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12 화투 섹스
좁고 지저분한 여인숙이었다.
거리 쪽으로 나 있는 조그만 창문에는 누군가가 자장면을 먹고 입술을 닦은 듯한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파란색의 커튼이 매달려 있었다.
그 밑에는 에나멜이 드문드문 벗겨져 나간, 밤색의 텔레비전 장식대 가 있었고.
이미 단종이 되어 버린 십사인치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먼지가 뽀얗게 묻어 있는,
그야 말로 역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여인숙이었다.
"이 방에는 물도 안 주나 봐."
혜미는 방안에 들어오는 순간 취기가 왈칵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구석에 있는 이불 앞에 앉아서 생수 회사의 로고가 붙어 있는 빈 피티 병을
흔들어 보이며 이불에 상체를 눕혔다.
"그래도 화장지 인심은 풍부한데."
혜미보다는 덜 취했지만 어느 정도 꼭지까지 술이 오른 민규가 포장지가 벗겨져 있지 않은
두루말이 화장지를 들어 보이며 킬킬거렸다.
"꿈 도 꾸지마. 날 어떻게 해 볼 생각이 있다면 일찌감치 찬물 먹고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꺼야."
혜미는 이불 위에 비스듬히 눕혔던 상체를 폈다.
쭉 뻗었던 발을 오므려서 파란색의 양발을 되는대로 벗어서 뚤뚤 말아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청바지 밑으로 뻗어 나온 길고 가즈런한 발가락이 제 기능을 다 해 버린 형광 불빛에 투명하게 빛났다.
"난 술을 마시면 설사를 하는 버릇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머리가 나빠서 이해를 할 수 없으니 풀어서 말 좀 해 줘라."
민규는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를 꺼냈다.
담뱃불을 붙여 한 모금 길게 내 품으며 이불에 기대에 팔베개를 하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혜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께 까지 닿은 긴 생머리가 보기 좋게 펼쳐져 있었다. 시선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졌다.
희고 긴 목 밑으로 탄력 있는 가슴이 봉긋이 솟아올라 있었고,
군살이 없는 아랫배 하, 펑퍼짐해 보이는 골반을 감추고 있는 청바지의 지퍼 부분은
패드 하나 정도를 끼워 놓은 것처럼 불룩 튀어 나와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나쁜 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봐, 난 리바이벌은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혜미는 손가락으로 양미간을 누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코웃음을 쳤다. 취하려고 마시는 술에 정도가
어디 있으며, 주법을 따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리바이불인지. 리바이벌인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단어고, 너 정말 그냥 잘래?"
민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혜미와 섹스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비록 말투는 밤거리를 방황하는 야화 같지만, 그녀의 서늘한 눈매에서 언뜻언뜻 느낄 수 있는
말 할 수 없는 슬픔 같은게,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어서 였다.
젠장, 이 놈의 술은 얼마나 마셔야 질리게 되나.
혜미에게서 관심이 사라지지 목구멍이 간질간질 해 지면서, 술이 고파졌다.
전화를 해서 맥주를 두어 병을 시켜서 마시고 잠을 자야 하나, 아니면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은데
좀 귀찮더라도 밖에 나가서 소주와 쥐포를 사다 마시고 잘까 하고 별 볼일 없는
갈등에 휩싸여 있는데 혜미가 입을 열었다.
"샤워는 하고 자야겠지."
"옷 입고 샤워할래?"
민규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창문에 늘어진 커튼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자장면 자국이었다. 어떤 년 놈 인지 모르지만 살모사 보다
더 몰상식 한 인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빠 너는 샤워 할 때 옷 입고 하냐?"
혜미는 눈거풀이 무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잠을 떨쳐 버리려고 눈을 꼭 감고
고개를 흔들며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이번엔 오빠냐? 어느 때는 자식이고, 기분 내키는 데로 군.
민규는 혜미를 쳐다보지 않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술을 한 병 마셔야 겠다는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혜미는 어느 정도 취기가 갈아 앉는 것 다는 기분 속에 눈을 뜨고 민규를 쳐다보았다.
반 곱슬머리에 서늘한 눈매, 크고 오뚝 솟은 코, 단단해 보이는 입술과 턱,
전체적으로 아랍인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지퍼를 열어 놓은 잠바 속으로
보이는 티셔츠를 입은 가슴에는 적당한 근육이 붙어 있었고.
역삼각형의 상체와 잘 조화를 이룬 하체는 길게 뻗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민규의 말대로 돈 있고 빽만 있으면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을 장식하고 있어야 할 용모였다.
하지만 그건 그의 영원한 꿈 일 뿐이고 창녀촌에서 기도나 하고 있던 신분을 생각하면,
서른 이전에는 백수를 면할 팔자는 못된다고 생각하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첨 보냐.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게. 술 한잔 더 할래. 난 그냥 못 자겠다."
민규는 마침내 좀 귀찮더라도 호주머니 사정을 감안해서 전화로 주문하는 것보다는
밖에 가서 소주를 사 오는 쪽이 났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고 벌떡 일어섰다.
"또 술이냐?"
"넌 그 말버릇 좀 고쳐라 오뉴월 하루살이 라는 말도 못 들어
봤냐. 너보다 나이가 한 살만 더 먹어도 이런 말은 안 한다. 그
런데 뭐냐. 난 네가 엄마 품속에서 응아 하고 빠져 나올 때, 똥
오줌 다 가리는 두 살이었다. 알았냐. 너 보다 오빠란 말이다."
민규는 잠바의 지퍼를 채우고 투덜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오빠. 텔레비전 좀 틀어 주고 나가라."
"저게, 필요할 때 만 오빠래."
민규는 오빠란 말에 기분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되돌아와서 텔레비전의 전원 스위치를
턱 눌러 주고 방안에 들여놨던 신발을 들고 방문을 열었다.
"재 들 왜 저래?"
텔레비전에서 지지직거리는 잡음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남녀의
뜨거운 신음 소리가 숨가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혜미는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포르노 장면이 결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는
얼굴로 상체를 폈다. 윗목에 민규가 두고 간 담배와 라이터가 있는 곳으로 가서 담뱃불을 붙였다.
재떨이를 들고 다시 이불이 있는 곳으로 가서 비스듬히 누웠다.
미국판 포르노 영화 였다. 정식 루트로 수입한 테이프가 아닌지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아,
무슨 뜻인가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헛간의 집단 위에서 섹스를 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가 매우 흥분해 있다는 것, 가끔은 여자가 노오, 노오를 연발하고 있는 것을 봐서.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발광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