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18화 (18/104)

〈 18화 〉 18 ­ 윙던 숲 下

* * *

버트와 이디아는 새벽이 끝날 쯤에 돌아왔다. 눈을 한 곳에 못 두는 이디아와 발그레한 버트를 보고서 어떤 반응이라도 나올 법 하건만. 브론트와 엘도트는 묵묵히 잠자리를 정리하였다.

그렇게 얼추 숙영지가 해체되자 머뭇거리던 버트가 셋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루하다를 불러내 모든 것을 밝혔다.

마신의 씨앗을 품은 일, 지금까지 리아주크와 함께 했던 일, 그리고 코르크와 병사들이 죽은 일까지…….

처음 들으면 황당함이나 당황스러움을 보여야 마땅한 말들이었다. 허나 그들의 반응은 밋밋했다. 마치 이미 들었던 얘기를 다시 들었던 것 마냥…… 그러고보면 루하다가 그림자에서 솟아날 때도 그들은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혹시……?”

버트는 짚이는 게 있어 루하다를 째려보았고 루하다는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일단 저의 존재라도 알려야겠다 싶었기에…….」

로그아웃을 한 사이 루하다가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나보다. 버트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셋은 동시에 아무 일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지 않단 건 둔한 버트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뭘 했는지 캐내면 세 사람의 자존심이 상할 거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결심 덕분에 루하다가 세 기사에게 했던 낯뜨거운 으름장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사실 때문에 이디아가 약간의 망설임만으로버트와 몸을 섞게 되었단 걸 알면…….

어쨌든 버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걸 밝히고 숲에 들어섰다.

‘내가 알고 있는 거랑은 많이 다른가.’

‘마신 리아주크’란 말에 갸우뚱거리던 기사들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판타지아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이런 길이…….”

숲길이라면 이골이 난 이디아도 버트의 길잡이에 혀를 내둘렀다. 절묘하게 길을 가린 나뭇가지를 걷어내고, 착시를 일으키는 바위 옆을 꿰뚫어보질 않는가.

윙던 숲의 악명이 과대평가가 된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건 버트가 예전에 얻은 ‘악몽의 성으로 가는 지도’와 니스의 지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걸 알 리 없는 이디아로서는 신들렸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리아주크의 도움이라도 있으신 건가.”

이디아의 중얼거림에 버트가 눈을 깜빡이며 돌아보았다.

“근데 리아주크란 게 대체 뭐죠?”

그 말에 이디아는 물론이고 나머지 둘도 화들짝 놀라 버트를 바라보았다.

“물으신 게 성신 리아주크인지, 아니면 다른 리아주크인지……?”

“어…… 제가 아는 건 마신이고…… 아마, 말하신 성신이 맞을 수도…….”

“맙소사.”

이디아가 놀라서 두 팔을 벌렸다. 귀족 앞에서 신하가 과한 행동을 하는 건 큰 무례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엘도트도 뭐라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어디 가서 그런 말씀하시면 안 돼요. 블랙스타는 웬만한 나라에서도 건드리지 않는 집단이라구요.”

“……그래요?”

이미 블랙스타의 교주를 만난 버트로선 의외의 정보였다. 그저 그런 할아버지인줄 알았는데…….

“그럼요. 자칭 전쟁의 신을 모신다고 하던 크로수스 교에서 블랙스타가 마기를 쓰는 걸 주목하고 파괴하려 했죠. 전력을 다한 충돌에서 블랙스타는 당당히 승리 했어요.당시 크로수스 교는 한 왕국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했고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도 말이죠. 물론 나라가 아닌 일개 집단이 강력한 힘을 가졌으니 수많은 나라에서 견제가 왔어요. 블랙스타에선 포교를 억압하는 행위나 교단에 해가 되는 일만 아니라면 나서지 않겠다고 공표하고 저 머나먼 눈의 나라 스카이 왕국에 총단을 건설했죠. 그러더니 포교 행위 외의 무력행사를 하지 않았다 해요.”

