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22/22)

뭐랄까, 그다지 특별할것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덤덤한것도 아닌, 그저, '이렇게 되었구나'라는 느낌만 있었다. 단지 몸이 지나치게 달아올라서 조금이라도 더 이상태로 놔뒀다간 이성을 잃을것 같다는 생각도 막연하게 들었다.

아니, 이성따위, 이미 예전에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 아무 기억도 없는 나로서는 전에는 어땟는지 모르지만 처음의 성관계다. 그렇게 소중할것도, 지키고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덤덤할뿐.

"아읏…흑!"

지금의 나 못지않게 눈앞의 남자는 당황하고는 있지만 그렇게까지 싫어하는듯한 기색은 없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눈치채고 있는듯 이 상황이 어쩔수 없다는걸 알고있는듯 보였다.

단지 지금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들로 복잡하다.

'마음껏 범해지며 느끼고 싶어 조금 더 아래쪽을 만져줘, 핥아줘'

이성을 유지할수가 없었다. 별로 유지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그저 떠오르는 성적 욕망들에 몸을 맡기며 그저 리드하는대로, 때로는 리드하며 몸을 움직인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원래 이런 여자였구나라고 생각을 굳혀간다.

"흐윽!"

"큭!"

삽입의 느낌은 고통과 함께 말로 표현할수도 없는 엄청난 쾌감이었다. 처음보는 남자와의 성관계치고는 나쁘다고만은 할수 없었다. 질벽에 쓸리며 느껴지는 쾌감은 그저 짧은 신음이 되어 터져나온다.

"앙! 흑! 으…응! 아앙! 아! 아파!!"

"아, 아팠어?"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던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춘다. 고통은 멈췄지만 동시에 쾌락도 멈췄다. 아니, 그게 들어와있는것만으로도 그곳이 찢어질것처럼 아파와서 견디기 힘들었지만 뭐랄까, 아쉬웠다.

-도리도리

"아…아 계속! 계속해줘엇… 흐윽!"

당장에라도 기절해버릴것만같은 쾌감이 온몸을 휩쓴다. 머리속이 쾌락으로 가득하고 이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아프고 성적 쾌감과 동반되어서 점점 더 몸이 달아오른다, 입술이 겹쳐진다. 혀와 혀가 얽히며 생전 처음느끼는 부드러움이 혀에 닿는다. 너무 좋아서 미칠것만 같았다.

"좋아! 좋아… 조금… 조금 더!… 흐윽! 악!"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몸은 너무나도 그 행위를 원한다. 남자는 허리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이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듯 내 행위에 몸을 맞춰온다.

머리로는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보는 여자와 섹스라니, 하지만 지금 몸은 알고있다, 나는 이녀석을 원하고 있다. 피부도 뜨겁지만 안은 화상을 입을것처럼 더욱 뜨거웠다. 마치 내걸 잡아먹기라도 할듯 꽉 잡는듯한 느낌은 지금 이상태만으로도 사정해버릴것 같았다.

"아악! 항! 응! 읏…"

얼굴을 찡그리며 있는대로 교성을 내지르는 녀석은 내 몸을 끌어안고 자기 나름대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지만 왠지 어설펐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약을 먹은것도 아닌데 나또한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도덕성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떠나서 지금 몸을 움직이는 일에만 집중한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쾌감이 엄청났다.

"아응! 아앗! 윽! 아앙!"

여자는 섹스할때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고 했던가, 확실히 지금 녀석의 모습은 견딜수 없을정도로 아름다웠다. 확대된 동공, 살짝 벌려져있는 입술과 흐트러져있는 모습은 남자의 본능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젠 오히려 내가 더 주체할수 없게 되어서 허리를 흔든다. 끝부분에 내 물건이 닿을때마다 몸이 움찔거리며 그곳이 강하게 조여온다. 이젠 더이상 참을수 없다.

"앗! 아앗! 아아아아아앙!"

녀석은 두번째 한계에 다다른건지 날 끌어안으며 최대한 자제하려는듯 하지만 귀여운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녀석의 몸에 사정해 버렸다.

"큭! 으…"

머릿속을 찌르듯이 올라오는 강렬함,쾌락 그 모든것들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마들어버려서 뭐가뭔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절정에 달하고 뒤따르는 사정, 이름도 모르는 여자의 몸에 잔뜩 해버리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녀석은 또다시 가버린건지 몸을 움찔움찔거리며 떨고있었다. 입으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것과 함께 잔뜩 상기된 얼굴과 풀린 눈동자는 많이 지친듯 보여서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도 지쳐있어서 옷을 다시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녀석을 침대에 끌어올려 눕힌 뒤 나도 그자리에 누워버렸다. 단지, 그 후의 걱정이 어떻건 간에 지금은 자고싶다.

[어제는 아무일도 없었던거야, 알았지?]

다그치듯이, 혹은 주입시키듯이 녀석에게 말하고 나와버렸다. 어제가 마지막 휴일이었기에 오늘은 출근해야만 한다, 왠만하면 조금 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어제의 그 일때문에 늦잠을 자기도 했고 왠지모르게 엄청나게 부끄러웠다. 처음보는 여자랑 같이 자버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제는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무감각한 그 모습 때문에 더 부끄러워졌는지도 모른다.

회사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떠오르는 잡생각들때문에 심란해 죽을지경이었다. 게다가 안에다 해버렸으니 임신하면 어쩌지?

머릿속을 맴도는 수많은 고뇌와 혼란때문에 어느새 입구를 지나쳐버렸다는것도 깨닫지 못했다.

"오랜만이에요 성현씨~"

"오늘 좀 늦었네?"

"아…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건 없고, 그래, 푹 쉬었어?"

날 바라보는 한 남자와 한 여자. 둘다 회사의 일원으로 한명은 사장 이름은 밝히길 꺼려하고 그저 사무실의 사장석 앞에서 당당하게 '사    장' 이렇게 되어있는 사람이다, 한명은 비서쯤 된다고 해야하나? 행정적 일을 맡고있는 윤지아 씨였다. 모두들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따지자면 이 회사에서 제일 어린건 나다.

"네, 덕분에… 그런데 다른 분들은…?"

