이 있었다. 진짜 드래곤과 비교하면 예쁘장하게 생긴 도마뱀 몬스터지만 그것도 엄연히 보스 몬스터였다. 필리어스라는 이름과 ‘제로 사파이어’라는 이명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필리어스는 멜그라우에게 사로잡혔다. 버트는 비참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키에에엑­

크르륵­

멜그라우는 이전보다 작아진 본체로 필리어스를 덮쳤다. 거대한 도마뱀의 교미 장면은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였다. 난쟁이의 입장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직관하는 기분이었다. 더 놀라운 건 멜그라우가 색마가 됐다는 점이었다.

‘설마 이거……’

버트는 혹시 몰라 필리어스를 덮치는 멜그라우를 확인했다. 그는 이제 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걸 덮치는 괴물이 되었다. 심지어 누구든 관계없이 발정할 수도 있었다. 종은 물론 남녀조차 가리지 않았다. 필리어스가 수컷인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괴팍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쿵­ 쿵­ 쿵­

버트는 마운팅 당하는 필리어스를 보고 식은 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타이밍에 그림자에서 솟아난 루하다가 덤덤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나, 나…… 너무 큰 사고를 친 거 같아.”

“종도 다르고 성도 같으니 알을 배진 않을 겁니다.”

“전혀 안심이 안 되는 말이야……! 이거 괜찮은 거 맞지?”

……

“아으으, 알아, 나도! 멜그라우 씨! 그만해요!”

「 이렇게 기분 좋은 걸 어떻게 그만둬! 크아아아­!! 」

끼이잉­!!

“안 돼요 멜그라우 씨……!!”

버트의 적극적인 만류로 필리어스는 풀려날 수 있었다. 다만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건지 바닥에 널부러져 훌쩍였다.

“분명 죽고 싶다던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변한 거예요.”

「 좋았으니까. 」

멜그라우는 거대한 머리를 디밀며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대로 네 안에 쑤셔박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았으니까.”

그의 다리 사이에서는 여지껏 본 적 없던 흉악한 생식기가 뻗어 나와 있었다. 그건 사람 몇 명을 합쳐놓은 크기였고 당연히 지금의 버트가 받아내기엔 어려웠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건 알겠지만 이런 건 하지 마세요.”

「 무슨 소리냐?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

멜그라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 천만에. 네가 뿜어대는 마기는 분명 리아주크의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달라. 」

멜그라우는 이전보다 작지만 여전히 커다란 앞발가락으로 머리를 콕 찍었다.

「 리아주크의 마기는 창조의 힘. 하지만 네 마기는 창조보단 변질에 가까워. 그렇다고 뿌리를 해치는 변질은 아니야. 줄기에 새로운 가지를 돋아나게 하지. 없는 걸 만들어낼 정도로 디테일하지 못해. 」

버트는 순간 최초의 권속이 된 ‘검은 비늘’과 린베스를 떠올렸다. 분명 그녀도 비슷한 말을 했고 루하다 역시 엇비슷한 설명을 했었다.

“그럼 그게…… 당신의 욕망인 건가요?”

「 아아, 그래. 번식은 귀찮아. 그냥 섹스만 하는 걸로 충분해. 그러니 실컷 즐겨야지. 」

멜그라우는 히죽거리며 가련하게 엎어져있는 필리어스를 보았다. 그의 흉기 같은 돌기 가득한 음경이 펄떡였다.

「 뭐, 그래도 나름 자제는 하지. 나도 이목이 집중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야. 이걸 오래 즐기려면 좀 더 눈을 신경 써야지. 」

“……네, 알았어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오냐. 이리 와라 수퇘지! 방금 못 박은 거에 배는 박아주마!!“

끼에에엑­

필리어스는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버트는 그 소리를 뒤로 하고 황급히 협곡을 벗어났다.

*

“폐하. 다시 한 번 청하옵니다. 부디 황금늑대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그림자늑대들을 물러 주시옵소서.”

키런 왕국의 왕실. 그곳에서 부복하며 탄원하고 있는 건 알카이드 나이트이자 황금늑대 기사단의 단장 넨피스 후작이었다. 그리고 후작과 마주하고 있는 건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있는 바틸카스였다.

“내 분명 말하였을 텐데. 왕의 말을 유심히 듣지 않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듣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전자면 좌천시킬 것이고 후자면 반역죄로 처벌할 것이다.”

“폐하! 분명 폐하께서는 서서히 국력을 키워 당대가 아니더라도 후대가, 그 후대가 못한다면 그 다음이 해내는 걸 목표로 키런 왕국을 키우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저 뿐만 아니라 황금늑대의 기사들에게도 항상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넨피스 후작은 말을 하다 말고 격앙되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말을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몇 주 만에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없었다.

“당신…… 누구야……?”

“시건방진 말이로구나, 넨피스 후작.”

“당신은 내가 알던 위대한 기사 바틸카스가 아니다…… 대체 누구냐!!”

“내가 바로 바틸카스 엔드로만이다. 누가 나를 대신한단 말이냐. 여봐라. 후작이 제정신이 아닌 듯 하니 데려가서 제정신을 차릴 때까지 옥에 가둬두어라.”

“내 스스로 가겠다.”

후작은 말없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온 병사들을 제치고 돌아섰다. 그러다 왕실을 벗어나기 전 바틸카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녕 폐하가 맞다면…… 다시 한 번 생각을 고쳐주십시오. 이건 왕과 신하가 아닌 오래 검을 나누었던 기사로서의 부탁입니다.”

후작은 떠나갔고 바틸카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바틸카스의 뒤에는 새하얀 머리칼의 소년과 눈부신 금발의 미남자가 함께했다.

“그래서 이제 어쩐다고?”

바틸카스는 두 사람를 모르는 눈치였다. 금발의 미남자 샤누흐는 그걸 알고 있는지 소년에게 말을 던졌다.

소년은 손을 들어 바틸카스의 뒤통수를 가리켰다.

“……이 녀석을 이용해서 뭐? 마신을 끌어내자고?”

끄덕.

샤누흐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 소년이 빤히 쳐다보더니 옆자리를 가리키는 걸 보았다.

“엔실라? 걔는 여기 말고 다른 데 있어. 뭐 필요해서 부르면 올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끄덕.

소년은 다시 앞을 보았다. 샤누흐는 그런 소년을 보며 혀를 찼다.

‘백신들은 하나 같이 나사가 빠졌어. 차라리 단답형으로 지껄이는 녀석이 낫지…… 이 녀석은 아예 말도 안 하잖아.’

샤누흐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소년과 함께 앞을 보았다. 그러는 동안 바틸카스는 품고 있는 마검에 착실히 잠식당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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