“그럼 그냥 무시해도 되지 않나요……?”

이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에요. 언젠가 듣도 보도 못한 교단에서 리아주크를 이단으로 선포하였다가 전국에서 블랙스타의 교도가 일어나 그들을 멸망시켰어요. 블랙스타의 마성자나 검은 수호자는 일체 출동하지 않았고요. 그것만으로도 블랙스타는 쉬이 볼 곳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들은 리아주크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죠.”

그러니 입 조심 하라 그 말이었다. 설명을 길었으나 어디까지나 이디아의 걱정을 기반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왜 루하다는 마신이라 부르고 여기선 성신이라 부를까요……?”

“동명이인이겠죠. 아무리 신이라도 같은 이름은 있지 않을까요? 제 이름도 흔치 않은데, 이디아란 이름만 두 번은 들었는 걸요.”

“동쪽 대도시에서 작은 꽃가게 하는 아가씨를 말하는 거냐.”

“아, 선배. 그거 얘기 안 하기로 했잖아요.”

“먼저 말 꺼낸 건 너잖아.”

브론트와 이디아가 말다툼을 하는 사이 버트는 ‘내부’에 있는 루하다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리아주크는 정말 둘이야?’

[제가 아는 리아주크는 단 한 분입니다. 다만 부르는 이름이 각기 다른 모양입니다. 역시 제가 알던 것과 현재의 지식은 다른 듯 하군요.]

‘음……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아. 몬스터의 원인인 마기의 시초고…… 으스스한 마기를 다루잖아. 근데 왜 성신이라고…….’

[아무래도 마신보단 성신이란 단어가 인간들이 거부감을 덜 느껴셔 그런 것 같습니다. 그저 칭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지만요.]

그렇게 루하다와 추측에 추측을 더하여 스스로 답을 낸 버트는 윙던 숲의 초입을 넘어 이제 중간까지 갔음을 알았다.

거대한 나무의 끄트머리. 우거진 숲 위로 홀로 우뚝 솟은 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나무를 보며 버트가 말했다.

“저 곳이 슬라임들이 사는 ‘머쿠스’란 나무래요. 저기 부근은 슬라임이 많으니 저기만 피해가면 숲의 절반은…….”

버트는 말을 하던 중에 떠오른 어젯밤일 때문에 얼굴을 확 붉혔다. 그리고 이디아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덩달아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런 둘이 눈을 마주쳤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브론트는 입을 꾹 다물고 그들을 보았고 엘도트는 숲길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어쩔 땐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아가씨 같다가도, 어느 땐 저보다 더 경험 있는 레인저 같네요. 대체 어디서 이런 비밀스런 숲길을 아신 거예요? 거기다 슬라임 서식지까지…….”

“그…… 어디더라……? 그림자……? 별을 쫓는……? 아무튼 그곳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어서…….”

막연하게 던져진 정보만으로 추측하기가 힘든 이디아로선 그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하나 떠오른 곳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대륙의 3대 정보단체와 줄이 대어져 있을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금방 잊어버리곤 숲의 안으로……

안으로…… 진입하였다.

*

[이곳은……]

루하다의 사념이 버트를 건드렸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버트는 주변을 집중하여 보았다. 현대의 식물들과 다른 종들이 많다는 거 말고는 특이할 게 없었다. 혹시 추억의 장소라도 되는 걸까.

‘왜 그래?’

[아는 녀석이 있을 거 같습니다. 설마 이 근처에 자리를 잡았을 줄은…….]

‘와……루하다의 친구인거야?’

[음. 굳이 분류하자면 그렇습니다만…….]

말꼬리를 흐리는 걸 보니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닌 거 같다. 그래도 몇 안 되는 루하다의 지인인데 그냥 지나갈 순 없지 않은가. 궁금하기도 했고…….

버트는 은근슬쩍 찔러보았다.

‘그럼 얼굴 한 번 봐야하지 않겠어?’