"다 나갔어, 일주일이나 쉬었더니 일거리가 밀렸다고"

"자꾸 전화가 와서 전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요…"

우는소리를 내며 울상을 짓는 지아 누나는 26살로 보자면 젊은 편이었지만 이 회사의 일원들은 거의 지아 누나 또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회사원은 그리 많은건 아니고 딱 중간정도랄까.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포상휴가 줄테니까 적당히 하라고"

"네에~"

사장님 앞에서는 꽤나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내 앞에서는 마치 자상한 누나처럼 변해서는 이것저것 조언해주는걸 좋아했다. 지아 누나는 이 회사에서 나하고는 꽤 친한 편이었다. 다들 친하기는 하지만 우린 같은 학교 출신이라 그런지 더 빨리 친해졌다. 이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때 적응을 쉽게 한것도 지아 누나 덕분이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지아 누나는 예쁜 편에 속해서인지 더 호감이 갔던 것일수도 있다.

"그나저나 무슨 걱정있어? 얼굴이 걱정투성인데?"

이사람의 성격중 하나가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무슨일이 있다고 하면 이것처럼 나서서 참견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 일을 하는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사람 표정만 봐도 근심걱정을 다 알수 있다고 가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아무것도 아니긴, 뭔일 있다고 얼굴에 다 써있는데?"

이 넓은 오지랖 때문에 내가 이사람을 이성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게 되었다. 왠지 계속 상대하다보면 옆집 아줌마같다고 해야하나? 혹시라도 내 생각을 알게되면 실례겠지만 진짜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이제 두 시점으로 나눠서 전개가 될거고 정현이는 가끔 등장할 예정입니다

그나저나 계절이 바뀌어서 연재가 되다니

재미있는 일이었다.

혼자 가만히 있으면서 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제 앞으로 뭘 해야할지.

하지만 해결되는건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 무언가를 해결할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것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것에 대한 허망함만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달그락

식기와 밥통을 만지작거리며 할 생각은 분명 아니었다. 배가 고픈것도, 그렇다고 해서 요리가 하고싶은것도 아니었다. 그저 뭔가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움직이고 있었다.

"……"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 잊지 말았어야 할 것, 또는 잊고싶었던 것들이 있었다. 그런게 있었다는 막연한 생각만이 떠오른다. 가장 중요한게 무엇이고 필요없는게 무엇이던 간에 지금 난 그 모든걸 송두리째 잊어버린 상태였다.

-드르륵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세차게 날아들어왔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전부 송두리째 일깨워지는 느낌, 난 조금 더 깊게 '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신분증이 들어있을만한 지갑이나 핸드폰같은건 하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미아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난 길을 잃었다. 이 세상이라는 너무도 크고 버거운 길 아래에 혼자 남겨져 버렸다. 분명 있을 것이다. 날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리가 없었다. 부모님이 없다 하더라도 내 이름정도는 알만한 사람이 분명 있을것이다. 난 주저할것 없이 문밖을 나섯다.

창가에 섯을때와는 비교할수 없을정도의 추위가 온몸을 찌른다. 하지만 돌아가기는 싫었다. 겨울임에도 아파트 단지내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이 많았고 어린아이들과 그 보호자일것이라 짐작되는 사람들이 한데모여 수다를 떨고있었다.

난 그 한켠에 앉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시선들이 스쳐지나가고, 또다시 다가온다.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과 만나고, 많은 사람이 날 보기를 원했다. 혹시 그중 하나, 날 아는사람이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정은 그저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듯한 식이었고 잠깐 머무르고는 곧 떠나갓다. 손가락에는 점점 감각이 없어지고 숨을 쉬기도 버거워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걸까, 엉덩이가 아파져올때쯤.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누나, 여기서 뭐해요?"

"……몰라"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던 남자아이가 쪼르르 다가와서 내게 물었다.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대답이었다. 내가 무슨짓을 하고있는건지 나 자신도 모른다. 단지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것 뿐이었다.

"어린이는 저기가서 놀아, 누나는 머리가 아파"

"어린이 아닌데요, 그리고 머리가 아프면 집에가서 자야죠"

"누나는 집이 없어 그러니까 어린이는 친구들이랑 놀아 얼른"

코흘리개 꼬맹이는 아니지만 밉살맞게 생긴 녀석이었다. 상대해주기도 귀찮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금 내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생각이라는건 한시간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서 내겐 너무도 길고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재미없어요 쟤네들이랑 노는건"

"나도 어린이랑 놀아주기는 싫어"

"놀아달라는거 아니에요 그냥 옆에 앉아있을게요"

그러면서 어린이는 내 옆에 앉았다. 귀찮게 조잘거리지도, 그렇다고 해서 멍하니 가만히 있지도 않았다. 단지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내 손에 쥐어줄 뿐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온다.

"전에 병원에 가서 미친 사람을 본적이 있어요"

"……"

"그런데 누나랑 표정이 똑같아요"

"지금 내가 미쳤다는거야?"

-부릅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자 녀석은 잠시 찔끔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에요"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 꼬마는 할 말이 없었고 난 말을 하고싶지 않았다. 멍하니 벤치 옆의 나무기둥에 머리를 대고 생각을 한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난 미친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사실을 이런 어린애를 상대하면서까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손가락이 얼었고 핫팩은 이미 식은지 오래였다. 난 핫팩을 어린이에게 건네고 자리를 일어섯다. 역시나 날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너무 오랫동안 앉아있던것 때문인지 눈앞이 아찔해졌다. 꼬맹이가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집앞까지 걸어가자 그제서야 난 집이 몇층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

그대로 계단에 쪼그리고 앉았다. 돌계단의 시린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추위도 점점 더 심해지고 몸은 으슬으슬 떨려왔다. 사람들이 올라갈때 한번, 내려올때 한번씩 날 위아래로 훑고 지나간다. 용기있게 내게 무슨 문제인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는게 다행이었다.

얼음장같이 몸이 차가워지고 눈앞이 흐릿해질 때쯤이 되어서야 집주인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

"……"

솔직히 말해서, 자존심이 상했다. 집주인은 내게 생긴 문제가 무엇인지 말 안해도 알고있는듯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날 일으켜서 엘리베이터에 타고는 11이라 써있는 버튼을 누른다. 11층, 그 숫자는 내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멍청하긴"

"뭐? 그럴수도 있는거지! 어젠 정신이 없어서 못본거야!"

내가 발끈해서 쏘아붙이자 남자는 당황한건지 약간 흠칫해 보였다. 사실 화를 내는건 맞긴 하지만 내 자신의 한심함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훈훈한 온기가 느껴졌다.