[저야 상관없지만 그릇께서 조금 곤란하실 겁니다.]

‘으응?’

[장난기가 많습니다.]

‘장난기?’

[마침 녀석의 일족이 나타났군요.]

그 말과 함께 세 명의 기사도 자그마한 빛덩이를 보았다.

반딧불? 그렇다고 보기엔 아직 밝은 낮일뿐더러 그 빛도 훨씬 선명했다.

빛덩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을 때눈이 좋은 이디아가 먼저 말했다.

“요정입니다.”

“요정?”

“예. 이종족 중에서도 가장 온순한 종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따금 길을 잃은 모험가들을 도와주거나 위험으로부터 구해주기도 하죠.”

버트로선 ‘요정과의 만남’이 판타지아에선 드문 확률로 벌어지는 이벤트임을 몰랐다. 그저 이디아의 설명에 와…… 하고 감탄만 했다.

눈에 부담되지 않는 은은한 빛.

버트가 손을 뻗자 빛덩이는 포르르 날아와 손끝에 앉았다. 그렇게 빛이 사라지고 요정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요정은 그 모습이 인형 같았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나뭇잎으로 엮은 옷 너머로 보이는 평평한 가슴과 짧게 친 머리칼. 언뜻 보면 남자처럼 보이는데.

투명한 피부와 깨끗한 눈동자. 가는 팔다리와 거칠지 않은 몸의 곡선을 보면 여자의 느낌도 들었다.

중성적인…… 그야말로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거기에 투명한 잠자리 날개가 파르르 떨리니 신비로움까지 더해져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예쁘다…….”

날갯짓을 할 때마다 반짝이는 가루가 퍼졌다. 요정은 생글 웃으며 뒷짐을 졌다.

순간 니스가 생각난 버트는 요정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보았다.

부드럽다…… 그 이전에 손에 찔리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손바닥에 내려앉을 때 닿았던 맨발도 그랬다.

요정의 감촉은 상상 이상이었다. 정신이 탁 풀리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리어페어리 일족입니다. 제 친우였던 슈어드가 책임지고 있는데…… 이 세계에선 요정(페어리)이라 불리는 모양입니다.]

이 요정이?

루하다의 친구가 책임지는 일족치곤 참으로 사랑스럽게 생겼는데…… 의외라고 느껴져서 속으로 킥킥 웃었다.

[슈어드가 있는 곳은 이곳에서 멀지 않을 겁니다. 그 전에……기사들은 잠시 이 근처에서 머무르게 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슈어드 역시 리아주크의 추종자인만큼 마기가 강해 그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들의 서식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기사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진 못할 겁니다.]

버트는 루하다에게서 들은 걸 그대로 얘기해주었다. 처음엔 마뜩치 않아하던 엘도트도 주군인 그녀가 하겠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위험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란 안부만 남길 뿐이었다.

버트가 루하다에게서 들은 대로 말했다. 요정 하나에게 ‘리아주크의 앞길을 축복하는 자를 만나게 해다오’라고 했더니 다른 요정이 나타나 길을 안내했다.

기사들은 버트의 손에 앉았던 요정이 이끌었다. 그들은 깊은 나무숲으로 옮겨졌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거야?”

버트의 물음에 요정이 고갤 돌렸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귀여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쉬어가는 숲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릇이시여. 그곳이라면 여행자들이 편히 쉬다갈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부담스러운 존칭에 그러지 말아달라고 말하려다 엘도트가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그저 충실히 길잡이를 하는 요정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숲길은 계속 똑같은 풍경만 보여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알록달록한 빛이 피어오르는 나무들이 나타났다.

“와아…….”

버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쁜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루하다가 옆에서 스륵 일어나며 말했다.

「리어페어리가 사는 곳엔 마기뿐만 아니라 자연의 힘, 마나, 생명력, 영혼, 감정의 에너지 등 온갖 힘이 몰려듭니다. 그것들이 충돌해서 이런 모습을 보이죠. 어느 정도 강한 이들이면 괜찮겠지만 어수룩한 녀석들은 휩쓸리고 맙니다.」

“그렇구나.”

사실 무슨 말인진 모르겠다. 그냥 이 곳에 이상한 힘이 모여 몽롱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만 이해했다. 루하다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는지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더 걷기를 몇 분. 버트는 아까 보았던 빛덩이들이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

수 백, 수 천에 달하는 빛. 이렇게 많은 요정이 있었는데 왜 지금까지 못 봤는지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 중에서 다른 빛덩이에 비해 몇 배는 큰 빛이 버트에게 날아왔다. 빛이 걷히고 드러난 건 버트의 얼굴 정도 될 법한 키를 가진 소년이었다.

검녹색의 신사복. 어깨나 상의 끝단이 뾰족하여 나뭇잎을 연상케 하였다. 그래서일까, 자연의 잎사귀를 양복으로 맞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귀엽게 생겼다.’

크고 둥그런 눈 속에 담긴 푸른 눈동자가 버트를 비추었다.

‘이 여자가?’

서로 다른 생각.

소년은 머리 위에서 아무렇게나 퍼진 짧은 금발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대충 넘겼다.

그야말로…… 부잣집 도련님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가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한 손은 등 뒤로, 다른 한 손은 가슴께에 두며 고갤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리아주크의 씨앗을 담은 그릇이시여. 저는 리어페어리를 이끄는 족장이자, 리아주크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축복하는 엘………… 슈어드라고 합니다.”

“실버트리. 버트라고 불러. 그보다 엘슈어드라고?”

“아, 아뇨. 슈어드라고 불러주세요. 하하하. 요즘 어린 것들이랑 놀다 보니 말실수가 잦아져서…….”

슈어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루하다를 흘긋거렸다.

“자,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저희의 마을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응­”

슈어드의 인도를 받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버트는 시야가 꺼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아래로 푹 꺼지는 몸뚱이…….

‘바닥이 꺼졌어?’

그녀가 마지막 기억을 최대한 끌어냈을 때 그건 분명 함정이 분명했다. 그 찰나의 순간 보았던 슈어드의 미소는…… 아주 해맑았다.

*

“정말이야 그거?”

「그러니 말조심해라. 내가 눈을 감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아직 밝아지지 않는 시야 때문에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언뜻 들어보니 루하다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거 같았다. 하지만 띵한 머리로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신의 힘이 쭉 빠져서 기운이 없었다. 꼭 힘겨운 일을 하고 뜨거운 물에 담겨진 거 같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

……?

이상하다.

아무리 감각이 둔해졌다지만 손가락에 뭐가 휘감기는 걸 착각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미끈하고 뜨뜻한 것이…… 그래, 혀…… 혀 같았다. 눈에 힘을 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조금씩 배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루하다와 슈어드. 일단 그 둘이 보였다.

버트의 흐릿한 초점에 슈어드가 눈앞까지 날아와 방긋 웃어주었다.

“안녕, 그릇. 기분은 좀 어때?”

“기분……? 기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손과 발에서 간질거림이 확 느껴졌다. 버트는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보여야할 팔다리 대신, 꿈틀거리는 거대한 민달팽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무슨 짓을 당한 거지……? 다시 제대로 살피니 사지는 민달팽이가 잡아먹고 있었다. 몸은 속을 판 나무에 앉혀져있었다. 버트의 깜짝 놀란 얼굴을 본 슈어드가 배시시 웃더니 그 작은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걱정 하지 마. 체액의 산도를 최대한 낮췄으니까. 아무리 내가 못된 녀석이라지만 창조주를 모시는 그릇을 부술 정도로 막 되먹진 않았다고.”

그 말 그대로 민달팽이들…… 그러니까 판타지아에선 슬라임이라 불리는 녀석들이 입을 오물거렸지만 그녀의 팔다리는 멀쩡했다.