"너 보일러 안껏냐? 나갈거면 끄고 나갔어야지"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춥잖아"

"그래도 돈이 얼마나 나오는데! 너 보일러 돌리는데에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기억안나"

그 말로 집주인의 말을 일축시켜버리고 난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일단은 뜨거운 물로 몸을 덥히고 싶었다. 얼음장같이 몸이 차가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앞으로는 끄고다녀, 알았어? 보일러 시간도 세시간으로 맞춰놔"

"시끄러! 내맘이야"

보일러 하나 켜는것가지고 쪼잔하게 저러는걸 보면 재차 생각하는거지만 정말 큰 위인은 되지 못했다.

계간지 도착

며칠이 지났다

기억이 없어진다는건 그렇게까지 드문일은 아니다. 짧으면 며칠 안에 기억이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재수없으면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 또한 내포한다. 내가 아는 사실은 아니었고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나의 보호자가 한 말이었다. 왠지, 날 어떻게든 빨리 떼어내고 싶어하는 태도로 보아 그런 사례로 날 위로한다기보다는 스스로 자위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나 또한 머릿속에 구멍이 뻥 뚫린듯한 기분을 안고 언제까지나 이런 기약없는 생활을 하고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호자의 저런 태도를 보고있노라면 언제까지나 눌러앉아 살고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요리 할줄 몰라?"

-끄덕

"쓸모없기는… 밥 축내지 말고 요리라도 배워서 앞으로 내가 돌아오면 밥이라도 차려놓는게 어때?"

"…싫다면?"

-척

그녀석은 말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러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것도 서러운데 생판 모르는 남에게 괄시받으며 살아갈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니 억장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책임진다고 했잖아?"

내가 할수있는 유일한 변명이었다. 얼마 전, 녀석은 그 색마 의사에게서 날 데려오면서 책임지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녀석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음흉한 미소를띄우고서 천천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진짜로 책임져줄까? 육체적으로 말이야"

"……원한다면"

내 순순한 발언에 녀석은 뜨악한 표정이 되어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한번 굴린 몸, 더 굴러간다고 해서 별로 아까울것도 없지 않은가?

"너한테는 무슨 농담을 못하겟다"

"그런 저질농담을 하니까 그렇지" 

내가 투덜거리자 녀석이 이채롭다는듯 말했다.

"저질이라는건 아네?"

"시끄러워…"

대화는 단절되었다. 공통의 화제가 없으니 대화가 이어지기도 힘든게 당연하다. 게다가 난 별로 대화하는걸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고 녀석 또한 그랬으니 우리는 참으로 심심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진짜 요리학원 다녀보는건 어때?"

"싫어"

일축에 거절하는 날 보며 녀석은 입맛을 다셧다. 하긴, 힘들게 일하고 집에 왔는데 인스턴트 식품이나 먹어야 한다면 그것도 굉장한 고역이겠지. 뭐 일을 한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성이지만 말이다.

"기억은 어때? 돌아오는 기미가 보여?"

"저언~혀"

"너 아주 팔자 좋다?"

-씨익

비꼬는 그 말투에 나는 느긋한 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물론, 이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다만, 구멍이 뚫린것처럼 가끔 쿡쿡 쑤시는곳이 있긴 하지만. 육체적인 만족과 정신적인 만족, 어떤것이 더 중요한지는 모른다. 다만 중요한건 지금 육체적으로는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것이었다.

"최면이나 하러 가볼래?"

"최면?"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성현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정말 열심히 최면이라는것의 효과, 능력, 신비, 그리고 쓸데없는 전생체험에 관한 것까지 열변을 토해냇다(거의 듣지 않았지만).

그렇게 얼렁뚱땅 최면을 받으러 가자는 그 말에 나도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건 사실이었다. 하루빨리 기억을 찾고 싶었으니까.

"……이거 안되겟네요"

"뭐가요?"

"으음… 아무래도 최면이 듣지 않는 체질인것 같습니다"

"뭐야, 돌팔이잖아?"

작게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그 최면술사도 들은건지 눈썹을 치켜올렸다. 녀석은 내 입을 후다닥 막고선 서둘러 그 건물을 나왔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돌팔이라고 그러면 되겟냐?"

"뭐어때? 내가 틀린말했나뭐…"

"가끔은 옳은말도 틀리게 해야할때가 있는거야"

"그게 무슨소리야?"

성현은 나를 보며 다시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엇다. 그곳을 나혼 후에도 이곳저곳 수소문해서 두세군데를 더 들려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최면이 걸리지 않는 체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왕 나온김에 놀다가자는 녀석의 의견을 어쩔수없이 들어서 시내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별로 특별할것도 없었다. 맛있어보이는게 있으면 사먹고, 재미있는곳이 눈에 띄면 들어가서 둘러보고, 그런게 다였다. 특별할것도 없고 딱히 일상과 다를것도 없는 소소한 것들.

-어?

그러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

익숙했다. 누군지는 몰라, 하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멀찍이 보이는 그는 날 본건지 못본건지 어느새 다른곳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

놓칠수 없어. 발걸음이 바빠졌다. 추운 봄날의 밤,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 달린다. 걸음의 뛰듯이 바빠지고 그것은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 내가 낼수 있는 한 최고로 빠르게 뛰어도 그것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갓다. 아니, 골목골목을 지나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뭐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난, 골목길에 혼자 남아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밤의 골목길, 쓰레기들이 굴러다니고 다 타버린 담배꽁초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여긴 어디지?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아무도?

-오싹

몸이 떨려왔다. 혼자가 되었다. 싫어, 혼자는 싫다.

"야아아아아!!!"

괜스레 무서워서 고함을 질렀다. 누군가 들었을까. 몰라, 하지만 혼자는 싫어, 누군가 듣고 와주었으면 좋겠다.

-야옹

"저, 저리가"

밤의 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처음 겪는 상황, 기억을 잃고난 뒤 모두 하나같이 처음 겪는 일들 투성이였다. 고양이는 날 위협하듯이 나에게 다가온다. 아니, 내가 목적이 아닐수도 있겠지, 하지만 일단 방향은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눈이 무서워.

무서워

혼자는 싫어.

같이있어줘

-턱

"아아악!!"

"헉! 왜그래 너…우냐?"

울고있던걸까? 내 어깨를 힘껏 내리친건 김성현, 현재의 내 보호자였다.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녀석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살며시 끌어안아 주……기는커녕

화를냇다.

"너 어디갔었냐? 지리도 모르는애가 갑자기 혼자서 싸돌아다니면 어떻게해! 너 시내한복판에서 미아신고할래?"

"흐끅…흑…으윽…우에에에엥…"

그냥 우는게 아니라 아예 목놓아 울자 녀석도 날 질책하려는 마음을 접은 모양이었다. 이럴때면 원래는 달래주지 않던가?

"야, 그, 그만울어라…"

"으어어어어어엉!!!"

녀석은 내가 목이 쉴때까지 울어도 등 한번 토닥거려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며칠이 지났다

기억이 없어진다는건 그렇게까지 드문일은 아니다. 짧으면 며칠 안에 기억이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재수없으면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 또한 내포한다. 내가 아는 사실은 아니었고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나의 보호자가 한 말이었다. 왠지, 날 어떻게든 빨리 떼어내고 싶어하는 태도로 보아 그런 사례로 날 위로한다기보다는 스스로 자위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나 또한 머릿속에 구멍이 뻥 뚫린듯한 기분을 안고 언제까지나 이런 기약없는 생활을 하고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호자의 저런 태도를 보고있노라면 언제까지나 눌러앉아 살고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요리 할줄 몰라?"

-끄덕

"쓸모없기는… 밥 축내지 말고 요리라도 배워서 앞으로 내가 돌아오면 밥이라도 차려놓는게 어때?"

"…싫다면?"

-척

그녀석은 말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러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것도 서러운데 생판 모르는 남에게 괄시받으며 살아갈 미래가 눈앞에 그려지니 억장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책임진다고 했잖아?"

내가 할수있는 유일한 변명이었다. 얼마 전, 녀석은 그 색마 의사에게서 날 데려오면서 책임지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녀석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음흉한 미소를띄우고서 천천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진짜로 책임져줄까? 육체적으로 말이야"

"……원한다면"

내 순순한 발언에 녀석은 뜨악한 표정이 되어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한번 굴린 몸, 더 굴러간다고 해서 별로 아까울것도 없지 않은가?

"너한테는 무슨 농담을 못하겟다"

"그런 저질농담을 하니까 그렇지" 

내가 투덜거리자 녀석이 이채롭다는듯 말했다.

"저질이라는건 아네?"

"시끄러워…"

대화는 단절되었다. 공통의 화제가 없으니 대화가 이어지기도 힘든게 당연하다. 게다가 난 별로 대화하는걸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고 녀석 또한 그랬으니 우리는 참으로 심심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진짜 요리학원 다녀보는건 어때?"

"싫어"

일축에 거절하는 날 보며 녀석은 입맛을 다셧다. 하긴, 힘들게 일하고 집에 왔는데 인스턴트 식품이나 먹어야 한다면 그것도 굉장한 고역이겠지. 뭐 일을 한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성이지만 말이다.

"기억은 어때? 돌아오는 기미가 보여?"

"저언~혀"

"너 아주 팔자 좋다?"

-씨익

비꼬는 그 말투에 나는 느긋한 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물론, 이 생활도 나쁘진 않았다. 다만, 구멍이 뚫린것처럼 가끔 쿡쿡 쑤시는곳이 있긴 하지만. 육체적인 만족과 정신적인 만족, 어떤것이 더 중요한지는 모른다. 다만 중요한건 지금 육체적으로는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것이었다.

"최면이나 하러 가볼래?"

"최면?"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성현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정말 열심히 최면이라는것의 효과, 능력, 신비, 그리고 쓸데없는 전생체험에 관한 것까지 열변을 토해냇다(거의 듣지 않았지만).

그렇게 얼렁뚱땅 최면을 받으러 가자는 그 말에 나도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건 사실이었다. 하루빨리 기억을 찾고 싶었으니까.

"……이거 안되겟네요"

"뭐가요?"

"으음… 아무래도 최면이 듣지 않는 체질인것 같습니다"

"뭐야, 돌팔이잖아?"

작게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그 최면술사도 들은건지 눈썹을 치켜올렸다. 녀석은 내 입을 후다닥 막고선 서둘러 그 건물을 나왔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돌팔이라고 그러면 되겟냐?"

"뭐어때? 내가 틀린말했나뭐…"

"가끔은 옳은말도 틀리게 해야할때가 있는거야"

"그게 무슨소리야?"

성현은 나를 보며 다시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엇다. 그곳을 나혼 후에도 이곳저곳 수소문해서 두세군데를 더 들려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최면이 걸리지 않는 체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왕 나온김에 놀다가자는 녀석의 의견을 어쩔수없이 들어서 시내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별로 특별할것도 없었다. 맛있어보이는게 있으면 사먹고, 재미있는곳이 눈에 띄면 들어가서 둘러보고, 그런게 다였다. 특별할것도 없고 딱히 일상과 다를것도 없는 소소한 것들.

-어?

그러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

익숙했다. 누군지는 몰라, 하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멀찍이 보이는 그는 날 본건지 못본건지 어느새 다른곳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

놓칠수 없어. 발걸음이 바빠졌다. 추운 봄날의 밤,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 달린다. 걸음의 뛰듯이 바빠지고 그것은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 내가 낼수 있는 한 최고로 빠르게 뛰어도 그것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갓다. 아니, 골목골목을 지나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뭐였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난, 골목길에 혼자 남아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밤의 골목길, 쓰레기들이 굴러다니고 다 타버린 담배꽁초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여긴 어디지?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아무도?

-오싹

몸이 떨려왔다. 혼자가 되었다. 싫어, 혼자는 싫다.

"야아아아아!!!"

괜스레 무서워서 고함을 질렀다. 누군가 들었을까. 몰라, 하지만 혼자는 싫어, 누군가 듣고 와주었으면 좋겠다.

-야옹

"저, 저리가"

밤의 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처음 겪는 상황, 기억을 잃고난 뒤 모두 하나같이 처음 겪는 일들 투성이였다. 고양이는 날 위협하듯이 나에게 다가온다. 아니, 내가 목적이 아닐수도 있겠지, 하지만 일단 방향은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눈이 무서워.

무서워

혼자는 싫어.

같이있어줘

-턱

"아아악!!"

"헉! 왜그래 너…우냐?"

울고있던걸까? 내 어깨를 힘껏 내리친건 김성현, 현재의 내 보호자였다.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녀석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살며시 끌어안아 주……기는커녕

화를냇다.

"너 어디갔었냐? 지리도 모르는애가 갑자기 혼자서 싸돌아다니면 어떻게해! 너 시내한복판에서 미아신고할래?"