대체 내부는 어떻게 되먹은 건지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사이를 핥아대는 듯한 감촉이 느껴졌다. 오돌토돌하고, 미끈미끈하고, 따뜻하고…… 하여간 설명하기 어려운 촉감이었다.

마치 여러 사람이 하나하나 입에 머금고 빨아대는 느낌이랄까……? 여태껏 난교를 펼치면서 예상치 못한 곳을 애무 받은 적은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소외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핥아지는 건 처음이었다.

이상해…… 오묘한 기분이 휘감아오더니 그건 곧장 흥분으로 뒤바뀌었다.

“하하, 뭐야. 슬라임한테 빨리는 건 처음이야? 아닐 텐데…….”

슈어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그 자그마한 얼굴을 눈앞에 갖다 댔다. 능청스러운 눈웃음이 훤히 보였다.

“숲에 오기 전에 새끼 슬라임들로 즐겼던 거, 난 다 알고 있는데 말이야.”

“으엉?! 엉?!”

버트가 물개처럼 놀라며 반응하자 슈어드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더니 날개를 파르르 움직여 가슴 앞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정말 내부의 씨앗이 쾌감과 반응한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릇의 감정과 연결되어있지.」

“번거롭네 그거. 어느 세월에 키우려고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손짓을 하자 몸을 가리고 있던 「밤 기사의 갑옷」이 사르르 사라졌다. 장비 자체가 사라진 게 아니라 벗겨진 것이다. 루하다도 하지 못했던 갑옷의 조절을 그가 해버렸다.

그 사실에 놀라기보단…… 난데없이 옷이 벗겨진 것에 더 놀랐다. 예쁘게 빛나고 있는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창피함에 소리치려 했다.

“쉿.”

“그웁?!”

그리고 그러기도 전에 입 속으로 작은 슬라임이 들어와 난동을 부렸다. 입을 범하기로 하는 것처럼, 몸의 절반을 쑤셔 박은 슬라임이 이리저리 꿈틀댔다. 그러다 버트의 혀를 집어삼키고 빨아들였다.

말이 막힌 버트는 콧소리로 답답함을 표현했다.

“그나저나 놀랍네. 리아주크 님의 육신까지 입고 있고 말이야. 정말 선택받은 몸인가.”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그보다 너무 거칠게 하진 마라.」

“왜? 이런 거 좋아하는 거 같은데.”

슈어드가 그렇게 말하며 그 작은 손으로 버트의 유두를 꽉 쥐었다. 손가락이 좀 남긴 했지만 유두가 손가락에 꼼꼼히 감싸졌다.

이런 식으로 유두가 잡혀본 적이 있던가. 버트는 눈을 반쯤 감고 바들바들 떨었다. 입에선 슬라임의 체액과 그녀의 침이 뒤섞여 줄줄 흘러내렸고 음부는 이미 흥건히 젖었다.

“정말 번거로운 몸뚱이구나. 모시기 힘들지 않아? 정 뭣하면 내가 맡아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아마 갑갑해 하실 테니, 내가 모시는 게 낫다.」

“너가 그렇게 말한다면…… 아, 혹시 페슈­ 음음. 걔도 만나러 가는 거야?”

「그릇께서 바라시고 계시니 만나야겠지. 애초에 이번 여행의 목적지도 거기다.」

“말리진 않겠다만…….”

이렇게 대화하는 와중에도 슈어드의 무심한 손길은 버트의 유두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 사소한 자극에 버트는 미쳐갔다.

매일 루하다가 풀어주고 있다 해도 조금씩 욕구불만에 쌓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형태의 능욕은 버트에게 너무 자극적이었다. 특히 몬스터에게 당한다는 그 인식은…… 뭐라 말하기 힘든 맛이 있었다.

“숲에서 몰래 섹스를 하다가 걸린 놈들 붙잡아다 걷지 못할 정도로 혼내준 적이 있어. 난 음란한 거 되게 싫어하거든. 그럼 엄청나게 밝혀대는 그릇한텐 어떻게 해야 될까?”