"흐끅…흑…으윽…우에에에엥…"

그냥 우는게 아니라 아예 목놓아 울자 녀석도 날 질책하려는 마음을 접은 모양이었다. 이럴때면 원래는 달래주지 않던가?

"야, 그, 그만울어라…"

"으어어어어어엉!!!"

녀석은 내가 목이 쉴때까지 울어도 등 한번 토닥거려주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무서웠어"

"에?"

집으로 가는 길, 내 뜬금없는 소리에 녀석이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녀석도 내 단독행동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건 누구였을까? 분명히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이었다. 분위기도 그렇고… 아니면 그냥 단순히 내가 기억을 너무 찾고싶어서 헛것을 본 것일까?

-찰칵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난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씻지도 않고 내가 드러누워버리자 녀석은 샤워를 하려는건지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쏴아아아아

물 트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고요…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또다시 덜컥 겁이 낫다. 아니야, 저기 안에 있잖아.

문 건너잖아?

아니야 혼자가 아니야

문 건너편에 있잖아? 너는 그곳과는 차단되어 있어. 넌 혼자야

아니야 혼자가 아니야 문따위 열면 그만이야!

-덜컥!

"우, 우왁! 너 뭐하는거야!"

"아, 아?"

나도모르게 문을 열어젖힌 모양이었다. 눈앞에는 물론 벌거벗고 샤워를 하고있는 녀석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커먼 그것 또한 보였다. 물론, 아직 개념이 덜 잡힌 나는 실례라는것도 모르고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빨리 문 안닫냐?"

-쾅!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을 닫은건 녀석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혼자라… 너무 싫어 

"너 오늘 대체 왜이러는데?"

"헤헤…"

꼼지락거리는 날 밀쳐내려고 녀석이 온갖짓을 다 했지만 난 떨어지지 않았다. 은은한 비누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안온했다. 더없이 편안한 기분, 난 한사코 소파로 가서 자겟다는 녀석을 끌어서 침대에 눕혀놓고 그 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이러고 자자"

"끄응…"

달라붙듯이 파고들어서 난 눈을 감았다. 편안해서 그런지 잠은 너무나도 빠르게 찾아왔다.

"자냐?"

"……"

죽은듯이 가만히 있는걸 보니 잠든 모양이었다. 새근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내 볼에 와닿는다. 얕으면서도, 가냘프고 그러면서도 녀석의 숨결은 무향(無香), 하지만 뭐랄까. 달콤한 듯도 했다

"애도 아니고 말이지…"

이쯤이면 되었겠지. 솔직히 이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러고 있다간 실수를 해버릴것만 같았다. 몸을 살짝 침대에서 빼내려는 순간,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갓다.

"같이 있어"

애원하듯하는 말투엔 간절함이라기보단 끌어안고 자던 인형을 뺏기기 싫은 어린아이같았다. 졸지에 테디베어가 되버린 나는 멍청해질수밖에 없었다.

"애구나…"

창밖은 어둑어둑했지만 달이 보였다. 녀석의 얼굴에 쏟아지는 달빛, 파란 달빛이 하얀 녀석의 볼에 흩어져 부서진다. 나도모르게 왠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설레이는것 같았다.

"니가 이러면 내가 잠을 못자잖아"

확실히, 잠이 올리가 없었다.

"너 진짜 어린애냐?"

난 어린애가 아니다.

"혼자 싫어…무섭단 말야!"

하지만 싫은건 어쩔수 없었다. 혼자있는건 싫다. 무섭다. 오싹하다. 뭔가 튀어나올것 같은, 어린아이의 공포라기보단 끝없는 고독에서 느끼는 지독한 감정이 싫었다.

"너 갑자기 왜이래? 안이랬잖아!"

녀석은 곤란하다는듯 인상을 썻다. 진짜로, 진짜로 무서웠다. 가지마, 기억을 잃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중에 가장 간절했다. 하지만 녀석은 매몰찻다.

"혼자있는게 왜 무서운건데?"

"그냥 싫어! 내가 싫다는데 왜그래? 그냥 오늘만 있어줘"

"내일은 어떻게 할건데?"

"그, 그건…"

"회사를 그만둘수는 없잖아? 아니면 놀이터에 가서 어랜애들 노는거라도 구경하고 있던가"

-쾅!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숨이 막혀온다. 생각했던것처럼 그렇게 두렵고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외로웠다. 아침이라며 던져준 푸석푸석한 빵을 씹으며 난 점점 불안감을 느꼇다.

"집에 뭐라도 있으면 좋잖아…… 심심하니까 이러는거야"

확실히 집에 뭔가 나같이 한가한 사람이 할만한건 없었다.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은걸 티라도 내는지 베란다엔 정리되지 않은 짐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청소라던지, 뭐라도 하면 잊을수 있지 않을까?

차가운 타일을 맨발로 밟자 아릿한 추위가 전해져왔다. 상자들은 꽤 많았는데 대개 쓸모없는 것들이라 그대로 놔둔듯했다. 몇몇 책들도 있었고 아직 집에 책장이 없어서 그대로 방치해놓은듯했다.

"정리하고싶어도 할게 없잖아…"

알고보니 그 상자들은 거의가 버리기로 작정한 물건들인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개중에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서 난 이것저것 꺼내놓기 시작했다. 물론, 결국 그때문에 정리라기보단 난장판이 되어버렸지만.

"응?"

뭔가 거대한 책이 발견되었다. 가죽으로 양장된 책의 머리에는 스티커로 '김성현'이라고 붙여져 있었다. 열어보자 첫 페이지에는 어떤 갓난아이가 발가벗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앨범인가?"

그렇다는건 이 사진의 주인공은 그 녀석이라는 뜻이었다. 발가벗고있는 모습을 보니 어릴대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실감이 된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아이는 자라기 시작했다. 소년이 되어서 유치원에 들어가고,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소풍을 가고 하는 평범한. 지극히도 평범한 일상의 기록이 담겨져 있었다.

너 의외로 평범한 녀석이구나

어릴때의 사진은 굉장히 수가 많았지만 해가 지나갈수록 사진들의 수는 점점 줄어갓다. 사진을 찍을 시간이 없어서였을까?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사진까지 보고 나서야 난 이따금 그 사진의 곁에 등장하던 녀석의 얼굴을 제대로 볼수 있었다.

"동생?"

이런말 하기는 그렇지만 김성현은 키도 크고 잘생겼다.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항상 기분나빠 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미남형이었다. 하지만 동생쪽은 뭐랄까……

"심플하네"

키도 중간, 머리 길이도 중간. 안경을 쓴걸 빼면 딱히 이렇다할 특징도 없는 녀석이었다. 김성현 쪽이 뭔가에 불만이 가득해서 인상을 쓰고있는 거라면 동생쪽은 뭔가 이유없는 고차원적인 불만, 그리고 권태로움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지겨워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지겨워하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알고싶지는 않았다. 앨범은 총 두권이었다. 하나는 방금 봤던 김성현의 것, 다른 하나는 누구의 것일까?

'김수현'

공교롭게도 나와 이름이 같았다. 그래도 지금 같은 지붕을 쓰고 사는 사람의 가족이다. 약간은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이 녀석의 사진은 갓난아기때의 것은 없었다. 대신 유치원때부터의 사진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평범했다. 항상 지루한 표정을 짓고있는건 변함이 없었지만 그것도 꽤나 재미있었다.

중학교때의 사진엔 친구들과 찍은것도 꽤 많았다. 뭐랄까, 왠지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사진들 중 옆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녀석도 있었다.

"헤에…"

그녀석도 꽤나 잘생겼다. 약간 쿨해보이는 표정과 딴청을 부리고 있는 모습이 있어보이고 싶어하는것 같았다. 뭐랄까, 그런데 아주 묘한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수가 없었다. 눈앞이 물이라도 먹은건지 뿌옇게 변했다.

"뭐, 뭐야…"

갑자기 머리도 슬슬 아파져왔다. 그게 전부 다 눈앞에 있는 앨범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엇고 앨범을 덮자 두통은 씻은듯이 나앗다. 뭘까? 어쨋든 머리가 아프니까 기분이 나빳다.

그나저나 그 녀석에게 가족이 있다니, 뭐 지금은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져서 사는걸까? 동생이란 녀석은 성격이 그 녀석과 비슷할까?

궁금한것 투성이었다.

"동생?"

"응"

녀석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건 어떻게?"

"사진 있던데?"

구석에 정리해놓은 앨범의 가리키며 말하자 녀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앨범을 가져오더니 한장한장 넘기며 보기 시작했다.

"가족이랑 따로살아?" 

"아니"

"그러면?"

녀석은 잠시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는듯 쓴웃음을 지었다.

"몰라, 어디있는지"

"왜 몰라?"

약간은 어이가 없었다. 한다는 말이 어딧는지 모른다는 소리라니… 가족에 대해 별로 좋은 생각을 하고있지 않은걸까??

물론, 나야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그것에 대해선 뭐라 말할수는 없지만 가족이 소중한것이라는정도는 어렴풋이 알고있다.

"너만 그런게 아니야"

"뭐가?"

녀석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갑작스레 진지해지는 분위기에 약간 숨이 막히는것도 같았다.

"나도,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는데 기억이 안 나, 그리고 그동안에 무슨일이 있었는지도. 겨우 한달정도일 뿐인데 무슨일이 있었던건지 전혀 모르겠어…"

별로 심각한 어투는 아니었지만 분위기로 알수 있었다. 굉장히 심각한 상태라는걸… 그리고 우연찮게도 기억을 잃은 나와 부분이기는 하지만 저녀석도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뭔가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가족… 찾고싶어?"

"당연하지, 너도 기억 돌아오면 알게될거야. 가족이 어떤건지"

"가족이 없으면 어떻게해?"

"뭐?"

녀석은 벙해져서 말이 없었다. 사실 불안했다. 난 가족이 없으면 어쩌지? 그래서 가족을 잃는다는 기분도 모를수도 있다. 그래서 불안했다.

"하하, 설마"

"난…… 신분증도 없고 핸드폰같은것도 없었잖아? 그럼 가족도 없는거 아냐? 그리고 날 찾는사람도 없잖아?"

"너무 좌절적인거 아냐? 어디선가 찾고있을지도 모르잖아?"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불안했다. 가족이라,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기억이 돌아오면 난 어떻게 해야하지? 난 무슨 인간이며,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되면 난 어떻게 되는거지? 안좋은 기억이면 어쩌지?

덜컥 겁이낫다.

"나도… 그렇게 행복한 가족은 아니야"

"왜?"

녀석의 얼굴이 또다시 음침하게 변했다. 표정이 저렇게 굳어버리면 나도 기분이 이상해진다.

"동생은 입양했어"

"……그래?"

그러고보니 그러면 동생의 아기때 사진이 없었던것도 설명이 된다. 게다가 사진에서 보면 형이랑 동생이 정말 눈코입 하나도 안닮았다는것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갓다.

"뭐…… 완전히 남남은 아냐, 아빠의 친구의 아들이니까…… 갑자기 동생이 된게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난뭐 그땐 뭐가뭔지 잘 몰랏으니까"

"그 동생 부모는 어떻게 됐는데?"

"음…… 자살했어"

갑자기 소름이 쭉 돋았다. 이유여하, 과거,현재,미래를막론하고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는 왠지모르게 숙연해지게 한다.

"뭐 자세한 이유야 나도 모르지만 그 아들을 우리가 입양했고 키웟지, 녀석은 원래 부모는 완전히 싹다 잊은것 같아서 굳이 말해주지도 않았고 말이지…"

"불쌍하네"

"뭐가 불쌍해? 별로 알아서 좋을것 없는 진실정도는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

정말로 그럴까? 그건 잔인한 짓이다. 눈가리개를 하고 살아가는 것과 다를게 없었다.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나중에 밝혀질수록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쨋든 착한 녀석인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빨리 기억이 돌아와야 하는데…"

"설마 이사간건데 너혼자 주소를 모르는거 아냐?"

"끄응… 의사가 셋다 실종이라고 그러던데…"

갑자기 녀석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키는 나보다 훨씬 큰 녀석이 우울해져 있으니 괜시리 나도 울적해졌다.

"야, 김성현 너 몇살이냐?"

"나, 나? 19살…인데?"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적어도 20대는 넘을줄 알았던 녀석이 알고보니 10대의 끝자락에 머물고 있는 녀석이라…

"누나라고 불러!"

"뭐?"

"난 딱봐도 20대 이상으로 보이잖아? 아무리 나이가 기억 안난다고 해도 난 20대 이하로는 봐줄수가 없는 외모라구, 그러니까 이제 나한테 누나라고 불러. 쪼그만게 지금까지 반말을 하고있었네?"