귀여운 얼굴로 하는 말 치곤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버트가 발딱 선 유두가 슈어드의 손에 이리저리 기울여지는 걸 보다 그의 말에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슈어드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애들한테 물어볼까.”

곳곳에서 요정들이 솟구쳤다. 언뜻 보기에도 수 십은 되 보이는 그 수에 놀랐다. 요정들은 버트의 앞에서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창피해……!

누가 봐도 순수해 보이는, 그것도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요정들 앞이다. 이렇게 알몸이 보여지니 양심에 찔렸다. 범죄 심리라 해야 할까…… 해선 안 되는 짓을 해버리는 그 기분에 평소보다 몸이 달아버렸다.

슈어드는 그걸 의도했는지 싱글거리면서 요정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말소리는 버트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릇께선 왜 옷을 벗고 있나요?]

[나라면 창피할 텐데…… 그보다 왜 슬라임한테 먹히고 있는 거죠?]

[저번에 숲에서 달라붙어있던 그 사람 같은 건가요?]

[우와, 엄청 큰 게 흔들흔들…….]

[슬라임은 왜 먹고 계세요? 맛있어요?]

공개 처형인가.

버트는 팔다리를 슬쩍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힘이 빠진 몸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건가.

‘혀가 너무 오돌토돌해……’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몸이 뜨거워지는데 그걸 막을까. 부끄러움에 푹 절어있던 버트가 입 안의 슬라임을 오물거리면서 야릇하게 웃었다.

“너희가 놀아주지 않겠니? 몸 여기저기 손으로 문지르고 혀로 핥아주면 참 좋아하신단다.”

[손으로요?]

[에헤헤…… 꽃가루 따먹듯이 핥으면 되나요?]

[우리 전부 달라붙어도 괜찮을까요…….]

귓가에 꽂힌 말을 해석하기도 전에 슈어드가 마음껏 놀아주라 외쳤다. 요정들은 기쁘게 웃으며 버트의 몸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슈어드의 말대로 그들은 하나같이 보들보들한 손바닥으로 문지르거나, 앙증맞은 혀로 핥아댔다. 그 간질거림이란 쾌감으로 번지기 충분했다.

무엇보다 요정들의 그 순수한 말이란…….

[이거 봐. 몸에서 물이 나와.]

[움. 물은 짠데 살은 달아.]

[그릇의 몸 기분 좋다. 냄새도 좋고…….]

[여긴 엄청 질겨. 봐봐.]

[그러게? 나무열매 같이 생겼는데, 잡아당겨볼까!]

[슬라임 맛있어요?]

[와아, 나 토끼가 싸는 거 봤어. 저거 오줌 맞지?]

흐르는 땀을 핥고, 유두를 잡아당기면서, 음부에서 흐르는 애액을 갖고 오줌이라 하는 등, 버티기 힘든 말들이 오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몸은 조금씩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그때 슈어드가 한 마디 거들었다.

“거기 다리 사이에 갈라진 데 보이지? 거기 안에 리아주크 님의 씨앗이 담겨있다. 그러니 그 부분은 조심히 만져. 들어갈 생각도 하지 말고.”

이때 잠깐 쾌락이 멈추었다. 피가 식어버린 게 아니라,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한……

삼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였다.

그리고 이 표현은 정확했다. 요정들이 음부 앞으로 몰려들 만져대기 시작하자 버트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으니까!

면봉 같은 손으로 힘을 합쳐 음부를 벌렸다. 불룩한 음핵을 이리저리 매만지기도 하고, 끈적한 음순에 입을 대고 맛보기도 했다. 결코 현실에서 겪을 수 없는 판타지 섹스가 펼쳐졌다.

그저 만지기만 해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 있구나. 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액을 흩뿌렸다. 요정들은 흥건히 젖은 몸을 서로 핥아주며 좋아라 했다.

버트는 정신적으로 지쳤다. 그러나 아직 몸은 쾌락을 원했다.

버트는 흐린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들의 농락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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