내가 꿀밤을 한방 먹여주자 녀석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내가 조금 동안이라 약간 꾸미면 중학생까지는 봐줄만한 모습이긴 하지만 적어도 내겐 20대로 보였다. 

"그런게 어딧어! 넌 딱봐도 중딩 이하야! 민증도 없는게 어디서 성인행세를 하려고?!"

녀석이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꺼내며 내게 디밀었다. 마치 너도 있으면 꺼내봐라라는식의 태도였다.

그런데 뭐랄까.

갑자기 복받쳐 올랐다. 민증이 있으면 지금 내가 이렇게 여기 있을 필요도 없잖아?

"이, 이……"

"왜, 없지? 있으면 꺼내봐, 꺼내서 보여주면 내가 누나라고 불러줄테니까~"

약올리듯 말하는 녀석이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복받쳐 오르기 시작하자 이런 되지도 않는 싸움을 건 나자신이 창피해졌다. 그리고 있으면 꺼내보라며 놀려대는 녀석의 모습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이!!…이…이이잉…흑…"

"꺼내보……엥?"

뭐가 서러웠던걸까. 갑자기 터져나온 눈물은 멈출수가 없었다. 내가 울면서도 우는 이유를 잘 몰랐다.

"흑…흐…흐으…개자식아!…… 우에에엥…"

"야, 야… 장난이잖아… 왜그래, 응? 울지마! 뭐가 서러운데"

"흑… 끅… 너, 너만 가족있는거, 것두 서럽구… 나 민증… 민증 없는데… 흐으아아아앙!!"

"야! 그건 니가먼저…… 아, 알았어! 미안해!"

눈물이라는건 굉장히 웃긴 것이다. 일단 한방울이라도 나오기만 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더 뽑아낼수 있었다. 녀석은 적잖게 당황한듯 어쩔줄몰라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앙!!"

사실 녀석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게 왠지 즐거워서 별로 슬프지도 않은데 이젠 억지로 우는척까지 했다.

"미안하다니까? 그만울어!"

"나쁜놈아아아… 흐끅!"

그렇게 얼마나 울어댓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운건지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녀석도 지친건지 혼이 다 빠져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다 울엇냐?"

"누나!"

"뭐?"

내 말에 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엇다. 실컷 울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그런 눈빛이었다.

"흑……흐윽……"

"아, 아 알았어! 알았다니까?"

내가 또다시 울먹이자 녀석은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바로 표정을 바꾸고 산뜻하게 웃어보였다. 녀석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불러달라고?"

-끄덕

녀석은 뭐라고 한차례 궁시렁거리며 살짝 입을 열었다. 문득 저 모습이 굉장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그래, 내가 이제 누나다 동생아!"

-퍽!

남자가 눈물에 약하다는 가설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쿨…"

잠든 녀석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방금 전가지 서럽게 울어대다가 갑자기 얼굴색이 바뀌는등, 황당한 짓거리를 했지만 이렇게 잠든 모습은 아주 평화롭고 안온해 보였다.

깨어있을때의 녀석은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멍하니 있을때가 많았고 혼자있는게 무서운건지 은연중에 내 곁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자면서도 무의식중에 내 옷을 붙잡고 있는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도 되는걸까?

문득 처음 만났을때가 떠올랏다. 이젠 없어졌겠지만 우리집에 들어오며 왜 여기에 네가 있냐는 표정을 하곤 멍청하게 바라보던 모습. 그리고 다음날 갑자기 기절하고 생뚱맞게도 기억을 잃었다.

동병상련의 기분이었는지, 아니면 옛날 누군가 말했던 차마 어찌할수 없는 마음에서 그랫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입이 하나 늘었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혼자였으면 심심했을지도 모른다. 여기로 이사온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분명 혼자였으면 심심했을지도 모른다. 많지 않은 월급이라 해도 나 이외에 한명정도 더 챙겨야 한다고 해서 쪼들리는 수준은 아니다.

좋게 생각하자.

"음냐……"

잃어버린 한달의 기억에 무엇이 있을까. 가족들은 왜 갑자기 모두 어딘가로 사라진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기억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머릿속 깊은곳으로 숨어버리는 것처럼.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지내다보면 어느순간 갑자기 떠오르리라는것 밖에는 지금 당장 할수있는것이 없었다.

[쓰레기정도는 치워놔 왠만하면………누나]

멍하니 TV를 보고있는데 갑작스레 녀석이 했던 당부가 떠올랏다. 확실히 먹는게 있으면 쌓이는게 있는 법이라 쓰레기통은 넘쳐서 마치 구토라도 해놓은것처럼 내용물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음식물이 아니라 더럽지는 않았지만 청소의 필요성은 느껴졌다.

"착한일좀 해볼까?"

사실 너무너무 할일이 없어서 든 생각이기는 했지만 이런 일이라도 해서 칭찬이라도 듣는게 기분좋은일 아닌가? 난 쓰레기봉투를 꺼내 쓰레기통을 털어넣고 집 곳곳에 아무렇게나 버려진(대부분은 내가 만들어낸)쓰레기들을 주워담았다.

"엄청많네…"

뭐 대개 비닐류의 봉지라서 부피만 클뿐 무겁지는 않았다. 게다가 밥은 거의 인스턴트만 먹기에 음식물 쓰레기도 없었다.

신기한건 기억을 잃어도 이런 기본적인 지식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추억'은 없어져도 '지식'은 없어지지 않는다.

"후아…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말자"

괜히 이런생각 해봐야 머리만 아프고 기억나는건 없기에 난 애써 생각을 멈췄다. 커다란 쓰레기 봉투를 질질 끌고 문을 나서자 의외로 따뜻한 공기에 약간 놀랐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람 때문에 한번 더 놀랐다.

"아, 안녕하세요?"

눈앞에 있는건 나와 똑같이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낑낑거리고있는 한 남자였다. 남자라기보단 소년에 가까운, 머리스타일로 보아 학생인듯했다. 약간 멋쩍어보이는 표정을 보아하니 왠지 나도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응… 그래, 여기 살아?"

"네, 얼마전에 이사오셧죠?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소년은 헤헤… 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앞집에 사는 학생이라, 그러고보니 오늘은 토요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는듯했다. 약간 힘겨울 정도로 많이 들고있는 쓰레기의 양을 보아하니 누군가 도와줘도 될듯한데…

그런걸로 보아하면 혼자사는걸로 짐작이 되었다. 가족이 있다면 저런걸 저렇게 힘들게 운반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전 호수에요, 김호수"

호수라, 좋은 이름이었다. 밝은 표정에 맑은 눈빛을 보니 왠지 나도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것 같았다. 호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난 김수현이야"

"음… 누나라고 불러도 되요?"

"아……뭐 그러던지"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도착했고 우린 서로 쓰레기 봉투를 안에 밀어넣었다.

"형이랑은…… 남매에요? 이름이 비슷하네"

"어? 아……"

뭐라고 대답할까, 사실 동거라고 해도 나쁠건 없지만 별로 그런 관계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았다.이성끼리의 동거라는 자체가 약간 사회적으로 문제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지는게 현실이니까. 게다가 이름도 비슷하지 않은가? 김성현 김수현……

"응, 내가 누나야"

이 대목에선 왠지모르게 승리한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그런데… 혼자살아?"

"네, 부모님이 외국에 계시거든요, 뭐 친척집에 가도 되지만 전 혼자사는게 더 편해서요 아, 제가 들어드릴까요?"

"괜찮아, 거기서 조금 더들면 무너지겟는데?"

저렇게 힘겹게 들고있으면서 내것까지 들어주겟다는 소리를 하다니. 무모한걸까 배려심이 깊은걸까?

왠지 눈앞의 소년이 갑자기 마음에 들었다. 뭐랄까, 순수하다고 해야할까? 아직 많은 사람을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외출할때마다 마주치는 남자들의 시선은 크게 그런건 아니었지만 불쾌했다.

마치,물건을 감정하듯이 훑어보는 눈빛.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하기 바쁘면서 대놓고 훑어보거나 혹은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녀석은 뭔가 달랏다. 날 처음 보면서도. 지금 이순간에도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처음 봣을때에도 전혀 사심없이 순수하게 인사를 건넸다.

뭐야, 난 이런거에 감동하는 사람인가?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1층에 도착했고 호수는 낑낑거리며 쓰레기 봉투를 잡아끌었다. 서늘하기는 했지만 점점 풀리는 날씨는 이제 옷을 얇게 입고다녀도 될것 같았다.

"식사는 하셧어요?"

"응? 아, 아직 안했어"

"왜요? 벌써 아홉시가 넘었는데…"

계속 인스턴트 식품만 먹다보니 아침은 거르고 점심에 배고파지면 먹는 정도라 아침은 집에만 있으면서도 계속 걸럿다. 하지만 호수는 그게 무슨 큰일이라도 된다는양 펄쩍 뛰었다.

"아침을 굶으면 학교에서 졸려서 수업을 못듣는… 아, 학생이 아니시지 참…"

"아하하…"

"그래도 아침은 굶으면 안돼요, 아침을 굶으면 오히려 살이 찐다고 하던데 TV에서… 차라리 조금이라도 아침을 먹고 규칙적인 식생활을 유지하는게 몸매관리에 더 좋대요"

글쎄다,나는 도저히 먹어도 안찌는 체질인것 같아서 말이야 

"으음… 요리를 못해서 별로…"

"요리 못하세요?"

"으응…"

내 말에 호수는 눈을 동그랗게 떳다. 혼자살면서 요리를 못하면 어떻게 하냐, 뭐 대충 그런 의미가 담긴 표정이었다.

"그러면 안되죠 그럼 점심은 배달시켜먹거나 라면먹는거에요?"

"응… 뭐 그렇다고나할…까?"

쓰레기를 버리고 난 뒤 거의 십분여동안 호수는 내게 아침밥의 중요성과 인스턴트 식품의 영양적 해로움, 그리고 직접 하는 요리의 만드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에 대한 열띤 강의를 했다.

"지금 아침 안드셧다고 했죠? 저도 안먹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결론은 그거였다.

"버섯전골 완성!"

마치 예술가가 작품 하나 만들어낸것처럼 호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식탁에 전골을 올려놓았다. 호수는 만들면서 이런건 배워야 한다며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전부 보여줬다. 물론, 지금 난 호수의 집에 들어와있는 상태였다.

혼자사는 집이라 아무것도 없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법 갖추어진 집이었다. 아니, 혼자살기엔 과하다. TV며 침대며 등등 전부 좋은것들이었고 한 댓명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을것 같았다.

"요리는 배운거야?"

"혼자살다보니 하게 되더라구요"

전골은 맛있었다. 뭐 식당의 맛이야 잘 모르지만 맨날 먹던 통조림같은 것들보단 비교할수가 없었다. 확실히 이래야 먹는 느낌이 난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수 있었다.

"후우… 고마워, 커서 주부해도 되겠는데?"

"하하… 그래서 제 꿈이 능력좋은 마누라 만나서 셔터맨 하는겁니다"

확실히 이정도면 공부 때려치우고 식당해도 나쁘지 않을만한 소질이었다. 뭐 물론, 입밖에 내지는 않았고 나야 뭐 맛있게 먹었으니까 좋다.

"음, 딱히 바쁜일 없으시면 그럼 요리 배워보실래요? 혼자살면서 라면끓여먹는것만큼 궁상맞은게 없거든요"

"음……그래볼까?"

딱히 할일도 없어서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가던 참이었기에 그건 환영할만한 제안이었다.

[요리에는 유연성이 필요해요, 어디 인터넷같은데에 나와있는것처럼 꼭 그 양만 넣으라는 법은 없어요, 개인적인 선호도에 따라 조미료를 조금 더 넣는다거나 줄인다거나 하는거죠]

가장 먼저 배운건 조미료의 양을 조절하는 방법과 칼질이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인만큼 꼭 기억해둬야 한다면서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니 꼭 어디의 요리학원 강사같이 보였다.

의외로 이쪽에 소질이 있는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 무렵엔 시간이 꽤나 많이 흘러 있었다.

"으음… 하루아침에 잘하게 될수는 없는거니까요, 평일엔 제가 네시쯤에 오는데, 그때 배워보실래요?"

"음…… 한두시간 정도라면, 괜찮아"

이론과 기초를 끝마치고 처음 만든 된장찌개를 맛본 호수의 대답은 썩 좋은건 아니었다. 확실히 내가먹어봐도 약간 뭔가 밋밋했다.

"이건 가져가서 드세요"

호수가 준건 아침의 버섯전골이었다. 확실히 이걸로 오늘내일까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것같았다.

f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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